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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뉴스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불가리아의 현실
    현재 불가리아 소피아의 가장 큰 문제가 난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시들 처분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데 EU가 보조금 가지고 불가리아 같은 나라에 협박을 하고 있다. 받아들인 난민들 숫자만큼 보조금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EU 탈퇴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EU 탈퇴하거나 보조금 못 받음 불가리아의 경제는 회생 불능이 된다. 과거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시메온 2세가 총리가 되고 불가리아를 2004년 나토, 2005년에 EU 가입 승인을 이끌어냈다. 그에 따라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문제 등에서 수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대놓고 부패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왠일인지 EU는 시메온 2세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대표적인 친러시아 국가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불가리아는 무조건 나토와 EU에 묶어 놔야 러시아가 세르비아 문제와 복잡한 발칸 문제에 참여를 못하게 되니까 시메온 2세의 비리를 눈감아 준 것이다. 실질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메온 2세 다음으로 총리에 오른 세르게이 스타니셰프(Сергей Станишев)는 아예 불가리아의 경제를 EU에 올인시켰다. EU가 시키는대로 다하고 국가 주권 행위도 EU나 나토의 승인이 없으면 발휘하지 못하는게 불가리아의 현실이다. 그러니 가난한 불가리아 국민이 80% 이상에 중산층은 갈수록 쪼그라 들어가고 젊은이들이 불가리아를 버리고 독일이나 프랑스로 일자리 찾아 떠나는게 현실이다.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나는 불가리아 젊은이들도 많다.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국 식당이 포진해 있는 곳 또한 불가리아 소피아다. 이 중국 식당은 요리 운영도 하지만 불가리아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취업하기 위한 취업 알선소 역할도 한다. 특히 소피아에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어딘가에서 알바를 하고 그걸로 벌어들인 돈 뭉치를 가지고 중국 식당에 찾아가면 비자 의뢰와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 중국 내 사무소와 즉각 커넥션이 이루어진다. 그 사무소로 인해 취업할 기업들을 소개받고 그 기업들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반면 러시아와 불가리아는 현재 그 관계가 소원해졌어도 여전히 양국 간의 무비자 협정은 유지되고 있다.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무비자로 모스크바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에서 취직한 불가리아 젊은이의 취업 비자 취득을 도와준다. 이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많게는 15만 루블 (한화 약 225만원)에서 10만 루블 (한화 약 150만원)을 번다. 불가리아에서 고작 많이 벌어야 500유로 (한화 약 73만원)보다 2.5배 더 버는건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떠난 빈 자리를 난민들이 채우고 있다. 소피아의 거리에는 10년 전에 상상도 못했던 히잡 쓴 여인들이 상당수 포착되고 있다. 대개 국적이 어딘지 물어보면 10중 8,9 시리아다. 능력이 있고 고학력자인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EU 보조금을 털어 불가리아 현지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 취직시켜 주고 정착할 수 있게 정착금까지 준다. 같은 국민인 불가리아인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서 시리아 난민 출신에게는 아낌없이 퍼줘야 한다. 게다가 이 자금이 난민들에게 잘 쓰이고 있는지 EU BULGAR CREDIT BANK 라는 곳에서 감시 요원들까지 투입해 불가리아 재무부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일일히 트집을 잡는다. 학력이 떨어지는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불가리아의 3D 업종에 일자리가 주어진다. 그리고 사진에서와 같이 부서지고 붕괴 위험이 있는 집에서 생활한다. 본래 저런 집은 대개 집시들이 차지했었는데 불가리아 최하층민인 집시들은 시리아 난민에게 아예 밀려나고 있다. 요즘 불가리아에서 집시를 찾는게 쉽지 않은 이유가 구걸이나 소매치기하며 밥벌이하는 그들이 시리아 난민들에게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리아에서는 시리아 난민들 때문에 고민이 많고 자국민의 불만은 팽배해져 간다. EU가 하고 있는 행태가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 불가리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서유럽, EU 하면 옹호하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동유럽 현실에 관심도 없고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나 갔다와서 EU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다닌다. 그 외의 유럽 국가들은 가난하다며 무시하고 알 필요도 없다며 선을 그어 버린다. 그들이 잘 지원해주고 있는데 못 사는 것은 그들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의 중추라는 조, 중, 동은 이런걸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거 취재하는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저 유럽이나 미국이 주는 뉴스만 번역해서 올리는 "외국 언론 번역기"에 불과할 뿐, 기자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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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30
  • 세르비아, 코소보의 독립을 16년 만에 승인하나?
    1999년 코소보 전쟁이 발생하면서 UN은 코소보를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면서 2007년에 코소보는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며 2008년 2월 17일에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코소보의 국제적 승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였고 초창기에는 국가로 승인한 국가들이 47개 정도였지만 차츰 늘어 현재 193개 유엔(UN) 회원국 가운데 94개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로써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국의 주권 영토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코소보만의 단독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있어서 남슬라브계가 첫 역사를 시작했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라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잃는다는 것은 세르비아인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 뿌리를 잃는다고 보고있으며 지금도 코소보는 미국과 집단서방에 의해 강제로 앗아간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코소보는 정식국가로써 UN의 가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UN의 상임이사국들이 코소보의 국가 존속 여부와 더불어 UN 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해야 하는데 세르비아의 형제 국가인 러시아가 줄곧 반대하면서 만장일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에 거대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이 반대하고 있어 코소보는 정식 국가 승인과 UN 입성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더불어 EU나 나토 가입도 마찬가지다. EU나 NATO의 회원국들 중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가 가입에 반발하고 있다. 나토의 경우, 터키도 코소보의 나토 가입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EU의 수장격 국가들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이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를 설득하고 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스페인과 키프로스에게 승인은 받아냈지만 친러인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세르비아와의 절친한 관계를 고려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EU 국가지만 세르비아와 그나마 교류가 각별한 루마니아 또한 쉽지 않다. 그리스의 경우, 북마케도니아와의 영토 문제 및 국호 문제로 인해 슬라브계와의 충돌을 꺼리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같은 정교회 국가이고 코소보는 상당수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다. 굳이 세르비아와 갈등을 키워가면서까지 코소보의 독립 및 EU, 나토 가입을 승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코소보 북부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코소보 북부의 미트로비차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세르비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 공화국이 아니라 지금도 코소보와 메토히야 자치주(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Косово и Метохиja)로 인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반면 알바니아에서는 라프시 이 두카지니트(Rrafshi i Dukagjinit), 약칭 '두카지니(Dukagjini)'라고 부르며 두카지니가(Dukagjinët)는 알바니아계 씨족이자 봉건 귀족 가문으로, 이들이 세운 두카지니 공국(1387–1444)은 코소보를 장악하고 있던 국가였다. 알바니아계 무슬림인 코소보인들은 두카지니 공국을 자신들의 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코소보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알바니아와의 문제도 함께 얽혀 있다. 좁게 언급하자면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자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미국 및 EU가 중재에 나서면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코소보의 관계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재의 배경에는 미국과 EU의 강력한 경제 제재 압박과 EU 가입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EU에서 세르비아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세르비아가 코소보와 관계를 정상화 하면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코소보의 유엔 가입을 도울 것을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데로 세르비아의 형제국인 러시아가 거부하는 한 코소보는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될 수 없다. 이는 해결 방법이 있는데 세르비아와 코소보가 관계회복을 하고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UN 가입 승인을 요청한다면 러시아도 코소보의 UN 가입을 막을 명분이 없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 입장에서는 EU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고 중국과 러시아의 투자를 유치하자는 입장이었다. 부치치는 중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재건하고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고 있지만 과도한 중국에 대한 경제력 의지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과도하게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EU, 미국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며 중국, 러시아 사이에 세르비아 만의 독자적인 형태를 구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결국 2023년 2월 2일 정규 의회에서 코소보와의 관계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대한 후폭풍은 거세게 부치치 대통령에게 몰아쳤다. 반발한 야당 의원들이 연단으로 몰려나오면서 본회의 진행이 어려운 상태까지 갔던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의원들에게 코소보와의 협상 경과를 설명하며 유럽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세르비아의 이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부치치 대통령은 미국과 EU가 세르비아에 뼈아픈 양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EU 가입을 위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했다가 반역자라는 욕까지 먹어야 했다. 게다가 친러시아 우파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부치치 대통령에게 코소보와의 대화를 당장 중단하고 서방의 국교 정상화 요구도 거부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는 EU 가입을 희망하면서도 여전히 러시아와의 친분을 유지해왔다. 세르비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던 것은 어느 진영에도 휩쓸리지 않고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세르비아만의 국익을 취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상황을 본다면 부치치의 이런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탁월하다. 그러나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UN 가입을 승인하다 해도 EU가 과연 약속대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승인해줄까? 나의 개인적 사견으로 본다면 그렇게 한다 해도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가능성보다 낮을 것으로 본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시절부터 있어 왔던 서방 국가들의 유고 쪼개기는 동유럽-발칸에서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견제하여 러시아와 맞서려는 전략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이같은 기조가 변할리 없다. 이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서방이 원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슬라브인들의 세력 약화와 민족적 소멸에 있다. 만약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다면 EU는 여러 이유를 들어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연기할 것이고 오히려 더 고립되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징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협상이 개시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얼마 전, 타냐 미시체비치(Tanja Miščević) 세르비아 유럽통합부 장관은 EU가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의 EU 가입에는 빠르게 반응했지만, 서부 발칸 지역 국가들의 가입은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발언했다. 미시체비치 장관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이후 EU 확장에 대한 욕구가 열정적이지 않았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확장에 대한 추진력이 다시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세르비아의 EU 가입에 대한 협상 늦어지고 있다며 불평했다. 이에 유럽집행위원회(EC)는 예비 EU 회원국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우크라이나, 몰도바의 가입 협상 단계 시작을 지지하고, 조지아는 EU 후보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EC는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코소보와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에 진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세르비아 EU 가입에 대한 협상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세르비아의 탓이라 언급했다. 2023년 12월 14일~15일에 있었던 EU 정상회의에서 세르비아의 가입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의미 있는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EU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측에 관계 개선을 위한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세르비아는 법치 분야를 비롯한 EU 가입 관련 개혁을 시행하고 있지만, EU의 요구 사항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전인 4월 2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EU 가입 조건으로 코소보가 UN이나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등 국제기구 가입하는데 세르비아가 여기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가입 문의 35장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국제 기구 가입을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강화하면서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2023년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오흐리드에서 체결된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에서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행정 문서를 인정하고 코소보의 국제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약속을 문서화한 바 있는데 이를 35장에 추가하여 외교적 압박을 가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만들고 러시아를 제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대한 정치적 딜레마가 걸려 있다. EU가 나토가 노리는 것 중 하나가 세르비아 내에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코소보 북부의 셰르비아계 지역에서 자치권을 둘러싼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부치치 대통령이 EU와 나토의 이러한 분열 획책 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부치치는 결국 미국,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주권을 강화하고 독자 노선을 행하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EU는 코소보 독립 승인 및 UN 가입, 러시아 제재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부치치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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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30
