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3-25(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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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철학자 카를 야스퍼스(Karl Jaspers, 1883~1969)는 B.C 5세기를 전후한 수백 년의 역사를 ‘축의 시대(Axial Age)’라고 명명한 바 있다. 이 시대에 서쪽의 그리스에서부터 인도를 거쳐 동쪽의 중국에 이르는 비교적 광활한 지역에서 인류사에 처음으로 철학적 사유가 등장하고 보편적 종교가 탄생했다. 이와 같은 ‘축의 시대(Axial Age)’의 서막을 알린 것이 지금의 이란 지역에서 발생한 조로아스터교다. 예언자 조로아스터가 창시한 이 종교는 세속적이고 구복적인 기존의 원시적 종교에서는 볼 수 없었던, 강한 윤리적 호소력을 가졌던 다신교가 대다수인 유라시아 지역에서 나타난 매우 혁명적인 종교였다. 영국의 조로아스터교 연구 권위자 메리 보이스(Mary Boyce, 1920~2006)가 저술한 <조로아스터교의 역사(A History of Zoroastrianism)>는 이 특별한 종교의 탄생 과정을 상세히 알려주는 책으로 나타난다. 보이스는 방대한 초기 이란-인도 문헌들을 찾아 조로아스터교의 역사를 회복시켰다. 전체 3권 가운데 첫 권을 옮긴 한국어본 <조로아스터교의 역사>는 조로아스터교의 토대가 된 고대 인도-이란의 공통 신앙, 예언자 조로아스터의 활동, 조로아스터교의 초기 형태를 추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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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Gonbad-e Qabus, 출처 : Wikipedia, Ziyarid dynasty

 

특히 메리 보이스는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 집단 거주하던 인도-이란의 공통 조상이 섬겼던 다신교 신앙을, 조로아스터교의 아베스타 경전과 고대 인도인들의 리그베다 경전을 비교해가며 상세히 살폈다. 이 다신교 신앙 속의 여러 신들이 조로아스터교에서 선과 악을 대변하는 존재로 체계적으로 집결했다. 또 조로아스터교가 창안한 천국과 지옥, 최후의 심판, 육체의 부활, 영원한 생명은 후대에 유대교·기독교·이슬람교에 깊은 영향을 주었다. 이와 같은 조로아스터교의 탄생 시기는 B.C 1400년에서 B.C 1000년 사이로 추정된다. 조로아스터의 출생과 행적은 <아베스타> 경전에 기록된 것들을 통해 어느 정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아베스타의 핵심을 이루는 찬송가 ‘가타(Gata)’는 조로아스터가 지은 것으로 추정되고 있어 이 노래를 통해 예언자의 ‘육성’을 들을 수 있다. 조로아스터라는 이름은 ‘낙타를 다룰 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유목민의 후손임을 짐작하게 하는 이름이다. 이 예언자의 가계도 어느 정도 확인되는데, 조로아스터는 아버지 포우르샤스파(Pourshasfa), 어머니 두그도바(Dugdoba)의 다섯 아들 가운데 셋째로 태어났다. 어린 조로아스터는 7세 무렵부터 사제 양성 훈련을 받아 15세에 ‘완전한 지식을 갖춘 사제’라는 뜻의 ‘자오타르(Zaotar)’가 되었다. 그러나 기존 지식에 만족하지 못한 젊은이는 20세 때 부모의 뜻을 거스르고 집을 떠났다. 삶의 의미를 물으며 세상을 떠돌던 방랑자는 10년 뒤, 최고의 신 아후라 마즈다를 만나는 놀라운 계시 체험을 하게 된다. 아후라마즈다는 조로아스터에게 자신을 위해 사역하라고 명령했고, 새로 깨달은 예언자는 이 부름에 마음으로 복종했다. 조로아스터는 고향으로 돌아와 신의 가르침을 열정적으로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예언자의 말을 듣는 사람은 없었고, 낯선 복음은 박대 받았다. 조로아스터는 10년 동안 사역에 힘썼으나 예언자는 사촌 한 명을 개종시키는 데 그쳤다. 박해를 견디지 못한 조로아스터는 다음과 같이 절규했다. 


