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 왕정 시대의 시민 사회는 실질적으로 시민들 대표에 가까웠던 많은 귀족들이 시민들과 영합하여 자신들의 정치적 영향력을 키우려고 했고 여기에 성공한 귀족들의 영향력은 왕권을 능가했다. 로마 역사에 나오는 공화정을 수립했다고 하는 브루투스도 여기에 해당했고 아테네에서도 솔론과 같은 인물이 존재하고 있었다. 로마의 경우에는 로마 국왕의 존재감이 점차적으로 희미해지게 되었다. 유력 귀족에 의한 과두 정권을 거쳐 시민들이 투표로 정치 현안을 결정하는 민주 정권이 나타났고 결국 B.C 500년 정도 되었을 때 로마는 왕정이 붕괴되고 말았다. 그리스에서는 왕정이 붕괴되고 귀족정이 형성되었다가 귀족들도 권력을 잃게 되었고 시민들이 주권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았다고 보고 있지만 로마는 귀족들이 계속 영향력을 유지하였는데 로마 특유의 파트로누스(Patronus (후원자)의 어원), 클리엔테스(Clientes, 영어 : Client (고객)의 어원)의 씨족 연맹 전통이 있었기 때문이다.

파트로누스, 클리엔테스의 관계는 유력 귀족 집안이 그들에게 충성을 바치는 평민들의 뒤를 봐주면 그 평민들은 이러한 귀족 집안에 충성을 바치는 방식이었다. 이 귀족을 파트로누스, 평민을 클리엔테스라고 부르고 있다. 이 파트로누스는 최대한 많은 평민들을 클리엔테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것이 곧 그들의 영향력과 비례하기 때문이었다. 한편 평민들은 최대한 강력한 힘을 가진 귀족을 파트로누스로 삼고자 하였는데 이는 다른 평민들과의 분쟁에서 어떠한 파트로누스가 개입하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지기 때문이었다. 당시 로마에선 거의 모든 평민들은 뒤를 봐주는 파트로누스 집안을 가지고 있었고 그로 인해 비록 공화정으로 바뀌어도 이 파트로누스 노릇을 하는 귀족 가문의 영향력은 막강하였다. 이는 귀족과 평민의 구분이 거의 소멸하다시피 했던 그리스와는 구별되는 특징이었다.
이러한 면에 있어서도 지역적 특성이 반드시 정치 체제를 결정한다는 보장은 없다. 이러한 강력한 귀족의 존재로 인해 로마에서는 공화정이 수립된 이후에도 강력한 귀족 집단이 존재하였고 때문에 귀족과 평민의 반목이 끊임없이 있었다. 그러한 반목 중 가장 중요한 이슈는 전리품과 획득한 영토의 배분 문제였는데 귀족들은 그들의 특권을 사용하여 전리품 가운데 가장 값이 비싼 것과 기름진 땅은 자신들이 갖고 평민들에겐 나머지만 분배할 뿐이었다. 또한 귀족은 평민들에게 높은 이자로 돈을 빌려주어 그들이 전쟁을 수행하면서 황폐해진 농토를 복구하는 데 필요한 자금으로 사용하게 하고 돈을 갚지 못하면 그들의 영토를 몰수한 이후, 노예로 삼는 짓도 하였다. 이러한 귀족의 횡포에 맞서 로마 평민들은 전쟁 수행을 거부하는 파업을 벌이는 방법을 사용하여 그들의 권리를 수립하고자 하였다.
귀족과 평민의 대립은 끝까지 로마의 문제가 되어 로마 멸망에 한 축을 담당하게 된다. 평민이 제외된 로마군은 켈트족에게 성이 함락되는 결과를 가져왔고 이후에는 평민의 권리를 수호하는 호민관이라는 직책과 평민 집회가 생겼으며, 이후 법적으로 평민과 귀족의 차이점을 없애버렸다. 평민도 호민관을 역임하면 원로원에 들어갈 수 있게 되었으나 실질적으로 평민은 들어갈 수 없었다. 여성이나 외국인의 법적 지위는 매우 낮았고 노예제가 있었기 때문에 평등 국가였다고 할 수는 없지만 평민과 귀족 사이의 계급 장벽이 일단 법적으로 볼 때 절대적이지 않았다. 노예는 상당히 많이 존재했고, 극히 일부의 경우는 해방 노예라는 신분을 거쳐서 시민이 되는 것도 가능했다. 하지만 이와 같은 경우는 가내 여노예의 자식이 대부분이고, 농장에서 일하는 노예 등은 전혀 해당 사항이 없는 내용이다. 귀족의 경우, 공식적으로는 오로지 명예로운 가문의 일원이라는 뜻을 갖고 있을 뿐, 직접적인 특권은 가지고 있지 않았다.
