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월 4일은 러시아의 민족 통합의 날(День народного единства)

입력 : 2024.07.27 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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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4일은 러시아의 민족 통합의 날(День народного единства)로 러시아의 공휴일이다. 폴란드와 모스크바 대공국과의 전쟁 중이던 1612년 11월에 모스크바를 점령하고 있던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 군대를 몰아내면서 러시아의 동란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를 종식시킨 사건을 기념하는 날이다. 

 

러시아에서는 매년 11월 4일 이 날을 공휴일로 삼았다. 그리고 1613년 초 전국회의인 “젬스키소보르”가 소집되면서 미하일 로마노프가 로마노프 왕조를 개창하고 차르가 되어 루스 땅의 모든 민족을 통합했다. 그 민족 통합의 유래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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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매년 11월 4일은 러시아의 민족 통합의 날(День народного единства), 출처 : РОССИЙСКИЙ СОЮЗ МОЛОДЕЖИ, ОБЩЕРОССИЙСКАЯ ОБЩЕСТВЕННАЯ ОРГАНИЗАЦИЯ, https://ruy.ru/press/news/my-vmeste-my-ediny/

 

러시아 역사에서 동란 시대(Смутное время, Time of Troubles)로 나타나는 시기는 러시아 최초의 차르가 존재했던 류리크 왕조의 대가 끊긴 1598년에서 로마노프 왕조가 세워진 1613년 사이의 지도자 공백 기간을 가진 시대를 통칭하고 있다. 당시 1601년에서 1603년 사이에 러시아는 역사상 유래 없는 대기근으로 인하여 인구의 3분의 1 가량인 200만 명이 죽는 심각한 자연재해를 겪게 된다. 

 

또한 1605년에서 1618년 사이에는 가짜 드미트리 전쟁으로 인하여 폴란드 제1 공국에 의해 일시적으로 점령당하게 되면서 슬라브 민중들이 몽골-타타르의 멍에와 마찬가지의 지배 현상을 겪게 되었다. 물론 15세기말부터 16세기 초엽까지 러시아는 최악의 정치적, 경제적 위기에 몰려 있었다. 

 

슬라브 인들을 이끌던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반 4세가 1584년에 사망하자 그의 아들이며 차기 차르가 될 표트르 1세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었던 데다 그의 아들이 없었기 때문에 이반 4세의 또 다른 아들 드미트리 우글리치스키(Дмитрий Угличский)가 1591년 의문의 죽음을 맞이하고 여러 세력이 차르의 자리를 둘러싸고 왕권 분쟁을 벌였다. 


이러한 배경으로 알렉산드르 푸시킨(Александр Сергеевич Пушкин)의 희곡과 작가 니콜라이 카람친(Николай Карамзин)의 Истории государства Российского (러시아 제국 역사)를 기초로 모데스트 무소르그스끼(Модест Мусоргский)가 직접 대본을 작성했고 프롤로그가 있는 4막의 러사아 오페라인 <보리스 고두노프(Борис Годунов)>가 탄생하게 된다. 

 

이 작품은 2개의 구분을 짓는 판본이 존재하고 있는데 1869년 원본은 공연 허가를 받지 못했다. 모데스트 무소르그스끼(Модест Мусоргский)는 1872년에 개정판을 완성하고, 이 판본으로 1874년 상트페테르부르크의 마린스키 극장에서 초연을 가진 것을 시작으로 지금까지 계속 공연 되어 오고 있다. 


1598년 표트르 1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오랫동안 승계된 키예프 루스는 단절되고 키예프 루스에서 모스크바로 전권이 넘어가 포트르 1세의의 섭정이던 보리스 고두노프(Борис Годунов)가 슬라브 족 정권이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차르가 되었다. 

