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레인은 18세기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이주해 온 알 칼리파 가문이 국가의 기초를 만든 후 1971년 영국군의 수에즈 동쪽 지역의 철군과 더불어 족장이었던 이사 이븐 술만 알 칼리파(Isa Ibn Sulman Al Khalifa)의 주도로 독립하면서 왕실이 이어지고 있는 상태였다. 바레인 군주에 대한 칭호는 1783~1971년에는 바레인 하킴(Hakim of Bahrain), 독립 이후에는 에미르(Emir)였으며, 2002년 2월 수정 헌법에 따라 국왕(King of Bahrain)으로 바뀌었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의회 구성을 승인하는 새로운 헌법이 발효되고 2002년 2월 입헌군주제 도입, 정치범 석방, 여성 투표권 보장, 국회의원 선거 실시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단행하였지만 국왕은 여전히 국정 전반에 걸쳐 큰 권력을 지니고 있으며, 왕실 일가는 전 국토의 80%와 관료 등 고위 인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다. 1947년 인도가 독립한 이후 19세기부터 바레인을 포함한 걸프 지역을 보호 통치하던 대영제국은 쇠퇴했다. 게다가 1950~1960년대에 역내에서 사회주의 성향을 가진 아라비아 민족주의의 대두와 더불어 바레인에서도 아라비아 걸프 점령지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을 비롯한 사회주의 단체들이 결성되면서 보호 통치를 실시하던 영국의 철수를 요구하는 압력이 증대되었다.
이와 동시에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한 바레인에 대해 통치권 문제에 영국과 이란, 사우디아라비아 등 주변 강대국들이 개입함으로 인해 바레인 주권 문제는 더욱 복잡해졌다. 결국 바레인 문제는 유엔에 제출되었고, 1970년 5월 11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는 주민의 압도적 다수가 독립을 원한다고 밝히게 되면서 바레인 독립을 승인하였다. 1973년 바레인 헌법의 가장 큰 특징은 단원제 의회와 선출된 의회의원이 장관으로 임용될 수 있다는 의원내각제를 규정한 것으로 보인다. 이 바레인 헌법에서 30명의 의원은 성인 남자로 제한된 보통선거로 선출되며,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은 당연직 의원이 된다. 이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12일 국민 의회 의원 선거가 실시되었다. 그러나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5년에 1973년에 만든 헌법을 폐지하고, 의회를 해산함으로써 1975년부터 2001년까지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으로 통치하였다. 현재 정치 개혁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단원제 국회를 포함하는 1973년 헌법으로 복귀를 요구한다.
1973년 헌법에 따라 1973년 12월 바레인 최초로 의회 선거가 실시되었고, 30명의 국민의회(The National Assembly of Bahrain) 의원들이 20개의 선거 구역에서 비밀투표, 과반수 적용 안 되는 단순 다수의 득표율로 선출되었다. 이 선거에서 참정권은 성인 남성으로 제한되었다. 이와 함께 왕이 임명한 14명의 장관들이 국민의회의 당연직 구성원들이 됨으로 인해 전체 의원의 수는 44명이 되었다. 24,883명의 등록된 유권자 가운데 19,509명이 투표함으로 인해, 투표율은 78.4%였다. 당시 정당설립과 활동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후보자들이 공개적으로 정치적인 견해를 표명함으로써, 2개의 강력한 정치 블록인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이 출현하였다. 인민 블록(People's Bloc)을 보자면 도시 지역에서 8명이 선출되었다. 인민 블록은 시아파와 수니파를 포괄하는 것으로 노동조합의 합법화와 1965년에 제정된 보안 조치 폐지를 주장하면서, 좌파적이고 아라비아 민족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 바레인 인민해방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Bahrain, PFLB, 1974~2001)과 바쓰 운동으로 알려진 바레인 민족해방전선(National Liberation Front Bahrain, NLFB)과 제휴하였다.
인민 블록은 알리 카심 라베아(Ali Qasim Rabea), 압둘 하디 칼라프(Abdulhadi Khalaf) 등을 포함하였다. 압둘 라흐만 알 누아이미를 비롯한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의 핵심 간부들이 점령지인 아라비아 걸프 인민 해방 전선(The Popular Front for the Liberation of the Occupied Arabian Gulf, PFLOAG, 1968-1974) 창설에 참가하였고, 1974년 PFLOAG 바레인 부문을 바레인 인민해방전선(PFLB)으로 분리 독립시켰다. 다른 하나는 6명의 시아파로 구성된 ‘종교 블록’으로 알려졌으며, 대부분 시골 선거구 출신으로 교사들과 종교법정 판사들로 구성되었다. 이 ‘종교 블록’은 셰이크 이사 카심(Sheikh Isa Qassim), 셰이크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Abdul Amir al-Jamri),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Sheikh Abdulla Al-Madani), 셰이크 압바스 알 라이스(Sheikh Abbas Al-Rayes), 술래이만 알 무바라크(Suleiman Al-Mubarak), 하산 알 무타우아즈(Hassan Al-Motawwaj)로 구성되었다. 당시 가장 탁월한 시아파 성직자였던 셰이크 만수르 압둘 아미르 알 자므리(Sheikh Mansour Abdul Amir al-Jamri, 1938~2006)가 바레인의 종교 블록을 이끌면서, 817표를 획득하여 당선되었다.
