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07-09(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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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카르파티야 지역은 루마니아 중부와 북부, 헝가리 서부 지역의 척박한 산지로 나타나지만 비옥한 우크라이나 쩨르노젬 지대와 헝가리의 푸스타 초원을 연결하는 천혜의 요충지이기도 했다. 고고학적인 연구에 의하면 자카르파티야 지역 주민들이 트라키아인과 켈트인의 영향을 받았고 스키타이계 유목민족들의 유골들이 출토되었으며, 빠르면 B.C 2세기 이후, 슬라브족이 정착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고트족, 훈족, 아바르 제국 등의 세력이 이 지역을 통과하여 로마 제국을 침공하면서 아시아계 기마유목민족들의 유럽으로 들어가는 통로가 되었다. 9세기 말엽에는 마자르족이 카르파티아 산맥을 넘어 푸스타 초원으로 진출하였다. 이후 이 지역은 헝가리 대공국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푸스타 초원의 원주민들이 헝가리인과 서로 급속히 동화되었던 것과 달리 척박한 변방 지대였던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슬라브계와 라틴계 토착민, 그리고 이주해온 헝가리인 사이의 동화가 매우 늦었다. 게다가 몽골 제국의 유럽 침공 이후로는 쿠만족까지 정착하면서 자카르파티야는 다민족들이 자리 잡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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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자카르파티야의 지도 및 자연환경, 출처 : Закарпатская область

 

그 결과로 인해 헝가리 왕국의 지배 하에서 헝가리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이 서로 뒤섞여 거주하는 독특한 문화를 지닌 지역이 되었다. 헝가리 왕국은 이 지역을 1,000여 년 가까이 지배했으나 실질적인 지배력이 점차 약해져 15세기에는 슬라브계 토착 귀족들이 주로 통치했다. 중세 헝가리 왕국의 영토가 꽤 거대한 편이었고 몽골 제국의 침공 이후, 헝가리 자체가 쇠락하면서 힘의 공백이 생겨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헝가리로부터 독립된 지역이 되었다. 이후 헝가리 왕국이 1526년 모하치 전투에서 패전함으로 인해 오스만투르크 제국에게 실질적으로 멸망했으며 헝가리인의 자치공화국인 에르데이 공국이 성립된 이후에도 이 지역은 오스만투르크의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다. 1699년에는 카를로비츠 조약으로 인해 합스부르크 제국에 귀속된 이후에 헝가리인보다는 루신인과 현지 러시아인을 위시한 슬라브계 인종이 훨씬 더 많았다.


1867년 오스트리아 제국과 헝가리 왕국 분리주의자 사이에 맺어진 대타협이 성사된 이후, 운그바르(Ungvár)를 중심으로 하는 운그 주(Ung vármegye), 베레그사스(Beregszász)를 중심으로 하는 베레그 주(Bereg vármegye), 나지쇨뢰시(Nagyszőlős)를 중심으로 하는 우고차 주(Ugocsa vármegye), 마라마로시시게트(Máramarossziget)를 중심으로 하는 마라마로시 주(Máramaros vármegye)로 분리되어졌다. 하지만 이 지역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트리아농 조약으로 헝가리 왕국은 공중 분해 당했다. 헝가리는 당시 패전으로 인해 72%의 영토를 잃어 전쟁 전 325,441km2에 달하던 헝가리의 영토는 93,073km2가 되었다. 헝가리는 64%의 인구를 잃어 2,090만 명에서 760만 명이 되었다. 그리고 국경의 변화로 인해 1,070만 명의 헝가리인 중 31%인 330만 명이 헝가리 국경 외부에서 살게 되었는데, 헝가리 고유의 영토라고 할 수 있는 부분까지 민족 구성을 핑계로 루마니아 왕국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세르비아 왕국 등으로 넘어갔기 때문이다.


