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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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의 엄청난 변화, 열악한 인프라의 개선과 갑자기 밝아진 미래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나는 소피아 대학 소속일 때, 베오그라드 대학까지 출강을 했었다. 그게 벌써 10년 전의 얘기다. 일주일에 두 번을 불가리아 소피아에서 밤 9시 50분에 출발하는 야간 열차를 타고 침대칸에 눈을 붙이면 새벽 5시 40분에서 아침 6시 10분 사이에 반드시 도착하게 되어 있다. 나는 주로 당시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대학은 일주일에 두 번, 루마니아 부쿠레슈티 대학은 일주일에 한 번, 그리스 테살로니키 대학과는 2주에 한 번, 이스탄불 대학과는 2주에 세 번의 시간 강사로 출강하는, 일종의 살인적인 일정을 소화했었다. 베오그라드에 올 때마다 느끼는 것은 EU가 아니면서 발전이 전혀 없이 퇴보만 존재하는, 그야말로 죽은 도시였다. 베오그라드라는 뜻은 "하얀 도시"라는 뜻인데 그게 그냥 말뿐이고 솔직히 회색 시멘트, 콘크리트로 덕지덕치 쳐발라 놓은 그런 도시다. 간혹 베오그라드로 여행 오는 미국인들이 우스겟소리로 붙인 별명이 "Godamgrad"였다. 베트맨이 온다해도 발칸의 그 어떤 도시보다 이 도시는 구해내지 못할 것이라는 뜻에서 생긴 별명이었다. 그 정도로 베오그라드는 죽은 도시의 상징이나 마찬가지였다. 곰팡이 썩는 꿉꿉한 냄세, 밝지 않고 어딘가에 지친듯한 무표정의 시민들, 거리마다 넘쳐나는 쓰레기들, 여행자만 보면 돈 달라고 달려드는 까무잡잡한 집시들이 넘쳐 나는 도시로 세르비아 최고 명문 베오그라드 대학의 학생들은 이 대학에 오는 목표가 독일이나 프랑스로 탈출하여 좋은 직장에 취직해 돈을 벌려는 것이다. 내가 한창 시간 강사로 강의할 때 학생들 중 세르비아에 남겠다는 학생은 단 한 명도 없었다. 말 그대로 저마다 세르비아를 탈출하려고만 하지 고국에서 뭘 해보려는 젊은이들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결국 이러한 상황은 심각한 인재 유출로 이어진다. 게다가 정치권에서 끊이지 않고 이어오는 부패의 사슬, EU와 미국의 제재와 더불어 세르비아를 말려 죽이기 위해 온갖 흉계를 꾸몄고 형제 국가인 러시아도 당시에는 도와줄 처지가 못 되었기에 루마니아, 불가리아와 같은 EU 국가들, 코소보나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같은 적대국에 둘러싸인 채, 외롭게 고립되어 있었다. 이 때 혜성 같이 등장한 영웅이 바로 알렉산데르 부치치(Александар Вучић)이다. 부치치는 2017년 대통령에 당선되면서 미국이나 EU와 좋은 관계를 맺으려 했지만 그들은 끊임 없이 세르비아 국내에서 협잡질을 일삼는 것을 파악하고는 본래 형제국가였던 러시아와 가까워졌다. 이어 중국과 더 밀착해 중국과 러시아의 지원과 투자를 받기 시작했다. 세르비아와 중국은 양국에서 공산주의가 시작된 이후 꾸준히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었다. 양국 모두 공산 독재 체제였지만 시스템은 전혀 다른 원칙에 따라 움직였다.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 공화국(1945~1992)에 속했던 세르비아는 진보적 공산주의 체제로 독재 정도가 그리 심하지 않았고, 일부 자본주의 시장 경제 요소를 도입하면서 개인사업과 소유를 어느 정도 허용했었다. 반면 중국은 농촌 인구가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었기에 이를 기반으로 한 독자적 형태의 공산주의로 발전했다. 