이 블록은 노동 조합을 지지하고, 음주를 금지하였으며 학교 내에서 남녀 분리, 남성 의사들의 여성 진료 금지 등 전통적인 관습과 관련된 다른 사항들을 요구하게 된다. 특히 셰이크 이사 카심이 이 선거에서 1,079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15개 선거구 중 가장 많은 표를 획득하였다. 이사 카심은 현재 알 와파크의 정신적인 지도자로 알려져 있다. 또 1967년까지 좌파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 지도자였던 셰이크 압둘라 알 마다니가 이 ‘종교 블록’에 들어와 771표를 획득함으로 인해 당선되었다는 사실을 주목할 만하다. 이는 당시 이념적인 경계가 완고하게 확고했던 것이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나머지 구성원들은 유동적인 입장을 취하는 무소속으로 알려졌다. 무소속 의원은 정부와 두 블록들, ‘인민 블록’과 ‘종교 블록’ 사이에서 중립적인 성향의 인물들이었다. 당시 바레인 노동 운동 지도자들은 수많은 파업을 조직했다. 이에 대한 응답으로 1974년 알 칼리파 정부는 정치적 불안을 조장하는 사회주의자들을 표적으로 하여 국가보안법(State Security Law of 1974)을 제안하였다.
당시 국민 의회는 이 법안을 압도적으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한 후속조치로, 아미르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4년 아미르 령(The Amiri decree No. 4 / 1974)으로 1975년 8월 26일 국민의회를 해산시켰으며, 1999년에 사망할 때까지 국민 의회를 다시 소집하거나 선거를 허락하지 않았고, 국가 보안법으로 강력하게 통치하였다. 이 법은 1974년부터 2001년까지 바레인에서 시행되었으며, 정부에게 국가 안보와 관련된 범죄자들을 체포하여 재판 없이 최대 3년까지 투옥시킬 수 있는 권한을 부여했다. 이어 국가보안 법정(State Security Courts)을 설립하도록 함으로써 임의적인 체포나 고문을 허용하였다. 인권단체들(Human Rights Watch and Amnesty International)의 보고서에 따르면, 거의 25년 동안 국가보안법은 정치범들에 대한 고문과 인권위반을 용이하게 하였다. 2001년 하마드 국왕은 이 법을 폐기하고, 헌법을 회복시켰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dam bin Isa al Khalifah) 국왕은 1950년 1월 바레인 남부 지역의 리파(Riffa)에서 선왕인 이사 이븐 살만 알 칼리파(Isa ibn Salman Al Khalifah)의 아들로 태어났으며, 1999년 3월 38년 동안 통치하였던 이븐 알 칼리파 왕이 타계한 이후 왕위를 계승하였다.
첫 번째 부인인 왕비 샤이카 사비카 빈트 이브라힘 알 칼리파(Shaikha Sabika bint Ibrahim Al Khalifa)와의 사이에 왕세자 살만 빈 하마드 알 칼리파(Salman Bin Hamad Al Khalifa) 등 6명의 아들을 두었으나 막내인 파이잘 이븐 하마드 알 칼리파(Faisal ibn Hamad Al Khalifah) 왕자가 2006년 1월 교통사고로 사망했다. 알 칼리파 가문은 바레인의 현 왕실로 1766년 창설되었고 1783년부터 바레인을 통치하기 시작했다. 시아파 신도가 대부분인 자국민들과 다르게 수니파 이슬람을 신봉하며 이러한 종파로 인해 많은 시위가 일어났다. 바니 우툽(Bani Utub) 연맹의 일원으로, 네지드 사막에 거주하다 17세기 사바흐 가문과 함께 쿠웨이트로 이주하게 된다. 다만 얼마 후, 사바흐 가문이 쿠웨이트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자 카타르의 북부 주바이라로 이주했다가, 18세기 친척인 사바 왕조의 도움으로 잔드 왕조 치하에 있던 바레인을 공격해 점령하였다. 그 후로 알 칼리파 가문은 현재까지 바레인을 통치하고 있다. 19세기 오만 제국 및 사우드 왕조가 바레인을 장악하여 축출되는 등의 위기를 맞았지만, 영국과 보호 협정을 맺으며 안정을 확보하게 된다. 독립 후, 현재는 사우디아라비아와 친선을 맺으며 권력을 유지하고 있다.
