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타르족의 폴란드-벨라루스-리투아니아 정착의 역사
립카 타타르족의 정착화와 동유럽에 미친 영향
립카 타타르 인들은 14세기 경 리투아니아 공국에 귀부하게 되었던 타타르 집단으로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충성을 다하면서 자신들의 영토를 분봉 받고 폴란드의 기병들로 활약했다. 본 연구에서는 립카 타타르 인들을 줄여 립카 인으로 표기함으로 알리는 바이다. 립카 인들과 비슷하게 폴란드에 기병 공급 등을 담당했던 자포리제 코사크는 폴란드에 자주 반란을 일으켰지만 이들 립카 인들은 정부에 대해 불온한 움직임을 보이지 않았다. 종교가 같고 문화나 언어도 비슷한 크림 칸국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여러 차례 립카 타타르의 반란을 사주하려고 했지만 립카 타타르는 그들의 유혹에 굴복하지 않고 충실하게 폴란드-리투아니아를 위해 봉사했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이들은 어느 정도 폴란드 인들과 동화되어 카톨릭을 받아들이는 자들이 나타나는가 한편 상류층은 루테니아 어나 폴란드어를 사용하기 시작했을 정도였다. 1588년 4월 8일, 동구권 유럽에서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외교 협상이 타결되었다. 11세기부터 생성된 폴란드 중세 왕조 이래로 바이킹의 침략 또는 발트 해 지배권을 두고 서로 간에 경쟁 상대라 할 수 있었던 폴란드와 스웨덴이 동맹을 맺기로 전격 결정한 것이다. 이것이 16~17세기에 존재했던 가장 강력한 동맹이라 할 수 있는 폴란드-스웨덴 동맹이다.
처음에는 북방 영토인 리보니아에 대한 이해관계를 원만히 정리하기로 한 외교적인 타협이었으나 이어서 군사 동맹으로까지 발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대개 이를 두고 이른바 북방 협상이라 표현된 칼마르 동맹과 폴란드-리투아니아의 협상, 그리고 이와 대치하는 러시아-타타르 동맹의 대립을 앞으로 생성될 러시아 동란 시대가 발발하는 원인 중 하나로 새롭게 거론하고 있는 형국이다. 그래서 러시아 동란 시대 이후에 북방 협상이 폐기된 것으로 착각하는 역사가들이 많이 존재하고 있다. 이는 바사 왕조 지배를 둘러싼 1655년에 발생했던 스웨덴의 침공 때문인데 이러한 동맹은 맺어지고 파기되기를 반복하면서 제1차 세계대전까지 이어왔다. 하지만 지난 2008년에 폴란드와 스웨덴이 공동으로 대대적인 420주년 행사를 개최했을 만큼 현재 양국의 관계, 특히 발트 지역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적 동맹 관계를 고려한다면 또 다른 형태로 여전히 진행 중이라 할 수 있을 듯싶다. 한편 이에 따라 1591년 독실한 카톨릭 신자로 알려진 지그문트 3세에 의해 립카 인들의 종교나 문화 등은 폴란드 정부로부터 규제 받기 시작했다. 그 이유는 두 나라가 동맹을 맺었기 때문에 리보니아 전선에 군대를 파병할 필요성이 없어졌기 때문이다. 게다가 립카 인들은 전통적으로 투르크-타타르계 무슬림들이었지만 이슬람을 인정하지 않는 지그문트 3세에 있어 북방 지역에 이슬람 세력은 카톨릭에 도전하여 그 세력을 인정하지 않는 모양새로 보여졌었고 이에 따라 카톨릭 개종령을 함께 포고해버린 것이었다.
이에 지그문트 3세는 종교세 부과를 통과시켜 립카 인들이 카톨릭으로 전원 개종하지 않으면 세금을 높이는 법령을 추가 공포했다. 이러한 세금이 높아지는 규제로 인하여 간접적인 종교 박해로 강화되기 시작했고 설상가상으로 1594년 폴란드 비슬라 강에서 대홍수가 발생하여 수많은 자국 이재민들이 발생하자 이들을 도와주고 지켜주는 방편으로 자국민 군인들의 비중을 높였으며 립카 인들은 더 이상 기용하지 않았다. 게다가 서남쪽으로 합스부르크 왕가가 침략함으로써 립카 인 대신 노가이 타타르 족이나 유럽인 출신 용병들을 기용하기 시작했다. 1612년 오늘날 벨라루스 지역에서 립카 인들이 거주하는 벨라루스 지역의 분할을 놓고 리투아니아와 러시아가 상호 간의 군사 대치를 벌이게 되었지만 팽팽했던 리투아니아와 러시아가 불과 6년 만에 화의를 맺기로 합의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 입장에 의하면 로마노프 왕조가 새로이 건국되어 내정을 확립해야 했으며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와 더불어 자신들의 남쪽 국경을 위협하고 있는 오스만투르크가 북진을 서두르고 있기 때문이었다. 이는 립카 인들에게 있어 상당한 비극이었다. 립카 인들은 리투아니아의 용병으로 기용되어 러시아와 전쟁의 최전선에서 활약했지만 화의가 맺어지자 이들은 순식간에 일자리를 잃게 된 셈이었던 것이다. 결국 리투아니아는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이 발발하자 폴란드, 독일 선제후들은 리투아니아를 돕기 위해 4년 동안 북방 십자군을 포함해 무려 200만을 참전시켰고 이 전쟁에 립카인들도 투입되었다.
