캄보디아 크메르 루주의 킬링필드에서 만행 (2편)
현재 캄보디아를 동남아시아 최빈국으로 몰락시킨 참혹한 현실
수확량이 떨어져도 크메르 루주의 관리자들은 처벌을 회피하고자 목표량을 달성하거나 초과했다고 상부에 허위 보고하거나 사망자 수를 줄여서 발표하고 사망자에게 돌아갈 식량을 빼돌리는 만행을 저질렀으며 정부는 이를 토대로 군대나 행정기관에 공급하고 전략물자로 비축할 쌀을 징수해 갔다. 그러고도 크메르 루주는 중국으로부터 무기를 얻을 자금을 얻기 위해서 이렇게 수확한 작물들의 대부분을 최전선 전사를 위한 것이라는 명목으로 수탈하여 수출했고 주민들에게는 이엥 티릿 사회부 장관이 밥을 지을 필요 없이 일하고 와서 그냥 밥을 먹으면 된다는 말을 남긴 것과 같이 모두 함께 하나의 급식소에서 하루 2잔의 묽은 쌀죽만 허용했는데 심지어 병이 들어 일을 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이 맹물에 가까운 조잡한 쌀죽조차도 주지 않았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음식이라고 하기 어려운 이러한 음식을 먹으며 맛없다고 하거나 겨우 국수를 배불리 먹고 싶다고 중얼거리는 사람들이 보이면 체포해 끌고 가서 처형했으며 병에 걸려 노동에 참여하지 못하는 것도 인력을 잃게 만들었다고 모함하거나 혁명 의식의 결핍이나 정권에 대한 반항, 심지어 일을 기피하고 더 많은 음식을 얻기 위해 병을 이용한다고 주장했다. 병자들은 그들 자신의 상상의 희생자들이다, 혹은 우리는 자신이 아프다고 생각하는 모든 사람들을 제거하고 우리 사회에서 추방해야 한다는 문건을 만들기도 했으며 환자들을 위한 약과 휴식을 거의 주지 않았다.
기아와 기근으로 고통 받는 것은 가상의 질병에 걸린 것으로 여겨졌고 열악한 노동 조건과 식량 배급에 불만을 품거나 기근의 존재를 인정하는 것은 사형으로 다스렸다. 폴 포트는 집권 초기인 1975년 8월에 서남 지대를 방문하고 이주한 사람들 대부분이 고통을 겪고 있으며 식량과 의약품이 부족하다는 것을 목격했으나 이주민들의 고통보다는 식량 부족으로 인한 노동력 약화를 더 심각하게 여겨 각 지역의 생산 할당량에 맞춰 인구를 재배치할 것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크메르 루주는 프놈펜이나 바탐방에 있는 고향으로 돌아갈 지원자를 모은다는 명분으로 지원자들을 모으고 이들을 대부분 캄보디아의 대표적 곡창비대인 서북지대로 보냈다. 그리고 폴 포트는 매주 마다 각 지역 지도자들이 보낸 상세한 보고서를 통해 국민들의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고 1976년 말에는 당 지도부의 비공개 회의에서 농촌 지역의 3/4이 심각한 식량부족을 겪고 있다는 보고를 듣고도 기근을 사소한 일로 치부하며 대책을 제대로 마련하지 않았다. 그나마 이후의 회의에서 폴 포트는 이것은 우리의 실수다고 하면서도 이것이 자신의 정책상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혁명에 대한 태도와 혁명 의식이 미약하기 때문이라고 진심으로 주장했다.