현재 국왕인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의 부친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영국의 보호국을 탈피하여 독립국이 된 1971년에 기존의 호칭인 하킴을 버리고 아미르로 호칭을 변경했다. 하마드 국왕은 2002년 왕이라는 뜻의 말리크로 호칭을 높였다. 하마드 빈 이사 알 칼리파(Hamad bin Isa Al Khalifa)는 1950년 1월 28일에 출생했으며 현재 70세가 넘는 고령이다. 그는 바레인 리파에서 태어났다. 학생 시절에는 영국에서 교육을 받았으며 그의 아버지인 이사 빈 살만 알 칼리파는 1971년에 독립한 바레인의 첫 아미르였다. 그의 장남이었던 하마드는 1999년 3월에 부왕이 사망하면서 아미르 제위를 계승했고, 2002년에 아미르라는 지위를 왕으로 승격시키면서 대관식을 올리게 된다. 하마드 국왕은 2020년 말 오랫동안 국무총리를 맡고 있던 삼촌이 사망하자 자신의 아들인 살만 왕세자를 차기 국무총리로 지명했다. 하지만 그는 단순히 바레인의 절대 군주일 뿐 아니라 억압적인 독재를 펼치는 전제 군주이다. 1990년에는 바레인에서 개혁을 원하는 시위가 일어났는데 이것이 1994년에 대규모 시위 및 항쟁으로 변하면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고, 이와 같은 시위는 1999년까지 일어났다.
그 이후 하마드가 즉위하면서 대사면 령을 내리고, 2000년대에는 의회를 재소집하려고 국민 투표를 하면서 차츰 민심을 얻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일종의 명분이었고, 군 장성과 관료, 의원을 임명하는데 권한은 모두 오직 국왕에게만 있을 뿐이었다. 게다가 2002년에는 칭호를 종래의 아미르에서 말리크(왕)으로 높였고 권위주의 체제가 더 강화되면서 독재를 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2011년 중동에서 대규모의 항쟁이 발생하면서 바레인에도 혁명의 조짐이 나타났다. 처음에는 평화적인 시위로 시작했으나 경찰과 군인, 시민들의 투쟁으로 4명의 시민들이 사망하면서 대규모 항쟁이 발생한다. 결국 2011년 2월 14일에 일어난 시위는 3월에도 이어졌다. 그러자 하마드 국왕은 경찰과 군인들을 총동원하여 이를 무자비하게 진압했다. 이 때 바레인 군경들은 실탄을 발포하여 수도 마나마에 있던 진주 광장의 시민들은 학살을 당했고, 진주 광장은 폐허로 변하면서 민주화 항쟁은 실패했다. 그 뿐만 아니라 하마드 국왕은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쿠웨이트 등 걸프 만에 있는 수니파 국가들의 도움을 요청했고, 특히 사우디아라비아의 군대가 가장 먼저 파병하자 아랍에미리트와 쿠웨이트도 군대와 경찰을 파견하였고 이들과 동맹을 맺으면서 더욱 강압적인 유혈 진압을 펼쳤다.
그리고 민주 항쟁의 흔적을 없애거나 시위를 못하게 하려고 싶었는지 광장과 중앙의 진주 탑을 철폐하고, 그 곳에서 레이스 경주대회를 하는 경기장으로 만들어버렸다. 물론 광장이 없어져도 계속 같은 장소에서 시민들은 2012년 3월까지 항쟁을 하였고, 그 이후에도 크고 작은 시위가 일어나지만 강경하게 진압하였기 때문에 시민들의 항쟁은 실패로 돌아갔다. 2014년 시위가 완전히 진압된 이후 진주 광장은 완전히 말살되어 2017년 알 파루크 교차로로 개조되었고 지금은 광장의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이후 시위자들에게 감금한 후 잔인한 고문을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2014년부터 국왕 모독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여 최대 징역 7년과 벌금 1만 디나르(한화로 3,000만원)로 대폭 올렸다. 게다가 이 국왕을 포함한 바레인의 왕실 가문들은 친미 독재에 적응된 인물들이 많았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에게 외면을 당했기 때문에 이들에 대해 잘 알려지지 않았던 적이 많았다.
결국 이로 인해 미국과 유럽의 선진국들은 독재자를 방조했다는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하지만 아라비아 국가들의 수장들이 그러하듯이 하마드는 억압적인 독재를 자행하면서도 세속적인 종교 정책을 펼치면서 쿠웨이트, 아랍에미리트, 요르단처럼 은근히 개방적인 모습도 보였다. 특히 하마드 국왕은 철저하게 정교분리를 추구하고 있다. 게다가 민주화 시위자들도 문제가 있었던 것이 순수한 민주화가 아니라 친 서방 수니파 세속주의 왕실을 타도하고 이란 식 반 서방 시아파 신정 독재를 요구했다는 것이 문제점으로 지적되기도 했다. 그리고 미국과 유럽 여러 국가들이 외면하지 않은 결과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 리비아를 참조하여 파악하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