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제이(Ejei) 칸은 링단 칸과 수타이 태후(蘇泰太后)의 아들이며, 에제이는 몽골어로 권리, 오른쪽, 올바름을 뜻하고 있다. 그리고 콩고르(Kongor)는 자기, 자신을 뜻하고 있다. 그는 링단 칸의 장남이며, 낭낭태후(娘娘太后)의 소생 아부나이(阿布奈)의 이복형으로 알려졌다. 당시 수타이 태후(蘇泰太后)는 여허(Yehe, 葉赫) 추장 긴타이시(Gintaisi, 金台石)의 손녀로, 데르케르(Derker)의 딸이다. 후금의 누르하치의 첩 중 1명인 몽고저저(Monggojeje, 孟古哲哲)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는 여허부(葉赫部)의 추장 양기누(Yangginu, 楊吉砮)의 딸이자 긴타이시(金台石)의 누이였다. 1634년 8월 7일 아버지 링단 칸이 티베트 원정을 가던 중 청해 지역에서 갑작스러운 두통, 혹은 천연두로 사망했다. 17세기 초까지부터 대칸의 권력은 점점 약해지기 시작했다. 아버지 링단 칸은 칸을 자처하는 투메드(土默特) 부를 멸망시키고, 차하르(察哈尔)에 비 호의적이던 하르친(科爾沁) 부 왕공들을 정벌했다. 이들은 모두 후금의 누르하치에게 귀순하게 된다. 링단 칸이 죽고 난 1634년, 에제이 칸과 그의 어머니는 1635년 2월 만주 기병대 1만 명의 기습으로 인해 포위되었다. 세첸칸부(車臣汗部)의 슈루이(Shurui)는 링단 칸의 카툰에게 자신에게 귀순할 것을 요청함으로써 압력을 가했다.
1635년 2월 에제이 칸과 그의 어머니, 계모 낭낭태후 등은 청나라 군에 항복하여 홍타이지에게 원나라 시대부터 전해진 전국새의 옥새를 바치며 대칸의 칭호를 넘겨주게 된다. 이후 홍타이지로부터 진왕(親王) 혹은 고륜액부친왕(固倫額駙親王) 혹은 차하르 친왕(察哈爾亲王)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그리고 친왕(亲王)의 작위는 그가 사망하고 난 1661년 동생 아부나이에게 상속되었다. 하지만 아부나이는 공개적으로 청나라 황실에 대해 불만을 표출하고 만주족들의 황실 행사에 참여를 거부하다가 1669년, 강희제에 의해 체포되어 심양에 유폐되었다. 어떠한 이유에서였는지 아부나이는 만주에서 탈출하려던 도중에 다시 청나라 군에게 체포되었다. 이후 아부나이는 청 태종 홍타이지의 딸이자 효단문황후(孝端文皇后) 보르지긴 씨쪽 철철(哲哲) 소생 고륜온장공주(固倫溫莊公主) 마가다(Magada) 혹은 아비다(Avida)와 결혼했다. 효단문황후의 친정 역시 보르지긴 씨족으로, 카라친(喀喇沁) 부 출신이며 친정아버지 망구스(Mangγus)는 칭기즈칸의 동생 주치 카사르(拙赤合撒儿)의 17대 손이었다. 그는 1661년, 포로로 있던 중, 북경에서 병으로 사망했다. 이후 남몽골 지역은 차하르 부족이 계속 다스리다가, 1635년 만주족이 세운 후금에 링단 칸의 아들 에제이가 항복하고 이후 만주와 함께 청나라 아이신줘러(愛新覺羅) 황실의 지배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인해 청나라의 황제는 원나라의 옥새를 얻어 몽골 제국 대칸의 권위를 이양 받았고, 남부 몽골 지역은 완전히 청나라의 일부가 되었다. 이후 청나라는 만주족과 몽골족은 연합 제국의 형태를 유지하며 고종(高宗) 건륭제 때는 할하부가 중심이 된 북부 몽골까지 병합했다. 청나라는 18세기 건륭제 시기에 북부 몽골과 신강(위구르스탄), 티베트에 걸쳐 존재하고 있던 오이라트 계통의 준가르 제국을 격전 끝에 멸망시키고 이 지역들까지 정복해 버렸다. 청 태종 홍타이지는 에제이 칸의 장례에 친왕의 의장을 하사하였으며, 몽골의 예로 라마 독경을 하게 명령받았으며 중국 승려를 불러 운구를 호송하게 하였다. 그의 작위는 그의 동생 아부나이에게 같은 해 9월에 상속된다. 후일 아부나이는 청나라 황실에 복종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심양에 감금당한다. 이어 아부나이의 작위는 아부나이의 아들 보르니(Boroni)에게 주어졌다. 아부나이의 아들인 보르니가 청나라 황실에 대한 불만을 표출하지 않게 하기 위하였지만, 결국 1675년, 그는 동생 루브증(Rubjung)과 모의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차하르 이 외에 다른 몽골족까지 가세할 것으로 믿었으나 모든 몽골족들은 그를 배신했고 이로써 봉기는 실패하게 된다.