  • Unveiling the Mona Lisa's Secret Twin: A Tale of Artistic Intrigue
    Sure, you know about Leonardo da Vinci's masterpiece, but did you know there's a doppelgänger chillin' in Madrid's Prado Museum? That's right, folks, we're talking about the OG copycat, created by one of da Vinci's apprentices way back in the day. It's like a Mona Lisa time machine, offering a glimpse into the artistry of the Renaissance maestro himself. What did they find, you ask? Well, buckle up, because it's a wild ride. Turns out, this copycat wasn't just phoning it in—it followed da Vinci's playbook like a boss. Sure, it might lack a bit of that signature da Vinci magic, but it's still a treasure trove of insights into the original masterpiece. From the color palette to the subtle tweaks da Vinci made along the way, this Prado Mona Lisa is a bona fide masterpiece in its own righ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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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Thoughts Of Seraphine
    2024-04-30
  •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처형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하나(Maria Antonia Josepha Johanna)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를 프랑스어로 재해석한 이름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의 막내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4세에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되었고, 얼마 후 남편이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자 그녀 또한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미모도 뛰어났고, 머리도 명석했던 실로 당시 드물게 모든 것을 갖춘 여자였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그녀를 마녀와 같은 이미지로 만들었다. 1793년 10월 16일 낮 12시 15분 그녀의 목에 길로틴 칼날이 떨어지면서, 한창의 나이인 38세를 일기로 참수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녀는 온갖 혐의를 쓰고 갖은 중상 모략을 당했다. 그녀에게 씌워진 혐의들은 재정 낭비,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시민들에 대한 기만, 전쟁 유발 등이었지만 놀랍게도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죄목 하나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근친상간의 혐의였다. 이는 본인의 아들을 겁탈했다는 죄목이었는데 장남인 루이 조지프는 8세에 죽었고 차남인 루이 17 또한 당시 재판에서의 나이로는 고작 8세였다. 즉, 어머니가 8살의 아이를 겁탈했다는 얘긴데 지금 들어도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시키기 위한 억지 죄목이나 다름없었다. 루이 17세의 변론과 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죄목 및 당시 재판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히 포스팅하고자 한다. 이미 그녀의 어떤 변론과 증언도 이 재판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사형이라는 처결을 결론 지어 놓고 한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침내 사형을 언도받았고 이는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해서는 상당한 양의 소설과 영화, 역사물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그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라는 파리 군중들에게 말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녀를 마녀로 몰아 처형하기 위한 정당성, 국민 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후대에 창작한 말이다. 그녀는 평소에 왕비로써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고,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로부터 국제적인 이득을 노렸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자신의 친모 및 친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220여 년이 지난 현재 많은 저술들이 나타나, 앙트아네트에 대한 잘못된 정보, 루머들로 인해 정치적으로 타살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프랑스 군중들은 왕비를 왜 마녀로 만들었을 정도로 증오했을까? 첫 번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상 루이 16세와의 혼인은 정치적으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를 연결시키려는 정략결혼 형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승계한 국가들은 15세기 이후 오랫동안 유럽 내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며 대립해왔다. 그러다가 신흥 프로이센이 강력해지면서 오스트리아가 전략적으로 프랑스와 연대하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왕가로 시집보낸 것인데 이는 프랑스 시민들이 원하던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보다 상류계급인 부르주아들의 정치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녀에 대한 사실적인 부분보다는 각종 정치 선전성 루머에 의해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 그녀를 재판정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었다. 이는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하여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했는데 이는 앙투아네트가 관여한 사건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프랑스 대귀족 출신인 루이 드 로앙(Louis René Édouard de Rohan) 추기경의 타락, 그로 인해 테레지아와 앙투아네트가 그를 멀리하자 그에 대한 앙심으로 라모트 백작부인을 가까이 하여 이 사건을 공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조작된 루머는 진범이 앙투아네트이고, 라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재판에서 이 사건은 증거가 없기 때문에 무고로 확인되었다. 세 번째, 당시에 시대상을 지배했던 상류층 여성에 대한 혐오였다. 일본의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이와 같은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의 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の生涯)』를 집필하면서 이 혁명재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는 그녀가 여자였고 상류층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노래와 우화, 가상 전기와 고백,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하면서 그녀를 풍자했다. 대부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논문>,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궁의 분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 처녀성 상실부터 1791년 5월 1일까지>, <프랑스의 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은밀하고 방탕하고 추잡한 삶> 등 제목만 보아도 그녀에 대한 수많은 저작들의 내용이 얼마나 저열하고 악의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서적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첫 번째 연인으로 추정되는 독일인 장교를 비롯하여 자신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애욕적인 포옹을 하고 있는 삽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로앙 추기경과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도 왕비의 성적 파트너로 등장하면서 역사적 근거와 별개로 그녀를 성적으로 음탕하고 온갖 자극적인 이미지로 몰고 갔다. 여기에 발기 불능인 국왕 루이 16세를 대신하여 아르투아와 폴리냑이 왕비를 상대하고 있는 채색 판화도 있고, 두 여자와 한 남자가 3인 1조를 이루어 섹스를 즐기는 삽화도 존재했다. 요즘 같으면 엄청난 수위의 성희롱을 300년 가까이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고증과 전혀 상관없는 가십용 거리로 전락한 앙투아네트의 모습과, 네티즌들이 온갖 악플 및 악의적이고 근거없는 가십거리로 루머를 만들어 퍼트려 몇몇 여성 연예인들을 자살로 이끌게 만드는 요즘과 별다를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혁명 세력은 근친상간이라는 인류의 금기까지 내세워 이를 기정 사실로 덮어 씌우고 혁명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정당성 때문애 그녀를 희생시켰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그녀는 단죄될 수 없었다. 더불어 요즘과 같이 MZ 세대가 대두되고 자유를 누리되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성별 대립 및 성 차별 등등의 각종 양극화적 논란으로 볼 때 프랑스 대혁명과 혁명 재판은 지금의 관점과 비교하여 재연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상 최초의 여혐(女嫌, misogynie)의 희생자였고 상류층, 부르주아 혐오에 대한 최초의 희생자였음을 단언할 수 있다. 그녀는 정치적 영역에서 여혐의 희생자가 된 사상 최초의 공적 여성이었으며 시대적 희생양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양극화 된 사회와 매우 유사한 시대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시대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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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29
  • IS의 뿌리와 알 자르카위(Al-Zarkawi), 그리고 알 바그다디와 하피즈 사이드 칸 ISIS-K (호라산 IS 조직)
    IS의 뿌리는 요르단 출신의 알 자르카위(Al-Zarkawi)가 1999년에 만든 ‘유일신과 성전(Monotheism and jihad)’이라는 조직에서 유래한 근본주의 조직이다. 이 단체는 2004년 이라크 알 카에다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는데 이 조직이 바로 한국인 김선일 씨를 납치하고 참수하였기 때문에 한국에는 이미 이름이 익히 알려진 조직이다. 김선일 씨 뿐 아니라 이라크의 시아파 주민들과 모스크, 유엔 인사 등을 상대로 지속적인 테러를 자행했던 테러단체이다. 명문 가문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오사마 빈 라덴과는 다르게 알 자르카위는 요르단 암만의 빈민가 출신으로 처음부터 독실한 무슬림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범죄를 저지르며 감옥을 전전했고 불우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도중 이라크 쿠파를 참배했을 때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알 하산 쿠르카(Al-hasan qurka)라고 하는 이맘이다. 쿠르카는 대단한 과격주의자로 빈민가 탄생부터 불우한 세월을 보낸 자르카위에게 전 세계를 알라의 앞으로 결집하여 신정국가를 이루는 것이 그 동안의 죄를 용서받고 알라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에 감명을 받아 자르카위는 아주 독실한 원리주의자로 재탄생했다. 그렇게 그가 레바논으로 들어와 IS의 전신인 레바논 이슬람 원리주의 알 카에다 조직을 창설하여 보다 과격하고 잔인한, 일종의 보여주기 방식의 테러에 집착하게 된다. 알 자르카위는 2006년 6월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조직은 더욱 잔혹해졌고 더 확충되어 그들의 수하에 어느새 5만의 무리가 모아지게 되었다. 레바논 알 카에다 조직은 알 자르카위와 함께 조직을 지휘했던 알 바그다디(Al-Bagdadi)를 중심으로 종합적인 조직으로 개편되었으며 이들은 2006년 10월 ‘이라크-이슬람국가(ISI)’로 조직명을 바꾸게 된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이슬람 국가’ 라는 표현이 국제언론에 노출되면서 I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다른 과격한 무장 조직들안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가 외부의 적인 미국 및 서방세력과의 전투에 몰두해가기 시작할 때, IS는 철저히 이라크 내부를 장악하는데 집중했다. 미국이 붕괴시킨 사담 후세인 정권의 잔존 세력들도 흡수했고, 이라크에서 대다수 시아파 세력까지 끌어들였다. 이들 시아파 세력들에게 시아파 교리를 버리라고 강요하여 이를 듣지 않은 자들을 참수하고 시아의 교리를 버린 자들을 거두어 거대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후세인 잔존 세력들이 알 바그다디에게 쉽게 흡수된 것은 알 바그다디 자신이 후세인 정권에서 장교를 지냈었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 바그다디와 ISI 대원들은 교도소를 습격하여 죄수들을 탈옥시켰고 이들은 ISI의 과격주의 교리에 감명받아 매우 충실하고 과격한 조직원으로 회개하며 변모하였다. ISI는 점점 더 이라크를 장악했고 이로 인하여 이라크 임시 정부는 ISI를 제어하지 못하자 이라크는 일종의 무법지대로 변해갔다. 2010년 말부터 2011년 초까지 이집트에서부터 발생하여 전 중동 지역으로 분파한 일명 ‘아랍의 봄(Arab of Spring)’ 이라는 시민 혁명은 ISI에게 오히려 기회로 다가오게 된다. 시민들은 민주화 열기로 인하여 조직적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했지만, 잠시 정권만 변화되었을 뿐 독재세력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특히 시리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는 내전으로 바뀌는 현상을 띄게 되었고, ISI는 이러한 시리아의 혼란을 기회로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하려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의 시작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는 알 바그다디에게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지 말고 시리아 내전에서 반(反) 정부 세력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ISI는 2013년 4월 조직의 이름을 ‘이라크와 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이라고 바꾸었고 알카에다의 지시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알카에다는 이 조직을 해체하라고 촉구했으나 알 바그다디는 그 명령을 듣지 않고, 2013년 11월에는 알카에다가 보낸 특사를 살해했다. 