 

보리스 고두노프는 당시 슬라브 족 통치 지역에서 카톨릭 교회의 탄압을 받고 있었던 프로테스탄트를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등 매우 온건하고 모스크바 주민들을 적극적으로 보호하는 정책을 펼쳤으나 키예프와 기타 슬라브 족 사회에서 그는 차르로써 즉위의 정통성을 의심 받는 상태였다. 

 

처음 키예프 루스와 유리 돌고루키 후예 단절의 이유가 되었던 황태자인 드미트리의 죽음 자체가 고두노프가 살해한 것으로 전 슬라브 족장들의 의혹이 고두노프 통치의 장애가 되었다. 고두노프는 반대 세력을 지배하에 두었지만 그들을 완전히 멸망시키지는 못했기 때문에 도리어 그의 일족이 멸족이 되는 비운을 맞게 된다.


1600년대 말기 폴란드-리투아니아 왕국으로부터 리투아니아 대공국의 재상 레프 사피에하(Lew Sapieha) 및 폴란드의 대귀족 스타니스와프 바르시츠키(Stanisław Warszycki)가 이끄는 외교사절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해 폴란드-리투아니아 연방과 모스크바 공국을 중심으로 한 전체 슬라브 족 간의 동맹인 동군연합(Personal union)을 제안했다. 

 

만약 세 나라의 군주 중 한 명이 후사 없이 죽는 상황이 발생한다면 다른 쪽 나라 군주가 양국의 왕이 된다는 것이 그들의 제안이었다. 그러나 차르인 고두노프는 동맹 안을 거부하고, 1500년의 리투아니아 전쟁을 끝낸 얀 자폴스키의 휴전(Treaty of Jan Zapolski)을 1622년까지 연장하면서 불안한 자신의 권력을 공고히 하는 것을 선택했다.


폴란드 왕 지그문트 3세 및 연방의 마그나트(Magnat)로 알려진 폴란드 왕가의 대 귀족들은 자국 군이 소규모이고, 국고는 독일기사단의 침입을 방어하기 위해 모든 금액을 동원했기 때문에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더구나 전쟁이 대중의 지지를 받지 못하고 있어 루스에 대해 본격적인 침공이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러나 루스 지역의 정세가 악화되어 가고 있었고 지그문트 및 마그나트들 등의 일부 귀족들, 특히 러시아 국경부근에 영토 및 병사를 가지고 있던 마그나트들은 차르 계승 문제에 대한 키예프 내부에서 분열에 대한 혼란에서 어떠한 이익을 얻을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같은 시기 내전 상태에 놓여있던 모스크바를 위시한 슬라브의 보야르들은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주위의 나라들로부터 도움을 얻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스스로 차르가 되기 위해 지원을 얻으려는 귀족도 있었지만 서쪽의 폴란드 귀족들과 당시 리투아니아 제국 의회에서 선거로 왕정이 성립되어 민회가 이를 견제하는 등의 상호 견제 장치가 있었다는 것에 매료되어 폴란드 정치가들의 힘을 빌려 폴란드와 연방과 동맹을 맺는 것을 생각한 귀족들도 존재하고 있었다. 

 

거기에 북쪽의 스웨덴과 깊은 교류를 가지면서 상당한 부(富)를 취득한 귀족도 있었으나, 여러 종합적인 상황들로 인해 야코브 드 라 가르디(Jacob De la Gardie)가 이끄는 스웨덴 군이 마침내 슬라브 족을 지배하에 두기 위해 모스크바를 비롯한 전 루스 연합을 침공하게 되었고 스웨덴, 폴란드 연합군과 러시아 간의 전쟁인 대북방 전쟁(Северная война)을 초래하게 되었다.


1612년 폴란드 점령군이 항복하고 모스크바가 해방되자, 모스크바 대공국의 러시아 군 총사령관 포자르스키(Pozarski) 공작은 15년간의 암흑기로 알려진 이른바 혼란시대(1598~1613)의 동란을 마무리 지은 직후 1613년 초 전국회의인 “젬스키 소보르”가 소집했다. 그 동안 내란의 상처를 치유하고 차르를 선출하여 정통성 있는 정부를 세우는 것이 그 목적이었다. 

