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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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현재 민족 갈등 우려에도 EU 가입 지속 추진 중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현재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에 대한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현재 독일과 중동부 유럽 EU 회원국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고 있는 상황이다. 독일의 아날레나 베어복 장관은 2024년 3월 5일에 갑자기 사라예보를 방문한 자리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중 ‘지정학적 필요성(Geopolitical Necessities)’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에 대한 통합과 가입에 대해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앞서 2022년 12월 올라프 숄츠(Olaf Scholz) 독일 국무총리 또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후보국에 대한 지위 부여를 축하하는 성명을 통해 지난 2013년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의 사례를 들며 보스니아의 조속한 가입을 기대한다고 밝혔다. 헝가리와 오스트리아, 체코 공화국,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 등 중동부 유럽 5개국은 지난 2022년 7월 EU 이사회에 공동 서한을 보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조속한 가입 후보국 지위의 부여와 가입 절차 개시를 촉구한 바 있다. 특히 헝가리 정부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우크라이나나 몰도바와 달리 보스니아의 가입에 대한 협상 개시를 망설이는 EU 집행위를 공개적으로 비난했다. 2024년 1월 26일 페테르 시야르토(Péter Szijjártó) 헝가리 외무장관은 사라예보를 방문하여 코나코비치 장관을 만난 이후 공동 기자 회견을 통해 같은 해, 7월부터 시작되는 자국의 EU 이사회 순회 의장국 임기 동안 유럽의 새로운 성장 동력과 에너지 및 야망을 위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통합과 가입을 적극 지원하겠다고 발표하였다. 지난 해, 2023년 11월 알렉산더 샬렌베르크(Alexander Schallenberg) 오스트리아 외무 장관은 파이낸셜 타임즈(Financial Times)와 인터뷰에서 EU 집행부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을 이유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를 비롯한 서부 발칸 국가들의 EU 가입 요청에 대해 홀대해서는 안 된다 주장했다. 이에 대해 샬렌베르크 장관은 이미 2016년 가입 신청서를 제출했던 보스니아에 앞서 우크라이나와 몰도바가 가입 절차를 시작하는 것은 불공정하다면서, EU의 서부 발칸 지역 확장이 지정학적인 이유로 매우 중요하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르비아계 주민이 8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은 1995년 이후에도 보스니아로부터 분리 독립과 세르비아 편입을 주장하고 있으며, 이로 인한 민족 간의 갈등은 2016년 2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신청서 제출과 2022년 11월 분리주의 성향 도딕 대통령의 재집권으로 다시 고조되고 있다. 이에 대해 도딕 대통령은 1998~2010년 사이 두 차례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국무총리를 역임하였으며, 2018~2022년 동안 세르비아계의 몫으로 돌아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대통령 직을 수행하였고, 2010년과 2015년에 이어 2022년 7월 스르브스카 공화국 대통령의 3선에 성공하였다. 그는 국무총리와 대통령 재임 중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의 민족 감정을 자극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정치적인 불안정을 꾀한다는 비판을 받아 왔다. 도딕 대통령은 지난 2021년 스르브스카 공화국이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중앙 정부의 통제를 벗어난 국방, 사법, 조세 제도를 운용해야 한다고 주장하여 큰 논란을 일으킨 바 있다. 또한, 도딕 대통령은 1995년의 데이턴 협정이 서로 다른 종교와 문화를 가진 민족들을 보스니아라는 단일 국가로 편성하면서 이들을 강제로 묶어 둔 것이 엄청난 실수였다고 주장하였다. 이에 보스니아 내 UN 평화유지 활동과 데이턴 협정 이행을 감독하는 크리스티안 슈미트(Christian Schmidt)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고위 대표는 2023년 10월 도딕 대통령이 데이턴 협정을 공개적으로 부정하면서 보스니아를 위험에 빠뜨리고 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도딕 대통령은 미국과 EU의 압력이 거세지자 2024년 1월 8일 로이터(Reuters)와 인터뷰에서 자신은 전쟁이나 혁명을 통한 분리 독립을 추구하지 않으며 단지 외세를 배제한 보스니아 내 다른 정파들과는 대화를 통해 지속 가능한 자치권 존중을 주장했을 뿐이었다며 한 발 물러섰다. 그러나 다음 날인 1월 9일 그는 스르브스카 공화국 건국기념일인 공화국의 날을 맞이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내 세르비아계 주민들이 정신적으로 세르비아와 연결되어 있다고 발언하여 다시금 보스니아 중앙 정부와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등의 강한 비판에 직면하게 된다. 한편, 보스니아 중앙정부는 스르브스카에서 기념하고 있는 공화국의 날을 자국 내 민족 갈등을 조장하는 불법 행사로 규정 및 규제하고 있지만 도딕 대통령의 이와 같은 결정으로 인해 스르브스카 공화국의 날은 여전히 지켜지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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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벨라루스의 2020년 시위 당시, 군중들이 불렀던 노래 빅토르 최(Виктор Цой)의 변화!(Перемен!)
