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5-11-14(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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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진남북조 시대 약 400여 년 간의 중국은 남과 북이 분단되어 오랜 분단으로 인해 경제 문화적으로 남북 간의 차이가 컸다. 이를 해소하기 위해 중국을 재통일한 수(隋) 문제(文帝)는 강남과 강북을 이어주는 대운하를 계획하였으나 현실적인 재정 문제로 인해 계획에만 그쳤다. 하지만 아들인 양제(煬帝)가 대운하를 완성시켰다. 양제는 604년에 패륜 행각을 통해 즉위하자마자 만리장성을 보수하는 동시에 대운하 건설을 다시 시작하도록 했다. 이는 남북조 시대 등의 분열 시대로 인해 남북 간의 교류가 원활하지 않게 되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604년 수나라의 양제가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으로 옮겼다. 605년에는 대공사를 일으켜 대운하를 건설하기 시작하였다. 공사 계획의 핵심은 통제거(通濟渠)와 영제거(永濟渠)였다. 통제거(通濟渠)는 605년 개착되었으며 동쪽과 서쪽의 두 부분으로 이루어져 있다. 서쪽은 지금의 낙양 서쪽에서 낙하(洛河)와 곡수(穀水)로 황하와 연결되어 있으며 동쪽은 형양(滎陽)의 사수(汜水)에서 출발하여 황허의 물줄기를 따라 변하(汴河)에 이어지며 회화(淮河)와 합류했다. 통제거(通濟渠)로 인해 황하와 회하(淮河)가 연결되자, 그 해 다시 운하를 개착하여 회하와 장강을 연결하였다. 3년 뒤에 다시 대공사를 일으켜 영제거(永濟渠)를 준설하였다. 


화면 캡처 2025-10-10 101328.png
사진 : 수 양제 시기에 지어진 대운하, 출처 : Wikiwind, Grand Canal

 

영제거는 608년 준설되었으며 심하(沁河)와 기수(淇水), 위하(衛河)를 연결하여 천진(天津)까지 연결하는 것으로 여기에서 영정하(永定河)를 따라 지금의 북경까지 연결될 수 있었다. 2년 후, 강남 운하(江南運河)를 개통하여 여항(余杭, 지금의 항주)까지 연결하였다. 이 운하 개통은 8년의 시간이 소요되었으며 대운하의 전체 길이는 2,700km로 당대 세계에서 가장 긴 운하였다. 양주(揚州)와 진강(鎮江)에서부터 항주(杭州)에 이르는 구간은 모두 400km 정도로 여겨진다. 수도 낙양에서부터 항주에 이르는 구간을 모두 합하면 1,700km 정도이다. 물론 이러한 대사업을 추진한 것에는 수나라 도성인 장안의 식량 문제도 이유 중 하나였다고 한다. 수나라 장안 주위가 척박한 땅이라 식량이 부족하여 이를 조달하는 데 어려움이 있었고 당시 수나라 식량의 주생산지였던 강남에서 말과 인부로 운반하기에는 도성까지 거리가 멀어 효율성이 떨어지며 수로로 운반할 필요가 있었다는 것이다. 따라서 운하 사업 자체는 국가에 필요한 일이긴 했다. 다만, 최소한 서민 경제 문제에 악영향을 최소화할 수 있게 기간을 넓게 잡고 노역에 참여시킬 인원을 적당히 조정했어야 했는데, 결과만 좋으면 된다며 백성들을 강제로 투입시킨 게 문제였다.


거기에다 양제는 대운하를 건설할 때 단순히 실용적인 목적만으로 진행한 것도 아니었다. 운하를 따라 40여 개의 행궁을 지었으며, 운하 옆에는 대로를 건설해서 그 옆에 버드나무와 느릅나무를 심었다.  운하에서 저지대가 발견되자, 양제는 관리 책임자와 인부 50,000명을 강가에 생매장하는 만행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 시기를 다룬 작품들에서는 은(殷)나라 주왕(紂王)의 재림이자 진(秦)나라 시황제(始皇帝)가 만리장성을 축조할 때도 이렇게까지 하지 않았다면서 수 양제의 폭군적인 면모를 강조하기도 했다.  당시 강남 지역은 한(漢)나라 이후 개발되지 않은 매우 기후가 습한 지역이었는데, 이러한 지역에서 백성들을 매우 가혹하게 징집하여 강제 노동을 시켰는데 당시 물속에서 일하는 인부들이 물 밖으로 나와 몸을 말릴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발의 살이 썩어 구더기와 모기 유충들이 들끓었다고 한다. 당시의 대운하는 말 그대로 장강과 황하, 회하를 연결한 것에 그칠 뿐이었다. 이는 강물을 조절할 수 있는 기술이 없었기 때문에 운하를 비스듬하게 대각선으로 팔 수 밖에 없었고, 그러한 기술로 인해 2,700km라는 세계에서 유례를 찾기 힘든 길이를 갖게 되었다. 또한, 강물의 흐름 또한 무시할 수 없었으니 운송선이 운행할 때 계절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게다가 운하가 장안까지 가야했지만 200km 동쪽에 있는 삼문협(三門峽)이라는 최악의 지형이 있어서 조운선은 안전을 위해 300km 동방의 낙양까지 가지 않았기 때문에, 낙양에서 장안까지 운송하는 것도 큰 문제였다. 


