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리투아니아 동군연합, 모스크바 대공국, 오스만투르크 제국 사이에서 독립을 유지하던 크림 칸국은 1466년 하츠 게레이가 사망하자, 그의 아들들이 칸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 내전을 벌이게 되었다. 그 중 장남인 누르 데블레트(Nur Devlet)가 킵차크 칸국의 지원을 받아 칸의 자리에 오르게 되자 다시 킵차크 칸국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다고 많은 귀족들이 반발했다. 크림 칸국을 구성한 부족들은 주로 몽골-타타르계였지만 이들은 투르크화 된 타타르였다. 우선 같은 타타르 족이었어도 몽골과 직접적인 관계의 타타르와 크림 칸국의 주 세력인 타타르와는 다른 부분이 존재했던 것이다. 누르 데블레트와는 반대로 투르크계 타타르 귀족들이 대부분 지지하던 자는 하츠 게레이의 6남인 멩글리 게레이(Meñli Geray)였다. 멩글리 게레이와 누르 데블레트와의 권력 정쟁으로 인하여 크림 반도 전역이 이들의 세력 다툼으로 번져가면서 불안한 정국을 유지했다. 멩글리 게레이는 자신의 형인 누르 데블레트가 세바스토폴을 떠나 케르치 지역에 순시를 나서자 누르 데블레트의 왕궁 수비대를 진압하고 궁에 들어가 대칸으로 즉위했다. 이에 누르 데블레트는 킵차크의 주력군과 함께 세바스토폴로 돌아와 성을 공격했으나 멩글리의 강한 수성 전으로 인해 고전했다.
그러나 1468년 초, 킵차크 칸국 내부에서 정변이 발생해 주력군이 대거 사라이로 퇴각하자 멩글리는 성 밖을 나와 누르 데블레트의 잔여 군대를 공격했다. 누르 데블레트는 멩글리의 군대에 대패하여 킵차크 칸국으로 도주했고 그의 군대는 거의 전멸했다. 이렇게 멩글리는 잠시 칸의 자리에 올랐으나 그의 형인 누르 데블레트는 카프카스에 주둔 중인 킵차크 군을 거느리고 다시 크림 반도에 입성했다. 멩글리는 케르치 해협을 봉쇄하고 누르 데블레트와 킵차크 군을 방어하려 했으나 누르 데블레트는 케르치를 우회해 헤니체스크(Генічеськ) 지역으로 하여 들어와 비어있는 세바스토폴을 점령했다. 세바스토폴이 함락된 것을 안 멩글리는 급히 회군했지만 이미 누르 데블레트는 세바스토폴 성 밖까지 전초 기지를 만들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배후에는 킵차크 군이 케르치 해협을 건너 멩글리를 추격해오고 있었다. 멩글리는 제노바 식민지였던 카파(Qapa)로 망명했으며 멩글리는 카파의 제노바 인들과 동맹을 맺은 후 1469년 제노바 군의 지원을 받아 흑해를 건너 다시 세바스토폴 앞 바다에 모습을 드러냈다. 멩글리는 1470년 1월, 세바스토폴 공략에 착수했다. 그러나 하치 게레이가 제노바 군을 방어하던 시기와 다른 점이 있다면 이 때 크림 군을 도울 국가가 없었다는 것이다.