    벨라루스 2020년 시위 당시 시민들 사이에서는 1991년부터 동구권에서 울려퍼졌던 민주화의 상징인 노래 Виктор Цой (빅토르 최)의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도 함께 불렸다. 빅토르 최의 음악에는 뭔가 메시지를 주는 부분들이 많다. 어쩌면 러시아에서 가장 철학적인 가수가 빅토르 최였는지도 모른다. 이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 2020년 유럽에서 마지막 장기집권국가인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부정선거 의혹에 항의하는 시민들, 서유럽식 자유 민주주의를 갈망하는 시민들에게 다시 불려졌다. 이 노래는 1980년대 후반 소련 젊은이들이 공산주의 사회와 로마노프 왕조 이후, 가장 최악의 서민 경제 상황으로 떨어진 것에 대한 불만, 그런 것들이 쌓이고 쌓여 변화를 원하는 그 마음을 대신한 노래였다. 이는 당시 미하일 고르바초프 대통령이 Перестройка (뻬레스뜨로이까)와 Гласность (글라스노스뜨)를 선언한 직후에 이 음반이 나왔으니 시기적으로도 맞아 떨어진 대작이라 볼 수 있다. 본래 이 노래는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으로 "변화를 원한다" 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이 노래는 동유럽 각국으로 퍼져나가 동유럽의 열망인 개방의 상징인 노래가 된다. 당시 소련에서 가장 인기 있는 컬트 영화 "아사"에서는 영화의 마지막 장면에서 한 젊은 가수가 음식점에 도착하고 공식 공연가가 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규칙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그걸 가만히 서서 듣는 대신 그는 자신이 시인이라면서 음식점을 나와 자신을 기다리는 밴드에게 돌아간다. 노래가 계속되면서 카메라는 빅토르와 밴드가 대규모의 군중 앞에서 연주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노래가 바로 Хочу перемен (하추 뻬레멘)이다. 그리고 빅토르 최가 사망한지 30년 후, 이번에는 벨라루스 민스크에서 이 노래가 울려 퍼졌다. 벨라루스 경찰당국은 2020년 8월 12일 민스크 민주화 시위 현장에서 '뻬레멘!'이 울려퍼지자, 노래를 연주하며 부른 디제이(DJ)들을 즉각 연행해 갔다. 하지만 시위 참가자들은 반주없이 '뻬레멘!'을 부르고 또 불렀다고 한다. 끌려간 DJ들은 풀려난 뒤 내무부 차관급 인사에게 밀실에서 구타를 당했다고 폭로하기도 했다. 벨라루스의 MZ 세대들은 구시대적인 루카센코의 체제에서 벗어나 서방이 추구하는 민주국가로써의 Перемен! (변화)을 원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비단 벨라루스만의 Перемен!이 아니라 진정한 변화를 원하고 있는 모든 나라들, 특히 대한민국에도 진정한 뻬레멘(Перемен)을 모든 국민들이 열망하고 있다. 빅토르 최의 철학적인 메시지가 담긴 노래들은 지금 현재, 현 세대에도 큰 영감을 주고 있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сердца, (뻬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쎄르짜) 변화를! 우리의 가슴은 요구한다. Перемен требуют наши глаза, (뼤레멘! 뜨레부유뜨 나쉬 글라자) 변화를! 우리의 눈동자는 요구한다. В нашем смехе и в наших слезах, (브 나쉠 쓰메헤 이 브 나쉬흐 슬라자흐) 우리의 웃음과 눈물과 И в пульсации вен (이 브 뿔싸씨이 볜) 우리의 고동치는 핏줄에 Перемен! (뻬레멘!) 변화를! Мы ждем перемен. (믜 쥐둄 뻬레멘) 우리는 변화를 원한다. Электрический свет продолжает наш день (에릭뜨리췌스끼이 스볫 쁘라달좌엣 나쉬 뎬) 전기불이 우리의 낮을 늘이고 И коробка от спичек пуста. (이 까로브까 앗 스삐췍 뿌스따) 성냥갑은 비어버있지만 Но на кухне синим цветком горит газ. (노나 쿠흐녜 씨님 츠볘뜨꼼 가릿 가즈) 부엌에는 푸른 색 가스불이 타고 있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 위엔 차를 Эта схема проста. (에따 스헤마 쁘로스따) 간단한 일이다. И больше нет ничего, все находится в нас. (이 볼쉐 녯 니췌고, 브쎄 나하딧쌰 브 나쓰) 더이상 필요한 것은 없다. 모든 것은 우리 안에 있다. Мы не можем похвастаться мудростью глаз (믜 녜 모쥇 빠흐바스땃쌰 무드라스뜌 글라즈) 우리의 눈동자가 항상 지혜에 가득차 있다고 할 수는 없고 И умелыми жестами рук, (이 우멜릐미 줴스따미 루끄) 우리의 손이 항상 숙련된 것도 아니지만 Нам не нужно все это, чтобы друг друга понять. (남 녜 누쥐노 브쎄 에따, 취또븨 드루그 드루가 빠냐뜨) 서로를 이해하는 데엔 그런 것은 필요하지 않다. Сигареты в руках, чай на столе, (씨가레띠 브 루까흐, 챠이 나 스딸례) 손에는 담배를, 식탁에는 차를 Так замыкается круг. (딱 자미까엣쌰 끄루그) 그렇게 처음은 끝이 되는 것이고 И вдруг нам становится страшно что-то менять. (이 브드룩 남 스따노빗쌰 스뜨라쉬나 췌또-따 메냣) 우리는 갑자기 변화를 두려워하게 된다. 이와 같은 벨라루스 MZ 세대들의 시위가 이웃인 러시아에도 적지 않은 영향을 끼쳤다. 러시아 하바로프스크 등 일부 도시에서도 경제 문제와 더불어 세르게이 푸르갈(Сергей Фургал) 주지사의 체포와 구금으로 인한 정치적 문제 등으로 인한 갈등들이 폭발해 반(反) 정부 시위로 촉발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로 인해 알렉세이 나발니 등 몇몇 반(反) 정부, 반(反) 체제인사들은 벨라루스 시위대들을 응원하거나 지지했다. 