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17(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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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에 본격화된 동아시아 국제질서의 변동은 수나라의 등장으로 시작되었다. 534년에 북위(北魏)가 동위(東魏)와 서위(西魏)로 분열된 이후 북중국에서의 상쟁은 북제(北齊)와 북주(北周)의 세력 경쟁으로 이어지다가 575년에 북주가 북제를 정복함으로써 종식되었다. 북주에 의한 북중국의 통일로 인해 다시금 동아시아의 정세는 변동이 예상되었다. 그런데 북주 내부에서 정권의 교체가 발생하게 된다. 581년에 양견(楊堅)이 한족 관료들의 지지를 받고 북주 정권을 탈취하여 수(隋)나라를 건국한 것이다. 문제(文帝)는 즉위한 이후 민심을 수습하고 통치기반을 다지기 위하여 부역을 경감했다. 이어 법령을 간소화하였으며 여러 제도를 정비하였다. 이러한 체제 정비에 따라 수나라의 국력은 급속히 강해졌으며, 이는 곧 대외적인 팽창으로 이어졌다. 588년에 수 문제는 강남을 통일하기 위하여 50만 명의 대군을 출동시켜 이듬해 진(陳)나라를 정복하였다. 수나라에 의한 진(陳)나라의 병합은 당시의 국제질서에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 중국 세력이 통일되어 그 강력한 힘이 외부로 향할 경우, 이제까지의 다원적인 국제질서는 급속히 변동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588년 수나라에 의한 중국의 통일은 주변 여러 나라를 긴장시켰다. 


화면 캡처 2025-10-12 170807.png
사진 : 수, 당 시대의 강남 운하,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수나라 건국 초기에 한 때 수나라와 충돌하던 토욕혼(吐谷渾)은 진(陳)나라의 멸망 소식을 접하자, 먼 지역으로 중심지를 옮기고 조공을 바치면서 수나라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이후 수나라가 멸망한 후, 당나라가 들어서자 송나라 시기까지 변혁론(変革論)이라는 인식론이 나타난다. 이 변혁론은 중국사에서 755년 안사의 난으로부터 11세기 말 왕안석(王安石, 1021~1086)의 신법(新法)에 이르는 시기까지 단순한 왕조의 교체를 넘어서는 혁명적인 전환이 있었다는 역사 인식론이다. 이는 고대에서 중세, 이어 근대까지 이행하는 세계사적 보편 발전 과정을 전제한 것이다. 이러한 변혁론은 당나라와 송나라 시대, 혹은 당나라 말기 5대 10국까지를 고대 혹은 중세로 볼 것인가, 혹은 송나라 시대 이후를 중세 혹은 근세로 볼 것인가 하는 시대 구분의 문제와 관련되고 있다. 그 쟁점은 송나라 시대 토지 소유 형태, 전호의 거주와 이전의 자유와 법적 신분 등의 문제에 집중되고 있다. 토지 소유 문제에 관해서는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가 발달하면서 지주 및 전호 관계가 지배적이었음이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다만, 이와 같은 대토지 소유가 서구 중세의 장원제에 비견되는 일원적 경영이었는지, 혹은 명칭만 장원(莊園)이었을 뿐 실제로는 소규모 영세 토지를 집적한 소농 경영에 불과했는가 하는 논의가 전개되었다. 송나라 이후 봉건론(封建論), 혹은 중세론(中世論)은 일본의 카토 시게루(加藤繁), 슈토 요시유키(周藤吉之), 니이다 노보루(仁井田陞)등이 주장하였고, 주로 도쿄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도쿄학파’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다. 이들은 당나라 이후 균전제(均田制)가 붕괴되고 지주와 전호의 관계를 기반으로 장원제가 발달한 사실에 주목하고 있다. 이에 따라 송나라, 원(元)나라, 명(明)나라, 청(淸)나라 시기의 중국 사회를 봉건 후기로 설정하였다. 하지만 슈토 요시유키는 송나라 시대에 대토지 소유가 발달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직접 생산자로서 전호는 토지에 매여 있으면서 신분적으로 지주에게 강하게 예속된 존재로 간주하였다. 곧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경제적 관계이면서도 경제외적 강제가 포함된 봉건적 관계에 놓인 것으로 이해되었다. 송나라 이후 근세론(近世論)은 1918년경 나이토 코난(內藤湖南)이 주창한 이후 미야자키 이치사다(宮崎市定)에 의해 확고하게 나타났다. 교토대학 출신 학자들, 이른바 ‘교토학파’들이 그 중심에 있었으며, 이후 서양의 중국 사가들이 여기에 가세하였고 한국학계도 대체로 공감하고 있는 편이다. 


