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키예프 루스 말기에 키예프의 한 대공이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드의 공으로 제위 시키려 했다. 이는 키예프의 다음 공후를 자신의 아들로 세습하려던 뜻이 있었던 것 같다. 그러자 노브고로트의 민회는 대공에게 사절을 보내 자신들의 뜻을 전했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에서 귀공도 또 귀공의 아드님도 바라지 않는다는 명확한 사실을 공후께 전합니다. 만약 공자께서 머리가 둘로 생각하신다면 우리에게 보내주십시오.”


위의 인용문 일화에서도 나타난 것과 같이 당시 키예프 공국 체제에서 제2의 도시로 각광을 받던 노브고로드는 키예프 공국 말기에서 몽골 지배 초기에 이르기까지 독특한 정치체제와 생활양식으로 유라시아 역사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공후의 권한이 점점 강력해지면서 전제군주가 태동하던 블라디미르 등지의 북동부 지역이나, 귀족들의 세력이 커져 귀족지배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던 남서부 체르니코프, 페레야슬라브 지역과 달리, 북부의 노브고로트에서는 시민과 민회의 세력이 강화되어 반(半) 공화제 정치 체제의 경향을 보였다. 정치체제와 시민생활은 르네상스 시기 이탈리아의 도시국가들과 흡사했다.


___.png
사진 : 노브고로드 민회,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전통사학에서 언급하기로는 노브고로드 공국의 정치, 사회 체제에 대하여 고도로 제도화된 베쩨(Вече)라는 일종의 민회와 노브고로드의 시장 역할과 더불어 행정과 사법을 관장하는 빠사드니크(Посадник), 천인대장이면서 도시 민병대의 수장인  띠샤쯔끼(Тысяцкий), 다른 귀족 가문의 일원들, 노브고로드 대주교 등으로 구성된 정부였다. 이러한 독특한 정부체제는 전제왕권을 지닌 국가들과 멀리 떨어져 있고 부유한 상인들이 많아지면서 그들의 권익을 수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다. 특히 띠샤쯔끼(Тысяцкий)는 초창기에는 군을 담당했지만 법률 및 상업적인 관리를 포사드니크에게 이양 받음에 따라 그들은 군과 경찰, 사법적인 부분은 관장하는 직책으로 변경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중세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정확한 헌정체제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그 존재가 확실한 노브고로드의 최소한 명목상으로 존재한 지도자는 노브고로드 대공 공작이었다. 노브고로드 시민들은 주위 국가들에서 명망 높은 공작을 모셔왔으며, 국력이 약해진 13세기와 14세기 초에도 여전히 외부에서 공작을 영입해왔다. 이에 대해 일부 학자들은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정부 행정의 수장이었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다양한 관리들의 정확한 권한을 밝혀내는 것은 많은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 이는 이반 3세가 침공하여 노브고로드를 점령했을 당시 다수의 문서들이 소각되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행정 수반은 여전히 대주교로 국정에 관한 회의들을 주재했으며 대주교 궁으로 알려진 다면궁에서 열린 “귀족평의회(Совет Господ)”가 존재했을 가능성이 있으나 최근 사학자인 J. 글렌버그(J. Granberg)는 실제로 그러한 기구가 존재했는지에 대해 의문을 재기했다. 글렌버그는 이러한 대주교 중심의 정부 개념의 이해를 파악할 때 역사학자들이 희박한 사료에 많은 몰입을 시도한 결과 추정되어진 것에 불과하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반론들로 인하여 노브고로드 대주교가 공국의 실제 권력자 혹은 행정수반이었는지 여부는 불확실하다. 하지만 중세 시대의 특성상 어느 경우든지 대주교가 도시의 주요한 관리였던 것은 확실해 보인다. 대주교는 노브고로드의 교회들을 감독할 뿐 아니라, 대사관을 대표하고, 세속적인 법정 판결을 감독했으며, 그 이외에도 몇 가지 세속적 임무를 맡아 수행했다. 그러나 대주교는 보야르들과 함께 노브고로드의 여러 회의들을 거쳐 그 의견들을 수렴한 것으로 생각되며, 대주교가 단독행동을 한 경우는 거의 없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특히 이러한 대주교는 외부에서 임명되지 않고 노브고로드 시민들이 투표로 선출한 후 키예프 정교회 모스크바 관구장 주교에게 재가를 받는 식으로 임용되었다. 노브고로드 대주교는 아마도 노브고로드에서 가장 부유한 단일 지주였을 것이며, 법정 수수료와 시장의 저울 사용 비용,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수단들을 활용하여 재산을 축적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 노브고로드 대주교 재산 축적의 원천은 노브고로드의 지리적 위치와 상인들과 결탁 등이 주요 요인이었다. 노브고로드는 발트 해와 지중해를 이어주는 바리야기(Барияги)에서 그리스로 가는 길의 북쪽 중심지였고 볼가 강 수로를 통해 동방과도 연결되는 교통의 요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이러한 지리적 특성은 노브고로드가 일찍부터 상업과 수공업이 발달하게 만드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이러한 경제적 부유화는 정치적인 위상도 격상시켜 키예프 대공은 대대로 자신의 아들을 노브고로드 대공에 임명하여 도시를 장악하려 했다. 키예프 공국의 전성기를 이룩했던 두 대공인 블라디미르 1세와 야로슬라프 1세도 한 때 노브고로드 공이었고, 야로슬라프 1세의 법전『루스까야 쁘라브다(Русская Правда)』가 만들어진 것도 이 노브고로드에서 주조한 것이었다.


