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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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반 뇌제(雷帝)로 알려진 이반 4세는 이반 3세를 계승한 바실리 3세(Василия III)의 장남으로 탄생했다. 그의 모친은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였는데, 그녀는 바실리 3세의 후비로 들어온 왕녀였고 첫 왕비인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는 자식을 생산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폐위되었다. 이반 4세의 모친인 엘레나 글린스카야는 남슬라브 세르비아인 어머니를 둔 전형적인 루스의 귀족 가문인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집안의 장녀였다.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이반 4세는 아버지 바실리 3세와 두 번째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 사이에서 1530년 8월 태어났는데 솔로모니야 사부로바(Соломония Сабурова)가 종래 키예프 공국을 다스리던 키예프 대공 집안인 사부로브스키(Сабуровский) 가문의 여식이었기 때문에 모스크바 대공국을 중심으로 옛 키예프 세력들과 정치적 연계를 하고 있었던 상황이라 이반 4세의 어린 시절 입지는 매우 불안했다. 물론 바실리 3세에게는 서자가 몇 명 있었지만 이반은 바실리 3세의 첫 적장자였기 때문에 후일 공후 승계 문제도 그렇고 여러 면에서 공후들의 반감을 받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모스크바 대공국의 직책들을 가지고 있던 각 보야르(Боярин)들 사이에 반발이 대단했는데, 이들은 몽골의 침략으로 파괴되어 대공국의 기능을 상실한 키예프와 연계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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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와 모스크바 대공국의 확장, 출처 : 러시아 매체 RT

 

이는 키예프의 솔로모니야(Соломония)와 연줄이 있는 귀족들이 많았던 데다 비잔틴 제국이 멸망한 이후, 정교회의 비잔틴 십자가와 성모상이 키예프에 있었다. 게다가 엘레나의 경우, 글린스키(Глинский) 가문이 정교회를 숭상하는 집안이 아닌 폴란드를 중심으로 한 카톨릭을 숭상하는 집안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이반 4세의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러시아정교회의 반대를 억지로 무마하고 재혼한 이유는 아직도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옛 대공국을 구성하는 공후들과 보야르들의 세력이 막강했고 이들에게서 벗어나 강력한 전제정권을 구사하기 위해 다른 세력을 끌어들여 모스크바 대공국의 지위를 확보하고자 하는 고도의 정치적인 계산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바실리 3세의 움직임과 달리 어린 이반 4세는 출생 전부터 왕조를 파멸의 길로 몰아갈 불길한 아이라는 저주에 시달리게 되었고 각 보야르들의 음해성 공격 및 암살 위협도 받았다. 그러한 배경들이 이반 4세의 정신적인 인성에도 큰 영향을 미쳤을 것으로 보인다. 왕권과 옛 키예프 공후들, 각 지방 및 모스크바 대공국 내부의 보야르들이 자신들의 정치적 욕구를 위해 끊임없이 어린 이반을 학대했기 때문이다. 


이어 1533년 이반 4세가 3살 되던 해에 부친인 바실리 3세가 다리에 생긴 종기가 염증으로 발전하여 패혈증으로 사망하면서 어린 이반을 지지해주고 보호해줄 수 있는 인물은 모친인 엘레나 밖에 없었다. 그러나 모친인 엘레나도 정통 러시아 출신이 아니기 때문에 그 기반이 매우 허약했다. 그러한 잦은 정치적인 암투로 인하여 오히려 어린 이반이 유년기 때부터 정치적인 성향을 학습하게 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바실리 3세는 사망하기 전에 어린 두 아들 이반과 유리(Юрий)의 장래를 걱정하며, 부인 엘레나 글린스카야와 그녀의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 공후에게 그들을 후견인이 되어 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 어린 아들에 대한 위협 등을 염려하여 왕족 및 보야르 등을 모두 불러 어린 이반에게 충성을 맹세하게 했다. 이반에게는 형제인 남동생 유리(Юрий)와 여동생 한 명이 있었고 그 밖에 블라디미르라는 이름의 서출 형이 한 명 더 있었지만 그는 왕권에 전혀 관심 없는 자였다. 그리고 남동생 유리는 청각장애를 앓고 있어 모든 권력적 상황이 이반에게 집중될 수밖에 없었다. 이에 부친의 유언에 의해 이반 4세는 바실리 3세 사망 이후 모스크바의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3세라는 어린 나이였기 때문에, 처음에는 어머니 엘레나 글린스카야(Елена Глинская)와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가 섭정을 맡게 되었다.


