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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림과 서체로 예술혼을 불태운 추사 김정희를 기리다
    [제주 서귀포시 추사관과 유배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가 있다. 당시 거주했던 초가는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친 곳이다. 뛰어난 예술가를 접하지 못해 지식에 목말라 있던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추사 김정희는 큰 스승이었으리라. 추사관에는 작품 세계관, 세한도를 통한 예술관, 최후의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다. 대정읍 일대는 김정희가 추사체를 완성한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서화가로 뛰어난 작품을 남겼고, 불교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 유학자들에게도 널리 이름을 떨친 김정희는 당정에 휘말려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어릴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을 타고난 그는 부유하게 살았던 당대 명문가였기에 척박한 미개척의 제주 생활은 얼마나 험난했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고통스런 현실속에서 예술가가 느꼈을 인간에 대한 배신과 고독을 그림과 서체로 남겼다. 특히 세한도는 제주도 유배 시절, 외롭고 힘없는 자신의 처지를 예술혼으로 불태운 대표작이다. 시리도록 새하얀 토담집 한채와 그 집을 둘러싼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쓸쓸하다. 그림의 중심에는 백송이 보인다.썩은 몸통에 구부러진 가지 하나가 추사의 이름을 받치고 있다. 백송의 절개를 이상적에 비유하였고, 절망스런 유배지에서 추사가 보내는 구조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장무상망) 인장으로 마무리하는데 뜻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로 제자 이상적에게 주었다. 이상적은 귀한 서책을 보내는 등 물질적 정신적 성심을 다하였기에 스승이었던 추사의 선물이었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중국 연경으로 가져가 문인들과 시사회를 열었다. 세한도를 칭송하는 찬시를 받아 그림에 붙여 긴 두루마기 형태가 되었다. 또한 추사의 편지와 보석같은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감상할 수 있는 추사관은 유배 당시의 모습을 보존해 두고 있다. 추사의 동상을 바라보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모든 세상의 권력과 이치를 초월한듯 굴곡많은 한평생 오로지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 김정희. 그림 속 절제된 기교로 고뇌하며 이룬 문화의 경지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벗들의 신의와 우정은 척박한 유배지에서 점점 노쇠해가는 대가를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도록 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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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 제주 탐방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송악산은 해안을 낀 산책로를 따라 둘레길이 유명한 명소이다. 99개의 작은 봉우리가 모여있는 송악산 둘레길에서 바다 멀리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 산방산과 한라산까지 볼 수 있다. 길이 가파르지 않아 아이들과 어르신도 걷기 편안하고 막힘없이 탁 트힌 전경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는 운치있는 억새가 보이고, 한가로이 풀 뜯는 말들과 인사하며 걷는다면 도시에서 느끼지 못한 진정한 힐링을 느낄 것이다. 드디어 전망대 도착이다. 끝없이 펼쳐진 탁 트인 바다는 마음까지 긴 호흡으로 편안함을 선사한다.노송을 바라보며 걸어도 좋고, 바다를 눈에 담으며 걸어도 추억이 되는 송악산은 주변 편의 시설도 잘 구비되어 있다. 이중 분화구로 송악산 둘레길은 화산학적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 경관이다. 자연 그대로 보존하자는 환경 캠페인이 전개되면서 송악산 개발을 막기 위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해외 유명 휴양지 못지 않게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갖춘 송악산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잘 보존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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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5
  • 평산 책방을 다녀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23년 4월 25일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 인근 주택을 사들여 책방을 열었다. 평소 책을 좋아했던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의 SNS에 다양한 책을 소개했었다. 이 때문에 책방을 여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지난 1월 말경 ‘평산 책방’으로 무심결에 발길이 돌려졌다. 평소 꼭 한번은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몇 년 전 봉하마을을 다녀오며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혹여 남에게 들킬세라 서둘러 눈을 훔치던 기억이 새롭다. 길을 서둘러 떠났지만,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차를 마을 주차장에 대고 내리니 입구에 마을 아주머니 몇 분이 오미자차와 식혜를 팔고 계셨다. 아주머니 한 분이 친근하게 얼른 책방으로 가라 하신다. 마침 문 전 대통령이 책방에 계시는데 언제 사저로 올라가실지 모른다며 서두르라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퇴임 대통령이 일반인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문 전 대통령을 뵐 수 있을까 서둘러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책방으로 올라가는 길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물론 뵙고 나서 천천히 내려오며 그제야 보이는 다른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산 책방이란 간판이 보였다. 책방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아니 책방이라기보다는 어느 마을 집 안마당과 같은 모습이며 많은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왜 이리 사람이 많은지 어안이 벙벙했다. 평일이었기에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내 생각을 여지없이 벗어나며 문 전 대통령의 인기를 실감했다. 사실, 평시에는 이렇게 오래 계시지는 않는 듯했다. 내가 평산 책방을 찾았던 날은 현 국회의원과 총선 출마자와 많은 사람이 책방에 있음에도 스스럼없이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편안한 얼굴로 대화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행이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 이후 사진을 찍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찍으라 해서 서둘러 사진을 같이 찍었다. 그러다 책을 한 권 사야겠다 싶어 책을 사고 서명을 부탁하니 서명은 안 하신단다. 그러며 계산대 옆에 문 전 대통령 성함과 평산 책방 로고 스탬프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많은 사람이 서명을 부탁하면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듯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이야 친필 서명을 직접 받고 싶었으나 그것은 나의 욕심 일터, 그러면서 다시 책을 들고 사진을 찍어 주셨다. 문 전 대통령과 악수하며 “건강하셔야 합니다.”이 한마디만을 전해드렸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사진을 같이 찍고 무엇인가 말을 전했다. 그런 문 전 대통령은 너무 인자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런 선량한 모습 안에 나라를 이끌었던 강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언뜻 보면 그냥 좀 알려진 작가가 책방을 내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셈법으론 다양한 해법이 나올 수 있지만 편안하게 국민과 만나는 이웃집 아저씨와도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분 앞에 누가 보수 유튜버의 타겟이 되어 지독한 시달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인가? 필자는 그만큼 그분의 강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평산마을에서 느낀 역사 청산의 필요성 문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퇴임 후 기존 양산 매곡마을 대신 평산마을을 사저로 택했다. 이때 문 전 대통령과 함께 내려온 불청객 보수 유튜버들로 인해 전직 대통령 사저 주변 경호구역 확대까지 한동안 정치권의 주요 관심사였다. 대통령을 전직으로 둔 사람의 숙명일까. 우리나라는 좌·우 양극이 매우 심한 탓도 있다. 그럼 왜 이렇게 좌·우가 심하게 갈라져 싸우며 왜 정치뿐 아니라 국민까지 영향을 받을까. 이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 친일 청산이 제동에 걸렸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잔재가 너무나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친일이 문제가 아닌 친일파가 권력을 잡고 근대사를 만든 것이 문제일 것이다. 얍삽했던 그들답게 이승만과 합작하여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지지 세력이 필요했던 이승만과 친일로 부를 창출했던 그들의 잇속이 맞아 들었다. 그리고 북한에서 쫓겨온 친일파들은 서북청년단이란 이름으로 공산당을 반대하며 이승만에게 달라붙었다. 이렇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근대의 역사가 이념적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문제는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 갈등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더 많은 피를 후세가 치러야 한다. 과거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야 이런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었다. 하지만 작금은 모든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 매우 민감하고 역사를 아는 사람은 자괴감마저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놀라운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나 행복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영향력 있는 미국 유튜버 ‘마크 앤슨’이 한국인에 대한 분석을 내놨다. 그는 “한국인들이 20세기 급속하게 근대화와 민주주의를 이룩한 특별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한국인은 자신들이 이룩한 대단한 성과를 자부심이 아닌 유교와 자본주의의 나쁜 점으로 스스로 자학적 평가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부의 균형이 깨지며 자본주의가 만나면서 만들어진 사회적 현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청년이 집을 사지 못한다던가, 결혼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를 가진 자들은 끝없이 가치를 높여 결국 자신과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청년들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종족 보존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대한민국 내에 만연한 현실이 되었다. 주변에 젊은 친구들과 얘기해 보면 왜 내가 고생하며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는 단순히 가정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복한 가정의 경우도 같은 현상이 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이 역사 청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이렇게 묻고 지나가면 다시 나라를 잃는 날이 오면 다시 나라를 배신하는 사람은 심판이 없었고 권력을 잡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또 역사가 반복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회 양극화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순히 가난한 자와 부자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면 근본을 해리하게 된다. 이런 말이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가난하고 나라를 팔면 3대가 잘 산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나라가 아직 이런 역사적 인식에 정당한 상과 벌이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축산의 기운에 따라 나라에 올바른 가르침을... 평산 책방을 다녀오며 홀로 사색에 잠겼던 생각들이다. 평산마을은 매우 조용하고 한눈에 보기에도 기가 흐르는 땅이었다. 필자는 풍수와 관련 지식이 없기에 당연히 필자 개인적 사견임을 밝힌다. 영축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평안함이 깃든 장소로 보였다. 영축산(靈鷲山)은 취서산(鷲栖山)으로도 불린다. 축과 취는 모두 같은 자로 ‘독수리 취’로 쓰인다. 그러나 불교적인 용어 ‘축’으로 읽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이는 석가모니가 인도 마가다국에 있던 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산이 영축산이다.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어 한글로 영축산·영취산·축서산·취서산 등으로 혼용되어 부르고 있다. 법화경은 원뜻으로 '백련화(白蓮華) 같은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이며 예로부터 제경(諸經)의 왕으로 생각되었다. 또 초기 대승경전(大乘經典) 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듯 법화경의 올바른 가르침에 따라 나라가 올바른 길을 가고 국민이 건강하고 자부심이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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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2
