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17(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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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카타르 쿠데타는 1995년 6월 27일 카타르에서 일어난 무혈 쿠데타로써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가 타니 가문의 지지 하에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프 빈 하마드 알 타니가 스위스 제네바에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쿠데타를 일으켰다. 1995년 쿠데타는 1992년부터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에게 주었던 일부 권한을 아버지인 칼리파 빈 하마드 알 사니가 다시 회복하려 했다. 이는 1995년 초부터 부자 관계가 악화되는 와중에 일어난 사태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 국왕은 1972년 2월 쿠데타를 통해 전 국왕이었던 하마드 빈 알리 알 타니가 이란으로 순방을 간 틈을 이용하여 쿠데타를 일으켜 카타르를 장악하고 있었다. 이후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은 근대화 정책을 펼치게 되었으며 1977년 5월에는 차남이었던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공석이었던 왕세자 자리를 부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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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Former Qatari Emir Sheikh Hamad bin Khalifa al-Thani (R) and his son, Emir Sheikh Tamim bin Hamad al-Thani. 출처 : KARIM JAAFAR / AFP / Getty Images

 

하지만 칼리파 국왕이 1990년대 이후 차남인 하마드 빈 칼리파에게 넘겨주던 권력 이양을 중지하고 전 석유 및 재무 장관이자 1992년에 하마드 빈 칼리파의 영향으로 축출되어 프랑스로 망명하던 압델 라지즈 빈 칼리파 알 타니(Abdelaziz bin Khalifa Al Thani)에게 권력을 다시 넘겨주려 했던 시도가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쿠데타의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위원회는 슈라 위원회 특별회의를 소집하고 쿠데타 직후 권력을 장악한 하마드 왕세자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헌법에 따른 강제적인 왕위 이앙 절차를 마쳤다. 또한 하마드 왕세자는 쿠데타 직후 짧은 대국민 담화를 발표해 “오늘 일어난 일이 기분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이는 단행되어야만 했던 일이고 나는 이를 해야만 했다(What happened today is not pleasant, but it had to happen and I had to do it.)”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해외 외교관들은 쿠데타가 형제 간 왕위계승권 문제 및 내부 권력 투쟁에 따른 영향이라 분석하였다.


쿠데타가 일어나자 국왕이었던 칼리파 빈 하마드는 자신의 아들을 “멍청한 인간”이라 부르고 자신이 계속해서 카타르의 합법적인 군주라고 선언했으며, 자신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고국 카타르로 귀국하겠다고 선언하였다. 반면 아들 하마드 빈 칼리파는 역으로 발생할 수 있는 쿠데타를 막기 위해 아버지의 해외 은행 계좌를 동결시키려고 미국의 로펌회사들을 고용하였다. 이에 1996년 2월에는 전 경제부 장관이었던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의 주도 하에 전 국왕인 칼리파 빈 하마드를 복권시키기 위해 쿠데타를 역으로 시도하려 한 사건이 일어났다. 하지만 이 쿠데타는 미수에 그쳐 실패했으며, 그러한 과정에서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바레인, 이집트 같은 전통적인 아랍 지역의 카타르 동맹국들이 쿠데타 미수 사건에 연루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게 된다.


강제로 퇴위당한 칼리파 빈 하마드는 프랑스와 아랍에미리트 아부다비에서 망명 생활을 했다가 2004년 고국인 카타르로 귀국하는 데 성공했다. 그는 왕이 되자마자 종교 제한 및 여러 가지 검열 정책을 폐지했으며, 여성 활동을 일부 허용했다. 1996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은 1996년 2월 14일 카타르에서 발생한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에 대한 폐위 시도이자 쿠데타 미수 사건으로 나타난다. 카타르 정부는 이 쿠데타 미수를 “아부 알리 작전(Operation Abu Ali)”이라 부르고 있다. 2017~2018년에 발발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언론사인 알 자지라는 1996년 당시 카타르의 쿠데타 미수 사건에 대해 바레인, 이집트,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가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 국왕 정부를 붕괴시키고 새로운 계획을 가지고 쿠데타 세력을 지원했다는 사실을 폭로하게 된다.


