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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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테트라오는 라오스에서 활동하던 공산주의 성향의 좌파 민족주의 반군 단체이며 1975년 라오스의 정권을 장악하였다. Pathet Lao는 라오어로 “라오스의 나라(Country of Laos)”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1860년대부터 프랑스의 인도차이나 침략이 시작되어 프랑스는 베트남과 캄보디아를 식민지로 만들었다. 당시에 라오스 영토의 거의 대부분이 태국의 지배를 받았는데, 프랑스는 무력을 사용하여 태국 정부로부터 메콩 강 동쪽의 영토 지배권을 인정받았는데 이 영토가 현재의 라오스가 된다. 프랑스는 라오스의 3개 지방을 합쳐서 루앙프라방 왕국을 만들었고 이 왕국을 보호령으로 선포했다. 그 후 일본이 제2차 세계 대전을 일으키자 프랑스는 퇴로를 확보하기 위해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개방하였다. 초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인 사르네(Sarne) 제독은 정치를 전혀 모르는 인물이었고, 당시 초창기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식민지인 코친차이나의 상황은 후에 태국 및 베트남 응우옌 조정이 임명했던 관리나, 조세 명부, 관청 문서 등이 전혀 남아있지 않은 최악의 상황이었다. 결국 실질적인 프랑스의 식민 통치가 시작된 것은 1863년 그랑디에(Grandie) 제독이 부임한 이후였다. 그랑디에 제독은 5년 동안 인도차이나를 지배하면서 조세제도를 개혁하고, 공공사업을 벌이는 한편 통역 학교를 설립하는 등 통치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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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지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프랑스의 본격적인 통치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설립한 직후였고,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총독들 가운데 가장 유명한 인물이 1897년에 부임한 폴 두메르(Poul Dumer)이다. 폴 두메르는 인도차이나 식민지에 강력한 프랑스와의 동화 정책과 본국 중심의 식민지 정책을 단행하게 된다. 당시 적자 상황이었던 인도차이나 경영을 위해 예산을 높이 책정하고, 이를 조달하기 위해 인두세를 500%, 토제세를 150% 인상하고 각종 간접세를 신설하기 시작했다. 우선 술에 관한 법률을 개정하였으며 모든 술 제조와 판매에 관한 권한을 프랑스 기업인 퐁텐(Fomgten)에 부여하고, 각 도시마다 소비량을 할당하여 강제로 술을 마시게 하였다. 집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금지되었고, 술을 만들다 발각되면 감옥에 가거나 재산이 몰수되었다. 이와 같은 조치로 인해 퐁텐은 자본금 350만 프랑을 투자하여 연간 200에서 300만 프랑의 이익을 거둘 수 있었고, 그에 비례하여 베트남의 술값은 1902년 5센트이던 것이 1906년에는 29센트로 4년 사이에 물가가 6배 가까이 폭등하게 된다. 베트남, 라오스, 크메르인들은 명절마다 집에서 담은 술로 축제를 벌이는 관습이 있었고 이는 현재에도 존재한다. 