한편 슬로베니아의 역사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시위가 성공한다 해도 루카셴코가 이루어 놓은 경제적인 안정과 안전, 분배 정책을 허사로 돌려놓아 혼란을 일으키고, 결과적으로는 더 국가주의적이고 극우에 가까운 지도자가 탄생하지 않을까 우려한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이는 마르크스주의 구좌파적인 루카센코의 성향도 한 몫 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루카센코는 현재 무소속이지만 과거에는 급진 좌파정당 소속이였고 현재도 구소련 시기와 비슷한 정책들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그 문제인데 그러한 정책들이 극우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것이다. 한편, 우크라이나와 조지아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고 우려되는 주장도 있다. 다만 조지아와 우크라이나의 경우와는 약간의 차이점도 있는데, 우선 조지아, 우크라이나는 목적이 반러 감정을 표출하는 것에도 같은 목표점을 두었던 반면 벨라루스 반(反) 체제 인사, 시위자들도 반러 감정을 가지고 있지만 반러 운동이 목적이라 보기는 어려운 부분이 있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오로지 루카센코의 실각이며 루카센코를 밀어주는 러시아 정부에 대한 불쾌감의 표현이었다. 따라서 벨라루스인들은 러시아 정부가 아닌 러시아인들을 자신들의 가족이자 친척이라 생각하고 동족으로 생각한다. 이러한 부분이 조지아나 우크라이나의 반러 시위와는 다른 부분이다. 물론 벨라루스 시민들 입장에서는 러시아 정부를 어느 정도 경계를 하지만 루카센코를 몰아내더라도 친러 정권을 유지하자는 시민들도 상당수 존재하고 있다. 그리고 일부 지역에 러시아인들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도 아니다. 우크라이나와 몰도바의 경우 반러감정에다 지역주의가 결합된 경우이지만, 벨라루스는 크게 특정 지역에서 이민족들이 벨라루스로부터 분리 독립하여 이탈하려는 움직임 같은 것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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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4
  •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 체중 증가의 미신과 과학적 해석
    많은 사람들이 초여름이 다가오면 다이어트에 대한 관심이 높아진다. 클리닉을 찾는 환자들 사이에서 자주 들리는 말은 "제가 물만 마셔도 살이 찌는 체질이라..."이다. 하지만 이 말은 과학적 근거가 부족하다. 실제로 물은 0칼로리이기 때문에, 물을 마시는 것만으로는 체중이 증가할 수 없다. 물론, 물을 많이 마시면 체중계상의 무게는 일시적으로 증가할 수 있지만, 이는 곧 소변 등을 통해 배출되면서 원래의 체중으로 돌아간다. '살이 찐다'는 표현은 일반적으로 체내에 지방이 축적되어 체중이 늘어나는 현상을 말한다. 실제로 몸이 지방을 생성하려면 섭취한 칼로리가 소비되지 않고 남아야 한다. 특정한 체질의 사람들은 소량의 칼로리를 섭취해도 체내에서 이를 효율적으로 지방으로 전환해 저장하는 경향이 있다. 이와 관련하여, 몇 년 전 '뚱보균'이라 불리는 퍼미큐티스(firmicutes) 박테리아가 화제가 된 적이 있다. 이 박테리아는 체내에서 당분을 발효시켜 지방을 생성하는 역할을 한다고 알려져 있다. 이러한 박테리아는 과도한 음식 섭취와 연관이 있으며, 많은 음식을 섭취할수록 이 박테리아는 더 많이 생겨나 체내에 지방을 쉽게 축적하게 된다. 따라서 체중 관리를 위해서는 과식을 피하고 균형 잡힌 식사를 하는 것이 중요하다. 또한, 장 건강에 대한 정기적인 검사를 통해 장내 박테리아 균형을 확인하고 필요한 경우 식단을 조정하는 것이 좋다. 유기산, 마이크로바이옴 및 음식물 알레르기 검사를 통해 장의 상태를 체크할 수 있다. 또한, 일상 생활에서 꾸준한 신체 활동을 통해 소비되지 않는 칼로리를 줄이는 것이 체중 관리에 도움이 된다. 규칙적인 운동은 칼로리 소모를 촉진할 뿐만 아니라, 전반적인 건강을 향상시키는 데에도 기여한다. 마지막으로, 체중 관리는 단순히 외모를 위한 것이 아니라 건강을 유지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임을 인식하는 것이 필요하다. 체중 증가에 대한 잘못된 믿음보다는 과학적으로 입증된 방법을 통해 건강하게 체중을 관리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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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문화/행사
    2024-05-13
  • 구독 서비스 관리 앱, 사용자 자동결제 관리에 도움 제공
    스트리밍, 쇼핑, 세탁, 커피 등 다양한 분야의 구독 서비스가 증가하면서 이용자들이 해지 시기를 놓치는 일이 잦아지고 있다. 이를 돕기 위해 구독 통합 관리 앱 '왓섭'이 등장했다. 왓섭은 국내외 다양한 구독 서비스와 연동하여 이용 및 결제 현황을 한눈에 보여주는 기능을 제공한다. 이 앱은 사용자가 공인인증서를 연동하면 자동으로 현재 이용 중인 구독 서비스의 내용을 집계해 보여준다. 이는 카드와 은행 거래는 물론 토스나 네이버페이 등 간편 결제 서비스까지 포괄한다. 또한, 사용자가 직접 구독 서비스 정보를 입력하여 관리할 수도 있다. 왓섭은 정기 결제 전에 알림을 보내 결제 의사를 다시 한번 확인하고, 원치 않는 결제는 앱 내에서 직접 해지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한다. 이러한 기능 덕분에 많은 사용자가 불필요한 자동 결제를 피할 수 있게 되었다. 구독 서비스에 가입한 후 무료 이용 기간이 끝나면 자동으로 유료 전환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구독 신청 시 다음 달 자동 해지 예약을 신청하는 것도 좋은 방법이다. 구글 플레이스토어나 애플 앱스토어에서는 설정을 통해 정기 결제를 취소할 수 있으며, 앱 장터를 통한 환불 요청도 가능하다. 