그러나 대공들은 결국 노브로고드에서 완전히 정착하지 못하고 도시의 정치적 실권은 점차 토착 귀족층인 보야르와 상류층 시민들에게 옮겨갔다. 그와 함께 민회(民會)가 도시의 최고 권력으로 자리 잡으면서 1136년에는 민회가 공을 추방하는 역사적 사건이 일어나고 1156년에는 자신의 대주교를 선출하는 권리까지도 받아낸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정부 체계에 따른 민회(民會)가 어떠한 역할을 하는지 알 필요가 있다. 노브고로드에서 중요한 정무관으로는 베쩨(Вече ; 민회)를 주재하는 노브고로드 빠사드니크(Посадник ; 시장)가 있다. 베쩨에서는 공작 이하 여러 사람들이 모여서 세금 징수와 도시의 여러 안건과 시외의 문제들을 논하는 자리이다. 그러한 민회의 존재로 인해 공작의 주요한 결정 사항들은 대부분 시장인 포사드니크의 재가를 받아야했다. 이러한 체계는 조금씩 변화를 거듭해 14세기 중반부터는 시장을 한 명만 두지 않고, 민회에서 한번에 6명을 선출했다. 


6명의 시장은 종신직이었으며, 매해 그들 중에서 수석시장인 스떼뻬노이 빠사드니크(Степеной Посадник)를 선출했다. 이러한 민회인 베쩨의 정확한 실체 역시 불확실하나, 자유농민을 포함한 부유한 시민들로 구성된 것으로 보인다. 이 민회가 민주적 기구였는지 보야르 귀족들에 의해 주도된 것인지에 대한 여부는 여러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어 왔다. 스떼뻬노이 빠사드니크(Степеной Посадник)는 물론 노브고로드 대주교나 주교 역시 민회에 의해 선출되거나 적어도 민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시(市)는 민회를 구성하기 위하여 5개 구로 분할했고, 광범한 자율권을 가진 각각의 구는 도시의 테두리를 넘어 방사상으로 뻗어 있는 각각의 주 농촌을 관할했다. 5개 주 바깥의 새로 획득된 넓은 대지는 도시 전체가 관리했다. 노브고로드에서도 최고의 직위는 사법, 행정, 군사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대공이었지만 실질적인 권한은 앞서 설명한 것과 같이 대주교에게 있었다. 