그래서 낙양 함가창(含嘉倉)부터 섬주(陝州)의 태원창(太原倉)까지 300리를 육상을 통해 물자를 이송해야 했는데, 물자 이송에 필요한 양도 매우 엄청나서 이동시 운송량의 반이 소모될 정도로 감당하기 힘들었던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수, 당나라 시기에는 대운하 개통 이후 현종(玄宗) 시기까지 비판을 받으면서 낙양을 장안 못지않게 중시했다. 당시에는 직접 황실과 조정이 낙양으로 행행을 했다. 양제나 측천무후는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을 정도였다. 결국 현종 시기인 734년의 낙양 행행 이후 강회하남전운사(江淮河南轉運使)가 된 배요경(裴耀卿)이 삼문협 동쪽에는 집진창(集津倉), 서쪽에는 삼문창(三門倉)을 설치하여 이 두 조창 간에 뚫은 18리의 통로로만 육상 운송으로 이송시키게 했다.  이로 인해 육로 운반으로 소모된 경비를 무려 40만관이나 줄이는데 성공하여 이후 행행이 중단되었으며, 741년에는 섬주자사 이제물(李齊物)이 삼문협에 통로를 내고 강가에서 많은 끈을 이용해 배를 끌어 올리는 토목공사를 해 개원신하(開元新河)가 완공되며 문제를 많이 해소했다. 주전충(朱全忠. 852~912)이 당나라를 멸망시키고 난 이후 세운 후량(後梁)부터 5대 왕조와 송(宋)나라, 금(金)나라까지 변량(汴梁)으로 수도를 옮겼고, 나중에는 갑문을 발명함으로써 더 확실하게 해결되었다. 


후일 금나라가 북송을 정복하고 송나라 조정이 강남으로 피신할 때, 송나라 조정은 금나라의 군대가 대운하를 통해 자신들을 추적할 것을 염려해서 대운하의 각종 시설들을 모두 파괴했다고 한다. 이리하여 1194년, 수나라 양제의 대운하는 끊기고 말았으며, 대운하의 역할은 원(元)나라 시기에는 바닷길이, 명나라 때는 새로 개발된 대운하가 그 역할을 맡으면서 다시 수리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현재까지도 수 양제의 대운하는 끊겨 있는 상태에 있다. 대운하는 장강 이남 지방의 개발과도 맞물려 있는데, 개발이 마무리되던 시기와 대운하가 개통된 시기가 큰 차이가 없었기 때문에 엄청나게 많은 강남의 물량을 화북으로 보낼 수 있었다. 이것이 정치적 헤게모니를 화북 지방이 계속 지니고 있었던 부분적인 이유가 되기도 한다. 14세기 이슬람 여행가 이븐 바투타는 원나라에 방문해 이에 대해 기록을 남겼는데, 대운하를 북경에서 발원하는 강이라 기록했다. 대운하가 개통되어 경제적으로 우월했던 남쪽이 북쪽과 연결되어 중국 전체의 유통이 원활해졌다. 그 경제적, 문화적, 정치적인 영향은 헤아릴 수 없다. 그러나 대운하의 건설에 많은 사람들을 동원해서 학대했기 때문에 수나라는 곧 멸망하고 당나라가 건국되었다. 사실 당나라야말로 대운하로부터 가장 큰 이익을 얻었다. 자체 생산력으로는 식량을 충당할 수 없었던 장안(長安)이 식량을 공급받을 수 있었던 것은 대운하를 통한 물자 수송 덕택이었다.  


