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2017년에 중국 광저우에서 잠깐 있어본 적이 있었다. 당시 베트남의 첫 번째 전제 국가인 남월(南越)에 대한 연구 때문이었는데 생각지도 못하게 아편전쟁에 대한 연구도 함께하게 되었다. 아편전쟁 이전, 특히 청나라의 대외무역제도는 매우 독특했다. 1757년부터 아편전쟁이 일어날 때까지 동남아 및 서양 세력과의 무역은 광동성(廣東省)의 수도 광저우(廣州)에 국한하여 시행하였다. 1683년 대만을 근거지로 삼고 있던 반청복명 세력인 정씨(鄭氏)가 멸망하자 청나라는 이른바 해금(海禁)을 풀고 4개의 항구를 열어 해외 국가들과의 무역을 재개하였다. 아모이(澳門, 마카오), 장주(漳州), 영파(寧波), 그리고 운태산(雲台山)이 주요 4개의 항구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청나라 정부는 1757년에 이들 4개 항구를 다시 폐쇄하고 광저우 항구만을 열어 대외무역을 하게 하였다. 그러나 동남아, 이슬람, 서양 상인들은 광저우에 자유로이 왕래한 것이 아니라 무역 할 수 있는 달인 10월부터 다음해 1월까지 일정한 조계지 거주 지역에 국한되어 활동할 수 있었다.
후일 이 지역을 재외상관(在外商館, Factory)이라고 부르며 오늘날 광저우의 사면도(沙面島)에 위치하고 있었다. 사면도(沙面島)의 재외상관은 청나라 정부에서 인공적으로 섬을 만들어 요새화된 외국인 거류지로 원래 해외 특허로 만들어진 회사의 군사력으로 보호되어 있었는데 이러한 재외상관 제도가 청나라에 들어오면서 군사력의 보호라는 명목적인 측면이 제외되었다. 이러한 대외무역제도에는 일정한 기구와 관리들이 있었다. 청나라 측에서 보면 먼저 양광 총독(兩廣總督)과 광동 순무(廣東巡撫) 등의 지방장관들이 있었고 광저우 부근의 해관(海關)은 외해관감독(粤海關監督, 외국인은 Hoppo라고 칭하였다)이 맡고 있었다. 그리고 이들 하부 조직에서 실제로 외국 상인들과 거래할 수 있는 특허를 가진 청나라 상인들이 있었는데 이들은 광동 십삼행(廣東十三行)이라고 불리는 일종의 조합 형태인 길드 조직을 이루고 있었다. 이들 특허상인을 공행상인(公行商人)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대외무역을 독점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광저우 지역에 있는 외국인의 모든 행동에 대해 책임을 지고 있었으며 관세를 비롯한 각종 세금의 징수도 이들 공행상인(公行商人)이 담당하였다.
서양 측에서도 이를 조합한 일정 기구가 있었는데 당시 대청무역에서 우월한 지위를 가지고 있던 영국의 경우를 보면 특허 회사인 동인도 회사가 대청무역을 독점하고 있었다 이러한 동인도회사의 중국 현지 기구로서 관화인 위원회(管貨人委員會, Select Committee of Supercargoes)가 존재하고 있었다. 관화인(管貨人, Supercargo) 중에서 3, 4명으로 구성된 이러한 위원회에는 수석(首席, President)이 있었는데 청나라 정부는 이러한 서양인의 총책임자로 간주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동인도 회사의 대청무역 독점은 1834년에 종료되었다. 랭커셔(Lancashire) 지방의 면업 자본이 자유무역을 계속 주장하여 관철한 것이다. 따라서 이 때부터는 영국 정부가 대청무역을 감독하기 위해 무역 감독관(貿易監督官, Superintendent of Trade)을 파견하게 되었다. 이 무역 감독관은 기존의 관화인위원회 수석이 동인도 회사의 직원인 것과는 달리 영국을 대표하는 국가 관리라는 점에서 청나라와의 관계에 있어 새로운 문제점으로 대두하였다. 일찍이 건륭제(乾隆帝, 1711~1799)는 청나라에 통상무역을 요청하러 찾아온 매카트니 사절단에게 “중국은 물자가 풍부하여 무역을 할 필요가 없다.” 라고 했다.