이에 알카에다는 알 바그다디가 참수 등 극형을 일삼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결국 2014년 2월 알 카에다는 “ISI는 우리와 아무 관련 없는 조직” 으로 규정하여 공개적으로 절연을 선언했다. 독자적인 세력이 된 ISI는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해나갔고 2014년 6월 9일 이라크 최대 유전도시 모술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수립을 선포하게 되면서 테러를 자행하는 대규모 조직에서 국가로 탈바꿈되는 이전의 알 카에다와 다른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IS가 거의 붕괴될 때 IS에 가담되어 있던 몇몇 지도부와 중앙아시아 극단주의 단체, 신장위구르의 살라피스트들이 호라산으로 대거 이동했다. 이들 IS들의 수장은 2014년 IS의 수장이었던 알 바그다디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합류했던 파키스탄 국적의 하피즈 사이드 칸이었다. 그는 2015년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과 이란의 북동부 지역에서 기존의 ISIS에서 호라산(Khorasan) 지역에서 출발했다는 의미로 지명인 호라산(Khorasan)을 따 이니셜로 ISIS-K라는 조직을 재건했다. 이들 또한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알라의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프 시대에 세워진 이슬람 국가를 재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교도는 물론 무슬림 중에서도 ISIS-K와 함께 하지 않고 ISIS-K의 뜻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모두 적으로 규정했다.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와 같이 잔인한 테러를 벌이고 있는 ISIS-K의 조직원이 얼마나 되는지, 자금을 얼마나 비축해두었는지, 앞으로 어떤 테러를 계획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정확하기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통 이슬람교는 여성을 성노예로 삼고 같은 무슬림을 살해하며, 자살 폭탄 테러를 일삼는 ISIS-K를 이슬람 무장단체로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슬람 국가 건설(Islamic country construction)’ 을 명분으로 테러를 자행하고 있으며 예측할 수 없고 예방할 수 없는 ISIS-K의 테러에 대해 모든 이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라 그에 대한 대처가 시급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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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엄청난 변화, 열악한 인프라의 개선과 갑자기 밝아진 미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나는 소피아 대학 소속일 때, 베오그라드 대학까지 출강을 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의 얘기다. 일주일에 두 번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밤 9시 50분에 출발하는 야간 열차를 타고 침대칸에 눈을 붙이면 새벽 5시 40분에서 아침 6시 10분 사이에 반드시 도착하게 되어 있다. 나는 주로 당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대학은 일주일에 두 번,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대학은 일주일에 한 번, 그리스 테살로니키 대학과는 2주에 한 번, 이스탄불 대학과는 2주에 세 번의 시간 강사로 출강하는, 일종의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었다. 베오그라드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EU가 아니면서 발전이 전혀 없이 퇴보만 존재하는, 그야말로 죽은 도시였다. 베오그라드라는 뜻은 "하얀 도시"라는 뜻인데 그게 그냥 말뿐이고 솔직히 회색 시멘트, 콘크리트로 덕지덕치 쳐발라 놓은 그런 도시다. 간혹 베오그라드로 여행 오는 미국인들이 우스겟소리로 붙인 별명이 "Godamgrad"였다. 베트맨이 온다해도 발칸의 그 어떤 도시보다 이 도시는 구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뜻에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 정도로 베오그라드는 죽은 도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곰팡이 썩는 꿉꿉한 냄세, 밝지 않고 어딘가에 지친듯한 무표정의 시민들, 거리마다 넘쳐나는 쓰레기들, 여행자만 보면 돈 달라고 달려드는 까무잡잡한 집시들이 넘쳐 나는 도시로 세르비아 최고 명문 베오그라드 대학의 학생들은 이 대학에 오는 목표가 독일이나 프랑스로 탈출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해 돈을 벌려는 것이다. 내가 한창 시간 강사로 강의할 때 학생들 중 세르비아에 남겠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말 그대로 저마다 세르비아를 탈출하려고만 하지 고국에서 뭘 해보려는 젊은이들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심각한 인재 유출로 이어진다. 게다가 정치권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오는 부패의 사슬, EU와 미국의 제재와 더불어 세르비아를 말려 죽이기 위해 온갖 흉계를 꾸몄고 형제 국가인 러시아도 당시에는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기에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같은 EU 국가들, 코소보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적대국에 둘러싸인 채, 외롭게 고립되어 있었다. 이 때 혜성 같이 등장한 영웅이 바로 알렉산데르 부치치(Александар Вучић)이다. 부치치는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이나 EU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그들은 끊임 없이 세르비아 국내에서 협잡질을 일삼는 것을 파악하고는 본래 형제국가였던 러시아와 가까워졌다. 이어 중국과 더 밀착해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과 투자를 받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와 중국은 양국에서 공산주의가 시작된 이후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었다. 양국 모두 공산 독재 체제였지만 시스템은 전혀 다른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1945~1992)에 속했던 세르비아는 진보적 공산주의 체제로 독재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고, 일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하면서 개인사업과 소유를 어느 정도 허용했었다. 반면 중국은 농촌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 형태의 공산주의로 발전했다. 물론 현재 두 나라 정치 체제는 모두 사회, 경제, 정치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국은 공산당, 세르비아는 민족주의 우파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세르비아는 의회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변화와 더불어 자유 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향한 경제적 변화를 위해 다당제를 확립했다. 그럼에도 중국과는 정치적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중국은 외교정책에서 항상 세르비아를 지지해왔다. 1990년대 집단서방과 미국은 세르비아를 발칸반도 민족분쟁의 주범으로 여기고 세르비아를 공격했지만, 중국은 세르비아를 유럽 내 정치적 동맹국으로 여기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2006) 정권을 지지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은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을 규탄했고, 현재 코소보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있으며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지난 20년 동안 더욱 견고해진 양국의 정치적인 관계는 경제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관계가 격상하여 발전하고 있다. 2013년 중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대륙을 관통하는 일대일로 정책을 시작한 이후 세르비아는 중국과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협력으로 이어졌지만 주변 EU 국가들의 방해로 이 또한 지지부진했었다. 따라서 중국의 투자가 늦춰지는 몇 년 동안 세르비아는 경제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스템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2017년에 당선된 알렉산데르 부치치 대통령은 코로나 시기에도 EU 국가들이 백신을 나누어 주는 것을 거부하고 시리아 난민을 세르비아 밀어넣으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국경을 통제하고 중국으로 시노백, 시노팜 백신을 받아들이면서 정보기술과 고부가가치 제품, 인프라 프로젝트 등도 중국의 투자를 요청했다. 2020년 하반기부터 물밀듯이 중국의 투자 업체들이 세르비아 밀려 들이왔다. 이는 대 세르비아만을 좋게 하려는 자선사업의 성격이 아니다. 이는 중국이 협력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 있어서 일대일로 추진의 최우선 목적은 지정학적 존재감을 강화하는 동시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중국 기업들은 EU 기업들과 경쟁할 때 수많은 공식, 혹은 비공식적인 통제의 측면에 직면했기 때문에 EU 시장으로의 진입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에게는 소규모 국가나 프로젝트가 EU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고 세르비아가 그 거점이 될 수 있다. 이에 지난 3년여 동안 40억 달러(약 4조 8,000억 원)가 넘는 중국의 대(對) 세르비아 대출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투자금들 중 약 40%가 세르비아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작업으로 투자되었다. 이후 부치치 대통령과 중국이 맺은 협정에 의하면 향후 4년 안에 40억 달러 이상이 추가로 투자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양국의 협력은 2011년 중국 최초의 대규모 프로젝트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Belgrade)의 제문-보르카 대교(Zemun-Borca Bridge) 건설부터 시작되었고 그 주변에 각종 아파트들과 오피스텔들 건설되기 시작했다. 오늘 찍은 사진이 바로 그러한 아파트들과 오피스텔들이다. 이후 세르비아는 중국의 경제 파트너들을 대규모 프로젝트에 추가로 참여시켜도 되는 믿을 만한 파트너로 간주했다. 현재 추진 중인 가장 중요한 인프라 프로젝트는 2018년에 시작된 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 철도와 2014년 시작된 세르비아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E-763 고속도로 건설에 있는데 이게 이제 속도를 좀 내고 있다. 인프라 개발과 투자 유치를 통해 경제발전 속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길 바라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국의 투자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실제로 세르비아의 모든 인프라들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EU 가입이 각종 이유들과 트집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는 상황애서 EU 구조 기금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없게 된 세르비아의 입장으로 볼 때 중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치는 매우 합리적인 대안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세르비아 정부는 정치 및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지정학적 관점으로 볼 때 세르비아는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동맹국으로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코소보의 지위와 관련하여 유엔에서 세르비아를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큰 영향력 가진 국가다. 이는 중국과의 향후 프로젝트 협상에서 세르비아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 여기에 세르비아의 입장이 반영된 최종 합의가 도달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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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실시간 칼럼 기사

  • 뉴스나 어디에서도 들을 수 없는 불가리아의 현실
    현재 불가리아 소피아의 가장 큰 문제가 난민이다. 그렇지 않아도 집시들 처분 문제 때문에 골치 아픈데 EU가 보조금 가지고 불가리아 같은 나라에 협박을 하고 있다. 받아들인 난민들 숫자만큼 보조금 지급하겠다는 것이다. 문제는 EU 탈퇴하면 되지 않느냐 하는데 EU 탈퇴하거나 보조금 못 받음 불가리아의 경제는 회생 불능이 된다. 과거 불가리아의 차르였던 시메온 2세가 총리가 되고 불가리아를 2004년 나토, 2005년에 EU 가입 승인을 이끌어냈다. 그에 따라 국유재산 민영화 과정 문제 등에서 수많은 재산을 축적했고 대놓고 부패 행위를 저질렀는데도 왠일인지 EU는 시메온 2세를 문제 삼지 않았다. 불가리아가 대표적인 친러시아 국가고 러시아를 견제하기 위해 불가리아는 무조건 나토와 EU에 묶어 놔야 러시아가 세르비아 문제와 복잡한 발칸 문제에 참여를 못하게 되니까 시메온 2세의 비리를 눈감아 준 것이다. 실질적인 문제는 그 다음이다. 시메온 2세 다음으로 총리에 오른 세르게이 스타니셰프(Сергей Станишев)는 아예 불가리아의 경제를 EU에 올인시켰다. EU가 시키는대로 다하고 국가 주권 행위도 EU나 나토의 승인이 없으면 발휘하지 못하는게 불가리아의 현실이다. 그러니 가난한 불가리아 국민이 80% 이상에 중산층은 갈수록 쪼그라 들어가고 젊은이들이 불가리아를 버리고 독일이나 프랑스로 일자리 찾아 떠나는게 현실이다. 아니면 중국과 러시아로 떠나는 불가리아 젊은이들도 많다. 동유럽에서 가장 많은 중국 식당이 포진해 있는 곳 또한 불가리아 소피아다. 이 중국 식당은 요리 운영도 하지만 불가리아 젊은이들이 중국으로 취업하기 위한 취업 알선소 역할도 한다. 특히 소피아에 고등교육을 받은 인재들이 어딘가에서 알바를 하고 그걸로 벌어들인 돈 뭉치를 가지고 중국 식당에 찾아가면 비자 의뢰와 더불어 연결되어 있는 중국 내 사무소와 즉각 커넥션이 이루어진다. 그 사무소로 인해 취업할 기업들을 소개받고 그 기업들 중 하나를 고르면 된다. 반면 러시아와 불가리아는 현재 그 관계가 소원해졌어도 여전히 양국 간의 무비자 협정은 유지되고 있다.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무비자로 모스크바에 가서 일자리를 구하고 직장에서 취직한 불가리아 젊은이의 취업 비자 취득을 도와준다. 이 불가리아 젊은이들은 많게는 15만 루블 (한화 약 225만원)에서 10만 루블 (한화 약 150만원)을 번다. 불가리아에서 고작 많이 벌어야 500유로 (한화 약 73만원)보다 2.5배 더 버는건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그렇게 젊은이들이 떠난 빈 자리를 난민들이 채우고 있다. 소피아의 거리에는 10년 전에 상상도 못했던 히잡 쓴 여인들이 상당수 포착되고 있다. 대개 국적이 어딘지 물어보면 10중 8,9 시리아다. 능력이 있고 고학력자인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EU 보조금을 털어 불가리아 현지 젊은이들이 떠난 자리에 취직시켜 주고 정착할 수 있게 정착금까지 준다. 같은 국민인 불가리아인들에게 그렇게 해주지 않으면서 시리아 난민 출신에게는 아낌없이 퍼줘야 한다. 게다가 이 자금이 난민들에게 잘 쓰이고 있는지 EU BULGAR CREDIT BANK 라는 곳에서 감시 요원들까지 투입해 불가리아 재무부 내정까지 간섭하면서 일일히 트집을 잡는다. 학력이 떨어지는 시리아 난민들에게는 불가리아의 3D 업종에 일자리가 주어진다. 그리고 사진에서와 같이 부서지고 붕괴 위험이 있는 집에서 생활한다. 본래 저런 집은 대개 집시들이 차지했었는데 불가리아 최하층민인 집시들은 시리아 난민에게 아예 밀려나고 있다. 요즘 불가리아에서 집시를 찾는게 쉽지 않은 이유가 구걸이나 소매치기하며 밥벌이하는 그들이 시리아 난민들에게 밀려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불가리아에서는 시리아 난민들 때문에 고민이 많고 자국민의 불만은 팽배해져 간다. EU가 하고 있는 행태가 얼마나 무책임한 짓인지 잘 보여주고 있는 모델이 불가리아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무조건 서유럽, EU 하면 옹호하는 상당수의 한국인들은 이러한 현실을 보지 못한다. 그들은 동유럽 현실에 관심도 없고 프랑스, 독일, 네덜란드, 이탈리아, 오스트리아, 스페인 같은 나라들에나 갔다와서 EU의 위대함을 선전하고 다닌다. 그 외의 유럽 국가들은 가난하다며 무시하고 알 필요도 없다며 선을 그어 버린다. 그들이 잘 지원해주고 있는데 못 사는 것은 그들 탓이라며 목소리를 높인다. 그리고 대한민국 언론의 중추라는 조, 중, 동은 이런걸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이런거 취재하는 한국 기자는 단 한 명도 보지 못했다. 그저 유럽이나 미국이 주는 뉴스만 번역해서 올리는 "외국 언론 번역기"에 불과할 뿐, 기자 정신은 사라진지 오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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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30
  • 세르비아, 코소보의 독립을 16년 만에 승인하나?