이 지역 인구의 다수를 이루었던 루신인과 우크라이나인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아닌 체코슬로바키아와 협력하여 자치주를 구성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산하 자치주는 낙후되었던 자카르파티야에 급수 시설과 철도를 확충하였다. 지주들에게 몰려있던 토지를 소(小) 농민들에게 재분배하여 빈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하게 된다. 체코슬로바키아 시절 자카르파티야에는 724개의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체코슬로바키아는 소수 민족의 자치에 대해 매우 관대하였고, 그 중에서 540개는 우크라이나어(루신어), 130개는 헝가리어, 32개는 슬로바키아어로 교육을 진행했다. 이 외에도 소수의 루마니아어 및 독일어 학교와 1개의 유태인 학교가 존재하고 있었다. 이는 과거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제한적인 민족어 교육에 비해 크게 진일보한 정책으로 나타난다. 과거의 헝가리 왕국은 대타협으로 주권 대부분을 회복한 이후 급진적인 마자르화 정책을 시행하여 슬로바키아인, 루마니아인, 루신인, 우크라이나인, 세르비아인 등의 소수민족들을 억압했었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시대에는 오스트리아 제국에 속한 시스라이타니아 지역이 훨씬 자유로웠다. 


헝가리 왕국의 마자르화 정책에 크게 위협을 받은 크로아티아인들은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요청하여 헝가리 왕국과의 타협으로 인해 크로아티아-슬라보니아 왕국을 결성하여 헝가리인의 탄압으로부터 탈출하려 했을 정도였다. 이후 루신인의 자치구, 그리고 1일 동안의 존속한 독립 국가를 거쳐 1938년에 헝가리 왕국이 재점령했다. 그러나 제2차 세계대전 중 소련이 자카르파티야 지역을 재점령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영토로 편입시켰고, 이 지역에 러시아어로 카르파티아 산맥 건너편이라는 쟈까르빠티예(Закарпатье)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 이 시기로 나타난다. 소련의 스탈린은 중부 유럽에 대한 소련의 영향력 확장과 유사 시에 판노니아 평원으로 진격을 쉽게 하기 위해 카르파티아 산맥이라는 자연적으로 형성된 국경 및 장벽에도 불구하고 카르파티야 지역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편입시켰던 것이다. 이 지역은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 우크라이나의 영토가 되면서 갈등이 최고조로 치닫게 된다.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우크라이나인이 주류로 나타나고 있으나 오랜 기간 동안 헝가리 영토였던 만큼 헝가리인이나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이 거주 중에 있다. 약 15만 명 정도 되고 있다. 그 외에는 루신인, 슬로바키아인, 러시아계 우크라이나인, 독일인, 집시, 루마니아인 등이 거주하고 있다. 이 지역은 우크라이나어가 공용어로 나타나지만, 소수민족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어 헝가리어, 루신어, 슬로바키아어, 루마니아어 등의 언어도 쓰이고 있는 실정이다. 대체적으로 우크라이나어의 비중이 높으나 베레호베(Берегово)와 같은 도시는 헝가리인이 다수를 점하고 있기에 헝가리어가 통하고 있는 곳이다. 따라서 베레호베 지역에는 우크라이나어가 잘 통하지 않는다. 과거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슬로바키아 영향력 하에 있던 지역이라 대부분의 도시들이 헝가리어, 독일어, 슬로바키아어 지명을 갖고 있는 실정이다.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헝가리와 우크라니아의 외교 갈등 원인이 되고 있는 지역이다. 


헝가리계 우크라이나인 또는 헝가리인들의 거주 지역인만큼 대부분 주민들이 헝가리어를 사용하기도 하고 있는데 2017년 우크라이나에서 시행된 ‘우크라이나 국어교육 강화법’으로 인해 중등교육기관에선 우크라이나어만 사용할 수 있도록 법령을 강화했기 때문에 헝가리 정부에서 이에 반발하고 있다. 이 때문에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는 이 조치가 취소될 때까지 우크라이나를 지지하지 않겠다며 매우 강경하게 나오고 있는 입장이다. 헝가리 민족주의자들은 공공연하게 트란스 카르파티아가 헝가리로 돌아와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고, 우크라이나는 이에 대해 매우 민감하게 반응하고 있다. 2022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자 최후방이 되어 우크라이나에서 유일하게 가장 안전한 주가 되었다. 전쟁 피해도 거의 없고 공습경보조차 울리지 않았을 정도로 러시아의 공습이 전무한 지역이다. 그러나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낙후된 농촌 지역이기 때문에 타격할 만한 곳이 거의 없고 우주호로드(Ужгород) 공항 정도에 불과한데, 이 공항의 활주로 끝이 러시아를 지지하고 있는 슬로바키아와의 국경선에 면해 있기 때문에 폭격을 하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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헝가리-우크라이나의 충돌 가능성이 높은 "자카르파티야" 지역은 어떤 곳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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