모친인 엘레나는 숙부인 미하일 글린스키 공후에게 처음에는 많이 의존했다가 이반 옵치나 오볼렌스키(Иван Овчина Оболенский) 공후와의 치정 관계로 인하여 미하일 글린스키와는 오히려 정치적으로 서로 적대하는 관계가 되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Андрей Старицкий) 등 일부 보야르들은 미하일 글린스키(Михаил Глинский)를 포섭하여 그를 대공 직위에 올리려 했다가 이 역시 사전에 엘레나와 옵치나 공후에게 발각되었고 미하일 글린스키는 역모 죄로 체포되어 옥사했다. 글렌스키야 가문 외에도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 벨스키(Бельский) 가문 등 유력 보야르들이 왕위를 노리고 있었으므로 엘레나는 자신의 친정 측에 원조를 받았지만, 자신의 삼촌 미하일 글렌스키야를 제거하면서 친정과의 연대는 끊어지고 말았다. 하지만 그러한 고변을 사건을 일으킨 엘레나도 역시 무사하지 못했다. 엘레나는 섭정기간 중 이반의 삼촌들을 처형했으며 많은 반대 세력들을 숙청하는 등의 폭정을 펼쳤다. 특히 이반의 삼촌인 유리 이바노비치(Юрий Иванович)는 충성 맹약을 번복했기 때문에 엘레나의 노여움을 사고 투옥되었으며 1536년 처형되었다. 또 다른 삼촌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역시 이반의 대공 지위를 노렸다. 그러자 이는 엘레나에게 발각되어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역시 투옥시키려 했다. 


그러자 삼촌 안드레이는 도망치려다가 국경에서 잡혀 1537년 투옥되고, 그 해 11월에 처형되었다. 그리고 평소에도 바실리 3세와 좋지 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리투아니아 공국이 이를 구실로 군사를 일으켜 모스크바 대공국을 침략해왔다. 루스의 공후들이 리투아니아의 공세를 성공적으로 방어해냈지만 어린 이반을 대신해 섭정하고 있는 엘레나는 같은 카톨릭 측이라는 이유로 리투아니아와 1538년 평화조약을 체결했고 이는 보야르들의 엄청난 반발을 불러오게 된다. 그녀의 계속되는 실정(失政) 및 폭정과 카톨릭 및 폴란드 이주민들에게 대한 우대, 그리고 리투아니아와의 독단적인 평화 조약 체결 및 옵치나 공후에 대해 과도한 이권을 몰아주는 것에 불만을 품은 보야르들은 그녀의 차에 독을 타 독살했다. 모친인 엘레나가 보야르들과 키예프의 13공후들에 의해 독살되었을 때 이반 4세의 나이는 8살에 불과했지만, 어리지만 영민하고 총명한 소년이었던 그는 이러한 보야르들의 음모로 인해 모친이 독살 당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후 옵치니 공후가 섭정을 하였으나, 슈이스키 가문의 영수 바실리 슈이스키(Василий Шуйские)는 옵치나 오볼렌스키를 투옥시켰다가 석방시켰고 자객들을 보내어 자는 도중 그의 집에서 살해했다.이 때 경쟁자 가문인 벨스키 가문의 이반 벨스키(Иван Бельский)를 옵치나와의 공모 혐의를 적용하여 숙청했으며 그를 투옥시킨다. 


바실리 슈이스키는 몇 년 후 이반 벨스키를 석방시켰으나, 세력의 재규합을 우려해 그를 다시 투옥시킨 뒤 살해했다. 이와 같이 옵치니 공후를 축출하고 권력을 확보한 슈이스키(Шуйские) 가문은 각기 블라디미르와 야로슬라블 지역을 영지로 하고 있었던 대 공후들이었고 키예프를 중심으로 한 다른 공후들의 협조도 가능했던 막강한 대외 권력도 함께 가지고 있었다. 모스크바 총대주교인 이오아사프(Иоacaв)가 추방된 관계로 인하여 비어있던 총대주교 지위는 막심 그렉(Максим Грек)에게 돌아갔고 막심 그렉은 1538년부터 1547년까지 섭정을 하여 바실리 슈이스키와 공동 통치를 했다. 한편은 이반은 어려서 대공의 지위를 계승했지만 이반 형제에게 적대적인 보야르들에 의해 구박받고 매우 불우한 유년 시절을 보냈다. 그러는 사이에 이반이 10세 때 그의 유일한 여동생인 엘리자베타가 갑자기 사망했다. 엘리자베타의 경우에는 슈이스키가 독살했다는 설이 지금까지 유력하게 나타나고 있다. 물론 이반은 대공 지위를 계승하기는 했지만 적대적인 보야르들의 늘 암살 위협을 받았으며 대공으로써는 그저 형식적으로만 존재했던 인물이었다. 이반 4세와 동생 유리는 크레믈린 궁의 탑 속에 갇혀서 먹을 것과 마실 것을 제대로 받지 못하고 기아에 시달려야 했으며 근처 보야르들의 심한 감시도 함께 받았다. 