    1999년 코소보 전쟁이 발생하면서 UN은 코소보를 관할 하에 두었다. 그러면서 2007년에 코소보는 독립국임을 선언했으며 2008년 2월 17일에 독립에 성공했다. 그러나 코소보의 국제적 승인은 복잡하게 얽혀 있는 상태였고 초창기에는 국가로 승인한 국가들이 47개 정도였지만 차츰 늘어 현재 193개 유엔(UN) 회원국 가운데 94개국으로부터 독립 국가로써 승인을 받았다. 그러나 세르비아는 코소보를 자국의 주권 영토 일부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코소보만의 단독 주권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게다가 코소보는 세르비아에 있어서 남슬라브계가 첫 역사를 시작했던 성지(聖地)와 같은 곳이라 매우 중요한 곳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코소보를 잃는다는 것은 세르비아인의 국가적, 민족적 정체성과 뿌리를 잃는다고 보고있으며 지금도 코소보는 미국과 집단서방에 의해 강제로 앗아간 지역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코소보는 정식국가로써 UN의 가입이 사실상 불가능한 상태이다. UN의 상임이사국들이 코소보의 국가 존속 여부와 더불어 UN 가입을 만장일치로 승인해야 하는데 세르비아의 형제 국가인 러시아가 줄곧 반대하면서 만장일치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거기에다 이번에는 세르비아에 거대 투자를 하고 있는 중국이 반대하고 있어 코소보는 정식 국가 승인과 UN 입성이 불가능한 상태에 있다. 더불어 EU나 나토 가입도 마찬가지다. EU나 NATO의 회원국들 중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가 가입에 반발하고 있다. 나토의 경우, 터키도 코소보의 나토 가입을 적극 반대하고 있는 입장이다. EU의 수장격 국가들인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 이탈리아 등이 스페인,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그리스, 키프로스, 헝가리를 설득하고 있고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스페인과 키프로스에게 승인은 받아냈지만 친러인 헝가리와 슬로바키아는 세르비아와의 절친한 관계를 고려하여 움직이지 않고 있으며 EU 국가지만 세르비아와 그나마 교류가 각별한 루마니아 또한 쉽지 않다. 그리스의 경우, 북마케도니아와의 영토 문제 및 국호 문제로 인해 슬라브계와의 충돌을 꺼리고 있는 입장이다. 게다가 세르비아는 같은 정교회 국가이고 코소보는 상당수가 알바니아계 무슬림들이다. 굳이 세르비아와 갈등을 키워가면서까지 코소보의 독립 및 EU, 나토 가입을 승인해야 할 필요는 없다. 코소보 북부에는 세르비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코소보 북부의 미트로비차에는 대부분의 주민들이 세르비아인으로 알려져 있다. 세르비아는 코소보 공화국이 아니라 지금도 코소보와 메토히야 자치주(Аутономна Покрајина Косово и Метохиja)로 인정하고 있는 입장이다. 반면 알바니아에서는 라프시 이 두카지니트(Rrafshi i Dukagjinit), 약칭 '두카지니(Dukagjini)'라고 부르며 두카지니가(Dukagjinët)는 알바니아계 씨족이자 봉건 귀족 가문으로, 이들이 세운 두카지니 공국(1387–1444)은 코소보를 장악하고 있던 국가였다. 알바니아계 무슬림인 코소보인들은 두카지니 공국을 자신들의 뿌리로 인정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코소보는 세르비아 뿐 아니라 알바니아와의 문제도 함께 얽혀 있다. 좁게 언급하자면 세르비아와 코소보의 문제이기도 하지만 크게 보자면 세르비아와 알바니아의 문제이기도 하다. 여기에 미국 및 EU가 중재에 나서면서 세르비아와 알바니아, 그리고 코소보의 관계 정상화의 물꼬가 트이기도 했다. 이러한 중재의 배경에는 미국과 EU의 강력한 경제 제재 압박과 EU 가입이라는 조건을 내걸어 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EU에서 세르비아가 EU에 가입하기 위해서는 무조건 세르비아가 코소보와 관계를 정상화 하면서 독립국으로 인정하고 코소보의 유엔 가입을 도울 것을 조건으로 걸고 있었다. 다만 앞서 언급한데로 세르비아의 형제국인 러시아가 거부하는 한 코소보는 유엔의 정식 회원국이 될 수 없다. 이는 해결 방법이 있는데 세르비아와 코소보가 관계회복을 하고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UN 가입 승인을 요청한다면 러시아도 코소보의 UN 가입을 막을 명분이 없기에 가능하다는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 입장에서는 EU와 미국의 경제 제재를 풀고 중국과 러시아의 투자를 유치하자는 입장이었다. 부치치는 중국의 도움을 받아 경제를 재건하고 수도인 베오그라드의 낙후된 인프라를 개선하고 있지만 과도한 중국에 대한 경제력 의지는 좋지 않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과도하게 중국에 대한 의존도를 줄이고 EU, 미국과도 좋은 관계를 구축하며 중국, 러시아 사이에 세르비아 만의 독자적인 형태를 구상하려 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을 내주고 뼈를 취해야 한다는 판단을 했던 것 같다. 결국 2023년 2월 2일 정규 의회에서 코소보와의 관계 정상화 필요성을 역설했고 이에 대한 후폭풍은 거세게 부치치 대통령에게 몰아쳤다. 반발한 야당 의원들이 연단으로 몰려나오면서 본회의 진행이 어려운 상태까지 갔던 것이다. 부치치 대통령은 연설을 통해 의원들에게 코소보와의 협상 경과를 설명하며 유럽의 길을 계속 가는 것이 세르비아의 이익을 위해 매우 중요하다고 했다. 부치치 대통령은 미국과 EU가 세르비아에 뼈아픈 양보를 요구하고 있지만 EU 가입을 위한 길을 계속 가야 한다고 말했다가 반역자라는 욕까지 먹어야 했다. 게다가 친러시아 우파 시위대가 대통령 집무실 앞에서 집회를 열고 부치치 대통령에게 코소보와의 대화를 당장 중단하고 서방의 국교 정상화 요구도 거부하라고 요구하기까지 했다. 세르비아는 공식적으로는 EU 가입을 희망하면서도 여전히 러시아와의 친분을 유지해왔다. 세르비아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비난하면서도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거부했던 것은 어느 진영에도 휩쓸리지 않고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세르비아만의 국익을 취하며 홀로서기를 시도하려 한 것이다. 그리고 세르비아의 상황을 본다면 부치치의 이런 결정은 표면적으로는 탁월하다. 그러나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하고 UN 가입을 승인하다 해도 EU가 과연 약속대로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승인해줄까? 나의 개인적 사견으로 본다면 그렇게 한다 해도 세르비아의 EU 가입은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가능성보다 낮을 것으로 본다. 본래 유고슬라비아 시절부터 있어 왔던 서방 국가들의 유고 쪼개기는 동유럽-발칸에서 러시아를 직접적으로 견제하여 러시아와 맞서려는 전략 중에 하나였기 때문에 이같은 기조가 변할리 없다. 이는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만 봐도 알 수 있는데 서방이 원하는 것은 결국 최종적으로 슬라브인들의 세력 약화와 민족적 소멸에 있다. 만약 세르비아가 코소보 독립을 승인한다면 EU는 여러 이유를 들어 세르비아의 EU 가입을 연기할 것이고 오히려 더 고립되는 상황에 몰릴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징후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EU 가입 협상이 개시되었다는 것에서 알 수 있다. 얼마 전, 타냐 미시체비치(Tanja Miščević) 세르비아 유럽통합부 장관은 EU가 우크라이나, 몰도바, 조지아의 EU 가입에는 빠르게 반응했지만, 서부 발칸 지역 국가들의 가입은 추진력이 부족하다고 발언했다. 미시체비치 장관은 유고슬라비아 전쟁이 끝난 이후 EU 확장에 대한 욕구가 열정적이지 않았으나,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확장에 대한 추진력이 다시 만들어졌다고 하면서 세르비아의 EU 가입에 대한 협상 늦어지고 있다며 불평했다. 이에 유럽집행위원회(EC)는 예비 EU 회원국들의 활동 상황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우크라이나, 몰도바의 가입 협상 단계 시작을 지지하고, 조지아는 EU 후보 자격을 부여했다. 그러면서 EC는 세르비아가 러시아에 대한 제재에 동참하지 않고 코소보와 긴장을 완화하려는 노력에 진전이 없다고 지적하면서 세르비아 EU 가입에 대한 협상이 진척되지 않고 있는 것은 세르비아의 탓이라 언급했다. 2023년 12월 14일~15일에 있었던 EU 정상회의에서 세르비아의 가입에 대해 논의했지만 결국 의미 있는 대화는 오고가지 않았다. 그러면서 EU는 세르비아와 코소보 양측에 관계 개선을 위한 의무를 이행하라고 촉구했고 세르비아는 법치 분야를 비롯한 EU 가입 관련 개혁을 시행하고 있지만, EU의 요구 사항에 부합하기 위해서는 추가적인 개선이 필요하다며 시간을 달라고 했다. 그리고 일주일 전인 4월 22일 룩셈부르크에서 열린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세르비아의 EU 가입 조건으로 코소보가 UN이나 유럽평의회(Council of Europe) 등 국제기구 가입하는데 세르비아가 여기에 간섭하지 말 것을 요구하는 가입 문의 35장을 개정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은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국제 기구 가입을 반대하지 않아야 한다는 EU의 요구를 강화하면서 세르비아를 압박했다. 2023년 북마케도니아(North Macedonia) 오흐리드에서 체결된 오흐리드 협정(Ohrid Agreement)에서 세르비아가 코소보의 행정 문서를 인정하고 코소보의 국제적 활동을 방해하지 않는 약속을 문서화한 바 있는데 이를 35장에 추가하여 외교적 압박을 가해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만들고 러시아를 제재하려는 목적을 달성하려는 것이다. 그런데 이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대한 정치적 딜레마가 걸려 있다. EU가 나토가 노리는 것 중 하나가 세르비아 내에서 정치적 갈등과 분열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속에서 코소보 북부의 셰르비아계 지역에서 자치권을 둘러싼 긴장 상태가 지속되고 있다. 부치치 대통령이 EU와 나토의 이러한 분열 획책 시도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전한 바 있다. 부치치는 결국 미국, EU와 중국, 러시아 사이에서 균형을 이루며 주권을 강화하고 독자 노선을 행하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이다. 미국과 EU는 코소보 독립 승인 및 UN 가입, 러시아 제재 두 가지 문제를 가지고 끝까지 물고 늘어질 것이고 부치치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만 간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30
  • Unveiling the Mona Lisa's Secret Twin: A Tale of Artistic Intrigue
    Sure, you know about Leonardo da Vinci's masterpiece, but did you know there's a doppelgänger chillin' in Madrid's Prado Museum? That's right, folks, we're talking about the OG copycat, created by one of da Vinci's apprentices way back in the day. It's like a Mona Lisa time machine, offering a glimpse into the artistry of the Renaissance maestro himself. What did they find, you ask? Well, buckle up, because it's a wild ride. Turns out, this copycat wasn't just phoning it in—it followed da Vinci's playbook like a boss. Sure, it might lack a bit of that signature da Vinci magic, but it's still a treasure trove of insights into the original masterpiece. From the color palette to the subtle tweaks da Vinci made along the way, this Prado Mona Lisa is a bona fide masterpiece in its own right.