립카인들은 90만 이상의 전사자를 포함한 300여 만의 인명 피해를 입었다. 이는 동구권 카톨릭 역사에서 전무후무한 참화였던 것으로 기록되고 있다. 이러한 정도로 폴란드-리투아니아를 비롯한 카톨릭 동맹국들이 함께 오스만투르크와 전쟁을 벌였고 립카 인들은 폴란드-리투아니아 인들과 관계에서 서로 간에 더욱 공고해질 수밖에 없었다. 물론 전후 질서 재편을 함께 주도했고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이 발발하자 오스만투르크에게 전쟁을 선포한 후 30만의 원정군을 폴란드 남부 지역에 즉각 파견했을 정도로 친 정부적인 호의를 보여주기도 했다. 물론 현재도 폴란드와 립카 인들은 그러한 동맹 기조를 이어가고 있지만 이러한 역사 중에서 서로를 적대시할 정도로 관계가 험악해진 적이 분명 존재했다. 이는 립카 인들의 봉기(The tribe a Lipka revolt)로 폴란드 전역이 내전에 돌입될 위기가 고조되었다. 1615년 5월 10일 이러한 내전 위기에서 그동안 기묘한 관계에 놓였던 오스만투르크와 모든 관계들이 종식되고 전쟁이 발생했고 이와 더불어 서남부 지역에서 합스부르크 왕국이 폴란드를 침공했다. 전력상 비슷하리라는 예상을 깨고 합스부르크의 군대가 헝가리 군의 엄호를 받는 집단화된 포병부대를 앞세워 폴란드 군 배후를 강타하자 상황은 급속도로 변해갔다.
불과 10일도 안되어 가 슐레지엔 지역이 장악되자 당시 바르샤바에서 긴급히 열린 연방 회의에서 리투아니아 대공인 지그문트 3세(Zygmunt III Waza)가 립카 인을 제외한 노가이 인들이나 크림 타타르 인들에게 우리는 패배했다는 말을 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정작 립카 인들은 이러한 소식을 듣지 못했다. 게다가 전선의 30만의 립카 인 전사들이 나가 있었다. 이렇게 소외되고 규제를 강력히 시행한 폴란드 정부의 압박으로 인해 립카 인들은 서서히 그들 내부에서 폴란드 정부에 대한 불만이 생기기 시작했다. 1618년 합스부르크 군이 우선 코시체에서 철군을 완료하고 루블린 지역을 공략하자 전투를 벌일 수 있는 군대가 거의 없던 립카 인들로 인하여 전쟁의 승패는 거의 결정 난 것과 다름없었다. 이에 루블린 지역에 살고 있던 립카 인들은 믿었던 폴란드가 배신했다고 분노했지만 이러한 참사를 당하게 된 근본적인 원인은 사실 폴란드를 너무 신뢰했던 립카인 스스로에게 있었다. 결국 오늘날 슬로바키아 지역까지 탄트라 산맥을 근거지로 하여 비교적 넓게 거주하고 있던 립카 인들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벨라루스 지역 각지에 연락을 통해 산발된 부족들을 긴급 규합하려고 했다. 이와 더불어 후사르 윙의 립카 인 장교였던 라우아르두(Rauaedu)를 새로운 립카 인의 지도자로 인정하고 1619년 새로 정권을 교체하여 일어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에 도움을 요청했다.