  • 송광사(松廣寺)로 향한 발길을 따라
    송광사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曹溪山)에 자리 잡고 있다.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사방을 병풍처럼 산에 둘러싸여 아늑한 명당자리에 위치한다. 삼보(三寶)는 불교의 신행 귀의 대상인 불(佛)·법(法)·승(僧)을 가리키는 말로 통도사가 불(佛), 해인사가 법(法), 송광사가 승(僧)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곳 송광사에는 유심히 보면 어느 절에나 있는 석등과 석탑이 없다. 우화각에 하나 달린 풍경을 제외하면 풍경도 없어 송광사 삼무(三無)라 말한다. 석등과 석탑이 송광사 풍수지리상 터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이라 무거움을 상징하는 석탑과 석등을 세우면 가라앉을 수 있다. 또 풍경 소리는 스님의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 한다. 송광사는 창건에 대한 자료는 정확히 없다. 그러나 송광사사적비(松廣寺事蹟碑)와 승평속지(昇平續誌)에 보면 신라 말에 혜린 대사(慧璘大師)가 창건하여 당시 길상사(吉祥寺)라 불렸다. 승려 수는 3·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이에 대한 창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를 설명하면 신라 말의 고승 혜린 대사가 제자들과 함께 산천을 돌며 수행했다. 그런데 제자들과 더불어 역병에 걸리고 말았다. 제자들은 꼼짝없이 산속에서 병으로 죽는 것에 두려워 떨고 있었다. 이때 혜린 대사가 제자들을 다독이며 이 고통을 참아야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 독려했다. 이후 기도를 위해 정결한 장소를 찾으니 마침 눈앞에 큰 연못이 나타났다. 그리고 못가에는 문수보살의 돌부처가 있었다. 혜린 대사는 문수보살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면서 돌부처 앞에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마지막 기도일 꿈에 석가여래가 나타나 “너는 더 배울 불도가 없다. 그러니 새로운 절을 세워 중생구제를 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때 혜린 대사가 역병으로 죽어가는 제자들을 살려달라고 했다. 이에 석가여래는 “모든 시련이 끝났으니 안심하라”라고 했다. 이에 감사한 마음으로 혜린 대사가 합장 배례하고 눈을 뜨니 석가여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제자들의 역병이 다 나았다는 함성이 들리며 돌부처가 늙은 스님으로 변했다. 늙은 스님은 자신이 석가여래의 분부를 받고 왔다면서 불보(佛寶) 세 가지[붉은 가사 한 벌, 향나무 불발(佛鉢), 불두골(佛頭骨) 한 조각]를 건네주었다. 라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이후 1200년(신종 3)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이곳으로 옮기며 정혜결사(定慧結社:불교계 정화 운동. 종래의 불교가 세속화된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통합을 추구)를 추구하였다. 몇 년 뒤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개명했다. '寺'가 아닌 '社'를 붙인 것에 대해 불교에서 해탈·열반을 목표로 뜻을 같이하며 수행·정진하는 모임을 가리키는 '결사'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 뒤 그의 제자였던 혜심(慧諶)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연이어 이곳 송광사에서 배출되며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삼보사찰(三寶寺刹)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가 1828년에 지은 “연천옹유산록”이다. 여기에서 홍석주는 “불가에서 말하기를, 동국의 사찰에 삼보가 있으니, 통도사에는 부처님 두골(頭骨)이 있으므로 불보라 하고, 해인사에는 대장경이 있으므로 법보라 하고, 송광사는 승보라 하는데 보조국사 이후 16 국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19세기 이전에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불일암(佛日庵) 무소유를 주장하신 법정 스님의 숨결을 느끼며 송광사에 오르다 보면 처음 갈림길 왼쪽은 불일암(佛日庵)으로 오른다. 불일암은 법정(法頂) 스님(1932~2010)이 17년간 머무셨다는 작은 암자다. 1992년에 이곳을 떠나 강원도 작은 오두막에서 홀로 수행하셨다. 이후 2010년 서울 길상사에서 입적한 후 이곳 송광사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산골 했다. 불일암은 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본디 이곳은 16 국사 중 7대 자정 국사가 창건한 자정암이 있던 터다. 불일암을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르다. 법정 스님이 걸었다던 무소유의 길이 펼쳐진다. 불일암을 오르는 길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지며 작은 개울이 흐르며 맑은 물소리가 난다. 20여 분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뿌리를 드러낸 나무 사잇길이 있다. 그리고 돌계단이 시작되는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불일암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법정 스님은 1970년대 초반 불교계 인사 중에는 가장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했다.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으로 박해받을 때마다 증오심이 생기며 수행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며 불일암에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스님은 폐허이던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불일암이란 편액을 걸었다. 스님은 불일암에서 한 달에 한 편의 글로 세상과 소통했다. 그리고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아 사찰 수련회의 시금석을 놓았다. 작은 암자 댓돌에 스님이 신었다던 삭은 고무신이 놓여있다. 작은 암자 왼쪽으로 나무 테이블과 나무를 잘라놓은 의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암자 우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정 국사 부도 묘광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암자를 한단 내려가면 스님의 청빈한 삶을 보여주듯 텃밭이 꾸며져 있다. 불일암을 뒤로하고 송광사라 향하는 산등성이를 넘다 보면 감로암(甘露庵)이 있다. 감로암은 송광사의 제6대 원감 국사 충지(冲止)가 창건한 사찰이다. 일찍이 충지가 김해 감로사(甘露寺)에서 수행하였던 것을 기념해 이름을 ‘감로암’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감로암은 총림의 4개 기관(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중 염불원이 있다. 감로암을 지나 구불구불 길을 내려오면 부도전을 앞에 보조국사 비가 있다. 이 비는 보조국사 지눌의 출가 이후 행적과 업적을 적은 비석이다. 1210년 당시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행장을 모아 제자 혜심 중심으로 왕에게 탑비를 세울 것을 주청해 세웠다. 그러나 이후 어떤 연유에서 파괴되었고 현재 탑비를 1678년(숙종 4년)에 다시 세웠다. 부도전 옆으로 율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율원이 있다. 송광사(松廣寺)로 향해... 조계산(曹溪山) 이란 이름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 중국의 대감 선사가 당나라 불교의 제6대 조종이 되었다. 대감 선사는 황제에게 매화나무 인장을 받아 허리에 차고 황금 지팡이를 앞세우며 영남지방의 소조 부의 조 씨 마을에 이르렀다. 그 마을의 촌장인 조서량과 마을 사람들이 평상시 대사님의 덕을 흠모하였던 터여서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가까운 쌍봉산 큰 골짜기에 수나라 말에 전쟁으로 불타 폐허가 되어 있는 보림의 옛 절터(계림)에 절을 세우고 스님을 모셨다. 이후 대감 선사(혜능 스님) 조계산에서 40년간 설법했다. 대감 스님이 일으킨 선풍을 조계선(曹溪禪)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인 조계종의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조계산 송광사는 불교계 새로운 전통을 확립해 선종 사찰의 근본 도량 역할로 보조국사를 조계종의 실질적 시조로 보기도 한다. 공식적으로는 도의 선사가 조계종의 시조로 돼 있다. 대사가 계신지 아홉 달 정도 된 이후 떠나면서 조 씨의 은혜 보답을 위해 산의 이름을 조서량의 ‘조’와 쌍계의 ‘계’를 한자씩 따서 ‘조계’라 지었다. 이처럼 중국의 ‘조계’가 태어난 유래라고 전해오고 있다. 위치는 지금의 곡강현의 동남쪽 약 12km 지점인 광동성과 호남성의 경계에 있는 커다란 산줄기 남쪽 쌍봉(산) 밑 골짜기에 있다. 순천의 조계산은 선암사 쪽과 송광사 쪽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두 사찰과 산의 이름의 변천을 살펴보면 송광사는 효령봉을 주산으로 송광산·길상사(신라), 송광산·수선사(고려), 조계산·송광사(조선)라 변천했다. 선암사는 장군봉을 주산으로 청량산·해천사, 청량산·선암사, 조계산·선암사로 변천한 기록이 있다. 송광사는 절 이름에 대해 세 가지 설화 첫째. 18명의 큰스님이 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송광사의 '송(松)'을 풀어 보면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며 18명의 큰스님이 불법을 만천하에 펼 절이라는 뜻이다. 둘째로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연관된 전설로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다. 그랬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했다. 육당 최남선이 이 전설을 토대로 송광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로 해석하고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셋째는 예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다. 그래서 송광산이라 불렀고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산이 솔갱이(‘소나무’ 사투리)가 많아 ‘솔메’로 부르고 광(廣)은 언덕을 의미하는 강(岡)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광사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1902년에 고종의 요청으로 성수전(현 관음전)을 건립한 이후에 설치했다. 성수전은 과거 황실 기도처였으며 성수전이 있는 사찰이라 예우를 한 것이다. 일주문에 달린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曹溪山 大僧禪宗 松廣寺)란 현판을 지나면 곧바로 고향수(枯香樹)가 발길을 끈다. 고향수는 지눌 스님이 처음 송광사에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다. 스님은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爾我同生死 이아동생사 我謝爾亦然 아사이역연 會看爾靑葉 회간이청엽 方知我亦然 방지아역연 너와 나는 같이 살고 같이 죽으니 내가 떠날 때 너도 떠나고 너의 푸른 잎을 다시 보게 되면 나도 그런 줄 알리라” 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님이 살아있는 동안 잎이 무성하게 자라다 스님이 입적하자 말라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제자들이 마른 향나무에 다시 잎이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고향수 뒤쪽 척주당과 세월각 이란 작은 사체가 있다. 이곳은 죽은 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곳이다. 이곳에 먼저 죽은 자의 위폐를 두고 법당으로 가기 전에 세속의 때를 벗는 곳 즉, 남녀 위폐를 각각 척주당과 세월각으로 나뉘어 정화하는 곳이다. 삼청교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 해볼까. 이제 삼청교(三靑橋)를 통해 송광사 경내로 들어간다. 삼청교는 1976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삼청교는 능허교(凌虛橋)라고도 불린다. 「송광사성공중창록(松廣寺成功重刱錄)」에 의하면, 이 홍교(虹橋:네모난 돌 19개로 무지개 모양)는 1707년(숙종 33)에 다리를 만들고 그 뒤 70여 년이 지난 1774년(영조 50)에 보수했다. 삼청교 밑으로 흐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19개의 4각 장대석을 각지게 맞춰 홍예(虹蜺)를 이루고 양쪽 측면으로는 막돌이 아닌 4각 판석을 쌓아 올렸다. 또 홍예 천장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돌이 나와 있다. 이 홍교(虹橋)는 다리와 위에 우화각(羽化閣)이라는 건물을 세워 사람의 통행과 건물이라는 이중효과를 내며 독특한 구조이다. 삼청교를 건너다보면 입구의 모양은 여덟 팔(八)자의 모양을 하고 있고 출구의 모양은 사람인(人)의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우화각에 걸린 송광사(松廣寺) 편액은 근대 서화가·사진가로 유명한 해강(海崗) 김규진(金奎鎭:1868-1933) 선생이 글을 쓰고 과 고종의 대령숙수 명월관 창립자로 유명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1871-1942) 난과 대나무를 쳤다는 작품이다. 그리고 삼청교와 우화각은 도교적 색채가 강한 이름이다. 우화각 안으로 천왕문이 붙어 있다. 삼청이란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하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세 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다른 능허교(凌虛橋)는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화는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라는 의미로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온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의 구절이다. 