    • 칼럼
    • Thoughts Of Seraphine
    2024-04-30
  •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처형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독일어로 마리아 안토니아 조세파 조하나(Maria Antonia Josepha Johanna)로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는 마리아 안토니아(Maria Antonia)를 프랑스어로 재해석한 이름이다. 그녀는 오스트리아를 지배한 합스부르크 제국의 여제인 마리아 테레지아와 프란츠 슈테판 신성로마제국 황제 사이의 막내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14세에 프랑스 루이 16세와 결혼해 왕세자비가 되었고, 얼마 후 남편이 프랑스의 왕위에 오르자 그녀 또한 왕비가 되었다. 그녀는 미모도 뛰어났고, 머리도 명석했던 실로 당시 드물게 모든 것을 갖춘 여자였다. 하지만 18세기 말에 발생한 프랑스 혁명은 그녀를 마녀와 같은 이미지로 만들었다. 1793년 10월 16일 낮 12시 15분 그녀의 목에 길로틴 칼날이 떨어지면서, 한창의 나이인 38세를 일기로 참수를 당하게 된다. 당시 그녀는 온갖 혐의를 쓰고 갖은 중상 모략을 당했다. 그녀에게 씌워진 혐의들은 재정 낭비, 부패, 오스트리아와의 결탁, 루이 16세를 타락시킨 혐의, 시민들에 대한 기만, 전쟁 유발 등이었지만 놀랍게도 구체적인 증거는 거의 없었다. 마지막으로 죄목 하나가 추가되었는데 이는 근친상간의 혐의였다. 이는 본인의 아들을 겁탈했다는 죄목이었는데 장남인 루이 조지프는 8세에 죽었고 차남인 루이 17 또한 당시 재판에서의 나이로는 고작 8세였다. 즉, 어머니가 8살의 아이를 겁탈했다는 얘긴데 지금 들어도 이는 마리 앙투아네트를 사형시키기 위한 억지 죄목이나 다름없었다. 루이 17세의 변론과 이 마리 앙투아네트의 근친상간 죄목 및 당시 재판에 대해서는 후일 상세히 포스팅하고자 한다. 이미 그녀의 어떤 변론과 증언도 이 재판에서는 통하지 않았다. 이미 사형이라는 처결을 결론 지어 놓고 한 재판이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마침내 사형을 언도받았고 이는 프랑스 헌정 역사상 최악의 사법 살인(Judicial murder)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리 앙투아네트에 관해서는 상당한 양의 소설과 영화, 역사물의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그녀는 “빵이 없으면, 케이크를 먹으면 된다”라는 파리 군중들에게 말했다고 하지만 정작 그녀는 그런 말을 한 적이 없고 그녀를 마녀로 몰아 처형하기 위한 정당성, 국민 혁명의 정당성을 위해 후대에 창작한 말이다. 그녀는 평소에 왕비로써 매우 검소하게 생활했고, 프랑스의 내정에 간섭하지 않았으며 프랑스로부터 국제적인 이득을 노렸던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가문과 자신의 친모 및 친부의 요구를 받아들이지도 않았다고 한다. 그리고 남편인 루이 16세에게 매우 순종적이었다. 프랑스 대혁명이 220여 년이 지난 현재 많은 저술들이 나타나, 앙트아네트에 대한 잘못된 정보, 루머들로 인해 정치적으로 타살되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그렇다면 당시의 프랑스 군중들은 왕비를 왜 마녀로 만들었을 정도로 증오했을까? 첫 번째, 마리 앙투아네트는 프랑스의 오랜 라이벌이자 숙적 국가인 합스부르크 제국 출신이라는 사실에 기인한다. 당시 프랑스는 합스부르크 제국에 대해 좋지 않은 시선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실상 루이 16세와의 혼인은 정치적으로 프랑스와 합스부르크를 연결시키려는 정략결혼 형식으로 생각하고 있었다. 더불어 프랑스와 합스부르크 가문이 제위를 승계한 국가들은 15세기 이후 오랫동안 유럽 내에서 패권 경쟁을 벌이며 대립해왔다. 그러다가 신흥 프로이센이 강력해지면서 오스트리아가 전략적으로 프랑스와 연대하기 위해 마리 앙투아네트를 프랑스 왕가로 시집보낸 것인데 이는 프랑스 시민들이 원하던 것이 아닌, 그저 자신들보다 상류계급인 부르주아들의 정치 놀음에 지나지 않았다. 두 번째, 그녀에 대한 사실적인 부분보다는 각종 정치 선전성 루머에 의해 국민들의 분노가 폭발했다는 점에 있다. 실제 그녀를 재판정으로 이끈 결정적 사건은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기 사건이었다. 이는 라 모트 백작 부인이 앙투아네트를 사칭하여 거액의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편취했는데 이는 앙투아네트가 관여한 사건은 아니었다. 이 사건의 발단은 프랑스 대귀족 출신인 루이 드 로앙(Louis René Édouard de Rohan) 추기경의 타락, 그로 인해 테레지아와 앙투아네트가 그를 멀리하자 그에 대한 앙심으로 라모트 백작부인을 가까이 하여 이 사건을 공모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로 인해 조작된 루머는 진범이 앙투아네트이고, 라모트 백작부인은 이용당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혁명재판에서 이 사건은 증거가 없기 때문에 무고로 확인되었다. 세 번째, 당시에 시대상을 지배했던 상류층 여성에 대한 혐오였다. 일본의 소설가인 엔도 슈사쿠(遠藤周作, 1923~1996)는 이와 같은 프랑스 사회에 만연했던 여성 혐오의 관점에서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マリー・アントワネットの生涯)』를 집필하면서 이 혁명재판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피력했는데 이는 그녀가 여자였고 상류층이었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 이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한 포르노그라피는 노래와 우화, 가상 전기와 고백, 연극에 이르기까지 모든 장르를 망라하면서 그녀를 풍자했다. 대부분 <마리 앙투아네트의 생애에 대한 역사적 논문>, <루이 16세의 부인, 마리 앙투아네트의 자궁의 분노>, <프랑스 국왕 루이 16세의 부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의 삶, 처녀성 상실부터 1791년 5월 1일까지>, <프랑스의 전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의 은밀하고 방탕하고 추잡한 삶> 등 제목만 보아도 그녀에 대한 수많은 저작들의 내용이 얼마나 저열하고 악의적인지 짐작할 수 있다. 물론 이 서적들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첫 번째 연인으로 추정되는 독일인 장교를 비롯하여 자신 주변의 거의 모든 사람들과 애욕적인 포옹을 하고 있는 삽화들로 채워져 있었다. 그리고 다이아몬드 목걸이 사건의 로앙 추기경과 라파예트, 바르나브 등도 왕비의 성적 파트너로 등장하면서 역사적 근거와 별개로 그녀를 성적으로 음탕하고 온갖 자극적인 이미지로 몰고 갔다. 여기에 발기 불능인 국왕 루이 16세를 대신하여 아르투아와 폴리냑이 왕비를 상대하고 있는 채색 판화도 있고, 두 여자와 한 남자가 3인 1조를 이루어 섹스를 즐기는 삽화도 존재했다. 요즘 같으면 엄청난 수위의 성희롱을 300년 가까이 하고 있는 셈이다. 역사적 고증과 전혀 상관없는 가십용 거리로 전락한 앙투아네트의 모습과, 네티즌들이 온갖 악플 및 악의적이고 근거없는 가십거리로 루머를 만들어 퍼트려 몇몇 여성 연예인들을 자살로 이끌게 만드는 요즘과 별다를게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혁명 세력은 근친상간이라는 인류의 금기까지 내세워 이를 기정 사실로 덮어 씌우고 혁명을 일으킨 것에 대한 정당성 때문애 그녀를 희생시켰다. 정상적인 재판이었다면 그녀는 단죄될 수 없었다. 더불어 요즘과 같이 MZ 세대가 대두되고 자유를 누리되 책임을 지지 않으며 성별 대립 및 성 차별 등등의 각종 양극화적 논란으로 볼 때 프랑스 대혁명과 혁명 재판은 지금의 관점과 비교하여 재연구할 필요가 있다. 따라서 마리 앙투아네트가 역사상 최초의 여혐(女嫌, misogynie)의 희생자였고 상류층, 부르주아 혐오에 대한 최초의 희생자였음을 단언할 수 있다. 그녀는 정치적 영역에서 여혐의 희생자가 된 사상 최초의 공적 여성이었으며 시대적 희생양이었다. 오늘날 대한민국 양극화 된 사회와 매우 유사한 시대가 프랑스 대혁명 시기의 시대라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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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IS의 뿌리와 알 자르카위(Al-Zarkawi), 그리고 알 바그다디와 하피즈 사이드 칸 ISIS-K (호라산 IS 조직)
    IS의 뿌리는 요르단 출신의 알 자르카위(Al-Zarkawi)가 1999년에 만든 ‘유일신과 성전(Monotheism and jihad)’이라는 조직에서 유래한 근본주의 조직이다. 이 단체는 2004년 이라크 알 카에다라는 이름으로 개명했는데 이 조직이 바로 한국인 김선일 씨를 납치하고 참수하였기 때문에 한국에는 이미 이름이 익히 알려진 조직이다. 김선일 씨 뿐 아니라 이라크의 시아파 주민들과 모스크, 유엔 인사 등을 상대로 지속적인 테러를 자행했던 테러단체이다. 명문 가문 출신으로 부유한 집안에서 자란 오사마 빈 라덴과는 다르게 알 자르카위는 요르단 암만의 빈민가 출신으로 처음부터 독실한 무슬림은 아니었다. 그는 여러 범죄를 저지르며 감옥을 전전했고 불우한 청년시절을 보냈다. 그러던 도중 이라크 쿠파를 참배했을 때 한 인물을 만나게 되는데 그가 알 하산 쿠르카(Al-hasan qurka)라고 하는 이맘이다. 쿠르카는 대단한 과격주의자로 빈민가 탄생부터 불우한 세월을 보낸 자르카위에게 전 세계를 알라의 앞으로 결집하여 신정국가를 이루는 것이 그 동안의 죄를 용서받고 알라의 전사로 거듭날 수 있다는 말에 감명을 받아 자르카위는 아주 독실한 원리주의자로 재탄생했다. 그렇게 그가 레바논으로 들어와 IS의 전신인 레바논 이슬람 원리주의 알 카에다 조직을 창설하여 보다 과격하고 잔인한, 일종의 보여주기 방식의 테러에 집착하게 된다. 알 자르카위는 2006년 6월 미군의 공습으로 사망했지만, 그의 조직은 더욱 잔혹해졌고 더 확충되어 그들의 수하에 어느새 5만의 무리가 모아지게 되었다. 레바논 알 카에다 조직은 알 자르카위와 함께 조직을 지휘했던 알 바그다디(Al-Bagdadi)를 중심으로 종합적인 조직으로 개편되었으며 이들은 2006년 10월 ‘이라크-이슬람국가(ISI)’로 조직명을 바꾸게 된다. 여기에서 처음으로 ‘이슬람 국가’ 라는 표현이 국제언론에 노출되면서 IS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다른 과격한 무장 조직들안 오사마 빈 라덴의 알카에다가 외부의 적인 미국 및 서방세력과의 전투에 몰두해가기 시작할 때, IS는 철저히 이라크 내부를 장악하는데 집중했다. 미국이 붕괴시킨 사담 후세인 정권의 잔존 세력들도 흡수했고, 이라크에서 대다수 시아파 세력까지 끌어들였다. 이들 시아파 세력들에게 시아파 교리를 버리라고 강요하여 이를 듣지 않은 자들을 참수하고 시아의 교리를 버린 자들을 거두어 거대 세력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후세인 잔존 세력들이 알 바그다디에게 쉽게 흡수된 것은 알 바그다디 자신이 후세인 정권에서 장교를 지냈었던 이력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알 바그다디와 ISI 대원들은 교도소를 습격하여 죄수들을 탈옥시켰고 이들은 ISI의 과격주의 교리에 감명받아 매우 충실하고 과격한 조직원으로 회개하며 변모하였다. ISI는 점점 더 이라크를 장악했고 이로 인하여 이라크 임시 정부는 ISI를 제어하지 못하자 이라크는 일종의 무법지대로 변해갔다. 2010년 말부터 2011년 초까지 이집트에서부터 발생하여 전 중동 지역으로 분파한 일명 ‘아랍의 봄(Arab of Spring)’ 이라는 시민 혁명은 ISI에게 오히려 기회로 다가오게 된다. 시민들은 민주화 열기로 인하여 조직적으로 독재정권에 저항했지만, 잠시 정권만 변화되었을 뿐 독재세력은 다시 권력을 잡았다. 특히 시리아에서 일어난 민주화 시위는 내전으로 바뀌는 현상을 띄게 되었고, ISI는 이러한 시리아의 혼란을 기회로 시리아를 완전히 장악하려 하였다. 그때까지만 해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조직의 시작이었던 아프가니스탄의 알카에다는 알 바그다디에게 독자적인 조직을 만들지 말고 시리아 내전에서 반(反) 정부 세력을 지원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ISI는 2013년 4월 조직의 이름을 ‘이라크와 레반트 이슬람국가(ISIL)’ 이라고 바꾸었고 알카에다의 지시를 듣지 않았다. 그러자 알카에다는 이 조직을 해체하라고 촉구했으나 알 바그다디는 그 명령을 듣지 않고, 2013년 11월에는 알카에다가 보낸 특사를 살해했다. 이에 알카에다는 알 바그다디가 참수 등 극형을 일삼는 것을 공개적으로 비난했고, 결국 2014년 2월 알 카에다는 “ISI는 우리와 아무 관련 없는 조직” 으로 규정하여 공개적으로 절연을 선언했다. 독자적인 세력이 된 ISI는 시리아와 이라크 지역을 군사적으로 장악해나갔고 2014년 6월 9일 이라크 최대 유전도시 모술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새로운 국가수립을 선포하게 되면서 테러를 자행하는 대규모 조직에서 국가로 탈바꿈되는 이전의 알 카에다와 다른 성향을 보이게 된다. 이러한 IS가 거의 붕괴될 때 IS에 가담되어 있던 몇몇 지도부와 중앙아시아 극단주의 단체, 신장위구르의 살라피스트들이 호라산으로 대거 이동했다. 이들 IS들의 수장은 2014년 IS의 수장이었던 알 바그다디에게 충성을 맹세하면서 합류했던 파키스탄 국적의 하피즈 사이드 칸이었다. 그는 2015년 아프가니스탄 동부 지역과 이란의 북동부 지역에서 기존의 ISIS에서 호라산(Khorasan) 지역에서 출발했다는 의미로 지명인 호라산(Khorasan)을 따 이니셜로 ISIS-K라는 조직을 재건했다. 이들 또한 이슬람교의 창시자이자 알라의 마지막 예언자인 무함마드와 정통 칼리프 시대에 세워진 이슬람 국가를 재현하겠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교도는 물론 무슬림 중에서도 ISIS-K와 함께 하지 않고 ISIS-K의 뜻에 따르지 않는 이들을 모두 적으로 규정했다. 카불 하미드 카르자이 국제공항에서와 같이 잔인한 테러를 벌이고 있는 ISIS-K의 조직원이 얼마나 되는지, 자금을 얼마나 비축해두었는지, 앞으로 어떤 테러를 계획하고 있는지, 어느 정도의 무기를 보유하고 있는지에 대해선 어느 누구도 정확하기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정통 이슬람교는 여성을 성노예로 삼고 같은 무슬림을 살해하며, 자살 폭탄 테러를 일삼는 ISIS-K를 이슬람 무장단체로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들이 ‘이슬람 국가 건설(Islamic country construction)’ 을 명분으로 테러를 자행하고 있으며 예측할 수 없고 예방할 수 없는 ISIS-K의 테러에 대해 모든 이들을 더욱 불안하게 만들고 있는 상황이라 그에 대한 대처가 시급한 상황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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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9
