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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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나라 말기인 1911년 당시에는 이홍장과 서태후라는 절대 권력의 상징이 모두 사라진 상태로 서구 열강들이 식민지 확장을 노리며 넓은 대륙을 잠식해 들어오던 도중에 청나라의 지식층들은 황실을 사수하여 열강들로부터 중국을 방어하자는 수구파와 서구의 영향으로 입헌군주제로 돌리고 영국처럼 의원내각제 가야 한다는 입헌파, 그리고 민주적인 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 등으로 3분할 되어 극도로 혼란한 상황에 빠져 있었다. 여기에 각종 한족과 중화사상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세력, 비밀결사 등이 개입하면서 중원의 혼란상은 날로 극심해져만 갔다. 1911년 5월 8일 황족인 경친왕 아이신기오로 이쾅(Aisin-Gioro Yikuang)을 초대 총리대신으로 출범시킨 청나라의 첫 번째 헌정 내각은 많은 개혁파들을 실망시키기에 충분했다. 이들은 청나라의 일부 전향적 조치에 기대하고 입헌내각운동을 벌이던 자들이라 많은 기대를 하고 있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 내각에서 한족은 13명 중 4명에 불과했고, 나머지 만주족들의 각료 가운데도 수상인 경친왕을 제외하더라도 7명이 황족으로 이루어졌다. 이는 개혁과 반대로, 만주족 귀족들과 황족들이 청나라 내, 이권을 완전히 독식하려는 의도가 돋보였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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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우창에 있는 쑨원의 동상. 이 자리는 우창봉기 당시 ‘호북 군정부’가 수립되었던 자리로 동상 뒤에 보이는 건물은 현재 신해혁명 기념박물관이다. 출처 : 필자의 직접 촬영

 

특히 가장 큰 문제는 우전부(郵傳夫, 우체-통신부) 대신이었던 성선회(盛宣懷, 성쉬안화이)라는 인물이다. 청나라의 지도층은 성선회의 주도로 민영으로 돌아가던 자국의 철도를 강제로 국유화했다. 그리고 그것을 담보로 삼아 열강들에게 차관을 얻으려고 했는데 이는 고스란히 빚이 되어 쌓여만 간다는게 문제였다. 중국의 장거리 철도가 제대로 부설되기 시작한 것은 청일전쟁에서 일본에게 패배한 이후부터였다. 당시 철도를 건설하기 위한 예산은 서태후가 이화원 중건과 더불어 회갑연 등에 사용한 예산이었다. 이 예산은 명목상으로 해군예산이었지만 이 중에는 텐진에서 산해관, 봉천(奉天)을 거쳐 길림까지 부설하려던 철도 건설비도 포함되어 있었고 이 때만 해도 해군아문(海軍衛門)에서 철도 부설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기 때문에 철도 건설 예산도 함께 편성이 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에 대한 예산 편성도 서태후의 이화원 중건으로 탕진하는 바람에 청나라는 한반도로 대규모 병력을 전개시키지 못해 청일전쟁의 패배를 야기했다. 참고로 청나라가 철도 부설하려고 여순에서 생산했던 6,000톤의 레일은 결국 청일전쟁 중에 일본군에게 전리품으로 넘어갔다. 중국이 건설한 최초의 철도는 1881년 6월 9일 당산(唐山, 현 탕산시)에서 석탄산지 서각장(胥各庄)으로 이어지는 9.7km 구간의 철도였다. 후일 이 철도는 톈진까지 이어졌다. 


