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6-01-13(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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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마 6세 와치라웃 왕은 아들이 없이 사망했다. 그에게는 친동생이 여럿 있었는데, 동생들도 먼저 사망하고 막내 동생인 프라차티폭 왕자만이 남아있었다. 왕권은 통치하기에 아무런 준비가 없었던 프라차티폭에게로 넘어갔다. 1925년 11월 프라차티폭(Prajadhipok)이 32세의 나이로 라마 7세에 즉위했을 때 나라 재정은 이미 파탄 상태에 있었다. 재정은 거의 파산 상태였고, 왕실에 대한 불신은 고조되었다. 그러다보니 갑자기 왕이 된 라마 7세는 혼자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웠다. 능력도 없었을 뿐더러 용기도 없었다. 그는 자문 기관으로 최고 평의회를 구성해 국정을 맡겼다. 평의회에는 담롱(Damrong)과 파누랑시(Panurangsi) 등 라마 6세의 재위 시절에 배제되었던 삼촌들과 보리팟(Boripat)과 낏띠야곤(Kyttiyagon) 등 왕자 5명으로 채워지기도 했다. 1인의 국왕 중심에서 집단 지도체제로 전환되었지만, 절대 군주제에는 변함이 없었다. 귀족이나 평민 출신은 권력 핵심에 들어가지 못했다. 라마 4세와 5세의 근대화 정책으로 인해 귀족과 평민 자제들이 외국에서 유학하고 돌아왔지만 그들의 참여 폭은 좁았다. 라마 7세는 형 라마 6세가 하던 것과 반대로 하면 지지를 얻을 것으로 생각했다. 라마 6세가 임명한 12명의 장관 중 3명만 남기고 모두 바꾸는 것에서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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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Tanks outside Ananta Samakhom Throne Hall, 출처 : Wikipedia, Siamese revolution of 1932

 

왕실 예산도 삭감하고 공무원 수를 줄였다. 하지만 나라는 이미 쇠퇴했고, 무엇을 해도 대중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왕은 헌법제정에 대한 요구를 받아들여 시도는 했지만, 기득권자들로 구성된 추밀원에서 거부되었다. 의회 구성도 논의되었지만 집권자들은 문맹자가 대부분이라는 이유로 대표자를 선출할 여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단정했다. 특히 서양학을 공부한 선각자들에겐 라마 7세도 절대왕정의 연장이고 독재정권에 불과했다. 절대군주제에 대한 불만은 해외 유학생들 사이에서 고조되었다. 옛 질서에 젖어 있는 국내에서는 체제의 모순을 보지 못하던 젊은이들이 서구 사회의 민주적인 풍토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게 되었다. 1924년 무렵, 유럽의 태국 유학생은 영국에 301명, 미국에 47명, 프랑스에 24명 등 대략 400명에 이르렀다. 처음에 왕족 위주로 나가던 유학을 갔으나, 이 무렵엔 귀족, 부유층으로 유학의 분위기가 확산되었고, 심지어 고학을 하며 해외 문물을 배우는 학생도 있었다. 영국에 가장 많은 유학생들이 있었는데, 대부분 집권 세력의 자제였기 때문에 고위 관직에 기용되기 위해 학업에 주력했다. 이에 비해 프랑스 유학파들은 소수였지만 가난한 집안 출신이 많았고 따라서 보다 이념적이고 급진적 성향을 가졌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과  러시아 혁명에 대해서도 듣고 배웠다. 당시에 유행하던 사회주의에 대해서도 공부했다. 1927년 2월 파리의 한 호텔에 7명의 태국 출신 유학생과 군 출신 외교관들이 만나 자리를 함께 했다. 이들 7인의 주동자에는 법학도인 프리디 바놈용(Pridi Banomyong), 포병 대위 출신인 쁠렉 피분 송크람(Plaek Phibunsongkhram), 정치학 전공인 프라윤 파몬몬트리(Prayoon Pamornmontri)가 포함되었다. 그들은 조국 시암을 개혁할 방향과 방법론을 논의했다. 우선 1912년에 발생한 쿠데타 음모의 실패 원인을 분석했다. 그들은 태국에 아직 대중적 민주화 기반이 없다고 분석했다. 중산층도 귀족에 매여 있기 때문에 민주화 역량이 없다고 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그러한 판단은 집권층의 논리와 유사했다. 결론적으로 7인의 개혁파들은 군부에 지지자를 결집해 혁명을 일으키기로 의견을 모았다. 이들은 자신들의 정치조직을 카나 랏차돈(Khana Ratsadon)이라 했다. 이를 직역하면 인민당이라 부른다. 프랑스 파리에서 조직된 인민당은 주동자들이 하나씩 태국으로 귀국하면서 국내로 확산되었다. 1929년 미국에서 시작된 대공황의 여파는 이듬해 시암 왕국에도 밀려왔다. 인플레이션보다 무섭다는 디플레이션이 찾아왔다. 물가가 하락하고 세수가 감소했다. 


