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프랑스의 식민 정책은 아시아까지 지속되었다. 대부분의 국가가 이 때 영국, 프랑스에게 굴복했지만 태국은 자국의 영토를 대나무 외교라는 명칭으로 영국, 프랑스 양측에게 조금씩 양보하는 형식으로 서로에게 이권을 제공하고 견제하는 방식을 통해 독립국 지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여러 불평등 조약과 이권 침탈에도 불구하고, 태국은 영국 프랑스 등 열강의 영향을 받아 19세기에 빠르게 근대화를 완료할 수 있었다. 더불어 이러한 불평등 조약들은 태국이 제1차 세계대전에 협상국의 일원으로 참전하게 되면서 폐지되었고, 이권 또한 치외 법권 정도의 특권만 남고 사라지게 된다. 한편 일본 제국은 태국과 1887년 우호 선언을 발표했으며 1898년 통상 및 항해 조약을 체결한 바 있었으나 관계는 크게 진전되지 않았었다. 그러나 두 나라 사이의 관계가 급속도로 진전된 계기는 1904년 러일전쟁 때문이었다. 태국은 일본이 러시아와의 전쟁으로부터 승리하여 열강의 일원으로 등극하는 것을 보고 큰 감명을 받았다. 일본 또한 자신과 똑같이 강제로 개항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같은 처지임에도 불구하고 서구 열강과 동등한 위치에 서게 되었다는 점에서 동질감과 경외심을 느꼈기 때문이다. 태국은 일본에 급속도로 접근하였으며, 교류 또한 급격하게 확대되었다.
1932년 입헌 군주제 쿠데타가 일어난 이래로 태국은 더욱 친일국가로 기울게 된다. 1933년 국제 연맹에서 일본의 만주 침략을 비난하는 결의안이 투표에 올려 졌을 때, 44개국 중 42개국이 찬성표를 던진 가운데 일본이 유일하게 반대하였고, 태국은 투표에 참여하지 않았다. 이를 계기로 두 나라 사이의 관계는 급속도로 진전되었으며, 일본은 태국을 자신의 동맹국으로 인식하게 된다. 일본은 태국에 기술자 파견 등을 통해 물적 지원을 제공하였으며, 특히 해군의 근대화에 도움을 주었다. 일본이 태국에 경제적, 기술적 원조를 제공하자 태국 내 여론은 더욱 친일외교로 일관하자고, 주장하게 되었으며 1937년 노구교 사건에 대한 국제 연맹의 규탄 결의안에서도 태국은 마찬가지로 기권 표를 던지며 일본 입장이 관철될 수 있도록 지원했다. 일본의 영향을 받은 태국은 파시즘에 대한 지지 또한 높아지게 되었다. 태국 내에서도 민족주의의 열풍이 유행하여 과거 영국, 프랑스에게 분리되어 넘겨주었던 영토들을 다시 회복해야 한다는 주장과 민족주의를 기반으로 타이 민족이 사는 영토는 모두 태국에게 속해야 한다는 대 태국주의 등의 이념들이 대두했고, 수도 방콕에서는 매일같이 폭력적인 민족주의 반영국 집회가 일어나는 등 정치가 혼돈의 연속이 된다.
1929년 대공황으로 인해 경제사정이 좋지 않아 동남아시아 지역 식민지들을 경영하기 어려웠던 데다 상황이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영국, 프랑스는 그나마 태국에 남아 있던 치외 법권마저 폐지해주는 등 급하게 우호적으로 나오게 된다. 그러나 결국 1938년 파시스트 성향에 강한 타이 민족주의의 정착을 주장하는 육군 원수 쁠랙 피분 송크람이 대중의 지지를 기반으로 총리에 취임하게 된다. 쁠랙 피분 송크람 태국 총리는 일본의 탈아입구(脫亞入歐)를 모방한 ‘랏타니욤(Rattaniyom)’이라는 서구화 정책을 펼쳤다. 먼저 태국 전통 의상 착용을 금지한 다음 서양식 의복 착용을 강제로 착용하게 했고, 음식을 먹을 때 포크를 사용하지 않을 시 벌금을 물게 했다. 심지어는 예술가들이 오선지를 사용하여 작곡을 하지 않으면 처벌하는 등 아주 세세한 부분까지 개입했다. 한편으로 송크람은 태국 민족 우월주의를 주장하며 민족주의 정서를 고취했다. 당시 태국에서 무역 상권을 장악하고 있거나 악덕 대부업자 또는 중개업자의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이들에 대한 태국인의 감정은 좋지 않았다. 특히 당시 태국인들은 일본을 좋아했으나 중국인들은 반일적인 정서를 가졌기 때문에 그 분노는 배가 되었다.
