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고르는 941년에 비잔틴 제국을 상대로 공격을 결정했다. 이고르는 초반 비잔틴에게 계속 승리하여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이 도시의 교외를 초토화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고르의 해상을 통한 콘스탄티노플 공격은 유명한 그리스의 불과 크림반도에 정착해 있던 대규모 비잔틴의 전함들에 의해 패배했다. 수륙 양면 공략에 실패한 이고르는 944년 콘스탄티노플의 포위를 풀고 강화를 요청했다. 이 때 맺어진 조약은 911년에 올레그에 의해 맺어진 조약에 비해 키예프 공국에게 훨씬 불리했다. 그러나 비잔틴 제국을 재공격하기 위해 여러 세력들을 지배하에 두어 국력을 회복하려 했으며 그러한 일환으로 이고르는 945년에는 페르시아와 몇몇 지역들을 공격하여 복속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무렵 ‘숲 속의 사람들’ 이란 뜻을 가지고 있는 슬라브계 종족인 드레블리예 족(The Derevlians)이 반란을 일으켰다. 키예프 공국의 지나친 공물 요구에 맞춰 힘겹게 공물을 바치던 그들은 키예프 공국이 두 차례나 비잔틴 제국과 전쟁하면서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실패하는 것을 보고 키예프 공국의 국력이 피폐해졌으리라는 판단 때문이었다. 드레블리예 족은 조직적인 반란에 들어갔고 이고리는 946년에 군대를 이끌고 드레블리예 족과 정벌 전을 벌였다.
그러나 드리블리예 족은 산세의 험한 지형을 이용하여 이고르의 군대를 기습했고 이고르는 포로로 붙잡히고 말았다. 드레블리예 족은 이고르를 매우 가혹한 고문을 시킨 다음 나무에 묶어 놓은 뒤 산 채로 찢어 죽였다. 이러한 사태로 인하여 드레블리예 족은 독립에 성공하였으며 키예프 공국을 정복하기 위해 군을 정비하고 공세를 강화하게 된다. 올레그와 이고르의 통치는 키예프 공국의 건국과 맞물려 있다. 따라서 실제로 역사적인 기록에서 언급될 때 언제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인가를 두고 많은 논쟁이 있어왔다. 그러나 잠정적으로 올레그가 882년에 키예프를 점령한 때로부터 시작된 것으로 합의되었다. 그러나 올레그가 앞에서 살펴본 바의 방식 그대로 키예프를 점령한 것인지에 대해서는 항상 의문이 제기되어 왔다. 그러나 올레그는 신하들의 도움을 받아 이웃의 동슬라브 부족들을 복속시켰으며 그들로부터 공물 또는 세금을 거두었던 것은 확실한 것 같다. 이후 올레그는 세력이 강성해진 것을 확인하자 907년부터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여 키예프 공국에 유리한 무역 협정을 맺었다. 이후 즉위한 이고르는 내치에 집중했으며 941년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했다.
