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6-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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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강경 쿠르드인들이 시리아 북부로 이동하고 있다. 시리아 북부와 이들이브 일대에 원래 시리아계 쿠르드인들이 존재했는데 이들과 합류하려 하는 것인데 최근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이 사형 면제를 조건으로 쿠르드인들의 무장을 해제하는 바람에 터키에서 할 일이 없어진 극단주의자들이 시리아 북부 로 이동하는 것이다. 1946년 시리아가 프랑스 식민지배에서 독립한 이래 이웃 나라 이라크처럼 다수 아랍계 중앙 정부로부터 쿠르드인들은 심한 차별과 탄압을 받았으며, 1986년과 2004년에 시리아 정부의 차별과 폭력에 견디다 못해 반정부 시위와 소요 사태를 일으키기도 했으나, 막대한 사상자들을 내고 알 아사드의 시리아 정부군에게 진압되었다. 그렇게 몇 번의 소요 사태들을 거치며 잠잠해지다시피 했었지만, 2011년 시리아가 내전에 빠지면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통제가 약화되자 시리아 북부에 살던 시리아 북부의 쿠르드족들이 2014년에 로자바라는 이름으로 자치 정부 수립을 선포함으로서 시리아 중앙 정부의 지배에서 사실상 이탈한 상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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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터키 동부 쿠르드자치구의 수도 디야르바크르의 쿠르드족 빈민촌,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당시 시리아 내전에서 IS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군과 협력했었지만, IS의 부속 세력인 HTS에 의해 시리아의 새 정권이 세워진 이후, 시리아 내 쿠르드족의 자치 승인 문제를 두고 시리아 정부와 적대 관계에 있다. 따라서 시리아 HTS 의 군대와 시리아계 쿠르드족 사이에 전쟁이 일어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에르도안은 HTS를 이용하기도 하지만 이들의 세력이 커지는 것을 적절히 견제하기도 한다. HTS가 너무 커져 버리면 터키 정부의 말을 듣지 않을테니 강성 쿠르드족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여 시리아 내 지렛대를 역할을 하게 하는 것이다. 알 줄라니가 말 안 들으면 로자바를 이용해 제거해버리고 시리아에 또 다른 트로이 목마를 수장으로 앉히는 것이다. 그 트로이 목마는 터키계 시리아인이거나, 터키의 말을 잘 듣는 쿠르드계 시리아인이 될 가능성이 높다. 에르도안의 정치력은 진짜 존경스러울 정도다. 


시리아로 합류하고 있는 터키 동부 지역의 강성 쿠르드족들은 주된 생업으로 목축을 하고 있다. 이들은 중동 외의 다른 민족과 같이 유목민으로서 생활을 영위해 왔다. 중동과 러시아, 유럽 사이에 위치한 지정학적 위치로 인해 강대국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에 이들에 대항하고 저항하는 정신이 무장되어 있다. 쿠르드족은 자신들의 국가가 없는 거대 민족이라는 점으로 인해 강대국의 이익과 쿠르드족의 독립 사이에서 때로는 협력하고 때로는 반목을 거듭했다. 쿠르드인들은 지난 100년 동안 적어도 8차례 강대국을 돕거나 반목을 거듭했었다. 과거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독립국가를 건설해주겠다는 영국을 믿고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븡괴시키는 데 일조했으나 결국 터키 독립전쟁의 결과인 로잔 조약으로 인해 배신을 당하고 흩어져 분단되었고, 틈틈히 강대국들에게 이용만 당해왔다. 1972년 냉전 시절 친미국가인 이란과 친소국가인 이라크 간에 국경분쟁이 일어났을 때 미국이 이라크 내 쿠르드인을 이용하고 막상 분쟁이 종료되자 철저히 외면했다. 이후 이스라엘이 이란 견제를 위하여 쿠르드인 일부 단체와 교섭을 했으나 이 역시 이용하는 수준에 지나지 않았다.