송크람은 태국 내 중국인을 유태인과 비슷한 민족으로 두고 규제를 강화했다. 민족주의에 대한 선전은 매우 성공적이었기 때문에 당시 군대에 약 70,000여 명이 자원 입대 하는 등 군부에 대한 지지가 높아지게 되었다. 이러한 정책의 결과로 인해 태국은 군국주의 정서가 팽배한 파시즘 국가로 변모하였다. 광범위한 대중의 지지를 통해 상당한 수준의 유럽 소국을 능가하는 형태로 군사력을 확장할 수 있었으며, 특히 장비의 수준이나 훈련도 측면에서 높은 질적인 성장을 이룰 수 있었다. 그러나 송크람 총리는 정책적으로는 전쟁 불개입을 기초로 한 중립적인 외교 정책을 펼쳤다. 개인적으로는 대 태국주의에 동조하는 민족주의자였음에도 불구하고, 영국, 프랑스 등의 ‘강력한 열강’과 전쟁을 벌여 승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마침 그 때, 유럽에서 프랑스가 독일에 6주 만에 붕괴되는 사건이 발생했다. 강력한 열강이라 생각했던 프랑스가 6주 만에 패배한 모습을 본 태국 군부와 국민들은 프랑스가 생각보다 훨씬 약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군부와 국민 모두가 당장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해 땅을 회복해야 한다는 여론이 폭주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송크람 총리는 일단 중립 외교 정책을 유지하려 했으나, 이미 해당 여론은 통제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민족주의 시위는 점점 강력해졌으며 1940년 10월 정도 되면 대학생들이 학업을 거부하고 방콕에서 프랑스 공격을 촉구하는 가두 행진을 벌이고 있는데, 거기에 교수들이 동조하여 행진에 합류하기까지 했다. 심지어 몇몇 장군들과 야전 사령관들까지 행진에 나와서 시위자들에게 감사를 표했고, 거기에 국민들은 열광하며 더욱 열심히 전쟁을 부추기는 등 주전론이 득세하게 된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피분 송크람 총리는 중립 정책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막대한 정치적인 압박을 받게 된다. 라디오에서는 매일 같이 민족주의 정서를 부추기는 방송이 흘러 나왔으며 심지어 군부는 이미 전쟁 준비에 들어간 상태였다. 만일 이 이상 공격을 허락해주지 않는다면, 군부가 자신의 통제에서 벗어나 독자적으로 전쟁을 일으킬 것이 명약관화했다. 한편 국익을 고려하여 중립 정책을 폈음에도 불구하고, 피분 송크람 총리 또한 강력한 민족주의자였기에 심정적으로는 공격 여론에 동조했다. 또한 항복 이후의 비시 프랑스가 겪는 혼란을 지켜보며 피분 총리는 만일 태국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공격하더라도, 비시 프랑스 당국이 식민지에까지 신경 쓸 여력이 없을 것이라고 추측하게 된다.
사실 낫질 작전(Battle of France, Western Campaign)의 성공으로 인해 프랑스의 몰락이 확실해진 5월 말부터 이미 양국 사이에는 공군을 중심으로 한 국경분쟁이 발생해왔다. 분쟁에서는 대체로 태국 공군이 우위를 점했으며, 태국은 국경지대에 대놓고 폭격을 가했다. 프랑스 측 또한 보복 폭격을 가했으나, 양쪽이 가한 피해는 비대칭적이었으며 프랑스가 입은 피해가 훨씬 컸다. 1940년 11월, 비시 프랑스는 라오스와 캄보디아 지역의 할양을 대가로 불가침 조약을 체결하겠다는 태국의 제안을 최종적으로 거절했다. 이에 국경분쟁은 보다 격화되었다. 1940년 11월 23일, 태국 공군은 6대의 B-10 폭격기로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지역 공군기지를 공격해 복수의 항공기를 파괴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M. S. 406 전투기들이 요격에 나섰고, 2대의 태국 폭격기를 격추했다. 같은 날 태국 육군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영내에 진입하여 프랑스 군과 교전을 벌였지만, 이내 철수하였다. 한편 프랑스는 이에 대한 보복으로 4대의 파르망 F. 221과 6대의 포테즈 542를 동원해 태국 측 공군기지를 목표로 야간 공습에 나섰다. 이를 통해 태국 항공기들에 약간의 피해를 주는데 성공했으나, 요격에 나선 태국 전투기들에 의해 호위기인 M.S. 406 2대와 폭격기 F. 221 1대가 격추되었다.