물론 현재 두 나라 정치 체제는 모두 사회, 경제, 정치적 삶의 모든 측면에서 중국은 공산당, 세르비아는 민족주의 우파 세력이 주도하고 있다. 유고슬라비아의 공산주의 체제가 붕괴한 이후, 세르비아는 의회 민주주의를 향한 정치적인 변화와 더불어 자유 민주주의 시장 경제를 향한 경제적 변화를 위해 다당제를 확립했다. 그럼에도 중국과는 정치적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하는 아주 좋은 관계를 유지해왔다. 그리고 중국은 외교정책에서 항상 세르비아를 지지해왔다. 1990년대 집단서방과 미국은 세르비아를 발칸반도 민족분쟁의 주범으로 여기고 세르비아를 공격했지만, 중국은 세르비아를 유럽 내 정치적 동맹국으로 여기고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1941~2006) 정권을 지지했다. 그 뿐만 아니라 중국은 1999년 나토의 세르비아 폭격을 규탄했고, 현재 코소보가 유엔에 가입하지 못하도록 세르비아를 지원하고 있으며 코소보를 독립국으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이처럼 지난 20년 동안 더욱 견고해진 양국의 정치적인 관계는 경제 협력이라는 이름으로 관계가 격상하여 발전하고 있다. 2013년 중국이 자국을 중심으로 동남아시아와 서아시아, 그리고 아프리카와 유럽까지 대륙을 관통하는 일대일로 정책을 시작한 이후 세르비아는 중국과 대규모 인프라 프로젝트 협력으로 이어졌지만 주변 EU 국가들의 방해로 이 또한 지지부진했었다. 따라서 중국의 투자가 늦춰지는 몇 년 동안 세르비아는 경제 성장 과정에서 여러 가지 시스템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2017년에 당선된 알렉산데르 부치치 대통령은 코로나 시기에도 EU 국가들이 백신을 나누어 주는 것을 거부하고 시리아 난민을 세르비아 밀어넣으려 하자 이에 반발하여 국경을 통제하고 중국으로 시노백, 시노팜 백신을 받아들이면서 정보기술과 고부가가치 제품, 인프라 프로젝트 등도 중국의 투자를 요청했다. 2020년 하반기부터 물밀듯이 중국의 투자 업체들이 세르비아 밀려 들이왔다. 이는 대 세르비아만을 좋게 하려는 자선사업의 성격이 아니다. 이는 중국이 협력과 관련하여 나름대로 우선순위를 정해놓고 있기 때문이다. 중국에게 있어서 일대일로 추진의 최우선 목적은 지정학적 존재감을 강화하는 동시에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는지의 여부다. 중국 기업들은 EU 기업들과 경쟁할 때 수많은 공식, 혹은 비공식적인 통제의 측면에 직면했기 때문에 EU 시장으로의 진입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중국에게는 소규모 국가나 프로젝트가 EU 시장에 진입할 수 있는 좋은 방법일 수 있고 세르비아가 그 거점이 될 수 있다. 이에 지난 3년여 동안 40억 달러(약 4조 8,000억 원)가 넘는 중국의 대(對) 세르비아 대출이 이루어졌고 이러한 투자금들 중 약 40%가 세르비아의 인프라를 개선하는 작업으로 투자되었다. 이후 부치치 대통령과 중국이 맺은 협정에 의하면 향후 4년 안에 40억 달러 이상이 추가로 투자될 가능성이 있다고 본다. 이러한 양국의 협력은 2011년 중국 최초의 대규모 프로젝트인 세르비아 수도 베오그라드(Belgrade)의 제문-보르카 대교(Zemun-Borca Bridge) 건설부터 시작되었고 그 주변에 각종 아파트들과 오피스텔들 건설되기 시작했다. 오늘 찍은 사진이 바로 그러한 아파트들과 오피스텔들이다. 이후 세르비아는 중국의 경제 파트너들을 대규모 프로젝트에 추가로 참여시켜도 되는 믿을 만한 파트너로 간주했다. 현재 추진 중인 가장 중요한 인프라 프로젝트는 2018년에 시작된 베오그라드-부다페스트 철도와 2014년 시작된 세르비아 중서부를 가로지르는 E-763 고속도로 건설에 있는데 이게 이제 속도를 좀 내고 있다. 