누르 데블레트는 킵차크 군을 거느리고 세바스토폴 항구 입구를 봉새했지만 킵차크 군의 주력은 육군이었기 때문에 상륙해 오는 제노바 군을 제대로 막아내지 못했다. 결국 1차 저지선인 항구를 장악한 제노바 군은 이어 성을 향해 공성전을 감행했다. 초반에 누르 데블레트와 킵차크 군은 성공적으로 방어하며 우세를 보였으나 카파를 거점으로 군대를 최대 15만까지 양성한 제노바 군과 맞서기에는 병력에서 열세를 면치 못했다. 상당히 불리한 상황에서 성 내 물자들이 봉쇄되었고 누르 데블레트는 세바스토폴을 탈출할 계획을 세우고 북문을 열고 탈출을 시도했다. 이에 멩글리는 북문으로 진격해 퇴로를 차단하고 탈출하는 킵차크 군을 섬멸한 다음 형인 누르 데블레트를 사로잡았다. 멩글리는 누르 데블레트를 제노바의 감옥에 보내어 가둔 후 다시 칸의 자리에 올랐다. 누르 데블레트는 1471년 감옥에서 탈출하여 오스만투르크로 망명했다. 오스만투르크의 메흐메트 2세는 누르 데블레트를 맞아들여 폰투스의 총독으로 삼았다. 처음에는 누르 데블레트가 폰투스의 해군을 양성하는데 많은 노력을 기울였으나 메흐메트 2세의 신하들이 누르 데블레트가 반란을 일으킬지 모른다고 우려하여 그를 이스탄불로 불러 올렸다. 한편 멩글리 게레이는 카파의 제노바 인들에게 감사를 표시했다.
그리고 세바스토폴 내의 항구들을 제노바 인들에게 내주고 그들이 장기 조차할 수 있도록 해주었다. 이에 카파 뿐 아니라 제노바 시에서도 많은 상인들이 세바스토폴에 몰려들었고 크림 칸국의 경제적인 요소들을 천천히 장악하기 시작했다. 1472년 전반에 걸쳐 제노바 인들이 세바스토폴의 상권을 장악함으로써 크림 지역의 타타르 상인들이 상당한 피해를 입게 되었고 타타르 상인들 뿐 아니라 다른 투르크 상인들도 크게 피해를 입게 됨으로써 불만이 고조되었다. 멩글리는 1473년에 베네치아 상인들도 끌어들여 크림 칸국의 상권은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이 장악하게 되었다. 게다가 베네치아 상인들은 제노바 상인들과 함께 크림 남쪽 연안과 인근 지역을 식민지로 삼고 군사 기지를 세웠다. 그러한 상태에서 크림 칸국은 오랜 시간동안 이탈리아 도시 국가들에 구속된 상태로 존재하고 있었다. 멩글리 게레이는 당시 세력을 급속도로 확장하던 오스만투르크 제국에 대항해 제노바와 테오도로스(Teodoros) 공국과 동맹을 맺었는데 이러한 부분이 오스만투르크 술탄 메흐메트 2세의 반발을 불러왔다. 특히 테오도로스 공국은 루마니아 왈라키아 공국과 오스만투르크 사이 오늘날 루마니아 콘스탄차와 도나우 강 삼각주까지 걸쳐 있었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볼 때 오스만투르크에게 직접적인 영향을 줄 수 있는 공국이었다.
이에 대규모의 해군을 도나우 강 하구에 파견한 메흐메트 2세는 육군으로 하여금 왈라키아를 견제하고 그 사이의 테오도로스 공국을 공격했다. 툴체아에 상륙한 오스만 군은 5차례의 전투를 통해 왈라키아와의 교통적 연계성이 있을 확률이 높은 요충지 갈라치를 함락시켰고 이어 콘스탄차를 공략해서 한 달간의 공성전 끝에 함락시키고 테오도로스 공국을 멸망시킬 수 있었다. 마침 크림 칸국에는 1474년 하츠 게레이의 4남이자 멩글리 게레이의 형인 하이데르 게레이(Hayder Gerey)가 얄타에서 반란을 일으켜 세바스토폴을 포위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대규모의 하이데르와 그를 후원하는 베네치아 공국의 함대가 대대적으로 크림 반도를 침공해 각지를 점령하고 세바스토폴을 공격했다. 그리고 제노바의 합류를 방해하기 위해 카파에 60여척의 함대를 포진시키며 도시를 봉쇄했다. 당시 멩글리 게레이는 상권을 이탈리아 상인들에게 강탈당한 타타르와 투르크 상인들의 불만이 팽배하여 이를 파악한 하이데르가 투르크와 타타르의 상권을 돌려주고 독자적으로 장사를 할 수 있게 도와주겠다고 공언했고 이들은 성 안에서 대량 소요를 일으켰다. 결국 멩글리의 세력이 약화되고 소요를 일으킨 상인들이 세바스토폴의 성문을 열자 하이데르가 입성하여 성 주민들을 살해하기 시작했다. 그러한 소요 사태로 인하여 멩글리는 세바스토폴을 탈출하여 옙파토리야(Евпатория)로 도주했다.
