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아제르바이잔의 악연은 19세기 초반부터 시작된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카프카스 지역으로 남하하여 영토를 확장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전쟁을 벌이게 되었다. 러시아는 이란 카자르 왕조와의 전쟁에 승리하면서 카자르 왕조의 근거지였던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정복하였다. 1828년에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이란 카자르 왕조는 투르크멘차이 조약(Treaty of Turkmenchay)을 통해 국경선을 확정하였는데, 이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 이후, 오늘날 이란과 아제르바이잔의 국경으로 거의 그대로 이어지게 된다. 당시 러시아 제국은 아제르바이잔의 시아파 무슬림들이 이란과 내통하여 폭동을 일으키고 반란을 획책할 것을 깊게 우려하고 있었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시아파 무슬림 종무청을 설치하여 운영하였으며 다른 한 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에서 아랍어와 페르시아어의 사용을 제한하고 대신 아제르바이잔어 사용을 장려하여 시아파 무슬림들의 억제하는 정책을 취했다. 그러나 이러한 러시아의 정책이, 아제르바이잔어가 현재 아제르바이잔에 정착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한편 조지아의 티플리스(Typlis, 트빌리시)와 보르조미(Borjomi) 등이 러시아인들의 온천 휴양지로 개발된 것과 달리, 아제르바이잔으로 러시아인들이 이민한 계기는 19세기 중반 바쿠에서 유전이 개발되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남부 아제르바이잔 일대를 통치하던 카자르 왕조가 심각한 부패와 기근 문제가 최악의 참사로 일어났고, 이를 "페르시아 대기근(Persian Great Famine)"이라 불리는데 당시 대기근으로 무려 150만 명이 아사했다. 이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 상당수가 국경을 몰래 넘어 바쿠로 모여들기 시작하면서 러시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들이 섞여 살게 되었다. 한편 아제르바이잔의 농촌 지역에서는 러시아 정교회에서 이단으로 박해받던 몰로칸파(Mолокан) 신도들이 여타 러시아 정교회 신도들과의 갈등을 피해 아제르바이잔 일대로 이주하여 정착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슬람과 몰로칸 정교회, 러시아 정교회 등이 자리잡기 시작했다. 그리고 문제는 여기서 발생했다. 당시 카스피해에서 석유가 본격적으로 산업에 차용되던 20세기 초반, 바쿠에서 기적적으로 생겨난 검은 황금인 석유는 러시아제국에게 있어 산업 경제에 큰 이익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석유가 채굴이 된다 하더라도 이 막대한 석유를 옮길 방법이 없으면, 혹은 석유 시추에 대한 기술이 없다면 소용 없는 일이었다. 이러한 핵심적인 문제에 대해 당시 기술로 본다면 석유를 이송하는 가장 쉬운 방법은 다수의 노새를 이용해 실어 옮기는 것이었는데, 이는 발굴한 노력에 비해 옮길 수 있는 양에 큰 한계가 있었던 것이다. 따라서 러시아 제국은 고심을 거듭한 끝에 스웨덴의 노벨 가문에게 도움을 요청하게 된다. 스웨덴의 노벨 가문은 여러 생각을 한 끝에 러시아 제국의 풍부한 수원의 흐름을 이용하여 편리하게 실어 나르기만 한다면 바쿠 유전이 막대한 이익으로 돌아올 것임을 확신했고, 이를 자신들의 것으로 만들기 위해 총력전을 개시하게 되는데 그 첫 번째 사업이 바로 카스피해로 연결되는 볼가 강 하구인 아스트라한 습지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이 때 볼가 강 각 곳에 카스피해에서 채굴되는 석유가 운반되기 시작하는데 이를 기준으로 볼가 강 각 지역에 운하가 만들어졌다. 현재 남아 있는 러시아 볼가 강 유역의 운하들은 카스피해의 막대한 석유를 운반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시초가 된 셈이다.