 

회의에는 성직자 · 귀족 · 사족 · 도시민의 대표들과 약간의 농민대표가 참가했다. 먼저 슬라브 족이 아닌 외국인은 일단 차르 후보에서 배제한다는 결정이 내려졌다. 이러한 차르 후보를 두고 오랜 회의와 토론 끝에 미하일 로마노프가 차르로써 강력한 후보로 대두되었다. 이 회의는 러시아 역사상 모든 자유 계급의 대표가 처음 참석한 것으로 평가된다. 


로마노프 가문은 당시 슬라브 인에게 인기 있는 가문이었다. 로마노프 가문이 인기 있었던 이유는 이반 뇌제의 훌륭한 황후로 알려진 아나스타시아(Anastasia)가 로마노프 가문 출신이었고 차르 선출 당시 폴란드에 포로로 붙잡혀 있던 미하일 1세의 부친인 필라레트(Pillaret)도 슬라브 인들에게 선정을 베풀었기 때문에 모든 시민의 계층에게 두루 신망을 얻고 있었다. 

 

더구나 미하일 1세가 당시 1세의 어린 나이였다는 것도 유리하게 작용했다. 최악의 러시아 동란으로 인해 폴란드 인이나 차르를 사칭하는 자들을 섬기거나 할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러시아 정교회 총주교 게르모겐(Germogen)이 천거했다는 것도 신망을 높이는 요소가 되었다.


그러나 과연 위와 같은 부분이 전체적으로 슬라브 인들을 통치하는데 인정을 받을 수 있는 부분인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요소들이 많다. 가령, 동란이나 식민 지배의 통치 하에서 갓 독립했던 슬라브 인이 쇠퇴한 모스크바 대공국의 이름만 차르였던 그 후계를 이전 모스크바 대공국의 차르와 같은 혈통, 혹은 단순한 민중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던 부분, 그리고 국난을 막 벗어나 전체 시민들을 안정시킬 수 있는 중요한 시기에 미하일 1세의 17세라는 어린 나이는 분명 납득하기 어려운 선택이었다. 

 

이에 가장 중요한 것을 간과하고 있었다. 로마노프 가문은 위와 같은 이유들 말고도 슬라브 인들을 대대로 수호했던 가문이었다. 키예프 공국 시기에는 페체네그와 같은 투르크 인들과 저항했고 타타르의 멍에 시절 때는 몽골-타타르 세력인 킵차크 한국과 저항하여 다수의 슬라브 인들을 지켜냈다. 


그리고 로마노프 가문의 시조인 안드레이 이바노비치 코빌라(Андрей Иванович Ковила)는 그의 어머니가 타타르 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타타르와 전쟁을 벌여 자신의 가문과 자신이 지배하던 슬라브 농노들을 수호하기도 했다. 이후, 리투아니아 공국, 폴란드 왕국의 지배 시기에도 굴하지 않고 저항하여 슬라브 인들을 수호했던 가문이었다. 로마노프 가문이 차르 후보로써 명망이 높았던 것은 슬라브 인들과 러시아 정교회를 수호하고 외부 세력의 침입에 끊임없이 저항했기 때문이었다.

 

차르를 결정할 전국회의는 전국에 밀사를 파견하여 지방 여론을 살피는 것에서 최종적인 결론을 내리기에 이른다. 국민들이 전국회의의 결정을 강력히 지지한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전국회의는 마침내 미하일 로마노프가 러시아를 통치할 차르로 선출됐음을 공표했다. 로마노프 집안의 17세 소년이자 가문의 장자로 알려진 미하일 로마노프(Михаил Романов)는 여론에 의해 차르에 올라 로마노프 왕조를 출범시키게 된다.


정길선 기자 lukybaby7@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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