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닌의 사망 이후, 스탈린이 집권하면서 스탈린은 정적을 제거하고,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기 위해 한 가지 묘안을 짜내게 된다. 이는 아직 더디게 진행되고 있는 시베리아의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정적들과 소비에트의 적이라 할 수 있는 반동주의자들, 그리고 그들의 가족 및 친구들까지 색출하여 시베리아의 노역소에 보내는 것이었다. 그와 같은 노역 행위의 중심이 바로 치타의 개발노역소, 굴락(Гулаг)이었다. 굴락(Гулаг)은 수용소총국(Главное управление лагерей)의 약자로 본래 시베리아 식민지와 불모지로 남아 있는 지역을 개척하기 위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서 정치범들과 온갖 사회문제를 일으키는 범죄자들을 대거 동원해 척박한 땅에서 무언가를 생산하게 하여 출소 시 사회에 직장을 갖고 적응할 수 있도록 돕거나, 도시 기반을 닦게하고 운하를 파는 일을 맡기면서 자신들의 잘못을 반성하고 국가와 국민에 속죄할 기회를 주었다. 게다가 범죄가 늘어나면서 수용할 감옥이 남아나지 않게 되면서 니콜라이 2세 때, 행정 수상인 세르게이 비테(Сергей Витте, 1849~1915)가 고심 끝에 고안했다.

죄수들로 하여금 시베리아를 개발하고, 자신의 잘못을 깨닫게 하면서 범죄자들의 재사회화에도 보탬이 되는 탁월한 방식이었다. 그러나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면서 스탈린의 시대가 시작되자 스탈린의 잠재적이거나 실제적인 정적들은 상당수가 처형되었고 시베리아의 굴락으로 보내졌다. 거기서 그들은 채석장과 광산에서 일을 하거나 운하 또는 시베리아 횡단철도 건설에 참여했다. 그러나 시베리아의 열악하고 혹독한 환경으로 인해 다수가 얼어죽거나 감시병들에게 죽기도 했는데 이같은 행위들을 감당하면서 노역을 강행해야만 했다. 이와 같은 노역에 시달려 사망한 자도 셀 수 없이 많았는데 혹독한 기후와 자연조건의 시베리아라는 것을 감안하면 이는 감수할 수밖에 없는 일이었다. 백해 운하, TSR 노선의 건설, 제2차 세계대전 시기 소련의 산업 생산 중 상당 부분이 이러한 죄수들의 노역에서 나온 대대적인 성과였다. 굴락에 수용된 죄수들의 노동은 의외로 소련이 경제적, 산업적으로 지탱하는데 있어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특히 스탈린 시절은 굴락이 대규모로 확대되고 생산량도 폭증했던 시기이기도 했다.
스탈린의 통치 하에 굴락의 주요 목적은 러시아 내륙의 미개발지를 개발하는 것에 중점을 두고 있었기 때문에 인권 보장이라는 것은 사치에 가까웠다. 소련의 경제 개발을 위한 재원 마련을 위해 죄수들은 금광, 목재, 니켈, 다이아몬드, 주석 등의 천연 자원 생산에 투입되었고, 그곳에서 관련 인프라와 산업도 발전시키게 되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수용자들이 특히 많이 투입된 작업은 러시아 북부 지방의 목재를 베는 일이었다. 경제개발 1차 5개년 계획으로 인해 이동된 죄수 집단들은 1934년에 우랄 목재 산업의 전체 인원 중 90% 이상을 차지하였다. 당시 우랄 공업 노동자 가운데 죄수 집단이 차지한 비율인 40~80%보다 좀 더 높은 비율로 여겨진다. 1930년에 우랄 주가 131,922명의 인원을 받아들인 것을 보면 최소한 1만 명 이상이 목재 관리 일에 투입되었다. 굴락은 계속 존속되어서 제2차 세계대전 당시 공업 생산량의 상당 부분을 책임졌으며, 이는 단순 노동에만 투입되었을 것과는 달리 소련을 이끌던 엘리트들도 상당수 굴락에 투옥되어 무기 개발과 개량을 책임졌다. 개발이 성공했을 경우에는 주로 형량이 감경 되고 봉급도 받는 일종의 특혜를 누리기도 했다.
