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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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명의 홍광제가 패몰한 이후 융무제(隆武帝), 영력제(永曆帝)와 명나라 부흥군의 분파가 각지에서 서로 즉위를 하고 청나라에 대항했으나 전투를 벌이는 곳마다 패배하고 1659년 영력제는 따웅우 왕조의 치하인 미얀마로 도주했으나 1662년에 그곳에서 미얀마가 오삼계에게 넘겨주게 되면서 그는 처형되었고 결국 남명의 잔존 세력들은 완전히 멸망했다. 남명의 부흥을 주도했던 인물 중 정성공(鄭成功)은 중국 본토에서 명나라의 부흥이 사실상 어려워지자 네덜란드가 식민 지배하고 있던 대만 섬을 공격해 차지하고, 그곳에서 정씨 왕국을 건국했다. 정씨 왕국은 명목상으로는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조를 유지했고, 삼번의 난 때는 오삼계 등과 협조하여 파병해 복건성에서 청나라 군과 교전하기도 했다. 남명이 패망한 원인을 두고 당시 남명의 지식인인 황종희(黃宗羲 1610~1695)와 전징지(錢澄之 1612~1693), 구식사(翟式紹)와 왕부지(王夫之 1619~1692) 등은 “청나라에 맞섰던 이른바 반청 의병들은 대부분 도적이나 불량배들로 규율이 문란하고 노략질을 저지르니 백성들이 그들을 따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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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정화의 원정로와 남방화교 2세대의 진출도, 출처 : Google Earth , Structures and Anomalies의 페이스북 페이지

 

혹은 부자들이 부리던 종이나 소작인들이 주인들의 강요에 의해 억지로 나선 것이라 사기가 낮고 겁이 많아서 제대로 싸울 수 있는 자가 매우 적었으니, 어떻게 강력한 청나라 군대를 이길 수 있겠는가?” 라고 평가했다. 남명에 가담한 세력들이 나약한 도적이나 불량배에 불과했으니 남명이 망했음은 당연하다고 혹평했다. 남명 정권이 멸망하자 청나라의 지배를 거부한 명나라 유민들은  배를 타고 동남아시아로 내려가 각 지역에 정착하면서 화교 2세대가 되었다. 15세기부터 동남아시아에 유입된 화교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을 차지하고 있으며 부(富)의 80%를 장악하고 있는 실정이다. 전 세계에서 화교의 영향력이 가장 큰 나라를 꼽으면 단연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라 볼 수 있다. 말레이시아에서는 인구 면에서 말레이계에 밀려 정치에서는 약간 밀렸지만, 말레이시아 상권의 대부분을 장악하고 있다. 더불어 화교 모임인 ‘죽망(竹网)’도 잘 갖추어진 나라다. 동남아시아 중, 근세 국가들이 건국 초기에도 화교의 세력들은 막강했다. 


정화의 대항해 이후, 가장 먼저 동남아시아에 화교들이 자리 잡은 지역은 말레이 반도 지역으로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자파히트 왕국이 지배하던 곳이었다. 그러나 말레이 반도 지역은 마자파히트가 세력을 잃은 뒤, 말라카를 중심으로 말라카 술탄국이 탄생했다. 말라카 술탄국은 말라카를 중심으로 해상 교역을 펼쳤고 당시 말라카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이들이 정화의 대항해 이후 남겨진 명나라 한족들의 후손들이었다. 이들은 현지인과 융합 정책을 펼치며 살아남았고 결국 혼혈 화교들이 말라카의 경제를 주도하게 된다. 당시에도 ‘정치는 말레이인이, 경제는 화교들이’라는 원칙도 나타났다. 하지만 화교에게 쏠려 있는 경제 금융은 좀처럼 풀리지 않았고, 민족 간 빈부 격차는 더욱 심해졌다. 당시 말라카 술탄국 뿐 아니라 조호르 술탄국이 주장한 말레이족과 한족의 ‘민족 융합’ 정책은 무색해졌다. 특히 페낭 섬의 경우, 말레이 반도의 작은 중국이라고 불릴 정도였다. 당시 페낭 섬 인구가 약 5만 명인데, 그 중에 1만 5천 명이 중국계로 나타났다. 