이 사론(史論)은 송나라 시대 군주 독재권이 확립되고 관료의 지위가 고양되었으며 인민들의 사유 재산권이 확립되고 서민 문화가 크게 진작되는 등 당나라와 송나라 시기의 전환기에 사회 및 경제, 문화 전반에 걸쳐 나타난 역사적 변화를 근세(近世, The Early Modern Period)로 설정할 수 있다는 관점이다. 근세론은 전호제(佃戶制)를 근간으로 한 대토지 소유제를 인정하며 이 때 지주와 전호는 계약 관계에 놓여 있다고 본다.  송나라 이후 대토지 소유는 명목상 장원이지만 실제로는 근세적 자본주의적 경영이었다고 간주하고 있다. 미야자키는 이에 더하여 지주와 전호는 봉건적 주종 및 예속 관계가 아닌 순수한 경제적 관계이자, 자유농민과 지주 사이의 자유 계약 관계, 일종의 ‘자본주의적 고용 관계’라고 적극 평가하고 있다. 전호의 거주 이전 제한은 그의 도주나 계약 위반에 대처하기 위한 것일 뿐이라는 것이다. 근세론에 의하면, 당나라 시대까지 토지 소유는 토지와 인민을 지배하고 자손을 위한 강고한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것이었다. 반면, 송나라 이후 토지는 일종의 투자 대상이었으며 지주와 전호의 관계는 거의 순수한 경제적 관계였다.


이는 전제 군주의 독재체제 아래 지주제를 기반으로 하는 토지 소유와 촌락 사회 위에서 송나라 시대 근세 사회가 성립되었다고 이해되고 있다. 하지만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만을 근세로 간주하는 논자도 있는 것과 같이, 송나라 이후 중국사 전체를 단일한 근세 사회로 확언하기 어려운 점도 있다. 지주와 전호가 순수 경제적 계약 관계였다고 단정할 수 없다. 전호가 법률상 양민으로서 독립된 경영 주체였지만 지주로부터 이탈이 금지되는 등 신분적으로 지주에 예속되었던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더욱이 동일한 대토지 소유, 혹은 지주와 전호의 관계라고 하더라도 강남과 변경 지역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었다. 미야자키의 자본주의 관점은 일반적인 자본주의 개념과 같지 않다. 근세 자본주의는 전기(前期) 상업 자본과 고리대 자본에 기반을 두었던 유통 경제를 상정한 것이었다. 미야자키는 근세 성립기 중국 사회의 선진 성을 강조하고 있지만, 동시에 그것은 명나라와 청나라 시대 정체성과 표리 관계에 있다. 그는 스승 나이토가 중국 민족의 주체성을 부정하고 일본의 중국 침략 정책을 긍정하는 한계를 보인 것과 맥락을 같이 했다. 


