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세계대전을 종결 짓고 소련의 참전을 확정 지은 포츠담 회담

입력 : 2024.02.28 0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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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포츠담 회담 이후, 기념 사진, 윈스턴 처칠, 해리 S. 트루먼, 이오시프 스탈린, 사진출처 : HISTORY.COM EDITORS

5개월 전이었던 2월에 열린 얄타 회담에서부터 서서히 시작을 알렸던 미국과 소련의 냉전은 포츠담 회담을 통하여 본격적으로 시작된다. 발칸반도를 비롯한 동부 유럽 곳곳에 소련은 자신의 위성국가들을 세우게 되면서 소련과 서방은 서로를 불신하기 시작했다. 


이에 전후처리 문제로 1945년 7월 17일부터 8월 2일까지 독일 베를린 근교 포츠담의 체칠리엔호프 궁전(Schloss Cecilienhof)에서 연합국 지도자들이 5월 9일 나치 독일의 항복 이후 유럽의 재건과 태평양 전선 종결을 위해 논의하기 시작했다. 이 회담에는 미국의 해리 S. 트루먼 대통령, 영국의 클레멘트 애틀리 총리, 소련의 스탈린 서기장이 참석하였다. 


그러나 영국 대표로 처음에 참석한 인물은 윈스턴 처칠이었다. 당시 영국은 1940년 5월 이래 독일과의 전시 거국 내각으로서 보수와 노동 연립 정권이 유지 중이었지만 독일의 항복 이후 자연스럽게 연립 내각이 해체되고 7월 5일에 총선을 치르게 된다. 


그러나 영국의 개표 결과는 처칠이 포츠담으로 출발할 때까지 나오지 않았는데 유럽 대륙에 주둔 중이거나 동남아시아에서 일본군과 전투를 벌이고 있는 장병들의 투표권 문제를 위해 개표가 매우 지연되었기 때문에 벌어진 일이었다. 


물론 처칠은 당연히 자신이 속한 보수당이 제2차 세계대전의 승전 주역이었기 때문에 선거에서 이길 것으로 생각해 포츠담 회담에 참석했다. 그러나 포츠담에서 그만 선거에서 노동당에게 패배했다는 뉴스를 듣고는 정상들과 사진 한 장만 찍고 영국으로 떠나야 했다. 


승리한 클레멘트 애틀리가 급히 포츠담으로 날아가 처칠과 바톤 터치를 한 셈이 되었다. 중국 대표 장개석도 참가하기로 되어 있으나 당시 중일전쟁이 한창 진행 중이었다. 그래서 독일 영토인 포츠담까지 가기에는 무리라고 판단하여 전쟁 이후에 서명한다며 참가국들의 양해를 얻어 불참했다. 


이 때문에 포츠담 회담은 미국, 영국, 소련이 참가했고 회담 중인 26일에 발표된 포츠담 선언은 미국과 영국, 중국의 서명으로 이루어졌다. 이 포츠담 선언 때 소련이 제외된 이유는 당시 소련은 1945년 8월 8일, 대일 선전포고를 하기 전이었기 때문에 불참한 것이다. 


소련은 이때까지만 해도 형식적으로 일본과의 중립 조약 및 불가침 조약을 유지하고 있었다. 물론 소련 내부에서는 대일본 전 준비가 빠르게 진행 중이었지만 소련의 기습 참전을 일본에 알리면 안 되는 군 기밀 사항으로 포츠담 선언에 불참했던 것이라 여겨진다. 


그 때문에 보통 한국의 고등학교 교과서 중에는 포츠담 회담을 미국, 영국, 중국과 했다는 서술한 경우가 있다. 정확히는 회담장에 참석한 것은 미국, 영국, 소련이었고 일본에 대한 대외 압박을 감행했던 선언에 참석한 것은 미국, 영국, 중국이었기에 이를 확실히 분리해 싣는 것이 정확하다. 


우선 전범국이었던 독일과 강제 합병된 오스트리아에 대한 처리에 대해서는 독일, 오스트리아가 4개의 구역으로 나뉘며 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이 각각 한 구역씩을 통치하기로 결정된다. 다만 베를린과 비엔나의 경우, 한 나라의 수도라는 위상을 고려하여 따로 4등 분해 통치하기로 했다. 


또한 오데르-나이세 선의 명확한 영역이 정해졌고 결과적으로 독일은 동프로이센, 슐레지엔 등 동방 영토를 내주게 되었으며 이 영토들은 자연스럽게 폴란드와 소련에 귀속되었다. 오데르-나이세 선으로 독일이 전후 상실한 영토는 1937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체코슬로바키아를 합병하기 이전인 독일 영토의 약 25%가량이었다. 


이로써 독일은 양차 대전의 결과 1914년 이전 독일 제국 영역의 1/3을 상실한 셈이 되었다. 전쟁 당시 피난 갔던 피난민들을 포함하여 오데르-나이세 선 외곽에 거주하고 있던 800만 명의 독일인은 이 때문에 순식간에 고향을 잃었다. 그 밖에도 중동 유럽 일대에 거주하던 700만 명의 독일인이 추가로 소련에 의해 강제 추방되었다. 


그리고 히틀러가 다른 나라에서 강탈한 영토, 특히 폴란드 서부와 체코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의 영토 원상 복귀가 이루어졌다. 이어 전쟁 배상에 대해서도 논의가 이루어졌는데 독일은 대략 230억 달러 정도의 전쟁 배상금을 연합군에게 지급하는 것으로 합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배상금들은 화폐류보다 주로 산업시설과 기계류들을 압류하는 차원으로 이루어졌다. 그중에서 스탈린은 소련의 점령 지역이 작센을 제외하면 상대적으로 산업화가 덜 이루어진 동부 지역이었기 때문에 이러한 결정에 대한 불만을 제시했다. 그러한 이유로 스탈린은 돈이 될 수 있는 것이면 모조리 압류하려고 했다. 


