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후예들이 다시 고개를 들고 있다.

입력 : 2024.05.07 04: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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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a Dom, spremni!(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크로아티아의 안드레이 플렌코비치(Andrej Plenković) 총리는 지난 크로아티아 총선에서 승리했고 여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rvatska Demokratska Zajednica)이 이기긴 했지만 여전히 조란 밀라노비치 대통령이 이끄는 크로아티아 사회민주당(Socijaldemokratska partija Hrvatske)의 세가 강하다. 

 

게다가 밀라노비치 대통령은 정치적인 실권은 없지만 친러시아 성격을 갖고 있어 러시아와의 외교를 강화하고 중국 기업을 끌어들여 일대일로 아드리아 해 사업을 받아들이려는 움직임이 있다. 그리고 세르비아와 화해 구도를 열어가기 위해 접촉 중인데 곧 세르비아를 방문할 시진핑 주석이 오는 시기에 맞춰 무언가를 진행중인듯 싶다. 

 

아직 그게 무엇인지는 구체적으로 밝혀지는 바는 없다. 이에 크로아티아 극우세력들은 적극적으로 반발하여 자그레브 내에서 연일 시위를 열고 있다. 이에 세르비아의 부치치 대통령은 크로아티아 민주연합을 우스타샤의 후예라고 비난 했고 플렌코비치 총리를 "파벨리치의 아들(Потомци Павелића)"이라며 맹비난했다. 이에 자그레브에서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는 우스타샤의 표어를 앞세워 반러, 반중, 반세르비아 정서를 강화하고 있는 입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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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크로아티아 자그레브 극우주의자들의 시위, 출처 : Алексей Зён의 페이스북

 

우스타샤는 크로아티아의 반 유고슬라비아 분리주의 운동 조직이면서 철저히 극우주의 성향을 갖고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 파시즘의 영향을 받았고 여기에 크로아티아의 국교나 마찬가지인 카톨릭이 섞인, 종교 전체주의(Religious Totalitarianism)의 성격을 띄고 있다. 이들은 이탈리아의 베니토 무솔리니의 영향이 강했다. 

 

베니토 무솔리니도 "고대 로마제국의 영향을 살리겠다(Faremo rivivere la gloria dell'antico Impero Romano)"는 극우주의적 표어로 선전, 선동하여 당선되었고 이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표어 제작에 막대한 영향을 주게 된다. 사실상 우스타샤는 무솔리니의 자금지원까지 받아서 활동했었다. 

 

특히 우스타샤의 창설자인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 1889~1959)는 무솔리니를 매우 존경했다. 그는 크로아티아의 독립과 보스니아 및 달마티아의 병합을 주장하는 민족주의 정당 프랑코프치(Frankopci)에 입당했는데 당은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가 지도하고 있었다.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는 이탈리아의 파시스트 사상가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인물이다. 


주세페 보타이(Giuseppe Bottai)는 "이탈리아 식민 제국에서의 이탈리아인의 역할에 대한 이해(Comprendere il ruolo degli italiani nell'impero coloniale italiano)"라는 제목에서 “Illuminano il mondo con la loro arte, insegnano con la loro conoscenza e forniscono una forte organizzazione nazionale nel nuovo territorio attraverso le loro capacità e abilità di governo (그들의 예술로 세상을 밝히고, 그들의 지식으로 가르치며, 그들의 통치 기술과 능력을 통해 새 영토에 튼튼한 국가 조직을 마련할 것)”이라 주장했었다. 이것을 스파치오 비탈레(Spazio Vitale)라고 한다. 

 

요시프 프랑크(Josip Frank)는 여기에 박수치고 있었던 인물이고 안테 파벨리치(Ante Pavelić)는 이를 크로아티아의 실정에 맞게 시도하고자 했던 인물인 것이다. 프랑크가 정부에 의해 체포되자 파벨리치는 프랑크 밑에서 개인 비서 역할을 했고 1927년 자그레브 시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국왕의 독재가 강화되면서 그는 무장단테 조직인 우스타샤(Ustaša)를 탄생시킨다. 우스타샤(Ustaša)라는 이름은 '서다', '오르다'라는 뜻의 단어인 'Ustati', Bставать (일어서다)의 슬라브어인 Usta, 중세 이탈리아어인 Scalatia (오르다의 중세어)를 합성해 만든 단어다. 이는 이후 크로아티아에서 "반란(Pobuna)"의 대명사로 자리잡았다. 