이는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라는 뜻이다. 삼청교와 연결된 왼쪽이 임경당(臨鏡堂)이다. 이는 ‘거울 같은 물가에 임한 집’으로 물가로 튀어나와 물에 살포시 들어앉은 정자는 육감정(六鑑亭)이다. 몸은 물질인 눈(眼)·귀(耳)·코(鼻)·혀(舌)·피부(身)와 정신작용의 마음(意)을 더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에서 비롯된다. 육감정(六鑑亭)이란 정자가 이 모두를 느끼는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송광사 최고의 경관으로 꼽히고 있다. 우화각 우측으로 하천가(신평천)에 축대를 쌓아 2층으로 기둥을 세워 누각 형태의 건물이 침계루(枕溪樓)이다. 침계루는 ‘계곡을 베고 누워있는 것’을 의미한다. 삼청교나 밖에서 보면 중층으로 보이지만 안쪽에서 보면 누각이 아닌 대형 단층 건물로 보인다. 안쪽의 건물 현판은 사자루(獅子樓)라고 걸려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전방에 ‘종고루’가 보인다. 원래 천왕문과 대웅보전 사이에 해탈문, 대장전, 종고루, 법왕문이 있었다. 1951년에 전쟁으로 공비에 의해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 ‘종고루’만 복원돼 아쉬움이 많다. 이때 대웅보전도 함께 소실되어 1961년 복원해 1988년 중창하며 규모를 더 키웠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바라보며... 대웅보전은 정면 일곱 칸과 측면 다섯 칸의 아(亞) 자형 전각이다. 특히 대웅전 기둥이 주련에 걸쳐 있지 않다. 이는 대웅전뿐 아니라 전각 대부분이 주련이 없다, 이는 복원 시 완벽하지 않은 지식을 경계해 주련을 걸지 않았다. 대웅보전 외벽 벽화는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덕목인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상징하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이 여섯 가지 수행으로 사바세계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수단을 말한다. 첫째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은 일체 탐욕을 떠나 남을 대할 때는 희생과 봉사와 헌신의 정신으로 주고 베푸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둘째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은 계율을 지켜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되 피해는 주지 말며 사물에 있어서 후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은 몸과 뜻과 입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한 행동을 참고 이기며 오로지 자비로운 마음이면 모든 일을 이루리라. 넷째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은 일체 부정과 불법에 관여하지 말 것이며 바른 일을 위해서는 끈기 있게 노력하라. 다섯째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은 잡된 번뇌와 망상을 버리고 깨끗하고 맑고 티 없는 마음으로 삼매에 들도록 노력하라. 여섯째 지혜바라밀(智慧波羅密)은 부처님의 법과 자비에 입각 오로지 선정으로 미련하고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하는 지혜를 갖도록 노력하라. 이다, 대웅보전 외벽 벽화에는 다섯 번째 선정에 달마대사의 9년 면벽 장면과 여섯 번째 지혜에는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담진 물을 먹은 뒤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현재 대웅전에는 과거 부처님인 연등불과 현재 부처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과 문수·보현·지장·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승보전의 비사리구시 승보전은 송광사를 상징하는 법당이다. 1988년 대웅보전 중창 시 예전 전각을 옮겨 승보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승보전 옆에는 ‘비사리구시’라 불리는 나무 밥통이 3개가 있다. 이는 송광사의 3대 보물 중 하나다. 기록에 의하면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해 만들었다. 나라의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으로 약 4천 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쌀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송광사의 ‘비사리구시’에 대한 유명한 설화가 있다. 그 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순천 땅 어느 고을에 할머니가 살았다. 일찍 남편을 여읜 할머니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았다.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할머니는 송광사를 오가는 데만 족히 반나절이 걸리는 데도 불공드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70이 되었어도 할머니는 무척 정정해 다들 처녀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점심을 먹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숨졌다. 너무도 조용히 숨져서 자식들은 처음엔 할머니가 돌아가진 지도 몰랐다. 죽은 할머니는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망자가 줄을 서 있었다. 할머니는 궁금해서 앞 사람에게 물으니 ”염라대왕이 재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염라대왕이 순천 송광사를 무척 좋아하여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염라대왕의 물음에 너도나도 가보았다며 염라대왕 앞에 나섰다. 염라대왕은 "송광사의 비사리구시 길이가 얼마며, 높이나 폭이 얼마나 되느냐?" 물었다. 그러자 가본 적이 없는자들이 우물쭈물 엉터리로 대답했다. 염라대왕이 크게 노하며 지옥으로 보냈다. 앞으로 나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역시 염라대왕이 비사리구시의 길이, 높이, 너비를 물으니 할머니가 대답했다. 할머니는 "살아 있을 때 해마다 초파일에도 가보고 보조국사님 제삿날에도 가보고 여러 번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바사리구시를 보고도 재보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정직한 사람이라며 크게 칭찬하며 좀 더 살다 오라 하였다. 할머니가 눈을 떠보니 아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죽었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자 아들이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아들에게 저승에게 겪은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는 즉시 송광사에 있는 비사리구시를 재러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그길로 아들과 함께 자를 들고 송광사에 가서 비사리구시를 재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렸다. 방법을 찾던 아들은 명주실로 길이, 높이, 너비만큼 각각 끊어 할머니의 빨간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그러면서 "어머니, 나중에 돌아가셔서 염라대왕이 물으면 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어 길이는 요만큼, 높이는 요만큼, 너비는 요만큼입니다라고 답하세요"하였다. 할머니는 100살 넘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인근에 비사리구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후로 한때 이곳에서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송광사 비사리구시를 자로 잰 후 실을 끊어 빨간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에 노인들이 많이 찾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송광사는 전각이 아주 많다. 과거 80여 동의 전각이 있었다. 그러나 외침과 화재 등에 의해 소실된 전각이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그래도 현재 50여 동이 복원되었다. 송광사는 수행을 우선 하는 승보사찰이다, 그래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는 점은 아쉬움이 있다. 성수전이 관음전이 된 사연 관음전은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聖壽 : 임금의 나이, 望六 : 51세)을 맞아 사액(賜額, 임금이 내린 편액)된 황실 기도처였다. 3단의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로 팔각지붕으로 건조되었다, 건물 외관은 빗살로 단장된 4분 합의 창호와 중앙 석축 앞 계단 소맷돌이 거북 모양으로 특이하다. 그리고 건물 외벽 3면에 십장생(十長生)을 도안하고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그리고 전각을 ‘성수전’이란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내렸다. 황실 기도처였던 까닭에 국내 어는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벽화가 있다. 가운데 불단 좌·우측 벽에 정1품과 정2품 신하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 있다. 어간 좌우 기둥 위에는 바깥으로는 용두(龍頭:용 머리)와 내부에는 용미(龍尾:용 꼬리)를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관세음보살 좌우에 태양과 달은 고종과 명성왕후를 상징한다. 성수전은 이후 1957년 부근 관음전이 크게 낡아 이를 해체하면서 관음보살을 이곳으로 옮겨 안치하며 관음전으로 바뀌게 됐다. 또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62년 비운의 왕자인 경안군(慶安君) 내외의 수명장원(壽命長遠)을 위해 발원 조성한 불상이다. 경안군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는 할아버지 인조에 의한 독살과 어머니 강빈 또한 인조에게 사약을 받았다. 또 소현세자의 첫째와 둘째가 제주 유배 생활 중 사망하고 경안군만 살아남아 효종 때 복권됐다. 복장 유물이 경안군의 것으로 추정되며 쪽빛 저고리와 발원문 등이 나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웅보전 뒤편 하사당(下舍堂)은 1963년 지정된 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주로 선실(禪室)로 사용되었다. 조선 말기 수선사(修禪社)에서 정진하는 선객(禪客)이 공양하던 곳이나 응진전(應眞殿)의 일을 맡은 임원들이 묵는 노전(爐殿)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남향으로 자리한 건물의 왼쪽 2칸은 온돌방으로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온돌방에는 앞쪽에 툇마루가 놓여있고 천장은 종이 천장이다. 부엌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으로 지붕 밑의 가구(架構)가 모두 보인다. 곧 대들보는 툇마루와 방 사이에 세운 고주(高柱)부터 뒷면의 평주(平柱)까지 통보[通樑]로 걸렸다. 건물 안의 살미첨차는 위아래의 것이 합쳐져 보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인 보아지[樑奉]로 되었다. 옆면에는 덩굴무늬[唐草文]가 조각되었다. 부엌 칸의 지붕 위에는 작은 맞배지붕을 올린 네모난 환기 구멍이 나 있다. 이는 다른 건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시설이자 요사(寮舍)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국사전에서 느끼는 16 국사의 기운 국사전은 송광사 전각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건물이다. 대웅전 뒤편 오른쪽에 있는데 담장 등에 가려 건물 일부만 볼 수 있다. 국사전은 송광사에서 배출한 16 국사의 진영을 모신 곳이다. 1369년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지어진 건물로 별로 남아있지 않다. 1971년 국사전을 해체 보수할 때 발견한 ‘상량문’을 통해 1501년 ‘조사영자전(祖師影子殿)’을 개창(改創)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1558년 중수했다. ‘송광사지’에는 ‘자음당(慈蔭堂)’으로도 불렸다고 기록되었다. 1722년(경종 2), 1807년(순조 7), 1918년에 각각 중수와 석축을 1926년 고쳐 쌓았다. 이후 1962년, 1972년, 1990년에도 전각을 수리하고 현재 2018년에 새로 조성한 16 국사 진영을 봉안했다. 하지만 1995년 송광사 배출 16 국사의 진영을 도둑이 들어 13점을 도난당한 아쉬운 일도 있었다. 세월각과 척주각에서 관욕을 마친 후 우화각을 건너 사찰안으로 들어선 영가는 지장전(地藏殿)으로 다시 모셔지게 된다. 지장전에서 영가천도의 재가 이뤄진다. 승보전과 함께 대웅보전의 좌·우 법당으로 사용되는 지장전은 1988년 8차 중창기에 중창된 건물이다. 중건 이전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다. 3단의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원형 주초 위에 배흘림기둥을 얹었다. 건물 전면은 2, 4분 합의 빗살문을 창호로 가설해 전면을 제외한 3면은 판벽으로 처리한 특이한 모습이다. 3면에는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를 비롯해 인로왕보살도(引路王菩薩圖)ㆍ동자도(童子圖) 등 수많은 불교 벽화가 단청 되어 있다. 내부는 고주 없이 5량의 가구로 처리하여 넓은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ㄷ’자형 불단 위에는 목조 지장보살좌상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저승의 시왕 등 명부 권속들이 협시해 있다. 후불탱으로는 1987년 금어 조연우(曺延宇)가 그린 지장탱(地藏幀)을 비롯하여 1963년 일섭 스님이 그린 시왕탱(十王幀) 등이 봉안되어 있다. 가장 작은 불전을 바라보며 약사불(藥師佛)을 봉안한 불전(佛殿)을 약사전이라 한다. 송광사의 약사전은 경내 가장 규모이다. 1974년 중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1631년(인조 9)과 1751년(영조 27)에 각각 중건됐다. 정면 1칸과 측면 1칸 규모로 단층 팔작지붕으로 4면이 모두 1칸씩으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 건물이다. 후불탱화로는 1904년에 조성된 석가모니 후불탱을 모셨다. 건물 규모에 비해 기둥이나 부재들은 굵직한 목재를 사용했다. 처마 밑을 받친 공포(栱包)가 이출목(二出目)으로 앙서(仰舌: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의 수는 3개로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내부 구조는 대들보가 없고 공포는 삼출목(二出目)으로 네 모퉁이의 귀살미부터 부재(部材)가 중앙에서 서로 교차해 천장을 이룬다. 