따라서 프랑스 총독부의 술 제조 금지령은 베트남과 코친차이나 지역 생활 전통 문화의 핵심을 파괴한 행위였다. 이후 폴 두메르는 베트남과 캄보디아 지역에서 소금을 전매하였고, 소금 값은 10년 만에 5배로 상승하였다. 거기에 아편마저 독점적으로 판매하여 폴 두메르가 물러났을 때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아편 수입은 취임할 때의 2배인 150만 프랑이었고, 아편 흡연자 역시 2배 이상으로 늘어나 있었다. 게다가 아편 재배와 무역은 식민 당국인 프랑스가 지역 유지와 기업들을 통해 반 강제적으로 확산 시킨 것이기 때문에 아편전쟁의 여파를 보며 기존의 성리학적 가치관에 따라 마약에 취해 있는 것을 극히 경멸하던 인도차이나인들의 가치관에 큰 모욕감을 주었다. 그리고 다음 시기에 프랑스 총독부 역시 토지 조사 이후 높아진 세금과 소작료, 그리고 술 제조 금지, 소금, 담배, 인삼의 전매 등으로 식민지인들을 수탈하게 된다. 폴 두메르가 취임하기 이전에는 적자였던 인도차이나 지역의 예산을 흑자로 돌렸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하는 인물들도 있는 것 같지만, 전체 예산의 25%를 술, 아편, 소금의 전매로 조달했다는 문제점도 갖고 있었다. 폴 두메의 가장 큰 악정은 인도차이나 지역의 토지들을 프랑스에서 이주해 오는 기업과 백성들에게 나누어 주면서 인도차이나 민중들의 생활 기반을 수탈한 것이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코친차이나의 토지 중 총 36만 헥타르가 프랑스인 이주자에게 불하되었다. 여기에 소수의 대지주가 동참하면서 토지 집중은 심화되었고, 전체 국민의 90%에 달했던 농민층의 양극화와 빈곤화를 초래하게 된다. 이와 같은 악조건은 이후에 인도차이나 공산당 조직이 결성되고 공산주의 이념이 뿌리를 내리는데 일조하게 된다. 프랑스의 식민 통치에 관여한 프랑스인들은 인도차이나 지역을 지배할 때, 특히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 사상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 사상을 말살하기 위해서 베트남어를 로마자로 표기하는 국어(꾸옥응으)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라오스와 캄보디아도 자국어와 프랑스어를 병행하도록 했다. 베트남의 전통적인 유교식 교육과 라오스, 캄보디아의 불교식 교육 대신 프랑스식 교육을 강요하였다. 교육의 혜택을 받기 어려웠던 육체노동자나 일꾼들도 떠이보이(Tây Bồi, "일꾼 서양말")라는 하급 프랑스어 회화 정도는 배워서 구사해야 생계를 이어갈 수 있었다. 일부 인도차이나의 애국지사들은 프랑스어 학습을 거부하기도 했으나, 근대 교육을 받거나 국제 여론전에 호소하기 위한 방편으로 프랑스어를 배워 구사하던 식자층도 많이 존재하고 있었다. 


어떤 인물들은 프랑스어를 배운 뒤 친 프랑스 파가 되어 프랑스 식민 통치에 부역하면서 재물을 수탈하기도 했다. 라오스의 경우에는 응우옌 왕조처럼 루앙프라방 왕국이란 괴뢰 왕국과 왕이 존재했으나, 당연히 실권은 프랑스 측에 있었다. 그러나 라오스는 농사를 짓기에는 환경도 그리 좋지 않았고, 중국 진출에도 큰 도움이 되지 않았기에 프랑스 당국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소외당했고, 당국은 상대적으로 돈이 되는 아편 재배를 적극적으로 장려했다. 게다가 교육도 거의 이루어지지 않아 평민을 위한 교육 기관은 사찰이 전부였다. 캄보디아 역시 라오스와 사정은 비슷하여, 고무, 옥수수 등의 플랜테이션 농법이 주된 경제 수단이었다. 근데 그마저도 대공황 이후 대부분 실패했다. 1885~1888년까지는 껀브엉(勤王) 운동이라고 하여 응우옌 왕조를 도와 국토 회복을 이루려는 독립운동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제국 열강의 식민 침략이 정점에 이르렀던 시기였기에 이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했다. 상대적으로 교육 수준이 낮고 당국의 관심도 적었던 라오스, 캄보디아와는 달리 교육 수준도 상대적으로 높았고 착취가 가장 심했던 베트남에서는 지식인들을 중심으로 독립 운동의 세력이 빠르게 커져가기 시작했다. 또한 베트남 국민들 입장으로 보면 인간적 유교 제국이 서방의 야만적인 국가인 프랑스 앞에 항복했다는 민중의 분노심도 크게 일조했다. 


