제1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에도 메카를 거점으로 한 후세인 이븐 알리(Husayn ibn ‘Ali, 1852~1931, 재위 : 1916~1924)의 하심 가문, 하일(Hail)을 중심으로 한 라시드 가문, 리야드를 본거지로 한 사우드 가문의 대립은 아라비아 내에서 팽팽하게 지속되었다. 사우드 가문은 초창기의 소박한 이슬람으로 돌아가자는 복고주의의 기치 아래 역사의 흐름 속에서 여러 가지 관행으로 누적된 당시의 이슬람, 구체적으로 볼 때 사회상을 개혁하기 위해 그 기반을 다지고 있었던 상황이었다. 한편, 하심 가문의 후세인 이븐 알리는 이슬람의 성지 메카의 지배자이며 예언자 무함마드의 직계 자손이라는 혈통을 내세워 아라비아인 거주 지역들을 그의 영도 아래 통합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었다. 후세인은 터키 이스탄불에서 수년 동안 거주했을 당시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의 궁전을 왕래하며 그와 교제한 결과, 1908년 메카에서 세습적 아미르 제위를 받을 수 있었다.

그러나 곧 청년 투르크 당이 정권을 장악하고 터키의 근대화 정책을 추진하려하자 메카와 이스탄불의 관계는 멀어지게 되었고, 아라비아의 민족주의자들은 후세인 알리에게 관심을 갖게 되었다. 더불어 제1차 세계대전 중에 투르크족과 아라비아 민족의 갈등을 조장하려는 영국이 그를 지지하는 것과 함께 선동을 거듭하자 그는 점차 아라비아인들의 대변자로 자처하게 되었다. 전쟁 중인 1916년에 그는 이스탄불의 오스만투르크 제국 술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켜 히자즈 지역의 독립을 선포한 이후, 곧이어 메디나에 주둔하고 있던 투르크 군을 공격하게 된다. 동시에 아라비아인들의 국왕임을 선포하였으나 영국과 프랑스는 승인하지 않았다. 후세인 이븐 알리는 아라비아 반도뿐만 아니라 이집트 동쪽의 모든 아라비아인들의 거주 지역을 그의 영토로 계획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영국의 중동 전문가로 알려진 사이크스(Sykes, Mark)와 프랑스의 베이루트 주재 영사 조르제 피코(Picot George) 사이에서 1916년 비밀리에 맺어진 사이크스-피코 협정(Sykes-Picot Agreement)에 따라 터키, 시리아, 이라크 등을 영국, 프랑스, 러시아 삼국이 분할하려는 의도가 공산 혁명을 통하여 1918년에 정권을 장악한 소련 정부에 의해 폭로되었다. 그 이후 1919년의 파리 강화 회의에서 후세인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통일 아라비아 왕국의 계획은 사라지고 말았다. 그러나 그의 두 아들인 압둘라(Abdullāh)와 파이살(Fayṣal)이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의 왕위를 약속 받아 다소 위로가 되었다. 한편, 더욱 큰 파멸이 후세인 알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1924년에 그가 요르단을 방문하는 도중 터키에서 칼리프 제위의 폐지가 공표되자 그는 스스로 칼리프로 자처하게 된다.
후세인 알리의 이러한 행위는 많은 무슬림들이 보았을 때 이를 매우 지나치게 보였기 때문에 결국 사우드 가문의 압둘 아지즈가 무슬림 형제단을 이끌고 히자즈를 공격하자 놀란 후세인 알리는 장님인 알리에게 칼리프 제위를 양위하게 된다. 그러나 12월에 메카마저 점령당함으로써 히자즈의 하심 가문의 권세는 종결되고 말았다. 그보다 3년 전에 사우드 가문은 라시드 가문을 공격하여 병합했기 때문에 일부 해안 지역을 제외하고는 아라비아 반도 내의 유일한 세력이 되었다. 아브드 알 아지즈(Abd Al Azij)는 1927년 히자즈의 왕이 되었고, 그 다음 해에는 나즈드 지역과 히자즈 왕, 1932년에 최종적으로 이 두 영역을 통합하여 공식적으로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정식적인 국호로 정하게 되면서 국왕으로 군림하게 된다. 1952년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에 처음으로 현대식 내각이 구성되었다.