이는 결코 호언이 아니었고, 그것은 약 50년이 지난 아편 전쟁 전후 시기에도 마찬가지였다. 1차 아편전쟁 직후인 1842년의 통계를 보면 청나라가 영국에서 면제품을 비롯한 각종 상품 960만 달러를 수입했는데, 영국에 수출하는 상품은 차 1,500만 달러, 비단 920만 달러를 비롯해서 총 2,570만 달러에 달했다. 차와 비단이 당시 영국인들의 식생활과 의생활에 거의 필수적이었던 것에 비해 영국의 상품은 중국인들에게 그리 절실하지 않았으니, 청나라 조정이 “외국과 무역을 하는 것은 화이(華夷)에게 은혜를 베푸는 것” 이라고 주장하면서 영국과의 무역에 우위를 점했다. 그러나 그러한 이면에는 청나라가 결코 여유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1842년 당시 공식 통계에는 잡히지 않는 상품인 아편의 중국 내륙 수입액이 약 2,400만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공식 무역수지는 청나라가 영국에 대해 1,610만 달러 흑자였으나, 아편을 계산하면 오히려 800만 달러에 가까운 적자인 셈이었다. 그것은 청나라의 국가와 관민 모두에 큰 부담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의 청나라는 쇠퇴기에 접어들고 있었고, 조정의 권위와 기강이 오랜 기간 동안 평화로운 틈에 매우 헤이해졌으며 부정축재와 더불어 매관매직에 이르기까지 국가 내부에 조금씩 균열이 생기고 있었다.
게다가 이러한 부정축재의 피해는 모두 백성들의 몫으로 돌아가 큰 고통을 겪었고 이를 배경으로 백련교의 난, 천지회, 삼합회 등의 암약, 소수민족들의 봉기 등이 계속하여 발생하면서 시정이 불안하고 재정 부담이 늘어나는 처지였다. 또한 외국에 지불하는 상품 대금들은 은으로 결제되었는데, 은은 정부에 납세 수단이기도 했기 때문에 매년 아편으로 인하여 중국의 은이 외국으로 새어나가는 상황은 은의 가격 상승, 나아가 정해진 세금 액의 실질적인 상승으로 이어지기 마련이었다. 이로 인하여 세금의 부담을 견디지 못해 농토를 버리고 유민이 되는 농민이 늘어났고, 그들은 대개 백련교나 천지회 등에 가입해서 반(反) 정부 활동을 했다. 그러한 상황에서 아편이 많은 중원 백성들의 건강을 해친다는 점을 접어두고라도, 청나라 정부는 아편 문제를 반드시 해결해야만 하는 입장이었다. 이러한 아편과 같은 마약이 중국에 들어온 것은 언제부터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영국이 중국에 아편을 밀수출하기 시작한 것은 18세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에 대한 폐해가 막심하자 옹정제 초기인 1729년에 이미 첫 번째 아편 금지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19세기에 이르러 폭발적으로 아편이 수입되면서 성장세를 보인다. 강희 · 옹정 · 건륭제의 통치시기로 알려진 이른바 3대의 청나라의 전성기는 끝나고 서서히 쇠퇴기를 맞이하기 시작했다. 부패한 관료들에게 늘어난 인구를 부양할만한 생산성의 향상이나 제도적 보완책을 기대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청나라 백성들은 아편의 잠재적인 수요자가 되어, 현실의 쾌락이나 고통으로부터 도피하기 위한 방편으로 아편을 피우게 되었다.
아편의 수요는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1780년 무렵 약 1,000 상자에 불과했던 아편의 수입량은 1830년에는 10,000 상자, 아편전쟁 직전에는 4만 상자 정도로 늘어났다. 이것은 무게로 치면 거의 300만 톤에 육박하는 것이었다. 고위관료, 지주, 상인, 군인 등 지위가 높은 사람들에서부터 방황하는 유민 층에 이르기까지 많은 사람들이 아편을 피웠다. 아편은 마약이기 때문에 한번 중독이 되면 쉽게 끊을 수 없어 죽을 때까지 피울 수밖에 없었다.
1773년에 영국제 아편이 들어올 무렵에는 판매량이 1천 상자였던 것이 1839년에는 40,000 상자까지 늘어나 있던 아편을 두고 청나라 조정에서는 ‘이금론(弛禁論)’과 ‘엄금론(嚴禁論)’이 격돌하여 조정은 격심한 혼란에 놓이게 된다. 이금론은 아편에 중독된 사람을 완치시키는 일도, 아편 유통과 흡입을 완벽하게 막는 일도 불가능하고 금지할수록 가격만 높아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므로 차라리 관리와 군인을 제외한 일반 백성에게는 아편 흡입을 허용하자는 것과 아편 결제에 은을 쓰지 말도록 하고 국내에서 아편을 재배해 수입품을 대체토록 하자는 주장이었다. 이러한 주장은 나름 현실성이 있었으나, 오랜 유교 론으로 볼 때 백성들을 지극한 덕으로 다스려야 할 황제가 취할 정책은 아니라는 평가가 지배적이었다. 이와 같은 사태를 볼 때 아편에 중독된 중국인은 약 400만 명으로 추정되었다. 이에 대해 황작자(黃爵滋), 임칙서(林則徐, 1785~1850) 등이 이금론을 반박 주장한 엄금론은 아편 흡입 자에게 1년의 기한을 주어 아편을 끊도록 하고, 그래도 끊지 못하면 사형에 처할 것이며, 아편의 수입과 유통을 엄중히 단속하자는 주장이었다. 특히 임칙서는 호광성(湖廣省) 총독을 지내며 독자적으로 아편을 근절시킨 업적이 있었고, 도광제(道光帝)에게 올린 상소에서 아편을 방치할 경우 “백성이 전멸하고 나라가 멸망할 것” 이라고 토로한 인물이었다.
