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자는 얼마 전에 고려인에 대한 다큐를 보다가 가슴에 맺힌 말이 떠올랐다.
"국적은 우즈베키스탄인데, 쓰는 말은 러시아 말인데, 민족은 고려인에 우리 대체 무슨 사람입니까?"
고려인들은 한국에 와 적응하는 일이 쉽지 않다고 한다. 고려인들은 한국어를 모르니 러시아어로 된 책과 신문, 인터넷 자료들을 읽는다. 고려인들은 한국에서 외국인처럼 취급받고 있는데, 노력해서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경향이 강하다. 한국에서 인정받아야 한다는 고려인들의 집념은 강제이주 직후 고려인들의 선택과 매우 유사했다. 그래서 고려인들은 지금 살고 있는 곳이 고향이라는 마음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혼신을 다해 고향에서 살아야 한다고 했다. 강제 이주 직후 소련에서 적성민족이 아닌 '국민'으로 인정받고자 한 김병화 선생님의 각고의 노력은 고려인들을 콜호스라 불리는 집단 농장의 노동영웅으로 만들었다. 독보적인 생산량에는 막대한 피땀 어린 노력들이 수반되었다. 이는 고려인들이 한국에 돌아와서도 마찬가지의 노동을 감내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고려인들은 '한국'을 다양하게 정의하고 있다. '아버지의 나라'라고 강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고, '역사적 조국'이라고 건조하게 말하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우즈베키스탄은 언젠간 다시 돌아갈 나라라고도 했다. 그 이유는 강제 이주 이후, 열심히 일구었던 터전, 부모의 청춘을 모두 바친 곳이라 의미가 남다르기 때문이다.

김병화 선생님은 연해주의 대한제국 농민 가정에서 1905년에 태어났다. 그의 부모님은 그가 태어나기 전에 러시아로 이주했으며 이들은 자기 땅 하나 없는 빈농들이었다. 연해주의 쿨라크(Кулак, 부농)에게서 논을 빌려서 소작을 지으면서 그럭저럭 벌어먹고 살았으나, 굶주림과 빈곤은 이들의 어쩔 수 없이 나타난 숙명이었다. 선생은 6살 때 아버지를 잃고 4명의 형제들과 아픈 어머니를 이끌어 가야만 했으며 여름에는 잡초 뽑는 일로 품삯을 받아서 연명했고 겨울에는 새끼를 꼬아서 파는 것으로 변변찮은 수입을 얻어왔었다. 대부분의 돈은 식량을 사는데 쓰였으며 남는 돈은 거의 없었다고 한다. 빈곤에서 벗어나기를 결심한 김병화는 지역의 학교에서 4년 동안 배우기로 결심했다. 지식에 대한 호기심과 열정으로 충만한 김병화는 대학까지 갈 수 있었다. 적백내전이 발발했을 당시에는 일본 간섭군을 맞이하여 파르티잔 활동을 하였으며, 후에 1927년 적군에 입대한다. 군생활을 잘하였는지 모스크바의 군사정치 학교까지 유학을 갔다 와서 1932년에 졸업했다.
선생은 비록 고향 땅 연해주는 아니었지만 타타르스탄 공화국 카잔에서 중대장을 맡아 중위 계급장까지 달면서 성공한 고려인의 전형을 보여주게 되었으나, 스탈린이 연해주의 고려인들을 모두 중앙아시아로 이주시키는 명령을 반포하고 고려인을 억압하기 시작했다. 1938년에 선생은 고려인 민족주의 당 조직에 몸을 담았다는 말도 안 되는 소련 정부의 주장에 의하여 대숙청의 일환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다행히 1939년에 증거 불충분으로 석방되었다. 그런데 카잔에 있던 군부대에서 반강제적으로 제대한 선생은 가족이 추방당한 우즈베크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향했다. 김병화 선생은 1939년 '새로운 여정'이라는 타슈켄트의 콜호즈에 들어가 건설 관리직으로 일하게 된다. 당시 중앙아시아 고려인들은 아무런 시설이 없는 초원 한 가운데에 놓여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간이 시설일지라도 주택 건설은 매우 시급한 문제였다. 김병화는 건설 자재, 차량, 기술자 등 모든 것이 부족한 상황에서 그럭저럭 괜찮은 거주지를 건설하는 것에 성공해다. 그의 성실함에 주민들은 감동하였고 당 지도자들도 여기에 많은 관심을 보이게 된다.