전체 인구의 72%를 중국계가 차지하고 있었던 셈이다. 페낭 섬의 중국인은 16세기 초부터 명나라에서 해금령이 떨어질 때, 중국 남쪽 광동(廣東) 성과 복건(副建) 성에서 해금령을 피해 대규모로 이주해 왔다. 당시 중국계 이주민 대부분이 무역 활동에 종사했다. 땅과 집을 살 돈이 없는 가난한 화교 노동자들은 바다 위에 나무로 집을 짓고 살았다. 페낭 섬과 말레이 반도 사이에 연결된 배가 출발하는 페리 승강장 주변에는 아직까지 화교 수상(水上) 가옥촌이 남아 있다. 정화의 선단이 아프리카에 도달했다는 기록도 사실상 남아 있지 않지만, 정화의 항해와 관련하여 아프리카의 기린으로 보이는 동물의 그림이 남아 있고 케냐의 한 부족 가운데 조상이 중국인이었다는 전설이 내려져 오고 있으며, DNA 조사 결과 실제로 중국인의 DNA가 있는 것도 확인되었기 때문에 최소한 동아프리카에 도달한 것은 일반적으로 인정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정화 선단의 선원들이 소말리아의 모가디슈 거리를 거닐었지만 별다른 감명을 받지 못했다는 기록과 메카에서는 깊은 인상을 받았다는 기록이 전해지고 있다. 


말레이시아와 자바, 인도, 실론, 페르시아 남부, 아라비아 반도 등의 지역은 송나라, 원나라 때 이미 해상 실크로드로 통해 많이 알려진 지역이며 중국과의 교역에 대한 기록과 유물이 많은 편이라 정화의 원정 주요 지역으로 추정되고 있는 편이다. 따라서 해당 지역에도 중국인들이 정착하여 화교 집촌인 최초의 차이나타운을 조성했을 가능성이 높다. 태국의 경우, 말레이 반도 지역에는 정화의 대원정 당시 함께 따라온 한족이 자리 잡았고 방콕을 비롯한 타이만 일대의 한족은 명나라 말기, 청나라의 남명 정권에 대한 공격을 앞두고 많은 복건 지역과 광동, 조주 지역의 한족들이 탈출하여 자리 잡았다. 이는 아유타야 특유의 외국인 기용제도와 개방적인 문화 등이 원인이었고 아울러 태국과 한족 혼혈들이 생기게 되었다. 1767년 아유타야 왕국의 두 번째 몰락 이후 점령한 버마군에 맞서 시암을 해방시킨 위대한 지도자인 탁신 대왕과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 또한 태국과 한족, 혹은 광동 조주 인들의 혼혈이었다. 


차크리 왕조는 현재까지 지속되고 있는데 차크리 왕조의 시조인 라마 1세의 모친이 중국계, 한족 출신이었다. 이들의 선조들은 1644년 이자성에 의해 멸망한 명나라 사람들이 광동, 복건, 광서 지역을 중심으로 남명(南明) 정권을 세웠던 사람들인데 조산(潮汕) 지역 사람들로써 광동인들이었다. 이들을 두고 조산화교(潮汕華僑)라 하여 차크리 왕조를 세웠던 라마 1세의 모계 혈통이 조산화교(潮汕華僑)에 있기 때문에 이들은 “왕실화교”로 대우를 받아온 것이다. 이와 같이 현 태국 왕실이 광동 화교와 혈통이기 때문에 이들은 중국이나 중국 정부와 상관없이 중국계 태국인으로 살 수 있었다. 태국인들은 안정과 포용을 소중히 여기고 있는 풍습이 존재한다. 때문에 화교들에 대해서도 따뜻하게 대해주었고 또한 왕실도 화교혈통이기 때문에 거부감이 없었다. 또 태국 정부의 동화 정책으로 인해 화교들은 쉽게 태국 국적 획득과 정치 참여 등을 자유롭게 할 수 있었다. 


