콘스탄티누스 2세 국왕은 아테네 근교 프시키코에서 1940년 6월 2일에 탄생했다. 그는 출생 4개월째 되는 해에 파시스트 이탈리아가 그리스를 침략했고, 그 다음 해, 나치 독일이 그리스를 침략하며 유년기를 피난지인 이집트와 남아프리카 연방에서 보내야 했다. 그는 1946년에 귀국하였으며, 1947년 아버지 파블로스 1세(Παύλος I, 1901~1964, 재위 : 1947~1964)가 즉위하면서 태자가 되었다. 그는 매우 뛰어난 스포츠맨이었으며 1960년 로마 올림픽 당시 요트 종목에서 금메달을 땄다. 역대 올림픽에서 다음 보위에 오를 태자가 금메달을 딴 것은 처음이며 마지막이기도 했다. 그래서 왕정이 폐지돤 이후에도 IOC 명예 위원으로 활동하여 여러 올림픽에 모습을 드러냈었던 인물이기도 했다. 1994년부터 노르웨이 국왕이자 먼 친척인 하랄 5세와 함께 국제요트연맹 공동 명예회장을 맡고 있다. 물론 하랄 5세 역시 요트 선수로 활동했지만 금메달을 따지는 못했다. 콘스탄티노스 2세와는 8촌, 그 왕비인 아네마리와는 6촌관계에 있다.
그는 1964년 3월 부왕이 암으로 승하하자 즉위하였으며, 9월 덴마크의 아네마리 공주와 결혼식을 올렸다. 콘스탄티노스가 국왕이 된 시기에는 그리스 정치에 있어 좌우 대립이 매우 극심했던 시절이었다. 즉위 한 달 전 열린 총선에서 11년 동안 그리스를 이끌어 오던 우파 내각이 패배하고 중도연합당의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가 총리가 되었다. 처음에는 젊은 국왕과 나이 많은 수상이 잘 이끌어갈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으나, 1965년 7월 그리스 군부 내 우익 세력들을 제거하려던 움직임이 있어 국방 장관의 퇴임을 결정하는 문제가 나왔을 때 오히려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1세 총리를 해임하고 같은 당 소속의 요르요스 노바스를 총리로 임명하자, 그리스는 그리스 좌파와 우파 간의 대립이 매우 심각해졌다. 이에 양파 간의 대대적인 시위가 벌어졌고 국왕을 공공연히 부정하던 좌파와 우파의 대립이 극심해졌으며 국왕이 총리를 지명하면 중도연합당이 장악한 의회가 거부하는 일이 빈번하여 왕정과 내각의 골이 깊어만 갔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자 군부의 요르요스 파파도풀로스 대령은 좌파들을 혁파해야 한다며 1967년 4월에 쿠데타를 일으켜 군사 정권을 수립했다. 당시 국왕인 콘스탄티노스 2세는 처음에는 쿠데타 세력을 지지하였으나, 같은 해, 12월 13일 근왕파 장교들과 동맹을 맺고 역으로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이와 같은 쿠데타가 실패하게 되자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일단 북부 그리스의 카발라로 파천하였다가, 이탈리아의 로마로 망명하게 된다. 파파도풀로스는 왕을 추방했지만 측근인 요르요스 조이타키스를 섭정으로 임명하면서 왕정을 없애지는 않았다. 이는 대중의 여론을 의식했기 때문이라 보인다. 이후 왕당파는 민주화 세력과 연대하여 반(反) 군사 정권 투쟁을 벌여 정권과 맞서게 된다. 결국 파파도풀로스는 1973년 7월 요식적인 국민투표를 거쳐 왕정을 폐지하는 것으로 응답했으며, 이로써 콘스탄티노스 2세는 공식적으로 폐위되었다. 그리스 군사 정권이 퇴진된 이후 새로 들어선 카라만리스 총리의 과도 정부는 군사 정권의 왕정 폐지에 대한 헌법 개정을 무효화했지만 그렇다고 1952년 제정된 민주 헌법으로 복귀하지도 않으려고 했다.