“나는 어느 땅으로 도망쳐야 합니까? 도대체 어디로 달아나야 합니까? 친척과 친구들이 나를 밀어냈습니다.” 


이어 고향을 떠난 조로아스터는 이웃 나라에서 비로소 자기를 알아주는 이를 찾았다. 그 나라의 왕비가 조로아스터의 새로운 교리를 받아들였고 이어 해당 국가의 왕도 새로운 가르침에 신도가 되었다. 이로써 조로아스터교가 번창할 토대가 마련된 셈이다. 이와 같이 전파된 조로아스터교는 역대 페르시아 왕조들의 종교가 되었고 이후 조로아스터교와 이슬람 사이의 악연은 예언자 무함마드 때부터 시작되었다. 이후 조로아스터교는 공개적으로 무함마드의 포교를 방해했다고 한다. 공교롭게도 나디르(Nadir)는 바드르(Badr) 전투 때 패배하며 포로로 잡혔는데, 다른 쿠라이쉬 포로들의 경우는 관대한 처우가 내려졌던 것과 반대로 나디르는 무함마드 앞에서 참수 당했다. 또한 무함마드와 그의 교우들은 이라클리오스(Iraclios) 황제의 비잔틴 군대가 조로아스터교를 믿는 사산 왕조를 격퇴하자 이를 매우 좋아하였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정통 칼리파 시대의 아라비아 정복자들도 페르시아 지역을 안정적으로 통치하기 위해 토착 유력자를 포섭해야 했으므로 조로아스터교는 명맥을 유지할 수 있었다. 그리고 토속 신앙과 달리 이슬람에 교리 상 유대교, 기독교와 마찬가지로 조로아스터교도 일신교에 해당하는 종교이고 기독교나 유대교와 교리를 공유하는 면이 있기 때문에 원칙상으로는 종교의 자유를 보장해주었다. 8~9세기 정도만 해도 중세 페르시아어로 기록된 조로아스터교 관련 문서들이 상당수 남아 있었다. 심지어는 조로아스터교 특유의 근친혼 풍습까지 허용해 줄 정도였다. 그러한 도중에 조로아스터교 내부에서도 이단 취급 받던 마즈다크 교는 시아파와 합세해서 제국에 반기를 들었기에 탄압받았다. 그러나 우마이야 왕조의 아라비아 인 우선주의, 비(非) 무슬림에 대한 추가 인두세를 부과하고 그리고 비(非) 무슬림을 차별하지 말라는 공식적 입장과 상관없이 이루어진 비공식적 차별, 특히 가혹한 세금과 더불어 조로아스터교도와 무슬림 형제가 있을 경우 조로아스터교도는 상속을 받을 수 없다는 등의 조치로 인하여 인해 점차 이란에도 무슬림 개종자가 늘어나기 시작했다. 


또한 처음에는 고등 종교로 인정하는 조치와 반대로 무슬림들은 점점 조로아스터교도들을 불을 섬기는 이교도로 취급하기 시작했고 이러한 편견이 조로아스터교가 배화교로 불리는 것에 일조하기도 했다. 750년 압바스 왕조가 우마이야 왕조를 붕괴시킬 때 이란의 비(非) 아라비아계 무슬림인 마왈리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9~10세기 정도가 되면 조로아스터교는 완전히 소수 종교가 된다. 11세기 셀주크투르크 제국을 위시한 이란 지역의 투르크화와 수니파 세력의 강화 역시 조로아스터교의 몰락을 가속화시켰다. 사산 왕조 페르시아가 멸망한 이후, 이란이 지속적으로 이슬람화 되자, 조로아스터교 신앙을 유지하기 위해 피난한 경우도 적지 않았다. 이들 중 인도 지역으로 피난한 사람들은 파르시(Parshi)가 되었고, 중국으로 피난한 사람들에 의해 배화교, 혹은 현교라는 이름으로 알려졌다. 이에 페르시아 지여르 왕국이 조로아스터교 국가로써는 마지막으로 영위한 국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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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란의 소수종교로 남아있는 조로아스터교의 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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