문은 정면에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고 측면에 출입문을 내고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조각 수법을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약사전은 건축학적 매우 중요한 특성이 있어 현재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전(靈山殿)의 다른 이름은 팔상전(八相殿)이다. 약사전과 나란히 서 있고 조선 후기의 건물로 보물 제303호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전체적으로 약사전과 비슷한 모습이다. 내부에 목조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의 영산회상도를 후불탱으로 배치했다. 또한 삼면 벽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탱이 묘사돼 있다. 영산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되었다. 상호와 신체 비례가 원만한 조선 후기 목불 좌상이다. 얼굴이 네모 넓적한 형태로 턱선은 둥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반월형 눈썹 그리고 큰 눈과 코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도톰한 입술에 먼지 미소는 매우 온화한 느낌을 준다, 본존 후불탱인 영산회상도는 1725년(영조 1)에 조성됐다. 가로 186.5㎝, 세로 214㎝의 비단에 채색했다.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그 청중들을 여실히 표현했다. 또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다. 송광사 기록에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우고 영조 12년(1736)에 수리했다. 현재 건물은 1973년에 보수했다. 천자암을 지은 담당국사는 정말 천자의 아들이었을까. 천자암(天子庵)은 송광사의 제9대 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했다. 담당(湛堂)이 중국 금나라 천자(天子)의 셋째 아들이었다. 보조국사가 금나라 장종(章宗) 왕비의 불치병을 치료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왕자 담당을 제자로 삼아 데리고 귀국한 뒤 담당이 천자암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천자암은 무엇보다 쌍향수(곱향나무)로 두 그루가 나란한 쌍처럼 서 있고 주요 줄기가 몹시 꼬여 가지를 밑으로 내려뜨리고 나란히 서 있다. 혹자는 이 모습을 흡사 스승과 제자가 서로 공경하며 절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보기도 한다. 특히 곱향나무는 중국과 백두산에 한정해 자생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천자암의 곱향나무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곱향나무이다. 쌍향수는 비사리구시, 능견난사와 더불어 송광사의 3대 명물이다.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오며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았다. 이때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서 가지가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해 자라는 듯한 오늘날의 쌍향수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자암은 그 뒤 1633년(인조 11) 설묵대사(雪默大師)가 중창하고 1730년(영조 6) 자원대사(自願大師)가 중건했다. 1740년 지수(指修)·자징(慈澄) 등이 만세루(萬歲樓)를 중건하고 1797년(정조 21) 제운(霽雲)·두월(斗月)이 중건하며 1893년(고종 30) 구연대사(九淵大師)가 성산각(星山閣)을 신축했다. 1924년 기산(綺山)·해은(海隱)이 중수, 1939년 금당화상(錦堂和尙)이 칠성각을 건립했고 1992년에 법당을 지었다. 현재 법당을 비롯해 나한전·산신각·법왕루·요사 등이 갖춰져 있다. 암자의 뒤쪽 쌍향수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이 나무는 수령 800년에 높이 12.5m에 이른다. 그러나 보조국사와 담당국사의 연대적 차이가 100여 년이나 차이나 이 전설을 믿기는 어렵다. 담당은 송광사 16 국사 중 9대 국사로 행적과 출생, 생몰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천년 사찰을 돌아보며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이 무엇을 그리 집착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신 법정 스님도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만을 남겼다. 다음 이에게 무엇인가 남기는 것,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이 아닐까? 굽이굽이 굽어진 언덕길을 오르고 내리며 이리 굽은 길들이 모두 이유가 있어 굽어진 길로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굽어진 길은 편히 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산을 직선으로 오르면 오르다 지친다. 굽이굽이 돌아가면 조금 더디지만 끝까지 갈 수 있다. 우리 인생도 굽어 가는 것을 낙담할 것이 아니라 내가 견딜 수 있게... 또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내어주고 있다는 것을... 굽은 것을 시련이라 말하면 아마도 선인들이 말한 삶은 견딜만큼 시험이 온다는 말이 이 뜻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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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1-24
  • ‘이 가을, 당신을 위한 레드카펫’…선운산 꽃무릇 활짝
    바라볼수록 뜨겁게 돋아나는 열정과 그리움. 선운산 계곡 깊숙이 레드카펫이 깔렸다. 가느다란 꽃줄기 위로 여러 장의 빨간 꽃잎이 한데 모여 말아 올린 자태가 빨간 우산을 펼친 것만 같다. 살펴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꽃들은 수수하게 잘도 피었다.추석을 앞두고 고창 선운산 계곡 사이사이 꽃무릇의 꽃대가 올라오고 있어 관광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15일 고창군 선운산공원팀에 따르면 선운산 꽃무릇의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해 이번 주말께부터 개화해 화려한 군무를 펼칠 전망이다. 꽃무릇은 통상 개화 후 열흘정도가 절정기로 알려져 있다.선운산 꽃무릇은 5월께 잎이 나왔다가 7월께 지고 나면, 9월초 꽃대가 솟아난다. 9월 하순이 되면 꽃이 붉게 피어오른다. 한 뿌리이면서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화엽불상견 상사초(花葉不相見 想思草)’의 그리움과 아련함으로 회자되는 꽃이다.가려진 모습과는 달리, 뿌리에는 코끼리도 쓰러뜨릴 정도로 강한 독이 있다. 그 옛날 단청이나 탱화 보존에 유용하게 쓰기 위해 절 주변에 꽃무릇을 많이 심었다고 전한다. 고창군 산림공원과 박진상 과장은 “선운산 곳곳에서 꽃무릇을 감상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며 “고창 선운산을 찾아오시는 관광객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시설물 점검 등에 각별히 신경 쓰겠다”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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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9-19
  • [포토] 인제 진동계곡의 여름
    인제 기린면 1리 추대의 진동계곡, 100대 명산 점봉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명품 계곡이다.여름 더위를 가시려고 사람들이 계곡을 많이 찾아 붐빈다.근처 명소에 진동리 산촌체험학교가 방문객들에게 인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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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2-08-10

실시간 여행 기사

  • 그림과 서체로 예술혼을 불태운 추사 김정희를 기리다
    [제주 서귀포시 추사관과 유배지] 제주 서귀포시 대정읍 안성리에는 추사 김정희 유배지가 있다. 당시 거주했던 초가는 마을 청년들에게 학문과 서예를 가르친 곳이다. 뛰어난 예술가를 접하지 못해 지식에 목말라 있던 가난한 젊은이들에게 추사 김정희는 큰 스승이었으리라. 추사관에는 작품 세계관, 세한도를 통한 예술관, 최후의 작품까지 만나볼 수 있다. 대정읍 일대는 김정희가 추사체를 완성한 역사적 공간이기도 하다. 조선후기 실학자이자 서화가로 뛰어난 작품을 남겼고, 불교학에도 깊은 영향을 주었다. 청나라 유학자들에게도 널리 이름을 떨친 김정희는 당정에 휘말려 1840년부터 1848년까지 제주도에 유배되었다. 어릴때부터 천재적인 예술성을 타고난 그는 부유하게 살았던 당대 명문가였기에 척박한 미개척의 제주 생활은 얼마나 험난했을지 짐작해볼 뿐이다. 고통스런 현실속에서 예술가가 느꼈을 인간에 대한 배신과 고독을 그림과 서체로 남겼다. 특히 세한도는 제주도 유배 시절, 외롭고 힘없는 자신의 처지를 예술혼으로 불태운 대표작이다. 시리도록 새하얀 토담집 한채와 그 집을 둘러싼 네 그루의 소나무와 잣나무가 쓸쓸하다. 그림의 중심에는 백송이 보인다.썩은 몸통에 구부러진 가지 하나가 추사의 이름을 받치고 있다. 백송의 절개를 이상적에 비유하였고, 절망스런 유배지에서 추사가 보내는 구조 신호였을지도 모른다. (장무상망) 인장으로 마무리하는데 뜻은 "오래도록 서로 잊지 말자"로 제자 이상적에게 주었다. 이상적은 귀한 서책을 보내는 등 물질적 정신적 성심을 다하였기에 스승이었던 추사의 선물이었다. 세한도를 받은 이상적은 중국 연경으로 가져가 문인들과 시사회를 열었다. 세한도를 칭송하는 찬시를 받아 그림에 붙여 긴 두루마기 형태가 되었다. 또한 추사의 편지와 보석같은 우리 선조들의 발자취를 감상할 수 있는 추사관은 유배 당시의 모습을 보존해 두고 있다. 추사의 동상을 바라보면 인생은 짧고 예술은 길다는 말에 공감하게 된다. 모든 세상의 권력과 이치를 초월한듯 굴곡많은 한평생 오로지 독창적인 추사체를 완성한 추사 김정희. 그림 속 절제된 기교로 고뇌하며 이룬 문화의 경지에 감탄이 절로 나온다. 벗들의 신의와 우정은 척박한 유배지에서 점점 노쇠해가는 대가를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도록 하는 힘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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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3
  • 가장 제주다운 친환경 섬---가파도에는 청보리 푸른 바람이 있다.
    [출처: 브런치 스토리-가파도 백팩킹 이야기] 대정읍 모슬포 운진항에서 배를 타고 20여분 남짓 가파도다. 동쪽으로 한라산을 비롯한 5개의 섬이 병풍처럼 둘러있고 마라도가 보이는 섬 가파도. 18만평 청보리 물결이 장관을 이룬 가파도 보리는 다른 지역보다 2배 이상 자라는 제주의 향토 품종이다. 최첨단 마라도에서 불어오는 살랑살랑 봄바람이 3월부터 5월까지 보리의 푸른 생명력을 키운다. 거센 바닷 바람과 거친 땅이 일구어낸 청보리는 수많은 고난을 이겨낸 우리 민족성과 닮아있다. 가파도는 위에서 내려다보면 가오리 모양을 하고 있어 가파도가 되었다는 설이 있다. 바닷 바람을 버틴 나즈막한 집들과 어우러진 파릇한 청보리는 날마다 하늘에 닿을만큼 쑥쑥 자라고 있다. 봄꽃들도 알록달록 청보리 축제 찾아온 발길을 여유롭게 한다. 눈을 돌리면 저만치 노오란 유채 물결이 출렁이고, 손끝에 닿는 청보리는 도시를 떠나온 이들에게 쉼을 선사한다. 자전거를 타고 가파도를 달려도 좋다. 가파도에서 바라보는 제주는 손에 닿을 듯하다. 가파도에서 내려 2시간 섬을 둘러보면 제주로 돌아가는 배를 타야 한다. 짧은 2시간동안 바다에 둘러싸인 섬길을 따라 걷다보면 교문없는 가파 초등학교를 중심으로 아담하고 정겨운 마을이 펼쳐진다. 쉬임없이 돌아온 바람이 여행객의 느긋한 발길에 머무는 가파도! 푸르른 파도처럼 일렁이는 청보리의 몸짓은 새 봄의 인사처럼 싱그럽다. 순수하고 꾸미지 않은 자연 그대로의 섬으로 떠나고 싶다면 가파도로 가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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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20
  • 제주 탐방
    서귀포시 대정읍 상모리에 위치한 송악산은 해안을 낀 산책로를 따라 둘레길이 유명한 명소이다. 99개의 작은 봉우리가 모여있는 송악산 둘레길에서 바다 멀리 가파도, 마라도, 형제섬, 산방산과 한라산까지 볼 수 있다. 길이 가파르지 않아 아이들과 어르신도 걷기 편안하고 막힘없이 탁 트힌 전경에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다. 전망대로 향하는 길에는 운치있는 억새가 보이고, 한가로이 풀 뜯는 말들과 인사하며 걷는다면 도시에서 느끼지 못한 진정한 힐링을 느낄 것이다. 드디어 전망대 도착이다. 끝없이 펼쳐진 탁 트인 바다는 마음까지 긴 호흡으로 편안함을 선사한다.노송을 바라보며 걸어도 좋고, 바다를 눈에 담으며 걸어도 추억이 되는 송악산은 주변 편의 시설도 잘 구비되어 있다. 이중 분화구로 송악산 둘레길은 화산학적 보존 가치가 높은 자연 경관이다. 자연 그대로 보존하자는 환경 캠페인이 전개되면서 송악산 개발을 막기 위한 노력도 지속되고 있다. 해외 유명 휴양지 못지 않게 빼어난 자연 경관을 갖춘 송악산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잘 보존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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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3-05
  • 제주 탐방
    오름은 산봉우리라는 뜻으로 제주에서 통용되는 순우리말이다. 낮은 언덕같은 200m 이하의 나즈막한 봉우리로 남녀노소 누구나 무리없이 올라가기 좋은 코스다. 숲으로 둘러싸인 자연의 낭만이 살아있는 곳~~ "저지 오름"이 있다. 저지 오름은 제주에서도 아름다운 숲으로 유명하다. 닥나무가 많아 닥목오름으로 불렸으며 높이 390m, 둘레 1540미터로 제주 올레 13코스다. 단거리로 중장년층도 부담없이 오름을 즐길 수 있다보니 사계절 많은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다 저지 오름 둘레길을 걷다보면 숲의 편안함 가득 연이어 들려오는 새소리도 정겹다. 한경면에 위치한 저지 오름은 숲을 따라 숲 안으로 초대받는 느낌이 오묘하다. 숲인지 분화구인지 햇갈일만큼 무성한 초록으로 뒤덮힌 형태는 분원형 분화구로 파여있다. 숲의 경관에 감탄을 자아내며 자연석 돌계단을 따라 오르다 보면 정상 둘레길이 반겨준다. 오름 둘레길은 가족과 산책하기 좋으며 상록수림, 낙엽수림 울창하여 한여름에도 시원한 그늘 아래 피톤치드로 상쾌함을 만끽할 수 있다. 저지 오름 전망대에서 금악오름 한라산 당오름 산방산을 멀리 바라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바라보는 제주도의 풍경은 사진속 그대로 추억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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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4
  • 평산 책방을 다녀왔다.
