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8월 소련의 붕괴 이후, 이란 국경의 북부에서 독립적인 아제르바이잔 국민 국가의 성립이 선언되었다. 남부 아제리 지역에서 그러한 사태가 발생하게 될 경우의 심각성을 인식한 이란 정권은 아제르바이잔 공화국과 적대적인 관계를 추구했으며, 특히 국영 방송국을 통해 기회가 있을 때마다 아제리의 신뢰성과 이미지, 그리고 성취를 손상시키려고 했다. 아제르바이잔에 페르시아가 영향력을 행사하기 시작한 것은 아주 오래전의 일로서, 이러한 특수한 관계의 기원을 찾으려면 페르시아 제국이 이 지역을 정복한 B.C. 6세기경까지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처음부터 페르시아 문화에 강하게 포섭되었다. 그들은 페르시아 영향으로 인해 조로아스터교를 종교로 신봉하면서 아라비아의 침략에 반대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의 이슬람화를 막으려 한 바박 반란(Babak Revolt, A.D. 816~817)의 시기 동안 중요한 점이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이 시아파 이슬람을 받아들인 것은 이 지역에 사파비 왕조(1501~1722)가 확립된 이후였다. 사파비 왕조는 모든 국민을 시아파 이슬람으로 통합시켰다. 대체로 이전의 페르시아와 오늘날의 이란은 종교 · 문화의 분야에서 아제르바이잔에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다. 그리하여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정신적인 중심은 아라즈 강 남부, 이란에 위치해 있음을 알 수 있다. 사파비 왕조는 1501년에 수도를 타브리즈(Tabriz)에 두기로 결정했는데, 타브리즈는 이란의 영토에 위치해 있지만 오늘날에조차 아제르바이잔의 전통적인 수도이다. 아제르바이잔 사람들이 아라즈 강의 양쪽 기슭에 살고 있는 것은 이러한 애착의 표현이라 볼 수 있다. 이 시기 동안 페르시아 인과 투르크 인은 이 지역에서 어떠한 종족문제도 없이 조화롭게 살았다. 이란의 사파비 지도자인 샤 이스마일(Shah Ismail)은 투르크어를 말하는 지도자로서 시아파 신앙을 추종했다. 이러한 측면은 아제르바이잔 민족 정체성의 또 다른 중요한 요소인데, 아제르바이잔 민족은 이를테면 시아파 이슬람의 영향을 받으면서도 투르크어를 사용한다는 것에 있다.
16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 동안, 타브리즈는 수차례에 걸쳐 아나톨리아 반도에서 침입한 오스만투르크의 공격을 받았다. 이에 따른 영향의 주된 결과는 투르크어에 대해 페르시아어가 우위를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오스만어는 적국의 언어로 여겨졌으며, 따라서 오스만어는 오랜 시기 동안 아제르바이잔 인에 의해 거부되어 왔다. 15세기에서 20세기까지 페르시아 인은 아르메니아 인, 쿠르드 인, 아제르바이잔 인과 공존했다. 공식적인 민족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이들 모든 민족은 자신들이 페르시아 제국에 속한다는 강한 믿음과 포용성을 가졌다. 페르시아 제국은 여러 곳에서 온 사람들이 평화롭고 조화롭게 삶을 영위한 다문화 적이고 포용적이며 관용적인 국가였다. 이란에서 팔레비 왕조(1925~1979)의 부상은 이란이 민족적으로 스스로를 페르시아 국가로 재확인한 것을 의미했다. 그 후의 이란 정부에 의해 그러한 경향이 확립되었으며 이는 현재의 이란 정부도 마찬가지이다. 오늘날 이란의 이슬람 공화국과 아르메니아 공화국 간의 관계는 매우 우호적이다. 이란은 1915년의 대량 학살 문제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는 터키와 아르메니아 간의 문제를 이용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 형성에서 다른 핵심적인 요소는 투르크의 유산이다. 오늘날 터키 정부와 아제르바이잔 정부 간의 접촉은 대단히 빈번하고 우호적이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ər Əliyev)는 터키에 대한 우호의 표시로 북부 키프로스 공화국의 승인을 고려하기도 했다. 일반적으로, 투르크 영향의 뿌리는 10~11세기에 아나톨리아에서 건너온 대규모 이주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아제르바이잔에 도착한 투르크 인은 그곳에 살고 있는 페르시아 인과 조우했다. 이와 함께 오랜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에는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가 함께 사용되는 상황에 있었다. 사실상 니잠 간제비(Nizam Ganjevi)와 같은 지식인은 투르크어와 페르시아어로 저술활동을 했으며, 따라서 관용적인 사회를 창조했던 것이다. 몽골 침략이 끝나가는 무렵인 14~15세기에 카라 코윤루(Qara Qoyunlu)와 아크 코윤루(Aq Qoyunlu) 왕조는 유명한 타브리즈 시에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했다. 이때부터 19세기에 아제르바이잔이 분할되기까지 타브리즈는 아제르바이잔인의 가장 중요한 문화 중심지가 되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위치한 타브리즈 시를 신성화했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타브리즈는 국경을 초월하는 아제르바이잔 공동체의 존재에 대한 분명한 본보기로 남아있다. 