당연히 이들은 나치식 경례를 채용했는데 경례구호는 "Za Dom, spremni! (조국을 위해 준비하라!)", 우스타샤의 표어였다. 이같은 구호는 나치 독일의 'Sieg Heil'에 상응하는 표현으로 알려져 있다. 크로아티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제1차 세계 대전으로 붕괴되면서 독립한 세력에 가깝다. 

 

본래 남슬라브 민족의 통합을 원하고 있던 세르비아와 협력해 크로아티아인의 독립을 공고히 하기를 원했었다. 그러나 세르비아인은 크로아티아인들로 인해 자신들의 정치적 위치가 위협당할까봐 두려워했고 크로아티아인들은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남슬라브의 체제가 돌아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파벨리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 내부에서 크로아티아 민족주의를 바탕으로 반란을 주도했으며 결국 크로아티아에서 추방되어 이탈리아 왕국으로 조직을 옮겼다. 역시 이들은 이탈리아와 관계가 깊을 수밖에 없다. 나치 독일의 영향을 받은 것은 그 이후의 얘기다. 

 

한편 같은 시기, 크로아티아에서는 알렉산데르 1세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선포하고 1931년 9월 3일 신헌법을 반포했다. 그러나 세계 대공황으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내의 경제마저 파탄에 이르자 1932년 들어 민주주의로 복귀하라는 시위가 빗발치게 되고 파벨리치는 이를 이용해 알렉산데르 1세에 대한 암살을 계획한다.


이 때 알렉산데르 1세는 프랑스와 회담을 준비하고 있었다. 그는 1934년 프랑스 마르세유를 방문한다. 프랑스 외무장관이자 총리를 역임했던 장 루이 바르투(Jean Louis Barthou)과 회담을 진행했다. 한편 파벨리치는 불가리아의 IMRO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와 손을 잡고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을 의뢰하게 된다. 

 

이 때 의뢰를 받은 인물이 블라도 체르노젬스키(Владо Черноземски, 1897~1934)이다. 체르노젬스키는 회담장에 뛰어들어 알렉산데르 1세에게 한 발, 장 루이 바르투에게도 한 발의 권총을 발사했고 알렉산데르 1세는 그 자리에 심장이 관통되어 절명했다. 한편 장 루이 바르투는 국왕을 지키려다 팔에 총알이 관통했고 과다출혈로 사망했다. 

 

바르투의 경우, 빨리 지혈했으면 살 수 있었지만 동맥에 총을 맞은데다 그걸 버티기 힘들 정도의 고령의 나이였기에 병원에 옮겨진 지 1시간 뒤에 사망했던 것이다. IMRO (내부 마케도니아 혁명 기구)의 해제된 기밀문서에 의하면 당시 체르노젬스키가 의뢰를 받은 것은 알렉산데르 1세 한 명이었다고 한다. 즉, 바르투가 죽은 것은 계획에도 없었던 일이라는 것이다. 


이 파장은 엄청났다. 유고슬라비아는 우스타샤의 소행임으로 밝혀내고 파벨리치의 소환을 이탈리아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이를 거부하고 그를 잠시 형무소에 가두는 걸로만 마무리했으며 그 마저도 3개월만에 풀려났다. 사실상 무솔리니가 풀어준거나 다름없는데 이후 그와 우스타샤는 독일로 넘어가 히틀러를 만나게 된다. 

 

그는 히틀러에게 크로아티아를 위해 유태인, 집시, 세르비아인, 공산주의자들을 대상으로 숙청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내고 나치 독일의 지원을 받는다. 그리고 제2차 세계 대전이 발생하면서 유고슬라비아가 점령되자 파벨리치는 자신의 조직 우스타샤를 이끌고 크로아티아로 돌아와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 헝가리 왕국의 지원으로 괴뢰 정부 크로아티아 독립국(Nezavisna Država Hrvatska, 약칭 NDH)을 세우게 된다. 