금융위원회가 운영하는 계좌정보통합관리서비스 '페이인포' 또는 '어카운트인포' 앱을 통해 이동통신요금, 4대 보험료, 전기요금, 임차료 등 정기적으로 결제되는 항목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통합 조회 서비스는 사용자가 자신도 모르게 지출되는 비용을 관리하는 데 큰 도움을 준다. 공정거래위원회는 구독 서비스 이용자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 온라인 다크패턴에 대한 자율 관리 가이드라인을 발표했다. 이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기업은 결제 대금 변경 7일 전에 결제 대금 변경 시점, 가격 변동 상세 내용, 결제 수단 등을 사용자에게 알리고 동의를 구해야 한다. 이는 투명한 결제 환경을 조성하여 소비자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조치다. 구독 경제가 확산되는 상황에서 왓섭과 같은 앱은 소비자가 자신의 금융을 더 효과적으로 관리할 수 있게 도와준다. 이러한 도구들을 활용함으로써 사용자는 불필요한 지출을 줄이고, 자신의 금융 상태를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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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전 세계에 잘 알려지지 않은 크로아티아의 EU 가입 배경, 부코바르(Vukovar)에 정착해 있는 세르비아인에 대한 처우 문제의 변화
    세르비아가 주도하던 구(舊) 유고슬라비아 연방으로부터 독립을 이루어낸 지 20여 년 만에 크로아티아는 여러가지 좋지 않은 상황을 이겨내며, 2012년 1월 22일 EU 가입을 묻는 국민투표에서 전체 투표자 43.58% 중에서 찬성 66.27%로, 마침내 2013년 7월 EU 가입을 확정지을 수 있었다. 이는 어쩌면 2000년 이후, EU 가입을 통해 진정한 유럽 국가로 도약하고자 했던 크로아티아의 계획이 마침내 달성되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와 같은 EU 가입 과정에서 크로아티아는 EU 가입에 있어 나타난 여러 장애물들 중 갸운데 가장 껄끄럽고 큰 요인이자 국제 사회에서 우려를 나타냈던 이웃 세르비아와의 갈등을 해소하려고 했다. 크로아티아는 EU의 기준에 따라 자국 내 세르비아 소수 민족의 권리 보장 및 이들과의 평화적인 관계 복원을 약속하게 되었다. EU는 마스트리히트(Maastricht) 조약 정신에 따라, 회원국 내에서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보호하려는 노력을 지속해 왔으며, 따라서 현재 EU 내 공식 언어만도 크로아티아어를 포함하여 24개에 이르고 있는 상황이다. 2013년 7월 1일, EU에 가입한 크로아티아는 소수 민족 주민 수가 3분의 1을 초과하는 지역에서는 소수 민족의 언어와 문자를 병기해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자국의 헌법을 개헌하면서까지 그 법령에 받아들여야 했다. 그러나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 옛 우스타샤의 후예들이 정치권에서 꽤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었고 이들은 소수 민족들에게 권리를 주는 것에 대해 굉장히 부정적인 입장이었다. 당시 여당인 민주연합은 EU에 가입하는 것이 크로아티아의 내부 경제 문제에서 관광업에 치중되어 있는 것을 탈피해 경제 분야의 다변화는 필연적인 부분이라 역설하며 극우주의자들을 설득하는데 성공한다. 그러면서 가장 먼저 이와 같은 소수민족에 대한 권리에 대해 부코바르(Vukovar)에 가장 먼저 적용시켰다. 부코바르는 내전 이전인 1990년엔 44,639명의 인구, 즉 크로아티아인 47.2%, 세르비아인 32.3%가 집단 거주하고 있었던 지역이다. 당시 2011년의 통계에 의하면 부코바르 지역의 인구가 27,683명으로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이 중 크로아티아인이 57.37%, 세르비아인이 34.87%를 차지하고 실정이다. 2013년 9월, 크로아티아 정부는 부코바르의 공용 표지판 및 공공 기간 현판에 크로아티아의 라틴(Latin) 문자와 함께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는 키릴(Ćiril) 문자를 병기했다. 그런데 문제는 부코바르에 거주하고 있는 크로아티아계 주민 및 크로아티아인들은 그 날 이후로 현재까지 키릴 문자와 서로 병기되어 있는 현판들을 훼손하거나 부수는 등 집단적으로 반발했다. 이와 함께, 과거 세르비아 민족에 의한 대량 학살이 이루어졌던 부코바르 지역 내 주민들을 고려해 EU 요구 조건이 예외적으로 적용될 수 있도록 ‘특별존중지역(Područje posebnog poštovanja)’으로 선포할 것을 강하게 요구했다. 또한 이러한 요구 조건을 관철시키기 위해, 이미 2014년 5월 초까지 크로아티아 전체 유권자의 10%가 훨씬 넘는 65만 여 명의 서명을 받아 국민투표를 요구했다. 크로아티아의 서명 법에 따르자면, 유권자 10%가 넘는 서명이 이루어질 경우, 해당 내용을 국민투표에 붙일 수 있다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이다. 부코바르는 세르비아계 소수 민족들이 밀집되어 있는 지역이다. 이는 오늘날 세르비아 보이보디나(Vojvodina) 지방과의 접경을 이루고 있는 슬라보니아(Slavonia) 지방에 자리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부코바르는 당시 세르비아인이 주도하던 유고슬라비아 연방군(JNA)에 의한 공격으로 크로아티아 여러 도시들 가운데 가장 큰 피해와 함께 가장 많은 희생자가 배출된 곳이기도 하다. 실제로 1991년 11월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약 2,000여 명으로 구성된 크로아티아 시민군이 지키고 있던 부코바르에서는 약 36,000여 명인 유고슬라비아 연방군이 약 87일 동안에 걸친 장기간의 포위와 더불어 대량 학살이 이어졌다. 당시 크로아티아 시민군과 민간인 등 약 2,000여 명이 살해되었으며, 약 800여 명은 실종되었고 약 22,000여 명은 유고슬라비아 군에 의해 다른 곳으로 강제 이주를 당해야만 했었다. 