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홍수의 발단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우크라이나 코사크들과 슐라흐타 간의 갈등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코사크들은 자신들을 보호하고 경제적 지원까지 해주고 있는 폴란드 국왕에게 맹목적인 충성을 바치며 등록 코사크 군으로서 복무해왔다. 그러나 폴란드 귀족들은 코사크들을 무자비하게 착취해왔고, 거기에 농노제와 카톨릭 신앙까지 강요하려 하자 결국 오랫동안 쌓여온 분노가 코사크 슐라흐타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야심과 결합하여 이전까지의 봉기와는 차원이 다른 대규모의 봉기로 발전했다. 심지어 폴란드의 막강한 기병에 맞서 코사크의 약점인 허약한 기병을 보완하기 위해 흐멜니츠키는 코사크와 원수지간이던 크림 칸국의 타타르 기병들까지 봉기에 끌어들였다. 1648년 1월 25일 흐멜니츠키는 시치(Січ)가 열리는 장소인 호르티치아 섬을 경비하던 폴란드 군인들을 죽인 이후 시치를 열어 폴란드에 맞서 봉기를 일으킬 것을 결정했다. 그 달 말 라다(Козацька рада)에서 헤트만에 선출된 흐멜니츠키는 곧바로 코사크 헤트만 국의 건국과 폴란드에 대한 선전포고를 선언했다. 같은 해 4월 코사크의 봉기 소식이 바르샤바에 전해지자 폴란드는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우크라이나로 군대를 파견했다. 하지만 조우티보디(Zoutibodi) 전투에서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 군에게 전멸 당했고 코르순(Kordun) 전투에서 다시 격파당하면서 어느 편에 설지 망설이던 코사크들이 대거 흐멜니츠키 편에 가담했다.
그에 맞춰 우크라이나 농민들이 슐라흐타에 대항해 민란을 일으키고, 우크라이나 전역에서 성직자, 귀족, 농민 가리지 않고 폴란드인들은 모두 학살당하는 상황이 펼쳐지면서 사태는 혼돈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당시 국왕 브와디스와프 4세는 코사크를 이용해 연방 남쪽 크림 칸국의 타타르들과 그 종주국인 오스만투르크 제국을 도발할 생각이었지만 국왕이 국익에 부합하지 않는 전쟁을 일으키려 한다며 입법부인 세임의 반대와 어린 아들인 지그문트 카지미에시(Zigmunt Kaimiesi)를 잃은 슬픔에 그 계획을 잠시 미루다가 코사크들의 대 봉기에 충격을 받아 사망하고 말았다. 이후 대홍수 사태는 성직자로 있다가 새 국왕으로 선출되면서 환속한 그의 동생 얀 2세가 해결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된다. 한편 흐멜니츠키의 봉기군은 민란을 일으킨 농민들과 합세해 필랴우치(Pilauchi) 전투에서 다시 폴란드 군을 격파하고 서쪽으로 진격했다. 서부 우크라이나의 대도시 리보프를 공략하려던 흐멜니츠키는 자신의 몸값을 받는 조건으로 도시 공략을 포기한 후 다른 도시인 자모시치를 공략하던 도중에 브와디스와프 4세의 사망과 얀 2세의 즉위 소식을 전해 들었으며 동시에 얀 2세로부터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들에게 특권을 부여할 것이니 봉기를 중지하라는 편지를 전해 받게 된다. 흐멜니츠키는 이를 받아들여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봉기는 일단락되었다. 1648년 성탄절 당일, 키예프에서 흐멜니츠키는 성대한 개선식을 열었고 우크라이나 인들은 해방자의 등장에 열렬히 환호했다.
