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7(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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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심 가문은 현대 요르단의 왕가로 나타난다. 과거에는 헤자즈 왕국,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 이라크 왕국의 왕가이기도 하였다. 하심 가문은 이슬람의 선지자 무함마드의 후손으로 알려져 있다. 가문 이름의 유래는 무함마드의 증조부 이름인 “하심”에서 유래된다. 다만 무함마드의 증조부 씨족인 “하심 씨족(بنو هاشم‎, Banu Hashim)”과 현대에 지칭되어지는 하심 가문(الهاشميون, Hashemites)은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들 하심 씨족들은 하심의 자손들 전반적인 면들을 포함하지만, 하심 가문은 메카 아미르 작위를 세습했던 무함마드의 혈통만을 중시하고 더 좁게는 아라비아 반란을 일으켜 이라크와 요르단의 건국 시조가 된 후세인 빈 알리(Husein Bin Ali, 샤리프 후세인)의 후손들만으로 한정된다. 


화면 캡처 2025-06-05 063619.png
사진 : 요르단의 하심 가문 페밀리,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1916년, 메카의 태수였던 하심 가문의 후세인 빈 알리가 토착 군대를 이끌고 영국과 동맹을 맺었다. 이들은 아라비아 반란을 성공시키면서 오스만투르크를 축출하고 나라를 세웠다. 1924년 3월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칼리프 제도가 폐지되자, 후세인 빈 알리는 스스로 칼리프임을 선포하게 된다. 이른바 요르단과 시리아 지역의 샤리프 칼리프 왕국이라 하는데 국제적인 인정은 받지 못했다. 그러다가 같은 해 10월, 후세인의 칼리프 참칭을 빌미로 이븐 사우드(Ibn Saude, 사우디아라비아 왕실 사우드 왕조의 시조)가 침략해왔고, 패배가 임박하자 장남인 알리 빈 후세인(Ali Bin Husein)에게 양위했다. 하지만 이듬해 결국 사우디아라비아에 정복당하면서 헤자즈 왕국은 멸망하게 되고, 헤자즈 왕실은 각각 요르단과 이라크로 도피했다. 


헤자즈 지역을 정벌한 네지드 토후국의 경우, 1926년 헤자즈-네지드 왕국(مملكة الحجاز ونجد)으로 개편했다가 2개 국가 왕위를 1932년에 통합하여 현대 사우디아라비아 왕국을 수립하게 한다.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은 단 4개월 동안만 존속했던 것으로 보인다. 시리아 아라비아 왕국은 1918년 10월 5일 건국을 선언했고, 1919년 11월 26일 영국이 시리아 남부 지역에서 철수하자 토후국으로 독립하게 된다. 그리고 1920년 왕국으로서 새롭게 건국되었다.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Faysal I)가 국왕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사이크스-피크 협정 당시 1920년 7월 25일 프랑스 제3 공화국에 항복하여 멸망하게 된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전하자, 1920년 세브르 조약에서는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영국에게 이라크의 지배권을 위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영국은 영국 위임통치령 메소포타미아를 설립하게 된다. 


1921년 카이로 평화회담을 통해 이라크에 군주제를 건설하기로 합의했다. 이들은 하심 가문의 파이살 1세를 국왕으로 옹립하여 이라크 왕국을 건설하게 하였다. 파이살 1세는 이라크에 온 적도 없는 수니파 무슬림으로 영국에서 일부러 내세운 인물이었다. 파이살은 얼마 전까지만 시리아 왕국의 왕이었지만 영국은 시리아를 프랑스한테 넘기기로 약속한 상태였고 시리아 왕국은 탄생한지 얼마 안 되어 프랑스의 위임통치령으로 복속되었다. 무함마드의 혈통이라는 명성이 있었지만 이라크 지역 주민이 아니었던 데다 실세는 영국이다 보니 초기부터 저항이 크게 발생했다. 또한 파이살은 수니파였고 이라크에는 시아파가 더 많았다. 바그다드를 비롯한 시아파 지역은 수니파 지역과 분리되어 통치되기를 바랬었지만 영국은 원활한 통치를 위해 이질적인 지역들을 한 통합했다.


영국은 파이살 1세를 자신들의 허수아비로 내세운 이후, 시아파를 대대적으로 탄압하며 수니파와 유태인, 기독교도들을 중심으로 이라크를 통치했다. 이에 반발한 시아파를 중심으로 1920년 바그다드에서 쿠데타가 발생하여 이라크인 453명이 사망하고 영국인도 2,000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는데 이 때 영국은 독가스를 살포했으며 민간인들을 공습하는 등, 잔혹한 방법을 동원하여 이라크의 봉기를 진압했다. 영국은 지속적으로 쿠르드 독립 국가 건설, 아시리아인, 쿠르드인, 기독교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관료 우대 정책을 펼쳐 시아파의 반발을 샀고 파이살 1세가 자신들의 기대와 달리 시아파와 수니파의 화해와 국방력 건설, 자주권 확보에 노력하게 되자 영국은 각 부족들의 친영국파 내각을 이용하여 국왕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1932년 이라크는 영국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획득했지만 실상은 식민지나 다름없었다.