이에 따라 1974년 12월 왕정 복고 국민 투표가 있었으나 콘스탄티노스 2세는 입국이 금지된 상태였기 때문에 TV 연설로만 지지를 호소할 수 있었다. 결국 7:3으로 왕정 복고가 부결되면서 콘스탄티노스 2세는 왕위에 복위하지 못했고, 1975년에 헌법이 제정되어 현 제3공화국 체제가 출범하게 된다. 1946년에 벌어진 국민 투표에서 7:3으로 왕정이 유지된 것과는 대조적인 상황이었다. 그래서 여전히 입국 금지를 당한 채, 돌아오지 못하고 런던에서 망명 생활을 계속했으며 당시 서방 정치인들로부터도 '멍청이', '암덩어리' 등의 비난을 들으면서 생고생을 하게 된다. 그러나 1981년 2월 어머니 프레데리카 왕비가 사망했을 당시 장례식에 참석함으로 인해 당일치기 방문을 했었고, 1993년 여름에 미초타키스 총리의 배려로 일가족과 휴양 차 방문한 적이 있었다. 콘스탄티노스 2세는 결국 굴복하며 공화정을 인정했지만 그리스에서 콘스탄티노스 왕에 대한 여론은 매우 냉담했기에 요르요스 파판드레우 2세 총리 시절인 1994년에는 아예 국적까지 박탈을 당하는 수모를 겪는다. 당시 콘스탄티노스는 다른 유럽 왕들과 마찬가지로 성씨를 사용하지 않았는데 그리스 정부에서 그에게 적법한 성씨가 없다는 이유로 그리스 국적을 부정했다.
물론 콘스탄티노스 왕의 성씨가 없는 건 아니었다. 평소에는 잘 사용하지 않고 공식적으로 이름을 써야 할 때도 쓰지 않는 것이었다. 보통 가문 이름이나 영지의 이름이 성으로 사용되는게 유럽 왕실의 관례였다. 또한 왕실 재산과 관련해서도 그리스 정부와 소송을 벌였는데 그리스 정부는 제대로 된 이름이 없는 사람이 소송하는 것을 부당하다면서 소송을 받아주지 않으며 그의 갖은 수모를 주었다. 결국 그는 소송을 위해 Κωνσταντίνος της Ελλάδας (그리스의 콘스탄티노스)라는 이름으로 개명하게 된다. 그리스의 법원에서는 그의 소송을 기각했지만 콘스탄티노스 2세는 이에 굴하지 않고 유럽 인권 법원에 소송을 제기했고 오랜 소송 끝에 2000년에 그리스 내에 있는 자신의 재산을 인정받게 된다. 자산은 그리스 정부의 소유로 인정하고 대신 그리스 정부가 보상금을 옛 왕가에 지급하는 방식으로 인정한 것이다. 그리스 정계는 이와 같은 보상 과정에 대해 비웃었는데, 이는 그가 탈세한 금액이 많다고 주장한 것이다. 2004년 아테네 올림픽 당시에는 Constantino de Grecia (그리스의 콘스탄디노스)라는 이름으로 덴마크에서 외교관의 여권을 발급받아 IOC 위원의 자격으로 입국하게 된다.
덴마크는 덴마크 왕가 후손에게 자국 외교관 여권을 발급해 주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지만 이 때 여권을 발급해줄 당시 성이 데그레시아라고 비아냥거리며 물어보았고 이에 대해 그리스 방식으로 콘스탄디노스 데그레치아스(Κωνσταντίνος Ντεγκρέτσιας)라고 비꼬는 이들도 있었다고 전해진다. 이 아테네 올림픽 당시의 방문을 계기로 그는 그리스 정계와의 사이가 개선되었고 이후 런던과 그리스를 왕래하다가 2013년에 영구 귀국을 허락받아 그 뒤로 그리스 펠로폰네소스 반도의 포르토 헬리(Πορτοχέλι/Porto Heli)에 거주하고 있다. 2000년대 이후 그리스의 경제 위기 등 현재 그리스 공화국 정부에 대한 그리스 국민들의 이미지가 매우 좋지 않아지자 그에 대한 반대 급부로 옛 왕실에 대한 호감이 좀 높아졌다. 그리스 왕국 시절에는 그리스의 경제적인 기적이라고 할 정도로 견실한 경제 성장을 하고 있었기도 했다. 그러나 입헌군주제로 왕정이 복고되기까지 갈 정도로 의미 있는 수준은 아니다. 그러나 이제는 나이가 있다보니 2016년에 뇌졸중으로 쓰러진 전력도 있고, 2021년 말-2022년 초에는 폐렴 및 코로나에 걸려 병원에 입원했다가 퇴원했다고 전해진다.
그리스 최후의 국왕이지만 군사 쿠데타 이후 추방을 당해 해외 여러 곳에서 망명생활을 하며 갖은 수모를 당했고 조국인 그리스에서 조차도 그를 외면했다. 그러나 그 수모와 비아냥을 모두 이겨내고 결국 그리스로 돌아왔다. 그리스에 돌아와 현재 조용히 살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