이것으로 몽골은 청나라에 완전히 정복되었다. 몽골 북부 할하부 또는 외 할하부의 3칸부인 투시예드 칸부, 세첸칸부, 자사그투 칸부는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을 수 있는 몽골의 대표 지도부로 생각했었다. 이들은 1691년 준가르 칸국과 강희제의 전쟁 중 양측의 압력을 받아 청나라의 속국이 될 때까지 형식적으로 청나라 조정에 조공을 보내고 자립을 형성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어 내몽골 지역에는 이번원(理藩院)이 설치되었는데 이번원의 전신은 몽골아문(蒙古衙門)으로, 홍타이지 시기 몽골을 정복하고 나서 몽골 지역의 관리를 위해 설치되었다. 장관으로 승정(承政)을 두었는데, 순치제 연간에 상서(尙書)로 개칭되었다. 순치제 16년에는 예부(禮部) 소속이 되었다가 순치제 18년에는 독립된 관청으로서 이번원(理藩院)이 설립되었다. 이번원은 19세기 제2차 아편전쟁 후 외국과의 외교를 위해 총리각국사무아문(總理各國事務衙門)을 설치한 이후로 러시아와의 업무만을 위해 이관되었다. 당시에도 이번원의 장관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상서로 종1품이며 차관으로 좌우 시랑을 두었다. 청나라는 만한병용(滿漢倂用) 정책에 따라 장차관을 비롯한 고위직인 중앙정치기구에서는 만주족과 한족을 1명씩 임명하였다. 그러나 이번원만큼은 오로지 만주족만이 임명되었다. 이는 몽골인의 수가 자리에 비해 매우 모자랐기 때문에 만주족이 대신 임명될 수밖에 없었다.
몽골계 민족들은 14세기 후반 몽골 제국의 해체 이후 분열과 쇠퇴를 거듭했다. 분열 후 수많은 몽골계 종족들이 난립했으나 17세기 초 중기에 한창 일어나던 후금에 남몽골이 복속되어 대원진국옥새를 바치고 후금과 일체화되었다. 17세기 말기에 강희제는 원정을 통해 준가르 인들을 추방해 버리고 북부 몽골을 복속시켜 버렸다. 이 때 준가르 명군인 갈단 칸은 패퇴 후 알타이 인근에서 자결로 끝을 맺었다. 갈단 칸이 죽고 체왕 랍단이 뒤를 승계하면서 준가르 제국은 동투르키스탄 및 몽골 서부 지역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이번에느 티베트를 복속시키는데 성공했다. 이후 18세기 중기 건륭제 때, 준가르 제국을 멸망시키며 준가르 인들을 대량 학살하는 과정에서 청해호 일대와 티베트, 동투르키스탄이 차례대로 청나라에 복속되었다. 이 때 중가리아 일대는 준가르 제국의 절멸로 인해 공지(空地)가 되어 버렸고, 여기에 한족들과 동투르키스탄 남부 타림 분지 일대에 살던 위구르, 알타이 일대에 거주하던 카자흐, 키르기스 등 각 투르크의 예하 부족들을 이주시키며 둔간족이라 불리는 한족 무슬림 회족이 생겨나게 되었다. 북부 몽골의 할하 인들은 청나라의 간접 지배하에 놓인 이후 끊임없이 청나라에 저항하게 된다. 할하 등 북부 몽골인들은 반독립 지대로 조공 국가였던 형식이라 각 지역의 칸들이 자치적으로 통치하고 중국 관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청나라 황실에 종속되었기 때문에 불만이 많았다.