그렇게 하여 1649년 1월 키예프 근교 페레야슬라프(Перея́слав)에서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들의 지위에 관한 폴란드와 코사크의 회담이 열렸다. 그러나 회담이 한창 진행 중이던 2월 흐멜니츠키는 자신을 루스 인들의 유일한 독재관이며 이와 동시에 리보프, 헤움(Heum), 할리치(Halichi)까지 이어지는 우크라이나와 포딜리야(Podilia), 볼히니아 전역의 권력자임을 선언하게 된다. 이로써 폴란드는 흐멜니츠키가 단순한 코사크의 지도자가 아니라 독립된 국가의 지도자가 되겠다는 야심을 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결국 페레야슬라프 회담은 결렬되었다. 그리하여 코사크와 폴란드 사이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1649년 여름 즈바라즈(Zbaraz)와 즈보리프(Zboriv)에서 전투를 벌였고 두 전투는 모두 무승부였다. 폴란드와 코사크-타타르 연합군은 8월 17일 즈보리프 조약을 체결하여 코사크 헤트만 국은 키예프, 브라츨라프(Braclav), 체르니고프 3개 주에서의 완전한 자치와 40,000명의 군대를 보유함과 동시에 헤트만 국의 신료들은 전원 우크라이나 인으로 임명하며 정교회 신자들의 특권 등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세임까지 승인한 즈보리프 조약이었으나 우크라이나의 카톨릭 신자들은 이 조약을 인정하길 거부했으며, 카톨릭 신자와 코사크 및 정교회 신자 간의 갈등이 커지자 폴란드는 코사크 헤트만 국을 다시 공격했다.
종전과 달리 이번에는 폴란드가 유리한 상황에 놓였는데 1651년 6월 베레스테치코 전투에서 폴란드 군이 압도적인 대승을 거두고, 9월 빌라체르크바(Bilacherkba) 전투에서 폴란드 군이 다시 승리를 거두자 코사크 헤트만 국은 휴전을 요청하여 9월 28일 빌라체르크바 조약이 체결되었다. 조약의 결과, 코사크 헤트만 국의 지배는 키예프 주 1개 정도로 축소되었고, 군대의 숫자도 20,000명으로 감축해야 했으며, 조약을 비준할 세임에 대표를 파견하여 국왕이 자비를 베푼 것에 감사를 표해야 하는 등 폴란드-리투아니아 및 국왕에게 완전한 충성을 맹세해야만 했다. 하지만 코사크 세력을 대거 격파하여 소멸 직전까지 몰아넣었던 내용의 이 조약은 세임에서 비준되지 못했다. 코사크에게 허용한 군대의 숫자가 너무 많다는 이유에서 세임이 리베룸 베토(LIBERUM VETO)를 선언한 것인데 흐멜니츠키 또한 굴욕적인 내용의 조약에 불만을 강하게 품고 있었다. 휴전 기간이 끝나자마자 코사크는 반격을 개시하여 1652년 바티흐(Batih) 전투에서 대승을 거두면서 베레스테치코에서의 패배를 설욕했다. 하지만 여전히 폴란드의 세력은 강성했고, 그에 반해 코사크 세력은 매우 미약했다. 베레스테치코에서의 대패를 기점으로 코사크 인들의 독립 국가 건국이라는 계획은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였다. 결국 흐멜니츠키는 최후의 수단으로 같은 동 슬라브 세력인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지원을 요청하였다.
그리고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흐멜니츠키의 봉기는 폴란드 전역을 초토화 시키는 대재앙으로 번지게 되었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알렉세이 1세의 참전 결정으로 인해 폴란드 사이의 전쟁이 불가피하게 되었다. 1654년 7월 41,000명의 러시아 군대가 폴란드를 침공해 벨리(Belli)와 도로고부시(Dorogobusi)를 점령했으며, 이어 대 러시아의 전진기지이자 강력한 요새인 스몰렌스크 공략에 나섰다. 또한 스몰렌스크 공략을 수월하게 진행하기 위해 오르샤(Otsha)를 점령하고 8월 슈클로프(Shuclov)에서 전투를 벌였으며 셰펠레비체(Szepielewicze) 전투에서 폴란드 군이 격파 당했다. 폴란드는 코사크 군과 이를 지원하는 러시아의 병력을 동시에 상대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되었으며 이후 전쟁은 폴란드에게 불리해져 갔다. 러시아 군대의 공세에 버티던 스몰렌스크마저 9월 23일 함락 당하면서 전세는 러시아, 코사크 군의 우세로 기울어졌다. 한편 우크라이나 방면에서는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이 서부 지역으로 진격에 나섰다. 전쟁이 시작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러시아 군대가 므스치슬라프(Mscislav)와 로슬라블(Roslavl)을, 코사크 군이 호멜(Homel)을 함락시키면서 드네프르 강과 드루지나 강 사이의 전 지역이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에게 완전히 장악되었다.