한편 오스만투르크는 테오도로스 공국을 멸망시킨 후, 제노바 인들의 도시인 카파를 공격했다. 1474년에서 1475년까지 벌어진 카파 공성전으로 인하여 카파의 제노바 인들은 철저히 고립되었다. 이에 제노바 인들은 멩글리에게 사신을 보내 배후에서 오스만투르크를 공격하도록 했다. 하이데르에게 밀려나 옙파테리야에 있던 멩글리는 위기에 놓인 카파의 포위를 풀기 위해 육로로 진군해 오스만투르크의 배후를 노렸다. 대칸의 지위를 위협받고 있던 멩글리에게 제노바와 카파는 반드시 필요한 동맹국이었다. 카파는 오늘날 우크라이나 미콜라이프(Миколаїв)에 위치한 지역이었으며 옙파토리야를 떠나 카파에 이르기까지 여정은 매우 길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카파에는 물자가 떨어져 완전히 고립되어 있었고 결국 오스만 군에게 성벽이 돌파당하며 마침내 함락되었다. 크림 반도를 지나 멩글리가 헤르손에 이르기까지 카파가 함락된 것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그러한 차단된 정보의 허점을 이용하여 오스만투르크는 밤새 달려 헤르손을 기습했다. 불의의 기습을 당한 멩글리의 군대는 순식간에 무너졌다. 대부분의 멩글리 군대는 전멸하거나 오스만 군의 포로가 되었고 멩글리 또한 오스만 군의 포로가 되었다. 오스만 군은 멩글리와 그의 제장들을 이스탄불로 압송했고 메흐메트 2세는 멩글리를 갈라타 탑에 가두고 자신에게 대항한 것에 대해 정복한 종족들과 국가, 민족들의 본보기로 삼았다.
오스만투르크는 이어 크림 칸국까지 공격했고 하이데르와 베네치아 군을 축출했다. 이어 메흐메트 2세는 누르 데블레트를 다시 크림 칸국의 대칸으로 복권시켜 크림 칸국을 속국으로 삼았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은 1477년 킵차크 칸국의 아흐메드 칸과 그의 사촌 야니베그(Yanibeg)가 크림 칸국을 침공하여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킴으로 인해 일시적으로 킵차크 칸국의 지배하에 들어가게 된다. 한편 이스탄불로 끌려가 감옥에 갇혀 있었던 멩글리는 칸 자리를 되찾게 해준다면 오스만투르크에 복속하여 앞으로 영원히 술탄의 봉신으로 살 것을 맹세했고 때마침 킵차크 칸국에 멸망한 크림 칸국의 귀족들이 오스만투르크에게 킵차크를 추방하고 멩글리를 복위시켜달라고 요청하면서 1478년 멩글리는 포로 신세에서 풀려나 킵차크 칸국을 몰아내기 위해 출정한 오스만 군와 함께 크림 반도에 돌아왔다. 그리고 멩글리는 오스만 군의 도움으로 킵차크 군과 누르 데블레트를 함께 몰아내고 칸 자리를 되찾으면서 크림 칸국은 오스만투르크의 속국이 되었다. 그러나 크림 칸국이 오스만투르크의 속국이 된 사실은 오히려 멩글리와 그의 후계자들의 위치를 더욱 강화시켜 주는 결과가 되었다. 그러한 이유는 크림 칸국의 타타르 족들이 강력한 오스만투르크의 지원을 받게 됨으로써 러시아 인들과 폴란드 인들이 그들을 상대할 때 더욱 오스만투르크를 염두 해두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당시 초강대국이었던 오스만투르크에게 의존한 결과, 크림 칸국은 다른 몽골계 국가들인 카잔 칸국과 아스트라한 칸국이 1552년과 1556년, 각각 러시아에게 멸망당할 때도 겨우 살아남을 수 있었다. 이러한 크림 칸국의 위상이 오스만투르크 내에서도 매우 높았는데, 도널드 쿼터트의 <오스만 제국사>와 시몬 몬테피오레(Simon Montefiore)의