이들은 한족과는 물론 남부 몽골과도 이질적인 존재들이었다. 이들 중 투시예드 칸부(Түшээт хан аймаг)는 가장 세력이 강했다. 이들 투시예드는 튀시예드 칸부 혹은 아이마그(Aymag)라 불렸다. 이들은 북원에 속해 있었던 몽골의 귀족 부락이자, 북원의 멸망 이후 독자적으로 외몽골 할하 중동부에 있던 외 할하의 부(아이마그)였다. 투시예드는 몽골의 외 할하부 중 대표적인 수장격인 부락이다. 투시예드의 역대 칸들은 칭기즈칸 가문의 직계 후손들로 황금씨족이었다. 투시예드 칸부의 영역은 울란바토르 시와 그 주변 지역, 외몽골 중부 지방이었다. 세첸 칸부, 자사그투 칸부와 더불어 외할하 3부, 혹은 사인노얀(Sainnoyan) 부, 코토고이드(Kotogoid) 부의 알탄(Altan) 칸부와 더불어 외 할하 5부로도 불린다. 몽골의 다얀 칸 사후, 생성된 외몽골의 5개의 독립된 칸부였다. 다얀 칸은 생전에 몽골의 6부를 분할하여 자신의 11명의 아들에게 분봉하였고, 외몽골 중동부의 할하 부 중 외 할하부는 다얀 칸의 11번째 아들 게르센지 잘라이르(Гэрсэнз жалайр, 1513~1549)에게 분봉되었다. 1549년 게르센지 잘라이르의 사후 그의 아들들 중 오노후이 콩타이지(Онохуй хунтайж)는 외할하 좌익을 물려받았으며, 후일 투시예드 칸부로 발전하게 된다. 게르센지 잘라이르의 사후, 외 할하부는 그의 아들들에게 분할 상속되었지만, 외 할하부는 북원-타타르의 대칸 정권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활동했다.
내몽골의 다른 부족들이 후금에 투항하여 참여하고 1635년 내몽골과 북원의 대칸이 청나라에 투항한 이후에도 이들은 외 할하에서 독자적인 세력을 유지하였다. 1697년 자오모도 전투(Battle of Zhao Modu)에서 외몽골 5개의 칸부가 청나라 군에게 패배하면서 형식적으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 또 다른 칸부인 세첸 칸부(Сэцэн хан аймаг, 車臣汗部, 徹辰汗部) 혹은 외할하 동로(外喀爾喀東路)는 북원-타타르 왕국의 외몽골 외 할하부 극동부에 위치한 몽골 부락의 하나였다. 이들은 항가이 산맥 외곽과 고비 사막 일대에 거주하였다. 자사그투 칸부, 투시예드 칸부, 사인노얀 부락, 코토고이드 부락, 알탄 칸부 등과 함께 외 할하를 구성하는 주요 부락(아이마그)이었다. 북쪽으로는 러시아와 동쪽으로는 여진족, 그리고 서쪽으로는 투시예드 칸부와 접하고 있다. 북원이 청나라에 항복한 이후에도 다른 외몽골 부락과 함께 독자적으로 존속하였으나, 1697년 자오모도 전투에서 외몽골 5개 칸부가 청나라 군에게 패하면서 형식적으로 청나라의 종주권을 받아들였다가 1911년 폐지되었다. 세첸 칸부는 몽골 다얀 칸의 11남 게르센지 잘라이르의 넷째 아들인 아민두팔(Amindupal)의 아들 수루이(Surui)가 세첸 칸이라 자처한 것에서 유래한 부락명이다. 이들은 1635년 청나라 태종 홍타이지에게 항복했다.
또 다른 칸부는 자사그투 칸(札薩克圖汗) 또는 자사그투 칸부(札薩克圖汗部, Засагт хан аймаг) 혹은 자사그투 칸부(扎薩克圖汗部)로 17세기 초부터 1923년 청나라와 중화민국 시대에까지 존속했던 몽골 칸부의 일종으로, 몽골 할하부에서 분할된 할하 4부 중 하나이며, 지도자의 호칭은 자사그투 칸이다. 이들은 할하 우익에서 출발하였다. 투시예드 칸부, 세첸 칸부와 함께 3칸부로 불리고 있다. 자사그투는 1923년 몽골 인민 공화국이 건국된 이후 폐지되면서 부락은 완전 해체되었다. 1688년 청나라 때에 복속되어 1691년 자크비라 세친비둘 노엘맹(札克畢拉色欽畢都爾諾爾盟, Заг голын эх Бидэръяа нуурын чуулган)으로 개편, 자사그투 칸이 직할하는 자사그투 부 중기 외 8개의 기(旗)로 개편되었다. 자사그투 칸부의 칸은 1691년 청나라 황제로부터 화석친왕(和碩親王)의 작위를 받았다. 몽골 북원 다얀 칸의 아들 잘라이르 부의 게르센지 콩타이지(Гэрсэнз хунтайж)의 아들 아시카이(Ашихай)가 차하르 우익을 형성했고, 아시카이의 손자 라이쿠루 칸(Лайхур хан, 1562~1610)은 1580년 혹은 1587년에 자립하여 잘라이르 부를 세웠다. 영지의 동쪽은 사인노얀 부로 분할되었다. 청나라에 귀순한 이후로는 17~18세기 중 여러 개의 기로 다시 세분화되어 분할되었다.