이에 국방 예산마저 삭감하지 않을 수 없었고, 91명의 장교 진급이 보류되었다. 국방 장관을 맡았던 보워라뎃 왕자가 사직하고 퇴임했다. 그러자 군부에 불만이 고조되었다. 1931년 영국이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자 기축 통화였던 파운드화가 흔들렸고, 태국도 1932년에 금본위 제도를 포기했다. 그러면서 정부의 지출을 3분의 1로 감축했다. 세수를 확보하기 위해 그 동안 부과하지 않았던 기타 소득에도 세금이 부과되었고, 공무원들이 대량 해고되었다. 경제 공황은 심리적 공황을 초래했다. 국민의 생계가 어려워지면서 통치자에 대한 불만이 높아갔다. 전지전능하던 우리 왕은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는 지 등에 대한 불만이었다. 1932년은 라타나코신 왕조가 수립된 지 150주년 되는 해였다. 시중에는 왕조의 멸망 설까지 나돌 정도로 태국 내에는 불안한 사회 징조가 포착되었다. 왕조가 창건된 지 150년이 되는 해에 뱀의 저주를 받아 대재앙이 일어나 왕조가 멸망한다는 소문이었다. 당시 태국 사회에서는 미신을 믿는 풍조가 강했었다. 귀국한 인민당의 주동자들은 각자의 영역에서 혁명 세력을 규합해 나갔다. 프리디 바놈용은 관료와 대학교수들을 섭외했고, 쁠랙 피분 송크람은 군부 내 급진 인사들을 포섭해 나갔다. 


대공황으로 관청에서 추방될  위기에 처해 있던 공무원, 봉급이 삭감된 장교, 서구 자유주의를 동경하던 지식인들이 인민당에 합류했다. 그들의 목표는 입헌 군주제였다. 헌법을 제정하고, 의회를 구성하며, 국왕의 권한을 제한한다는 것이었다.점차 상급 장교들이 절대 군주제 타도에 가담했다. 1931년 후반에는 방콕 포병대 부지휘관인 프라야 파혼(Praya Pahon) 대령, 육군사관학교 교육부장인 프라야 송수라뎃(Praya Songsuradet) 대령이 합류했는데, 이들은 모두 독일에서 유학했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1932년 인민당에 가입한 당원이 102명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러한 음모자들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보안이 취약했다. 거사일은 1932년 6월 23일 밤으로 정했다. 그날 라마 7세는 방콕을 떠나 말레이 반도 후아힌(Huahin)에 있는 별궁에서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 수도 방콕은 보라팟(Borapat) 왕자가 맡고 있었다. 거사 하루 전에 음모의 전모가 누설되었으나, 첩보를 전해 받은 보라팟 왕자는 주모자의 체포를 하루 미루었다. 태국군 총사령관을 맡고 있던 왕자의 우유부단함이 혁명의 성공을 돕는 역설을 낳았다. 6월 24일 새벽, 주동자들은 탱크부대를 앞세워 궁궐을 포위하고 정부 핵심 관료들을 체포했다. 그들은 카나 랏사돈(인민당)의 명의로 쿠데타를 공식 선포했다. 