  •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엄청난 변화, 열악한 인프라의 개선과 갑자기 밝아진 미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나는 소피아 대학 소속일 때, 베오그라드 대학까지 출강을 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의 얘기다. 일주일에 두 번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밤 9시 50분에 출발하는 야간 열차를 타고 침대칸에 눈을 붙이면 새벽 5시 40분에서 아침 6시 10분 사이에 반드시 도착하게 되어 있다. 나는 주로 당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대학은 일주일에 두 번,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대학은 일주일에 한 번, 그리스 테살로니키 대학과는 2주에 한 번, 이스탄불 대학과는 2주에 세 번의 시간 강사로 출강하는, 일종의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었다. 베오그라드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EU가 아니면서 발전이 전혀 없이 퇴보만 존재하는, 그야말로 죽은 도시였다. 베오그라드라는 뜻은 "하얀 도시"라는 뜻인데 그게 그냥 말뿐이고 솔직히 회색 시멘트, 콘크리트로 덕지덕치 쳐발라 놓은 그런 도시다. 간혹 베오그라드로 여행 오는 미국인들이 우스겟소리로 붙인 별명이 "Godamgrad"였다. 베트맨이 온다해도 발칸의 그 어떤 도시보다 이 도시는 구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뜻에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 정도로 베오그라드는 죽은 도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곰팡이 썩는 꿉꿉한 냄세, 밝지 않고 어딘가에 지친듯한 무표정의 시민들, 거리마다 넘쳐나는 쓰레기들, 여행자만 보면 돈 달라고 달려드는 까무잡잡한 집시들이 넘쳐 나는 도시로 세르비아 최고 명문 베오그라드 대학의 학생들은 이 대학에 오는 목표가 독일이나 프랑스로 탈출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해 돈을 벌려는 것이다. 내가 한창 시간 강사로 강의할 때 학생들 중 세르비아에 남겠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말 그대로 저마다 세르비아를 탈출하려고만 하지 고국에서 뭘 해보려는 젊은이들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심각한 인재 유출로 이어진다. 게다가 정치권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오는 부패의 사슬, EU와 미국의 제재와 더불어 세르비아를 말려 죽이기 위해 온갖 흉계를 꾸몄고 형제 국가인 러시아도 당시에는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기에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같은 EU 국가들, 코소보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적대국에 둘러싸인 채, 외롭게 고립되어 있었다. 이 때 혜성 같이 등장한 영웅이 바로 알렉산데르 부치치(Александар Вучић)이다. 부치치는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이나 EU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그들은 끊임 없이 세르비아 국내에서 협잡질을 일삼는 것을 파악하고는 본래 형제국가였던 러시아와 가까워졌다. 이어 중국과 더 밀착해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과 투자를 받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와 중국은 양국에서 공산주의가 시작된 이후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었다. 양국 모두 공산 독재 체제였지만 시스템은 전혀 다른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1945~1992)에 속했던 세르비아는 진보적 공산주의 체제로 독재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고, 일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하면서 개인사업과 소유를 어느 정도 허용했었다. 반면 중국은 농촌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 형태의 공산주의로 발전했다. 물론 현재 두 나라 정치 체제는 모두 사회, 경제, 정치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국은 공산당, 세르비아는 민족주의 우파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세르비아는 의회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변화와 더불어 자유 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향한 경제적 변화를 위해 다당제를 확립했다. 그럼에도 중국과는 정치적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중국은 외교정책에서 항상 세르비아를 지지해왔다. 1990년대 집단서방과 미국은 세르비아를 발칸반도 민족분쟁의 주범으로 여기고 세르비아를 공격했지만, 중국은 세르비아를 유럽 내 정치적 동맹국으로 여기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2006) 정권을 지지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은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을 규탄했고, 현재 코소보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있으며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지난 20년 동안 더욱 견고해진 양국의 정치적인 관계는 경제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관계가 격상하여 발전하고 있다. 2013년 중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대륙을 관통하는 일대일로 정책을 시작한 이후 세르비아는 중국과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협력으로 이어졌지만 주변 EU 국가들의 방해로 이 또한 지지부진했었다. 따라서 중국의 투자가 늦춰지는 몇 년 동안 세르비아는 경제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스템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2017년에 당선된 알렉산데르 부치치 대통령은 코로나 시기에도 EU 국가들이 백신을 나누어 주는 것을 거부하고 시리아 난민을 세르비아 밀어넣으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국경을 통제하고 중국으로 시노백, 시노팜 백신을 받아들이면서 정보기술과 고부가가치 제품, 인프라 프로젝트 등도 중국의 투자를 요청했다. 2020년 하반기부터 물밀듯이 중국의 투자 업체들이 세르비아 밀려 들이왔다. 이는 대 세르비아만을 좋게 하려는 자선사업의 성격이 아니다. 이는 중국이 협력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 있어서 일대일로 추진의 최우선 목적은 지정학적 존재감을 강화하는 동시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중국 기업들은 EU 기업들과 경쟁할 때 수많은 공식, 혹은 비공식적인 통제의 측면에 직면했기 때문에 EU 시장으로의 진입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에게는 소규모 국가나 프로젝트가 EU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고 세르비아가 그 거점이 될 수 있다. 이에 지난 3년여 동안 40억 달러(약 4조 8,000억 원)가 넘는 중국의 대(對) 세르비아 대출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투자금들 중 약 40%가 세르비아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작업으로 투자되었다. 이후 부치치 대통령과 중국이 맺은 협정에 의하면 향후 4년 안에 40억 달러 이상이 추가로 투자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양국의 협력은 2011년 중국 최초의 대규모 프로젝트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Belgrade)의 제문-보르카 대교(Zemun-Borca Bridge) 건설부터 시작되었고 그 주변에 각종 아파트들과 오피스텔들 건설되기 시작했다. 오늘 찍은 사진이 바로 그러한 아파트들과 오피스텔들이다. 이후 세르비아는 중국의 경제 파트너들을 대규모 프로젝트에 추가로 참여시켜도 되는 믿을 만한 파트너로 간주했다. 현재 추진 중인 가장 중요한 인프라 프로젝트는 2018년에 시작된 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 철도와 2014년 시작된 세르비아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E-763 고속도로 건설에 있는데 이게 이제 속도를 좀 내고 있다. 인프라 개발과 투자 유치를 통해 경제발전 속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길 바라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국의 투자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실제로 세르비아의 모든 인프라들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EU 가입이 각종 이유들과 트집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는 상황애서 EU 구조 기금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없게 된 세르비아의 입장으로 볼 때 중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치는 매우 합리적인 대안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세르비아 정부는 정치 및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지정학적 관점으로 볼 때 세르비아는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동맹국으로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코소보의 지위와 관련하여 유엔에서 세르비아를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큰 영향력 가진 국가다. 이는 중국과의 향후 프로젝트 협상에서 세르비아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 여기에 세르비아의 입장이 반영된 최종 합의가 도달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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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 차가타이(Чагатай)를 소환한 현 시대 대한민국
    요즘 차가타이와 그의 나라,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티무르 제국까지 이어지는 중앙아시아의 시대상 변천을 함께 보면서 느낀 바 있다. 칭기즈칸, 바투나 수부타이, 재배, 카이두 및 아리크부카나 쿠빌라이 칸 등의 영웅들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만 칭기즈칸의 차남인 차가타이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나는 다른 영웅들보다 차가타이를 매우 좋아한다. 그에게 있어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라고 하는 두 가지의 기본 철칙이 있었고 그런 기본 철칙은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라는 것이 부족한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차가타이는 성격이 불같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엄격하고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칭기즈칸은 차가타이에게 몽골의 법전인 <에케 야사>를 창안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일례로 차가타이의 동생인 오고타이가 대칸이 된 이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 칸이 술자리를 했는데, 차가타이가 취중에 오고타이 칸에게 실수를 했다. 다음 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차가타이는 아우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실수를 벌해달라고 청했다. 오고타이 칸은 이를 "뭘 그런거 가지고..." 하면서 그대로 넘어갔지만 차가타이는 끝내 <에케 야사>의 법률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자신을 벌했다고 전해진다. 차가타이는 매우 엄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오고타이 칸이 술에 취해서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면 법의 수호자이자 무서운 형님이 되어 동생을 혼냈는데 취중에도 오고타이 칸은 형이 오면 무서워하였다는 설화도 존재하고 있다. 