    문재인 전 대통령이 지난 23년 4월 25일 경남 양산 평산마을에 인근 주택을 사들여 책방을 열었다. 평소 책을 좋아했던 문 전 대통령은 자신의 SNS에 다양한 책을 소개했었다. 이 때문에 책방을 여는 것은 당연하다는 의견도 많았다. 지난 1월 말경 ‘평산 책방’으로 무심결에 발길이 돌려졌다. 평소 꼭 한번은 다녀와야겠다는 생각이 있었다. 몇 년 전 봉하마을을 다녀오며 많은 생각을 했다. 당시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혹여 남에게 들킬세라 서둘러 눈을 훔치던 기억이 새롭다. 길을 서둘러 떠났지만, 오후 4시가 조금 넘어 도착했다. 차를 마을 주차장에 대고 내리니 입구에 마을 아주머니 몇 분이 오미자차와 식혜를 팔고 계셨다. 아주머니 한 분이 친근하게 얼른 책방으로 가라 하신다. 마침 문 전 대통령이 책방에 계시는데 언제 사저로 올라가실지 모른다며 서두르라 친절하게 말씀해 주셨다. 퇴임 대통령이 일반인과 자유롭게 만날 수 있을까? 혹시라도 문 전 대통령을 뵐 수 있을까 서둘러 올라갔다. 마음이 급해서인지 책방으로 올라가는 길을 자세히 보지는 못했다. 물론 뵙고 나서 천천히 내려오며 그제야 보이는 다른 풍경을 발견할 수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평산 책방이란 간판이 보였다. 책방은 생각보다 아담했다. 아니 책방이라기보다는 어느 마을 집 안마당과 같은 모습이며 많은 사람이 둘러앉아 있었다. 왜 이리 사람이 많은지 어안이 벙벙했다. 평일이었기에 사람이 많지 않을 것이라 예상했는데 내 생각을 여지없이 벗어나며 문 전 대통령의 인기를 실감했다. 사실, 평시에는 이렇게 오래 계시지는 않는 듯했다. 내가 평산 책방을 찾았던 날은 현 국회의원과 총선 출마자와 많은 사람이 책방에 있음에도 스스럼없이 앞에서 대화를 나누고 계셨다. 무슨 대화를 나누는가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다만 편안한 얼굴로 대화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사진을 몇 장 찍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그 일행이 인사를 마치고 자리를 떴다. 이후 사진을 찍지 않은 사람이 있다면 지금 찍으라 해서 서둘러 사진을 같이 찍었다. 그러다 책을 한 권 사야겠다 싶어 책을 사고 서명을 부탁하니 서명은 안 하신단다. 그러며 계산대 옆에 문 전 대통령 성함과 평산 책방 로고 스탬프가 마련되어 있었다. 하긴 생각해 보니 많은 사람이 서명을 부탁하면 그것만으로도 시간이 부족할 듯 보였다. 그래서 그렇게 하는 이유는 바로 이해할 수 있었다. 마음이야 친필 서명을 직접 받고 싶었으나 그것은 나의 욕심 일터, 그러면서 다시 책을 들고 사진을 찍어 주셨다. 문 전 대통령과 악수하며 “건강하셔야 합니다.”이 한마디만을 전해드렸다. 이후에도 많은 사람이 사진을 같이 찍고 무엇인가 말을 전했다. 그런 문 전 대통령은 너무 인자한 모습이었다. 하지만 누가 알았을까? 그런 선량한 모습 안에 나라를 이끌었던 강단이 있다는 것을 말이다. 언뜻 보면 그냥 좀 알려진 작가가 책방을 내신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정치권의 셈법으론 다양한 해법이 나올 수 있지만 편안하게 국민과 만나는 이웃집 아저씨와도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이분 앞에 누가 보수 유튜버의 타겟이 되어 지독한 시달림을 받았다고 생각할 것인가? 필자는 그만큼 그분의 강한 정신세계를 엿볼 수 있었다. 평산마을에서 느낀 역사 청산의 필요성 문 전 대통령은 대통령직을 퇴임 후 기존 양산 매곡마을 대신 평산마을을 사저로 택했다. 이때 문 전 대통령과 함께 내려온 불청객 보수 유튜버들로 인해 전직 대통령 사저 주변 경호구역 확대까지 한동안 정치권의 주요 관심사였다. 대통령을 전직으로 둔 사람의 숙명일까. 우리나라는 좌·우 양극이 매우 심한 탓도 있다. 그럼 왜 이렇게 좌·우가 심하게 갈라져 싸우며 왜 정치뿐 아니라 국민까지 영향을 받을까. 이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 친일 청산이 제동에 걸렸기 때문이다. 인류 역사상 청산되지 못한 역사의 잔재가 너무나 깊이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순히 친일이 문제가 아닌 친일파가 권력을 잡고 근대사를 만든 것이 문제일 것이다. 얍삽했던 그들답게 이승만과 합작하여 나라를 엉망으로 만들었다. 지지 세력이 필요했던 이승만과 친일로 부를 창출했던 그들의 잇속이 맞아 들었다. 그리고 북한에서 쫓겨온 친일파들은 서북청년단이란 이름으로 공산당을 반대하며 이승만에게 달라붙었다. 이렇게 첫 단추가 잘못 끼워진 근대의 역사가 이념적 상처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역사를 바로 세우는 문제는 이렇게 시간이 지나도 갈등의 씨앗이 된다. 그래서 역사를 바로 세우지 않으면 더 많은 피를 후세가 치러야 한다. 과거 먹고살기 힘든 시절이야 이런 이야기를 귓등으로 들었다. 하지만 작금은 모든 국민이 고등교육을 받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이러한 문제에 매우 민감하고 역사를 아는 사람은 자괴감마저 가지고 있다. 대한민국 국민은 놀라운 경제발전에도 불구하고 자신감이나 행복함을 느끼지 못한다고 한다. 영향력 있는 미국 유튜버 ‘마크 앤슨’이 한국인에 대한 분석을 내놨다. 그는 “한국인들이 20세기 급속하게 근대화와 민주주의를 이룩한 특별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스스로 불행하다고 생각한다.”라고 했다. 한국인은 자신들이 이룩한 대단한 성과를 자부심이 아닌 유교와 자본주의의 나쁜 점으로 스스로 자학적 평가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청산되지 못한 역사로 부의 균형이 깨지며 자본주의가 만나면서 만들어진 사회적 현상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청년이 집을 사지 못한다던가, 결혼할 수 없는 환경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부를 가진 자들은 끝없이 가치를 높여 결국 자신과 위치가 다르다는 것을 확인시키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청년들은 인류의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인 종족 보존을 포기하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은 이미 대한민국 내에 만연한 현실이 되었다. 주변에 젊은 친구들과 얘기해 보면 왜 내가 고생하며 아이를 키워야 하는 이유를 찾지 못한다. 이는 단순히 가정사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복한 가정의 경우도 같은 현상이 있으니 말이다. 사실 지금 이 역사 청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또 어떤 의미가 있을지 잘 모를 수 있다. 하지만 역사를 이렇게 묻고 지나가면 다시 나라를 잃는 날이 오면 다시 나라를 배신하는 사람은 심판이 없었고 권력을 잡으면 된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렇게 또 역사가 반복될 것이 자명하기 때문이다. 사회 양극화의 시작은 이렇게 시작되었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단순히 가난한 자와 부자의 차이에서 시작되었다고 보면 근본을 해리하게 된다. 이런 말이 있다.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가난하고 나라를 팔면 3대가 잘 산다.”라는 말이 있다. 이는 나라가 아직 이런 역사적 인식에 정당한 상과 벌이 확고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축산의 기운에 따라 나라에 올바른 가르침을... 평산 책방을 다녀오며 홀로 사색에 잠겼던 생각들이다. 평산마을은 매우 조용하고 한눈에 보기에도 기가 흐르는 땅이었다. 필자는 풍수와 관련 지식이 없기에 당연히 필자 개인적 사견임을 밝힌다. 영축산의 정기를 이어받아 평안함이 깃든 장소로 보였다. 영축산(靈鷲山)은 취서산(鷲栖山)으로도 불린다. 축과 취는 모두 같은 자로 ‘독수리 취’로 쓰인다. 그러나 불교적인 용어 ‘축’으로 읽는 것이 적합하다고 본다. 이는 석가모니가 인도 마가다국에 있던 산에서 법화경을 설법했다는 산이 영축산이다. 영축산은 석가모니가 법화경을 설법한 고대 인도의 마가다국에 있던 산 이름에서 유래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한자 표기는 '영축산(靈鷲山)'과 '취서산(鷲栖山)' 두 가지로 표기되어 한글로 영축산·영취산·축서산·취서산 등으로 혼용되어 부르고 있다. 법화경은 원뜻으로 '백련화(白蓮華) 같은 올바른 가르침'이라는 뜻이며 예로부터 제경(諸經)의 왕으로 생각되었다. 또 초기 대승경전(大乘經典) 에서 가장 중요하게 여긴다. 이렇듯 법화경의 올바른 가르침에 따라 나라가 올바른 길을 가고 국민이 건강하고 자부심이 가득한 나라가 되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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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2-12
  • 송광사(松廣寺)로 향한 발길을 따라