 

이 나라는 이탈리아 왕국의 보호령이기도 하였지만 사실상 나치와 파시즘이 교합된 괴뢰국이었고 이탈리아 왕국 사보이 왕조 방계인 사보이아오스타(Duca d'Aosta) 가문의 아이모네를 국왕 토미슬라브 2세(Tomislav II, 1900~1948)로 즉위시켰다. 그러나 실권은 우스타샤와 그 지도자 파벨리치가 쥐고 있었다. 그러나 토미슬라브 2세는 명목상 크로아티아의 왕이었지만 정작 크로아티아를 한 번도 방문하지 않았다. 


크로아티아 왕위 자체는 일단 수락하였으나, 본인이 크로아티아의 왕으로 즉위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고 이탈리아의 달마티아 병합의 현실성에 관한 개인적인 의문과 안전 보장의 어려움을 이유로 크로아티아로 가는 것은 거부하였다고 한다. 어차피 이름 뿐인 왕인데 굳이 파벨리치가 자행한 숙청의 피바람을 지켜봐야 할 이유도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파벨리치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의 실질적인 수장이나 마찬가지였다. 파벨리치는 우스타샤들과 함께 세르비아가 주도하는 유고슬라비아에서 민족적 독립을 이루기 위하여 나치 독일과 협력하여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우스타샤는 '1/3론'이라는 정책을 세웠는데 크로아티아에 있는 세르비아계의 1/3은 살해하고 1/3은 카톨릭으로 개종시키고 1/3은 추방한다는 뜻이었다. 

 

그 결과 세르비아인 25만 명을 국외로 추방하고 40만여 명의 세르비아인과 10만 이상의 유태인을 학살했다. 그리고 20만 명이 강제로 가톨릭으로 개종당하면서 종교의 자유가 박탈당했다. 이들은 같은 슬라브계인 세르비아를 학살하면서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절대적으로 협력했다. 이러한 나치 추종 세력 중 가장 악질적인 집단이 우크라이나의 스테판 반데라 집단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 집단으로 꼽히고 있는 이유다.


학살에서 살아남은 대다수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계 주민들은 학살과 탄압을 피해 크로아티아의 고향을 버리고 세르비아로 피난을 가기도 했지만 살던 터전을 버리지 못한 사람들은 크로아티아인이나 가톨릭교도인 척하면서 살았다고 한다. 우스타샤는 세르비아인들을 총살은 물론이고 산 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심지어 우스타샤 신병에게 팔 다리를 묶은 세르비아인 또는 유태인들의 배를 갈라 죽이게 하는 시험을 보게 했는데 이는 현재까지도 사진으로 남아 있기도 하다. 심지어 임산부의 배를 갈라 태아를 꺼내는 잔혹 행위를 하기도 했다. 이같은 만행은 당시 발칸반도에 주둔하던 나치 독일군들조차도 그 잔혹함에 놀랐을 정도였다. 

 

자그레브에 위치한 독일 점령군 사령부는 그들의 잔혹함을 차마 보지 못하고 오히려 히틀러에게 우스타샤에 대한 지원을 중단해줄 것을 요청하기도 했다. 이들의 행위에 독일군과 이탈리아 군이 우스타샤의 무장을 해제한 다음에야 학살의 만행이 끝났다고 전해진다. 아이러니하게도 세르비아인들은 인종청소를 당하다가 나치 독일이나 파시즘의 이탈리아가 인종 절멸에서 구해준 셈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파벨리치는 1941년 4월 30일 국적법을 개정하여 아예 비 크로아티아 시민을 무국적자로 만들어버렸다. 이 날 민족간의 결혼을 금지하는 법률도 만들면서 철저하게 세르비아인들을 솎아냈다. 6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의 사회, 청년, 스포츠, 문화조직, 문학 및 언론, 예술에 비 아리아인의 참가가 금지되었고 자발적 아리아인이 된 크로아티아인들의 참여를 독려했다. 