1929년 전 안드레이 등, 20여 명에 의해 연해주 미하일로브까 지구의 리뽀브까 마을에 김병화 농장의 시초인 북극성 농장이 조직되었다. 이후 1937년 강제 이주로 인해 우즈베키스탄의 타쉬켄트 주 중치르칙 구역에 자리를 잡게 되면서 북극성 농장의 농업 개척의 역사는 이 때부터 시작되었다. 1940년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의 북극성 콜호즈의 지도자로 선출되었다. 선생은 연해주의 소작농이던 경험과, 군대의 규율을 겸비하고 있던 북극성 콜호즈 최적의 지도자였다. 김병화 농장의 농업개척의 역사는 단연 독보적이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 늪지대를 매립하여 농지를 조성했다. 당시 소련의 집단농장은 그 효율이 매우 낮았기 때문에 80년대 말쯤에도 4%의 자영지에서 25%의 식량을 생산하는 상황이 벌어질 정도로 좋지 않았다. 그러나 농장대표인 김병화 선생의 탁월한 지도력은 북극성 농장을 최고의 위치에 올려놓았다. 북극성 농장은 주력 작물인 면화 1000헥타르, 벼 300헥타르, 밀 500헥타르로, 총 1800여 헥타르의 경작지를 보유했다. 북극성 농장은 대조국 전쟁 시기에는 밀 867톤과 목화 163톤을 수확해 내었고, 소련 전투기 생산에 221만 1천 루블을 기증하기도 했다.
1941-45년 기간에는 1,080헥타르의 토지를 개척해 내었고, 목화와 벼 파종 면적을 약 10배까지 증가시켰다.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 당 4~5톤의 쌀을, 일부 작업반들은 8톤까지 생산해 내었다. 당시 김병화 선생은 고려인들에게 초가집을 짓고 살게 했다. 당시 고려인들은 기본으로 바닥에 온돌을 깔고 나무로 벽을 만들며 지붕을 초가를 얹었다 한다. 그러한 덕택에 카자흐스탄과 달리 우즈베키스탄에서 얼어죽은 고려인은 없었다고 전해진다. 이처럼 북극성 집단농장의 수확량이 꾸준히 늘면서, 김병화 선생은 1948년에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았고, 1951년에도 두 번째로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받아 ‘이중 노동영웅’의 반열에 올랐다. 소련 시대 통틀어 ‘사회주의 노동영웅’ 훈장을 두 차례, 2중으로 받은 고려인은 김병화 선생이 유일하다. 한편 북극성 농장의 경제적 여건은 해가 갈수록 성장했다. 경작 면적은 총 2,600헥타르까지 증가되었고, 1971년대에 들어서는 13개 민족, 6,000명의 대식구들을 거느린 대규모 농장으로 우뚝 서게 된다.
방직, 전자제품의 생산성, 황무지를 옥토로 만들어 생산량을 높이고 옥수수를 다량 재배하여 굶주리는 소련 인민들에게 다량의 배급품으로 보내는 등, 사회적 공헌도와 기여도도 높았다. 대조국 전쟁이 끝나고 소련 전체에서 식량 사정이 많이 안 좋았을 때, 북극성 콜호즈는 높은 생산성을 올려 소련의 식량 문제 해결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북극성 콜호즈는 사막이 많은 중앙아시아에서 벼를 재배하는 엄청난 근성을 가진 콜호즈였는데, 이들은 잘 짜여진 노동 조직과 사회에 대한 의무감을 바탕으로 당시 소련 평균보다 훨씬 많은 식량생산을 기록했다. 소련에서는 헥타르 당 2.7톤~3.4톤이 목표라고 지시를 내려왔는데 콜호스의 몇몇 팀들이 헥타르 당 8톤을 생산해버린 것이다. 중요한 건 여기는 원래 낙후지역이라서 소련이 트랙터, 잡초 제거기와 같은 농기계는 물론이고 비료조차도 보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당시 고려인들의 근성으로 농장의 모든 지표는 상승 곡선만을 그리고 있었다. 그리고 북극성 콜호즈뿐만 아니라 다른 고려인 콜호즈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었다.
김병화 선생을 도와준 능력있는 25명의 고려인 지도자들도존재했다. 이들 또한 ‘사회주의 노동영웅’으로 불려졌다. 그들은 전영섭, 김창세, 니콜라이 리, 니콜라이 김, 세르게이 허등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들 대부분은 벼농사와 면화 재배 전문가인 사람들이었다. 특히 김창세 선생은 농학사의 학위를 갖고 있었고, 니콜라이 김은 벼나 면화 재배 이 외에도 가축 사육 전문가로도 활동했었던 인물이었다. 아울러 소피아 김, 갈리나 김, 예카테리나 김 등의 여성 농민도 면화 재배에 힘써 높은 생산성을 나타내게 된다. 자연히 북극성 콜호즈의 높은 생산성과 뛰어난 지도력은 국가 차원에서 공식적으로 인정되었다. 그 뒤 북극성 콜호즈는 주변의 부진한 콜호즈들을 흡수 및 통합을 거듭하여 면적과 구성원을 늘려 나갔다. 1953년에 아훈바바예프(Ахунбабаев) 콜호즈를 마지막으로 편입하였는데, 당시 경작지는 강제 이주 직후의 경작지 면적에 비해 3배 이상인 2,480ha까지 늘어났고, 주요 작물들은 점차 면화로 바뀌었다. 또한 콜호즈 내부에는 대부분의 시설을 갖추었다.
