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8세기 동안, 유럽의 대외 무역은 꾸준히 성장하여 자국 영사의 보호 아래 시리아와 이집트 항구들 그리고 기타 도시에 무역업자들의 거주지가 마련되었다. 18세기에 이집트가 참여한 동양의 향신료와 실크 무역은 영국과 네덜란드의 손에 대양의 교역로가 좌우되면서 점점 감소하게 됐다. 프랑스인들의 이집트 통치는 비록 3년 만에 끝이 났으나 상당한 의미가 있었다. 서구가 큰 경제 · 사회 · 문화적 중요성을 가지고 아라비아 세계에 직접적으로 개입하는 시대를 열게 된 것이다. 프랑스 군대는 속으로는 문화적 착취, 겉으로는 부흥이란 도구로 무장되어 있었다. 프랑스가 손쉽게 승리하면서 그동안 도전이 불가능하리라 생각했던 이슬람의 우월성에 대한 환상을 파괴하게 되자 새로운 관계 설정이라는 중대한 재조정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래서 발생된 심리적 혼란은 아직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한다. 프랑스의 점령에 대하여 이집트 출신으로 이슬람 역사학자인 알 자바르티(al-Jabarti)는 이집트가 당한 충격과 프랑스와 이집트 사이의 힘의 차이를 느끼며 그 도전에 맞서려는 이집트 통치자들의 무력감을 생생하고도 자세히 기록했다.

프랑스가 철수하고 나서 이어진 무정부 상태는 1803년 발칸 지역 알바니아 출신이며,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장교였던 무함마드 알리의 등장으로 종결되었다. 그는 새로운 이집트의 통치자가 되는 것에 성공하였다. 비록 이집트의 독립과 영토를 확장하려는 그의 노력은 좌절되었지만 그 나름대로 개혁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특히 군사 분야에서 새로운 유럽형 군대를 보유하고자 경제 및 교육에서의 야심 찬 계획에 착수하였다. 산업화 정책은 실패하였으나 농업을 합리적으로 확장하는 등 봉건제도를 이집트와 시리아에서 붕괴시키기 시작했다. 신학교를 설립하고 이곳에 유럽의 교사들을 초청했다. 서구의 도서 번역을 지원하였고 장기 계획의 일환으로 유럽에 최초로 유학단을 파견했다. 면화 경작을 늘려 영국 등 서유럽과의 경제적 유대를 강화시켰다. 국내는 물론 해외 유학단의 교육을 통해 알려진 유럽의 언어와 문화들이 퍼지면서 전통적 견해는 새 문화와 견해에 충격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무함마드 알리 스스로 터키어를 구사하는 오스만투르크의 인물이지 아라비아 인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의 아들, 이브라힘은 아라비아어로 말하고 아라비아 제국의 존립에 대해 걱정했다.
시리아는 1840년 무함마드 알리 군대의 철수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복귀하였다. 하지만 봉건제도를 파괴하고 중앙 집권화 된 행정체제로 대체하는 일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후원 하에 계속되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개혁은 중앙집권화의 척도를 증가시켰다. 지방은 더 이상 군 파샤(Military Pashas)가 보유한 봉토가 아니었으며, 행정 구역은 중앙정부 관리들이 관리했다. 지주 계층은 봉건 제도상의 특권과 법의 집행력은 탈취 당했더라도 사회 · 경제적 우월성은 보유했으며 경제 및 행정 분야에서 지배 계층으로 남아 있었다. 한편 유럽의 경제 활동은 새로운 국면에 돌입했다. 유럽인들은 더 이상 무역에 크게 매달리지 않았다. 자원과 서비스, 특히 통신의 개발과 통제에 관심을 가졌다. 바스코 다 가마 시대부터 유럽은 무역이든, 전쟁이든, 인도를 접근할 때 희망봉을 경유했다. 그러나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은 새로운 가능성을 제시했다. 계절풍의 영향을 받지 않는 증기선의 출현으로 현실화될 수 있었다.