 

1941년 6월 15일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삼국 동맹 조약에 가입하였으며 6월 26일에는 방공 협정에 가입하였다. 12월 14일에 파벨리치는 미국과 영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1942년 9월에 파벨리치는 독일을 방문하여 히틀러의 허가를 얻은 후 크로아티아의 제2인자이며 원수인 슬라브코 크바텔니크(Slavko Kvatelnik)를 공식 해임한 이후 정부 재편을 실시했다. 

 

더불어 1943년에 형식상의 국왕이었던 토미슬라브 2세가 퇴위했기 때문에 그는 명실상부한 1인 독재자가 되었다. 이후 그와 우스타샤는 아인자츠그루펜이나 SS를 상대로 어떻게 하면 총 한 번 쏘지 않고 편리하고 쉽게 살상할 수 있는지에 대해 수업을 열었고 나치 친위대원들이 이를 배워가기까지 했으며 여기에서 배운 아인자츠그루펜은 우크라이나로 건너가 스테판 반데라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 조직(Організація Украінських Націоналістів)인 일명 OUN에게 전수하기도 했다. 


우스타샤는 민병대들을 이용하여 1941년부터 1945년까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22만~50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했는데 심지어 당시 카톨릭계는 이들을 변호하기까지 했다. 반면 크로아티아인은 나치 독일이 이들을 고트족의 후예라 하며 선동했기 때문에 학살을 면할 수 있었고 도리어 대다수의 크로아티아인들이 나치에 협력하였다. 

 

사실 역사적으로 따지면 남슬라브인들 중, 세르비아인이면 모를까 크로아티아인은 고트족과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한편 홀로코스트 수용소 중에도 야세노바츠 강제수용소를 필두로 한 노동수용소까지 포함하면 크로아티아 독립국 영내에 세워져 있던 것이 30곳이나 되었다. 물론 세르비아인들도 당하고만 있지 않았다. 

 

민병대 체트니치가 조직되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게릴라 전을 벌이며 나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 우스타샤 민병대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결국 민병대들은 1945년 1월, 크로아티아 독립국 군대에 흡수되었지만 이미 전세는 연합군 쪽으로 기울고 있었고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의 세력은 더욱 강해졌다. 결국 무솔리니가 실각됨으로서 이탈리아군이 모든 점령지에서 철수했고 1944년 헝가리가 자국 보호를 위해 철군했다. 결국 독일군까지 물러나자 우스타샤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에게 궤멸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파벨리치는 해외로 도피하여 스페인 및 아르헨티나, 칠레 등 여러 나라로 몸을 숨겼고 해방된 유고슬라비아에서 열린 인민재판에서 궐석으로 사형 판결이 내려졌으며 망명 중이던 1957년 아르헨티나에서 티토 정부에서 보낸 암살자의 총탄에 맞았는데 목숨을 건지긴 했지만 1959년 스페인에서 총상 후유증으로 병원에 누워 있다가 죽었다. 

 

현재 크로아티아의 네오나치들이나 민족주의자들은 서로 우스타샤의 후신임을 자처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것은 이들이 유고슬라비아에서부터의 민족적 독립을 위해 일했다고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후일 우스타샤는 1990년대 유고슬라비아 전쟁 때 프라뇨 투지만 크로아티아 초대 대통령에 의해 복원된다. 

 

학살 대상은 세르비아 인뿐만 아니라 보슈냐크 무슬림까지 대상으로 삼았다. 1995년 데이턴 협정에 따라 투지만이 서구권으로부터의 비난 여론을 감수한 끝에 우스타샤를 해산했지만 그 뿌리는 현재까지도 이어오고 있다.  이들의 민족주의적 이념으로 인한 세르비아인 학살은 반 크로아티아 감정을 세르비아 인들에게 남기기 충분했고 현재도 세르비아의 체트니치와 더불어 서로를 증오하는 양대산맥으로 남아있다.


정길선 기자 lukybaby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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