1940년 12월 8일, 피분 송크람은 프랑스 군이 태국 국경으로 집결하는 등 자국을 공격할 징후가 보인다는 것과, 11월 28일 나콘파놈 지역이 폭격당해 자국민 5명이 부상당했다는 것을 명분으로 비시 프랑스에 선전포고하였다. 하지만, 1941년 1월까지 지상군 간에 교전은 없었으며 국경 분쟁과 같이 공중전 위주의 전투가 이루어졌다. 태국 공군은 프랑스 식민정부 측 공군에 비해 양적, 질적 우위를 점했다. 수 자체도 1. 4:1 수준으로 태국 측의 항공기가 더 많았을 뿐만 아니라, 질적으로도 태국 측이 약간의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공중전의 성패를 좌우한 결정적인 요소는 양쪽 조종사들의 숙련도 차이였다. 숙련도의 차이는 급강하 폭격에서 두드러졌으며, 조종사들의 숙련도가 부족한 프랑스 측은 더 많은 손실을 강요당했다. 결국 이 시기 태국 공군은 제공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국경지대인 비엔티안과 캄보디아 지역에 위치한 군사 목표물에 집중적인 폭격을 가했다. 제공권이 완전히 장악 당했기 때문에 프랑스 측은 전쟁 내내 일방적으로 폭격을 당해야만 했으며, 겨우 구축한 방어선도 상당 부분 무력화 되었다. 지상전은 1941년 1월부터 시작되었다. 육군 전력에서는 태국이 압도적인 우위를 점했다.
이는 장비의 질적 차이에서 두드려졌는데, 프랑스 식민 군이 제1차 세계대전 시기나 그 이전의 무기로 무장했던 반면, 태국 측은 60구경장 보포스 40mm 포 등 현대화 된 장비를 갖추고 있었다. 기갑 전력의 차이는 더욱 두드러졌다. 전차 수효로만 보아도 태국 측이 134대, 프랑스 측이 20대로 7:1에 가까운 차이였던 데다가 프랑스 군의 전차 전력은 전량 르노 FT-17로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개발된 고물이었다. 사실 태국의 기갑 전력 또한 질적인 측면에서 그리 좋지는 않았다. 134대 중 60대는 카든-로이드 탱켓이었으며, 30대는 빅커스 6톤 전차였다. 그러나 이들은 적어도 전간기에 개발된 물건이었으며, 60대의 탱켓을 제외하고 본다면 질적 측면에서도 태국 측의 우위였다고 볼 수 있다. 결정적으로 프랑스 군은 12,000명만이 본국 출신이고 나머지는 식민지 출신이었기에 사기도 떨어져 있는 편이었다. 1941년 1월 5일, 폭격으로 약해진 국경 쪽의 방어선은 태국 측이 공격을 시작하자마자 붕괴되었다. 이어 태국군은 라오스, 캄보디아 지역에서부터 본격적인 공세를 시작하였다. 프랑스 군은 나름 분전했지만, 중화기 부족으로 인해 화력 차이 때문에 연패를 거듭했다.
태국군은 기갑전력을 앞세워 공세를 지속하였고 라오스 전역을 점령하는데 성공했다. 이에 프랑스는 베트남 지역에서 지형을 활용하여 방어선을 형성했고, 현지 징집을 실시해 병력을 보강하였다. 한편 캄보디아 지역의 공세는 라오스 지역만큼 성공적이지는 못했다. 태국의 공세가 이어졌으나 1941년 1월 16일, 프랑스군은 산포를 동원해 빅커스 6톤 전차 3대를 격파하는데 성공했고, 이에 태국의 공세는 돈좌되었다. 프랑스 군은 뒤이어 반격을 실시했으나 성공적이지 못했다. 그러나 기갑전력을 상실한 태국군 또한 공세 역량을 상실했으며, 추가적인 공세를 수행할 수 없었다. 일단 공세를 저지하는데 성공했으나, 프랑스 측의 상황은 절대로 좋지 않았다. 교환 비부터가 거의 10:1 수준으로 처참했으며, 제공권을 장악한 태국군은 내내 폭격을 가해왔다. 비시 프랑스에 가해진 여러 제약 및 내부적 혼란으로 인해 본국으로부터의 지원 또한 기대할 수 없었으며, 이대로라면 캄보디아 지역을 상실하는 것 또한 시간 문제였다. 이에 프랑스는 가용 가능한 해군 전력을 모두 모아 결정적인 공격을 준비하였다. 만일 캄보디아 연안의 제해권을 장악할 수 있다면, 함포 사격을 통해 예상되는 태국 육군의 공세를 저지하지 못해서 수성은 가능하리라 기대됐기 때문이다.