그 이후 몇 달 가지 않아 후세인 알리가 사망하고, 그의 아들 사우드(Saud, 1954~1964)가 왕위를 계승하게 된다. 사우드는 재물의 낭비가 심한데다가 건강이 좋지 않아 권력은 그의 동생 파이살에게 장악되어 있다가, 결국 1964년에 강제적으로 폐위 당함으로써 파이살(Fayṣal, 1964~1975)이 그 뒤를 승계했다. 파이살의 통치 시대에 사우디아라비아는 석유로 인한 수익으로 병원, 학교, 아파트 등 근대 시설이 대량으로 건설되었다. 1975년 파이살이 조카에 의해 암살되자 왕위는 동생인 칼리드(Khalid, 1975~1982)에게 넘어가게 된다. 칼리드 역시 1982년에 병사하자 그의 동생인 파드(Fahd, 1982~ 현재)가 왕위를 승계했다. 1996년 1월 파드 국왕의 건강이 악화되자 이복동생인 압둘라에게 통치권을 이양했다. 그런데 여기에서 매우 특이한 점은 왕위가 직계 자식에게 넘어가지 않고 동생에게 계승되고 있다는 사실이다.
사우디아라비아의 국가 재정은 세계 최대의 석유 매장 국가이며 수출 국가인 관계로 그 수입에 의존하고 있으며, 아라비아와 미국의 석유 회사인 아람코(Aramco : Arabian-American Oil Company)는 여전히 사우디아라비아 내의 석유 개발권과 경영권을 가지고 있지만 아람코의 유전 사용료는 점차 증가 추세에 있는 현실이다. 더불어 히자즈 지방에서 금광이 발견되어 금을 생산하고 있으나 그 양은 많지 않다. 그러나 석유 수입이 안정적으로 들어오면서 사우드 가문의 정권도 안정적인 상태가 되었고, 국민 복리, 교육 시설의 신축 등 많은 사업이 추진되었다. 1971년의 제4차 중동 전쟁 이후 석유 값의 폭등으로 외화 수입이 크게 증가하자 산업, 항만, 주거 시설의 확장과 신축에 투자하게 된다. 이 사업에 한국의 건설 기업들도 참여하여 국내 경기에 호황을 가져와 1970년대에는 중동 경기가 한국 경제를 지탱하고 있기도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에 사우디아라비아의 비중은 전략적, 또는 경제적으로 매우 미약한 상태였고, 사우드 가문도 세계대전에 대해 관망하는 자세로 일관했기 때문에 전쟁의 피해는 무사히 지나갈 수 있었다. 그 후 팔레스타인 문제가 대두되었을 때도 사우드 왕가의 권력 체제를 유지하려는 절대적인 명분으로 인해 아랍 급진주의자에게 있어 매우 미온적인 정책을 취하게 된다. 1950년대에서 1973년의 제4차 중동 전쟁이 일어났을 때까지만 해도 사우디아라비아의 영향력은 중동 지역 밖으로 거의 미치지 않았고, 아라비아 반도 역내에서의 비중도 비교적 허약한 상태였다. 다만, 1962년 9월에 예멘(당시 북예멘)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맘이 퇴출되었다. 이를 계기로 왕당파와 공화파 사이에 내전이 일어나자, 반도 내의 세력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두려워한 사우드 왕가와 사우디아라비아는 내전에 개입하여 왕당파를 지원했다. 이에 대응해 이집트는 공화파를 지원하니 내전은 장기전으로 비화되었다. 결국 1970년에 두 파벌 간에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내전은 종식되었다.