다만 권력에 쉽게 접근할 수 있는 특권 및 로마의 계속되는 정복 전쟁으로 인한 전리품, 그리고 정치적 유력자로서 주변에 모이는 사람 등을 활용해서 결과적으로는 거대한 일문의 정치 집단이 된다. 이후 일부 평민 계층들은 호민관에서부터 시작하여 원로원, 집정관, 군단 사령관의 지위에 올라 유력 가문이 되는 이른바 평민 귀족이라는 것까지 등장한다. 이 평민 귀족은 “새로 함께하는 자”라는 의미의 노빌리스(Nobilis)라고 불렸으며, 이것이 후에 귀족을 의미하는 말인 노블(Nobl)의 어원이 되었다. 참고로 귀족은 파트리키(Patrici), 평민은 블레브스(Blebs), 기사계급은 에퀴테스(Eqites)라 불린다. 로마는 건국 직후인 왕정 시대에도 로마는 끊임없이 전쟁을 수행하였는데 로마의 지리적인 특성에도 기인했다. 로마는 이탈리아 반도의 정중앙에 위치하고 있고 이탈리아에서도 비옥한 이탈리아 서부 평야 지역에 있었다. 여기에 테베레 강(Tiberis)까지 끼고 있어 이탈리아를 가로 지를 때 강을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 육지를 따라 이동하는 부족들은 반드시 로마 근처를 거쳐 가야 했다.
로마를 우회하려면 이탈리아의 정중앙을 가르고 있는 아펜니노 산맥(Monti Appennini)을 거쳐 가야 해서 로마를 통하는 것보다 훨씬 불편했기 때문이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으로 로마는 끊임없는 외세의 침략이나 동맹 제의에 노출되었고 로마인들은 건국 초기부터 거의 한 해도 거르지 않고 전쟁을 수행하여야 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거기에 구성원들 대다수가 특정 신앙, 부족, 민족을 중심으로 성장하지 않았기 때문에 에트루리아의 문화적 영향과 라틴 인들과의 접점에도 불구하고 대단히 주변국들에게 배타적이었다. 처음부터 가난한 농촌의 로마였던 시기의 레물루스 왕 시절부터 주변 마을들을 군사적으로 복속시킴으로서 국가로써 성장했고, 내부의 정치적 갈등과 문제를 전쟁으로 해결해 온 경험으로 인해 주변국과의 문제를 해결하고자 할 때 군대를 보내는 것으로 해결했으니 지리적 요인과 정치 및 사회적인 문제까지 겹쳐 로마인들은 전투 민족으로써 성장했고, 이것은 각 소국들이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을 벌이는 것이 흔했던 당시 기준으로도 무언가 특이했던 것은 분명했다.
상무 정신과 대단히 보수적인 가부장 문화는 오랜 기간 로마 문화의 근간을 이루게 된다. 실제로 로마인들의 특징을 보통 개방성으로 보는 학자들이 많지만 로마 왕국 시절부터 실제로 로마인들의 대외 정책은 배타성과 개방성이 혼재된 것이었다. 우선 적이 되면 상대 국가가 완전히 멸망하거나 복속 될 때까지 끈질기게 전쟁을 벌이면서 거의 사생결단의 방식으로 나왔다. 우선 로마 사에서는 당시 대표적인 주적이었던 베이(Bey), 삼니움(Samnium), 볼스키(Bolski) 등을 비롯한 부족국가들과 해마다 전쟁을 벌였던 기록이 나타나고 있으며, 적당히 타협하거나 교류하지 않고 끝도 없이 약탈 및 전쟁을 벌였던 것이 로마인이었다. 물론 로마의 기록들은 상대 국가나 부족들이 로마를 자주 약탈하였으니 로마인들의 전쟁은 타당하다는 식으로 서술하고 있지만, 로마인들은 상대방에게 거의 일방적인 대외정책을 펼쳤고, 상대 이익에 맞는 적절한 유화책을 사용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