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1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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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울랴노프스크(Ульяновск)에는 러시아 제국 시절 유명 문학가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이름을 차용한 거리가 있다. 곤차로프는 소설가로 볼가 강 연안의 울랴노프스크에서 상인의 가정에서 출생했다. 그는  모스크바 대학 문학부를 졸업했고 1835년부터 30년 동안 재무성과 내무성 등의 관료생활을 하였다. 1846년 비사리온 벨린스키(Виссарион Белинский, 1811~1848)과 절친이 되면서 문학에 대한 관심이 고조되었고, 1847년에 첫 작품인 <평범한 이야기(Обыкновенная история)>를 발표해서 문단의 지위를 확고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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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수작,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 출처 : 러시아도서출판위원회

 

이 작품은 아도예프(Адоев)라는 시적인 한 청년이 수많은 공상과 정열을 품고 있지만, 숙부의 냉담한 설득에 의해서 그것을 포기하고 결국은 평범하게 일생을 마치게 되는 경로를 사실적으로 객관적으로 묘사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러시아 문단에 러시아 문학 내 이상주의를 환기했다. 그는 예프게니 뿌쨔친(Е. В. Путятин) 제독의 비서로서 세계일주에 올랐고, 1858년에 여행기인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를 발표했다. 당시 곤차로프가 여행한 팔라다 호는 1852년 10월 7일 청나라 5개 항구의 통상권 교섭, 러시아와 일본의 수교라는 임무를 갖고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출발했다. 유럽, 아프리카, 동남아시아, 홍콩, 중국, 일본을 차례로 항해하던 팔라다 호는 1853년 8월 10일 일본의 나가사키(長崎)에 도착하였다.


1853년 8월 9일과 10일 사이 나가사키(長崎) 항구에 정박하여 일본을 1차로 방문했다. 이후로 팔라다 호는 일본 정부와의 수교 협상이 지연되자, 1853년 11월 5일 식료품을 보충하기 위해서 상하이로 떠날 것을 결정하고 11월 11일 출발하였다. 그 후 팔라다호는 상하이 근처 새들 군도(Saddle Islands)를 출발하여 1853년 12월 24일 나카사키에 정박하여 일본을 2차로 방문하였다. 팔라다호는 1854년 2월 27일 마닐라를 출발하여, 5월 22일 시베리아 해안으로 진출하게 된다. 그 사이 1854년 4월 2일 안전 문제로 인해 조선의 작은 섬인 거문도에 임시 정박하여 4월 7일까지 머물렀다. 곤차로프는 당시 조선 땅과 조선인들에 대한 첫 인상을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보이는 것은 초가 지붕 뿐이고, 드물게 군데 군데 주민들이 왔다 갔다 하고 있다. 모두들 마치 수의를 입은 것처럼 흰옷을 입고 있다. 마침내 우리는 극동에 속한 가장 마지막 민족을 보게 되었다.”


그는 조선인이 류큐(현 오키나와)인에 비해 체격이 크고 단단하다는 것과 검고 투명해 햇볕을 전혀 차단하지 못하는 이상한 모자(갓)를 쓰고 있다는 점, 담장 쌓는 솜씨가 형편 없는 걸로 보아 게으른 민족일 것이란 추측 등을 세세히 기록했다. 그는 조선의 지도 보완 등을 이유로 거문도와 동해안을 방문하고 조사하였는데 4월 20일부터 5월 11일까지 조선의 동해안 전역을 실측하였다. 곤차로프는 조선 주민들의 공격적인 태도와 헐벗은 산지 등에 실망하였지만 새로운 문물에 대한 호기심과 외세에 별 거부감이 없는 모습에 대해서는 매우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곤차로프는 이어 자신이 쓴 수기에서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모든 것이 벌거벗었고, 궁핍하고 서글프게 보였다. 주민들이 우리에게 식료품을 줄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다. 그들 자신이 굶어 죽지 않을 정도의 식량을 겨우 가지고 있었다. 내가 보기에는 조선인들에게 유럽인에 대한 불신이 아직 뿌리내리지 않았고, 조선 정부가 외국인과의 통상을 금하는 강력한 조치들을 취하지 않은 때인 지금 관계를 맺는 것이 더 편할 것으로 생각된다. 그들은 유리병과 동으로 만든 단추, 도자기를 보고 달려들었다.”