그리고 이와 같은 참상의 흔적과 아픈 기억은 내전이 발생하기 이전에 만들어진 레스토랑을 비롯, 시 전망대가 있었던 ‘워터타워(Vukovarski vodotoranj)’ 기념비 등에 아직까지 그대로 남아 있는 상황이다. 이처럼 부코바르 대학살의 참담한 기억과 상처는 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한 이후, 또 다시 이 지역의 평화를 위협하는 심각한 도전으로 부활하고 있다. 그 동안 크로아티아 정부는 EU 가입 전제 조건인 발칸 유럽의 평화 정착을 위해 세르비아와의 화해 및 관계 개선 노력을 기울여 왔던 것은 사실이다. 실제로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소수 민족 문제를 해결하는 부분과 주변 국가들과 관계를 개선하려는 노력과 의지는 독립 크로아티아의 세 번째 대통령으로 당선된 이보 요시포비치(Ivo Josipovic) 대통령의 2010년 2월에 열린 당선 연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언론회견에서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정치적 해결의 공감대에 기초해 우호관계 발전을 제안하였고, 비록 크로아티아는 코소보에 대한 독립을 인정하면서 양국 간 관계를 경색시켰던 이유 중 하나가 되었지만 그로 인해 양국 간 관계 악화가 더 이상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화해 모드를 표방하기도 했다. 더불어 크로아티아인이 상당수 거주하고 있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게도 내부적 안정을 도모하기를 바라면서 국제 사회와의 유대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크로아티아의 국익에 부합하고 있다는 점을 분명히 상기시키기도 했다. 당시 이와 같은 발표는 발칸 유럽 지역의 안정과 평화를 바라는 국제 사회와 EU의 적극적인 지지를 받았지만, 반면 크로아티아 민족주의자들 및 우타샤의 후예들이 이에 절대적으로 반발함은 물론이고 부코바르 지역을 비롯해 세르비아와의 내전에서 가족과 삶의 터전을 잃어버린 전쟁 피해자들이 거칠게 항의했기에 이러한 국내 내정에 상당한 진통이 이어졌다. 특히 이는 세르비아 측이 크로아티아인 학살에 대해 여태까지 사과와 배상을 한적이 없었기에 더더욱 내부에서 반발이 극심해졌다. 이처럼 내부에서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요시포비치 대통령은 2010년 4월 보스니아 내전 당시 크로아티아 민병대들이 무슬림 민간인 116명을 학살한 아흐미치(Ahmici) 학살 사건과 모스타르(Mostar) 도시 파괴 등을 사과하면 배상을 약속했다. 보스니아 무슬림들이 크로아티아인을 학살했던 보스니아 마을(Krizencevo Selo) 또한 방문하여, 희생자들의 추모와 함께 보스니아와의 화해 를 타진히고 미래에 대한 협력을 요청하기도 했다. 실제로 이러한 요시포비치 대통령의 노력은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 국경위원회 회의가 자그레브에서 개최되어 그동안 소규모적인 영토분쟁에 휘말렸던 부분을 해결하기 위해 국경을 확정하는 협의가 논의되었다. 이어 양국 간 총리 회담 등 여러 고위급 회담 자리로 이어졌고 이 회담들에서 크로아티아가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강력하게 지지하는 등 양국 간 화해 분위기가 빠르게 진전되었다. 그리고 2010년 6월, 자그레브에서 양국 간의 과거 청산을 위한 마지막 절차라 할 수 있는 양국 국무장관 간의 군사 협력 협정을 체결했다. 그리고 베오그라드에서는 양국의 법무장관이 만나 부패 및 조직범죄에 관한 양국 간 범죄인 인도조약을 체결하는 것으로 이어졌다. 2010년 7월엔 요시포비치 대통령이 세르비아를 방문하여 보리스 타디치(Boris Tadić) 대통령과 회동하였고, 회담에서 양국 피난민의 자유로운 입국을 허용할 것과 각 영토 내 소수민족들의 언어 및 문화 정체성을 인정하고 문화재 반환 등 과거 유고슬라비아 내전에 관한 청산 문제 등이 중점적으로 논의되기도 했다. 양국 간의 이와 같은 화해 무드는 경제적인 교류 확대와 발전에도 영향을 미치게 된다. 2010년 이후로 크로아티아는 세르비아 내 투자 규모 6위로 상승하였으며, 단절 이후 교역량이 8배 이상 증가하는 효과거 이어졌다. 또한 이는 크로아티아 기업들의 세르비아에 대한 투자 확대로 이어졌고, 2011년 약 10억 유로 이상이 세르비아에 투자되는 등 양국 간 경제 교류가 활발히 진행되었다. 더불어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간의 화해는 과거 연방의 구성국이었던 슬로베니아 기업들과의 상호 투자와 교역 관계로 이어지게 하고 있으며, 국영 철도 합작 회사를 설립하는 등 다양한 분야에서 서로 건의 협력을 증진하는 단계까지 이르렀다. 이러한 크로아티아, 세르비아 간의 화해 무드는 2010년 11월 타디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요시포비치 크로아티아 대통령과 함께 유고슬라비아 내전 당시 가장 큰 전쟁의 피해를 입었던 부코바르를 방문하여 민간인 희생자를 추모했다. 이어 내전 당시 세르비아군에 의해 저질러진 과거사에 대해 사과하는 것까지 발전되었다. 무엇보다도 과거의 내전 당시 저지른 인종 학살에 대해 당시 세르비아의 공식적인 사과가 이루어졌다. 이에 양국 간 과거사 극복을 위한 우호 관계 증진의 노력이 중요한 결실을 맺었다는 것에서 이는 역사적인 의미와 함께, 발칸 유럽 지역의 안정과 진정한 평화적 토대를 구축되었다는 것을 의미했었다. 하지만, 부코바르의 키릴 문자 공용 표기를 둘러싼 갈등의 경우와 같이, 힘들게 발전시켜 온 양국 간, 양민족 간 화해와 평화 무드는 크로아티아가 EU 가입이 확정되면서 모두 깨졌다. 이와 함께 2014년 3월 4일에는 크로아티아와 세르비아 양국가가 내전을 벌이면서 이루어진 여러 학살 행위를 인종 학살로 규정하고 크로아티아 측이 세르비아를 국제유고전범재판소(ICTY)에 고소했으며 이에 세르비아도 그동안의 화해를 깨고 크로아티아에 맞고소를 하면서 재판이 시작되면서 모처럼 불어온 발칸의 훈풍은 차가운 냉방으로 바꼈다. 