이에 더해 폴 포트는 1976년 12월에 중앙위원회 회합에서 식량 부족의 이유가 숨어 있는 적들의 식량 약탈과 적들에 의한 자기들의 지령 왜곡, 적들이 인민들이 병에 걸리던 말든 강제로 일을 시키며 인민들을 학대하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 원래 크메르 루주는 1인당 하루 배급량을 570g 정도로 약속했으나 실제 배급량은 많으면 500g 정도였고 배급량이 250g에 불과한 지역도 있었으며 심한 경우에는 340g 깡통의 절반 정도인 약 180g 정도만 배급되는 경우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도 크메르 루주는 시간이 지나 기아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많아질수록 음식 배급량을 도리어 더욱 줄였다. 이와 같이 양과 질 모두 형편없는 음식만 먹어야 했던 사람들은 매우 굶주렸기 때문에 수유기 여성들의 젖이 나오지 않고 생리가 멈출 정도로 기아 상태에 빠졌다. 결국 사람들은 살기 위해 궁여지책으로 수렵 채취로 기아를 면했으며 독이 있거나 덜 익은 동식물은 물론이고 돼지가 먹을 사료, 나뭇잎과 나무껍질, 흙을 넘어 심지어 인육을 먹는 사태까지 벌어졌다. 당시 사람들의 주장에 의하면 기아를 이기지 못해 도마뱀이나 바퀴벌레를 잡아먹었고 이 때 기아로 인한 염분 부족 상태로 사망하는 사람들도 많았다고 한다. 폴 포트 치하에서 매우 어린 나이에 부모, 큰 언니, 여동생을 잃은 캄보디아 계 미국인 여성 인권 운동가 로웅 웅(Loung Ung, 1970~)의 증언에 의하면 독이 든 음식을 먹고 죽은 남편의 살을 매우 배고팠기 때문에 자기의 아이들과 나누어 먹은 한 여성이 독에 중독되어 아이들과 같이 사망해 한 가족이 몰살되는 참혹한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폴 포트는 살기 위해 인육까지 먹어야 한 사람들이 적발되면 목까지 땅에 파묻어 죽을 때까지 내버려 둔 후 죽으면 효수하여 다른 사람들에게 경고로 삼게 했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식량과 물물교환을 하는 것을 반역 행위로 간주해 식량과 물물교환을 하다가 적발된 사람들은 폭행을 당하면서 관련된 모든 사람의 이름을 발고해야 했다.
물론 식량을 기르는 밭들은 무장한 군인들이 지키며 주민들이 식량을 몰래 가져가는 것을 막았으며 심지어 여자들이 밭에서 식량을 도둑질하다 걸리면 그 군인들은 걸린 여자들이 아무리 어려도 봐주지 않고 강간을 하기까지 했다고 한다. 여기서 더 나아가 크메르 루주는 정부가 정하지 않은 야채와 채소를 기르는 것은 물론이고 물고기를 잡거나 야생 망고 하나를 채취하는 등의 수렵 채취도 사람들마다 수렵이나 채취로 구한 것들의 양이 다르니 평등하지 않다는 이유로 금지시켰다. 이러한 조치는 지도자들이 승인한 것이었다. 심지어 농장을 다니는 멧돼지를 죽이거나 엉까의 소유물로 간주된 땅에 떨어진 과일을 줍는 것까지 민간 기업 활동이나 집단 재산 절도로 간주해 처형으로 다스렸다. 감자를 훔치다 들킨 사람은 현장에서 총살되었으며 작물을 먹는 새들을 쫓아낸다는 명목으로 과일 나무들을 모두 베어 버려 과일 채집까지 막아 버렸다. 게다가 크메르 루주는 배고픔은 가장 효과적인 질병이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보다 더 많은 음식을 갖게 되면 공동체의 음식 분배가 부적절해진다.
우리는 모두 평등해야 하기 때문에 한 사람이 굶주리면 모두 굶주려야 한다, 인민의 재산에서 손을 떼십시오! 쌀 한 알, 고추 한 알, 바늘 한 알도 안 됩니다! 등의 말들로 국민들의 아사를 조장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가 측정한 킬링필드 시기 캄보디아의 1인당 평균 열량 섭취량은 매우 처참하여 1970년 기준으로 2,088kcal의 낮은 수준이었다가 캄보디아 내전의 영향으로 1974년 기준 1,902kcal의 매우 낮은 수준으로 떨어졌으나 이조차 1975년에는 1,596kcal로 폭락했다. 그리고 1976년에는 1,519kcal로 다시 한 번 폭락했으며 1977년에는 1,537kcal, 1978년에는 1,580kcal로 별로 나아지지 않았다. 단 5년 만에 평균 열량 섭취량이 76.4% 수준으로 떨어졌으며 1976년에는 1970년의 72.7%였다. 킬링필드 시기 연평균 열량 섭취량은 1,558kcal이었으며 이 정도면 하루 두 끼도 제대로 챙겨먹지 못하는 수준이라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비슷하게 혼란상에 빠졌던 라오스도 평균 열량 섭취량이 60년대부터 90년대까지 내내 1,900~2,000kcal대였으며 베트남도 이와 비슷한 수준이었단 것을 감안하면 캄보디아는 매우 치명적인 수준이라 볼 수 있다. 그러한 정책의 결과가 가져온 여파는 장기적으로 이어졌는데 크메르 루주가 축출되고도 반년도 더 지난 시점이었던 1979년 10월 8일자 경향신문 보도에 따르면 폴 포트의 퇴진 후에도 캄보디아 아동의 영양 실조율은 무려 90%에 달했다.