차가타이의 동생이자,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의 장남이자 후일 몽골의 대칸이 되는 몽케가 차가타이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며 차가타이는 몽케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밀어줬다고도 전한다. 차가타이는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 칸국을 건국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카자흐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북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까지 지배했으며 그의 영토가 상당히 넓었음에도 원리원칙에 따라 주군은 늘 몽골 카라코룸의 대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차가타이는 죽을 때까지 결코 칸을 자칭하지 않았다.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자들 중 처음으로 칸을 칭한 것은 손자인 카라 훌라구였다. 차가타이를 시조로 간주하는 차가타이 칸국은 동유럽을 정복한 킵차크 칸국이나 중국을 정복한 원나라, 그리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전쟁을 벌이고 페르시아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일 칸국에 비하면 세계사적인 입장에서 그다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다른 칸국들은 각각 러시아, 명나라, 맘루크 및 오스만투르크 같은 중세 후기에서 근세 시대 대제국들이 성장하면서 반드시 이겨할 적으로서, 또는 동시와 많은 문화와 기술, 제도를 서로 교환한 외교적인 국가로서 세계사의 거대 세력들 역사와 같이 존재감이 컸던 것에 비하면 차가타이 칸국이 있었던 지방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곳이라서 세계사의 중심으로 도약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일찌감치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주목받길 원하지 않고 오로지 <에케 야사> 법전에 나와 있는 대칸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주목 받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명성을 떨친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과 같이 독립 국가적인 주체로써 몽골 제국을 확장시켰던 것이 아니라 몽골 울루스의 일원으로써 중앙정부와 함께 해야 한다는 차가타이의 원리원칙론이 작용했기에 일찍부터 중앙아시아 이외 지역에 세력 확장을 하지 못한 이유일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그랬을까?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은 오래가지 못했고 차가타이 칸국은 아미르 티무르라고 하는 칭기즈칸과 맞먹는 걸출한 대영웅을 배출해내면서 티무르 제국을 만들어냈으며 차가타이와 티무르의 후예는 인도로 들어가 아시아 3대 강국을 칭하는 무굴제국을 건국해 아시아 중근세 제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19세기까지 존립하게 되었다. 내가 차가타이를 관심있게 보았고 그를 소환해 낸 것은 현 대한민국의 정세와 맞닿아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보면 차가타이의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를 갖추고 있는 정치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군주인 오고타이 칸에게 실수해 자기 자신에게 법률 <에케 야사>를 작용해 벌을 내렸던 그런 사법계의 용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런 용기가 있는 자,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잘못했으면 은폐하기 바쁘지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릴 원리원칙주의자가 누가 있을까 싶다. 차가타이는 자신의 군주에게 충성했지만 군주가 법을 어기면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대통령이 법을 어기면 엄하게 꾸짖는 원칙주의자와 공명정대한 인물을 찾기 대단히 어렵다. 원래 이 나라 공직자들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달콤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에게 들리는 쓴소리는 차단하기에 바쁘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인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차가타이는 법전에 나와 있는 원리 원칙대로 정당한 비판을 하였지만 이 나라의 인물들은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니 유치한 비난과 어린 애들이나 할법한 반박이 이 시대에 난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은 차가타이와 같은 원리원칙적이고 공명정대한 인물이 필요하다. 내가 차가타이를 현 시대 대한민국에 소환한 것은 정부 정책의 미흡함, 그리고 한국 정치에서 원리원칙적이지 않고 공명정대하지 않는 모습들,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유치한 네거티브 현상들을 보며 해외에 나와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한심해 보여서다. 이 나라는 정말 차가타이 같은 인물이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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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걸쳐 지배한 투르크계 가즈니 왕조와 북인도로 이슬람의 유입
    마흐무드의 연이은 서북 인도에 대한 침입으로 펀자브 지방과 카나우즈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카나우즈는 마흐무드의 철수와 함께 회복되었으며, 다시 한 번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찰루키아와 라지푸트의 위상을 계승하려는 가하다발라(Gahadavala) 등의 여러 국가들로부터 계속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비하르(Bihar) 지방은 남방 기원의 종족인 타밀계 카르나타카(Karnataka)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칼라츄리(Kalachuri)는 자발푸르(Jabalpur) 근교에 있는 트리푸리(Tripuri)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벵골은 세나 왕조의 지배하에서 일시적인 번영을 이루었으나, 결국 13세기 초에 투르크계의 장군 무함마드 할지(Khalji)에게 패배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라지푸트 족들은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서 서로 간에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했다. 일개의 왕국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웃의 국가들과 계속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전쟁은 무사들 규범의 일부가 되어 남았다. 파라마라는 말와에서 크게 번영하였으며 솔란키는 카티아와르를 주변으로 구자라트에서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찬델라(Chandella)는 파라마라와 칼라츄리에 대한 주도권 쟁탈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데 여념이 없었으나, 결국 12세기에 차우한에게 점령되면서 종말을 맞이한다. 구힐라(Guhila)는 메와르(Mewar)와 오늘날의 우다이푸르(Udipur) 주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으며 또 다른 라지푸트 족인 카치차파가타(Kachchhapaghata)는 괄리오르(Gwalior)와 그 주변 지역을 지배했다. 델리의 토마라 왕국을 지배했던 차우한은 여러 차례 강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세력을 유지했다. 차우한 왕국의 마지막 왕인 프리트비라자 3세(Prithviraja III)는 카나우즈의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하여 그녀와 결혼하게 된 낭만적인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음영 시인인 찬드 바르다이(Chand Baardai)가 저술한 장편 서사시 <프리트비라자로소(Prithvirajaroso)>는 이 사건을 잘 언급해 주고 있다. 카나우즈의 왕은 공주의 사위를 고르기 위해 그의 궁정으로 인근 여러 나라의 왕자들을 초청했다. 그녀는 그 피로연 장소에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왕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녀는 당시에 카나우즈와 적대 관계에 있던 용감한 프리트비라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말았다. 카나우즈의 왕은 프리트비라자를 욕보이기 위해 그를 일부러 연회에 초청하지도 않았으며, 연회장에 나타난 그를 문지기가 서 있는 곳에 위치시켰다. 그러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카나우즈의 공주는 모여 있던 모든 왕자들을 마다 하고 동상의 목 주위에 있는 화환으로 눈을 돌렸다. 신하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프리트비라자는 그 근처에 숨어 있다가 공주를 가로 채 그의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곧 결혼했지만 영원한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다. 구르 왕조 무함마드기 인도 서북방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프리트비라자는 그와 맞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전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후 북인도는 오랜 기간 동안 외래의 종족들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았다. 에프탈 훈족의 침입으로 인한 충격은 거의 잊혀졌으며, 아라비아의 간헐적인 습격도 쉽게 퇴치되었다. 본격적인 아라비아의 침입이 있기까지 거의 4세기 동안의 세력 다툼과 전쟁이 인도 내부 각 왕국 사이에서 일어났고 매우 치열했었다. 각 왕조의 재력과 국력을 탕진시키는 끊임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여러 군소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해 갔다.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날로 점증하는 지역적인 문제에 고심했기 때문에 외부 세계와의 접촉은 차츰 좁아지게 되었다. 서방 세계와의 무역은 감소되었고,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던 인도의 부는 차차 줄어들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외부 세계를 향해서 개척해 나가기보다는 스스로 만족해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제국은 점차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11세기에 이르러 그 첫 번째의 타격을 입게 된다. 인도의 북서쪽에서는 가즈니(Ghazni)의 마흐무드(Mahmud)로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공국(公國)이었던 가즈니(Ghazni)는 투르크계의 귀족들이 중앙아시아 변경 지대와 사히야 왕국의 일부 지역을 합병했던 977년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부터 21년이 지난 후 가즈니의 제7대 왕 마흐무드(998∼1030)는 중앙아시아에 가즈니의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쏟아 부으며 정복에 나서기 시작했다. 인도에 대한 마흐무드의 관심은 인도의 재부와 힌두쿠시 산맥의 황량한 지역보다 기름지고 풍성하며 비옥한 펀자브 지방을 얻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상황은 인도보다는 중앙아시아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흐무드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인도 침입은 우연적인 일이며 주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과 지중해 연안 국가와의 무역이 계속적으로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북인도보다는 투르키스탄을 장악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마흐무드의 인도 침략은 인도의 부(富), 특히 귀금속의 탈취와 노예 획득에 있었고, 인도에서 원정하여 돌아오는 시간도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을 원정하는 것보다 그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마흐무드의 정복 전쟁은 거의 해마다 거듭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15~17차례나 인도를 침입하여 정복 전쟁의 화신(化身)으로 불릴 정도였다. 1000년에 사히야의 왕 자야팔라(Jayapala)를 격퇴시켰고, 그 이듬해에는 세이스탄(Seistan)을 점령했다. 1001년에는 인더스 강 상류의 펀자브 지방을 다스리던 힌두의 왕과 페샤와르에서 격돌하여 그를 철저히 유린하고 포로로 잡았다. 1004∼1006년 동안에는 인더스 강 하류의 전략적 요충지인 물탄(Multan)을 여러 차례 공략했다. 1008년에 마흐무드는 다시 펀자브 지방을 공격하여 이듬해까지 6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였다. 