1962년에는 11년제 학교, 문화회관, 사무실, 상점, 제분소, 구두 수선소, 책방, 탁아소, 유치원, 병원, 기계 수리소, 창고, 자동차 정비소 등 대학을 제외한 거의 모든 시설을 갖춘 공동체로 운영되었고, 그 뒤에는 구성원들이 생활의 불편을 겪지 않는 다민족 공동체로 발전했다. 김병화 농장의 주민들의 문화 생활은 노동시간이 끝난 이후 이루어졌다. 한복 입은 공연팀은 멀리 공연 나가기도 했는데 모든 고려인들이 노동에 동원된 것은 아니었다. 예술성이 뛰어난 사람은 계속 예술업에 종사하게 했고 공부 잘하는 사람은 공부에 매진하도록 했다. 스포츠에 뛰어난 사람은 운동선수로 성장시키기도 했다. 특히 한복 입은 공연팀은 공연 예술만 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소비에트 전 지역을 다니면서 숱한 공연을 했고 북한 평양도 다녀온적이 있다 한다. 이후 김병화 선생은 사망하기 전까지 레닌훈장, 10월혁명훈장, 노력적기훈장, 존경징표훈장을 받았는데 이 훈장들의 훈격은 소련에서도 상위 클래스였다. 레닌훈장은 그 중에서도 4회를 수여 받았다. 1974년 5월 7일 북극성 농장의 대표인 김병화 선생은 위암으로 별세했다.
북극성 농장은 우즈베키스탄 법령에 따라 이중노력영웅의 이름을 기려 김병화 농장으로 개칭되었으며 거리의 이름은 선생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서 김병화로(路)로 명명되었다. 김병화 선생 이 외에도 1950년대까지 우즈베키스탄에서 콜호즈 지도자로 높은 생산력을 보여준 공로로 사회주의 노력영웅 칭호를 받은 고려인들로 폴리타토젤 콜호즈의 황만금, 프라우다 콜호즈의 드미트리 김, 드미트로프 콜호즈의 안톤 최, 스베르들로프 콜호즈의 신종직이 있었다. 그 당시 이 칭호를 받은 이들이 소련 전체를 통틀어 200명 조금 넘는 정도였다는 것을 감안하면 소련 내에서 소수 민족 고려인들의 저력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우즈베키스탄 최초의 옥수수 농장이 바로 김병화 농장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옥수수 재배법을 우즈벡 인들에게 가르쳐준 것도 고려인들이다. 김병화 선생은 우즈베키스탄 고려인 성공 신화의 상징이었지만 우즈베키스탄 정부의 탈(脫) 소련 정책으로 인해 그의 명성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고 있다. 소련 정부가 붙여준 ‘김병화 농장’은 ‘용우치콜리 농장’으로 바뀌었고 김병화의 이름을 딴 고등학교와 거리도 다른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따라서 우즈베키스탄 내 고려인들은 구 소련시대에 대한 향수가 매우 강한 편에 있다. 소비에트 시대에 권력의 핵심인 소련 정부로부터 인정을 받고 정치, 경제적으로 안정된 삶을 누렸던 고려인들은 구소련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어쩌고 보면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고려인들은 핏줄의 근원인 한반도에 대해서도 대단한 애정을 갖고 있다. 심정적으로는 조상의 고향인 북한에 더 가깝지만 대한민국에 대해서도 모국으로 여기고 동질성을 확인하려 한다. 그렇지만 세대를 거쳐 가면서 한국어를 구사할 수 있는 수가 줄어들었고 우즈베키스탄 문화에 동화되는 이들도 많아지고 있다. 그러나 최근 대한민국과의 연결고리를 지탱할 수 있는 한국어 교육과 한국 정부의 문화지원 정책 등으로 인해 요즘 고려인 젊은 세대들로부터 다시 한국어와 한국 문화가 부흥기를 맞고 있다. K-POP, K-드라마, K-영화 등 한류가 잇달아 중앙아시아에 상륙하면서 이를 향유하는 요즘 고려인 세대들이 늘고 있다.
자신들의 모국인 대한민국에 이렇게라도 관심이 증폭되어 오히려 한류로 인해 자신들의 정체성을 스스로 찾아가고 있는 것이다. 앞으로도 이러한 문화적 지원을 더욱 늘려 우리의 정체성을 일깨워 준다면 조상들의 조국인 대한민국을 더욱 자랑스러워하지 않을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