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아웅산 테러 42주년. 한국은 한글날이지만 42년 전에는 미얀마 양곤 아웅산 묘지에서 북한에 의한 테러 사건의 비극이 있었다. 아웅산 묘지 공원에는 미얀마의 실질적인 국부라 할 수 있는 아웅산 장군이 잠들어 있는 신성한 곳이다. 더불어 우리에게는 현대사에 있어 매우 중요한 곳이기도 하다. 이 사건을 "아웅산 묘역 테러사건"이라 불리는데 1983년 10월 9일 이곳 아웅산 묘역에서 미얀마를 방문한 전두환 대통령을 상대로 북한이 테러를 저질러 한국인 17명과 미얀마인 4명 등 21명이 사망하고 수십 명이 부상당하는 사상 최악의 참사가 벌어졌다.
1970~1980년대는 대한민국과 북한에서 제3 세계 외교전이 매우 치열하게 전개되던 시기였다. 서로 상대방 국가와 단교하고 자기들과 수교를 요구하면서 상대방 국가를 고립시키려고 시도하는 한편 국제 사회에서 자국의 외교적 정통성과 국격, 위세 등을 인정받기 위해 양측이 냉전을 벌이고 있었던 시기이기도 했다. 당시 미얀마는 제3 세계 비동맹 국가였지만 사회주의 이념을 지지하던 국가였기 때문에 북한과 매우 좋았다. 그러나 경제 등 현실적인 이유로 인해 이 시점에는 남한과의 관계 개선에도 많은 의욕을 보이고 있었다고 한다. 이러한 부분들을 감안하여 당시 전두환 대통령은 미얀마를 대한민국과 가장 우호적인 국가로 확실히 만들기 위해 1983년 가을로 예정된 동남아시아와 미얀마, 인도, 스리랑카, 호주, 뉴질랜드 순방에 미얀마를 첫 번째 순방국으로 지정했다.
당시 정부 핵심 관료들, 특히 외교에 밝은 노신영, 이범석 장관 등이 미얀마 방문을 반대했다. 미얀마가 국력이 약한 국가에, 군사 독재 국가의 특성상 외교를 통해 얻을 만한 실리적인 부분과 국제적 위상이 떨어진다는 것을 고려해야 했고, 결정적으로 북한을 더 지지하는 성향의 국가라는 것을 감안할 때 한국과 정상 외교를 맺기에는 다소 거리가 있다는 주장이었다. 게다가 북한의 테러 위협이 상존하는 지역이라 더욱 위험하다고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83년 10월 8일 전두환 대통령을 비롯해 핵심 참모 및 관료들로 구성된 대한민국 정부 수행원 일행은 서울을 떠나 양곤으로 향했다. 전용기가 무사히 양곤에 도착하고 공항에서 당시 미얀마 대통령인 우 산유(U San Yu)의 영접을 받는 것을 시작으로 영빈관에서 양국 정상 간 대담도 나누는 등 첫날 순방 일정은 매우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전두환의 미얀마 순방 이틀째인 10월 9일의 공식 일정은 오전 10시 30분에 미얀마의 독립 영웅 아웅산 장군의 묘소를 참배하는 것이다. 행사를 위해서 서석준 경제기획원장관 겸 부총리, 이범석 외무장관 등의 정부 수행원들과 기자들은 먼저 인야레이크 호텔에서 아웅 산 묘소로 별도 승용차편으로 이동해서 10시 18분 쯤 아웅 산 묘소에 가장 먼저 도착했다.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함병춘 대통령비서실장, 심상우 민주정의당 총재 비서실장, 민병석 대통령 주치의 등 나머지 수행원들은 영빈관에서 의전 행렬의 선발대로 10시 10분 경에 아웅산 묘소로 출발하여 서석준 부총리 등 일행들과 최종 합류하도록 되어 있었다. 10시 26분 경 태극기를 단 감색 계통의 벤츠 280SE 차량을 선두로 한 제대 차량이 앞뒤로 경찰의 호위를 받으면서 묘소에 도착한 후 공식 수행원, 기자, 경호원들의 시선이 자연히 이 차에 모아졌다. 창문이 선팅되어 있어 차량 내부는 잘 보이지 않았으며 이 차에서 내려 도열에 합류한 이들은 바로 이계철 주 미얀마 대사 일행이었다.