당시 다이나마이트를 발명한 알프레드 노벨은 석유 산업에 이렇게 발을 담구게 된다. 그는 서유럽에서 막대한 돈을 벌고 있었는데, 루드비히 노벨과 로베르트 노벨이 알프레드를 설득하여 석유 회사에 자금을 대게 만들었고 이를 통해 취득한 막대한 부는 노벨이 사망한 이후 제정된 막대한 노벨상 초창기 상금의 원금이 된다. 이후 노벨 가문은 발빠르게 움직였다. 미국의 스탠다드 제국보다 약간 빠른 시기에 운하를 통한 운송 다음으로 빠르게 운송할 수 있는 송유관을 개발했다. 여기에서 멈추지 않고 노벨가문은 거의 세계 최초의 유조선인 조로아스터(Zoroaster) 호를 만들어 출항시켰다. 그러나 바쿠 유전이 가진 막대한 가능성과 그 효용성을 알아 본 사람들과 국가, 가문들은 스웨덴의 노벨 가문 뿐이 아니었다. 세계 석유 시장을 지배하면서 장악하고 있던 미국의 스탠다드 오일과 당시 세계 금융가를 장악하고 있었던 로스차일드 가문이 후원하는 로얄 더치 쉘(Royal Dutch Shell), 러시아와 라이벌이면서 그레이트 게임 등을 통해 러시아와 대적해왔던 영국의 부유한 상인들이 엄청난 투자를 했으며 미국과 독일 제국마저 바쿠를 노렸다.
로스차일드는 그동안 노벨 가문에게 돈을 지원해주면서 많은 이익을 보고 있었다. 이 때 스탠다드 오일이 바쿠에 관심을 갖고 있다는 소문이 전 세계 금융가에 퍼지게 되면서 마음이 급해졌다. 당시 세계 최대의 석유 제국이라 불리는 스탠다드는 미국 석유의 90%이상을 장악한 거대 기업이었다. 로스차일드 가문은 즉각 태도를 바꾸어 스탠다드와 동맹을 맺고 노벨 가문에 대한 지원을 끊었다. 거기에 아제리아 바투미 석유 회사까지 인수에 성공하면서 본격적인 석유사업에 뛰어들었다. 노벨 가문의 브라노벨은 1879~1883년에 이르는 4년 여 기간 동안 2,000% 생산량 증대를 노렸다. 그러면서 러시아 시장을 50%까지 장악하면서 카프카스의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를 위협했다. 그러자 로스차일드와 스탠다드는 바쿠를 과감히 포기하고 루마니아 플로이에슈티(Ploiești)로 옮기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인들이 꾸준히 바쿠에 유입하게 되는데 이 때 바쿠에 유입된 러시아인들은 대개 포그롬 사태로 인해 카스피해 일대에 이주해 온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이후, 바쿠의 인구 30%가 러시아계 유태인들로 자리 잡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 이스라엘과 남다른 유대감을 발휘하고 있는 것도 이들 러시아계 유태인들이 아제르바이잔에 상당수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시대부터 남아있던 아제르바이잔 투르크인들이 유태인과 섞여 살게 되었는데 이들은 서로의 종교를 박해하지 않고 나름 평화롭게 잘 지냈다. 그러나 1905년이 되면서 크림 타타르족 출신 이슬람 모더니즘 사상가인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의 영향을 받은 신식 이슬람 학교들이 바쿠를 중심으로 들어서게 되면서 투르크-타타르 민족주의의 광풍이 아제르바이잔을 비롯한 카스피해 일대에 불어 닥치게 된다. 이스마일 가스프린스키(Исмаил Гаспринский)는 범투르크주의를 기반으로 이슬람의 현대화를 주장하던 인물로, 부하라의 전통적인 이슬람 마드라사들을 매우 시대에 뒤떨어진 무슬림 사회를 대표하고 있는 적폐로 묘사했다. 이와 동시에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에 존재하는 립카 타타르 그룹들을 무슬림들이 본받아야 할 모범적인 사례로 내세웠다. 시아파 이슬람 세계에 속해 있었던 바쿠의 지식인들은 같은 시아파인 이란의 전통적인 농촌 마드라사들을 낙후한 무슬림 사회의 전형으로 보게 되면서 이란 문화에 상당한 거부감을 갖게 된다.