이 당시 마흐무드와 힌두의 양 군대는 페샤와르 평원에서 또 다시 격돌했다. 이 전투는 둘 다 12,000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그 처참한 광경은 극에 달했다. 이 전쟁에서 인도군은 대패하여 인도 깊숙한 곳으로 가즈니의 군대가 침입해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나아가, 마흐무드는 구르(Ghur, 가즈니와 아프가니스탄의 중심부 사이에 있는 지역)의 지배자들과도 자주 전투를 벌였다. 분명히 마흐무드의 군대는 기동성이 있었고 용맹스러웠다. 그렇지 않다면 매년 각각 다른 지역의 침공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복 전쟁의 용의주도함은 농업 수확기를 맞이한 인도 땅에서 늘 나타나는 마흐무드 군대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가 해당 지역을 점령하여 거기에서 세금을 받아 내기보다는 군대의 기동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재부를 탈취한 이후 다시 가즈니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 인도의 사원은 현금, 금화, 그리고 귀금속 등의 많은 재부의 보고였다. 그래서 사원은 부를 찾는 비(非) 힌두교도들의 지극히 당연한 목표물로 되었다. 마흐무드의 금에 대한 욕심은 끊임이 없었다. 그래서 1010년부터 1026년까지의 마흐무드의 침입은 사원 도시인 마투라, 타네사르, 카나우즈, 솜나트(Somnath) 등에 집중되었다. 그 중에서 솜나트는 가장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사원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마흐무드의 솜나트 점령은 불가피한 귀결로 되었다. 부를 획득하는 것 이 외에도 종교적인 동기도 있었다. 신상을 파괴하는 것은 열렬한 이슬람교도에 있어서는 우상을 척결한 가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솜나트 사원의 파괴는 광란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그 결과 인도인의 마음속에는 수 세기 동안 그 마음의 상처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었고, 이는 또 마흐무드의 평가를 크게 윤색시켰다. 솜나트 사원에 대해서 13세기의 아라비아의 자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솜나트 - 바다의 연안에 있던 아름다운 인도의 도시에, 카티아와르 반도의 조파(潮波)가 만든 신성하고 미려(美麗)한 힌두 사원이 있다. 매일 1,000명의 브라만이 제사를 드리고, 300명이 근무하는 이발소가 있어 사원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이발을 해 준다. 500명의 무녀(巫女)가 링가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사제인 브라만들은 인근 10,000개가 되는 촌락에서 기부금의 형식으로 착취한 지세(地稅)로 생활하고, 링가는 750㎞ 떨어진 갠지스 강에서 운반된 성수(聖水)로 매일 깨끗하게 닦여졌다. 사원은 수많은 보석을 재산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 (중략)······. 이슬람 군은 1024년에 이 사원을 철저히 파괴했다. 힌두교 시바파의 성물(聖物)인 링가(男根)를 부수고, 그 일부를 가즈니로 가져가 이슬람 사원 입구에 깔았으며 매일 기도드리러 오는 이슬람교도들이 이를 밟고 지나가게 했다. 마흐무드는 1030년에 사망했다. 신상 파괴와 연례적인 침략자로 연상되는 그의 죽음은 북인도의 주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인도인과 힌두교에 무자비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슬람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단했다. 가즈니에서는 도서관과 박물관이 있었고, 그가 세운 모스크(Mosgue)들은 당시의 이슬람 건축에 있어서 최고로 발달된 모습을 보여 준다. 마흐무드는 크와라즘(Khwarazm)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알베루니(Alberuni)를 그의 왕실로 데려왔다. 알베루니는 마흐무드의 명령에 따라 인도에서 10년을 보냈는데, 그가 저술한 인도에 관한 책인 <타키키 힌드(Tahqiq­-Hind)>라는 책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인도 문화에 대한 관찰을 담고 있다. 마흐무드의 인도 침입은 매우 조용하게 진행되었으며 서북 인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힌두의 여러 국가 간에 동맹 관계는 형성되었지만, 인도 대륙, 심지어는 북인도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방어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군에 대한 방어는 위험에 처한 왕을 도와주는 일회적 목적만을 수행하는 데 불과했다. 인도의 입장에서는 마흐무드는 사카와 훈족과 같은 외래 민족의 침입자였다. 이들 외래 민족들은 한 때 북인도의 정세를 흔들어 놓았지만, 곧바로 망각의 상태로 흘러갔으며, 이는 마흐무드의 군대도 그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흐무드가 사망함으로써 북인도의 여러 국가는 서북쪽을 방어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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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 함석헌의 씨알과 비폭력
    “모든 존재하는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 생명이다.” 당연하지만 아름다운 말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바탕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에 씨ᄋᆞᆯ학당에서 주최하는 ‘함석헌과 생명평화’라는 타이틀의 정기 강연회를 개최한다. 첫 강연자로 나선 우희종 선생은 ‘함석헌의 생명으로서의 씨ᄋᆞᆯ과 비폭력’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우희종 선생은 폴 틸리히의 ‘ground of being-itself’를 언급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은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함석헌은 왜 생명이라 말하지 않고 씨ᄋᆞᆯ이라고 이야기했을까? 어제 현장에서 강의를 듣는 순간에도 함석헌의 씨ᄋᆞᆯ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나는 조금 무식한 질문을 하였다.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는 우리들의 희망 종단(우희종)에서 참석한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만큼 우희종 선생과는 서로를 잘 아는 사이이다. “장자는 氣가 천지 사이에 충만하고, 氣가 모이고 흩어져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고, 천지의 만물은 모두 하나의 氣라고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면 함석헌의 씨ᄋᆞᆯ이 장자의 氣와 유사한 것입니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던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주체적인 것이며, 생각하는 씨ᄋᆞᆯ이라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氣에는 유물론적인 부분이 있지만, 함석헌의 씨ᄋᆞᆯ에는 유물론적인 요소가 없어 보였다. 강의가 끝난 후에 나는 씨ᄋᆞᆯ학당 김영덕 연구원장으로부터 <함석헌 연구>라는 책을 한 권 받을 수 있었다. 그 책에는 “씨ᄋᆞᆯ은 생명 그 자체이며 역사를 살려내는 역사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씨ᄋᆞᆯ은 땅과 하늘과 바람과 물 즉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생명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씨ᄋᆞᆯ의 출발은 “함께 살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함석헌의 씨ᄋᆞᆯ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조금은 부족하여 서재에 있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이라는 책을 펼쳐봤다. “유영모는 생명을 물질과 정신의 결합으로 보고, 생명이 물질에서 정신으로 고양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보았다.” 유영모의 이러한 생각이 함석헌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하다. 유영모의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연결시켜보면,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단순한 생명은 아니라 온 우주와 함께 하나가 되는 과정 속에 있는 진화하는 씨ᄋᆞᆯ로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ᄋᆞᆯ이어야 산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어지는 강의에서 우희종 선생은 비폭력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어리석음이 폭력이라고 하였다. 깨어있지 않음과 연결된다. 어리석음, 정상적인 관계의 단절, 왜곡된 믿음 등이 폭력이란 것이다. 폭력의 정의가 그렇다면, 비폭력은 정상적인 관계의 회복이고, 그러한 관계에 깨어 있음을 위한 실천과 행동에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약자의 체념이나 무관심도 폭력의 행사라고 보았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비폭력은 너와 나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차별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말을 우희종 선생은 파사현정, 즉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부수고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불교의 용어를 언급하면서 angry Buddha를 이야기했다. angry Buddha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바름으로 이끄는 분노의 행동이야말로 비폭력의 다른 이름이라고 강조했다. 비폭력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우희종 선생은 슬라보에 지젝의 폭력에 대한 생각을 잠시 언급만하고 가볍게 지나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구분하면서 오늘날 사회에서 객관적 폭력인 상징적이면서 구조적인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고 보았다. 주관적 폭력은 가시적인 폭력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다음의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빌 게이츠의 두 얼굴은 소로스의 두 얼굴과 꼭 닮았다. ...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에로스에서 티모스로의 전환이다. 대상을 소유하는 것에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전환에는 가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환경파괴의 주범이면서 자연보호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조직적 폭력이고, 공손한 미소가 야수적인 감정 폭발보다 더욱 폭력적이란 말이다. 그 책의 마지막 대목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는 angry Buddha와유사하게 읽힐 수도 있다. 우희종 선생은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비폭력사상이 생명 감수성을 높이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씨ᄋᆞᆯ들은 서로 주고받고, 같이 울고, 같이 느낄 때 부분의 합보다 위대해지고 부분은 전체 안에, 전체는 부분 안에 존재하게 되어 개인의 소리는 전체의 외침이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생명과 비폭력에 대한 우희종 선생의 강의는 이 짧은 문장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이해했다. 뒤풀이로 우희종 선생과 함께 나눈 대화 속에서는 아르네 네스의 환경철학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네스는 생태운동을 표층과 심층으로 구분하면서 모든 동식물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 심층생태운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우희종 선생과 헤어졌다. 우희종 선생을 통한 함석헌의 생명과 비폭력에 대한 강의는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깨어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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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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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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