대운하의 개통으로 말미암아 개봉이 교통의 중심지로 부상하여 경제적인 중요성이 높아지고, 이후 북송의 수도가 되었다. 개봉성의 성곽 중심을 운하가 관통하고 있었다. 대운하의 첫 번째 통로는 수 양제 양광이 황제에 등극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대거 수리 공사를 벌이게 되었다. 먼저 통제거(通濟渠)를 파서, 북으로 탁군(涿郡)과 통하게 하였고, 이전에 팠던 광통거(廣通渠)와 연결하여 황하(黃河)와 회하(淮河)를 직접 연결하는 수로 교통이 뚫리게 되었다. 그 후에 그는 다시 한구(邗溝)와 장강 남부의 운하를 개조하여, 장강, 회하의 여러 지류를 가로지르는 운하 체계를 완성했다.  대운하, 경항대운하(京杭大運河)는 만리장성과 더불어 명성을 날리고 있는 중국고대의 가장 위대한 두 가지 공사로 전 세계에 유명하다. 대운하는 북으로 탁군에서 남으로 항주까지, 북경, 천진의 두 직할시 및 하북, 산동, 강소, 절강의 4개의 성을 지나가며, 해하, 황하, 회하, 장강, 전당강의 5대 수계를 관통한다. 전체 길이는 1,784km에 이른다. 수 양제 양광이 건설한 대운하는 세계에서 하류 운수거리가 가장 길고 공사 량이 가장 많으며 역사가 가장 긴 운하중 하나이다. 운하의 건설에 동원된 인력, 물력, 재력은 당시 세계에서 가장 거대한 것이었다. 이는 아마도 수 양제 양광이 황제에 오른 지 얼마 되지 않아 대형 운하 공사의 건설을 명하였고, 많은 민간의 인력, 물력, 재력을 동원하였기 때문에, 민간의 원성이 자자했다.


결국은 수나라의 조기 멸망으로 이어졌으며, 수 양제 양광 본인에게도 중국 고대 제왕사상 좋지 않은 명성을 남기게 되었던 것이다. <隋書-煬帝本紀>上, 卷3의 기록에 의하면, 대업 원년, “하남의 각 군의 남녀 백여만을 보내어 통제거를 파게하고, 서원에서 곡, 낙수를 황하에까지 끌어들였다. 대업 4년에는 “정월 을사. 조서를 내려 하북의 여러 군의 남여 100여 만에게 영제거를 파게 하여, 심수를 끌어들여, 남으로 황하에 이르고, 북으로 탁군에 이르게 했다.”라고 하였다. 우선 수 양제는 대운하를 파기 위하여 수백만의 백성을 동원했다. 이 같은 인력동원은 현재라고 하더라도 놀라운 일이다. 수 양제가 이처럼 대규모로 대운하를 파게 된 것에 관하여, 중국 민간에서 전해지는 가장 널리 알려진 견해는 수 양제 자신이 운하의 수로를 따라 양주로 가서 미인들과 즐기는 것 이 외에도 양제가 수양(睢陽)의 지기(地氣)를 약화시키기 위함이었다고 전해진다. 당나라 때 한옥(韓偓)의 <開河記>에 의하면, “수양에는 왕기가 나왔다. 하늘에 점을 친 경순신은 황제에게 아뢰기를 500년 후에 천자가 일어날 것이다”라고 했다고 한다. 그리하여 당시 양제의 처남이자 간의대부(諫議大夫)인 소회정(蕭懷靜)은 운하를 파서 첫째는 광릉까지 가는 길을 열고, 둘째는 왕기를 파버리자고 한다. 양제는 그의 말을 듣고는 아주 좋아하며 대운하를 파도록 지시했다는 것이다. 


명나라 때의 제동야인(齊東野人)도 그의 장회소설 <隋煬帝艷史>에서 장회의 편명을 “경순신이 천자의 기운을 고하고, 소회정은 운하를 파는 계책을 바치다”라고 하였다. 이를 보면 이러한 주장이 아주 상세하고 그럴듯하게 전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부분들은 대운하를 둘러싼 야사이자 전설이다. 이것으로 역사의 근거를 삼을 수는 없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이 풍수상의 원인인지 아닌지는 이미 역사에서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이유에 대하여 그 자신이 양주(梁州)에 가서 황음한 일을 하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라는 것에 대하여, 지금까지 전해져 오는 민간 전설들로 판단해 보자면, 대운하의 성공적인 건설은 최소한 수 양제로 하여금 그의 황음무도한 생활을 즐기는데 도움을 주었다는 것은 확실하다. <隋煬帝艷史>에서는 대운하가 개통된 이후, 양광은 양주경화(揚州瓊花)를 구경한다는 빌미로 여러 번 대운하를 따라 강남으로 가서 엽색 행각을 벌였다. 매번 대운하를 따라 내려갈 때마다, 양안에는 5색 깃발을 휘두르고, 그 기세가 융중했다고 전한다. 대운하가 지나는 소북의 민간에는 지금까지도 양제가 당시 양주에서 미녀와 즐겼던 황음한 이야기들이 많이 전해져 온다. 수나라 때와 수 양제에 관련된 여러 가지 사서와 서적들을 조사하다보면, 그중에는 괴이하고 해결되지 않는 모순이 있다고 느끼게 된다. 