그러나 1136년의 민중혁명이 발생하면서 민회가 대공의 권력과 활동에 세세하게 제한을 가하기 시작했다. 이후 공의 권력은 서서히 미미해지고 시민들의 세력이 강화되었으며 이를 통한 민회 역시 강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민회는 공후를 임명하고 해임했으며,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를 선출했고, 대주교 지위에 합당한 세 후보를 선출하여 사실상 대주교의 선임을 결정했다. 또한 민회는 전쟁과 강화를 결정하고, 법률 선포, 세금 조달 등을 관장하는 도시의 최고 권력이었다. 민회의 성원 자격은 도시에 거주하는 모든 자유민 가장이었으며, 단 한 사람의 시민이 종을 울려 민회를 소집할 수도 있었다. 민회에서 선출된 포사드니크는 공과 행정업무를 분담했고, 공후의 협력자 또는 부관 역할을 하면서 공후의 대한 전제적 통치에서 도시의 이익을 보호했으며, 공후의 부재 시에 역할을 대행했다. 티샤츠키는 자유민 1,000명의 대표로서 상업적 분쟁 등을 처리했다. 


대주교는 성직자 고유의 역할 외에도 세속 권력자들에게 조언을 하고 서로 적대하는 당파를 화해시키며 해외 사절단을 조직하고 거느리는 등 정치적으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여기에 또 하나 중요한 기관으로는 명사위원회가 있었다. 노브고로드와 부와 세력이 반영된 기관으로서, 귀족층, 전, 현직 포사드니크와 티샤츠키, 각 구와 거리의 대표들이 위원으로 참여했다. 위원회는 민회에서 논의 또는 제정한 법과 그에 행한 조치들을 정교하게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노브고로드 정치의 흐름을 면밀히 조절했다. 사법 체계 역시 상당히 치밀하고 인도주의적이었다. 여러 단계의 법정에 민주적인 배심원 제도와 중재 제도 등을 두어 사건을 합리적으로 처리했다. 이처럼 민주적인 제도 하에서 노브고로드는 교역도 크게 성장하고, 키예프의 유산을 승계하여 문화도 크게 발전시키면서 15세기까지 번영을 누렸다. 이러한 하나의 예로, 노브고로트에서 발견된 500여 개의 자작나무 껍질 문서들은 시민들 사이에 읽고 쓰는 능력이 널리 보급되어 있었음을 시사한다.


상공업에 종사한 자영업 상인들과 장인들도 역시 노브고로드의 정치적 문제에 참여했다. 이에 전통적인 학자들은 그들이 콘치(Kонец ; 복수형 Kонцы)라 불리는 5개 자치구에 분산하여 거주했으며 또한 그 자치구별로 상업적인 조직을 이루었다고 주장한다. 특정 골목과 거리, 도시의 어떤 기능이 집중되어 있는지에 따라 해당 골목, 혹은 거리의 명칭이 정해지기도 했다. 이러한 상인 집단들은 쏘뜨냐(Cотня ; 100인대)라는 조직을 만들어 스스로를 방어하기도 했다. 이것은 최초의 러시아에서 길드(Guild)로 간주되기는 하지만 루스 민족의 여러 나라들에 네덜란드, 독일, 프랑스, 영국 등에 존재했던 것과 동일한 성격의 길드가 존재했다는 근거는 나타나지 않고 있다. 노브고로드 중세사에서 다른 부분과 마찬가지로 이러한 상공업자들의 조직의 실체 역시 불명확하기 때문에 서유럽이나 북유럽의 보다 조직화된 길드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은 재고의 여지가 있다. 노브고로드의 골목(Alley)이나 거리(Distance)는 길드나 조합이라기보다는 단순한 행정 단위에 불과할 가능성도 있다. 