그리고 이후 이고르의 전사는 슬라브 부족들의 단결을 이끌어 냈고 탈 슬라브 연맹을 선언한 드레블리예 족을 축출하는 것에 세력을 합의했다. 945년 가을 무렵 남편 이고르 대공이 드레블리예 부족에게 살해당하자 올가는 슬픔에 젖을 틈도 없이 남편을 대신해 키예프를 통치해야만 했다. 아들이었던 스비아토슬라프가 매우 어렸기 때문이다. 키예프를 통치하면서 동시에 올가는 남편에 대한 복수를 해야 했다. 가족 중 누군가가 죽임을 당할 경우 나머지 가족들이 복수하는 행위는 당시에 관례였다. 올가의 복수전을 설명하기 위하여 올가는 어떠한 여인이었고 어떻게 출생했으며 성장했는지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고 본다. 올가는 러시아의 북서부에 위치한 프스코프 주(Pscov, 오블라스트 Oblast)의 비부티(Bibuty) 마을의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올가는 어릴 때부터 아주 현명하고 결단력 있는 여자 아이로 소문이 자자했다. 너무 아름답다보니 사람들은 그녀를 ‘미의 화신’ 이라고 부를 정도였고 이내 그녀의 미모에 대하여 슬라브 부족 전체에 알려졌다. 어느 날 키예프 공국의 이고르 대공은 사냥을 하다가 올가를 보게 됐다. 그녀에게 반한 이고르 공후는 올가에게 청혼했고 청혼을 받아들인 올가와 이고르 대공은 결혼했다. 그 때 신부인 올가의 나이는 13세였다. 이고르 대공은 신부에게 삼촌의 이름 올레그를 따서 올가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올가는 아름다운 외모 뿐 아니라 매우 지혜롭고 총명했기 때문에 때때로 국가의 중요한 정사에 관여하기도 했다. 올가는 이고르가 비잔틴 제국에 대한 대대적인 봉쇄를 시작할 때 상당히 많은 지략을 총괄했으며 외교적인 역량으로 인하여 동맹 세력들이 확대된 것을 확인하자 941년에 비잔틴 제국을 공격하는 것에 참여했다. 그러나 이고르 대공이 해군의 전멸로 인하여 콘스탄티노플 공략에 실패하자 주력 육군을 거느리고 키예프 공국에 매우 유리한 지역을 선점하여 안전하게 콘스탄티노플을 벗어날 수 있게 하였다. 이어 주변 동유럽 국가들과의 경제적인 협력을 강화하여 무역 협정을 이끌어내는데 성공했으며 이고르가 드레블리예 부족을 토벌하기 위하여 출정했을 때 수도인 키예프를 최종적으로 방어하는 수장의 위치까지 겸하기도 했다. 이러한 올가에 대한 남편 이고르 대공은 상당히 신임했으며 여러 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과 올가 사이의 아들인 스비아토슬라프를 후계자로 삼았다. 러시아연대기에 의하면 올가는 아들 스비아토슬라프를 942년 그녀가 52세 되던 해에 낳았다고 전해진다. 이고르 대공을 살해하고 키예프를 공격할 계획을 세우고 전진했으나 드레블리예 부족에 합세했던 일부 슬라브 부족들은 올가에 의한 대병을 거느리고 공격할까 두려워했다.
이들은 키예프를 공격하는 것에 대하여 상당히 조심스럽게 행동했고 급기야 드레블리예 부족을 배신하고 살 길을 찾을 궁리를 하기 시작했다. 이에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키예프 진군을 포기하고 키예프의 섭정이 된 올가에게 자신들의 공후인 마르(Мал)와 결혼한다면 그들이 관할하는 영토는 더욱 강대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묘수를 찾았다고 생각한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올가에게 사신을 보내 마르 공후와 결혼할 것을 제안했다.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보낸 사신의 제안을 듣는 척하던 올가는 그들에게 하루만 시간을 달라고 부탁했다고 한다. 올가는 다음 날 아침에 사신을 보낼 것이니 그들과 함께 자신에게 오라고 말하면서 사신들을 안심시킨 이후 병사들에게 궁전 앞마당에 아주 크고 깊은 구덩이를 파라고 지시했다. 하루가 지난 후 올가는 사람을 보내 드레블리예 사신들을 불러냈다. 올가의 부하들은 걸어서 올지 배를 타고 드레블리예 사신들에게 묻자 드레블리예 사신들은 배를 탄 상태로 궁전으로 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자 올가의 부하들은 사신들이 탄 배를 들고 키예프로 들어왔고 사신들이 키예프의 궁전으로 들어오자 올가의 부하들은 구덩이에 배를 던져버렸다. 배 안에 있던 드레블리예 사신들은 구덩이에 빠지게 되었고 올가는 그들을 산 채로 매장하라고 지시했다.