리보니아-벨라루스 방면에서는 프스코프에서 출발한 러시아 군대가 7월 1일 네벨(Nevel)과 17일 폴로츠크(Polosk), 11월 1일 비쳅스크(Vichepsk) 등 벨라루스의 도시들과 루자(Ruza), 레제크네(Rezekne) 등 폴란드령 리보니아의 도시들을 함락시켰다. 흐멜니츠키가 지휘하는 코사크 군은 볼히니아 지방으로 밀고 들어가 그 해 연말까지 오스트로흐(Ostroh)와 리우네(Liune) 등을 함락시켰다.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은 빠른 속도로 폴란드 동부 전역을 초토화 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국토의 동부 전역이 전화에 내몰리자 폴란드는 함락된 영토를 회복하기 위해 반격에 나섰다. 1654년 겨울부터 1655년 봄까지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마그나트이자 야전 헤트만인 야누시 라지비우가 크림 칸국과 동맹을 맺고, 벨라루스 지방에서 반격을 개시해 오르샤를 탈환했다. 이어 마힐료프를 포위했으며 폴란드 군이 오흐마티프 전투와 자시키프 전투에서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을 연달아 격파한 것을 기점으로 전쟁은 이제 밀고 밀리는 양상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전황이 불리하게 돌아가자 알렉세이 1세는 군 지휘관들에게 위협적인 칙령을 내리면서 사기를 진작시키고, 대규모 공세를 펼칠 것을 지시하였다. 이에 리투아니아 군은 러시아-코사크 연합군의 공세에 소극적으로 저항하면서 6월 러시아 군대는 슬로님(Slonim)과 클레츠크(Cleczko), 벨리시(Belisi)를 함락시켰다.
1655년 7월 3일 민스크와 체르카시가 흐멜니츠키의 코사크 군에게 함락되었다. 7월 31일에는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수도였던 빌노(Bilno)가 러시아의 수중에 놓이게 되었다. 이어 대규모적인 여름 공세의 성공에 힘입어 러시아 병력은 8월 카우나스와 흐로드나까지 점령했으며 흐멜니츠키가 이끄는 코사크 군은 여세를 몰아 갈리치아를 공략하여 9월 브레스트 전투에서 폴란드 군을 격파한 후 리보프를 공격하고 루블린에 입성했다. 이 정도로 몰린 상황이면 폴란드가 당장 항복해도 이상하지 않을 수준이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폴란드의 위기는 여기서 멈추지 않았다. 스웨덴은 당시 발트 해의 지배권을 장악하는 숙원을 이루기 직전까지 도달하는가 하면 30년 전쟁에서 단련된 군대를 보유하는 등 당시의 스웨덴을 스웨덴 제국으로 칭하기도 할 정도로 전성기를 달리고 있었지만, 군대를 유지할 자금이 부족하다는 문제도 함께 겪고 있었다. 전쟁 당시에는 동맹국이었던 프랑스 왕국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지만 종전 이후에는 프랑스의 지원이 끊어졌고, 새로 확보한 영토에서 벌어들이는 세수에도 한계가 있었다. 당시 재정 문제로 인해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었던 국왕 칼 10세 구스타브는 여기에서 군사적인 성공으로 인해 재정 문제를 일거에 해결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더불어 바티흐 전투에서 정예군이 제압당하고 한창 러시아-코사크 연합군과의 전쟁으로 인해 혼란에 빠진 폴란드는 스웨덴에게 있어 아주 좋은 식민지 감으로 보였다.
한편, 폴란드 바사 왕조는 여전히 쇠락을 거듭하고 있는 가운데 스웨덴의 왕위를 주장하고 있었다. 얀 2세의 바사 가문은 본래 스웨덴의 귀족 가문으로, 덴마크가 주도하는 칼마르 연합에서 벗어나는 스웨덴 독립 전쟁에서 구스타브 바사가 주도적인 역할을 맡아 스웨덴의 왕위를 차지하게 된 가문이었다. 핀란드까지 탈환에 성공했지만 즉위 초창기 구스타프 바사의 신세는 귀족들의 대표자에 불과했고 왕권도 불안정했다. 1529년 베스테르예틀란드에서 귀족 및 성직자들이, 1533년 달라르나에서 농민봉기가 일어났다. 구스타브 1세는 반란을 가혹하게 진압했다. 이후 귀족들은 조용해졌으며 달라르나 지역도 다시는 반란을 일으키지 못했다. 이 바사 가문이 폴란드 왕위를 차지하게 된 계기는 지그문트 3세였다. 지그문트 3세의 아버지는 구스타브 바사의 차남인 요한 3세로 스웨덴에서 태어나고 자랐던 스웨덴 인이나 다름없던 인물이었다. 그렇지만 어머니인 카타르치나 야기엘론카(Katarzyna Jagiellonka)가 폴란드 국왕 지그문트 1세의 딸이었기 때문에 폴란드 국왕이 될 자격까지 충분했다. 그리하여 1587년 폴란드 국왕으로 선출된 지그문트 3세는 요한 3세가 1592년 사망하자 스웨덴 왕위까지 물려받으면서 스웨덴과 폴란드의 동군연합을 이끌게 되었다.