크로아티아는 지난 2014년 ICTY 제소 내용을 토대로 세르비아가 지난 1991~1995년 독립전쟁의 기간 동안 약 2만여 명의 크로아티아계 민간인 학살과 인종 청소를 주도했다는 점을 비난했다. 이에 대응해 같은 해 하반기 때 세르비아도 크로아티아를 ICTY에 제소하면서, 내전 기간 동안 크로아티아 민병대가 저지른 인종 학살과 더불어, 당시 세르비아인들의 포로 구금 상황이 세계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 극우 정권이었던 우스타샤(Ustaša) 정권에서 자행된 나치 강제 수용소와 같다고 비난하고 있다. 향후 부코바르 문제를 비롯해 양국 간 관계, 그리고 더 나아가 발칸 유럽 지역의 평화는 요원하다. 특히 크로아티아가 EU에 가입 충분 조건을 지키기 위해 세르비아와의 화해를 이용한 셈이나 마찬가지니 세르비아 입장에서 그 분노와 배신감은 컸다. 크로아티아 EU 가입 문제, 그로 인해 크게 알려지 않았던 잠시 동안의 세르비아와의 화해와 EU 가입 직후, 태도를 바꿔 세르비아를 배신한 크로아티아 이야기, 두 나라는 서로가 멸망해 없어질 때까지 견원지간(犬猿之間)의 관계는 앞으로 영원히 지속될 전망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3
  • 2040년대를 위한 군 전략, 한국 공군의 '하이급' 전투기 대폭 증강 필요성 강조
    최근 대전에서 개최된 '에어로스페이스 콘퍼런스 2024'에서 한국국방연구원(KIDA)은 2040년대 한국 공군의 전략적 방향성에 대한 중요한 제안을 내놓았다. KIDA에 따르면, 북한의 핵과 대량살상무기 위협에 신속하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스텔스 기능을 갖춘 '하이급' 전투기의 비율을 대폭 증가시켜야 한다. 이 제안은 한국이 이미 F-35A 전투기 40대를 도입했으며, 최근 20여 대를 추가 구입하기로 한 배경에 더해, 더 많은 5세대 스텔스 전투기 도입이 이루어질 가능성을 시사한다. KIDA는 국방정책 전반에 대한 깊이 있는 분석을 바탕으로 이 같은 전략을 제시하였으며, 이는 향후 군의 전략 결정에 큰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박찬우 KIDA 군사발전연구센터장은 세미나에서 "현재 우리 공군의 하이급 전투기 비율은 주변국에 비해 낮은 편"이라며, 이를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그는 미래 전장에서의 공중우세 확보가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고 예측하면서, 사이버 및 우주공간 확장, 인공지능(AI) 및 유무인 복합체계의 활용이 필수적이라고 말했다. 한국은 현재 전투기 430대 운용을 목표로 하고 있으며, 이 중 하이급 전투기는 100대(23.3%)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KIDA는 이 비율이 향후 전략적 요구를 충족시키기에는 부족하다고 판단하고 있으며, 특히 5세대 이상의 스텔스 기능을 갖춘 전투기의 비율 증가가 시급하다고 보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박 센터장은 미래 전투기 개발 전략에 대해서도 언급했다. 그는 "우리는 KF-21 '블록3' 같은 다음 세대 스텔스 전투기의 개발을 서두르는 한편, 6세대 전투기 개발에도 주목해야 한다"고 설명했다. 일본이 영국, 이탈리아와 함께 차세대 전투기 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점을 예로 들며, 한국도 이에 대비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한, 박 센터장은 기술력 향상을 통해 전투기 무장의 정확도가 높아지는 것이 보편적인 추세라며, 2040년대에는 유무인 복합전투기가 도입될 경우 유인 전투기 한 대에 두 대의 무인기를 붙이는 방법도 고려할 수 있다고 언급했다. 이러한 전략적 변화는 전통적인 공군 작전 방식에 큰 변화를 가져올 것이며, 전투 효율성을 극대화하는데 기여할 것으로 보인다. KIDA의 이번 분석과 제안은 미래 한국 공군의 전략 방향성을 재정립하는 중요한 계기가 될 것이며, 이는 국방 전략의 새로운 패러다임을 제시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 뉴스
    • 정치
    2024-05-13
  • 정유라, 생활고 호소와 네티즌 비판에 대한 격렬한 반응 표출
    정유라가 최근 생활고를 호소하며 후원금을 요청하는 가운데 일부 네티즌의 비판적 댓글에 강한 반응을 보였다. 12일, 그녀는 자신의 페이스북을 통해 특정 네티즌들을 지목하며 강도 높은 언어로 비난했다. "돈 벌어라", "구걸하지 마라"라는 댓글을 남긴 이들을 '종북'이라 칭하며, 이들이 조국혁신당에 기부하고 조민의 유튜브 채널에 후원하는 것을 지적했다. 정 씨는 자신이 조민을 질투한다는 의견을 일축하며, 윤석열 대통령의 부인 김건희 여사에 대한 질투심을 비유적으로 언급했다. 후원금 요청이 부끄러운 일이라는 것을 인정하면서도, 국민의힘과 더불어민주당의 행태를 비판하며 자신은 충분히 후원을 받을 자격이 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녀는 안민석 민주당 의원과 관련된 재판 문제를 언급하며, 자신에게 돈을 주는 이들과 조민의 여행 비용을 지원하는 이들을 비교하며 의문을 제기했다. 그러면서 정 씨는 비판자들에게 돈을 내고 비판하라고 요구하면서, 현재의 비판은 무료로 제공되어서는 안 된다는 점을 강조했다. 그녀는 또한 자신은 홍삼 판매나 광고 등으로 돈을 벌지 않으며, 방송을 통해 상품을 판매하고 싶지 않다고 밝혔다. 그 대신, 그녀는 당당히 자신의 필요를 밝히고 그에 따른 성과를 보여주고 싶다고 말했다. 이는 조국의 딸 조민을 간접적으로 비판하는 발언으로, 조민이 후원금을 여행과 식사에 사용한다고 주장했다. 정 씨는 현재의 방송 환경을 비판하며, 자신은 책을 쓰거나 국회의원으로 나서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이는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불필요한 비용을 지출하게 하고 싶지 않기 때문이라고 덧붙였다. 그녀의 발언은 자신을 둘러싼 상황과 갈등에 대한 강한 입장을 보여주는 것으로, 사회적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그녀의 현재 심경을 반영한다.