첫 번째 복수를 끝낸 이후 올가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사신을 보냈다. 올가는 사신을 통해 마르 공후와 결혼하겠다는 의사를 전하고 대신 드레블리예 부족들 가운데 연로하고 존경받는 인물들을 키예프로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리고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사는 곳으로 갈 때 미리 그들의 풍습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싶다는 뜻을 전했다. 사신들의 운명을 모르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마르 공후와 결혼한다는 올가의 말을 믿고 마을의 수장들을 키예프로 보냈다. 올가는 키예프에 도착한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피로를 풀라며 목욕할 것을 권했고 그들이 목욕탕에 들어가자 올가는 문을 폐쇄하고 목욕탕을 불태워 수장들을 모두 화형에 처했다. 두 번째 복수를 마친 직후 올가는 다시 사신을 보내 자신은 벌써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살고 있는 곳으로 출발했다며 자신을 마중 나오기를 요청했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약 5천 명의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올가를 만나기 위해 나왔다고 한다. 드레블리예 사람들을 만난 자리에서 올가는 남편 이고르의 추모식을 거행했다. 추모식이 끝나고 그들에게 술을 먹이고 취해 잠이 들었을 때 올가는 그들 모두를 참수했다. 세 번째 복수를 마친 올가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주로 거주하고 있는 본거지인 코로스텐(Korosten)으로 갔다.
이 때 올가의 복수를 알고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했다. 드레블리예 부족민들이 사력을 다해 성을 방어하자 여름 내내 코로스텐 성을 포위하고도 점령하지 못한 올가는 다른 전략으로 선회하게 된다. 올가는 성을 지키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에게 항복한 사람들은 세금을 내면서 농사짓고 있다며 성을 지키다 굶어죽느니 차라리 세금을 내고 농사짓는 것이 낫지 않겠냐고 설득했다. 세금을 내고 싶었지만 올가의 복수가 두려웠던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복수가 끝났다는 올가의 확답을 듣기를 원했다. 그녀는 복수는 끝났다며 화해를 요청했고 화해의 상징으로 드레블리예 부족들도 각 가정마다 비둘기 세 마리와 참새 세 마리를 가져오라고 요청했다. 진정으로 복수가 끝났다고 생각한 드레블리예 부족들은 올가의 요구를 들어줬고 올가는 드레블리예 부족들이 보낸 새들의 다리에 유황을 묻힌 끈을 묶고 끈에 불을 붙여 새들을 성으로 돌려보냈다. 성으로 돌아간 새들 때문에 코로스텐 성은 내부에서 화재로 인하여 대혼란으로 이어졌다. 화재를 피해 성 밖으로 나온 부족민들은 올가의 병사들에게 살해당했고 나머지 부족민들은 모두 불에 타 죽었다. 그리고 살아남은 부족민들은 모두 올가의 노예가 되었다.
올가의 복수는 이렇게 하여 끝나고 드레블리예 부족은 이후로도 키예프 공국에서 가장 하층 계급으로 존재하게 되었고 몽골 제국에 의해 키예프 공국이 멸망할 때까지 이와 같은 노예 생활을 지속되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두고 러시아 인들은 오랫동안 그녀의 이러한 복수를 칭송하면서 그녀를 ‘지혜로운 러시아 여성’ 의 상징처럼 여겼다. 이처럼 일단 복수전을 성공시킨 뒤 올가는 드레블리예에 협력한 슬라브 부족들을 여러 지역으로 나누고 각 지역에 징세 관을 보내서 세금을 걷게 했는데 각 지역 공통의 세율과 세법을 정해서 징세 관들의 자의적인 징세를 막았으며 징세의 횟수를 한 해에 한 번으로 한정해 드리블리예 부족에 협력했던 기타 슬라브 부족들의 원성을 낮추려고 노력했다. 이러한 노력들은 슬라브 부족들의 성공적인 재통합으로 이어졌다. 키예프 공국의 역사에 있어 올가의 이름을 특별히 기록하게 만든 것은 이러한 성취들이 아니었다. 올가의 기독교의 수용은 그동안 다신교를 믿었던 슬라브 인들의 종교적 통합을 위한 정치적인 방편이었다. 올가는 957년에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고 비잔틴 제국으로부터 환대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 정교회의 세례를 받았다.
