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0(월)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몽골 울란바토르 수흐바타르 광장의 시위대는 몽골에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를 도입하길 요구했다. 반 정부 인사들은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 내에서 자유로운 선거와 경제 개혁을 요구했다. 시위대들은 몽골 현지인들로 거의 대부분은 읽지 못했지만 민족주의적인 몽골 전통문 자를 사용하면서 몽골식 키릴 문자가 가진 정치 체제를 상징적으로 부정했다. 공산주의 치하 말기의 몽골에서는 범몽골주의라는 민족주의적 사상이 1980~90년대에 이미 자리 잡고 있었다. 범몽골주의는 몽골인들의 정치 및 문화적 통합을 제창하는 민족통합 운동과 사상을 말한다. 즉, 현재의 몽골 공화국, 중국, 러시아 연방공화국 등지에 거주하고 있는 몽골계 민족을 통합하여 하나의 통일 국가를 건립하려는 주장과 운동으로 주로 몽골국, 중국의 내몽골자치구, 동북지역, 신장 등의 몽골인 거주지, 러시아 연방의 부리야트 공화국의 통합을 말하고 있지만 경우에 따라서는 몽골 공화국 북부의 투바 공화국까지 통합의 범위에 넣기도 한다. 


489408917_9759790567413256_5470555189160989287_n.jpg
사진 : 몽골 국회 "쿠랄", 출처 : 울란바토르 국립박물관에서 필자의 직접 촬영

 

그러나 20세기 전체를 통하여 가장 자주 언급되고, 역사 과정에서 구체적으로 실천에 옮겨진 민족 통합 운동은 몽골 공화국과 중국 내몽골 자치구의 통합을 말한다. 범몽골주의는 몽골인들이 20세기 초기 청나라의 지배에서 벗어나면서 발흥하기 시작하여 20세기 내내 민족 운동의 중심 축으로 기능했으며, 1990년대 초기 몽골 공화국의 체제 전환 이후 현재까지도 변형된 형태로 그 맥이 이어지고 있다. 따라서 범몽골주의의 역사적 추이에 대한 분석은 몽골 근현대사 전개 과정에 대한 이해는 물론, 현재 몽골, 중국, 러시아에 분산 거주하고 있는 몽골계 민족의 정체성 그리고 세 나라 관계의 특징을 이해하는 데 핵심 사안이다. 1989년 12월 말, 체스 그랜드마스터인 가리 카스파로프(Гарри Каспаров)가 플레이 보이와의 인터뷰에서 "몽골을 중국에 매각하는 것은 소련에게 경제적 이득을 줄 수 있다(Selling Mongolia to China could provide economic benefits to the Soviet Union)"라는 발언이 퍼지며 민족주의적인 시위가 거세졌다. 


1990년 1월 2일, 몽골 민주 연합은 민주 혁명을 요구하는 전단지를 뿌리기 시작했다. 정부가 이를 수용하지 않자 시위가 번져 더욱 과격한 요구가 나오기 시작했다. 1990년 1월 14일, 처음 300명에서 1,000명으로 늘어난 시위대는 울란바토르 레닌 박물관 앞 광장으로 집결했으며, 레닌 박물관 앞 광장은 이때부터 울란바토르 자유 광장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1월 21일에는 영하 21도의 날씨 속에서도 수흐바타르 광장에 시위가 열렸다. 시위대는 칭기즈칸을 칭송하는 푯말을 들며 소련이 학교 교육에서 의도적으로 무시하는 몽골 민족 영웅들을 재발굴하여 시위 전면에 내세웠다. 시위대는 칭기즈칸 탄생 800주년을 기념한 죄목으로 1962년 몽골 인민혁명당에서 축출되었던 정치인 다라민 토모르오치르(Daramin Tomorocir)의 사면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여기에 몽골 인민공화국의 국기에서 공산주의를 뜻하는 붉은 별을 지우고 새로운 소욤보 문양을 장착한 국기를 흔들었다.


몽골은 1980년대 중반부터 소련 및 동구권에서 일어난 민주화 운동의 영향을 받았다. 1989년에는 민주화 운동이 아예 몽골에서 거의 유행이 되다시피 했다. 1921년 독립 이후 70여 년 동안 이어온 몽골 인민혁명당(MPRP)의 일당 독재가 1990년에 종식되었다. 1990년 5월 정당법이 채택되어, 다당제가 도입되고 1990년 7월에는 몽골이 최초의 자유선거를 실시하게 된다. 오랫동안 일당 체제를 유지 해 온 몽골의 정당 정치에 민주화 이후 다른 신생 민주주의 국가들과 같이 신생 정당들이 많이 등장하였지만, 대부분의 정당들이 의회 진입에 실패하였다. 따라서 몽골 최초의 자유 선거가 실시된 7월 29일은 현재 몽골에서 기념일로 지정되어 있다. 몽골의 정당들은 1992년 첫 의회 선거부터 총 7차례의 선거를 치러 왔다. 몽골 인민당(MPP)은 오랜 역사 및 경험을 가진 정당으로서 선거에 최소한 의석의 30% 이상을 차지하여 왔으며, 세 차례의 선거에서 과반수 의석을 차지하여, 정권을 잡았다. 