    송광사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 조계산(曹溪山)에 자리 잡고 있다. 해인사 통도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사방을 병풍처럼 산에 둘러싸여 아늑한 명당자리에 위치한다. 삼보(三寶)는 불교의 신행 귀의 대상인 불(佛)·법(法)·승(僧)을 가리키는 말로 통도사가 불(佛), 해인사가 법(法), 송광사가 승(僧)에 해당한다. 그리고 이곳 송광사에는 유심히 보면 어느 절에나 있는 석등과 석탑이 없다. 우화각에 하나 달린 풍경을 제외하면 풍경도 없어 송광사 삼무(三無)라 말한다. 석등과 석탑이 송광사 풍수지리상 터가 연꽃이 물에 떠 있는 연화부수(蓮花浮水)형이라 무거움을 상징하는 석탑과 석등을 세우면 가라앉을 수 있다. 또 풍경 소리는 스님의 수행에 방해가 되기 때문이라 한다. 송광사는 창건에 대한 자료는 정확히 없다. 그러나 송광사사적비(松廣寺事蹟碑)와 승평속지(昇平續誌)에 보면 신라 말에 혜린 대사(慧璘大師)가 창건하여 당시 길상사(吉祥寺)라 불렸다. 승려 수는 3·40명을 넘지 못하는 규모의 절이었다. 이에 대한 창건 설화가 전해져 내려오는데 이를 설명하면 신라 말의 고승 혜린 대사가 제자들과 함께 산천을 돌며 수행했다. 그런데 제자들과 더불어 역병에 걸리고 말았다. 제자들은 꼼짝없이 산속에서 병으로 죽는 것에 두려워 떨고 있었다. 이때 혜린 대사가 제자들을 다독이며 이 고통을 참아야 중생을 구제할 수 있다 독려했다. 이후 기도를 위해 정결한 장소를 찾으니 마침 눈앞에 큰 연못이 나타났다. 그리고 못가에는 문수보살의 돌부처가 있었다. 혜린 대사는 문수보살이 우리를 구하러 왔다면서 돌부처 앞에서 7일 동안 정성껏 기도를 올렸다. 마지막 기도일 꿈에 석가여래가 나타나 “너는 더 배울 불도가 없다. 그러니 새로운 절을 세워 중생구제를 하도록 하라”라고 했다. 이때 혜린 대사가 역병으로 죽어가는 제자들을 살려달라고 했다. 이에 석가여래는 “모든 시련이 끝났으니 안심하라”라고 했다. 이에 감사한 마음으로 혜린 대사가 합장 배례하고 눈을 뜨니 석가여래의 모습은 사라지고 없었다. 그때 제자들의 역병이 다 나았다는 함성이 들리며 돌부처가 늙은 스님으로 변했다. 늙은 스님은 자신이 석가여래의 분부를 받고 왔다면서 불보(佛寶) 세 가지[붉은 가사 한 벌, 향나무 불발(佛鉢), 불두골(佛頭骨) 한 조각]를 건네주었다. 라는 설화가 내려오고 있다. 이후 1200년(신종 3)에 보조국사(普照國師) 지눌(知訥)이 이곳으로 옮기며 정혜결사(定慧結社:불교계 정화 운동. 종래의 불교가 세속화된 신앙적 반성에서 출발, 선종(禪宗)과 교종(敎宗)의 통합을 추구)를 추구하였다. 몇 년 뒤에 조계산(曹溪山) 수선사(修禪社)로 개명했다. '寺'가 아닌 '社'를 붙인 것에 대해 불교에서 해탈·열반을 목표로 뜻을 같이하며 수행·정진하는 모임을 가리키는 '결사'라는 의미로 보인다. 그 뒤 그의 제자였던 혜심(慧諶)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가 연이어 이곳 송광사에서 배출되며 승보사찰(僧寶寺刹)이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다. 삼보사찰(三寶寺刹)과 관련된 최초의 기록은 연천(淵泉) 홍석주(洪奭周 1774~1842)가 1828년에 지은 “연천옹유산록”이다. 여기에서 홍석주는 “불가에서 말하기를, 동국의 사찰에 삼보가 있으니, 통도사에는 부처님 두골(頭骨)이 있으므로 불보라 하고, 해인사에는 대장경이 있으므로 법보라 하고, 송광사는 승보라 하는데 보조국사 이후 16 국사가 배출되었기 때문이다.”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19세기 이전에 송광사는 ‘승보사찰’이라는 관념이 형성되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불일암(佛日庵) 무소유를 주장하신 법정 스님의 숨결을 느끼며 송광사에 오르다 보면 처음 갈림길 왼쪽은 불일암(佛日庵)으로 오른다. 불일암은 법정(法頂) 스님(1932~2010)이 17년간 머무셨다는 작은 암자다. 1992년에 이곳을 떠나 강원도 작은 오두막에서 홀로 수행하셨다. 이후 2010년 서울 길상사에서 입적한 후 이곳 송광사 불일암 후박나무 아래 산골 했다. 불일암은 8부 능선에 자리하고 있다. 본디 이곳은 16 국사 중 7대 자정 국사가 창건한 자정암이 있던 터다. 불일암을 오르는 길은 꽤 가파르다. 법정 스님이 걸었다던 무소유의 길이 펼쳐진다. 불일암을 오르는 길은 소나무와 대나무가 어우러지며 작은 개울이 흐르며 맑은 물소리가 난다. 20여 분의 산길을 따라 오르면 뿌리를 드러낸 나무 사잇길이 있다. 그리고 돌계단이 시작되는 대나무 숲길을 지나면 불일암이란 표지판이 보인다. 법정 스님은 1970년대 초반 불교계 인사 중에는 가장 적극적인 사회운동을 했다. 1974년 인혁당 사건 이후 민주화운동으로 박해받을 때마다 증오심이 생기며 수행에 방해된다고 생각하며 불일암에서 많은 저서를 남겼다. 스님은 폐허이던 이곳에 작은 암자를 짓고 불일암이란 편액을 걸었다. 스님은 불일암에서 한 달에 한 편의 글로 세상과 소통했다. 그리고 송광사 수련원장을 맡아 사찰 수련회의 시금석을 놓았다. 작은 암자 댓돌에 스님이 신었다던 삭은 고무신이 놓여있다. 작은 암자 왼쪽으로 나무 테이블과 나무를 잘라놓은 의자가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암자 우편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자정 국사 부도 묘광탑이 자리하고 있다. 그리고 암자를 한단 내려가면 스님의 청빈한 삶을 보여주듯 텃밭이 꾸며져 있다. 불일암을 뒤로하고 송광사라 향하는 산등성이를 넘다 보면 감로암(甘露庵)이 있다. 감로암은 송광사의 제6대 원감 국사 충지(冲止)가 창건한 사찰이다. 일찍이 충지가 김해 감로사(甘露寺)에서 수행하였던 것을 기념해 이름을 ‘감로암’이라 했다는 설이 있다. 감로암은 총림의 4개 기관(선원, 강원, 율원, 염불원) 중 염불원이 있다. 감로암을 지나 구불구불 길을 내려오면 부도전을 앞에 보조국사 비가 있다. 이 비는 보조국사 지눌의 출가 이후 행적과 업적을 적은 비석이다. 1210년 당시 보조국사가 입적하자 행장을 모아 제자 혜심 중심으로 왕에게 탑비를 세울 것을 주청해 세웠다. 그러나 이후 어떤 연유에서 파괴되었고 현재 탑비를 1678년(숙종 4년)에 다시 세웠다. 부도전 옆으로 율사들을 양성하는 기관인 율원이 있다. 송광사(松廣寺)로 향해... 조계산(曹溪山) 이란 이름은 신라 문무왕 원년(661) 중국의 대감 선사가 당나라 불교의 제6대 조종이 되었다. 대감 선사는 황제에게 매화나무 인장을 받아 허리에 차고 황금 지팡이를 앞세우며 영남지방의 소조 부의 조 씨 마을에 이르렀다. 그 마을의 촌장인 조서량과 마을 사람들이 평상시 대사님의 덕을 흠모하였던 터여서 반갑게 맞이했다. 그리고 가까운 쌍봉산 큰 골짜기에 수나라 말에 전쟁으로 불타 폐허가 되어 있는 보림의 옛 절터(계림)에 절을 세우고 스님을 모셨다. 이후 대감 선사(혜능 스님) 조계산에서 40년간 설법했다. 대감 스님이 일으킨 선풍을 조계선(曹溪禪)이라 부르기도 한다. 한국 불교를 대표하는 종단인 조계종의 명칭이 여기서 유래했다. 그러나 조계산 송광사는 불교계 새로운 전통을 확립해 선종 사찰의 근본 도량 역할로 보조국사를 조계종의 실질적 시조로 보기도 한다. 공식적으로는 도의 선사가 조계종의 시조로 돼 있다. 대사가 계신지 아홉 달 정도 된 이후 떠나면서 조 씨의 은혜 보답을 위해 산의 이름을 조서량의 ‘조’와 쌍계의 ‘계’를 한자씩 따서 ‘조계’라 지었다. 이처럼 중국의 ‘조계’가 태어난 유래라고 전해오고 있다. 위치는 지금의 곡강현의 동남쪽 약 12km 지점인 광동성과 호남성의 경계에 있는 커다란 산줄기 남쪽 쌍봉(산) 밑 골짜기에 있다. 순천의 조계산은 선암사 쪽과 송광사 쪽이 각기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두 사찰과 산의 이름의 변천을 살펴보면 송광사는 효령봉을 주산으로 송광산·길상사(신라), 송광산·수선사(고려), 조계산·송광사(조선)라 변천했다. 선암사는 장군봉을 주산으로 청량산·해천사, 청량산·선암사, 조계산·선암사로 변천한 기록이 있다. 송광사는 절 이름에 대해 세 가지 설화 첫째. 18명의 큰스님이 나고 부처님의 가르침을 널리 펼 절이라는 뜻이다. 송광사의 '송(松)'을 풀어 보면 '十八(木)+公'을 가리키는 글자로 18명의 큰스님을 뜻하고, '광(廣)'은 불법을 널리 펴며 18명의 큰스님이 불법을 만천하에 펼 절이라는 뜻이다. 둘째로 보조국사 지눌 스님과 연관된 전설로 스님께서 정혜결사를 옮기기 위해 터를 잡으실 때 모후산에서 나무로 깎은 솔개를 날렸다. 그랬더니 지금의 국사전 뒷등에 떨어져 앉더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 뒷등의 이름을 치락대 (솔개가 내려앉은 대)라 했다. 육당 최남선이 이 전설을 토대로 송광을 ‘솔갱이(솔개의 사투리)’로 해석하고 송광사를 ‘솔갱이 절’이라 풀었다고 한다. 셋째는 예부터 산에 소나무(솔갱이)가 많아 '솔메'라 불렀다. 그래서 송광산이라 불렀고 산 이름이 절 이름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이 산이 솔갱이(‘소나무’ 사투리)가 많아 ‘솔메’로 부르고 광(廣)은 언덕을 의미하는 강(岡)으로 추정하고 있다. 송광사 입구에는 하마비(下馬碑)가 있다. 1902년에 고종의 요청으로 성수전(현 관음전)을 건립한 이후에 설치했다. 성수전은 과거 황실 기도처였으며 성수전이 있는 사찰이라 예우를 한 것이다. 일주문에 달린 조계산 대승선종 송광사(曹溪山 大僧禪宗 松廣寺)란 현판을 지나면 곧바로 고향수(枯香樹)가 발길을 끈다. 고향수는 지눌 스님이 처음 송광사에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다. 스님은 지팡이를 땅에 꽂으며 “爾我同生死 이아동생사 我謝爾亦然 아사이역연 會看爾靑葉 회간이청엽 方知我亦然 방지아역연 너와 나는 같이 살고 같이 죽으니 내가 떠날 때 너도 떠나고 너의 푸른 잎을 다시 보게 되면 나도 그런 줄 알리라” 라는 시를 읊었다고 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스님이 살아있는 동안 잎이 무성하게 자라다 스님이 입적하자 말라 죽었다고 전해진다. 이후 제자들이 마른 향나무에 다시 잎이 피어나길 기다리고 있다. 고향수 뒤쪽 척주당과 세월각 이란 작은 사체가 있다. 이곳은 죽은 자의 영혼을 정화하는 곳이다. 이곳에 먼저 죽은 자의 위폐를 두고 법당으로 가기 전에 세속의 때를 벗는 곳 즉, 남녀 위폐를 각각 척주당과 세월각으로 나뉘어 정화하는 곳이다. 삼청교에서 우화등선(羽化登仙) 해볼까. 이제 삼청교(三靑橋)를 통해 송광사 경내로 들어간다. 