인프라 개발과 투자 유치를 통해 경제발전 속도를 높이고 경쟁력을 강화하길 바라는 세르비아에게 있어 중국의 투자는 아주 매력적이었고 실제로 세르비아의 모든 인프라들이 달라지고 있다. 특히 EU 가입이 각종 이유들과 트집으로 인해 지연되고 있는 상황애서 EU 구조 기금을 더 많이 활용할 수 없게 된 세르비아의 입장으로 볼 때 중국으로부터의 투자 유치는 매우 합리적인 대안으로 인식되는 것은 당연하다. 이처럼 세르비아 정부는 정치 및 경제적인 이유로 인해 중국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어한다. 지정학적 관점으로 볼 때 세르비아는 강대국인 중국과 러시아를 동맹국으로 두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중국은 러시아와 함께 코소보의 지위와 관련하여 유엔에서 세르비아를 강력하게 지지해주는 큰 영향력 가진 국가다. 이는 중국과의 향후 프로젝트 협상에서 세르비아의 입지를 강화하는 것, 여기에 세르비아의 입장이 반영된 최종 합의가 도달되기 위해서 매우 중요한 일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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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 차가타이(Чагатай)를 소환한 현 시대 대한민국
    요즘 차가타이와 그의 나라, 차가타이 칸국, 그리고 티무르 제국까지 이어지는 중앙아시아의 시대상 변천을 함께 보면서 느낀 바 있다. 칭기즈칸, 바투나 수부타이, 재배, 카이두 및 아리크부카나 쿠빌라이 칸 등의 영웅들은 충분히 알려져 있지만 칭기즈칸의 차남인 차가타이는 그다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사실 나는 다른 영웅들보다 차가타이를 매우 좋아한다. 그에게 있어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라고 하는 두 가지의 기본 철칙이 있었고 그런 기본 철칙은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라는 것이 부족한 우리 대한민국에서도 가장 필요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차가타이는 성격이 불같고 타협을 모르는 성격이었다. 자기 자신에게조차 엄격하고 원리원칙을 철저히 지키는 인물이었기 때문에 칭기즈칸은 차가타이에게 몽골의 법전인 <에케 야사>를 창안하고 관리하는 역할을 맡기기도 했다. 그에 대한 일례로 차가타이의 동생인 오고타이가 대칸이 된 이후, 차가타이와 오고타이 칸이 술자리를 했는데, 차가타이가 취중에 오고타이 칸에게 실수를 했다. 다음 날 자신의 실수를 깨달은 차가타이는 아우에게 찾아가서 자신의 실수를 벌해달라고 청했다. 오고타이 칸은 이를 "뭘 그런거 가지고..." 하면서 그대로 넘어갔지만 차가타이는 끝내 <에케 야사>의 법률을 스스로에게 적용하여 자신을 벌했다고 전해진다. 차가타이는 매우 엄격한 성격이었기 때문에 오고타이 칸이 술에 취해서 마찬가지의 행동을 하면 법의 수호자이자 무서운 형님이 되어 동생을 혼냈는데 취중에도 오고타이 칸은 형이 오면 무서워하였다는 설화도 존재하고 있다. 차가타이의 동생이자, 칭기즈칸의 막내 아들, 툴루이의 장남이자 후일 몽골의 대칸이 되는 몽케가 차가타이의 성격을 가장 많이 닮았다고 하며 차가타이는 몽케의 즉위를 적극적으로 밀어줬다고도 전한다. 차가타이는 중앙아시아에 차가타이 칸국을 건국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카자흐스탄 남부,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아프가니스탄, 이란 북부, 파키스탄 펀자브 지역까지 지배했으며 그의 영토가 상당히 넓었음에도 원리원칙에 따라 주군은 늘 몽골 카라코룸의 대칸이었다. 