결국 도광제는 엄금론자들의 손을 들어 주고, 1839년 3월에 임칙서를 흠차대신(欽差大臣)으로 임명하여 서양의 수송선이 들어오던 광동으로 파견했다. 그리고 5월에는『아편흡입엄금장정(嚴禁阿片烟章程)』39조를 반포하고 전국적으로 강도 높은 아편 단속을 펼치도록 지시했다. 아편무역에 대한 청나라의 강경한 대응에 반하여 영국의 입장에서 볼 때 어떠한 상황이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불과 100년 전까지만 해도 영국 입장에서 중국은 워낙 멀리 떨어진 곳에 있는 신비의 나라로 인식되었다. 그러나 대항해 시대가 도래하면서 그러한 사이에 중국을 방문하거나 오랫동안 체류한 사람이 많아지며 이에 많아진 정보 덕택에 영국의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중국에 대한 관념이 생겨나고 있었다. 그리고 그러한 중국을 바라보는 시각의 대부분은 중국인과 그 문화에 대한 혐오스러움이었다. 자신들과 워낙 다른 피부색과 언어, 몸차림 등은 혐오대상은 아니었지만 중국 상인과 관료들을 접한 경험은 불친절, 교만, 부정부패, 무사안일, 허례허식 등의 나쁜 인상을 길이 남겼다.
그것은 당시 영국의 시민문화가 근대적 사회의 기틀을 잡아가면서 얼마 전까지는 자신들도 예외가 아니었던 무절제함이나 무교양 등을 혐오하는 사회의 분위기가 자리 잡은 한편, 사대부 가문들이 알려주는 중국의 교양과 예의범절은 ‘복잡하기만 하고 이해할 수 없는 광대놀음(Complicated and incomprehensible play clown)’ 으로 보였기 때문이었다. 물론 중국인의 눈에도 영국인의 행동거지가 야만적이기는 마찬가지였다. 서로 판이하게 다른 문화가 전혀 서로를 모를 때보다 약간의 지식을 갖게 될 때 발생하는 혐오감의 전형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대다수 영국인의 인식과는 달리 소수의 지식인과 선교사들은 중국인과 중국 문화를 깊이 배우려는 자세를 가졌고, 따라서 그에 대한 존경심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도 헤겔(Hegel, Georg Wilhelm Friedrich)의 말과 같이 “오직 황제 한 사람만 자유롭고 모두가 노예인(Only the emperor is free and all are slaves)” 이라는 중국의 정치와 사상은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기독교 포교가 공식적으로 금지되어 있던 당시 동양철학사상을 가진 중국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자유롭게 전할 날이 왔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영국의 일반인이나 지식인 모두 다소 거친 방법을 쓰더라도 중국인들을 ‘해방(Liberation)’시키고 ‘계몽(Enlightenment)’시킬 필요가 있다는 막연한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 아편전쟁으로 촉발되었던 것이다. 물론 그러한 막연한 생각이 전쟁으로 이어지지는 않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중국을 자국과 다를 바 없는 문명국으로 여기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면, 이러한 전쟁이라는 결정이 쉽게 이뤄질 수 있었는지가 의문이다. 여러 정황들에 있어 전쟁의 동기는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이유였다. 인도와 영국 본토의 무역수지를 유지하려면 다소 부도덕한 면이 있어도 아편 무역에 의지해야 했고, 또한 잠재력이 풍부한 중국 시장을 아편 이외의 영국 상품으로도 본격적으로 공략해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청나라의 관세가 정부의 방침대로 정해지는 일과 무역항이 광주(廣州) 하나로만 국한된 일, 그리고 공행(公行)이라 불리는 상인조합이 무역의 전 과정을 장악하고 폭리를 취하고 있는 일 등을 반드시 개혁해야 한다는 오랜 숙원도 있었다. 이와 더불어 다른 열강과 식민지인들 앞에서 대영제국의 체면을 세워야 한다는 정치적인 고려도 존재했고 막대한 부와 많은 인구에 비하여 많이 약화되어 보이는 청나라의 군사력이 영국 정책결정자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