이 때부터 이반 4세는 두 살 어린 동생 유리와 함께 귀족의 권력 암투 속에서 그들의 양면성을 지켜보며 성장했다. 이후 삶과 죽음의 경계에 서 있었던 이반 4세의 앞에는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날들이 지속되었던 것이다. 이반 4세가 후일 측근에게 쓴 한 편지에 의하면 자신이 8세 무렵부터 슈이스키 가문과 벨스키 가문으로부터 수시로 멸시 당했고 그들이 대공 지위의 이반에게 매우 무례하게 굴었다고 고백하기도 했다. 

많은 사람이 이 불운한 소년이 머지않아 폐위되거나 암살될 거라고 여겼지만 러시아 내부의 묘한 정치적 역학관계로 인하여 이반은 끝까지 살아남게 된다. 물론 1533년 이반은 모스크바 대공으로 즉위했지만 이는 형식적인 지위였다. 보야르 귀족들은 이반과 청각장애를 앓고 있는 유리 형제를 무시했다. 형제들은 누더기 옷을 입고 배가 고파서 쓰레기통을 뒤져서 먹을 것을 찾는 상황이었지만 누구 하나 도와주는 사람이 없었다. 대 공후이긴 했지만 귀족들은 7살의 어린 공후 형제들을 심문한 뒤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고문을 즐기기도 했다. 이반 형제가 왕과 왕족의 예우를 받는 날은 왕실 행사가 있는 날로, 이 날 만큼은 더러운 옷을 벗고 목욕을 한 후 왕의 옷으로 갈아입고 행사에 참석했다 한다. 그러나 행사가 끝나고 나면 다시 이반 형제들은 누더기 옷으로 갈아입어야 했다. 아직 대공이 건재하고 있다는 대외적인 홍보와 더불어 대공에게 최대한 예우를 하고 있다는 간접적인 표현일 뿐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왕실 내에 발생하는 참혹한 살인과 암투, 음모 등을 여과 없이 목격하면서 자라난 이반의 성격은 매우 포악하게 변모했다. 그는 형식상의 대공이었으며 정무는 각 두마와 보야르들이 관장했기 때문에 그가 가진 권한은 전무했다. 한편 슈이스키 가문 등의 유력 보야르들이 대공의 섭정 자리를 둘러싸고 치열한 파벌 경쟁을 벌였고, 이러한 갈등은 이반이 1547년 공식적으로 차르가 될 때까지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공적인 자리에서는 이반을 대공으로 대우해주고, 이반의 동생 유리를 왕자로 대우했다. 그러나 공식석상 밖에서 보야르들은 이반에게 무례하게 굴기가 예사였고, 누더기 옷을 강제로 입혔으며 이반의 침실에 나타나 일부러 소란스럽게 논쟁을 벌이면서 그의 권위를 무시했다. 안드레이 슈이스키는 더러운 신발을 이반의 침대 위에 갖다 두고 강제로 신게 하면서 그를 조롱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 이반은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하여 높은 성 옥상에서 애완동물을 떨어뜨려 죽이거나 칼로 찔러 죽였다고 한다. 당시의 많은 보야르 및 일반 귀족 그리고 키예프 13공후에 속하지 않은 지방 귀족인 드보랸(Дворян) 등은 그가 독살당하거나 폐위 또는 암살당하리라 전망했었지만 이반은 자신의 세력으로 몰래 드보랸(Дворян)들을 끌어들였다. 