그리고 폴란드-리투아니아 전 지역에 이와 같은 립카 반란의 전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그러나 립카 인들에게 아직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이라는 미련이 남아있었다. 자신들의 요구 조건 몇 가지만 수용해준다면 대화의 여지를 남기며 위기를 타개할 수 있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의 협상 수용에 기대감도 가지고 있었다. 모두가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하여 전체적인 판세를 반전시켜 주기를 원했으나 정작 지도자인 라우아르두는 다른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고 폴란드에 항복하는 것 이외에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실 타타르와 폴란드의 관계사를 살펴보면 항복은 비록 치욕스럽지만 그래도 민족 자체를 보존할 수 있는 최소한의 방법이었다. 당시 기준으로 최근이라 할 수 있는 러시아-폴란드 전쟁, 독일 30년 전쟁, 영국-스페인 전쟁도 승자가 패자를 멸망시켜 국토를 병합하거나 식민지로 삼지는 않았었다. 대신 많은 간섭과 착취가 수반되는 것을 매우 당연한 일이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도 협상을 원하는 립카 인들에게 기대할 수 있는 선례를 남겼던 것이다. 결국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이 개시되어 1620년 폴란드와 립카 인 사이에 평화 협정이 체결되었다. 라우아르두는 적어도 타타르 족의 명예만은 지켰다라고 말했을 만큼 형식상으로는 민족 대 국가로서 이루어진 하나의 종속 협정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협정 장소와 형식부터가 립카인들에게 여러 가지 굴욕을 주는 상황으로 진행되었고 립카인의 요구들은 폴란드 정부가 안 들어주면 그만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정부의 의사들이 고스란히 반영된 일방적인 항복이었던 셈이다. 그러한 협상으로 인하여 1621년부터 폴란드-리투아니아 전역에서 고조되었던 반란의 조짐은 사라졌다. 이어 립카인을 도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러시아가 중립을 선언하면서 러시아와 립카인들의 협상은 폐기되고 벨라루스에 정착해있던 일부 립카인들이 모스크바에 망명하여 자신들만의 자치 정부를 선포했지만, 폴란드와 러시아는 여전히 외교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폴란드의 립카인들이 정부와 협상에 성공했기 때문에 러시아 정부에서도 모스크바 립카 인들을 도울 별다른 움직임은 없었다. 립카 타타르 인들이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에 굴복했어도 타타르라는 실체나 정부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었고 립카 이외에도 러시아 외부에 산재한 수많은 타타르 칸국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기에 각 지역의 타타르 인들도 그 약한 동질성을 가지고 모스크바에 망명한 립카 인들에게 일일이 도움을 줄 필요도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특히 이는 불과 9년 전에 폴란드 군이 모스크바를 침공하여 군대를 진주시켰고 당시의 타타르 칸국들 또한 폴란드 군에 합세하여 모스크바를 침공한 바 있었다.
그러나 이에 친러 세력들로 구성된 칸국들이 러시아를 구원하지 않았고 당시 러시아 동란으로 인해 슬라브 민족들이 붕괴의 위기에 봉착했던 것들을 비교하면 타타르 족들 간의 연대성은 그 연결고리가 매우 약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이런 표면적인 모습과 달리 립카 인들은 생존하려면 철저하게 폴란드의 조치들에 굴복해야 했다. 1620년 폴란드 정부와의 협상 타결 이후 폴란드 군은 혹시나 모를 립카 인들의 반기를 견제하기 위해 동북 폴란드 영토인 비알리스토크, 남동부의 루블린, 자모시치 등, 립카 인들이 주로 거주한 지역들에 진주하기 시작했다. 물론 역대 역사를 보아도 영토의 일부를 군사적으로 점령한 사례는 흔했지만, 이번의 경우는 라우아르두도 당황했을 정도로 그 차원이 달랐다. 어쩌면 지난 폴란드-립카의 1차 화약 당시 립카 인들에게 매우 가혹한 조건들을 제시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날수록 립카 인들의 강한 반발들을 피하기가 어려웠던 건지도 모른다. 우선 폴란드 정부가 통치할 수 있는 립카 인들의 거주 지역은 화약 당시 이전의 오스만투르크와 전쟁 때 투르크 족들이 점령하지 못한 루블린 일대로, 그들이 머물고 있던 국토의 40% 정도 밖에 되지 않았었다. 또한 립카 인들이 먼저 폴란드에 반기를 들었다는 명분으로 인해 하루에 4억 즈워티의 폴란드 점령군들 유지비용을 지불해야 했다.
