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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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 분쟁은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분쟁에 있어 큰 분수령이 되었다. 제1차 중동 전쟁 이래 1980년대 레바논 전쟁은 이스라엘이 아라비아 국가들을 상대로 벌인 전쟁이 아니라 주로 팔레스타인 인들을 상대로 하여 벌인 전쟁이었고, 팔레스타인 인들이 주체로 참가해서 벌어진 대규모 전쟁이기도 했다. 무장 게릴라 조직인 팔레스타인 페다인(Fedayeen)은 1960년대 중반부터 요르단의 카라메, 레바논 남부에서 이스라엘 군과 대결을 벌였다. 페다인들은 이집트의 지원을 받아 1950년대에 주로 활동한 팔레스타인의 민족 게릴라들로 아랍어로 "민병대"라는 뜻을 갖고 있다.1948년의 제1차 중동전쟁 이후, 창설된 페다인은 1956년에 일시적으로 해체되었지만 1978년 리타니 작전, 1981년 레바논과 이스라엘 국경을 가로지르는 격렬한 포격전 당시 페다인은 무장 조직으로 부활에 성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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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팔레스타인 페다인 여성 요원들,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팔레스타인 PLO가 정치, 군사적으로 레바논에서 굳건한 입지를 구축했기 때문에 이스라엘의 제한적인 군사 작전으로는 팔레스타인 무장조직을 근원적으로 제거하기 어려웠다. 그러나 1982년의 레바논에 대한 침공은 그 목표와 규모, 지속 기간, 손실의 강도, 이후의 정치적 영향 등을 고려해 볼 때 완전히 성격을 달리한 전쟁이었다. 당시 이스라엘의 전쟁 목표는 여러 가지가 있었지만 레바논에서 PLO를 축출하고 팔레스타인 조직들의 저항 운동을 봉쇄하는 것이었다.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이스라엘 입장에서 매우 불편한 상황을 야기하기 시작했다. 우선 시아파 무장조직이자 정당인 헤즈볼라가 탄생했고, 헤즈볼라는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 당시 이슬람 혁명수비군에 의해 레바논에서 창설된 시아파 무장조직이다. 


이들은 시리아의 지원을 받으며 레바논 남부 지역에서 이스라엘의 침공에 맞섰다. 헤즈볼라는 이란, 시리아의 재정 지원을 받았으며 무기 지원도 받아 최대 25,000여 명의 대원들을 거느렸다. 이들은 현재까지 이스라엘과 미국에 끈질기게 맞서왔다. 헤즈볼라는 미국과 이스라엘이 손꼽은 대표적인 테러 단체로 알려졌지만 레바논 내 120만 명의 시아파 주민과 아랍권의 지지를 받고있는 정당이자 무장조직으로까지 성장했다. 헤즈볼라는 2001년 5월 이스라엘군이 레바논 남부에서 철수할 때까지 격렬한 전쟁을 벌였다. 1982년 이스라엘의 레바논 침공은 오래 지속된 레바논 내전과 관련이 깊다. 1936년 아랍 민병대에 대항하는 기독교 우파 민병대인 팔랑헤 민병대를 창설한 사람이 피에르 제마엘(Pierre Gemayel)이다. 그 아들 바쉬르 제마일(Bachir Gemayel)은 악명을 떨친 “레바논 부대” 사령관이자 팔랑헤당 지도자였다. 


바쉬르 제마일은 1982년 레바논 대통령으로 당선되었으나 같은 해 9월 14일 팔랑헤당 당사의 거대한 폭발 사건이 발생하면서 폭사당하고 말았다. 이 팔랑헤당 당사 폭발 사건 또한 이스라엘의 모사드가 주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뒤를 이어 친형 아민 제마일(Amin Gemayel)이 1982년에 대통령에 당선되어 1988년까지 레바논 대통령을 지냈다. 2006년 11월 21일, 레바논의 반(反) 시리아계 정치인 피에르 제마엘(팔랑헤 민병대 창설자 피에르 제마엘과 동명이인) 산업장관이 베이루트 기독교인 거주지역에서 자동차를 타고 가다가 소총으로 무장한 괴한들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그는 아민 제마일 대통령의 아들이었으며 폭력의 악순환은 꾸준히 지속되고 있는 것이다. 


페다인은 이후, 이라크 지역으로 들어가 이라크의 비정규군으로 활약했다. 페다인은 이라크 남부에서 미국과 영국 연합군을 자주 기습했다. 이에 따라 미, 영 연합군은 바그다드로 진격하는 것은 며칠 뒤로 미루고, 주로 페다인 부대 소탕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민간인 복장으로 위장한 페다인 부대원들은 AK-47총과 수류탄 투척기로 무장한 채 트럭을 타고 다녔으며 이들은 연합군의 후방 교란작전에 크게 기여했다. 곳곳에 매복해 있는 페다인들은 지형지물을 잘 아는 점을 활용해 게릴라 전술로 미 보병 3사단과 해병대들을 괴롭히며 다른 저항 조직들에 큰 영향을 주었다. 민간인 복장을 하고 있거나 투항하는 것처럼 백기를 들고 다가오다가 불시에 공격하는 것도 페다인들의 수법 중 하나다.


페다인들은 2000년대 초반 주로 나자리아, 나자프, 사마와 등 이라크 남부와 중부 도시 인근에서 활동했었으며, 남부 도시 바스라에서 끝까지 남아 저항하는 1,000여 명의 페다인 저항 부대들은 헤즈볼라, 하마스와 꾸준히 연계했었다. 당시 미군은 종종 페다인 부대원들을 실은 긴 차량 행렬을 발견하곤 했는데 이들은 주로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향하고 있었다고 전해왔다. 이들 페다인들의 정식 명칭은 '페다인 사담(فدائيي صدام, 사담의 순교자들)'이라 불렸으며 이들은 사담 후세인 전 이라크 대통령에게 대한 충성심이 강했다. 주로 16세 이상 젊은층들이고 30,000~40,000명 규모로 나타난다. 2000년대 초까지는 사담 후세인의 장남 우다이 후세인(عُدي صدّام حُسين)이 지휘하고 있었다.


당시 우다이는 평상시 페다인 부대를 이라크 국경에서 밀수와 이라크 내 반(反) 후세인 세력을 제거하는 등에 활동을 해 온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페다인 부대원들은 후세인 치하에서 많은 혜택을 받았기 때문에 후세인 정권에 대한 충성도가 엄청났다. 이라크 전쟁 당시 페다인 부대원들이 이라크군의 투항을 막기 위해 살해 위협까지 일삼았으며 토벌된 2003년 이후, 후세인의 차남 쿠사이가 이끄는 특수 보안대(SSO)에 합류했다. 이들의 수효는 적게 2,000~5,000여 명, 많게는 보안당국과 경찰 인력까지 포함함 100,000명이 있었으며 700만 명의 저항 세력임을 주장하는 예루살렘 여단(القدس)과 같은 비정규군에 속해 꾸준히 미군과 싸워왔다. 현재 페다인의 상당수는 헤즈볼라와 하마스에 합류되어 있는 상태이고, 작은 조직들이 소규모 저항을 하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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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바논-이스라엘 전쟁의 여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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