이 철도는 6월 9일에 개통되었으며 개통일인 1881년 6월 9일은 조지 스티븐슨의 탄생 100주년이었다. 이날을 개통식으로 삼은 것은 이홍장의 전격적인 결정이었다. 또한 중국인이 설계하고 공사한 최초의 철도는 첨천우(詹天佑)가 건설한 북경에서 장자커우(張家口)까지 180km의 거리로 이루어진 경장선(京張線)이었으며 1905년부터 1909년까지 건설했다. 북경에서 한구(漢口)까지 경한선(京漢線)이 건설된 정도였다. 그 외에는 북경에서 남경(南京)과 연결된 경포선(京滬線), 북경에서 봉천까지 연결된 경봉선(京奉線)을 1912년까지 건설하는 상태에 있었다. 특히 길이 1,212km의 경한선(京漢線)은 개통 첫 해인 1906년에만 350만 냥이 넘는 수입을 올리면서 철도가 어느 정도 돈이 된다는 인식이 널리 퍼져  있었으며 이는 철도 건설이 붐이 일었을 정도로 청나라 전국에서 철도 건설 사업이 이어졌다. 신해혁명이 발발하기 직전 청나라의 철도 총연장은 9,000km에 이르렀을 정도로 광범위해졌다. 1897년 당시 양자강을 지나는 지역에 철도 관련 부설 이익권을 가지고 있었던 영국은 광저우(廣州)에서 한구까지 이어지는 철도인 월한선(越漢線)을 부설하는 것을 제안했다. 40년 동안 청나라를 부국강병 시키키 위해 전력을 다한 성선회는 이를 영국의 중대한 위협으로 판단하였다. 철로 부설권을 영국이 가지게 되면, 청나라는 주권을 가질 수 없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는 그 상황에서 1900년 미국 자본(미국합흥회사)을 빌려 철도 국유화를 추진했다. 


영국에게 받은 차관 400만 파운드를 연 5.9%로 철도 운영을 통해 30년 동안 갚아 나가려고 한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한 일이 잘 된다면 북쪽의 북경에서 내려오는 경한선과 남쪽의 월한선이 이어지면서 북경에서 광저우까지 이어지는 대동맥이 완성되는 것이었고 아마 광동 지역 개발도 동시에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결론적으로는 이 철도 건설은 결국 이루어지지 못했다. 거기에는 두 가지의 원인이 있었다. 첫 번째, 기술의 문제였다. 신해혁명이 발생한 1911년 당시 월한선 철도는 광저우에서 광동성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으며 호남성(湖南省) 장사(長沙)와 주저우(株洲) 사이를 연결하는 중간 구간이 1911년에 간신히 개통되었고 우한에서 장사를 연결하는 구간의 공사는 여전히 지지부진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실제 역사적으로 월한선은 여러차례의 중단 사태를 거쳐 1916년에 광저우 북쪽 삼수(三水)에서 소관(韶關)까지 이어지는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1918년에는 우한-장사 구간이 완성되고 마지막 남은 소관-주저우 구간은 북벌로 인해 국민당 정부가 들어선 1929년에 이르러서야 공사가 시작되어 1936년에 전 구간이 완성되었으며, 중국을 남북으로 철도를 연결시키겠다는 발상은 우한에 양자강 철교가 지어지는 1957년에 완성되었다.


이런 부분들은 지속되는 전쟁과 국내 혼란으로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두 번째로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와 같은 국유화 작업은 각 지방에서 일어나는 민간 자본으로 실시하는 철도 부설하는 방식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것이었다. 1903년 당시 사천성(四川) 총독이었던 석량(錫良, 시량)은 횡으로 이어진 철도인 사천-한구를 연결하는 천한선(川漢線) 철도를 부설하기 위해 외채가 아닌 민간자본에 의지하자는 의견을 제기했다. 그러자 이러한 의견을 청나라에서는 "철로간명장정(鐵路簡明章程)"으로 철로의 민간부설을 허가하게 된다. 그리고 1905년 서태후가 총애했던 신하인 장지동(張之洞)은 호북(湖北), 호남(湖南), 광저우의 대표들을 모아 신상회의(紳商會議)를 소집하여 월한철도 부설권을 회수하게 된다. 이에 미국합흥공사에 675만 달러까지 돌려주면서 상인들의 주도로 일부는 관청과 합작하여 대량의 민간철도들이 부설되었다. 게다가 이는 단순히 중국의 유지, 유한 계급들의 금액만을 모은 것이 아니라 서민들과 거지들의 돈까지 모았는데 이것이 후일 폭동의 단초를 제공하게 된다. 그러나 성선회의 입장에서는 민영자본에게 이를 맡긴다는 것은 철도를 오히려 망치는 것이라 판단했다. 