삼청교는 1976년 전라남도 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 삼청교는 능허교(凌虛橋)라고도 불린다. 「송광사성공중창록(松廣寺成功重刱錄)」에 의하면, 이 홍교(虹橋:네모난 돌 19개로 무지개 모양)는 1707년(숙종 33)에 다리를 만들고 그 뒤 70여 년이 지난 1774년(영조 50)에 보수했다. 삼청교 밑으로 흐르는 계곡을 이용하여 19개의 4각 장대석을 각지게 맞춰 홍예(虹蜺)를 이루고 양쪽 측면으로는 막돌이 아닌 4각 판석을 쌓아 올렸다. 또 홍예 천장에는 여의주를 물고 있는 용머리 돌이 나와 있다. 이 홍교(虹橋)는 다리와 위에 우화각(羽化閣)이라는 건물을 세워 사람의 통행과 건물이라는 이중효과를 내며 독특한 구조이다. 삼청교를 건너다보면 입구의 모양은 여덟 팔(八)자의 모양을 하고 있고 출구의 모양은 사람인(人)의 모양을 하고 있다. 특히 우화각에 걸린 송광사(松廣寺) 편액은 근대 서화가·사진가로 유명한 해강(海崗) 김규진(金奎鎭:1868-1933) 선생이 글을 쓰고 과 고종의 대령숙수 명월관 창립자로 유명한 죽농(竹濃) 안순환(安淳煥:1871-1942) 난과 대나무를 쳤다는 작품이다. 그리고 삼청교와 우화각은 도교적 색채가 강한 이름이다. 우화각 안으로 천왕문이 붙어 있다. 삼청이란 신선이 살고 있다고 하는 옥청(玉淸)·상청(上淸)·태청(太淸)의 세 궁을 가리키는 말이다. 또 다른 능허교(凌虛橋)는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리고 우화는 “모든 것을 비우고 허공으로 건너 오르는 다리”라는 의미로 소동파의 적벽부에 나온 ‘우화이등선(羽化而登仙)’의 구절이다. 이는 “신선이 되어 승천한다.”라는 뜻이다. 삼청교와 연결된 왼쪽이 임경당(臨鏡堂)이다. 이는 ‘거울 같은 물가에 임한 집’으로 물가로 튀어나와 물에 살포시 들어앉은 정자는 육감정(六鑑亭)이다. 몸은 물질인 눈(眼)·귀(耳)·코(鼻)·혀(舌)·피부(身)와 정신작용의 마음(意)을 더하여 여섯 가지 감각기관인 육근(六根)에서 비롯된다. 육감정(六鑑亭)이란 정자가 이 모두를 느끼는 바로 그곳이다. 그리고 이곳은 송광사 최고의 경관으로 꼽히고 있다. 우화각 우측으로 하천가(신평천)에 축대를 쌓아 2층으로 기둥을 세워 누각 형태의 건물이 침계루(枕溪樓)이다. 침계루는 ‘계곡을 베고 누워있는 것’을 의미한다. 삼청교나 밖에서 보면 중층으로 보이지만 안쪽에서 보면 누각이 아닌 대형 단층 건물로 보인다. 안쪽의 건물 현판은 사자루(獅子樓)라고 걸려있다. 천왕문을 지나면 전방에 ‘종고루’가 보인다. 원래 천왕문과 대웅보전 사이에 해탈문, 대장전, 종고루, 법왕문이 있었다. 1951년에 전쟁으로 공비에 의해 모두 불타버렸다. 현재 ‘종고루’만 복원돼 아쉬움이 많다. 이때 대웅보전도 함께 소실되어 1961년 복원해 1988년 중창하며 규모를 더 키웠다. 대웅보전(大雄寶殿)을 바라보며... 대웅보전은 정면 일곱 칸과 측면 다섯 칸의 아(亞) 자형 전각이다. 특히 대웅전 기둥이 주련에 걸쳐 있지 않다. 이는 대웅전뿐 아니라 전각 대부분이 주련이 없다, 이는 복원 시 완벽하지 않은 지식을 경계해 주련을 걸지 않았다. 대웅보전 외벽 벽화는 보살의 여섯 가지 수행덕목인 보시·지계·인욕·정진·선정·지혜 등 육바라밀(六波羅密)을 상징하는 내용이 그려져 있다. 이 여섯 가지 수행으로 사바세계에서 열반의 저 언덕으로 건너가는 수단을 말한다. 첫째 보시바라밀(布施波羅密)은 일체 탐욕을 떠나 남을 대할 때는 희생과 봉사와 헌신의 정신으로 주고 베푸는 마음으로 대하는 것이다. 둘째 지계바라밀(持戒波羅密)은 계율을 지켜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되 피해는 주지 말며 사물에 있어서 후회하는 일은 하지 말아야 한다. 셋째 인욕바라밀(忍辱波羅密)은 몸과 뜻과 입에서 일어나는 모든 악한 행동을 참고 이기며 오로지 자비로운 마음이면 모든 일을 이루리라. 넷째 정진바라밀(精進波羅密)은 일체 부정과 불법에 관여하지 말 것이며 바른 일을 위해서는 끈기 있게 노력하라. 다섯째 선정바라밀(禪定波羅密)은 잡된 번뇌와 망상을 버리고 깨끗하고 맑고 티 없는 마음으로 삼매에 들도록 노력하라. 여섯째 지혜바라밀(智慧波羅密)은 부처님의 법과 자비에 입각 오로지 선정으로 미련하고 어두운 마음을 밝게 하는 지혜를 갖도록 노력하라. 이다, 대웅보전 외벽 벽화에는 다섯 번째 선정에 달마대사의 9년 면벽 장면과 여섯 번째 지혜에는 원효대사가 해골바가지에 담진 물을 먹은 뒤 ‘일체유심조’의 깨달음을 얻는 장면이 인상적이다. 현재 대웅전에는 과거 부처님인 연등불과 현재 부처인 석가모니불, 그리고 미래의 부처인 미륵불과 문수·보현·지장·관음보살을 모시고 있다. 승보전의 비사리구시 승보전은 송광사를 상징하는 법당이다. 1988년 대웅보전 중창 시 예전 전각을 옮겨 승보전으로 사용하고 있다. 승보전 옆에는 ‘비사리구시’라 불리는 나무 밥통이 3개가 있다. 이는 송광사의 3대 보물 중 하나다. 기록에 의하면 1724년 남원 송동면 세전골에 있던 싸리나무가 태풍으로 쓰러진 것을 가공해 만들었다. 나라의 제사를 모실 때 손님을 위해 밥을 저장했던 통으로 약 4천 명이 한꺼번에 먹을 수 있는 쌀 일곱 가마 분량의 밥을 담을 수 있다고 한다. 송광사의 ‘비사리구시’에 대한 유명한 설화가 있다. 그 설화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 옛적에 순천 땅 어느 고을에 할머니가 살았다. 일찍 남편을 여읜 할머니는 아들 며느리, 손자 손녀들과 함께 살았다. 큰소리 한 번 내지 않는 화목한 가정을 꾸리며 살았다. 할머니는 송광사를 오가는 데만 족히 반나절이 걸리는 데도 불공드리는 것이 유일한 낙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나이 70이 되었어도 할머니는 무척 정정해 다들 처녀 같다고 우스갯소리를 하기도 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할머니는 점심을 먹다가 아무 이유도 없이 숨졌다. 너무도 조용히 숨져서 자식들은 처음엔 할머니가 돌아가진 지도 몰랐다. 죽은 할머니는 저승사자를 따라 염라대왕 앞에 서게 되었다. 그런데 많은 망자가 줄을 서 있었다. 할머니는 궁금해서 앞 사람에게 물으니 ”염라대왕이 재판“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염라대왕이 순천 송광사를 무척 좋아하여 가본 적이 있는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염라대왕의 물음에 너도나도 가보았다며 염라대왕 앞에 나섰다. 염라대왕은 "송광사의 비사리구시 길이가 얼마며, 높이나 폭이 얼마나 되느냐?" 물었다. 그러자 가본 적이 없는자들이 우물쭈물 엉터리로 대답했다. 염라대왕이 크게 노하며 지옥으로 보냈다. 앞으로 나선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드디어 할머니 차례가 되었다. 역시 염라대왕이 비사리구시의 길이, 높이, 너비를 물으니 할머니가 대답했다. 할머니는 "살아 있을 때 해마다 초파일에도 가보고 보조국사님 제삿날에도 가보고 여러 번 가보았습니다. 하지만 바사리구시를 보고도 재보지 않아 알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그러자 염라대왕은 정직한 사람이라며 크게 칭찬하며 좀 더 살다 오라 하였다. 할머니가 눈을 떠보니 아들이 울고불고 난리였다. 죽었던 할머니가 벌떡 일어나자 아들이 깜짝 놀라 뒤로 자빠졌다. 아들에게 저승에게 겪은 이야기를 하던 할머니는 즉시 송광사에 있는 비사리구시를 재러 가자고 했다. 할머니는 그길로 아들과 함께 자를 들고 송광사에 가서 비사리구시를 재었다. 하지만 할머니는 돌아서면 금방 잊어버렸다. 방법을 찾던 아들은 명주실로 길이, 높이, 너비만큼 각각 끊어 할머니의 빨간 주머니에 넣어 드렸다. 그러면서 "어머니, 나중에 돌아가셔서 염라대왕이 물으면 주머니에서 실을 꺼내어 길이는 요만큼, 높이는 요만큼, 너비는 요만큼입니다라고 답하세요"하였다. 할머니는 100살 넘게 살다 돌아가셨다고 한다. 그래서 인근에 비사리구시 이야기가 널리 퍼지게 되었다. 그 후로 한때 이곳에서는 나이 많은 노인들이 송광사 비사리구시를 자로 잰 후 실을 끊어 빨간 주머니에 차고 다니는 유행이 되었다고 한다. 송광사에 노인들이 많이 찾는 것도 그 때문이라고 한다. 송광사는 전각이 아주 많다. 과거 80여 동의 전각이 있었다. 그러나 외침과 화재 등에 의해 소실된 전각이 아직 복원되지 않았다. 그래도 현재 50여 동이 복원되었다. 송광사는 수행을 우선 하는 승보사찰이다, 그래서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된 곳이 많다는 점은 아쉬움이 있다. 성수전이 관음전이 된 사연 관음전은 1902년 고종황제의 성수망육(聖壽 : 임금의 나이, 望六 : 51세)을 맞아 사액(賜額, 임금이 내린 편액)된 황실 기도처였다. 3단의 축대 위에 정면 3칸, 측면 3칸에 겹처마로 팔각지붕으로 건조되었다, 건물 외관은 빗살로 단장된 4분 합의 창호와 중앙 석축 앞 계단 소맷돌이 거북 모양으로 특이하다. 그리고 건물 외벽 3면에 십장생(十長生)을 도안하고 화려한 단청을 입혔다. 그리고 전각을 ‘성수전’이란 이름을 붙이고 편액을 내렸다. 황실 기도처였던 까닭에 국내 어는 사찰에서도 볼 수 없는 벽화가 있다. 가운데 불단 좌·우측 벽에 정1품과 정2품 신하들이 허리를 굽히고 있는 모습이 있다. 어간 좌우 기둥 위에는 바깥으로는 용두(龍頭:용 머리)와 내부에는 용미(龍尾:용 꼬리)를 조각해 놓았다. 그리고 관세음보살 좌우에 태양과 달은 고종과 명성왕후를 상징한다. 성수전은 이후 1957년 부근 관음전이 크게 낡아 이를 해체하면서 관음보살을 이곳으로 옮겨 안치하며 관음전으로 바뀌게 됐다. 또 관음전의 목조관음보살좌상은 1662년 비운의 왕자인 경안군(慶安君) 내외의 수명장원(壽命長遠)을 위해 발원 조성한 불상이다. 경안군은 소현세자의 셋째 아들로 아버지는 할아버지 인조에 의한 독살과 어머니 강빈 또한 인조에게 사약을 받았다. 또 소현세자의 첫째와 둘째가 제주 유배 생활 중 사망하고 경안군만 살아남아 효종 때 복권됐다. 복장 유물이 경안군의 것으로 추정되며 쪽빛 저고리와 발원문 등이 나와 이를 뒷받침하고 있다. 대웅보전 뒤편 하사당(下舍堂)은 1963년 지정된 보물로 앞면 3칸, 옆면 2칸의 단층 건물이다. 지붕은 맞배지붕이며 주로 선실(禪室)로 사용되었다. 