그리고 보야르 및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과 친해지면서 자신의 세력을 몰래 강화했으며 1543년 12월 말, 이반은 이러한 보야르 및 드보랸 자제들을 동원해 두마 회의 당시 크레믈린 궁 주변에 매복시켰다. 크리스마스에 이반은 회의 자리에서 안드레이 슈이스키가 그를 무시하며 조롱하자 그를 죽이라고 명령했다. 다들 순간적인 명령이라 당황했었지만 이반은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죽이라고 재촉했다. 그러나 대다수 그의 말을 무시하고 듣지 않자 그는 자신의 명으로 매복한 보야르와 드보랸의 젊은 자제들로 하여금 안드레이 슈이스키를 납치해 크레믈린의 개 사육사에게 넘겼고 맹견에게 공격을 받아 죽게 했다. 이어 두마 회의가 끝나자 자신을 학대하던 두마 의원들과 보야르 귀족들을 잡아들여 같은 방식으로 살해했다. 이후로 이반에 대해 보야르, 제후 의원들의 멸시와 구박은 줄어들었지만 경계심은 계속되었다. 이반이 15살 되던 해 궁중에서 식사를 하던 중 이반의 면전에서 귀족들이 서로 패를 나누어 심하게 격투를 벌이고 방자하게 싸움을 하였다. 그들에게 어린 왕은 안중에도 없었기에 신경 쓰지 않았다. 분노한 이반은 조용히 할 것을 명령했으나 귀족들은 무시하고 계속 다투었다. 이반은 시종들에게 비밀리에 경호용 개를 데려오게 한 후 경호용 개들에게 물어버리라고 명령한다. 


이반의 경호용 개들은 귀족들에게 달려들어 얼굴을 마구 물었고, 심하게 물린 귀족은 이후 외부 출입을 하지 못하고 은둔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건으로 인해 공포감을 느낀 두마 의원들은 이반이 강력하게 성장했음을 파악하고 그에게 친정 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친정에 대한 기본적인 통치 관념이 없어서 이를 두려워한 이반은 일단 보론초프(Волончёв) 가문 사람들을 중용했지만 1546년 이반은 보론초프 가문도 숙청하고 말았다. 지방 귀족인 드보랸들과 지식인, 상인 계층에서는 이반의 아버지 바실리 3세 시기부터 내심 보야르 및 두마 의원, 중앙 관료들의 횡포를 억제해 줄 수 있는 강력한 왕권을 오랫동안 원했고, 상인들은 각 지역마다 다른 상법들을 정비하여 동일한 상법 및 무역법의 신설을 원했다. 이들은 보야르와 적대적인 이반 4세에게 오랫동안 호의를 보여 왔고 이반 4세 그리고 그가 친정하자마자 그를 적극 지지하게 된다. 1545년 이반 4세는 블라디미르에 군사를 내어 실력자 안드레이 슈이스키의 세력들을 제거하도록 명을 내렸고 이들 드보랸들은 자신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 항쟁했으나 이반의 군사력을 이기지 못하고 패퇴했다. 블라디미르의 세력들을 제거한 이후, 이반은 1546년 12월 내년에 혼인할 것이고 차르로서, 러시아의 지배자로서 즉위하겠다고 선언한다.


이듬해 그는 로마노프 가문의 딸 아나스타샤 로마노브나(Анастасия Романовна)를 선택, 성대한 결혼식을 올린다. 그는 어릴 적부터 교회 서적을 통해 대관 의식의 중요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반 4세는 성년이 되는 1547년, 교회를 통해 대관식을 치르고 ‘전 러시아의 차르’로 등극했다. 이러한 부분이 실현된 이유는 역설적으로 어린 왕의 통치기에 보야르들의 숫자와 권력이 크게 늘어났기에, 그들끼리 파벌과 다툼이 생겼으므로 보야르가 단결해서 왕권을 위협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또한, 하급 귀족 내지 지방 귀족을 의미하는 드보랸들은 보야르의 횡포를 억제해줄 강력한 왕권을 기대했고, 상인들은 러시아 전역을 하나로 묶는 동일한 상법의 적용을 받는 상권이 탄생하기를 바랐기 때문에 이반 4세의 차르 즉위를 지지했다. 그리고 17세이던 1547년 6월 말에 벨스키 가문을 정벌하기 위하여 야로슬라블로 군사를 보내 벨스키 가문을 공격해 멸족시켰고 야로슬라블의 대부분 구역을 파괴했다. 1548년 1월부터 직접 정치를 하게 되면서 이반 4세의 내치는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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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 모스크바 대공국 이반 4세의 초창기 유년 시절 : 이반 4세의 차르 권력 강화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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