1995년 6월 27일, 당시 왕세자였던 하마드 빈 칼리파 알 사니는 아버지이자 카타르의 아미르였던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를 상대로 쿠데타를 일으키고 자신이 이미르에 스스로 등극하였다. 칼리파 빈 하마드 국왕이 스위스 제네바로 해외 순방을 가는 동안 무혈 궁정 쿠데타를 일으킨 것으로 쿠데타 수 시간 후 카타르의 의회 격에 해당하는 카타르 자문 위원회에 의해 권력을 이양 받는데 성공한다. 하마드 빈 칼리파의 통치 첫 해에는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중요한 여러 조치를 시행했고 민주적인 선거로 선출한 의회를 수립하겠다고 발표했다. 이와 같은 자유화 정책은 문화적으로 보수적이고 전통적 가치를 중요시한 아버지와 극명한 대조를 이루었던 것으로 보인다. 1996년 1월에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조만간 고국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며 걸프 협력 회의(GCC)가 새로 왕위에 등극한 하마드 빈 킬리파와 자주 충돌하는 것을 이용하여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등을 연달아 방문하기도 하였다. 


퇴위한 전 아미르와도 깊은 관계에 있었던 알 타니 가문의 여러 고위 인사들은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타도하기 위한 쿠데타를 역으로 자행하기 위해 여러 단체들을 조직했다. 카타르는 1996년의 쿠데타 미수 사태가 아랍에미리트, 사우디아라비아, 이집트, 바레인 등 해외 각국의 지지로 이루어졌다고 주장했으며 1997년 뉴욕 타임스의 기사에 따르면, 일부 익명을 요구한 서방 외교관은 쿠데타가 사우디아라비아와 아랍에미리트의 지지와 묵인이 있어야 가능했다고 말한 것을 보도했다. 2018년에는 2017년부터 시작된 카타르의 외교 위기 이후 알 자지라가 다큐멘터리 보도를 통해 사우디아라비아, 아랍에미리트, 이집트, 바레인이 하마드 빈 칼리파 국왕을 축출하는 쿠데타에 가담했다며 정식으로 보도했다. 이와 같은 알 자지라의 보도에 따르면 쿠데타 음모의 핵심이 무장 괴한들이 카타르 왕궁에 진입하여 하마드 빈 칼리파를 납치해 알라이얀 도로에 있는 자택에 연금시키는 일이 목적이었다. 


이 같은 불법적인 납치 작전은 2월 16일 오전 5시로 예정되었으나 발각될 가능성 때문에 급하게 작전 시기를 2월 14일로 앞당겼다. 카타르 정보부에 따르면 이러한 작전 변경은 당시 아랍에미리트 군 총사령관이었던 무함마드 빈 자이드 알 나하얀(Muhammad bin Zayed Al Nahyan)의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여기에 정보부는 카타르의 군사 시설을 완전히 장악한 쿠데타 군이 사우디아라비아 비정규군의 도움을 받을 계획이었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쿠데타 음모가 발각되어 실행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카타르 정부는 2월 20일 쿠데타 관련 주동자들을 체포하게 된다. 알 자지라에서는 전 프랑스 육군 사령관인 폴 바릴(Paul Baril)이 아랍에미리트에서 카타르 쿠데타 작전 시행을 요청받아 무기를 받고 계약했다고 보도했다. 아랍에미리트의 외무부 장관인 안와르 가르가시(Anwar Gargash)는 알 자지라의 보도에 대해 폴 바릴은 아부다비를 방문했던 전 국왕 칼리파 빈 하마드 알 타니의 보안요원으로 다큐멘터리의 모든 내용은 쿠데타를 사주한 것이 아랍에미리트라는 선동적인 내용이라 비난했다.


쿠데타의 주동자로 아미르의 사촌이자 전 경제부 장관인 하마드 빈 자심 빈 하마드 알 타니(Hamad bin Jassim bin Hamad Al Thani)가 지목되었다. 수 년 동안의 망명 생활 끝에 하마드 빈 자심은 1999년 7월 납치되어 재판에 넘겨졌다. 2000년 2월, 하마드 빈 자심을 포함한 32명의 쿠데타 가담자들은 내란 음모의 혐의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쿠데타에 연루된 85명이 추가로 기소되었으며, 이 중 일부는 궐석 재판 형태로 진행되기도 하였다. 참석한 피고인들은 전원 무죄를 주장했다. 나아가 1997년 자국에서 열린 아라비아 경제 회의에서 아라비아 역사상 처음으로 이스라엘을 초청하는 일을 하게 된다. 이웃인 사우디아라비아는 물론, 이스라엘과 수교국인 이집트조차도 이러한 사실을 비난했다. 1998년에는 왕이 절대 왕정에서 입헌군주제로 바꾸게 되면서 사회적인 분위기도 바뀌게 된다. 더 나아가 외국으로 유학을 나간 여성 지식인들을 초청하여 회의도 가지고, 여성부 비슷한 기관을 만들었으며 여성 정치가 활동 및 언론 활동까지 전면 허용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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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5년 카타르 쿠데타 미수 사건의 전말과 그로 인한 사회적 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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