그 사서와 서적에서는 야사 전설의 선입관으로 수 양제를 항상 황음무도한 일만 생각하는 후안무치한 인물로 그리고 있다. 양제를 유사 이래 가장 추악하고 가장 잔혹하며 가장 황음한 폭군이라 묘사하고 있다. 이는 수 양제가 세계에 유명한 대운하 공사를 벌이고 여러 가지 역사적 업적을 쌓은 것과는 아주 배치된다. 마치 수 양제가 대운하를 판 것도 그 목적이 미녀를 만나기 위함이라든지, 왕기를 없애기 위함이라 폄하하고 있다. 만일 정말 그러했다면, 수 양제는 양주의 미녀들을 모조리 궁중으로 불러들여서 즐기면 되지 굳이 운하를 축조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왕기를 없애는데도 다른 여러 가지 방법이 있었을 텐데 운하까지 축조할 이유 또한 없다. 그렇다면 재력이 많이 들고 사람도 많이 동원되는 대운하를 건설한 이유는 남북 지역의 통합을 염두해 두었음을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필자의 판단으로는 수 양제가 대운하를 건설한 직접적인 원인은 단순히 양주로 미인을 보러 가기 위함은 아니었고 수양의 왕기를 없애기 위함도 아닌 국가 통합의 차원이었다고 본다. 오히려 양제는 물자가 풍부한 강남 지역의 많은 물자들을 북으로 운송하여 경도와 황궁에서 사용할 수 있게 하고, 자신이 순유하고 시찰하는데 편리하게 하기 위함이었다고 보는 것이 적절할 것이다. 


이에 대한 일례로 대운하를 판 후에, 강남 지역에서 낙양으로 운송되는 쌀, 비단, 진귀한 보물 등이 계속 궁중으로 들어갔다는 것은 그러한 이유였음을 보여준다. 일부 역사서적에서는 수 양제를 매우 황음하고 지력이 떨어진 인물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수 양제가 대규모 공사로 백성들을 힘들게 하였고, 당시의 문인들을 학살했기 때문에, 후일 양제는 요사스러운 폭군처럼 묘사되게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중국의 역사 속에서 양자강 유역을 기준으로 화북 경제권과 강남 경제권이 분리다. 중국 역사에 있어 군웅할거의 주요 무대가 화북 지방에 집중되다 보니 주목받지 못했을 뿐, 수나라로 통일되기 전까지 강남 지역에서도 왕조가 계속 이어지면서 양자강 유역 이남의 개발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지금까지는 금(金)나라에 밀린 송(宋)나라가 강남 지역으로 이동하면서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었다고 알려졌지만 우리에게 알려진 것과는 다르게 강남의 경제력은 송나라 이전에도 상당한 수준에 이르렀다. 그에 대한 반증이 통일 왕조 중의 하나인 수(隋)나라이다. 수나라는 고구려를 정복하려다가 실패해 짧게 유지되다 망한 중국의 왕조로 여겨진다. 


수나라는 400여 년 동안 고착화 되어있던 혼란스러운 위진남북조 시대를 끝내고 세워졌지만 안정을 회복하기보다 동북아시아의 패권을 장악하려는 과욕으로 동북아시아의 또 다른 강자였던 고구려와의 전쟁을 준비하면서 국력을 과도하게 소모했다. 전쟁을 준비하는 과정에서 필요한 물자들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화북의 물자로만은 부족하게 되니 풍요로운 강남을 이용하려 한다. 육로로 강남의 물자를 가져오는데 비용과 시간이 많이 든다는 것을 파악한 수나라는 이를 수월하게 하기 위해 엄청난 계획을 세우게 된다. 이것이 강남 운하다. 현대의 기술로도 어려운 일이기에 당시 기술로는 불가능에 가까운 것이었지만 엄청난 인원이 동원인 약 1억 5,000만 명으로 추정되어 남북으로 약 2,700km의 길이의 물길을 약 8년 만에 만들어냈다. 그 외에도 토목 사업이 동시다발로 진행되었는데 동원된 백성들의 원망으로 돌아선 민심을 회복하지 못하고 결국 멸망했다. 경제의 중심이었던 여항(黎杭, 항저우)에서 시작된 운하는 정치의 중심 중 하나였었던 낙양(落陽)을 거쳐 북방 군사의 중심이던 탁군(涿郡, 베이징)까지 이어진다. 운하로 강남의 풍요가 화북까지 이어져 전쟁 준비는 마쳤지만 자만으로 시작된 전쟁은 패배는 귀결되었다. 짧았지만 강하고 단순했던 수나라로 인해 이후에 성립된 왕조들은 운하를 이용해 긴 기간 대륙을 통치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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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강남 개발의 역사 : 수 양제 시대에 건설된 대운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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