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3-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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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라는 명칭은 고대부터 서양인들 사이에서 이란 민족, 혹은 이란 민족에 의한 고대 제국을 가리키는 말로 사용되었다. 이 명칭의 기원은 고대 그리스인들이 이란 남서부 해안 지역에 사는 사람들을 파르스(Fars)라고 부른데서 비롯되었다. 이것이 라틴어 화(化)하여 페르시아(Persia)로 변화했으며, 이 지역이 아케메네스(Achaemenes) 왕조의 발상지였으므로 아케메네스 제국의 명칭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그 후로도 1935년 3월 21일 팔레비 왕조의 레자 샤(Reza Shah)가 국호를 공식적으로 이란으로 바꿀 때까지 여러 왕조에 걸쳐 페르시아라는 국호가 사용되었다. B.C 900년에 사카 계통의 종족들이 점차 서진하면서 카스피 해 북쪽을 돌아  얌나야 문화를 영위하고 있던 민족들을 밀어내면서 또 다른 대이동의 시작이 이루어진 이후, 카프카스 지역에도 새로운 종족들이 유입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이동의 불길은 점점 커져서 B.C 9세기 내내 유라시아 전 지역을 들불처럼 불태웠다. 그 불길은 전혀 정신적이지만은 않았으며, 폭력과 유혈이 낭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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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아케메네스 페르시아의 영토 확대 과정, 출처 : WORLD HISTORY ENCYCLOPEDIA

 

극동에서 카프카스에 이르는 유라시아 땅에서 정주민에 대한, 또는 정주국가에 대한 공격과 학살이 그치지 않았다. 또한, B.C 822년 사카의 영향을 받은 서부 중앙아시아, 키질쿰 지역의 유목 부족들이 남하하여 힌두쿠시 지역을 공격했던 전쟁, B.C 824년에서 B.C 823년까지 역시 사카 종족의 대이동에 따른 영향으로 인더스 지역에서 농민들과 각 도시의 영주들이 전쟁을 벌인, 이른바 인더스 내전, B.C 821년 이란 북부에서 메디아 왕국과 또 다른 사카계 민족인 사르마트 족이 치열하게 전투를 벌인 메르브 전투, B.C 816년에서 B.C 815년까지 카스피 해 남부 타바리스탄의 도시들이 아시리아 샬만에세르 3세(Shalmaneser III, 재위:B.C 858~B.C 824)의 이민족 탄압 정책에 항거해 아브작(Abzak) 동맹을 맺고 아시리아와 싸운 ‘아브작 전쟁’, B.C 826년부터 B.C 823년까지 8차례나 벌어진 아시리아와 우라르투와의 전쟁 등 각종 약탈 전쟁도 이어 발생했다. 약탈만큼 사람들을 격정적으로 만들고, 각종 학대와 학살로 단순화하여 서로에 맞서 목숨을 걸고 투쟁하게끔 부추기는 계기도 없는데다, 당시 이미 정주 국가들은 막대한 부와 정치권력을 안고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탈취하려는, 또는 각 약탈을 빌미로 상대 도시와 국가를 정복하려는 세속 권력의 속셈이 함께 어우러지면서 많은 학살을 당하게 된 것이다.