성선회의 원칙은 철도는 국력이기 때문에 지분 분할보다는 차관으로 외국자본을 받아야 가능하다는 것이었고 실제로 투자 회수가 길고 대량의 자본이 필요한 철도 산업이 국영화가 필요하다는 성선회의 견해는 틀린 말이 아니었다. 그리고 민간 주도로 넘어간 이후, 중국의 철도는 더더욱 개설이 늦어지게 된 것이다. 성선회는 장지동을 설득하여 민간 부설권을 회수해 1909년 독일, 영국, 프랑스 은행의 돈 550만 파운드를 빌려 지금의 호남 지방과 호북 지방의 철도 차관 계약을 실현했다. 물론 민간 진영들의 반대는 매우 심각했고 결국 장지동은 갑작스러운 병으로 인해 사망했다. 성선회는 민간 진영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철도 국유화에 더욱 박차를 가했다. 그러던 차에 성선회가 새로운 내각의 우선부대신으로 오른 것이다. 그는 1911년 5월 민영화된 월한선과 천한선 전역을 국유화하는 것을 조정에 주청했으며 조정은 이를 받아들여 직예(直隷), 호광(湖廣) 총독을 거친 단방(端方)을 내려보내 일을 처리하게 했다. 그러나 갑자기 언제 돌려줄지 모르는 국가 보증만을 남기고 재산이 휴지조각이 된 자들은 여기에 가만 있지 않았다. 심지어 주식을 대신한 공채들은 철도가 완료된 뒤에야 보상하기로 되어 있었다. 


여기에 영국, 프랑스, 독일, 미국 등, 4개 국 은행단에 600만 파운드를 연리 5%, 40년 안에 상환하기로 하면서 사천, 광동, 호남, 호북의 염세와 이금, 탄광까지 담보로 맡겼다. 결국 청나라의 민중들에게 있어 철도의 국유화가 오히려 철도를 외세에 팔아먹는 것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일부 지역인 의창(宜昌)에서 만현(萬縣) 구간의 철도 공사는 중단되기도 했다. 결국 이를 반대하는 대규모 민중 시위가 발생했다. 5월 14일 창사에서 국유화 반대 시위가 벌어졌고 이를 시작으로 창사에서 주저우까지 철도 노동자들의 반대 시위가 벌어졌다. 각지에서 서민들의 이권수호운동이 발생했는데 이를 보로운동(保路運動)이라고 한다. 이를 조직화된 것이 바로 보로운동회(保路運動會)다. 이어 동맹 휴학과 납세 거부도 나타났다. 특히 성선회를 민족의 역적으로 인식하여 그를 능지처참하자는 분위기가 사천성에서 매우 강하게 나타났다. 결국 9월 7일에는 강력 토벌에 나선 경찰들로 인해 보로운동의 수뇌부가 체포되었고, 이에 사천성에서 일어난 10만 명이 넘는 시위 군중에게 발포하여 경찰과 서민들 사이에 대규모 유혈사태가 벌어졌다.


강에 띄운 유동나무 목판인 "수전보(水轉報)"는 수백판이 금강을 따라 떠내려가며 소식이 삽시간에 사천성 전역에 전달되었고 이어 보로운동회의 봉기로 이어졌다. 그리고 9월 말 사천 영현(榮縣)에서 첫 봉기가 성공하였다. 이어 사천성의 성도(省都)인 성도(成都)의 도시 기능이 마비되면서 사태는 사천성만으로 축소시키기에는 무리가 되었다. 결국 이를 제압하기 위해 청나라의 군대가 민중 봉기의 거점인 사천성으로 투입되었고 이로서 호북 지역의 중요한 군사 거점인 우창에는 군대가 비어 있게 되었다. 때마침 좋은 명분을 얻은 우창의 쑨원(孫文)을 중심으로 한 민주적인 공화정을 열망하는 혁명파는 정부군의 파병을 구실로 1911년 10월 10일, 마침내 우창에서 봉기를 일으켰다. 이 봉기는 우창의 8사단 공병 제8 대대의 부사관과 사병들부터 시작하여 보병, 포병, 사관생도까지 가세했다. 총독 서징(瑞澂)이 도주했고 혁명군은 당일 우창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민주공화정을 기반으로 하는 군사 정부 수립을 선언하게 된다. 이 때가 신해년(辛亥年)인 1911년이었기 때문에 신해혁명이라 지칭되고 있다. 신해혁명이 1911년 10월 10일에 일어나 십(十)이 두 번 들어가서 쌍십절(雙十節)이라 붙여지고 중화민국(中華民國), 현 대만 정부는 오늘을 중요한 국경일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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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10월 10일은 대만에서는 쌍십절(雙十節), 우창 봉기로 인한 신해혁명(辛亥革命) 114주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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