거리 조직은 자신들이 살고 있는 마을에 교회를 짓거나 돌림병일 들 때 죽어나간 이웃 주민들을 매장하거나 했다고 알려져 있지만 그 활동이 정확히 어떤 것이었는지 역시 확실하게 드러나 있지 않다. 러시아 최초의 길드라고 하는 이반(Иван)의 Cотня (100인대) 같은 경우에도 그 실체는 아직 알 수 없다. 이와 같은 거리와 골목에 속해 있는 상인 세력들은 특정 귀족 파벌을 지지하거나 그들의 이해를 보호하면서 정치적 의사 결정 과정에 참여했을 가능성이 있다. 여러 조약과 그 외의 규약들에서 상인들, 속칭 “원로(Elder)”들이 간혹 언급되기도 하지만 이러한 규약들 중 불과 100여개 정도만 보존되어 있으며 그 중 12개의 자작나무 껍질로 서술된 규약들은 12세기의 것으로 나타났고 나머지 대부분은 1262년 이후의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자료의 부족으로 인해 노브고로드의 정치 조직을 이해하고 가늠하는 것은 상당한 어려움이 따르고 있다는 것을 보여 준다. 


한편 노브고로드 공작은 다른 루스의 공국들과는 달리 세습 직이 아니었고 그 권력 역시 상당히 제한적이었지만 여전히 공작은 노브고로드 시민의 생활에 있어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100여명의 노브고로드 공작들 중 다수는 노브고로드 시민들에 의해 초빙되거나 폐위되었다. 그 중 일부는 랴드(Pяд)라 불리는 계약에 서명하면서 계약에 따른 내용들을 인정하게 했다. 이러한 랴드라는 것은 노브고로드의 보야르들의 이해를 보호하고 공작의 권리와 의무를 정해 놓은 계약으로 판단된다. 현재 모스크바 문서보관소에 보존된 랴드는 초빙된 공작 12명과 노브고로드의 관계를 서술하고 있다. 문서보관소에 서술된 12명의 공작 중 5명은 트베리, 4명은 모스크바, 3명은 리투아니아에서 영입된 것으로 보인다. 노브고로드 공작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군사적 지도자였다. 


또한 공작은 도시의 교회들을 후원하고 재판소를 유지했으며 공작이 노브고로드에 부재할 시, 공작 지위의 나메쯔니크(Намечник)나 빠사드니크가 대신 업무를 보았다. 재판에는 빠사드니크가 항상 참석했고, 빠사드니크의 승인 없이는 어떠한 판결도 내려질 수 없었다. 또한 시장의 허가가 없이는 공작이 노브고로드의 영토를 분할하거나 법을 만들 수 없었다. 무엇보다 공작은 노브고로드에 자신의 사유지를 가질 수 없었고, 노브고로드의 영토에서 세금을 걷을 수도 없었다. 노브고로드 공작은 도시에서 그에게 지불하는 돈만 받아가는 일명 월급쟁이 사장과 같았다. 여러 리아드에 의하면 공작은 노브고로드 영토 밖에서 노브고로드 시민을 체포하거나 재판에 기소할 수 없었다. 그러한 노브고로드에 공작의 거처는 두 곳 있었는데, 하나는 시장 터에 있었다. 이 저택은 야로슬라프 1세의 이름을 인용하여 야로슬라프 궁전이라 하였다. 다른 공작의 거처는 남쪽으로 수마일 떨어진 고라디쎼(Городище)였다.


이러한 노브고로드 공화국의 행정구역은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다. 공화국은 수 개의 띠샤짜스(Тысячаc, 나라의 핵심 영토)와 볼로츠(Волоц, 북부와 동부의 식민지 또는 공물을 바치던 지역)로 분할되었다. 노브고로드 시와 그 주위를 비롯한 도시들은 이러한 구역들에 포함되지 않았다. 프스코프는 13세기 이후로 노브고로드로부터 자치권을 얻어냈으며, 1348년 볼로또바(Болотово) 조약으로 독립을 인정받았다. 그 외의 다른 도시들도 노브고로드 그리고 자신들의 이웃 도시들과 연대하면서 특수한 지위를 누리게 된다. 


전체댓글 0

  • 30747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러시아 최초의 의회인 노브고로드 민회(民會)와 선거제도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