성명서는 프리디 바놈용이 작성했고, 인민당 당수 프라야 파혼이 성명서를 발표했다. 성명은 라마 7세 정부의 연고주의와 무능, 금권 정치를 비난하고 쿠데타를 통한 정권 전복의 정당성을 역설했다. 혁명 세력은 라마 7세에게 전갈을 보내 정부가 전복되었고, 주요 관료들이 체포되었다고 통보하고, 국왕이 방콕으로 돌아올 것을 촉구했다. 그들은 국왕에게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 국왕은 쿠데타 세력을 진압할 능력이 있었다. 하지만 라마 7세는 자신이 헌법 제정을 요구했다가 거부된 적이 있기 때문에 쿠데타 세력의 요구를 거부할 명분이 없었다. 결정적으로 그는 우유부단했다. 당시 쿠데타 소식을 듣고 라마 7세는 태연자약했다고 한다. 그는 후아힌 골프장에서 왕비와 함께 골프를 치다가 라운드를 중단하고 방콕으로 돌아왔다. 국왕은 6월 26일 쿠데타 주모자들과 만났다. 프리디는 인민당의 성명 내용을 국왕에게 설명하고 사죄를 구했고, 라마 7세는 주동자들을 모두 용서하는 형식을 취했다. 이는 형식상일 뿐 사실상 국왕이 쿠데타 세력에게 굴복한 것이다. 곧이어 인질이 석방되고, 국왕의 뒤에서 조종하던 최고평의회와 추밀원이 해체되었다. 라마 7세는 인민당이 만든 헌법을 수용했다. 


이로써 태국에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막이 내리고 입헌 군주제가 실시되었다. 역사가들은 이 사건을 쿠데타의 수준을 넘어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이라고 규정한다. 더불어 이 혁명은 무혈혁명이었다는 것에서 의미가 있었다.  라마 7세는 결국 혁명세력을 무력으로 진압할 경우 수많은 인명 피해와 심각한 정국 혼란이 발생할 것을 우려해 입헌 군주제를 받아들였다. 혁명 세력은 유럽에서처럼 시민과 부르주아로 구성되어 있지 않았고, 주로 프랑스에서 유학한 귀족 자제와 군부, 민관 관료들이 주류를 이루었다. 같은 해 12월 혁명을 주도한 인민당은 태국 최초로 헌법을 제정했다. 헌법에 형식적으로는 의회 개설이 규정되었으나, 혁명 지도부도 국민의 민주 역량을 믿지 못했다. 의원의 절반은 지명되고, 나머지 절반은 간접 선거로 선출되었다. 이는 문맹률이 높아 민주적 선거를 치를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다만 혁명 세력은 국민의 절반이 기본 교육을 받은 때에 선거를 실시하겠다고 했다. 그 시기는 1940년대쯤으로 되어야 할 것으로 관측되었다. 혁명 초기 권력은 군부 출신이 장악했다. 중국계 화교 출신인 프라야 마노파콘(Prays Manopakon)이 초대 총리로 선출되었다. 혁명이 성공한 이후 그 다음 일어나는 일은 내분이다. 태국도 이 공식에서 예외는 아니었다. 


혁명의 다음해인 1933년, 급진파였던 프리디 바놈용이 개혁 안을 라마 7세에게 제출했다. 프리디의 개혁 안에는 농지를 국유화하고 정부가 산업을 통제하는 내용이 포함되었다. 왕족과 귀족의 관료 진출을 제한하고 교육을 받은 평민에게 관료 진입의 문호를 개방하도록 했다. 국왕은 그 개혁 안을 공산주의적이라고 비난했다. 마노파콘 총리도 개혁 안에 반대했다. 총리는 화상(華商)의 이익을 고려해야 했고, 본인도 귀족 반열에 오른 인물이었다. 반동의 기류가 강하게 대두되었다. 개혁 안은 혁명파를 분열시켰다. 마노파콘 정부는 보수 세력들을 결집해 개혁 안을 무산시키려 했다. 그러자 쁠랙 피분 송크람과 파혼 장군이 프리디를 지지하면서 군대를 동원해 마노파곤 정부를 전복했다. 태국에서 정치적 타협이 이루어지지 않으면 쿠데타를 일으키는 관례가 이 때부터 생겨냈다. 피분 송크람과 프리디의 연합 세력은 파혼을 총리로 추대했다. 라마 7세는 차기 국왕을 지명하지 않았다. 파혼 정부는 왕족 가운데 자신들의 명령을 이행할 수 있는 왕족을 찾았다. 라마 7세의 조카로 스위스에서 유학하고 있는 아난타 마히돈(Ananda Mahidol)이 차기 국왕으로 선택되었다. 