반면, 민주당(DP)을 축으로 한 야권은 첫 선거부터 패배하면서 이후 통합 및 선거 연합으로 이합집산을 하여 불안정한 모습을 보였다. 몽골은 민주주의 국가가 되면서 다당체계가 가능하게 되었지만 역대 의회 선거에서 MPP와 DP만이 의석의 대부분을 차지하면서 실제로 양당 체계 및 패권 정당 체계가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물론 제도적 측면에서는 몽골의 민주주의는 잘 정착했지만 시민의 정치 참여도나 예산 집행의 투명성 등은 아직 높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다. 정치를 떠나 사회적 인권 문제에 있어서는 가정 폭력, 여성들의 인권 문제 등 여전히 개선해야 될 점이 있다고 지적 받고 있는 실정이다. 그리고 중국, 러시아 사이에 놓인 내륙 국가다 보니 두 강대국으로부터 정치적으로 꾸준히 간섭을 받기도 했다. 몽골이 독립 이후 꾸준히 유지될 수 있었던 것도 이와 같은 두 강대국 사이의 완충 지대였던 점이 컸다. 그래서 두 국가 모두 견제할 필요가 있는 미국이 주목하고 있는 국가이기도 한다.


공산권의 붕괴 이후, 몽골의 여당이었던 몽골 인민 혁명당은 야당 세력과 합의해 다당제와 자유 선거를 도입했으며 이를 통해 비교적 단기간에 민주화를 달성했다. 몽골이 민주주의를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는 예로부터 북방민족들이 선거와 비슷한 쿠릴타이 제도로 족장을 뽑은 제도가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몽골의 경우 칭기즈칸 이후부터 원나라까지의 사례를 제외하면 대체로 쿠릴타이 등으로 리더를 뽑는 방식이었는데 물론 지금과 같은 전 국민 직선제는 아니고, 권력을 가진 씨, 부족들이 모여 리더를 뽑는 형식이었다. 일종의 우리 고대 화백 회의와 같은 귀족 정치인 셈인데 이 때문에 몽골은 역사적으로 중국이나 러시아에 비하면 정치적 권위주의는 상대적으로 약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현재 경제적으로 몽골 국민의 소득은 많이 낮은 편이다. 1990년 대 체제를 전환하는 과정에 있어 여러 경제적 어려움 등이 겹친데다 1990년대 말에 IMF 외환위기가 다가오게 된다.


몽골은 2000년대가 되어서야 경제 성장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사실 공산주의 시절에도 그리 잘 살았던 편은 아니었지만 이후 체제 변환이 된 다음에도 크게 변하지 않았다는 비판에 직면하고 있다. 넓은 국토에 비해 인구가 매우 적어서 내수가 빈약한 상태다. 특히 경제가 자원 수출에만 지나치게 집중되어 있다보니 산업도 다양하지 못한 형편이다. 그 중에서 중국에 대한 자원 수출 의존도가 굉장히 높아 중국 경제에 많은 영향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현재 몽골 경제를 지탱해주는 원자재 광물 수출 산업도 외국 기업들의 투자를 적극적으로 얻어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인데, 이는 몽골이 민주주의 체제임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도 국민성과 더불어 몽골 정부 성향에 공산주의의 잔재와 외국에 배타적인 문화가 강하게 남아 있기 때문이다. 특히 정부부터가 배타적인 부분이 남아있어 외국 기업을 거의 갈취하는 수준으로 높은 수익금을 요구하는 것이 큰 문제가 되고 있다. 일례로 들면 현재 한 호주 기업에서 몽골의 구리 광산에 투자하고 있었다. 


이는 몽골 정부에서는 해당 호주 기업에게 모든 개발 비용 지불 및 2030년까지 몽골 정부에게 배당금의 34%를 지불할 것을 조건으로 걸어 놓았던 것이다. 물론 몽골 정부 입장에서는 엄청난 득이 되는 계약이지만 정부가 기업에게 돈을 갈취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계약이었기에 국가 신용도에서조차 하위권을 맴돌고 있는 것이 현 상황이다.


BEST 뉴스

전체댓글 0

  • 82868
비밀번호 :
메일보내기닫기
기사제목
범몽골주의의 민족주의 발현과 몽골의 민주화, 그리고 소득 수준이 낮은 몽골의 경제
보내는 분 이메일
받는 분 이메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