태국의 화교들은 정치, 경제, 사회 분야에서 원주민인 타이족과 동등한 권리를 얻게 되었으며, 그만큼 현지 사회에 빠르게 침투하여 자리 잡았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인과 혼인하여 태국 사회에 완전 적응해 들어갔고 그들 중 상당수가 태국 이름으로 개명했다. 동남아시아에서 태국 화교들은 원주민인 타이족들과 가장 잘 동화되고 각종 소요사태 및 범죄와 같은 문제성 일들이 적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특히 제2차 세계대전 이후 태국 화교들은 정치적으로 아주 빠르게 현지 사회에서 인정을 받았고 문화적인 탈바꿈이라 할 정도로 변신했다. 그리고 이는 같은 화교 군 출신이자 군부 독재자인 피분 송크람의 적극적인 지원도 있었다. 많은 화교들은 태국에 안착할 수 있었으며 태국은 어떤 사업이든 성공이 보장되어 있는 곳이었다. 태국 화교들의 정치 참여와 활약은 기타 국가의 화교들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높은 비율과 그 효율성 또한 대단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태국의 정치 지도자들은 자신들이 화교라는 사실을 감추지 않으며 오히려 자신들이 중국계라는 것을 자랑스러워하고 있었다. 


일부 화교의 유명인들은 태국 정부의 중용을 받았고, 작위도 받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더불어 화교들이 국회의원으로 선출되고, 장관으로 발탁되었으며 또한 총리까지 맡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태국은 1932~1990년간 화교 출신 총리가 총 8명이나 된다. 1990년 이후에도 6명의 화교 총리가 배출되었다. 현재 잉락 친나왓 총리의 조상도 광동 출신이다. 1991년 태국 의원 357명 중 화교가 거의 100명에 달했으며, 당시 44명으로 구성된 정부 내각에도 중국 혈통이 반 이상을 차지했다. 2005년 탁신 총리가 연임에 성공한 후 구성한 35명 내각 중 70%가 화교였을 정도로 태국은 화교 없이는 나라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을 지경이라고 한다. 태국 외에 상당수 화교들이 많이 건너갔던 곳은 수마트라와 자바 섬 일대였다. 대부분 17세기에 이주하게 되었는데 시기는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였다. 명나라가 멸망하는 1644년을 전후하여 여러 정치적인 원인 등으로 오늘날의 인도네시아로 망명하는 중국인들이 많았다. 


북쪽의 만주족의 후금의 공격을 받게 되었고 이들을 피해 화북의 주민들이 광동과 광서로 이주했다. 이후에 혹시나 모를 남방 해안에서 왜구의 공격을 피해 1620년대부터 순차적으로 오늘날의 필리핀과 인도네시아로 이동했다. 당시 황하 이북의 한족이 남하하여 인도네시아에 이주한 중국인들은 10여만 명에 달했다. 그 뿐 아니라 명나라의 지식인 다수가 인도네시아로 망명했다. 당시 마타람 술탄국은 자바 섬과 발리 섬에 이주한 이들 명나라의 이주민들을 콘밍(Khonming)이라 부르며, 이후 대만 정씨 왕조에서 건너온 한족과 베트남이나 캄보디아에서 들어온 귀화인인 향화인(向華民)과 구분하여 대우했다. 콘밍에게는 군역과 각종 세금을 면제해주고, 명나라를 위한 마타람 술탄국의 축제 당시 그들을 참가시키기도 했다. 그런데 명나라와 청나라의 교체기에 베트남으로도 정치적인 망명을 한 중국인도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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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로 진출한 남방화교 2세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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