주 전장지인 서부 이란 지역의 경우, B.C 815년 9월에 메디아와 하나의 잠정적인 협정이 맺어짐으로써 사태가 극단을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흐샤트리타(Khshathrita)를 이어 메디아의 왕으로 즉위한 데이오케스(Deiokes)는 젤리라바트(Cəlilabad)에서 메디아와 사카의 일족인 파르시의 대표를 불러 모아 일정한 타협을 모색했으며, 그에 따라 파르시 족이 메디아 왕국의 영토 내에 거주하는 권리가 인정되었다. 그리고 ‘각 지역의 주민의 신앙은 지역 통치자의 신앙에 따른다(Cuius regio, Eius Religio)’는 원칙이 수립되었다. 이는 “하나의 국가, 하나의 신앙”을 고집했던 데이오케스의 노선이 포기되었으며, 지방에 정착한 파르시 족들이 세속 권력만이 아니라 종교적인 권력까지 갖게 됨으로써 메디아 국왕에게 대항할 동기가 감소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타협에는 불만의 목소리도 많았다. 사카계에서 분리되어 남하한 파르시와 달리 메디아 남부 지역에 정착한 엘람 인들은 여전히 아무런 권리를 얻지 못했으며, 영주의 신앙인 조로아스터교를 강제로 따라야 하는 지역민들의 저항도 끝이 없었다. 


비록 파르시에게 양보를 했다고는 하지만 기존의 메디아 시민들이 파르시와 통혼하는 일을 차단함으로써 결국 메디아의 왕은 파르시 인을 후원하고 있음을 분명히 했다는 점도 불만 요소였다. 메디아 왕국은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의 보호자로서 수메르 국가들과 불가분의 관계를 유지해온 아시리아와 소수의 북방 메소포타미아 원주민들이 이미 주민의 다수가  버린 제국을 통치한다는 정치적인 난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한편으로 당시의 중동은 정주민과 유목민들이 전쟁을 부추기는 한편, 약탈을 빌미로 전쟁을 더 많이 일으키려고 하는 경향이 함께 존재했다. 그리고 그것은 경제, 정치를 놓고 말해도 비슷했다. B.C 9세기 초까지는 메소포타미아 문명이 가져온 상업적인 부흥으로 고대 중동의 경제는 호황이었다. 그러나 중엽부터는 양상이 달라졌다. 대규모의 귀금속들이 메소포타미아에서 유입되면서 다량의 인플레이션이 생겨났고, B.C 8세기로 넘어가던 때를 전후하여 중동이 소빙하기에 들며 농업 생산력은 크게 떨어졌는데 인구는 마침 급증해 있어서 식량 사정이 심각해졌다. 여기에 각종 전염병까지 창궐했다. 당시 중동의 도시 인구의 4분의 3이 재산이 전혀 없는 무산자였으며, 바빌론의 경우 B.C 7세기 중엽에서 말엽까지 45,000명이던 주민이 기근과 전염병으로 25,000명까지 줄어드는 참상을 보였다. 