이에 대해 화약 조건의 이행을 감시하기 위해 설치된 정부와의 교섭위원회는 무조건 폴란드 점령군 최고 슐리흐타의 지시를 받도록 했다. 이러한 명목으로 인해 립카는 그저 폴란드 문서상에만 존재하는 형식상의 독립 종족이었을 뿐이다. 그러한 탄압에 가까운 상황에 직면했음에도 겉으로는 큰 문제가 없었다. 정치적으로 연방 회의에 참여할 수 있었고 다른 타타르 세력들과의 외교 협력도 빈번한 편이었다. 게다가 경제 행위도 이루어지면 폴란드 정부에 세금도 냈고 자치적으로 군대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폴란드 정부는 1차 화약 당시 반기를 획책한 주모자들 200여 명을 감금한 끝에 처형시키고 대부분의 군직을 박탈했으며 자치 군의 장비를 대부분 수거했다. 그러한 상황이었기 때문에 립카-타타르 군은 거의 해체에 준하는 수준까지 몰락했었다. 이는 마치 이전 스웨덴과의 조약 하에 리보니아에 남겨둔 주둔군처럼 10만 정도의 폴란드 정부군을 협조할 수 있는 군대 정도를 보유할 수 있도록 조치했다. 그런데 이러한 조치에도 일부 묘한 부분이 존재하고 있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폴란드 정부 측이 립카 타타르의 기마병들을 그대로 두었던 것이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와 같은 조치는 폴란드 정부가 립카 인들의 반항을 어느 정도 인식하고 수용했다는 표현이 맞을 정도다.
1차 화약 협정을 맺을 당시에 폴란드 정부는 엄청난 규모의 립카 기마병들을 확보하지 않고 단지 무장만 해제할 것을 요구했다. 거의 대부분 군 장비들을 거두어갔다는 표현이 적합할 정도로 보병, 포병들의 무기를 수거한 것에 비하면 상당히 의외의 조치였다. 이는 립카의 기마병들이 폴란드 군의 주력 돌격 군으로 남겨 놓겠다는 조치로 밖에 생각할 수 없을 것 같다. 이는 당시의 상황은 물론이지만 이후 발생할 1672년 립카 반란의 진행 과정을 상기한다면 이해하기 어려운 조치였던 것이다. 오스만투르크와의 전쟁 당시만 해도 폴란드는 동구권에서 가장 강력한 후사르 기마병들을 보유했지만 종전 이후 강력한 후사르 기마병들은 그 열세를 인정하여 철저히 축소되어 몰락했었다. 이후 리투아니아 얀 3세 대공이 통합 국왕으로 즉위한 이후 기병 전력 증강에 나섰지만 아직은 대규모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은 상태였다. 더구나 그나마 구축한 기병 전력도 직전의 모스크바 침공 전에서 러시아 군의 저항으로 많은 손실을 본 상황이었다. 반면 당시 립카 인들은 다른 타타르 칸국들과의 전력을 비교해 볼 때 몽골-타타르 칸국들에 이은 4위의 기병 전력이었다. 당시 폴란드 최강 기병대인 후사르에 속해 여러 국가들과 전쟁에서 승리했지만 모스크바에서 패전한 퇴각한 직후 러시아에 의해 자의반 타의반으로 억류되었으나 대부분 기병들은 급격히 쇠락하고 있을지라도 후사르의 주력 부대라는 명성에 걸맞게 대부분 살아남아 있었다.
오스만투르크조차도 립카의 기병들을 생포하기 위해 작전을 펼쳤던 점을 고려한다면 강한 유목 민족 출신의 국가였던 오스만투르크도 분명히 그 용맹성을 가지고 싶었을 정도였다. 그러한 부분에도 불구하고 립카 인들의 기병 담당 조교인 아불 바기에르(Abul Bagier)는 립카 기병들의 부족민들 보호 의지가 확고한데도 무장 해제를 요구하는 것은 부당하다며 강력히 반발하자 폴란드 정부는 처음 요구했던 해체 명령을 거두어들이고 존속시키기로 결정했다. 러시아와 오스만투르크에게 대패하고 기병 전력이 현저하게 떨어졌던 폴란드 군이 그것도 판노니아 평원을 지나 오스만투르크와 합스부르크를 공격해야 할 입장임에도 불구하고 립카의 기병들을 왜 해체하려 했는지에 대해 여러 주장이 제기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확실하게 알려진 것은 없다. 그래서 이와 같은 행태들이 1683년 비엔나를 포위하여 유럽 연합군들을 몰아넣고 3일 동안 공격을 중지시켰던 오스만투르크와 유사한 폴란드 전역의 또 다른 의문점들로 취급되고 있다. 결국 이러한 기병들의 존재는 결과적으로 폴란드와 립카인들이 다시 대립하는 원인이 된다. 오스만투르크의 입장으로 볼 때 비엔나에서 퇴각한 후 다음 목표는 당연히 폴란드였다. 육지에서 전선을 마주하고 전투를 벌인다면 평지의 기병전에서 폴란드 군이 이길 가능성은 거의 없었지만 다행히도 최강의 포병들을 육성했었고 네덜란드의 포병조련 장교들을 받아들여 화승총으로 무장한 보병들이 15만이나 존재하고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