고대에서 중세로든, 혹은 중세에서 근세로든 간에 당나라와 송나라의 교체 시대에 일어난 혁명적인 변화는 연구자들 사이에서 대체로 인정되고 있다. 이는 송나라 시대 이후의 사회는 삼국 시대에서 당나라 시대까지와 크게 다르며 명나라 및 청나라 시대와 동질성이 더 많이 관찰된다. 결국 당나라와 송나라의 변혁 문제는 황제 및 관료 지배의 전통과 자작농의 끊임없는 재생산, 거듭된 왕조 말기의 반란 등 중국사에서의 장기 지속적 요소들을 구체적 역사 맥락 위에서 구조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 이는 황제 지배의 성격, 개별 인신적 황제 지배 및 귀족제 하의 황제권, 그리고 전제권이 성립된 사대부 사회의 황제나 관료의 성격, 향거리선(鄕擧里選)으로 충원된 관료, 구품중정제(九品中正制) 하 문벌 귀족 사회의 관료, 과거제 하의 사대부 관료, 지배층의 성격인 호족, 문벌 귀족, 사대부 및 신사 등을 둘러싸고 일련의 지속과 변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가능해진다. 이에 대한 일례로 후주(後周 : 951~960)의 금군 총사령관이었던 조광윤(趙匡胤)은 960년 거란의 침입을 방어할 목적으로 출병하였다가 북송의 수도 변경(汴京)의 동북쪽으로 40리에 위치한 진교역(陳橋驛) 정변을 통해 송나라의 태조가 되었다. 


이는 안사의 난 이후 강화된 번진(藩鎭) 체제와 5대 10국의 군벌 체제를 증식시킨 사건이었다. 이후 송나라 태조는 당나라 말기 번진의 할거 이래 황제의 권력에서 멀어져 있던 병권 및 재정권, 혹은 민정권의 회수에 주력하였다. 그는 특히 군사제도를 개혁하여 금군을 대폭 강화하는 한편, 특히 인종(仁宗) 시기의 80여 만 명, 병권이 1인에게 집중되는 것을 막기 위해 분권화하고 그 통수권은 황제에 집중시켰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여 그 공정성과 개방성을 넓히는 한편, 황제가 과거의 최종 합격자를 직접 선발하는 전시제(殿試制)를 채택하여 과거 합격자들과 군주의 결속력을 공고히 하였다. 과거제를 발판으로 송나라는 군대와 중앙 및 지방의 주요 실권자를 모두 문관으로 임명하는 문신 관료제를 확립시킬 수 있었다. 황제는 권신의 집단화를 억제하기 위해 관료들이 재상의 사저(私邸)를 출입하는 것을 금하는 알금제(謁禁制)와 관리의 출신지 부임을 금하는 회피제를 시행하였다. 또한 강력한 첩보망을 동원하여 황제 권력에 반하는 관료나 군사 지휘권을 사전에 차단함으로써 관료들이 황제를 두려워하도록 유도하였다. 이러한 변화는 송나라 시대 근세론을 정치적인 배경을 갖춘 군주 독재 체제설의 토대가 되었다.


재상권과 신권을 축소하는 한편 제도적으로 황제권에 정당성을 부여하여 국가의 최종 결정권을 황제에 집중시키는 송나라 시대의 독재 군주권은 개인의 능력에 의해 독재 권력을 행사한 진(秦)나라의 시황제, 한(漢) 무제(武帝), 수 양제, 당(唐) 태종(太宗) 등과는 질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송나라 시대 황제 권력은 당나라의 귀족 사회가 붕괴되고 당나라 말기에서 5대 10국에 새로 등장한 형세호(形勢戶)를 기반으로 나타난 사대부 사회를 배경으로 성립되었다. 사대부는 과거를 통하여 황제의 인적 기반인 관료로 진출하여 사대부 문신 관료 체제를 구축하였다. 호족과 문벌 귀족은 가문과 출신에 의해 그 신분이 규정되었던 반면, 사대부는 원칙적으로 출신과 무관하며 자신의 능력, 곧 유교 경전 지식과 문필 능력에 의해 신분이 결정되었다. 사대부의 계층 유동성은 송나라 시대 과거 급제자들 가운데 본인의 앞 3대 이내에 관료를 배출하지 못한 비(非) 관료 가문 출신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점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렇지만 과거 시험에 전념할 수 있도록 사대부에게 어느 정도 경제적 능력은 필수적이었다. 사대부가 사실상 중소 지주 이상의 경제력 보유자 혹은 상인 출신이었던 것도 이러한 이유에서 비롯되었다. 


