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무한 경쟁과 소외를 극복하기 위한 자기 정체성 확립과 공정성의 원리
<자유의 위기와 자기 진실성의 윤리>
자유주의는 부르주아라고 하는 시민사회계급을 중심으로 중세의 절대군주제와 봉건적 신분제 사회를 무너뜨린 사회사상이었다. 자유주의는 17C 즈음에 서구에 도입되었다고 보아도 큰 무리가 없을 것이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자연스럽게 개인의 권리나 개인의 재산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다. 개인의 권리와 재산을 강조하기 위해서는 개인은 신 앞에 평등해야 했을 뿐만 아니라, 나아가 모두가 주권을 가지고 있고 또한 법 앞에서도 평등해야만 했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도입함으로써 개인의 자유를 최대한 발휘하는 제도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다. 이러한 자유주의는 처음 시작은 중세의 절대 군주라는 권위와 봉건적 신분 질서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진보적인 사회사상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에 있어서 자유는 전혀 진보적인 색채를 가지고 있지 않다. 한편에서는 아직도 빨갱이를 운운하는 일부 정치 세력에 의해 공산주의를 반대하는 세력을 자유주의자라고 착각하고 있고, 또 다른 한편에서는 군사독재 시절의 향수에 젖어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을 자유라고 착각하고 있다.
서구에서 자유주의가 도입된 역사에 비하면 우리나라에 자유주의가 도입된 역사는 매우 짧다. 우리나라에서의 자유주의는 해방 이후 남북의 대치 상황에서부터 시작되었던 이승만 정권의 자유민주주의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면 이제 겨우 80여 년 정도에 불과하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자유주의에 대한 깊이 있는 이해가 부족한 것도 사실이다. 나는 나의 책 『왜 다시 자유인가?』에서 서구 자유주의의 변천사를 짧게 요약한 바 있다. 서구의 자유주의는 고전적 자유주의에서 시작하여 신(new)자유주의(사회적 자유주의), 그리고 오늘날 유행하고 있는 신(neo)자유주의(자유지상주의)로 이어졌다고 거칠게 요약할 수 있다. 그러나 오늘날에 와서 자유주의는 또 한차례 도전을 받고 있다. 자유주의가 도전받는 이유는 간단하다. 그것은 우리의 현실에서도 발견된다. 자유주의의 바탕에 깔려 있는 개인주의가 점차 이기적 개인으로 변모하면서 사회가 점차 부익부 빈익빈의 사회로 변모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한 사회는 무한 경쟁을 초래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자유주의가 갖고 있는 문제점에 대한 비판의 화살은 공동체주의자들에 의해 촉발되었다. 처음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의 대결은 1970년대 롤즈의 『정의론』이 출판된 이후 마이클 센델의 롤즈의 정의론에 대한 비판에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들은 좋음보다 옳음을 우선하는 자유주의와 무연고적인 개인에 대한 비판을 가했다. 그들을 공동체주의자들이라고 부르는데 그들이 센델을 비롯하여 매킨타이어, 왈처, 테일러이다. 이 글에서는 자유주의와 공동체주의 논쟁의 전반을 다루기보다, 테일러의 『불안한 현대사회』를 중심으로 테일러의 사상을 조망해 봄으로써 테일러의 사상을 통해 자유주의가 가지고 있는 문제점을 극복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을 모색해보고자 한다.
테일러는 『불안한 현대사회』에서 현대사회의 세 가지 불안을 개인주의의 팽배, 도구적 이성의 지배로 인한 삶의 터전 상실, 시민의 정치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한 정치적 자유의 상실로 보았다. 사실 근대적 자유는 근대 이전의 삶의 질서를 부정하면서 탄생했다. 전통에 대한 단절이다. 하지만 이렇게 탄생한 자유는 삶의 목적마저 상실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점차 개인은 타인에 대한 무관심으로 이어지면서 불안을 느끼게 된다는 것이다. 테일러는 이를 나르시시즘의 만연으로 표현한다. 또한 도구적 이성의 지배는 계산에 의한 합리성을 바탕에 두기에 인간 자신도 도구적 이성에 의해 지배당할 수 있다는 불안을 초래하게 된다고 보았다. 이것은 결국 인간이나 사물 모두 비용-소득이라는 효율성의 논리에 의해 교환가능한 것으로 전환되면서 오는 불안이다. 그리고 테일러는 이러한 불안 요소가 정치에 미치는 영향을 또 다른 불안으로 보았다. 나르시시즘에 빠져 있는 개인은 정치에 무관심함으로 인해 토크빌이 말한 ‘온건한’ 독재가 출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낳게 된다는 것이다. 이는 곧 거대한 관료주의 국가 앞에서 개인이 느끼게 되는 무력감으로서의 불안이다.
테일러는 이러한 현대 사회의 불안을 극복하기 위해서 ‘자기 진실성(authenticity)’의 윤리를 주장한다. 자기 진실성이란 자기 내면에 진실하라는 말이다. authenticity에 대한 번역은 학자들 마다 다소의 차이는 있다. 『불안한 현대사회』를 번역한 송영배 외 다수의 학자들은 자기 진실성으로 번역하지만, 또 다른 학자는 ‘본래성’으로 번역한다. 나는 본래성으로 번역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우리 전통에는 심즉불(心卽佛), 인내천(人乃天)이라는 사상이 있고, 그것이 말하는 바는 인간의 본래 마음이 곧 부처이고 하늘이라는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테일러가 불교의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는 불교의 사상을 알고 있는지 여부는 알 수 없으나, 테일러가 말하는 authenticity에는 전통적으로 이어져 오는, 그리고 개인을 넘어서는 ‘존재의 거대한 고리’라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존재의 거대한 고리는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의미의 지평이기도 하다.
테일러가 보는 개인은 결코 유령적인 존재가 아니다. 무연고적인 개인이 아니라 존재의 거대한 고리 속의 개인이다. 그래서 그는 타인들과의 연대를 강조하고, 나아가서 인간적인 욕망이나 포부를 넘어서는 곳에서 파생되어 나오는 요구들을 고려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러한 고려가 없는 자기실현은 결국 자기 파괴적이라고 보았다. 테일러의 자기 진실성의 윤리는 자기 내면에 충실하면서 그것을 표현함으로 인해 타인의 인정을 이끌어 내는 자기 정체성 확립을 강조한다. 그러면서 그는 상호 간의 차이를 인정하는 공정성의 원리를 언급한다. “사회적 차원에서 결정적인 원리는 공정성의 원리이다, 각자의 정체성과 관련하여 서로 간의 차이들을 모두 다 인정하면서 각자가 자기의 정체성을 계발시킬 수 있는 균등한 기회를 요구하는 것이 공정성의 원리이다.” 헤겔에 바탕을 둔 테일러의 철학은 한편으로는 『인정투쟁』의 악셀 호네트와도 이어진다.
테일러의 자기 진실성의 윤리에서 우리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과연 나르시시즘적 자기 파괴적 면모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가? 그러한 삶의 태도는 개인을 하나의 쇠우리 속으로 빠져 들게 하여 타인과의 소통을 통한 상호 인정의 사회로 나아갈 수 없게 만든다. 현대 사회의 큰 병폐 중 하나가 현대인은 인터넷을 통한 소통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인터넷을 통한 대화는 자기 편향성만을 높일 뿐 상호 인정과는 무관하다. 그래서 사회는 점차 배제와 무시만이 판을 치고, 그로 인해 사회는 분열된다. 이러한 현실을 고려한다면 테일러의 ‘자기 진실성의 윤리’는 우리 사회에 하나의 의미를 던져준다고 볼 수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