그리고 알탄 칸 왕조(阿拉坦汗王朝)가 내몽골에 존재했는데 이들은 1606~1691년 몽골 할하 북서부 우부스 호(Увс нуурын)와 데르거 모른(Deleugeo moleun) 일대의 코토고이드(Хотгойд) 부를 다스리던 역대 칸들의 칭호로 나타난다. 코토고이드 부의 역대 지도자들은 칸과 카간 대신 콩타이지(渾台吉)라는 직책을 자칭하였다. 할하의 알탄 칸, 코토코이드 칸부로도 부르며 한자로는 투메드 부의 지도자 알탄 칸(俺答汗)과는 다르게 번역되고 있다. 이들은 1606년 자사그투 칸부에서 자립, 1691년까지 기록에 등장한다. 자사그투 칸부의 라이쿠루 칸이 오이라트를 통제하기 위해 1606년 자사그투 칸부의 북쪽 영지와 코토고이드 부를 슈루이 우바시 콩타이지(Шуруй Уваси Конгтайжи)에게 콩타이지 직책을 부여하고 맡기게 된다. 그러나 알탄 칸부의 콩타이지는 후일 자사그투 칸부와 갈등하면서 대립하게 되었고 이들은 1691년 청나라에 복속되어 사라졌다. 3대 알탄 칸 에린친 롭상 콩타이지(Эрин Чин Роб Санг Конгтайжи)는 1697년까지 코토고이드 부를 다스렸다. 1682년 에린친 롭상 콩타이지는 자사그투 칸부와 갈등을 벌이다가 축출되었으나, 준가르 칸국과 청나라의 도움으로 복귀하지만 다시 자사그투 칸부에 체포되었다. 그의 후계자이자 동생인 센자브(Сенжаб)가 계승하였으나 1703년 센자브가 사망하면서 단절되었다.
이에 청나라는 코트고이드 부락이 있던 지역에 이번원(理藩院, Tulergi Golo-be Dasara Jurgan)을 설립하여 만주와 남몽골 부락민들에게 이번원의 모든 업무를 담당하게 했다. 특히 남몽골의 차하르, 투메드, 우랑카이, 칼간 등 이미 청나라와 일체화한 몽골 부족들이 할하 거주지로 들어가 이들을 통제하게 되었다. 그리고 저항하는 북부 몽골 인들을 억제하기 위해 기존 구역을 분할하고 일정한 유목지를 설정했다. 그리고 구성원들로 하여금 자기가 속한 행정 구역 외부로 이주하는 것을 엄격히 제한하는 분할통치(分而治之)를 시행했다. 이 제도를 시행할 때 설정한 행정구역이 호쇼트 또는 코쇼(Qosi'u)와 솜(Soum), 치굴간(Чигулган)이었다. 북부 몽골이 독립한 이후에 당시 몽골 인민 공화국이 고슈트를 없애고 치굴간을 오늘날 애막(Аймаг)으로 바꾸면서 별도의 행정 구역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청나라와 중화민국 시기를 거쳐 현대 중국도 각각 한자로 번역해 기(旗), 소목(蘇木), 맹(盟)으로 사용하고 있다. 이는 몽골인들의 역동성과 단결성을 억제하고, 청나라의 지배 구조에 순응하면서 동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이미 만주에 일체화된 남부 몽골인들은 이 기/맹 체계들을 따르고 있어 한족들이 어디 성(省) 주민인가 물어볼 때 이들은 무슨 기(旗)에 속해 있는 주민인가 물어보며 서로의 출신을 정의했다.
청나라는 이질적인 북부 몽골 인들을 억제하는 동시에 한편으로는 일찍 일체화 된 남부 몽골인들에 대해서는 이들을 적극 우대하였다. 남부 몽골인들의 경우 일찍부터 후금 시절에 합류하였기 때문에 팔기군에 몽골병(蒙古兵; 몽고병) 또는 몽골팔기로, 한족으로 구성된 한족병, 만주족과 타 여진족 부족들 그리고 시버족으로 구성된 청나라 병사와 함께 엄연한 팔기군의 구성원이었다. 물론 수효는 한족병, 한족 군대 기인이 가장 많았고 팔기 내에서 몽골기인들은 상대적으로 소수였으나 이들은 한족군기인보다 우대 받는 집단이었고, 청나라 시대 남부 몽골 지역의 132기 중 106기가 다얀 칸의 후손이었다. 황실은 주로 이들 보르지긴 왕공들의 딸과 지속적으로 통혼하였다. 그로 인해 남부 몽골 왕공들의 기세는 매우 높았으며, 특히 준가르 원정과 할하 복속 당시 남부 몽골 왕공들이 주력이었기에 더욱 그러했다. 사실 남부 몽골 지역이 중국화(中國化) 된 원인은 이 외에도 여러 가지가 있다. 청나라 시기 남부 몽골에 광산 개발이 이루어지자 한족들이 남부 몽골에 정착하면서 남부 몽골이 중국에 동화되어 버린 것과 한화된 만주인이 몽골인과 혼인함으로 인해 한인 문화가 몽골 지역으로 급속히 전파된 것 등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