곧 사대부는 국가 권력에 의한 승인과 경제적 부를 존립 기반으로 지식과 교양을 사회적 특권으로 전환하는데 성공한 세력이었다. 지주로서 사대부는 농업 생산을 매개로 지역 사회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그들은 진부(陳尃)의 <농서(農書)>의 사례와 같이 농서의 간행과 보급에 관심을 기울였으며 강남에서는 수리 개발에 적극 개입하였다. 수리 개발은 기본적으로 중앙 및 지방 정부에 책임을 지었으나 실제 사업 수행에서 부담은 사대부 등 지역 사회 구성원이 담당하였다. 이러한 사회, 경제적 배경 아래 북송 당시 여대균(呂大鈞, 1031~1082)이 섬서 지역에서 향약을 처음으로 도입하였다. 교화와 상호 부조를 통하여 지역 사회의 질서를 유지하려는 목적으로 하는 향약은 주희(朱熹, 1130~1200)에 의해 정비되어 이후 명나라 시대에 널리 보급되었다. 또한 주희에 의해 정착된 사창(社倉)은 사대부가 주도하는 지역 사회의 자치적 구휼 기관으로서 기능할 수 있었다. 사대부의 활동은 그들의 정치의식과 무관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일례로 범중엄(范仲淹, 989~1052)은 “천하의 근심을 앞서 근심하며, 천하의 즐거움을 남보다 뒤에 즐거워한다(先天下之憂而憂, 後天下之樂而樂).”고 하여 사대부가 황제를 대신하여 천하 통치의 책임을 져야 한다는 치자(治者) 의식을 강조하였다. 


반면, 천하를 향한 근심은 오직 하늘(天)로부터 통치를 위임받은 황제만의 소관이고, 관료는 천자의 충실한 수족으로 머무는 피동적 존재라는 인식도 공존하였다. 그래서 관료는 황제 권력과 경쟁학기도 하고 때로 협력하면서 자신의 이익을 추구해 나갔다. 그러나 송나라 시대에 과도한 중앙집권화와 문치주의는 관료 기구의 비대화를 낳았고 행정과 재정의 효율성을 저해하였다. 송나라 태조의 문치주의는 분권적 절도사 체제를 중앙집권적 문신 관료체제로 전환하여 황제 지배체제를 복원할 수 있었지만, 다른 한편으로 군사력을 약화시키고 동아시아의 정세 변화에 대응하지 못하는 빌미를 제공하였다. 그러한 결과로 인해 강력한 유목 국가의 출현에 직면하여 송나라 이들에게 줄곧 고전하였다. 거란 요(遼)나라의 7년에 걸친 전쟁 끝에 1004년 송나라는 요나라에 현 북경과 천진, 산서 등의 16개 주(州)인 연운십육주(燕雲十六州)를 양도하고 매년 비단 20만 필, 은 10만 냥을 세폐로 보내기로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는 전연(澶淵)의 맹약을 체결하였다. 그로 인해 길지 않은 평화가 찾아온 뒤 1126년에는 황제 휘종(徽宗)과 흠종(欽宗)이 여진족이 세운 금(金)나라의 포로가 되어 만주의 오국성(五國城)에서 최후를 맞이했다. 


이를 정강의 변(靖康之變)이라 한다. 이후 고종(高宗)에 의해 남송(南宋)이 재건되었지만, 1279년에 몽골 제국이 세운 원(元)나라에 병합되었다. 몽골의 지배 하에서 남송의 문인 사대부들은 송나라를 향한 이상적 충절과 현실 타협의 사이에 갈등하면서 원나라의 질서에 편입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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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수, 당, 송나라 시대의 강남 개발과 강남을 중심으로 한 정치, 사회적 제도들의 도입 및 개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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