아마 이는 곤차로프가 삼정의 문란이 극심하고, 안동김씨 세도정권 하에 신음하고 있는 조선의 민중을 본듯 싶다. 그가 조선을 관찰한 시기가, 1854년(철종 5년)이니 안동김씨의 세도가 극에 달할 시기였다. 때는 삼정의 문란으로 인한 민란이 전국으로 확대되었던 시기이기도 하다. 당시에 곤차로프가 본 조선인들은 안동김씨 정권에 수탈된 조선 백성들의 참상을 그대로 묘사한 것이다. 이 외에도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조선 등의 과거와 현재를 세밀하게 관찰했다. 특히 곤차로프는 계층 사회로 이루어진 일본의 관료주의, 쇼군과 다이묘들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권력에 대한 서민들의 공포심 등을 보고 크게 비판하였다. 곤차로프는 개인주의로 팽배한 중국 청나라 또한 뇌물로 부패하였고, 모든 것이 풍족하기 때문에 중국인이 더 이상 발전을 꿈꾸지 않는다고 판단하여 이 또한 비판했다. 


곤차로프는 중국이 단일성과 전체성을 상실하여 개인주의와 불합리성에 빠져들었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조선인이 중국인과 일본인 보다 빨리 서양 문물을 수용하여 발전할 수 있는 원동력으로 ‘사물에 대한 호기심(Любопытство вещей)’과 ‘변화에 대한 열망과 갈망(Желание и тоска по переменам)’으로 파악했다. 곤차로프는 중국, 일본, 유구(琉球), 조선 등의 민족을 하나의 가계로 인식하기도 했다. 곤차로프는 4개 민족 모두가 외모, 성격, 사고방식 등 공통되는 정신적 삶을 형성하고 있다고 파악했다. 그런데 곤차로프는 이 민족들이 갖고 있는 장점보다 ‘황폐하고 비참한 문명사회(Опустошенное и несчастное цивилизованное общество)’라는 시각을 갖고 4개 민족을 비판적으로 보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곤차로프는 기본적으로 조선, 중국, 일본이 인접성의 장점 때문에 유럽과 연결된 동북아시아의 상업적 미래는 매우 희망적으로 판단했다. 일본과 조선이 가깝고, 두 나라는 상하이와 가깝기 때문에 지정학적으로 서로 연결되어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곤차로프는 삼국이 유럽의 무역과 항해를 위해 자유로운 공간이 될 것이라 예측하였다.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우리 입장에서는 좋은 역사적 기록으로 남고 있다. 


곤차로프와 뿌챠찐 제독은 1854년 4월 6일 동해안을 탐사 도중에 러시아 함대 팔라다 호 소속 올리부차(Олибуча) 호가 두 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섬을 발견하고 각각 이름을 붙였다. 


“아침에 발견한 두 개의 높은 바위는 반나절 동안 시야에 있었으며, 이제 명확해졌다. 두 개의 제법 높고 예각의 벌거벗은 바위는 약 300 사젠(642m) 떨어져 있었다. 이들 중 더 높은 서쪽 섬을 ‘올리부차(Олибуча)’라 명명했다. 동쪽 섬을…‘메넬라이(Менелай)’라고 불렀다.”


참고로 올리부차(Олибуча)로 명명된 서쪽 섬은 독도의 서도, 메넬라이(Менелай)로 이름 지어진 동쪽 섬은 동도로 나타나며 아는 서양이 최초로 명명한 독도의 이름으로 나타난다. 이와 같은 곤차로프의 관찰 일지는 러시아가 독도를 대한민국의 영토로 인식하게 하는데 큰 기여를 했던 것으로 보인다. 학자들은 팔라다호가 항해를 마친 2년 뒤인 1857년 러시아 해군부가 조선 동해안도를 그릴 때 독도를 포함시켰다고 했다. 당시 러시아가 독도를 한국의 영역으로 파악했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근거 중에 하나인 것이다. 1858년 러시아에서 출간된 <전함 팔라다(Фрегат Паллада)>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각국의 문화를 생생히 기록한 여행기라는 점에서 문학가 안똔 쩨홉을 비롯해 여행을 동경했던 당대 러시아인들의 베스트셀러였다. 


책 말미의 조선 불시착기는, 전체 여행 일정 중 일부에 불과하지만 19세기 중엽 러시아의 눈에 비친 조선과 조선인들의 모습을 자세히 담고 있다는 점에서 문학적, 학술적으로 가치가 높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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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의 대문호, 이반 곤차로프(Иван Гончаров, 1812~1891)의 조선 방문기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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