올가는 자신의 기독교 수용을 계기로 자신의 백성들도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올가 대공이 언제 기독교 세례를 받았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957년에 비잔틴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에서 세례를 받은 일은 거의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 그리고 올가 공후의 세례가 키예프 사회에 별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는 사실도 대부분의 학자가 의견을 같이하고 있다. 심지어 올가의 아들인 스비아토슬라프 조차도 본인이 기독교로 개종할 경우에 부하들이 자신을 업신여길 것이라 생각해 개종하지 않았다. 그래서 올가 대공의 기독교 세례는 개인적 차원에서 이뤄진 것으로 보는 편이 많다. 올가 대공이 콘스탄티노플을 방문하여 세례를 받을 때 비잔틴 제국의 황제를 예방한 적이 있었다. 러시아 연대기에 의하면 현명하고 슬기로운 올가 대공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당시 올가 공후는 이미 기독교에 대해 많은 이야기를 알고 있었다. 좀 더 세부적으로 기독교를 알기 위해 올가는 비잔틴 제국의 수도인 콘스탄티노플로 향했다. 키예프 대공이 방문한다는 소식을 접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올레그 대공이 비잔틴 제국에 행한 정벌에 대하여 상당히 격양되어 있었기 때문에 올가 대공을 쉽게 만나주지 않았다.
하지만 올가 대공을 만난 비잔틴 제국의 황제는 올가를 보자마자 미모에 반했다고 한다. 황제는 올가 공후에게 청혼했고 현명한 올가 대공은 아직 기독교를 받아들이지 않아 황제의 부인이 될 수 없다는 이유를 들어 황제의 제안을 거절했다. 하지만 황제가 올가의 대부가 되어 직접 세례를 해준다면 그때는 결혼하겠다고 말했다. 이에 황제는 총대주교와 함께 직접 올가에게 세례를 주었다. 세례를 마친 후 황제는 다시 한 번 올가 대공에게 청혼했다. 그러나 올가 대공은 “황제께서는 제 아버지로서 세례를 해주셨고 저를 딸이라고 부르시는데, 딸인 제가 어찌 아버지와 결혼할 수 있겠습니까?” 라고 황제의 청혼을 거절했다. 이는 정치적인 면에서 올가 대공의 현명함이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수 있다. 세례를 받고 돌아온 올가 대공은 백성들에게 기독교를 전파하려 했으나 대부분의 백성들이 이를 거부했다. 한편 비잔틴 제국은 키예프 공국이 비잔틴 제국 황제의 정치적 권위와 콘스탄티노플 총주교의 종교적 권위를 인정할 것을 요구했다. 이러한 상황에 놓이자 올가는 로마 가톨릭을 받아들이려고 했다. 그러나 교섭 과정에 교황과의 오해가 생겨 성사되지 않았다. 이렇게 되면서 키예프 공국에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분위기가 크게 생겨나게 되었고 이내 기독교를 거부하는 부족민들로 인하여 전도를 위해 상주했던 사제들이 참혹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그러자 올가는 장성한 스비아토슬라프에게 대공 지위를 양위하게 되었다. 그러나 올가(Ольга)가 대공으로써 직접 통치한 (945~962) 기간 동안 키예프 대공국은 크게 안정기에 접어들었다. 특히 각 부족들의 총 지도자 역할을 맡으면서 그들의 단체 이탈을 봉쇄했다 우선 드레블리예 부족에 대한 복수전을 벌인 이후, 동부 우랄일대까지 비교적 넓게 분포되어 있던 드레블리예 부족의 동맹 세력들을 단계적으로 분할하여 세금을 징수하는 등 추가 이탈을 봉쇄하기 위하여 여러 혜택들을 주고 이들에 대한 통합을 전개했다. 올가는 자신에게 충성 서약을 위해 찾아온 서부 지역의 슬라브 부족들의 사신들을 적당히 구슬려 자신의 친위 세력으로 만들었고 회유가 되지 않은 남부 슬라브 부족들과 크림 반도 일대의 슬라브 부족들을 토벌 작전을 감행하여 부족민들을 산 채로 묻어 죽이거나 마을에 들어가게 해놓고 불을 질러 태워 죽이면서 잔인하게 제압했다. 이렇게 통합된 슬라브 민족들로 인하여 스비아토슬라프의 정복 전쟁을 용이하게 해주는 결과가 되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