식량배급량은 겨우 130g에 불과해 많은 사람들이 곤충을 잡아먹으며 연명했다고 하며 당시 캄보디아의 참상은 크메르 민족 자체가 소멸될 위기에 처해 있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처참했다고 한다. 크메르 루주가 집권할 동안 27만 명의 캄보디아인들이 민주 캄푸치아를 탈출하여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살아가야 했으며 1979년에 태국 난민 수용소에서 일했던 의사 존 콜린스 하비(John Collins Harvey)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8세에서 11세라고 생각한 소년들이 사실은 16세에서 20세였다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했다. 곧 성인이 될 청소년들이 하도 기아 상태에 시달렸기 때문에 영양부족으로 시달린 나머지 몸집이 초등학생 수준으로 줄었다는 뜻이다. 크메르 루주는 농학에 무지하여 국토마다 기후와 환경이 다른데도 모든 지역이 동일한 농사 일정을 따라야 한다는 규범집을 만들고 이를 강요했으며 건설한 관개시설도 공학적 지식이 전무한 크메르 루주 간부들의 명령에 따라 만들어졌기 때문에 제 기능을 하지 못해 제대로 된 효과를 보지 못했다. 더구나 폴 포트는 서양 의학을 자본가의 발명품 정도로만 여기며 서구식 병원과 의학 도서관을 모두 불태운 후 의사들이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사람들을 치료하는 방법을 알아가야 한다며 10대 소년들을 아무런 훈련과 기본적인 지식 전수 없이 환자들을 치료하게 했다.
그 소년 의사들은 다양한 식물의 혼합물을 융합한 것을 코코넛 주스에 용해한 뒤 재활용된 더러운 바늘로 주사하거나 환자에 대한 기본적인 마취 하나 없이 환자들을 치료했다고 한다. 보건소에서는 무자격 간호사들이 정맥주사나 비타민 주사를 투여했고 말라리아 치료제라며 약초를 나누어 주었다. 물론 폴 포트는 이를 혁명적인 의학으로 자화자찬했지만 자신들도 이와 같은 서구적이지 않은 치료는 받기 싫었는지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은 아프면 중국까지 가서 서구식 치료를 받았고 지방 간부들은 서구 의약품을 이용했다. 프놈펜에 있는 병원 두 곳은 티오운(Thioun), 티오은(Thioeun)과 인 소칸(In Sokan)이 운영했는데 이 병원들은 크메르 루주의 고위 간부와 외국 외교관이 이용했다. 이 때 당시 캄보디아는 당연히 경제 사정이 좋아질 리가 없어 UN 통계 기준으로 민주 캄푸치아의 1인당 GDP는 언제나 95~106달러를 유지했으며 1975년에는 184위였으며 당시를 제외하면 모두 187개국 중 185위로 최악의 경제 상황이었다. 물론 이는 캄보디아가 내전의 영향으로 크메르 루주가 집권하기 전부터 경제력이 분파된 것도 감안해야 하지만 정부가 장담한 것과 비교하면 도저히 비교가 되지 않는 성과였다.
그러나 더욱 분노할 만 한 부분은 이와 같이 국민들은 심각한 기아에 시달렸으나 정작 크메르 루주 수뇌부들은 국민들이 배급받는 쌀죽을 같이 먹어가지 않고 매우 잘 먹고 잘 산 나머지 오히려 집권 이전보다 살이 더 쪘을 정도였다. 시아누크 국왕은 중앙위원회 병참부로부터 푸르삿의 오렌지, 캄포트의 두리안, 람부탄, 파인애플과 같은 각 지방의 특산 과일과 일본산 화과자, 호주산 버터, 프랑스식 바게트 빵, 오리 알, 맛 좋은 캄보디아 산 게 등을 공급받았으며 이엥 사리는 시가와 코냑에 대해 뚜렷한 취향을 가졌다. 게다가 그는 UN 총회에 다녀오는 길에 푸아그라와 스위스 치즈가 든 바구니를 들고 왔다. 그리고 당시 폴 포트는 당시로서는 호화로운 음식이었던 코브라 수프, 사슴 및 멧돼지 고기, 신선한 과일, 브랜디, 중국산 술을 즐겨 먹었다. 크메르 루주 정권은 자본주의나 외국과 관계되어 있거나 관계되었던 사람들, 그 중에서도 외국어를 구사하는 사람, 공무원, 교수, 교사, 의사, 약사 등 전문적인 직업을 가진 사람들과 유학생들과 중산층 이상의 사람, 심지어 유명 스포츠 선수와 음악가를 포함한 예술가들, 즉 농민, 노동자 외에 모든 사람들을 사회의 장애물이자 인민의 적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전부 처형하거나 수용소에 가두었다.