    • 뉴스
    • 사회
    2024-05-13
  • 여러분들이 모르는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과정 이야기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이 세워진다. 이에 국가 내의 다양한 민족과 종교 사이에 민족주의 감정이 대두되면서 혼란이 찾아오는 위기가 계속 있었지만 요시프 티토가 1980년에 사망하면서 결국 국가 해체로까지 이어진다. 티토는 그동안 범슬라브 민족주의를 억제하는 정책을 펼쳐오며 유고슬라비아의 통합을 위해 노력했지만 그가 사망하고 한 달도 안 되어 코소보에서 폭력 사태가 분화하기 시작하면 범슬라브 민족주의가 서서히 고개를 들기 시작했다. 당시 티토가 후계자를 직접 정하지 않고 사망했기에 유고 연방의 정치권력 체제는 집권여당인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SKJ)의 1당 독재 체재를 유지하면서 각 공화국 출신의 대통령들이 1년에 한 번씩 번갈아 가면서 통치하는 집단 지도체제로 개헌된다. 그러나 이는 더 좋지 않은 방향으로 흘러가게 된다. 생전의 티토는 공산주의 정권과 자본주의 경제 체제로 인한 수정 자본주의와의 결합을 통해 미소 냉전으로 구분되던 양 진영에서 벗어나 제 3세계를 주도해왔다. 그랬기 때문에 자유 진영이든, 공산 진영이든 어디든 자유로이 왕래가 가능했다. 그런 상황에서 티토의 이러한 제3 세계 수정 자본주의 정책으로 자유 세력들과 공산 세력이 공존했던 곳이 베오그라드와 사라예보였고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 사회주의 공화국은 서방과의 경제 교류와 문화 교류 등등으로 인해 이미 자유 진영과 상호 신뢰를 구축해 놓았다. 반면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사회주의 공화국은 소련이나 중공, 북한과의 연계성을 통해 그들과 가까웠고 보스니아의 경우, 무슬림들을 중심으로 알바니아, 터키와 관계가 깊었으며 사우디아라비아나 시리아까지 교역이 가능했던 국가였다. 이러한 체제들을 모두 수용해서 하나로 묶었던 것이 티토였다. 그런데 이런 국가들은 유능한 지도자가 있을 때, 뜻을 함께하여 같은 미래를 꿈꿀 수 있지만 그 유능한 지도자 죽고 없어진 상황에 사후 대책도 수립되지 않은 혼란한 상황이라면 서서히 딴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즉, 연방을 걷어 치우고 각자도생의 길을 열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서서히 발호되는 것이 바로 민족주의의 개념이다. 유고슬라비아의 민족주의는 기존의 소련이나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서슬라브권 민족주의와는 차원이 달랐다. 같은 남슬라브계지만 그 민족주의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구심점은 제각기 달랐다. 그것이 바로 종교라는 구심이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는 같은 남슬라브계지만 이탈리아계 슬라브인의 비중이 80%에 달했다. 이는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무솔리니의 이탈리아 군이 달마티아 해안가와 슬로베니아 본토를 장악하면서 수많은 이탈리아인들이 그 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이탈리아 군이 철수했으며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어도 이들 이탈리아인들은 크로아티아와 슬로베니아를 떠나지 않고 그대로 살았으며 남슬라브계와 혼혈한 2~3세대는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중심 세력이 되어갔다. 이렇게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중심 세력이 이탈리아계가 되어가다보니 세르비아 및 보스니아와는 민족적으로 이질적인 형태를 띄워갔다. 게다가 종교도 카톨릭이고 슬라브계가 주축인 세르비아와 마케도니아, 몬테네그로는 정교회였다. 단 보스니아의 경우, 알바니아계와 터키계, 무슬림으로 개종한 슬라브계가 뒤섞인 이슬람이 대다수였다. 그러다보니 이 이질적인 형태의 민족주의에 구심점은 종교가 자리잡으니 상호간의 불신과 반목은 자명한 일이다. 여기에 오일쇼크로 인한 경제 위기는 세르비아계를 늘 도와줬던 소련의 경제가 휘청였다. 소련이 어려워지니 유고슬라비아를 도울 수 있는 상황이 되지 못하자 여기에 슬슬 자유진영들이 밀고 들어오기 시작했다. 마케도니아 출신의 라자르 콜리셰프스키(Лазар Колишевски)가 티토를 승계하게 되자 여기에 세르비아 중심의 유고슬라비아의 정권 중앙집중화를 노리고 콜리셰프스키의 하야를 요구하자 유고슬라비아 내 다른 민족의 민족주의자는 국가의 지방분권화를 원하며 자그레브와 베오그라드에서 시위를 벌였다. 유고슬라비아가 이렇게 서서히 분할의 조짐이 보이자 집단 서방과 미국은 냉전 시기 막판에 승기를 잡으며 공산 진영에 대한 우위를 확고히 다지기 위해 유고슬라비아 내정에 서서히 개입하게 된다. 우선 당시 집단 서방은 프랑스의 프랑소와 미테랑 대통령을 앞세워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 동맹에서 슬로베니아 대표를 맞고 있는 밀란 쿠찬(Milan Kučan)을 만났다. 류블라냐에서 벌어진 미테랑과 쿠찬의 회동은 유고슬라비아 국가 중 가장 먼저 슬로베니아가 이탈하게 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그 다음으로 접촉한 인물이 프라뇨 투지만(Franjo Tuđman)이다. 그는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크로아티아인의 처우에 대해 비판하며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주장하는 연설을 진행하였다가 티토의 눈 밖에 나서 투옥된 인물이다. 투지만은 이때부터 독립 크로아티아의 밑그림을 그리기 시작한다. 투지만은 우선 캐나다로 가서 크로아티아계 이민자들을 만났다. 이 때 미국, 캐나다, 영국의 정치인들과 접촉이 이루어진 것으로 확인된다. 크로아티아가 독립하게 되면 미국, 영국, 캐나다 등이 크로아티아를 지원하고 돕겠다는 확약을 받았을 것이다. 게다가 소련이 극심한 경제난으로 인해 힘을 잃어가고 있기 때문에 소련의 위성국들을 차례대로 독립시켜 소련을 붕괴시키는 작업에 이미 들어갔을 것이다. 그러한 근거로 동유럽 내 불고 있는 민주화 시위들을 들 수 있다. 특히 폴란드, 체코, 헝가리, 루마니아, 발트 3국 등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민주화 시위가 더 강력한 태풍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게다가 소련의 약화되고 있을 때, 그 틈을 이용해 유고슬라비아를 해체해 자신들이 발칸에 진주하고 바르샤바 조약기구와 독립국가연합을 서서히 해체시켜버리는 것이다. 티토가 만든 제3 세계의 정책은 그가 살아 있었을 때는 대단한 위력을 발휘했지만 그가 사망한 이후에는 아주 치명적인 약점으로 다가왔다. 이후 캐나다 여행에서 돌아온 투지만은 1989년 동유럽 혁명에 따라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도 민주화를 결정하고 각 공화국 별로 선거를 시행하기로 결정하였고 이 흐름에 맞춰 1989년 크로아티아 독립을 주장하는 크로아티아 민족주의 정당인 크로아티아 민주연합(HDZ)을 창당하여 당대표로 취임했다. 이때도 미국, 영국을 비롯한 자유진영들의 지원을 받았다. 슬로베니아의 밀란 쿠찬 또한 미테랑의 지지를 받아 1986년 5월에 슬로베니아 공산주의자 동맹의 대표가 되면서 자신의 입지를 굳혀 나갔다. 1991년 6월 25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이후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한 유고 연방군이 슬로베니아를 침공하며 독립전쟁을 벌인다. 슬로베니아는 경찰 병력과 국토방위군 등으로 게릴라 전 전술을 구사했다. 그러나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이 없었던 유고 연방정부는 고작 개전 10일 만인 1991년 7월 9일 전투를 중단하고 철군하면서 사실상 슬로베니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이 10일 전쟁에서 사실상 패배한 유고 연방군은 슬로베니아를 지배할 명분도 없었던 것도 있지만 크로아티아 내에서 투지만을 중심으로 매우 불온한 움직임이 있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후방에 문제가 생겨 연방군이 고립될 가능성이 높았다. 이 전쟁은 크로아티아의 브리오니 섬에서 체결된 브리오니 협정으로 종료되었으며, 슬로베니아는 3개월 뒤인 10월 공식적으로 독립했다. 