유럽의 선박들은 인도의 제품을 수세기 동안 홍해와 걸프 만을 관통하여 바스라, 제다, 수에즈 시장으로 가져갔다. 영국 회사들은 인도에서 바스라와 수에즈까지 선박 운송 업무를 했다. 그 운항의 안전을 위해 영국과 인도의 해군이 아라비아 해에서 해적 행위를 진압하고 동시에 석탄 공급 항구와 전략적 감시소들을 획득하였다. 영국은 이 지역에서 자신의 정치적 패권을 확립시켰다. 1869년 11월 17일 역사적인 수에즈 운하의 개통으로 이집트는 이집트-홍해 루트가 복원되면서 요충지임을 다시 확인했지만 영국이 이집트에 대한 관심을 더욱 갖게 만든 사건이기도 했다. 아라비아 지역에서 통신의 발달은 더 지지부진했으며 시기도 늦었다. 프랑스는 시리아에서 도로와 철도를 건설했고, 터키는 다마스쿠스와 메디나를 잇는 히자즈(현재 사우디아라비아 서남부)철도 건설에 공헌했다. 또 독일이 바그다드 철도를 1914년에 대부분 완성하는 등 이 지역에서 항구, 교량, 운하, 전신 및 기타 서비스 분야가 발전했다. 이러한 방대한 개발은 본질적으로 운송에 관심을 둔 것이었다. 경유하는 국가들에게는 제한된 이익이 주어졌다.
따라서 아랍 지역의 주요 자원 개발은 발전이 크게 이루어지지 못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새로운 장비의 출현으로 관개 사업이 빠르게 발전하고 거대한 시장 접근을 가능하게 한 새 철도와 도로, 항구 때문에 이집트에서 면화 및 설탕의 재배가 확대된 점이다. 20세기의 변화는 혁명적이라 할 만큼 훨씬 더 급진적이다. 내부에서 연소하는 엔진이 등장해 새로운 교통수단으로 비행기, 자동차, 대형 화물차(lorry)가 추가되었다. 이와 같은 교통수단의 발달로 아라비아 이슬람 세계는 새로운 통신 네트워크를 갖추게 되었으며 인간, 물자와 사상의 급속한 교류가 가능케 되었다. 이와 함께 이 지역에서 이제 외부 세계에 가장 중요한 자원이 된 석유 개발이 이루어졌다. 유럽으로부터의 문화적 침투는 기독교인을 통해 주로 종교적으로 이루어졌다. 16세기부터 바티칸은 레바논의 마론파 가톨릭(Maronite Catholics)과 접촉을 유지하고 있었고 이탈리아와 프랑스 카푸친회(Capuchins) 수도사들과 예수회 수사들은 시리아에서 활동했다.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술탄들은 아랍어나 터키어로 된 인쇄를 오랫동안 금지하였다. 그래서 아랍어 서적은 서구에서 인쇄하여 아라비아 이슬람 지역에 배부되었다. 아라비아 세계에 등장한 첫 번째 인쇄기는 이집트의 ‘무함마드 알리 인쇄기’로 1822년에 설치됐으며 학교 교재들이 주로 인쇄되었다. 19세기, 주요 성지와 기독교 소수파들에 대한 보호 문제에 강대국들은 치열하게 경쟁하였다. 아라비아 세계에서 가장 활동적인 선교사들은 프랑스의 예수회 수사들과 미국의 개신교 선교단이었으며 그들은 아랍어 인쇄기를 설치하고 많은 서적을 인쇄하였다. 그들은 거의 잊고 있었던 자신들의 고전을 복원시켜주었고 몇몇 서구의 지식들을 아라비아 인들을 위해 번역하였다. 또한 아라비아의 신세대를 교육시켰다. 그들은 즉시 자신들의 유산에 대해 자각하였고 유럽의 영향을 의식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든 변화에 대한 사회적 영향은 기대보다는 크게 제한적이었다.
무역업자들과 지식인들로 이루어진 토종 신(新)중산층들은 주로 소수파 출신들이며 지위의 불안정과 전반적으로 주민들과 분리되기 때문에 완전한 역할을 할 수 없었다. 그러나 이 중산층은 아랍어로 쓰고 말했다. 외국 선교사들로부터 교육을 받은 시리아의 기독교인들은 시리아는 물론 이집트에 신문과 잡지사를 설립하였고 경제 및 사회 변화의 영향을 받은 주민들에게 더욱 더 광범위하게 다가갔다. 아라비아 민족주의가 태동한 것은 이 시기였다. 터키인과 이질적인 침략주의자 유럽인을 혐오하는 아랍인들은 유럽의 민족주의 개념을 수용하고 아랍어와 아라비아 문화의 부활을 인식하게 됐다. 민족주의는 무슬림의 단일성에 영향을 덜 받고 경제 변화와 서구 문화의 영향을 많이 받은 기독교인들에게 가장 강했다. 기독교인들은 옛 이슬람 공동체의 현대판 정치적 표현인 범 이슬람 사상에 동의할 수 없었다. 그 대신에 기독교인들은 종교보다는 민족적인 용어로 침략자 서양에 대항할 동양의 결속과 불쾌감을 새롭게 표현하고자 노력했다.