한편 불어난 귀금속을 믿고 사치와 세력 증대를 위해 사치와 낭비를 일삼던 수메르의 왕후 귀족들은 어느새 자신이 빚에 올라 있으며, 농민들의 세입은 크게 줄어든 사실을 발견했다. 이를 극복하고자 그들은 매우 어려운 농민의 삶을 더욱 어렵게 했는데, 더 가혹한 세금을 물리고, 빚을 빌미로 자유농민들의 신분을 농노로 추락시키고, 그리고 전쟁을 벌여 이웃의 물자를 강탈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군사기술의 발달이 개재되었다. 역청을 발라 석성을 쌓는 축성술이 개발되자 공성전에는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병력과 물자가 필요해졌고, 따라서 공격과 방어 비용이 모두 크게 늘었다. 전격적으로 적의 도시를 함락시키는 일이 어려워지면서 여름철만이 아니라 일 년 내내 병력을 동원하여 포위전을 전개하는 경우도 늘었다. 이렇게 되자 경비는 늘어난 병력 수요를 고대적인 군역 체제가 충당하지 못함에 따라 일부에서는 상비군이 출현했고, 그것을 감당하기 어려웠던 도시 국가 왕들은 전쟁 때마다 병사들을 모집해 용병대를 운용했다. 이 역시 결국에는 돈을 필요로 했다. 그래서 당시의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후와 귀족들은 하나의 전쟁에서 이기고 그 전리품으로 각 귀족들의 부채와 용병의 급료를 지불하고 나면 다시 가난해져서 또 전쟁을 벌여야만 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훨씬 힘든 측은 농민이었다. 전쟁은 그들에게 무거운 세금과 강제 징집을, 그리고 화제로 전소된 가옥과 황폐해진 밭, 강간되고 살해된 가족을 남겼다. 이렇게 전쟁으로 모든 것을 잃은 사람이 할 수 있는 일은 전쟁이었다. 병력의 수요는 늘 있었으므로 가진 것이 없는 사람들은 용병이 되어 먹고 살았고, 이를 통해 잘 하면 부유해지고 신분 상승까지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전쟁은 점점 위에서나 아래에서나 필수적인 ‘사업’이 되어갔다. 여기에 정치적인 긴장이 이란 지역과 메소포타미아와의 또 다른 전쟁의 계기를 마련했다. 수메르 도시 국가의 왕들은 엄밀히 말해 자신의 직할 도시에서만 세금과 병력 징발을 할 수 있는 상태에 불과했지만, 그 이름에 맞게 아시리아 제국처럼 단일 통치 국가로서 제국을 호령할 수 있기를 내내 바래왔었다. 그래서 국왕들 일부가 아시리아와의 동맹국이라는 것을 빌미로 그들을 압박하고 각 영지를 몰수하고 싶어 했으며, B.C 810년 이후 생긴 파르시의 존재는 각 도시 국가의 야심들에 부응해 파르시 부족들을 압박하는 선봉 역할을 했다. 반면 아시리아에 속한 북부 수메르의 국왕들은 반대로 아시리아의 간섭에서 완전한 독립을 염원했고, 그와 같은 목표 의식들은 다른 수메르 도시 국가의 국왕들도 다르지 않았다.


이렇게 메소포타미아 내에서 중앙과 지방의 긴장이 날로 고조되는 가운데 국제정치적으로도 역시 긴장이 커졌다. 이미 데이오케스 왕 때 메디아와 하나였던 파르시는 이제는 분리되었지만 그래도 같은 사카, 스키타이 민족이라는 인연으로 이란 지역에서 연대하려 했다. 그것은 메디아에게서 벗어나려 분투하던 파르시와 두 종족과 국가를 양쪽으로 상대하던 아시리아를 긴장시켰다. 특히 메디아 왕국이 조로아스터교를 중심으로 하는 더 통일된 국가로 발전할 움직임은 아시리아나 시리아와 같은 인근의 강대국들로서도 두고만 볼 수 없었다. 이미 B.C 790년대 초에는 유프라테스 강, 자그로브 산맥, 지중해와 카스피 해가 모두 일촉즉발의 긴장으로 덮여 있었다. 그리고 B.C 788년, 무려 3개의 혜성이 나타나면서 오리엔트 지역의 정치권에는 일종의 대혼란이 야기되었다. 많은 점성가들이 이를 분석하여 종교적인 설명을 내놓았으나, 종교는 종교일 뿐, 큰 사건, 한 시대가 바뀔 수 있는 엄청난 일이 벌어지리라는 예감은 많은 사람들의 불안을 야기했다. 그리고 그 예감은 정확했다.