수행원들끼리 간단히 악수로 인사를 나누었고 이후 수행원들 모두 2열 횡대로 도열했다. 기자들도 촬영 준비를 했다. 아웅산 묘소의 나팔수들은 행사 진행 전 시범 삼아 연주를 시작했는데 이 과정에서 아웅산 묘소 참배 현장을 직접 볼 수 없었던 북한 공작원들은 애초에 폭탄의 폭파 시점을 전두환의 묘소 참배를 알리는 진혼 나팔 소리에 맞추기로 했었다고 한다. 결국 진혼곡 연주가 나오자마자 곧바로 테러를 진행했다. 나팔수가 시범 연주를 하지 않았으면 스케줄이 늦었더라도 전두환은 폭탄 테러를 피할 수 없었을 것으로 보인다. 폭발 이후, 한국의 서석준 부총리와 이범석 외무부 장관, 김동휘 상공부 장관 등 각료와 수행원 17명이 사망하고 기타 수행원들이 부상당하였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뛰어난 경제학자이자 대통령 비서실 경제수석비서관인 김재익(金在益, 1938~1983) 씨도 여기서 숨을 거두었다는 것이다.
김재익씨는 대한민국을 오늘의 반석 위에 올려 놓은 경제 천재였던 인물이다. 그는 금융실명제, 물가안정화 정책, 정보화 정책, OECD 가입, 수입자유화 정책 등을 입안했고 한국 사회의 인플레이션을 수습하기 위하여 금융과 재정을 긴축하고, 수입을 자유화하며, 임금 상승은 생산성 증가의 범위 내로 억제하고, 환율과 금리는 시장에서 결정되도록 해야 한다는 기조를 유지했다. 또한 경제의 능률 향상을 위해서는 개방과 경쟁이 필수적이고 정부의 간섭을 최소화해야 한다는 원칙을 가졌다. 김재익 덕분에 물가상승률은 20%에서 3.2%로 줄었고 경재성장률이 1980년을 제외하고 모두 10%를 넘었을 정도로 그는 5공 시대에 국가 경제를 활성화시켰던 아까운 인물이었다. 테러 사건 직후 당시 전두환 대통령이 모든 일정을 취소하고 귀국했다. 당시 미얀마는 군부가 통치하는 공산주의 국가였고 사실 우리보다 북한이 더 가까운 사이였다.
당시 미얀마 외무장관이 탑승한 차량의 타이어가 펑크가 났고, 세계 최빈국인 미얀마 특성상 택시가 주변에 없기 때문에 택시를 타는 것이 늦어지면서 오히려 전두환 대통령의 지각은 불가피했다. 미얀마 외무장관이 도착하지 않으니 전두환이 영접 요원들과 인사하거 향후 스케줄이 늦어지게 된 것이 테러를 당하지 않은 원인이 되었다. 이어 전두환 대통령과 비슷한 외모를 지닌 주 미얀마 한국 대사이자 비서실장인 이계철 대사가 태극기가 휘날리는 차를 타고 먼저 도착했으며 당시 경호실장과 처장의 시범 연주를 지시했고 진혼곡 나팔 소리가 나오자 전두환이 도착했다고 착각한 테러리스트들이 폭탄을 터뜨렸다. 그러나 자국의 독립 영웅인 아웅산 묘역에서 폭탄 테러를 일으킨 것은 참을 수 없는 무례였고, 이에 미얀마 정부를 포함하여 전 국민들 또한 격노했다. 이에 미얀마는 북한과의 국교를 즉시 단절했다. 그리고 공산권 국가로 최초로 북한을 국가 승인까지 취소했다.
이어 테러리스트 3명 중 2명을 사형시키고 나머지 1명 또한 북한에 돌아가지 못하고 복역 중에 사망했다 전해진다. 이후 아웅산 공원은 2012년까지 비공개로 전환되었다. 그러나 2012년 5월, 이명박 전 대통령이 방문하여 당시 테러 때 희생된 관료들의 넋을 위로함과 동시 다시 일반인에게도 개방되었다. 필자는 2019년 4월 6일에 미얀마 방문 때, 양곤의 아웅산 공원 묘소를 일부러 찾아 헌화했다. 당시 희생된 한국의 정치인과 기타 분들을 위해 짧게나마 묵념을 드렸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