그러나 이와 같은 상황을 파악한 이란 팔레비 정부가 이들 단체들을 무력을 발휘해 쓸어버렸다. 이 당시 팔레비 정부가 쿠르드인을 공개 총살하던 사진이 퓰리처상까지 받았던 바 있다. 촬영자는 이름도, 정체도 철저하게 은닉되어 있었는데 촬영자의 정체는 26년이나 지난 2006년에 이란인인 자한지르 라즈미(Jahangir Razmi)라는 사진작가로 밝혀졌다. 1923년 터키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터키 정부의 세속화 정책에 반발한 남동부 지역의 쿠르드 부족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이들을 진압한 것은 터키군보다 이웃인 다른 쿠르드 부족들이 많았다. 게다가 강성 단체 PKK, 쿠르드 사회주의 노동자당을 이끌던 압둘라 외잘란(Abdullah Öcalan)조차도 오랫동안 서로 분열되어 살다보니 완전히 다른 정체성으로 변질되고 있다면서 이라크, 이란, 터키 내 쿠르드인들은 서로 간의 생각과 의식 등이 완전히 달라졌다고 한탄할 정도였다. 이는 다른 지역의 쿠르드인들과 문화적, 지역적 갈등까지 생겨 버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당연히 이라크 및 여러 지역 사막에 살던 쿠르드인들이나 이란 서북쪽 서늘한 산지에서 주로 살던 쿠르드인들, 터키나 시리아 여러 도시에 분리 거주하던 쿠르드인들에게 갑자기 통합하자 주창하면 누구를 따라야 할지 고민되는 부분이 있다. 쿠르드인은 현재까지도 내부적으로도 세력 분열을 거듭하고 있으면서 각국에서 분리주의 독립운동을 펼치고 있다. 쿠르드는 단 한 번도 통일된 공동체를 가져본 적이 없다. 터키에서도 극렬 독립파인 PKK나 반대로 자치를 주장하는 KDP 같은 단체로 나뉘어 자신들끼리 내전을 벌여 죽고 죽였다. 특히 PKK의 본산인 디야르바크르는 쿠르드인의 본거지나 마찬가지일 정도로 쿠르드 인구가 많은 곳이다. 이 도시 이름조차도 쿠르드어로 '도시'를 뜻하는 diyar와 '구리'를 뜻하는 터키어 bakır가 합쳐져서 만들어진 이름이다. 고대 시대부터 질 좋은 구리가 생산되면서 구리세공업으로 유명했기 때문에 디야르바크르가 유명했다. 특히 실탄의 겉표면을 구리로 감싸기 때문에 강성 쿠르드인들이 탁월한 구리 세공업으로 만든 실탄을 타국에 팔고 그 돈으로 더 성능이 좋은 무기들을 샀다. 


1990년 초반, 디야르바크르 부근에서 터키어를 모르던 쿠르드인 노인 유목민이 터키군에게 말을 못 알아듣는다는 이유 하나로 총살당하던 사건이 발생했다. 실제로 동부 지역은 터키인보단 쿠르드인들이 더 많고 이들은 시골 생활을 하면서 터키어를 모르는 경우가 많았다. 따라서 그런 유목민 노인을 총살한 일이었기 때문에 터키 군부에서도 강성 쿠르드 집단들이 들고 일어나 내전을 벌일까 우려했다. 이와 같은 사건은 터키 내 좌파들과 우파의 일부도 이 사건은 쿠르드인들만 분노하게 만들고 터키의 국제적 입지에 타격을 준다고 반발했다. 결국 이와 같은 비난 속에 가해자 군인이 8년 징역형을 살았으며 직속 상관들도 강등시키는 조치를 취했지만, 이 사건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을 응집하게 만든 계기가 되었다. 그 이후로 터키 내 쿠르드족들은 게릴라 유격전이나 대도시 테러 등의 활동을 지속하며 터키 정부를 끊임없이 괴롭혀 왔다. 그러지 터키에서는 쿠르드어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었고, 심지어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조차 금지시켰다. 


그런데 그와 같은 쿠르드식 이름들 중 몇몇은 터키인들도 흔하게 쓰던 이름이라서 이 문제로 야당까지도 쿠르드 고유의 이름을 짓는 것을 금지한 것에 대해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와 같은 조치는 2010년대까지 계속 이루어져 왔다. 이와 같이 터키에 저항하던 쿠르드인들을 돕겠다고 나선건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은 강성 쿠르드 집단들에게 그들을 돕겠다고 약속하고는, 오히려 터키 정부가 쿠르드인들을 학살할 때, 터키를 도우며 쿠르드인들을 배신했다. 그리고 터키 정부가 터키에 저항하던 조직 PPK의 리더인 압둘라 외잘란을 체포할 때도 모사드가 터키 정부에 정보를 제공했다는 이야기가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즉, 이스라엘은 쿠르드를 이용하고 버렸으며 국제 사회에 영향력이 있다는 이유로 끊임없이 이용하려고 했다. 아마도 시리아에 정착한 쿠르드인들을 터키 정부 뿐 아니라 이스라엘이 다시 이들을 이용하기 위해 공작을 벌일 가능성 또한 농후해 보인다. 가자 지구 진입이 생각보다 잘 안 되고 있는 이스라엘 입장에서 시리아에 모여들고 있는 쿠르드족은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에 또 다른 변수로 등장할 가능성을 배제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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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동안 외신에 알려지지 않았던 강성 쿠르드 집단과 PKK의 최근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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