사파비 왕조를 대신해 카자르 왕조(1781~1925)가 들어섰을 때, 투르크 문화는 아제르바이잔 지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획득했다. 투르크어는 사교적인 언어로 사용되었으며, 페르시아어는 문학에 사용하는 것으로 국한되었다. 카자르 왕조의 가장 큰 실책은 러시아 로마노프 차르 제국의 이해관계와 충돌한 것이라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19세기 동안 러시아와 페르시아는 카프카스 지역의 헤게모니를 차지하기 위해 수차례 대결을 벌였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아제르바이잔 인은 페르시아가 아니라 투르크 문화에 더욱 가까이 다가가려 했다. 그들은 전체 카프카스에 대한 러시아의 식민지화에 대응해 대항 세력을 찾으려 했다. 그뿐 아니라 투르크의 민족주의 자체가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강한 투르크적인 요소는 범투르크주의에 있다. 이러한 세속적인 운동은 국가와 이슬람의 균형적인 관계를 달성하려 했다. 오늘날 이것은 여전히 아제르바이잔 인의 정체성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이에 대한 이유로 아제르바이잔에서 투르크의 영향은 페르시아의 그것과 모순되기 때문이다. 터키가 더욱 많은 영향력을 아제르바이잔에 행사하면, 이란이 영향을 미칠 여지는 더욱 줄어든다. 마찬가지로 1911년에 범투르크 운동의 결과로, 일단의 젊은 아제르바이잔 인들이 무사바트(Musabat, 평등)라는 중요한 정당을 창당했다. 이 정당은 투르크의 세속적인 민족주의에 헌신한다는 중요한 특징을 갖고 있다.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의 독립과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의 확립에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 정권은 여성에 투표권을 부여한 최초의 무슬림 국가였다. 비록 무사바트 당이 소비에트 시기 동안 합법적이지 않았지만, 특히 아제르바이잔 인들의 민족정신에는 대단히 중요한 요소였다.
오늘날 야당인 무사바트 당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세속적인 형식을 옹호한다. 다른 형식적인 부분은 이란적인 것으로서 더욱 종교적이고 이란에서 전파된 근본주의에 기초하고 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19세기에 카프카스 지역을 점령하기 시작했다. 이 시기에 이 지역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이란과 러시아 간에 충돌이 벌어졌다. 양국이 격돌한 지점은 아제르바이잔이었는데, 지금도 러시아와 이란은 이 지역에서 이해관계의 충돌을 일으키고 있다. 이란과 러시아 간의 특별한 관계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중요한 획기적인 사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제1차 러시아-이란 전쟁이 끝났을 때 이들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굴리스탄 조약을 체결했다. 1825년에 이란은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 군대에 의해 다시 패배했으며, 1828년 러시아와 이란은 평화협정인 투르크멘차이 조약을 체결했다. 이 조약은 아제르바이잔 지역을 러시아 영토와 이란 영토의 두 부분으로 분리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분할 경계선은 아라즈 강이었다. 북부 지역에 위치했던 현재의 아제르바이잔공화국은 수도를 바쿠로 정하고 러시아의 영향력 안에 잔존했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이 지역 주민은 근대 러시아 교육을 받게 된 것이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란의 영토인 남부 아제르바이잔에 대해서도 일부 경제적 권리를 보유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지배 시대는 전반적으로 아제르바이잔에게는 대단히 어려운 시기였다. 가장 잔혹한 사건 중 하나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 운동에 대한 억압이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차르에 대한 혁명의 가능성을 차단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서 페르시아나 투르크의 상징을 용인하지 않았다. 그들은 페르시아어나 투르크어를 보급하려 한 신문을 여러 개 폐간했는데, 이 신문들은 아킨치(Akinchi)나 카쉬쿨(Kashkul)이 대표적으로 강제 폐간을 당한 경우였다. 1905년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토에서 겨울혁명이 발발했다. 이 혁명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좌익 운동이 일어나는 데 도움을 주었다.