그런 이유로 인해 차가타이는 죽을 때까지 결코 칸을 자칭하지 않았다. 차가타이 칸국의 지배자들 중 처음으로 칸을 칭한 것은 손자인 카라 훌라구였다. 차가타이를 시조로 간주하는 차가타이 칸국은 동유럽을 정복한 킵차크 칸국이나 중국을 정복한 원나라, 그리고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와 전쟁을 벌이고 페르시아 문화에 영향을 받은 일 칸국에 비하면 세계사적인 입장에서 그다지 크게 두드러지지 않았다. 다른 칸국들은 각각 러시아, 명나라, 맘루크 및 오스만투르크 같은 중세 후기에서 근세 시대 대제국들이 성장하면서 반드시 이겨할 적으로서, 또는 동시와 많은 문화와 기술, 제도를 서로 교환한 외교적인 국가로서 세계사의 거대 세력들 역사와 같이 존재감이 컸던 것에 비하면 차가타이 칸국이 있었던 지방은 그다지 주목받지 못한 곳이라서 세계사의 중심으로 도약하기 어려웠던 것은 아니다. 일찌감치 주목받지 못했던 것이 아니라 주목받길 원하지 않고 오로지 <에케 야사> 법전에 나와 있는 대칸에 대한 충성심이라는 원칙을 고수했기 때문이었다. 스스로 주목 받길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일찍부터 명성을 떨친 킵차크 칸국이나 일 칸국과 같이 독립 국가적인 주체로써 몽골 제국을 확장시켰던 것이 아니라 몽골 울루스의 일원으로써 중앙정부와 함께 해야 한다는 차가타이의 원리원칙론이 작용했기에 일찍부터 중앙아시아 이외 지역에 세력 확장을 하지 못한 이유일 것으로 보여 진다. 그래서 그랬을까? 킵차크 칸국과 일 칸국은 오래가지 못했고 차가타이 칸국은 아미르 티무르라고 하는 칭기즈칸과 맞먹는 걸출한 대영웅을 배출해내면서 티무르 제국을 만들어냈으며 차가타이와 티무르의 후예는 인도로 들어가 아시아 3대 강국을 칭하는 무굴제국을 건국해 아시아 중근세 제국 중 가장 강력한 국가로 19세기까지 존립하게 되었다. 내가 차가타이를 관심있게 보았고 그를 소환해 낸 것은 현 대한민국의 정세와 맞닿아 있다. 대한민국의 정치판을 보면 차가타이의 원리원칙과 공명정대를 갖추고 있는 정치인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 군주인 오고타이 칸에게 실수해 자기 자신에게 법률 <에케 야사>를 작용해 벌을 내렸던 그런 사법계의 용자도 전혀 보이지 않는다. 사실 그런 용기가 있는 자, 자체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자신이 잘못했으면 은폐하기 바쁘지 자기 자신에게 형벌을 내릴 원리원칙주의자가 누가 있을까 싶다. 차가타이는 자신의 군주에게 충성했지만 군주가 법을 어기면 엄하게 꾸짖었다. 그러나 이 나라는 대통령이 법을 어기면 엄하게 꾸짖는 원칙주의자와 공명정대한 인물을 찾기 대단히 어렵다. 원래 이 나라 공직자들은 자신에게 들어오는 달콤한 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자신에게 들리는 쓴소리는 차단하기에 바쁘다. 윗물이 그러니 아랫물인 일반 시민들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차가타이는 법전에 나와 있는 원리 원칙대로 정당한 비판을 하였지만 이 나라의 인물들은 비판과 비난을 구분하지 못한다. 그러니 유치한 비난과 어린 애들이나 할법한 반박이 이 시대에 난무하는 것이 아니겠는가? 대한민국은 차가타이와 같은 원리원칙적이고 공명정대한 인물이 필요하다. 내가 차가타이를 현 시대 대한민국에 소환한 것은 정부 정책의 미흡함, 그리고 한국 정치에서 원리원칙적이지 않고 공명정대하지 않는 모습들, 서로에게 마이너스가 되는 유치한 네거티브 현상들을 보며 해외에 나와 가장 객관적인 입장에서 볼 때 가장 한심해 보여서다. 이 나라는 정말 차가타이 같은 인물이 없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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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8