그 대신 러시아를 통해 수입된 서구식 민족주의 및 범투르크주의에 대단히 열광하게 되었다. 이는 후일 소련으로부터 독립 이후, 아제르바이잔이 이란과 거리를 두고 수니파 이슬람이 우세한 터키와 친교 관계를 강화하는 직접적인 계기가 되었다. 19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아제르바이잔의 여러 이슬람 칸국들은 종파 문제 때문에 오스만투르크 제국과 잦은 전쟁을 치르던 적대 관계였지만 이란과의 관계가 틀어지면서 친(親) 오스만으로 변모하게 되었다. 1918년 러시아 제국이 혁명으로 붕괴되면서 소련이 출범한 이후에 러시아 제국의 지배를 받았던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자카프카스 민주 연방 공화국이 되었다. 자카프카스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에 완전히 병합되었으며 당시 아제르바이잔 지역은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으로 자치 형태의 소비에트 공화국으로 남게 되었다. 이미 바쿠에는 1904년부터 볼셰비키 조직이 자생하기 시작했는데, 이는 일찍이 바쿠 유전에서 근로하는 산업 노동자 계급들이 형성 되어 있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고 이들 노동자 계급들 대부분이 러시아계 유태인들이었다.
소비에트 정권은 1926년 바쿠에서 개최된 투르크어학 대회에서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페르시아 문자 사용을 금지하고, 라틴 문자로 표기하기로 결정했다. 하지만 해당 조치들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인들이 터키와 지나치게 가까워지며 러시아어 습득에 전혀 열의를 보이지 않게 되니 다시 소비에트 정권은 1939년부터 아제르바이잔어를 키릴 문자로 표기하도록 방침을 변경하게 된다. 모든 소비에트 자치 국가들이 그러했던 것과 같이 아제르바이잔에도 스탈린의 숙청이 시작되었다. 당시 아제르바이잔의 민족주의자들과 지식인들은 상당수가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다. 소련의 일부가 된 이후, 스탈린 시절에는 50,000명이 넘는 아제리인들이 시베리아로 유형을 당했는데 그중에는 이슬람 성직자인 이맘들도 상당히 많았다고 전해진다. 이에 따라 남부 아제르바이잔 지역도 소련의 영향을 받았다. 20세기 초반부터 중반까지 소련은 아제르바이잔을 지배하면서 남부 아제르바이잔에도 잠시 소련의 위성국으로 알려진 길란 사회주의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웠지만, 이후에 이 지역을 아제르바이잔 사회주의 공화국에 합병시켰다.
레닌 시기에 발생한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전쟁에서는 스탈린이 아제르바이잔의 편을 들어주면서 나히체반과 나고르노 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로 귀속시키면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의 1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이 지역을 두고 치열한 전쟁이 벌어지게 된다. 그런데 1988년 2월 27일에는 아제르바이잔계 무슬림들이 무리를 지어 거리와 아파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을 공격하고 살해하는 숨가이트 학살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에는 미하일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게 된다. 당시 고르바초프 정권이 아르메니아 편을 들어주고 아르메니아인들의 보복으로 발생한 카살리 학살을 적극 지지하면서 아제르바이잔에서는 급격한 반러시아 시위들이 일어나 오히려 서방 세계와 미국을 지지하는 여론이 커졌다. 그러나 미국과 서방 세계는 더욱 노골적으로 아르메니아의 편을 들었기 때문에 친서구 정책을 취하던 민주 정부가 붕괴되면서 헤이다르 알리예프(Heydar Aliyev) 정권이 집권하게 되었고 아제르바이잔은 친러 정책으로 돌아서게 된다.
다른 한편으로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의 공용어는 러시아어 민족 자치어는 아제르바이잔어였고, 공교육은 러시아어와 아제르바이잔어로 이루어졌다.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시대를 거치며 아제르바이잔 내 타트족 및 탈리시족과 같은 소수민족 집단이 모어인 타트어 등으로 글을 읽고 쓸 줄은 모르지만 러시아어로는 글을 자유자재로 읽고 쓰게 되면서 이들 소수민족의 글과 말은 완전히 사장되었다. 그리고 농촌에서 도시로 이사한 이후에 러시아어만 사용하게 되었고 같은 이유로 세대가 지나면서 점차 모어를 잊어버려 아제르바이잔인으로 완전히 동화되기 이른다. 러시아 제국 시대 바쿠 일대의 유전 지대가 개발되었던 영향으로 인해 아제르바이잔이 소련 경제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상당한 편이었다. 당시 적지 않은 러시아계 유태인들인 석유 화학 기술자들이 아제르바이잔 일대에 체류하였으나, 소련이 해체된 이후에는 대부분 러시아 등으로 돌아가 버리고 오늘날 아제르바이잔에 잔류한 러시아 인들은 대개 19세기 초, 아제르바이잔으로 이주해 온 몰로칸파와 유태인들의 후손들이기에 러시아에 돌아갈 연고지가 없는 사람들이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