하지만 처칠은 지난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으로 지나치게 가혹하게 패전국을 대했던 프랑스의 예를 들어 매우 가혹하게 수탈할 경우, 3차 대전을 초래할 수 있다며 “말에 채찍질을 하려면 적어도 말이 먹을 건초는 남겨둬야 한다”라고 스탈린을 설득했다. 


그리하여 서방 연합국은 자신들의 몫으로 가져갈 산업시설 중 10%를 소련에 넘겨주고 합의를 보게 된다. 즉, 처칠 때문에 독일은 제1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 베르사유 조약처럼 막대하게 뜯겨 갈 수 있는 것을 비교적 온화하게 처리될 수 있도록 막아준 셈이 되었다. 


또한 연합국은 독일의 전쟁 재도발을 막기 위한 목적으로 독일에서 나치 세력을 일소하고 전 군대의 무장 해제와 동독일에서의 민주화, 비중앙집권화 등을 실시하기로 결정한다. 베르사유 조약 당시에는 10만 명의 군 보유를 허용했지만, 이번에는 그것조차 용납하지 않고 완전 해제를 결정한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나치 전범 처리에 대한 뉘른베르크 재판이 열리는 것이 결정되었으며 탱크, 항공기 등을 생산해낼 수 있는 중공업 산업 시설들 역시 모두 해체되어 연합국들이 전리품으로 나눠 가졌다. 연합국은 독일의 경제력을 유럽 평균치를 넘지 못하게 해야 한다고 결정하면서 아예 독일을 경공업, 농업 기반 국가로 만들려고 했다. 


그러나 이러한 조치는 냉전이 격화되면서 소련으로부터의 방패막이가 필요한 서방 세력에 의해 전면 백지화되었다. 사실상 공산주의,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최전선이 서독이었던데다 서독의 중공업이 받쳐줘야 소련 및 바르샤바 측과 전략적 완충 지대를 형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조치는 물론 독일 뿐 아니라 일본도 마찬가지였는데, 추축국이었던 이들에 대한 공업 대국화를 철저하게 막으려 했던 미국은 일본을 아시아의 스위스로 만들겠다고 공언하게 된다. 그러나 6.25 전쟁이 발발하자 이는 모조리 백지화되었다. 


북한, 중공과 싸우기 위해서는 참전 유엔군에 대한 보급과 파쇄된 전쟁 무기에 대한 수리가 필요했기에 산업시설들이 마구 들어서게 된다. 다만 일본은 독일과 달리 미국에 의해 일방적으로 점령된 상황이라 소련의 영향력은 철저히 배제된 상태로 전락 되었다는 차이가 있다. 



결국 미국과 경쟁하여 때로는 대립각을 세우며 독자적인 열강으로 남으려던 영국과 프랑스는 미국의 무역망에 편입된 서독과 일본에 경제적으로 추월당하는 현상이 발생하게 된다. 이처럼 유럽에서의 전쟁은 5월 9일 나치 독일의 항복으로 종결되었다. 그러나 일본의 패전이 분명한 상황이었음에도 1억 총 옥쇄와 같은 구호를 부르짖으며 전쟁을 지속하고 있었다. 


이 포츠담 회담에서는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권유하는 포츠담 선언이 발표되었다. 물론 일본은 이와 같은 포츠담 선언을 단번에 거절했다. 카이로 회담 이후로 조건부 항복 협상이라도 시도했다면 나을 수 있는 부분이었지만 일본 군부는 이미 멈출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와 같은 저항의 결과는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 실전 투입과 전무후무한 핵 공격의 재앙이었다. 당시 트루먼은 회담 도중 스탈린에게 강력한 신무기를 미국이 가지고 있다며 소련에 대한 기선 제압하는 형식으로 알려 주었는데, 이미 각종 스파이를 통해 미국이 원자폭탄을 개발한 사실을 알고 있었던 스탈린은 그 무기를 일본에 적절하게 사용하기를 바란다며 반격한 것은 유명한 일화로 알려져 있다.



한편 당시 회담 때 일본 내부의 안정을 위해 연합국 내부에서도 천황제는 유지하기로 합의되어 있었으나 이를 일본에 알리진 않았다고 한다. 천황제를 내세워 더 저항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더불어 전범인 히로히토에 대한 처벌이 포츠담에서 논의되었지만, 히로히토를 전범으로서 처벌하는 문제와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과는 별개였다. 


이는 천황 개인과 제도로서의 천황제를 구분해야 한다고 일본 문화에 잘 알고 있던 미국, 영국의 외교관들이 주장했다. 사실 일본이 유지하고 싶었던 것은 히로히토 개인이 아닌 유구한 역사를 가진 천황제의 전통이었다고 보는 것이다. 만약에 천황제를 유지할 것을 허용한다는 것을 일본에 내비쳤다면 일본이 7월에 항복했을 개연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는 연구도 존재한다. 


패전이 명확한 상황에서 일본이 끝까지 강화 교섭에 매달렸던 이유도 다름 아닌 천황제를 유지하는 것이었다. 일본에 있어서는 천황제 유지가 최우선 조건이었고 조선, 대만 등 식민지들을 독립시키는 문제는 차선이었다. 그리고 만주국이나 동남아시아, 중국의 점령지들을 내주는 문제는 마지막 순위였다. 


결국 일본에 대한 처결 문제는 8월 14일, 히로히토 일왕의 포츠담 선언 수용과 무조건 항복 이후로 넘어가게 되었다. 

정길선 기자 lukybaby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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