  •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에 걸쳐 지배한 투르크계 가즈니 왕조와 북인도로 이슬람의 유입
    마흐무드의 연이은 서북 인도에 대한 침입으로 펀자브 지방과 카나우즈가 큰 피해를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파괴되지 않았다. 카나우즈는 마흐무드의 철수와 함께 회복되었으며, 다시 한 번 번영을 누리기 시작했다. 이 때문에 찰루키아와 라지푸트의 위상을 계승하려는 가하다발라(Gahadavala) 등의 여러 국가들로부터 계속적인 공격을 받게 된다. 비하르(Bihar) 지방은 남방 기원의 종족인 타밀계 카르나타카(Karnataka) 왕조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칼라츄리(Kalachuri)는 자발푸르(Jabalpur) 근교에 있는 트리푸리(Tripuri)에서 최전성기를 구가했다. 벵골은 세나 왕조의 지배하에서 일시적인 번영을 이루었으나, 결국 13세기 초에 투르크계의 장군 무함마드 할지(Khalji)에게 패배하여 멸망하고 말았다. 라지푸트 족들은 11세기와 12세기에 걸쳐서 서로 간에 끊임없는 투쟁을 계속했다. 일개의 왕국을 잘 이끌어 나가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으며, 이를 위해서는 이웃의 국가들과 계속 전투를 벌여야 했다. 전쟁은 무사들 규범의 일부가 되어 남았다. 파라마라는 말와에서 크게 번영하였으며 솔란키는 카티아와르를 주변으로 구자라트에서 그 세력을 유지하고 있었다. 찬델라(Chandella)는 파라마라와 칼라츄리에 대한 주도권 쟁탈을 위해 전쟁을 벌이는데 여념이 없었으나, 결국 12세기에 차우한에게 점령되면서 종말을 맞이한다. 구힐라(Guhila)는 메와르(Mewar)와 오늘날의 우다이푸르(Udipur) 주변에서 지배적인 위치를 점했으며 또 다른 라지푸트 족인 카치차파가타(Kachchhapaghata)는 괄리오르(Gwalior)와 그 주변 지역을 지배했다. 델리의 토마라 왕국을 지배했던 차우한은 여러 차례 강한 공격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계속 세력을 유지했다. 차우한 왕국의 마지막 왕인 프리트비라자 3세(Prithviraja III)는 카나우즈의 공주에게 사랑을 고백하여 그녀와 결혼하게 된 낭만적인 영웅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음영 시인인 찬드 바르다이(Chand Baardai)가 저술한 장편 서사시 <프리트비라자로소(Prithvirajaroso)>는 이 사건을 잘 언급해 주고 있다. 카나우즈의 왕은 공주의 사위를 고르기 위해 그의 궁정으로 인근 여러 나라의 왕자들을 초청했다. 그녀는 그 피로연 장소에서 자기의 마음에 드는 왕자를 선택할 권리가 있었다. 그러나 공교롭게도 그녀는 당시에 카나우즈와 적대 관계에 있던 용감한 프리트비라자에게 사랑을 느끼고 말았다. 카나우즈의 왕은 프리트비라자를 욕보이기 위해 그를 일부러 연회에 초청하지도 않았으며, 연회장에 나타난 그를 문지기가 서 있는 곳에 위치시켰다. 그러자 큰 혼란이 일어났다. 카나우즈의 공주는 모여 있던 모든 왕자들을 마다 하고 동상의 목 주위에 있는 화환으로 눈을 돌렸다. 신하들이 눈치를 채기 전에 프리트비라자는 그 근처에 숨어 있다가 공주를 가로 채 그의 왕국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곧 결혼했지만 영원한 행복을 누리지는 못했다. 