그의 나이는 9세였다. 그는 의회 승인을 얻어 라마 8세로 등극했는데, 방학 때 잠시 귀국하는 것을 제외하면 1946년 6월 20세의 나이로 사망할 때까지 대부분을 해외에 거주했다. 국내 정치는 혁명파에 의해 움직이게 되었다. 라마 7세를 추방한 이후 혁명파들은 개혁에 매진했다. 프리디 바놈용과 쁠랙 피분 송크람의 협력은 개혁의 원동력이 되었다. 정부가 금본위 제도를 포기하면서 수출이 회복되었고, 교육 지출은 이전보다 4배나 증가해 문맹률이 급감했다. 먼저 지방에서 선거를 실시한 연후에, 1937년에는 직접 선거에 의해 의회가 구성되었다. 다만 정당 설립은 허용되지 않았다. 프리디 파놈용의 제안으로 일반 국민도 지원할 수 있는 탐마삿 대학도 설립되었다. 육군과 해군의 무기와 장비가 크게 확충되었고, 공군도 창설되었다. 1938년 12월 또 다시 정치권에 쿠데타가 모의되었다. 그 동안 유지해 온 정치적 동맹 관계에 균열이 생기고 피분 송크람이 총리가 되었다. 집권하자 그는 왕당파, 민주파 등 정적 50여 명을 체포하고 그 중 18명을 처형시켰다. 그는 왕실의 원로인 담롱 왕자를 국외로 추방하고 군부의 신임을 받고 있는 송수라뎃 일파를 제거했다. 이후 송수라뎃은 캄보디아로 망명했다. 이로써 권력은 그에게 집중되었다. 


피분 송크람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를 존경했고, 파시즘 수법을 그대로 따라했다. 그도 당시 독일 히틀러나 이탈리아 무솔리니처럼 민족주의를 주창했다. 우선 1939년 국명을 시암(Siam)에서 타이(Thailand)로 바꾸었다. 시암은 라오스, 캄보디아, 말레이 반도를 포괄하고 화교와 이슬람을 품는 포용적 개념이었지만, 타이는 타이족의 국가라는 국수주의적인 의미가 강했다. 그의 정권은 “타이족을 위한 태국(Thailand for the Thai)”이라는 명제를 주창했다. 피분 송크람은 히틀러처럼 특정 인종을 배척했는데, 그 목적은 화교에 있었다. 중국인 상인 계층에 대한 선동적인 구호를 외쳤고, 화교 학교, 화교 신문을 철폐했으며, 화교들의 사업에 세금을 증액했다. 그는 대중매체의 위력을 간파하고 미디어를 적극 활용했다.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해 정권을 홍보하고 국왕에 대한 보도를 극히 제한했다. 거리와 관공서마다 피분 송크람의 사진이 걸렸다. 피분 송크람 정권은 문화운동을 벌여 국민들의 정신을 개조하고 생활을 개선하려 했다. 그들이 지향한 것은 서구화였다. 애국심이 강조되었다. 국기에 대해 경례를 하고, 국가를 암송하고, 태국어로 말하도록 했다. 학교 수업에서는 애국이 강조되었고, 집단 무용이 학습되었다. 


옷 입는 것도 서구화했다. 이전의 태국인들은 남성이건 여성이건 윗옷을 벗고 살았는데, 서양인들처럼 윗도리를 입도록 했다. 또한 학생들은 제복을 입었다. 정부는 문화운동 12개항을 제정해 국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피분 송크람은 독재 권력 유지에 민족주의를 이용했다. 그는 오랫동안 태국의 영토를 잠식해온 프랑스에 대항하고, 프랑스의 적인 일본과 독일과 동맹을 맺는 전체주의적 이념에 놓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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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라마 7세와 800년 동안 이어온 절대 군주제의 폐막, 시암 혁명(Siamese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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