1958년 7월, 이라크의 하심 왕가가 군사 쿠데타로 멸망할 때까지 사우드 왕가는 요르단과 이라크의 하심 왕가를 적대시하여 서로 간에 사이가 좋지 않았다. 결국 왕국의 수가 줄어들자 요르단과의 관계는 점차 개선되어 갔다. 게다가 1967년에는 예멘, 1969년에 리비아의 왕가가 차례로 붕괴되자 그 관계는 매우 밀착되었다. 1971년에 영국이 수에즈 운하 동쪽 지역에서 군사 기지들을 모두 철수하자, 사우디아라비아는 그 때까지 영국에서 독립한 반도 내의 여러 군소 왕국인 쿠웨이트, 바레인, 카타르, 오만, 아랍 에미리트의 실질적인 보호자 구실을 하고 있는 편이다. 특히, 1979년 초에 이란에서 이슬람 혁명이 성공하자 사우디아라비아와 이들 군소 왕국과의 결속력은 한층 강화되었고, 다른 아라비아 온건 국가들인 이집트, 요르단, 북예멘, 수단, 모로코, 튀니지와의 관계도 호전되면서 왕정 유지를 위한 결속력을 강화했다. 현재 사우디아라비아는 경제력을 배경으로 아라비아계 온건 국가들의 지도적 지위를 누리고 있다.
또한 이란 이슬람 혁명의 여파가 자국 내에까지 미치는 것을 예방하기 위해서 이란-이라크 전쟁 시기(1980~1988)에는 이라크를 지지하기도 했다. 여기에서도 아라비아계 내에서 초강경적인 국가들인 시리아, 리비아, 남예멘, 알제리가 이란을 지지했던 것을 보면 좋은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아라비아계 내에서 강경국과 온건국의 차이는 팔레스타인 문제와 관련하여 이스라엘과 그 배후 국가로 나타나고 있는 미국에 대한 외교적 정책의 강약에 따라 편의상 국제 정치학적으로 구분하고 있는 20세기 말의 용어로 볼 수 있다. 사우디아라비아는 특정 국가와의 군사 동맹을 맺고 있지는 않고 있지만 사우드 왕가가 권좌에 있는 상태에서 외교적으로는 친 서방 중립 정책을 상당 기간 동안 추구할 것으로 보이며, 1991년 걸프 전쟁에서 노골적으로 미국을 지지하면서 타 아라비아인들의 반감을 샀다. 그리고 약 4,000명 규모의 미군이 사우디아라비아 영역 내에서 주둔하고 있는 사실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사우디아라비아에서도 1990년대에 들어와 정책적 변화의 필요성을 감지하게 된다. 이는 특히 1991년의 걸프 전쟁 때 미국을 비롯한 동맹국 군대의 영내 주둔을 허용함으로써 촉발되었다. 이슬람 율법에는 비 무슬림 군대가 신성한 아라비아 반도에 주둔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매우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이슬람 과격파인 와하비 세력과 반체제 원리주의 무슬림들의 지하 활동이 이어졌고, 사우디아라비아 정부도 그에 대한 대응책으로 1993년에 정치 개혁의 목표로 60명 정원의 자문 회의(Majlis al-Shūra)를 설립하여 다양한 의견을 수렴하게 된다. 2001년에는 정원을 120명으로 증원하여 의결권이 없는 국민 의회의 역할을 부여하여 대 국민 홍보용으로 활용하고 있는 실정이다. 하지만 과격파들이 1995년에 수도 리야드 소재 미국 군사 자문관 숙소와 1997년 페르시아만 연안의 알 호하르(al-Khohar) 소재의 미군 기지를 공격하는 등의 사건이 일어난 이후, 서양인에 대한 테러 행위가 거의 해마다 이어지고 있었다. 이는 인근 섬에 국가를 유지하고 있는 바레인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