프랑스의 침략 초기부터 계속된 게릴라식 무장 투쟁이 모두 실패로 돌아가면서 두 가지 움직임이 새롭게 등장하게 된다. 하나는 특정 지역에만 국한되었던 투쟁을 전면적이고 조직적인 투쟁으로 발전시켜 나갈 것을 지향하는 움직임으로 다시 국내의 모든 저항 세력을 규합해서 무력 투쟁을 벌이자는 부류와 국제 사회의 지원을 기대하는 부류로 나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에 대해 다른 움직임은 프랑스 식민 지배는 물론이고 응우옌 왕조를 비롯한 봉건체제 자체를 타도 대상에 포함시키는 형태로 이들은 대개 공산주의자들이었다. 여기에 프랑스에 대한 저항 의식이 가미되면서 초기 베트남의 경우, 민주주의와 독립운동은 판 보이 쩌우(Phan Bội Châu, 潘佩珠)와 판 쩌우 찐(Phan Châu Trinh, 潘周楨)이 주도했다. 판 보이 쩌우가 군주제를 옹호하고 외세, 특히 일본의 힘을 빌려 프랑스를 격파하려는 생각으로 일본으로 유학가자는 동유운동을 전개한 반면, 판 쩌우 찐은 군주제를 부정하고 프랑스의 도움으로 근대화를 이룩하려 하였기 때문에 군주제를 비판하는 글을 발표하고, 프랑스를 도와서 개혁을 이루려는 모습을 보여주게 되는 것이다. 


그 외에도 옛날 유교 사회로 돌아가려는 복벽주의 독립 세력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었다. 이와 같이 분열된 운동을 하나로 규합시킨 계기가 된 인물이 응우옌 타이 혹(Nguyễn Thái Học, 阮太學)이었다. 응우옌 타이 혹은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하노이의 인도차이나 대학을 다니면서 사회주의에 의한 사회 개혁에 대해 흥미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1926년에는 대학 동기들과 남동서사를 설립하여 유럽에서 발생한 사회 개혁 주장을 게재한 출판물을 제작, 판매하였고, 1927년에 지지자를 모아 무력 혁명을 통한 베트남 독립을 위하여 베트남 국민당을 창설했다. 이것이 베트남 국민당 운동으로 불려진다. 베트남 국민당은 1929년에 당원수가 1,500여명에 이를 정도로 빠르게 성장하였지만, 하노이에서 발생한 프랑스인 바쟁 살인 사건의 주범들로 지목되면서 인도차이나 총독부의 탄압을 받았다. 이러한 위기 상황을 타개하기 위하여 1930년 옌바이에 위치한 프랑스 군 막사를 공격하면서 무장 봉기를 일으켰으나, 프랑스군의 반격으로 인해 결국 실패했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몇 천 명의 당원들이 체포되고, 응우옌 타이 혹은 사형에 처해졌다. 이 사건을 계기로 베트남의 독립운동은 민족주의, 비(非) 공산주의 계열에서 공산주의 계열의 주도로 바뀌게 되었다. 


그리고 이를 주도한 베트남 근대사 의 영웅으로 나타난 호치민의 지휘로 인해 베트남 민족주의의 세력은 공산주의의 세력의 영향력 안에 모두 규합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 1940년 비시 프랑스의 페탱 정권이 나치 독일에 항복하자 일본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대다수가 유럽 국가의 식민지였던 동남아시아로 세력을 확장시켰다. 그와 같은 명분은 당시 일본에 저항하던 중국을 압박하는 것이었고, 그 과정에서 비시 프랑스를 압박하여 거의 강제로 허가를 받아 최대 25,000명의 인도차이나 파견군을 베트남에 진주시켰다. 다만 일본은 다른 동남아시아에서 기존 지배 국가인 영국과 미국 등의 잔재들을 신속하게 청산하고 군정을 실시한 이후 괴뢰 국가들을 세운 것과 달리,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존의 프랑스식 지배 체계와 프랑스인 관료 체제를 인정하는 방식으로 간접적인 지배를 시행했다. 이는 프랑스 본국이 일본의 동맹인 나치 독일에 의해 점령된 상태였기 때문에 이 시기 기준으로 볼 때 비시 프랑스도 여러 모로 볼 때 일본의 우군에 해당하는데, 그 비시 프랑스의 식민지인 인도차이나도 완전히 장악해 버리면 모양새가 좋지 않은데다 프랑스 본국을 조종하는 나치 독일의 상황도 인정해줘야 했기 때문이다. 