굴락은 소련 전국에 최소한 476개의 수용소 집합체가 있었으며, 각각은 수백 개, 심지어는 수천 개의 개별 수용소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곳들에는 상당한 수의 수용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중 약 10%가 시베리아의 혹독한 기후를 이기지 못하고 매년 사망했다. 대부분 굴라크 수용자는 양심수가 아닌 범죄자였지만, 양심수들도 어느 정도 존재했다. 이들의 죄목은 무단 결근이나 좀도둑질, 정부에 대한 농담으로비난한 것에 대해 굴라크에 수용당한 예도 있었을 정도다. 정치적인 수감자의 약 4분의 1 정도는 굴락으로 별도의 재판 없이 끌려 온 사람들이었다. 공식적인 통계에 따르면 1921년에서 1953년 사이에 소련 비밀 경찰들이 조사한 경우와 관련해서, 피고인을 감옥에 들어가게 판결한 사례의 수가 260여 만 명이 넘는다고 했다. 유죄 판결을 받은 수용자들은 모든 종류의 노동과 함께 벌목을 하게 되었다. 그들에게는 시베리아 숲 벌목을 위한 정사각형 넓이의 공간이 주어졌다. 또한 그들이 작업장을 탈출하거나 빠져 나가려는 행위등은 벌목장의 모서리마다 설치된 탑들에 의하여 적극적으로 감시되었다. 이러한 소위 "탈주범"들을 총살하여 조사하는 경우, 시신이 누워있는 방향이 총살의 단서로 고려되었다.
우선 시신의 발이 수용소를 향해 누워 있고, 머리가 반대쪽으로 향하여 있는 경우는 수용소 탈출 시도의 충분한 증거로 간주되었다. 조사에 의하면, 죄수들은 보초들이 "탈주범"들에게 발포한 이후에 그 발포가 정당하다는 판단을 받기 위하여 타 죄수들이 탈주범의 시신을 간단하게 조작하도록 했다. 또한 어떤 보초들이든 탈주범에게 발포하여 총살한 경우, 그들에게 현상금이 걸려졌다. 공식적인 규율에 따르면, 수용자들이 탈주한 경우, 보초들은 벌금을 물어야했다. 탈주범을 잡은 주민들에게는 현상금이 지급되었다. 하지만 추운 지방에 위치한 굴락들은 추위와 겨울로 인하여 어떤 경우든 사망한 채 발견되어 보초들이 탈주범을 찾는 것이 크게 고려되지 않았다. 또한 총상을 입은 탈주범들은 몇 Km 지난 곳에서 죽은 채로 발견되었다. 특히 탈주범의 탈출을 알고 밀고 하거나 탈주범 검거에 공을 세우거나 수용소에 대해 특별한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자들은 특별포상과 더불어 노역에서 면제되거나 노역자들을 관리하는 간수로 승격되기도 했다. 그러한 예로 나프탈리 프렌켈(Наптали Пленкел)이라는 인물이 있다.
1923년 나프탈리 프렌켈은 밀수 관련 죄를 저질러 백해에 있는 솔로베츠키 섬(Соловецкие острова)의 노동수용소에 수감되었다. 이 섬은 절해의 고도로 죄수들이 탈출하기 어려운 곳 중에 하나였다. 솔로베츠키 수용소는 ‘슬로베츠키 특별수용소’의 약어로 슬론(СЛОН)이라 불렸는데, 이곳은 블라디미르 레닌이 정치범과 잡범들을 수용해 노동을 시키기 위해 만든 최초의 굴락(Гулаг)이었다.당시 소련의 반체제 인사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Александр Солженицын)이 이 섬에 노역자로 있었는데 그의 회고에 따르면, 프렌켈은 유태인이었다고 한다. 프렌켈은 수용소에 들어와 노역을 하면서 큰 문제점을 발견했다. 열심히 노동하는 죄수와 빈둥대며 노는 죄수가 똑같이 식량 배급을 받는 것이었다. 그는 이와 같은 문제점을 개선하는 대안으로, 노동의 결과가 많은 죄수에게는 많은 식량을 배급하고 게으른 사람에게는 배급량을 줄이는 아이디어를 제시하게 되는데 이 자체가 사실 스탈린이 추구하는 공산주의 이론과는 달랐지만 그래도 비용을 절감하는 차원에서 프렌켈의 아이디어는 참조할 만한 것이었다.