구르 왕조 무함마드기 인도 서북방으로 침입하였기 때문에 프리트비라자는 그와 맞서 전투를 벌이다가 패배하여 전사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후 북인도는 오랜 기간 동안 외래의 종족들로부터 침입을 받지 않았다. 에프탈 훈족의 침입으로 인한 충격은 거의 잊혀졌으며, 아라비아의 간헐적인 습격도 쉽게 퇴치되었다. 본격적인 아라비아의 침입이 있기까지 거의 4세기 동안의 세력 다툼과 전쟁이 인도 내부 각 왕국 사이에서 일어났고 매우 치열했었다. 각 왕조의 재력과 국력을 탕진시키는 끊임없는 전쟁의 와중에서 여러 군소 왕국들이 흥망성쇠를 거듭해 갔다. 인도의 여러 왕국들은 날로 점증하는 지역적인 문제에 고심했기 때문에 외부 세계와의 접촉은 차츰 좁아지게 되었다. 서방 세계와의 무역은 감소되었고, 세계의 한 부분을 이루던 인도의 부는 차차 줄어들게 되었다. 적극적으로 외부 세계를 향해서 개척해 나가기보다는 스스로 만족해하는 분위기가 팽배해지면서 제국은 점차 축소되었다. 그러나 이러한 상태는 11세기에 이르러 그 첫 번째의 타격을 입게 된다. 인도의 북서쪽에서는 가즈니(Ghazni)의 마흐무드(Mahmud)로부터 공격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아프가니스탄의 공국(公國)이었던 가즈니(Ghazni)는 투르크계의 귀족들이 중앙아시아 변경 지대와 사히야 왕국의 일부 지역을 합병했던 977년에 두각을 나타냈다. 이로부터 21년이 지난 후 가즈니의 제7대 왕 마흐무드(998∼1030)는 중앙아시아에 가즈니의 가공할 만한 군사력을 쏟아 부으며 정복에 나서기 시작했다. 인도에 대한 마흐무드의 관심은 인도의 재부와 힌두쿠시 산맥의 황량한 지역보다 기름지고 풍성하며 비옥한 펀자브 지방을 얻는 것에 있었다. 그러나 이 때의 아프가니스탄의 정치 상황은 인도보다는 중앙아시아에 더욱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마흐무드의 입장에서 볼 때 그의 인도 침입은 우연적인 일이며 주요한 일이 아니었다. 이는 실크로드를 통한 중국과 지중해 연안 국가와의 무역이 계속적으로 성황을 이루었기 때문에 북인도보다는 투르키스탄을 장악하는 것이 훨씬 매력적인 일이었다. 그래서 마흐무드의 인도 침략은 인도의 부(富), 특히 귀금속의 탈취와 노예 획득에 있었고, 인도에서 원정하여 돌아오는 시간도 중앙아시아의 어느 지역을 원정하는 것보다 그 속도가 놀라울 정도로 빨랐다. 마흐무드의 정복 전쟁은 거의 해마다 거듭되었다. 그는 죽을 때까지 15~17차례나 인도를 침입하여 정복 전쟁의 화신(化身)으로 불릴 정도였다. 1000년에 사히야의 왕 자야팔라(Jayapala)를 격퇴시켰고, 그 이듬해에는 세이스탄(Seistan)을 점령했다. 1001년에는 인더스 강 상류의 펀자브 지방을 다스리던 힌두의 왕과 페샤와르에서 격돌하여 그를 철저히 유린하고 포로로 잡았다. 1004∼1006년 동안에는 인더스 강 하류의 전략적 요충지인 물탄(Multan)을 여러 차례 공략했다. 1008년에 마흐무드는 다시 펀자브 지방을 공격하여 이듬해까지 6차례의 원정을 감행하였다. 이 당시 마흐무드와 힌두의 양 군대는 페샤와르 평원에서 또 다시 격돌했다. 이 전투는 둘 다 12,000명의 사상자를 낼 정도로 그 처참한 광경은 극에 달했다. 이 전쟁에서 인도군은 대패하여 인도 깊숙한 곳으로 가즈니의 군대가 침입해 들어오는 계기를 마련했다. 나아가, 마흐무드는 구르(Ghur, 가즈니와 아프가니스탄의 중심부 사이에 있는 지역)의 지배자들과도 자주 전투를 벌였다. 분명히 마흐무드의 군대는 기동성이 있었고 용맹스러웠다. 그렇지 않다면 매년 각각 다른 지역의 침공은 성공을 거두지 못했을 것이다. 그 정복 전쟁의 용의주도함은 농업 수확기를 맞이한 인도 땅에서 늘 나타나는 마흐무드 군대의 모습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해 그가 해당 지역을 점령하여 거기에서 세금을 받아 내기보다는 군대의 기동성을 최대한으로 활용하여 재부를 탈취한 이후 다시 가즈니로 돌아가는 데 있었다. 