1941년 말, 대조국 전쟁이 발발하자 아돌프 히틀러는 일본이 연해주를 공격하여 전쟁 수행에 도움을 주기를 원했기 때문에, 일본의 환심을 사기 위해 비시 프랑스 정부를 압박하게 된다. 이에 따라 25,000명의 파견 제한이 사라졌고, 인도차이나의 군사 시설을 마음대로 이용할 수 있으며, 인도차이나에서 생산되는 물품을 자유자재로 수탈할 수 있게 되었다. 사실상 프랑스 총독부와 일본군 사령부 간의 이중 권력이 생긴 셈이다. 인도차이나 각국은 공납을 프랑스와 일본에 따로 바쳐야 하니 주민들에 대한 수탈은 더욱 심해졌고, 이러한 폭압은 독립 운동이 더욱 확산되는 계기를 가져오게 되었다. 1941년 베트남 공산당은 독립운동 조직인 베트남 독립 동맹(Việt Nam Ðộc Lập Ðồng Minh Hội, 약칭 Viet Minh)을 결성하고, 호치민이 이 단체의 지휘를 맡았다. 물론 공산당에 의해 창건되었지만 좌파나 우파 등 이데올로기적 성향과 관계없이 조직원들을 받아들여 1943년에 베트남 내에서 가장 활발한 독립 운동 세력이 되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일본이 라오스 국경을 넘어 침공하자 미얀마로 가는 통로를 내주고 이 지역을 이중으로 수탈하던 비시 프랑스 정부의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총독부는 1944년 비시 프랑스가 몰락하자 자유 프랑스 측으로 돌아서려는 움직임을 보였으며 이에 불안감을 느낀 일본이 명호작전(明号作戰)을 시작했다. 


이에 일본은 1945년 3월, 인도차이나 총독부를 폐지하고 행정권까지 장악한 후 프랑스인들을 인도차이나 반도에서 몰아내거나 수용소로 체포해 투옥시켰고, 각 지역의 명목상 군주들을 수반으로 한 만주국과 비슷한 성격의 괴뢰 왕국을 건국했다. 그와 같이 베트남 제국, 캄보디아 왕국과 함께 라오스에서도 루앙프라방 왕국의 괴뢰 국왕 씨싸왕 웡(ສີສະຫວ່າງວົງ, 1885~1959)에게 독립을 강요했으며, 1945년 4월 8일 라오스 왕국의 독립을 선언했다. 이에 라오스 국민들도 이를 대부분 반겼으나, 일본의 항복 선언 이후 독립 선언은 그대로 무효로 돌아갔다. 이에 자유 프랑스의 대통령인 샤를 드골은 식민지를 회복하기 위해 라오스 지역의 민족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한다. 비록 이와 같은 독립 운동 지원에 대한 의도는 불순하였으나 자유 프랑스는 이전부터 라오 민족 쇄신 운동원, 라오어 신문 발간, 라오인의 보병부대를 창설하는데 기여를 해오고 있었기에 라오스 인민공화국이 후일 세워진 것에 대해 어느 정도 역사적 공로가 있는 것으로 보고 있다. 특히 프랑스는 1944년 말, 일본의 침략에 대규모 병력을 동원할 수 없었기에 항복했다. 당시 프랑스군에는 베트남인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계속되는 프랑스 장성들의 핍박에 질려 언제든 모반을 일으킬 소지가 있었다. 