크메르 루주가 지식인인지에 대해 여부를 판단하는 기준이 매우 어이가 없는 부분이었는데 당시 그들을 지식인으로 규정하는 기준은 영어를 안다는 것과 손바닥에 굳은살이 없다, 그리고 안경을 썼다, 피부가 하얗다는 이유로 사람을 죽인 것은 지극히 정상적이고 매우 양호한 경우라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이는 당시 캄보디아에는 펜을 가졌다는 이유는 당연한 일이었고 무려 책을 제대로 들 줄 안다, 시계를 볼 줄 안다는 이유만으로도 지식인으로 몰려 처형된 사람과 배가 나왔다는 이유로 부르주아로 몰려 처형된 사람까지 있었다고 한다. 이 때문에 캄보디아의 의사들은 800명 중 40명만 살아남게 되었다. 이에 대한 일례로 핑 소이(Ping Soi)와 그의 동료는 중등 교육이 시작될 때를 대비해 혁명 교과서를 집필하라는 지시를 받았지만 중등 교육은 결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고등학교에 다니다가 크메르 루주 군에 합세한 이들이 각 집단 농장에서 어린이들에게 기초적인 읽고 쓰기와 산수를 가르쳤지만 이조차도 촌장의 선택에 달려 있었다. 킬링필드의 과격하고 폭압적인 부분을 입증하는 이야기도 있다.
1977년 7월 6일에 폴 포트의 파리 유학 당시 동창생이자 크메르 루주 정권의 정보 선전 장관이었고 온건파였던 후 님(Hu Nim, 1932~1977)이 반역을 꾸민 혐의로 악명 높은 강제 수용소 뚜올쓸랭에 끌려가고 나서 아내의 처형으로부터 한참 지난 후 다른 126명과 같이 처형당했는데 처형 사유는 크메르 루주의 정권 장악 직후에 라디오 방송에서 피아노 곡을 전국에 내보내서였다고 전해진다. 후 님의 처형으로부터 3일 후 해외 음악은 물론, 제국주의의 산물이라고 본 테니스를 포함한 스포츠도 모두 금지되었고 유망한 테니스 선수들도 전부 숙청되었는데 이처럼 운동선수 2,000여 명이 자본주의자라는 명목으로 몰살되었다. 그리고 캄보디아의 전통 문화에 능통하던 사람들도 대량으로 학살당했으며 단순히 학교에 다니는 학생들조차 가난한 사람들을 착취하는 교육을 받았다는 이유만으로도 살해당했고 심지어 단순히 학교 근처에서 놀던 아이들조차 지식인으로 몰려 살해당했다. 이러한 일로 인해 캄보디아에서는 문맹률이 매우 높아져 정보 전달을 위해 식당 간판에 접시를 그려 넣는 등 거리의 간판에 그림을 그리는 사례까지 나타났다고 한다. 권력자의 학살 자체 또한 문제지만 그 명분마저도 근거가 부족하고 그 실행마저도 크메르 루주의 명령에 의해서만 집행되었다. 처형시킨 이유는 사실 명분일 뿐이고 처형은 크메르 루주의 명령을 따르는지와 아닌지에 대한 것과 무작위로 이루어졌다.
폴 포트는 이를 합리화하며 죄책감에서 도피하는 모습도 보여주었다. 이와 같이 극악무도하고 무식한 박해의 대상이 된 지식인들은 죽거나 밀림에 숨어버리고 국외로 탈출하여 사라지게 되자 크메르 루주의 학살 대상은 농민들 중 협조적이지 않은 자들로 확대되었으며 이후에는 크메르 루주 간부들까지 무차별적으로 살해되는 숙청 투쟁으로까지 변하면서 캄보디아 전역이 사지(死地)이자, 킬링필드로 변모해 버렸다. 한창 교육 현장에 종사해야 할 교사들마저 모두 학살당했기 때문에 문화 대혁명처럼 캄보디아 교육에 큰 단절을 가져왔으며 비교적 최근까지 캄보디아의 교사들 중에는 과학 실험을 직접 해 본 적이 없다는 사람들이 적지 않았다고 한다. 기술이나 예산 문제도 있지만 본질적인 문제는 이러한 단절 때문이며 자신들이 못 배웠는데 다음 세대를 잘 가르칠 수 있을 리 없었다. 따라서 크메르 루주는 교사들을 10명만 남겨 놓고는 모두 몰살해 버렸다. 당연하겠지만, 독립 이후 크메르 공화국 시절까지 기득권을 누려온 친 프랑스 지주들도 킬링필드 과정에서 완전히 몰락하거나 살해당해 거의 사라지게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