인도의 사원은 현금, 금화, 그리고 귀금속 등의 많은 재부의 보고였다. 그래서 사원은 부를 찾는 비(非) 힌두교도들의 지극히 당연한 목표물로 되었다. 마흐무드의 금에 대한 욕심은 끊임이 없었다. 그래서 1010년부터 1026년까지의 마흐무드의 침입은 사원 도시인 마투라, 타네사르, 카나우즈, 솜나트(Somnath) 등에 집중되었다. 그 중에서 솜나트는 가장 많은 부를 가지고 있는 사원으로 유명했다. 그래서 마흐무드의 솜나트 점령은 불가피한 귀결로 되었다. 부를 획득하는 것 이 외에도 종교적인 동기도 있었다. 신상을 파괴하는 것은 열렬한 이슬람교도에 있어서는 우상을 척결한 가치 있는 일이었다. 더욱이 솜나트 사원의 파괴는 광란에 가까운 것이었으며, 그 결과 인도인의 마음속에는 수 세기 동안 그 마음의 상처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앙금으로 남아 있었고, 이는 또 마흐무드의 평가를 크게 윤색시켰다. 솜나트 사원에 대해서 13세기의 아라비아의 자료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솜나트 - 바다의 연안에 있던 아름다운 인도의 도시에, 카티아와르 반도의 조파(潮波)가 만든 신성하고 미려(美麗)한 힌두 사원이 있다. 매일 1,000명의 브라만이 제사를 드리고, 300명이 근무하는 이발소가 있어 사원을 방문하는 순례자들을 위해 이발을 해 준다. 500명의 무녀(巫女)가 링가의 주위를 돌며 춤을 춘다. 사제인 브라만들은 인근 10,000개가 되는 촌락에서 기부금의 형식으로 착취한 지세(地稅)로 생활하고, 링가는 750㎞ 떨어진 갠지스 강에서 운반된 성수(聖水)로 매일 깨끗하게 닦여졌다. 사원은 수많은 보석을 재산으로 간직하고 있었다. - (중략)······. 이슬람 군은 1024년에 이 사원을 철저히 파괴했다. 힌두교 시바파의 성물(聖物)인 링가(男根)를 부수고, 그 일부를 가즈니로 가져가 이슬람 사원 입구에 깔았으며 매일 기도드리러 오는 이슬람교도들이 이를 밟고 지나가게 했다. 마흐무드는 1030년에 사망했다. 신상 파괴와 연례적인 침략자로 연상되는 그의 죽음은 북인도의 주민들에게 평화를 가져다주었다. 그러나 인도인과 힌두교에 무자비했던 모습과는 달리, 이슬람 문화에 대한 그의 관심은 대단했다. 가즈니에서는 도서관과 박물관이 있었고, 그가 세운 모스크(Mosgue)들은 당시의 이슬람 건축에 있어서 최고로 발달된 모습을 보여 준다. 마흐무드는 크와라즘(Khwarazm)을 정복하여 중앙아시아 최고의 지성인이었던 알베루니(Alberuni)를 그의 왕실로 데려왔다. 알베루니는 마흐무드의 명령에 따라 인도에서 10년을 보냈는데, 그가 저술한 인도에 관한 책인 <타키키 힌드(Tahqiq­-Hind)>라는 책은 놀라울 정도로 정교한 인도 문화에 대한 관찰을 담고 있다. 마흐무드의 인도 침입은 매우 조용하게 진행되었으며 서북 인도에서 일어난 사건은 외부에 알려지지 않았다. 힌두의 여러 국가 간에 동맹 관계는 형성되었지만, 인도 대륙, 심지어는 북인도의 자원을 효율적으로 활용하는 대규모의 조직적인 방어 체제를 갖추지 못했다. 아프가니스탄 군에 대한 방어는 위험에 처한 왕을 도와주는 일회적 목적만을 수행하는 데 불과했다. 인도의 입장에서는 마흐무드는 사카와 훈족과 같은 외래 민족의 침입자였다. 이들 외래 민족들은 한 때 북인도의 정세를 흔들어 놓았지만, 곧바로 망각의 상태로 흘러갔으며, 이는 마흐무드의 군대도 그와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마흐무드가 사망함으로써 북인도의 여러 국가는 서북쪽을 방어할 필요성이 없게 되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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