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를 용서하시렵니까?”… 천노엘 신부가 남긴 마지막 외침
장애인과 함께 살아낸 67년, 광주의 작은 집에서 시작된 복지 혁명
[칼럼] “사회를 용서하시렵니까?” – 천노엘 신부가 남긴 선한 외침
주제어: 천노엘 신부, 발달장애인 복지, 장애인 인권, 그룹홈, 사회적 인식 변화
사실관계 확인 키워드: 천노엘 신부 생애, 그룹홈 설립 연도, 김여아 사건, 엠마우스 복지관, 국적 취득, 탈시설화 운동
'푸른 눈의 천사'가 남긴 한 문장
2025년 6월 1일, 아일랜드 리머릭의 성골롬반 요양원에서 천노엘(노엘 오닐) 신부가 선종했다. 향년 93세. 67년간 한국에서 장애인들의 곁을 지킨 그는 생의 마지막까지 ‘함께 사는 삶’을 실천했던 인물이었다. 그가 1979년 무연고 지적장애인 ‘김여아’를 위해 묘비에 새긴 문장, “사회를 용서하시렵니까?”는 지금도 많은 이들의 가슴을 먹먹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한 참회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얼마나 오래도록 장애인을 외면해왔는지를 통렬히 드러내는 고백이었다.
‘김여아 사건’과 사목 전환의 순간
1970년대 말, 천 신부는 광주 무등갱생원에서 신자들과 함께 봉사하던 중 19세로 추정되는 무연고 지적장애 여성의 죽음을 접했다. 급성 폐렴으로 위독한 그녀는 마지막으로 “감사합니다”란 말을 남기고 세상을 떠났다. 병원 측은 시신을 연구용으로 기증하면 장례비를 지원하겠다고 제안했다. 이는 천 신부에게 인간의 존엄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살아서도 차별받은 이들이 죽어서조차 도구로 취급되는 현실. 천 신부는 이 장례를 직접 주관했고, 이후 본당 사목을 내려놓고 장애인들과 함께 살아가는 특수사목의 길을 택했다.
안식년이 남긴 전환점과 ‘공동체’라는 선택
1981년 안식년을 맞은 그는 북미와 유럽, 오세아니아의 장애인 복지 시설들을 둘러보았다. 그곳에서 본 것은 '수용'이 아닌 '공존'이었다. 특히 캐나다 라르슈 공동체에서 받은 인상은 깊었다. 발달장애인과 비장애인이 한 집에서 살아가며 일상을 공유하고, 일하고, 급여를 받는 모습은 새로운 복지 모델의 가능성을 보여줬다. 그는 귀국 후 광주 월산동의 작은 주택에서 발달장애 여성 1명, 봉사자 2명과 함께 한국 최초의 '그룹홈'을 시작했다.
'장애인과 이웃'이라는 철학의 실천
천 신부는 "장애인은 보호받아야 할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신념을 평생 실천했다. 1985년 엠마우스 복지관을 설립해 조기교육, 직업훈련, 인식 개선 활동을 전개했고, 1993년 무지개공동회를 설립해 자립 가능한 일자리를 마련했다. 1996년부터는 중증 장애인을 위한 활동센터 운영, 1998년에는 탈시설화 운동을 통해 시설 밖 자립생활의 첫 모델을 만들어냈다.
그의 노력은 제도와 정책에도 영향을 끼쳤다. 그룹홈은 2023년 기준 746곳으로 확대되었고, 발달장애인을 위한 통합돌봄 정책과 소규모 거주시설 도입은 그의 복지 철학이 실천된 대표 사례다. 그는 늘 말하곤 했다. “장애인을 대하는 사회의 ‘태도’가 문제입니다.”
‘한국에 묻히고 싶다’는 유언과 그 실현
천 신부는 고령과 건강 악화로 2023년 아일랜드로 귀국했지만, 그의 마음은 한국에 남아 있었다. 그는 “나는 한국 사람입니다. 내 가족은 광주에 있습니다”라고 말하곤 했다. 그의 유언에 따라 유해 일부는 광주 담양 천주교 공원묘원에 안장될 예정이며, 광주대교구는 연이은 추모 미사와 분향소 운영을 통해 그의 뜻을 이어가고 있다.
복지의 틀을 넘어 ‘삶의 방식’으로
천 신부가 강조한 것은 ‘시설 밖의 삶’이었다. 하지만 단지 물리적 거주의 변화가 아니라, 사회 전체의 인식 전환과 공동체적 책임을 요구했다. 그는 “장애인 없는 교회는 장애를 가진 교회”라고 말하며, 교회와 사회 모두가 약자의 목소리에 응답할 책임이 있다고 역설했다. 그의 철학은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회적 통합' 교리와도 맞닿아 있다. 복지 제도를 넘어, 장애인을 ‘곁에 계신 예수님’으로 여기는 시선 전환이 절실한 시대다.
"참고, 참고, 참고, 그리고 많이 사랑하십시오"
천노엘 신부는 늘 겸손했고, 어떤 상도 거절했다. 그는 "내가 받는 상은, 장애인들과 함께 사는 그 자체"라고 말했다. 그의 외침, 그의 웃음, 그의 묘비에 새겨진 문장까지 모두는 우리 사회가 기억하고 되새겨야 할 유산이다. "저는 장애인들을 통해 더 많이 배웠고, 더 행복했습니다"라는 그의 고백은, 그가 준 마지막 메시지다.
그는 달리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그리고 우리에게 바통을 넘겼다. 그의 외침에 우리는 이제 응답할 차례다.
천노엘(본명 오닐 패트릭 노엘) 신부
천노엘(Noel O'Neill) 신부는 지적장애인들을 위해 67년간 헌신한 '장애인의 아버지'로 불립니다.
1957년 아일랜드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1958년 전남 장성성당에서 사목을 시작했습니다.
서울, 제주, 광주 등 여러 지역에서 활동하며 신앙과 사랑을 실천했습니다.
천 신부는 국내 최초로 ‘그룹홈’을 도입하여 지적장애인들이 지역사회에서 자립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습니다.
1981년 광주에서 시작된 그룹홈은 장애인 자립생활 모델의 시초가 되었습니다.
그는 엠마우스복지관(1985년)과 무지개공동회(1993년)를 설립하여 장애인 자활을 지원했습니다.
천 신부는 "장애인은 보호 대상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는 이웃"이라는 철학으로 인권 보호와 인식 개선에 앞장섰습니다.
1991년 광주시 최초의 명예시민, 2016년 특별공로자 자격으로 대한민국 국적을 받았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