따라서 우크라이나 동부 지역은 주인 없는 땅이 많아 다른 슬라브 인들이 경작하여 본인들의 것으로 삼았고 한동안 드네프르 강 일대는 사람이 살지 않는 공백지가 되다시피 한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코사크들이 이 공백 지를 접수한 후에 러시아와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 도주해 온 농노들을 받아들인 후 세력을 키워 러시아에 대항하는 전초 기지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리투아니아의 농노제가 대단히 악명 높았음에도 불구하고 농노들의 반란이나 소요가 적었던 이유가 노예로 납치되는 것보다는 농노로 사는 것이 낫다고 판단하였기 때문이었다. 주로 노예로써 상품 가치가 높은 처녀들이 납치의 주 목적이 되었고, 어린아이들은 납치해도 노역에서 병들어 죽기 쉽다는 이유로 납치하지 않고 살해했다고 한다. 폴란드-리투아니아에서만 해도 1474년부터 1694년까지 매년 평균 2만 명 가까이가 크림 타타르 전사들에게 납치되거나 살해당했다고 전해지니 당시 농노로 살기를 선택했던 사람들이 느꼈던 공포는 상당했다. 또한 국가적인 차원에서 인구가 지속적으로 유출되는 상황이다 보니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와 폴란드-리투아니아 공국 입장에서는 국력 성장을 막고 오히려 세금이 줄어 그 영향력이 약화되는 주 요인이기도 했다. 이에 크림 칸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관계를 악화시킨 것은 러시아 로마노프 왕조였다.
겨울에도 얼지 않는 항구인 부동항을 찾아 헤매던 러시아는 처음에는 발트 해에 매우 큰 관심을 보였지만 리보니아 전쟁의 실패로 인하여 흑해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고, 흑해 북쪽 해안지대를 차지하고 있던 크림 칸국을 정복하기로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에 속국이 멸망하게 되면 크림 반도와 카프카스 동부 지역의 거점을 상실하게 되는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의 공격에 맞서게 되는데, 이것이 러시아-투르크 전쟁의 시작으로 나타난다. 하지만 1768년에서 1774년까지 계속된 1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에서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에게 패배하고 러시아와 쿠취크카이나르자(Quchikai) 조약을 체결하여 카파를 러시아에 할양하고 크림 칸국의 독립을 인정했다. 하지만 1783년 러시아는 크림 칸국을 무력으로 정복했다. 이에 오스만투르크는 조약 위반이라며 러시아에 항의했지만, 러시아는 오스만투르크 항의에 다시 전쟁을 일으켜 오스만투르크를 공격하게 된다. 1787년부터 1792년까지 2차 러시아-투르크 전쟁이 벌어지나 역시 오스만투르크가 패배했고, 1792년 러시아와 이아시(Iashi) 조약을 체결해 오스만투르크는 러시아의 크림 칸국 병합을 인정하였으며 추가로 예디산(Yedisan) 지역을 러시아에 할양하면서 급격히 그 세력이 쇠퇴했다. 그리고 마지막 크림 칸국의 대칸으로 서유럽 식 군제 개혁을 시행하는 등 나름대로 개혁을 추진했던 샤힌 게레이(Shahin Geray)의 마지막도 비극으로 종결되었다.
1783년 러시아 군에 의해 상트페테르부르크로 옮겨져 1787년까지 감금당했다가 이후 감금에서 풀려나 자신이 태어났던 에디르네로 돌아오지만 이어 러시아 군을 끌어 들였다는 죄목으로 인하여 오스만투르크 정부에 의해 체포되어 이스탄불로 끌려가 같은 해, 로도스에서 참수되고 말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