요르단은 하심(Hashim) 가문이 다스리고 있는 아라비아 왕정국가로 나타난다. 하심 가문은 7세기 무렵 이슬람을 창시했던 예언자 무함마드가 속한 가계로서,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무함마드의 43대 손으로 알려져 있다. 역사적으로 하심 가문은 메카와 메디나를 중심으로 한 아라비아 반도 홍해 연안의 서부 지역인 히자즈에서 통치 가문으로의 역할을 해왔다. 16세기에 오스만투르크 제국은 히자즈 지역을 정복했지만 하심 가문에게 자치권을 인정해 주는 정책을 유지해 왔다. 하지만 제1차 세계대전 직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멸망하자 하심 가문은 영국의 지원 하에 히자즈 왕국(1916~1925), 이라크 왕국(1921~1958), 요르단 왕국(1921~현재) 등을 차례로 건국했다. 이 가운데 요르단은 현재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하심 왕국이다. 과거에 요르단 지역은 트란스요르단이란 이름으로 알려졌다. 트란스요르단은 ‘요르단 강 건너편 지역’이라는 지정학적 용어로 팔레스타인 지역 중 요르단 동편을 지칭한다. 1921년 요르단은 ‘트란스요르단 토후국’이라는 국명으로 영국의 보호령 하에 자치권을 인정받았다. 


1946년 5월 25일 요르단은 영국으로부터 독립하면서 국명을 ‘트란스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게 된다. 그 이후 1949년 4월 요르단은 다시 오늘날의 국명인 ‘요르단 하심 왕국’으로 바꾸었다. 요르단은 현재 입헌군주제 국가이지만 국왕은 행정 및 입법 부문에서 막강한 권한을 행사하고 있다. 요르단 국왕은 국가 원수인 동시에 최고 군사령관일 뿐만 아니라 총리, 내각 장관, 도지사 등 행정부 주요 요직에 대한 임명권을 갖고 있으며 국회 해산권을 행사할 수 있다. 요르단은 기독교도, 유태교도, 무슬림이 聖地라고 부르는 지역의 교차로에 위치하고 있어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다. 또한 요르단은 중요한 미국의 우방국으로서 아라비아 지역의 국가 중 이집트와 더불어 유일하게 이스라엘과 평화조약을 체결한 국가이기도 하다. 1946년에 독립한 이후 요르단은 총 4명의 왕이 통치했고 세 차례 왕위 계승 과정을 거쳤다. 형식상 요르단의 하심 왕가는 부친이 사망한 이후 장자가 왕위를 계승하는 전통을 유지하고 있지만 그 과정을 들여다보면 결코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1951년 건국자이자 1대 국왕인 압둘라 1세가 암살로 사망하자, 그의 아들인 탈랄 빈 압둘라(Talal Bin Abdullah)가 왕위를 계승했다. 하지만 탈랄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는 사유로 즉위 13개월 만에 왕위에서 물러났고, 그의 아들인 후세인 1세가 1952년에 왕위에 올랐다. 후세인 1세는 1952년부터 1999년 사망할 때까지 47년 동안 요르단을 통치했고, 1965년에 자신의 동생인 하산 빈 알 탈랄(Hassan Bin Al Talal)을 왕세제로 책봉함으로써 자신의 후계자로 삼았다. 하지만 후세인 1세는 사망하기 2주일 전인 1999년 1월 25일에 34년 동안 왕세제를 역임해 왔던 하산을 전격 해임하고 자신의 큰 아들인 압둘라 2세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현 국왕인 압둘라 2세는 부친으로부터 왕세자로 책봉된 지 2주 후인 1999년 2월 7일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압둘라 2세의 왕위 등극은 스스로도 전혀 예상치 못했을 정도로 매우 급작스러운 사건이었다. 그는 후세인 1세의 장남으로 태어나긴 했지만,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이 이미 왕세제로 책봉되어 있던 상황이었다. 더구나 압둘라 2세의 모친은 영국인 출신으로 후세인 1세의 두 번째 아내였으나 1971년에 이혼한 상태였다. 


후세인 1세는 말년에 네 번째이자 마지막 아내였던 누르 왕비를 총애했고, 따라서 삼촌인 하산 빈 알 탈랄에게 어떠한 사건이 생길 경우, 그녀의 장남이었던 함자 빈 알 후세인(Hamza bin Al Hussein)이 차기 왕위에 오를 것이 유력했다. 1999년 후계자 선정 문제를 두고 후세인 1세는 많은 갈등을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사망하기 전에 후계자를 동생 하산 빈 알 탈랄 대신 자신의 아들 중 한 명을 선택하고 싶어 했다. 당시 그는 누르 왕비의 청원에 따라 그녀의 아들 함자를 후계자로서 신중히 고민했다. 하지만 당시 함자의 나이는 18세에 불과하여 왕위를 승계받기에는 무리였다. 결국 그는 37살이었던 장자인 압둘라 2세를 후계자로 지명하는 대신 함자를 차기 후계자로 삼을 것을 유언으로 남겼다. 압둘라 2세는 부친의 유언에 따라 그의 이복동생 함자를 1999년 2월 7일 왕세제로 책봉했다. 그러나 2004년 11월 28일 압둘라 2세는 전격적으로 함자를 왕세제로부터 해임했다. 


당시 그는 함자에게 서한을 보내 “상징적인 직위 때문에 너는 행동의 자유를 구속받아 왔다. 그리고 그것으로 인해 네가 충분히 자격을 갖추었음에도 불구하고 어떤 책무도 맡기지 못하게 되었다 (Because of your symbolic position, you have been restricted in your freedom of action. And because of that, you have not been given any responsibility, even though you are more than qualified to do so).”고 말하며 해임의 사유를 밝혔다. 그는 함자의 해임 이후 약 5년 동안 후계자 자리를 공석으로 남겨 두었다가 2009년 2월 당시 15살이었던 장남 후세인 빈 압둘라(Hussein bin Abdullah)를 왕세자로 책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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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까지 남아있는 무함마드의 직계, 현 요르단 하심(Hashim) 왕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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