크로아티아의 투지만은 1990년 5월 20일 투지만은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의 9대 대통령으로 당선되면서 분리 독립을 꾀했고 1991년 5월 19일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결정하는 국민투표가 실시되어 투표 결과 93%에 달하는 압도적인 찬성으로 독립 찬성이 결정되었다. 크로아티아는 슬로베니아와 같은 날인 6월 25일,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탈퇴하고 독립을 선언해버렸다. 그러자 이를 거부한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군을 동원해 전면적으로 크로아티아를 침공하면서 기나긴 유고슬라비아 내전이 시작된다. 1991년 7월 10일 슬로베니아는 독립을 쟁취했으나 크로아티아는 1991년 9월 17일까지 독립 선언을 연기한다는 조건 하에 일단 세르비아와의 전쟁을 중지했다. 그런데 문제는 보스니아에서 터졌다. 앞선 1년 전 보스니아는 최초로 다당제 총선이 열었다. 이렇게 형성된, 국민의회에서 공산당이 축출되고 3개 민족을 기반으로 한 민족 정당이 의회를 장악한다. 이후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가 독립선언을 하는 가운데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계속 유고 연방에 존속해 있으면서 세르비아계를 중심으로 유고슬라비아 내에서 계속 존속할 것인지, 그리고 보슈냐크 무슬림들과 보스니아에 남아 있던 크로아티아인들은 독립을 요구했기에 독립할 것인지에 대한 의견 충돌로 인해 긴장감이 감돌기 시작했다. 이후 1991년 10월 24일, 세르비아계를 기반으로 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국민의회 위원이 사라예보의 국민의회를 포기하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세르비아계 의회로 합류하면서 1990년부터 시작된 3개 민족 연합 통치는 완전히 붕괴했다. 1992년 1월 9일에 세르비아계 의회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세르비아계 공화국을 선포하면서 보스니아로부터 독립했고 1992년 8월에는 스르브스카 공화국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보스니아는 이후 1992년 2월 29일부터 3월 1일까지 유고슬라비아로부터 독립할 지에 대한 결정을 위해 국민투표를 열었다. 이 국민투표는 대다수의 세르비아인이 보이콧하면서 일방적인 형태로 변했고 99.7%로의 득표율로 독립이 확정되었다. 이리하여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는 1992년 3월 2일에 독립을 선포하게 된다. 그러자 이에 반발한 세르비아계 스르브스카인들로 인해 보스니아 전국에서 긴장이 조성되었고 1992년 3월 7일 세르비아 민병대가 카프리냐 주위의 보스니아인-크로아티아인 마을을 공격하야 살인 및 약탈을 자행하면서 보스니아 내전이 시작되었다. 이후 3월 15일에는 보산스키브로드(Bosanski Brod)와 보스니아인 마을 고라즈데(Goražde)가 대대적인 공격을 받았다. 이러한 소규모 공격이 자행된 이후 3월 19일에는 아드리아해 항구인 네움에 세르비아계 포병들 포를 사격하여 공격이 이어졌고, 24일에는 보산스키브로드, 30일에는 비옐리나에서 전투가 시작되면서 4년에 걸쳐 진행된 보스니아 내전의 비극의 서막이 열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3
  • 윤석열 정부, 국정 3년 차 정책 방향 "민생과 소통 강화"
    윤석열 정부는 국정 3년 차를 맞아 민생 개선과 대국민 소통을 중심으로 한 정책 방향을 세웠다. 김수경 대통령실 대변인은 용산 대통령실에서 진행된 브리핑을 통해, 정부는 여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국민의 삶을 실제로 변화시킬 수 있는 정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민생 물가 안정을 위한 태스크포스를 구성하여 물가를 지속적으로 모니터링하고, 유통 및 무역 구조의 개선을 통해 물가의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는 계획도 밝혔다. 이를 통해 물가 안정에 만전을 기하겠다는 입장이다. 또한, 수출이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산업의 발전을 지원하기 위한 전략산업 태스크포스를 통해 양호한 수출 실적을 이어가고자 한다. 이는 2차, 3차 협력 업체로의 성과 확산을 통해 경제 전반의 온기를 더욱 확산시킬 예정이다. 정부는 또한 민생토론회를 재개하여 대통령이 국민으로부터 직접 삶의 어려움을 청취하고, 국민통합위원회 성과보고회와 국가재정전략회의를 개최하여 국민의 삶을 개선할 전략을 논의할 계획이다. 성태윤 정책실장이 이끄는 민생물가 태스크포스와 국가전략산업 태스크포스는 이미 지난 2일 구성되어 핵심 산업 지원과 물가 안정 작업을 시작했다. 이러한 정책 방향은 민생을 우선하고 국민과의 소통을 강화하여 국민의 삶의 질을 향상시키는 데 중점을 두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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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 Pioneering Pig Kidney Transplant: A Bittersweet Breakthrough
    The first living patient to receive a genetically modified kidney from a pig died two months after the procedure, the US hospital that performed it has announced. Richard Sleiman, 62, from Boston, was living with end-stage kidney disease when he decided to receive a kidney from a pig that had undergone 69 genome modifications in what experts said would mark "a new era" in organ transplantation. Massachusetts General Hospital (MGH) said on Sunday that there was no indication that his death was the result of the transplant. Transplants of other organs from genetically modified pigs have failed in the past, but the operation on Mr. Sleiman was hailed as a historic milestone. In addition to kidney disease, Mr. Sleiman also suffered from type 2 diabetes and hypertension. In 2018, he underwent a human kidney transplant, but it began to fail after five years. After the pig kidney transplant on March 16, his doctors confirmed that he no longer needed dialysis, as the new organ appeared to be working well. "Slayman will forever be considered a beacon of hope for countless transplant patients around the world, and we are deeply grateful for his trust and willingness to advance the field of xenotransplantation," the hospital statement said. Organ shortages are a chronic problem around the world, and the United Nations said in March that there were more than 1,400 patients on its waiting list for kidney transpla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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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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