B.C 7세기 말, 파르시 족은 중부 이란과 남부 이란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 영토의 넓이는 대략 180만㎢, 인구는 20만을 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당시 세계 인구가 1억 정도였음에 비하면 매우 소규모였다. 그 국가의 정점에 서 있던 인물인 아케메네스는 사트라프(Satraf)라 불리는 지방 총독들과 “왕의 눈”, “왕의 귀”라 불리는 첩자, 비밀경찰로 통하는 밀정들을 부리며 군림하고 있었다. 아케메네스는 그 출신이 불분명했지만 “왕 중의 왕”, “아후라마즈다 신의 대리인”으로 불려 마땅하다 여겨졌다. 그런데 이와 같은 왕 중의 왕이 수자원도 풍부하고 기름진 영토의 오리엔트에서 북적대며 거주하던, 200만의 인구인 수메르, 그리고 아시리아 제국을 정복하기 위해 아케메네스는 적극적으로 강병을 양성했다.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남쪽의 엘람과 북쪽의 메디아 왕국을 병합해야 했다. 이는 남쪽의 엘람을 정벌하여 후방의 위협을 없애고 북쪽인 메디아 왕국과 협상을 통해 통합하여 이란 자체를  통합해야 했다. 그리고 동쪽의 아리아 인의 위협에 대항해야 했다. 이는 한 국가의 체면과 위신을 지킨다는 것과 지배자는 하나여야만 하며, 반대의 목소리는 용납하지 못한다는 정치적인 논리에 있었다. 더불어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는 보잘 것 없는 무리라 하더라도 그래서 내버려 두어도 별 문제가 없고, 정복해도 별 이익이 없는 머나먼 땅으로도 대군을 파견하여 페르시아의 위세를 강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런 ‘이념적’인 문제만 걸려 있었던 것은 아니다. 페르시아 왕국은 수립된 지 아직 반세기 정도 만에 강력한 제국으로 성장했다. 그리고 그 체제는 중단 없는 정복 사업을 이어가고 있었다. 제국의 판도가 매우 넓어지고, 수많은 민족을 아우르다 보니 반란의 소지는 언제나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역참 체제와 “왕의 눈, 귀”로도 닿지 않는 먼 변방에서 일어난 반란도 빠르게 파악했다. “왕의 길”을 통해 제국의 변방에도 진압군이 신속히 투입될 수 있도록 했다. 또한 각 민족의 종교와 관습을 대부분 그대로 인정하고, 세금 등도 되도록 가볍게 해서 반란이 일어날 수 있는 빌미를 줄였다. 하지만 그래도 시간이 지나다 보면 잠복해 있던 불만세력들, 구체제의 복원을 꿈꾸는 자들이 들고 일어나기 마련이었다. 이에 맞서는 특단의 방법이 주기적인 정복 사업이었던 것이다. 왕이나 왕이 친애하는 장군이 수도에서 정예부대를 이끌고 변방에 도착하면, 변방에서는 병력을 추려 정복 군에 보태야 한다. 따라서 평화가 이어졌으면 반란의 자원이 되었을 변방의 병력이, 중앙의 통제를 받으며 변방을 새로 늘리는 일에 투입된다. 나중에 페르시아의 다리우스 1세가 그리스를 공격할 때, 복속시킨 지 얼마 안 되는 아나톨리아 지역과 바빌로니아의 군대를 몰아 정벌군을 구성했던 것과 마찬가지의 발상인 것이다. 


병력의 대부분이 차출된 변방은 원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킬 힘이 없고, 원정에 투입된 병사들은 전사하거나 ‘페르시아의 영웅’이 되어 귀환함으로써 더 이상 제국의 근심거리가 아니게 된다. 그래서 페르시아는 마치 전 세계를 정복하고야 말겠다는 듯, 잊을 만하면 새로운 정복전쟁을 일으켜야만 했다. 이후 아케메네스가 이끄는 파르시 족은 B.C 700년경 남쪽으로 이주하여 엘람 왕국의 영향력 하에 있다가, 엘람 왕국이 아시리아에 패해 멸망한 뒤 권력의 공백기인 B.C 691년, 아케메네스 왕조의 실질적인 시조인 테이스페스(Teispes) 왕자가 안잔(Anzan)을 점령하고, 부친 아케메네스(Achaemenes)의 이름을 차용한 왕조를 세웠다. 테이스페스는 왕국을 확장시켰다. 그러나 그의 사후 왕국은 둘로 분리되어 북부는 차남 아리아라메스(Ariarames)가, 남부는 장남 키루스(Cyrus)가 통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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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시아의 명칭 기원과 고대 아케메네스 왕조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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