그러나 무슬림들은 정치와 종교를 따로 구분하지 않았다. 정체성의 기본적 정서는 종교적이고 사회적이었다. 이슬람의 완전한 사회는 때로는 민족주의 용어로, 때로는 종교적인 용어로 표현됐다. 유럽인들이 아라비아 인들을 직접 통제하자 아라비아 민족주의 운동은 가속화 되었다. 그들은 처음에는 아라비아 세계 변방에서 민족주의 운동이 발생하였는데 1830년 프랑스가 알제리에서, 1839년 영국이 아덴에서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났다. 서구 열강들은 이들을 통제하다가 나중에는 아라비아의 중심 지역들을 통제하였다. 드디어 1882년 영국은 아라비아의 중심지역인 이집트를 점령했다. 그 점령으로 인해 이집트에서는 민족주의 운동이 더욱 격렬해졌다. 이번에는 훨씬 구체적인 불만의 씨와 목적이 크게 드러났기 때문에 더욱 지역적이었다. 그 때까지 민족주의 운동은 정치계와 정당 등 정치적으로 표현됐다. 이것은 또 다른 중요한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다.
이전 사회에서 종교적으로 표출했던 방식이 회복되었다. 다시 말해서 20세기 초에 아라비아 반도에서 와하비야 운동이 다시 전개되었던 것이다. 이 때는 압둘 아지즈 빈 사우드가 열렬한 와하비야 전사들과 나즈드 통치 지역을 확장시킬 때였다. 그는 하사를 1913년에 점령했으며 샴마르를 1921년에 병합했고 히자즈를 1924~25년에 병합하였다. 이후, 1932년 사우디아라비아라는 새로운 왕국을 선포하고 와하비즘(Wahhbism)을 국가의 공식 강령으로 채택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옛날 충성과 연합의 형태로 복귀하려는 호전적인 이슬람 형제단이 갑자기 등장하기 전까지 대부분의 아라비아 국가에서 보여준 주요 행동은 서구에서처럼 정치적이었다. 공공생활의 서구화는 엄청나게 피상적이었다. 진정한 사회 기반은 아직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았다. 지주와 농민 간의 실질적인 봉건적 관계는 법적으로 폐기되었으나 변한 것이 거의 없었다. 아직도 지주들은 주도권을 독점하고 있었다.
비 무슬림들로 구성된 무역 종사자들은 투쟁 전선에 나서지 않았다. 지배 계층은 이전처럼 변함없는 기본적인 문화 창출적인 면과 이해를 가지고 있었다. 권위의 상징들인 의회, 선거, 정당, 정강, 신문 및 여론에 대한 호소라는 서구식 정치적 기구와 표현들은 그대로 도입되었으나 사회현실과는 거리가 있었다.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아직도 무슬림의 감정이 우세한 것으로 드러났다. 영국이 점령한 이집트에서 대부분의 아라비아 무슬림들은 터키 쪽을 동정하며 편을 들었으나 아라비아 민족주의도 급속히 발전하였다. 1916년, 영국은 히자즈에서 아라비아의 반란을 조직화하는 데 성공했다. 즉각적인 물자 원조와 전후 아라비아 지역의 독립을 보장하는 대가로 아라비아 유목민 부대는 영국의 시리아 점령을 도왔다. 영국으로 인한 평화적인 정착은 아라비아 인들의 희망에 훨씬 미치지 못했지만 아라비아 인들에게 많은 것을 안겨 주었다. 이라크, 시리아, 레바논, 요르단 및 팔레스타인에 신흥 국가들이 설립됐으며 연합군은 터키 지배를 종식시켰다. 그러나 그토록 갈망했던 독립이 연기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위임 통치가 실시됐다.
교전 기간 중 급속한 경제 및 문화의 발달로 인해 더욱 강한 여론을 갖게 된 아라비아의 서구에 대한 실망은 일련의 활발한 민족주의 운동으로 표출됐다. 그 운동은 비록 여전히 종교적인 색채를 갖고 있었으며, 통치력과 많은 정책들이 옛 사회 질서에 의존했지만, 오히려 그 때문에 진정한 대중 운동이었으며, 교육받고 정치적 자각이 있는 소수 계층에서부터 문맹이며 열악한 환경에 놓여 있는 농민에 이르기까지 무슬림 사회의 모든 부문에 영향을 미쳤다. 투쟁은 보다 격렬했으며 지속적이었다. 정치적 목표를 추구함에 있어 민족주의자들은 대체로 성공적이었다. 곧 이집트와 이라크는 공식적으로 독립하였으며 반(反) 제국주의 주요 투쟁은 레바논,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에 집중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후, 시리아와 레바논이 독립했으며 1945년에는 아랍 연맹이 공식적으로 발족됐다. 1950~1960년대에 나머지 아라비아 국가들이 독립을 이루었고 아랍 연맹에도 가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