하지만 지그문트 3세는 어머니의 영향으로 인해 독실한 카톨릭 신자였고, 루터교가 다수를 차지하던 스웨덴을 다시 카톨릭 국가로 돌려놓으려고 하자 카톨릭화 정책에 반발한 숙부 칼 공작이 반란을 일으켜 1599년, 지그문트 3세를 폐위시켰다. 폐위당한 지그문트 3세는 당연히 스웨덴의 왕위를 주장하며 스웨덴과 여러 차례 전쟁을 벌였으나 칼 9세가 사망한 이후 스웨덴 왕으로 즉위한 칼 9세의 아들이자 지그문트 3세의 사촌은 당대의 사자왕이라 불리던 구스타브 2세 아돌프(Gustav II Adolf)였다. 결국 지그문트 3세는 1629년 알트마르크 조약으로, 스웨덴 왕위를 탈환하지 못하고 리보니아 전쟁을 통해 차지한 리보니아 지역만 상실하게 되었다. 구스타브 2세 아돌프가 뤼첸 전투(Battle of Lützen)에서 전사한 이후, 딸 크리스티나(Kristina) 여왕을 거쳐 1654년 구스타브 2세의 외 조카 칼 10세 구스타브가 스웨덴 왕위에 오르면서 바사 왕가가 끝나게 된다. 스웨덴에는 팔츠츠바이브뤼켄 왕가(House of Palatinate-Zweibrücken)가 들어섰으나 폴란드의 바사 왕가는 지그문트 3세가 사망하고 그 자식들인 브와디스와프 4세, 얀 2세 카지미에시 시대에도 계속해서 스웨덴 왕위를 주장했다. 폴란드 바사 왕가의 이러한 주장이 불편했던 칼 10세는 폴란드를 제압함으로써 왕위 문제를 확실하게 정리해버리려고 했다.
그 동안 돌아가는 상황을 지켜보던 스웨덴은 폴란드-리투아니아에 선전포고를 하며 제2차 북방 전쟁을 일으켰다.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폴란드-리투아니아의 결속력은 형편없었다. 국왕 얀 2세는 폴란드 슐라흐타들에게 인기가 없었을 뿐더러 그들의 문화였던 사르마티즘을 경시했다. 더구나 그는 전직 예수회 수도자였으며 지역 추기경이기까지 했다. 종교를 수단으로 하여 폴란드 귀족들의 권한을 제한하고, 개입하려 했던 얀 2세에 대해 많은 귀족들이 반발했다. 이에 수많은 귀족들을 스웨덴 국왕 칼 10세에게 가담하게 만드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했던 것이다. 특히 스웨덴 편에 가담한 일부 슐라흐타들은 칼 10세에게 폴란드 국왕으로 즉위할 것을 권유하는 사태까지 이어졌다. 이에 스웨덴 군은 약체화된 폴란드 군을 격퇴하고 결국 무저항 상태의 수도 바르샤바를 함락시켰으며, 이에 놀란 국왕 얀 2세는 슐레지엔으로 도주하고 말았다. 그러자 러시아는 폴란드와 휴전하고, 곧바로 스웨덴령 리보니아를 공격했다. 한편 러시아와 대치하고 있었던 야전 헤트만 야누시 라지비우는 리투아니아의 다른 마그나트들과 함께 폴란드-리투아니아를 해체하기 위해 스웨덴과 결탁했다. 연방에서 리투아니아 대공국을 분리하여 스웨덴-리투아니아 동군연합을 이루며 리투아니아는 다시 2개의 공국으로 나누어 하나는 자신이, 또 하나는 종제인 보그스와프 라지비우(Boguslaw Radziwill)가 가지고, 스웨덴을 종주국으로 인정하는 케다이니아이(Kedainiai) 협정을 맺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