조선 말기 수선사(修禪社)에서 정진하는 선객(禪客)이 공양하던 곳이나 응진전(應眞殿)의 일을 맡은 임원들이 묵는 노전(爐殿)으로 사용되었다고 전한다. 남향으로 자리한 건물의 왼쪽 2칸은 온돌방으로 오른쪽 1칸은 부엌이다. 온돌방에는 앞쪽에 툇마루가 놓여있고 천장은 종이 천장이다. 부엌은 서까래가 드러나 있는 연등 천장으로 지붕 밑의 가구(架構)가 모두 보인다. 곧 대들보는 툇마루와 방 사이에 세운 고주(高柱)부터 뒷면의 평주(平柱)까지 통보[通樑]로 걸렸다. 건물 안의 살미첨차는 위아래의 것이 합쳐져 보를 보강하는 짧은 부재인 보아지[樑奉]로 되었다. 옆면에는 덩굴무늬[唐草文]가 조각되었다. 부엌 칸의 지붕 위에는 작은 맞배지붕을 올린 네모난 환기 구멍이 나 있다. 이는 다른 건물에서 좀처럼 볼 수 없는 특별한 시설이자 요사(寮舍)를 나타내는 상징으로 알려져 있다. 국사전에서 느끼는 16 국사의 기운 국사전은 송광사 전각 중에서 유일하게 국보로 지정된 건물이다. 대웅전 뒤편 오른쪽에 있는데 담장 등에 가려 건물 일부만 볼 수 있다. 국사전은 송광사에서 배출한 16 국사의 진영을 모신 곳이다. 1369년 고려 공민왕 때 처음 지어진 건물로 별로 남아있지 않다. 1971년 국사전을 해체 보수할 때 발견한 ‘상량문’을 통해 1501년 ‘조사영자전(祖師影子殿)’을 개창(改創)한 것을 알 수 있다. 또 1558년 중수했다. ‘송광사지’에는 ‘자음당(慈蔭堂)’으로도 불렸다고 기록되었다. 1722년(경종 2), 1807년(순조 7), 1918년에 각각 중수와 석축을 1926년 고쳐 쌓았다. 이후 1962년, 1972년, 1990년에도 전각을 수리하고 현재 2018년에 새로 조성한 16 국사 진영을 봉안했다. 하지만 1995년 송광사 배출 16 국사의 진영을 도둑이 들어 13점을 도난당한 아쉬운 일도 있었다. 세월각과 척주각에서 관욕을 마친 후 우화각을 건너 사찰안으로 들어선 영가는 지장전(地藏殿)으로 다시 모셔지게 된다. 지장전에서 영가천도의 재가 이뤄진다. 승보전과 함께 대웅보전의 좌·우 법당으로 사용되는 지장전은 1988년 8차 중창기에 중창된 건물이다. 중건 이전 명부전으로 사용되었다. 3단의 높은 축대 위에 세워진 정면 5칸, 측면 3칸 규모의 건물로 원형 주초 위에 배흘림기둥을 얹었다. 건물 전면은 2, 4분 합의 빗살문을 창호로 가설해 전면을 제외한 3면은 판벽으로 처리한 특이한 모습이다. 3면에는 반야용선도(般若龍船圖)를 비롯해 인로왕보살도(引路王菩薩圖)ㆍ동자도(童子圖) 등 수많은 불교 벽화가 단청 되어 있다. 내부는 고주 없이 5량의 가구로 처리하여 넓은 장방형의 평면을 이루고 있다. ‘ㄷ’자형 불단 위에는 목조 지장보살좌상 좌우에 도명존자, 무독귀왕, 저승의 시왕 등 명부 권속들이 협시해 있다. 후불탱으로는 1987년 금어 조연우(曺延宇)가 그린 지장탱(地藏幀)을 비롯하여 1963년 일섭 스님이 그린 시왕탱(十王幀) 등이 봉안되어 있다. 가장 작은 불전을 바라보며 약사불(藥師佛)을 봉안한 불전(佛殿)을 약사전이라 한다. 송광사의 약사전은 경내 가장 규모이다. 1974년 중수 시 발견된 상량문에 1631년(인조 9)과 1751년(영조 27)에 각각 중건됐다. 정면 1칸과 측면 1칸 규모로 단층 팔작지붕으로 4면이 모두 1칸씩으로 되어 있는 정사각형 건물이다. 후불탱화로는 1904년에 조성된 석가모니 후불탱을 모셨다. 건물 규모에 비해 기둥이나 부재들은 굵직한 목재를 사용했다. 처마 밑을 받친 공포(栱包)가 이출목(二出目)으로 앙서(仰舌:끝이 위로 삐죽하게 휘어 오른 쇠서)의 수는 3개로 전체적으로 장중한 느낌을 준다. 내부 구조는 대들보가 없고 공포는 삼출목(二出目)으로 네 모퉁이의 귀살미부터 부재(部材)가 중앙에서 서로 교차해 천장을 이룬다. 문은 정면에 사분합(四分閤)의 띠살문을 달고 측면에 출입문을 내고 바닥에 마루를 깔았다. 조각 수법을 보아 조선 중기인 17세기 무렵에 세워진 것으로 추정한다. 이 약사전은 건축학적 매우 중요한 특성이 있어 현재 보물 제302호로 지정되어 있다. 영산전(靈山殿)의 다른 이름은 팔상전(八相殿)이다. 약사전과 나란히 서 있고 조선 후기의 건물로 보물 제303호다. 앞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건물로서 전체적으로 약사전과 비슷한 모습이다. 내부에 목조 석가여래상을 모셨다.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장면의 영산회상도를 후불탱으로 배치했다. 또한 삼면 벽에는 부처님의 일대기를 여덟 장면으로 묘사한 팔상탱이 묘사돼 있다. 영산전에 봉안된 석가여래좌상은 1780년(정조 4)에 조성되었다. 상호와 신체 비례가 원만한 조선 후기 목불 좌상이다. 얼굴이 네모 넓적한 형태로 턱선은 둥글다. 뚜렷한 이목구비에 반월형 눈썹 그리고 큰 눈과 코의 특징을 가지고 있다, 또 도톰한 입술에 먼지 미소는 매우 온화한 느낌을 준다, 본존 후불탱인 영산회상도는 1725년(영조 1)에 조성됐다. 가로 186.5㎝, 세로 214㎝의 비단에 채색했다. 영축산에서 설법하는 석가여래와 그 청중들을 여실히 표현했다. 또 석가의 생애를 8단계로 나누어 그린 팔상도가 있다. 송광사 기록에 이 건물은 조선 인조 17년(1639)에 세우고 영조 12년(1736)에 수리했다. 현재 건물은 1973년에 보수했다. 천자암을 지은 담당국사는 정말 천자의 아들이었을까. 천자암(天子庵)은 송광사의 제9대 국사인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창건했다. 담당(湛堂)이 중국 금나라 천자(天子)의 셋째 아들이었다. 보조국사가 금나라 장종(章宗) 왕비의 불치병을 치료해준 것이 인연이 되어 왕자 담당을 제자로 삼아 데리고 귀국한 뒤 담당이 천자암이라 명명했다고 한다. 천자암은 무엇보다 쌍향수(곱향나무)로 두 그루가 나란한 쌍처럼 서 있고 주요 줄기가 몹시 꼬여 가지를 밑으로 내려뜨리고 나란히 서 있다. 혹자는 이 모습을 흡사 스승과 제자가 서로 공경하며 절하고 있는 모습이라고 보기도 한다. 특히 곱향나무는 중국과 백두산에 한정해 자생하는 나무로 알려져 있다. 천자암의 곱향나무는 남한에서 유일하게 볼 수 있는 곱향나무이다. 쌍향수는 비사리구시, 능견난사와 더불어 송광사의 3대 명물이다. 고려시대에 보조국사(普照國師 1158~1210)와 담당국사(湛堂國師)가 중국에서 돌아오며 짚고 온 향나무 지팡이를 이곳에 나란히 꽂았다. 이때 지팡이를 거꾸로 꽂아서 가지가 하늘이 아닌 땅을 향해 자라는 듯한 오늘날의 쌍향수가 되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천자암은 그 뒤 1633년(인조 11) 설묵대사(雪默大師)가 중창하고 1730년(영조 6) 자원대사(自願大師)가 중건했다. 1740년 지수(指修)·자징(慈澄) 등이 만세루(萬歲樓)를 중건하고 1797년(정조 21) 제운(霽雲)·두월(斗月)이 중건하며 1893년(고종 30) 구연대사(九淵大師)가 성산각(星山閣)을 신축했다. 1924년 기산(綺山)·해은(海隱)이 중수, 1939년 금당화상(錦堂和尙)이 칠성각을 건립했고 1992년에 법당을 지었다. 현재 법당을 비롯해 나한전·산신각·법왕루·요사 등이 갖춰져 있다. 암자의 뒤쪽 쌍향수는 1962년 천연기념물로 지정됐다. 이 나무는 수령 800년에 높이 12.5m에 이른다. 그러나 보조국사와 담당국사의 연대적 차이가 100여 년이나 차이나 이 전설을 믿기는 어렵다. 담당은 송광사 16 국사 중 9대 국사로 행적과 출생, 생몰연대를 알 수 있는 자료가 전혀 없다. 천년 사찰을 돌아보며 찰나를 살아가는 인간이 무엇을 그리 집착하는지 생각해 보았다. 일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신 법정 스님도 당신의 가르침과 행적만을 남겼다. 다음 이에게 무엇인가 남기는 것, 그것은 사람이 살아가는 이유와 방법이 아닐까? 굽이굽이 굽어진 언덕길을 오르고 내리며 이리 굽은 길들이 모두 이유가 있어 굽어진 길로 만든 것이라 생각했다. 굽어진 길은 편히 갈 수 있도록 만들어졌다는 것을.... 산을 직선으로 오르면 오르다 지친다. 굽이굽이 돌아가면 조금 더디지만 끝까지 갈 수 있다. 우리 인생도 굽어 가는 것을 낙담할 것이 아니라 내가 견딜 수 있게... 또 편하게... 갈 수 있는 길을 내어주고 있다는 것을... 굽은 것을 시련이라 말하면 아마도 선인들이 말한 삶은 견딜만큼 시험이 온다는 말이 이 뜻일까?
    • 문화
    • 여행
    2024-01-24
  • ‘이 가을, 당신을 위한 레드카펫’…선운산 꽃무릇 활짝
    바라볼수록 뜨겁게 돋아나는 열정과 그리움. 선운산 계곡 깊숙이 레드카펫이 깔렸다. 가느다란 꽃줄기 위로 여러 장의 빨간 꽃잎이 한데 모여 말아 올린 자태가 빨간 우산을 펼친 것만 같다. 살펴주는 이 아무도 없어도 꽃들은 수수하게 잘도 피었다.추석을 앞두고 고창 선운산 계곡 사이사이 꽃무릇의 꽃대가 올라오고 있어 관광객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고 있다.15일 고창군 선운산공원팀에 따르면 선운산 꽃무릇의 꽃대가 올라오기 시작해 이번 주말께부터 개화해 화려한 군무를 펼칠 전망이다. 꽃무릇은 통상 개화 후 열흘정도가 절정기로 알려져 있다.선운산 꽃무릇은 5월께 잎이 나왔다가 7월께 지고 나면, 9월초 꽃대가 솟아난다. 9월 하순이 되면 꽃이 붉게 피어오른다. 한 뿌리이면서 잎과 꽃이 서로 만나지 못해 ‘화엽불상견 상사초(花葉不相見 想思草)’의 그리움과 아련함으로 회자되는 꽃이다.가려진 모습과는 달리, 뿌리에는 코끼리도 쓰러뜨릴 정도로 강한 독이 있다. 그 옛날 단청이나 탱화 보존에 유용하게 쓰기 위해 절 주변에 꽃무릇을 많이 심었다고 전한다. 고창군 산림공원과 박진상 과장은 “선운산 곳곳에서 꽃무릇을 감상하고 아름다운 추억을 만들 기회가 되었으면 한다”며 “고창 선운산을 찾아오시는 관광객들이 불편함이 없도록 시설물 점검 등에 각별히 신경 쓰겠다”고 밝혔다.
    • 문화
    • 여행
    2022-09-19
  • [포토] 인제 진동계곡의 여름
    인제 기린면 1리 추대의 진동계곡, 100대 명산 점봉산에서 시작된 물줄기가 만들어 낸 아름다운 명품 계곡이다.여름 더위를 가시려고 사람들이 계곡을 많이 찾아 붐빈다.근처 명소에 진동리 산촌체험학교가 방문객들에게 인기이다.
    • 문화
    • 여행
    2022-08-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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