그러나 해상 전력에서도 문제가 많은 것은 마찬가지였다. 경순양함 1척, 통보함 4척에 무장 화물선 1척, 전력 외로 취급해야 할 정도의 구식 잠수함 1척이 전부였다. 프랑스 군의 뒤게-트루앵 급 경순양함이자 기함 라모트-피케는 1924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최고 속도 33노트에 달하는 빠른 속도를 가진 대신 장갑이 없는 수준이라는 것이 특징이다. 배수량은 7,500톤으로 태국 측 함선들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매우 대형 함정이었다. 함포 또한 155mm 연장 포 4문으로 비교적 빈약했으나, 대신 어뢰를 다수 탑재할 수 있었다. 부겐빌 급 통보함 뒤몽 뒤르빌(Dumont d'Urville)과 아미랄 샤흐니(Amiral Charner)는 각각 1931년, 1932년에 진수된 함선으로 비교적 신형 함선이었다. 배수량이 무려 1,955톤으로 통보함 치고는 매우 대형 함정이었는데, 이는 부겐빌 급 통보함 자체가 당초 구축함 내지 경순양함 용도로 사용할 것을 염두에 두고 건조되었으나, 런던 해군 군축 조약의 제약을 회피하기 위해 함정의 명칭만 통보함으로 붙인 것에 가깝기 때문이다. 함포는 반자동으로 장전되는 138mm 단장 속사포 3문으로 상당히 높은 화력이었으나, 함포 구경 및 수량에 따른 한계도 명확했다.
후미에 수상기 1대를 탑재했다는 것도 특징이다. 아라급 통보함 마네(Marne)와 타후엔(Tahure)은 제1차 세계대전 시기에 건조된 함선으로 구형함이었다. 배수량은 600톤이며, 138mm 연장포 1문을 탑재했다. 현대화가 전혀 되지 않아 노후화가 심각했으며, 사실상 전력 외에 가까웠다. 그 외에도 무장 화물선 1척과 구형 잠수함 1척을 동원했으나, 이는 전력 외의 함정이었으며 아무런 역할을 하지 못 했다. 태국 해군은 전함을 해방함으로 대용하고, 스크린을 건보트, 어뢰정으로 꾸려지는 전형적인 소국 해군이었다. 해방함 2척을 주력함으로 하고, 배수량에 비해 대구경 함포를 장착한 2척의 건보트가 중간의 순양함 역할을 했으며 10척의 어뢰정으로 이를 보조하였다. 여기에 수송선을 습격할 수 있는 4척의 잠수함 또한 갖추고 있어 전반적으로 균형이 잡힌 연안해군이 구성되었다. 톤부리 급 해방함 톤부리와 스리 아유타야는 가와사키 중공업에서 1937년에 진수된 최신형 함선으로, 사실상 태국 해군의 전 재산이나 다를 바 없는 주력함이었다. 배수량은 2,350톤으로 203mm 연장 포 2문으로 무장했으며 장갑 또한 포탑 103mm, 갑판 63mm로 나쁘지 않았다. 대신 해방함답게 속도가 15.5노트로 극히 느렸다. 이 외에도 이탈리아에 배수량 6,000톤의 에트나 급 경순양함 2척을 주문했으나, 이는 제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압류되었다.
애진코트와는 달리 이 함선은 그나마 전쟁이 끝날 때까지 완성되지 못해서 1943년 이탈리아 전선이 열리고 연합군이 조선소에 들어올 당시 공정 진행도는 53% 수준이었다. 태국 해군은 톤부리 급 함정 2척을 주축으로, 1925년 진수된 152mm 단장포 두 문을 장착한 영국제 라타나코신드라(Rattanakosindra)급 건보트 2척과, 1935~1937년에 순차적으로 진수된 76mm 속사포를 장착한 이탈리아제 촌부리 급 어뢰정 10척, 1937년에 진수된 일본제 마차누 급 잠수함 4척으로 구성되었다. 이처럼 태국 해군은 연안해군 전략에 맞춰 건조되었기 때문에 함선 체급에 비해 높은 화력을 갖추고 있었던 반면, 프랑스 함선들은 대양 해군 전략에 따라 원양 작전 능력을 갖추고 건조되었기 때문에 화력이 제한되었다. 심지어 4척은 개중에서도 특히 원양 작전 능력에 집중한 아비소라 불리는 통보함이었기에, 태국 연안이라는 전투 환경은 태국 해군에 압도적으로 유리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총톤수도 프랑스가 12,500톤, 태국이 16,600톤으로 대략 3:4 정도였다. 개함 성능도 라타나코신드라급 두 척을 제외하고 최신형이었던 태국이 당연히 유리했으며, 심지어 제공권도 갖추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령 인도차이나의 해군은 태국 해군에 비해 전력상 확실한 열세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