이들 운동은 몇 년 후에 볼셰비키가 공산주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주요한 기반이 되었다. 그 집단들은 사실상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의 전신이었으며, 수십 년 동안 아제르바이잔 공산당은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이끌었다. 소비에트 스탈린 시기에는 북부 아제르바이잔과 남부 아제르바이잔 간의 모든 유대를 단절시키는 정책이 취해졌다. 이러한 정책은 또한 가장 대규모 종족 집단인 페르시아 인에 기반을 두고 이란의 정체성을 확립하려 한 팔레비 정권에 의해서도 받아들여졌다. 제2차 세계대전 후, 모스크바는 남부 아제르바이잔에서 소비에트 혁명을 고무했다. 마지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것에서 순전한 아제르바이잔의 요소를 지적할 수 있다. 이 과정의 첫 번째 단계는 바박 반란이다. 수년에 걸쳐 아라비아의 지배를 받은 후,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의 점령에 반대하는 저항 운동들이 분출했다. 이 사건 이후 줄곧 바박은 민족의 영웅으로 추앙받았으며, 오늘날에도 아제르바이잔인의 성(性)으로 아주 널리 통용된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 형성에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이슬람 종교에 대한 자유주의적인 관점의 수용이다. 아제르바이잔 민주 공화국(1918~1921)은 러시아, 터키, 이란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공존했던 관용의 사례일 뿐 아니라 자유주의의 본보기임을 지적할 필요가 있다. 당시에 여성들이 투표권을 가졌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변화이다. 그런데도 이러한 경험은 소비에트 혁명과 볼셰비키의 억압으로 인해 막을 내렸다.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의 부활에서 주요한 요소 중 하나는 1994년에 휴전이 체결된 이래 아직까지 미해결 상태에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의 통제권을 둘러싼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있다. 이 분쟁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20%를 통제하는 것으로 끝났으며 100만 명에 가까운 난민을 발생시켰다. 또한 아제르바이잔의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요구는 이란 영토 북부의 아제르바이잔인 부분에 대한 민족 통합주의 요구에 의해 손상을 입고 있는 실정이다.
수년에 걸친 전쟁을 치른 후, 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아제르바이잔의 국민적 정체성을 통일시키는 주요한 정치적, 민족적 단결의 원천이 되고 있다. 오늘날에도 이 분쟁은 양측에 의해 자국의 국내 문제를 은폐하려는 의도로 이용되고 있다. 어떤 면에서 볼 때 권위주의 세력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자유주의 정부를 와해시키기 위해 이용했다고도 볼 수 있다.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불파즈 엘치베이(Abulfaz Elchibey)의 경우와 아르메니아에서 페트로샨의 경우가 그러했다. 헤이다르 알리예프와 로버트 코차리안(Robert Kocharian)은 그러한 방향에서 한 단계 후퇴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오늘날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는 정치적, 종교적 차이로 분열된 국가를 결집시키는 요소 중 하나이다. 이러한 이유로 현 정부는 국가가 겪고 있는 다른 문제를 은폐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를 조장하려고 한다. 알리예프 대통령을 비롯한 역대 아제르바이잔의 지도자들은 모든 연설, 회의, 인터뷰에서 이 분쟁을 언급하고 있다.
일찍이 소련 정부는 영토 획득을 공고히 하고 다민족으로 이루어진 제국을 통치하려는 목적으로 민족정책을 통해 행정과 문화 개혁을 단행했다. 이 개혁의 예상치 못한 결과는 민족주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는 정치 환경을 조성했다는 점이다. 소비에트 체제에서 양성된 아제르바이잔 지식 계층들은 점차 소비에트 체제에 대해 비판의 성토했는데, 그들은 진정한 아제르바이잔 정체성을 재발견하기 위해 소비에트 이전의 과거로 돌아갔다. 그렇게 되자 이와 같은 정체성은 소비에트 러시아적인 모든 요소와 이란적인 요소에서 벗어났으며 투르크의 종족적 · 문화적 유산을 크게 강조하게 되었다. 아제르바이잔 민족주의자들은 신화, 유물, 상징, 전통에 의지해 혼란에 빠진 아제르바이잔공화국에 새로운 민족-문화적 공간을 조성하려 했다. 분명한 것은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다수 지식인과 일반 대중은 터키에 대한 경외감을 가졌다는 사실에 있다.
그러나 독립 초기 아제르바이잔의 가장 영향력 있는 사회 문화적 운동이자 집권 정당(1992.6∼1993.6)으로서 PFA의 주장과 활동은 국내외에서 엄청난 정치적 반발을 불러일으켰다. 그들은 아제르바이잔의 비 투르크계 소수민족을 소외시켰고, 역내 강국들의 분노를 샀으며, 아제르바이잔 국내 정치를 급진적으로 만들었다는 것에서 큰 부작용을 낳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