이들은 일본군에게 투항했고, 프랑스군이 어디에 있고 무엇을 하는지에 대한 정보를 일본 측에 제공했다. 이는 프랑스가 일본에게 참패하게 된 원인이 되었다. 응우옌 왕조 마지막 황제 바오 다이도 프랑스를 적대하는 일본군에게 협력했다. 절대적으로 보이던 프랑스가 일본에 굴복했다는 것부터 베트남의 독립 투쟁을 더욱 고무시키게 되었고, 호치민과 인도차이나 공산당이 중심이 된 가운데 인도차이나 공산당과 그 전위 조직, 베트남 문화 강경 지지파, 베트남 국민당(VNQDD)의 일부 세력, 군소 집단 및 중국으로 망명한 소수의 개인들이 독립 투쟁에 참가하게 된다. 이후 모든 정치 활동은 베트민의 이름으로 행해지고, 공산당은 뒤로 물러나 자신들을 드러내지 않았다. 후에 군대 조직도 완성되었는데, 그 중에서 베트남 해방군 선전대가 월맹군으로 발전하게 된다. 결국 일본이 항복하기 직전 호치민이 이끄는 베트민이 봉기하면서 일시적으로 베트남을 해방시켜 베트남 민주 공화국이 성립하게 된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이후 전후 처리를 위해 북위 16도선을 경계로 베트남 북부에는 중화민국 군이, 남부에는 영국군이 진주하였다. 북부에 주둔한 중화민국 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지 않은 채 호치민과 베트민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면서 정치적인 혼란으로 정계가 분열되자 1946년 2월, 프랑스와의 협정을 통해 프랑스에게 북베트남을 넘기고 철수했다 


이어 1946년 3월 6일, 프랑스는 베트민과 하노이 예비 협정을 체결하여, 프랑스 인도차이나 연방에 소속된 하나의 국가로 베트남 민주공화국의 독립을 지원하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베트남에 지배권을 다시 행사하려는 프랑스의 속임수에 불과했고, 같은 해 3월 26일, 남부 코친차이나 지역에 괴뢰국인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성립시켜 프랑스가 구상한 인도차이나 연방에 편입시킬 생각이었다. 독립협상이 지지부진한 와중에 결국 1946년 11월 20일, 하이퐁 항구에서 밀수선 단속으로 인한 충돌을 기회로 프랑스군은 하이퐁 항구를 기습적으로 공격했고, 이어 통킹 만에 상륙함으로써 베트민과의 전면전이 시작되었다. 결국 베트남 민주 공화국은 다시 자신들을 지배하려는 프랑스에 맞섰고, 결국은 프랑스와 베트민 사이에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이 일어나게 되었다. 한편 북위 16도 이남 남베트남에서는 일본이 패망한 이후, 승전국들이 영국군에게 일본군의 잔당들을 처리하기 위해 남베트남의 지배를 맡겼는데, 영국군은 프랑스인들을 풀어주면서 지배권을 프랑스에게 다시 넘겼고, 돌아온 프랑스군은 베트남을 다스리려 했다가 국제 여론의 비난을 받게 된다.


이에 프랑스 측은 1949년 응우옌 왕조의 마지막 황제인 바오 다이를 내세워 베트민이 장악하지 못한 남부 베트남을 베트남 왕국으로 형식적인 독립을 허가했으나 사실상 프랑스의 괴뢰 국가였다. 반면 베트민은 주민들의 지지를 받으면서 유리한 위치를 점했으며 1949년에는 국민당을 몰아내고 중국 대륙을 통일한 중국의 지원까지 받으면서 프랑스를 더욱 공격하였다. 프랑스는 1954년 디엔비엔푸 전투로 베트민에게 패배하였고, 제네바 합의에서 베트남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하였으며 같은 해 10월, 남북 베트남에서 군대를 전면 철수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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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령 인도차이나와 코친 차이나 및 인도차이나의 독립 과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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