프렌켈은 그 내용을 적어 고충처리함에 넣었다. 그 문건이 수용소 감독관 겐리흐 야고다(Генрих Ягода)에게 넘어 갔다. 야고다는 보고자를 찾았고 프렌켈은 야고다에게 그 아이디어를 구체화 한 후 당의 상부에 보고서를 올렸다. 그 보고서를 공산당 제1서기였던 스탈린에게 들어가 직접 보게 되었다. 스탈린은 프렌켈을 불렀다. 프렌켈은 스탈린에게 다윈주의 이론을 설명하며 교도소 노동의 경제적 활용 방안을 설명했다. 수감자에게 능력에 따라 적절한 노동량을 배당하고, 죄수가 할당량을 충족하면 배급을 주면서 그렇지 못할 경우 배급량을 줄여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수용소에서 죽고 살아남는 문제는 죄수의 노동 강도에 의해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부분을 지적한 것이다. 스탈린은 프렌켈의 아이디어를 채택했으며 당시 10년형을 받았던 프렌켈은 1927년에 석방되었다. 스탈린은 1927년에 제1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1928~1932)을 발표하고 서유럽에 뒤쳐진 공업화를 적극적으로 밀어붙였다. 로마노프 제국 시절만 해도 농업이 러시아 산업의 대부분을 차지했었지만 소련은 스탈린의 지도 하에 공업으로 그 중심을 탈바꿈했다.
당시 당 지도부는 공업화 추진에 굴락을 적극적으로 활용했다. 반동적 정치범을 대량으로 격리시킬수 있는데다 저임금 노동력을 활용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시베리아 동토 지역의 광산 채굴과 같이 일반인이 기피하는 작업에 죄수를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시베리아 개발과 공업화 전략이 큰 효과를 얻었다. 스탈린에게 아디이어를 제공한 프렌켈은 스탈린에 의해 슬론 수용소를 최고 책임자로 임명되어 수용소로 부임하게 된다. 따라서 슬론의 수용 인원은 1927년 1만 명에서 1932에는 10만여 명으로 급격히 불어났다. 프렌켈은 슬론을 영리 기업으로 활용했다. 그리고 정부로부터 벌목 공사와 도로 건설 사업을 따내 수감자들을 적극적으로 노동에 헌신하게 했다. 한낱 밀수범에 불과했던 범죄자 프렌켈은 소련의 열악한 수용소 내 아이디어를 제공하고 그 공로로 본인이 수용소장으로 임명되어 수형자들을 지휘해 시베리아를 개발하게 했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시베리아를 개발함으로써 대조국 전쟁 당시, 나치 독일을 상대로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셈이 되었다. 그리고 굴락의 성과는 현재 시베리아 개발의 초석을 다진 셈이 되었고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 되었다.
굴락은 비인권적이며 최악의 시설이라는 비난을 받았지만 굴락이 있음으로써 사회악을 일소하고, 시베리아 개발을 앞당기는 등, 아이러니하게도 오늘날의 러시아를 있게 한 원동력이었다. 시베리아의 열악한 환경은 죄수들의 노역과 희생으로 개발되었고, 그러한 희생의 역사는 러시아 곳곳을 연결하는 철도 발전의 초석이 된다. 오늘날 수많은 러시아인들의 발이 되어주고, 열차 관광의 초석을 만들어 준 것이 굴락의 수형자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 만든 시베리아 횡단철도 및 횡단열차였다. 당시 고통스러운 환경이었겠지만 그들의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는 개발되었고, 블라디보스톡 항구는 동해와 태평양 지역까지 연결되는 러시아 극동 최대의 물류 허브가 되었다. 마치 중국이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만들어 중국의 관광지로 현재도 수많은 돈을 벌어들이고 있듯이, 수(隋)나라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건설해 강북과 강남을 연결해 후일 중국의 거대한 발전을 이루어냈듯이 굴락 또한 수많은 희생과 피로, 시베리아를 개발하면서 러시아의 발전을 이룩해낸 곳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