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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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동석의 주먹이 다시 한번 빛나는 순간
    2024년 4월 24일에 개봉한 한국 영화 '범죄도시4'는 기존 시리즈의 인기 요소를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관객들에게 친숙한 액션과 코미디의 진수를 선보였다는 평이. 마동석 주연의 이 영화는 상영 시간 109분 동안 범죄와의 전투를 그려내며, 15세 이상 관람가 등급을 받았다. 영화는 특유의 강력한 액션과 유머를 바탕으로 마석도 형사(마동석 분)와 그의 팀이 다시금 범죄와 맞서 싸우는 모습을 그린다. 이번 편에서는 특히, 백창기(김무열 분)와 장이수(박지환 분) 등 새로운 캐릭터들이 등장하여 이야기에 신선함을 더했다. 백창기는 조직의 행동대장으로 잔인함을 띄며 강력한 빌런으로 등장, 마석도와의 대결 구도를 형성한다. 전편들에서 호불호가 갈렸던 점을 고려해 영화는 다소 안전한 수순을 밟으면서도 관객에게 익숙한 맛을 제공한다. 액션 장면들은 중독성 강한 숏폼 영상처럼 연속적이고 강렬하게 펼쳐지면서, 심심할 틈 없이 진행된다. 장동철(이동휘 분)과 같은 캐릭터가 범죄자가 아닌 조력자로서 참여하면서 발생하는 해프닝은 영화에 유쾌한 웃음을 더한다. 그러나 영화는 여전히 변화에 대한 필요성을 느끼게 한다. 관객들 사이에서는 이미 익숙한 패턴과 스토리가 다소 지루하게 느껴질 수 있으며, 이에 대한 지적도 존재한다. '범죄도시4'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충분히 흥미롭고 관람 가치가 있는 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특히, 마동석의 카리스마와 강력한 액션은 여전히 매력적인 요소로 작용하며, 쿠키 영상이 없음에도 영화의 마지막까지 관객을 자리에 묶어둔다. 이 영화의 성공 여부는 관객의 반응과 손익 분기점인 350만 명의 관객 동원에 달려있다. 현재까지 '범죄도시4'는 극장가에서 꾸준한 관심을 받으며 상업적으로도 성공할 가능성이 높은 상태입니다. 만약 '범죄도시5'가 제작된다면, 제작진은 새로운 변화와 신선한 요소를 더해야 할 것으로 보인다
    • 문화
    • 영화
    2024-04-27
  • 임신중독증, 임신부 사망 원인 1위: 예방과 조기 진단의 중요성
    임신중독증은 임신 20주 이후에 발생하는 고혈압을 동반한 임신 중 고위험 질환으로, 산모와 태아에게 치명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질병이다. 이 질환은 임신부 사망 원인 중 1위를 차지하며, 전 세계적으로 첫 임신 연령이 상승함에 따라 그 위험이 더욱 커지고 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한국에서 초산모의 평균 연령은 2006년 29.3세에서 2018년 31.9세로 증가하였고, 35세 이상 고령 임신 비중도 같은 기간 11.9%에서 31.8%로 상승했다. 임신중독증의 위험과 증상 임신중독증은 주로 임신 초기 태반의 형성 장애로 발생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로 인해 혈액량 증가에 따른 혈압 상승이 발생했다. 이 질환은 경증과 중증의 형태로 나뉘며, 중증인 경우 자궁 내 태아 성장 지연, 태반 조기 박리, 경련, 간 파열, 뇌출혈, 폐부종, 심지어 실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합병증을 유발할 수 있다. 산부인과 전문가들은 임신중독증을 의심할 수 있는 증상으로 지속되는 심한 두통, 시야 흐림, 다리의 부종, 오른쪽 윗배 통증, 체중의 급격한 증가 등을 꼽는다. 이런 증상 중 하나라도 발생할 경우 즉시 의료기관을 방문해 진료를 받는 것이 권장한다. 고위험군 및 예방 임신중독증 고위험군은 초산, 만 35세 이상의 고령 임신, 다태 임신, 이전 임신에서의 임신중독증 과거력이 있는 경우이다. 또한, 비만, 만성 고혈압, 당뇨병, 루푸스 등의 기저 질환이 있는 임신부도 주의가 필요하다. 고위험군에 속하는 임신부에게는 임신 12주부터 출산까지 저용량 아스피린 복용을 통한 예방적 치료가 권장된다. 이와 같은 예방책은 임신중독증 발생 위험을 줄이는 데 효과적이다. 조기 진단과 관리 정기적인 산전 진찰과 임신중독증 예측을 위한 혈액검사(sFlt-1/PlGF 검사)는 중요하다. 이 검사는 임신중독증의 발생 여부와 발생 가능성을 예측할 수 있으며, 임신 20주 차에 시행하는 것이 권장된다. 분만 시기의 결정에도 이러한 검사 결과가 유용하게 활용된다. 치료 및 관리 임신중독증의 치료는 주로 혈압 조절에 초점을 맞추며, 중증 임신중독증의 경우에는 임신을 종결하는 분만이 최종적인 치료 방법이다. 임신 34주 이후에 발견된 중증 임신중독증은 바로 분만을 통해 관리된다. 임신중독증은 산모와 태아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될 수 있는 만큼, 예방, 조기 진단, 그리고 적절한 치료가 매우 중요하다. 고위험군에 속한다면 전문의와 상의하여 적극적인 관리 계획을 세우는 것이 좋다.
    • 과학
    • 의학
    2024-04-27
  • 지방 의대생, 대입전형 변경 금지 가처분 소송 제기…첫 심문 개최
    서울중앙지법 제50민사부(김상훈 부장판사)는 오는 26일 오전 10시, 지방 의과대학 학생들이 각 대학교 총장들을 상대로 제기한 대입전형시행계획 변경 금지 가처분 소송에 대한 첫 심문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이 소송은 충북대, 제주대, 강원대를 포함한 10개 지방 의과대학 학생들이 제기한 것으로, 최근 의대 증원 계획에 따른 학습권 침해를 이유로 대입전형 시행 계획의 변경을 금지해달라고 요청하는 내용이다. 이들은 증원 강행이 학습환경에 미치는 부정적 영향을 주장하며, 서울 소재 8개 대학을 제외한 32개 지방 의과대학의 학생들이 참여하고 있다. 대표로 가처분 신청을 낸 이준성 충북대 의대 학생회장은 "민사소송을 통해 의대 증원 강행의 절차적 부당성과 이로 인한 학생들의 학습권 침해를 소명하고자 한다"고 밝혔다. 이들의 법률대리인 이병철 법무법인 찬종 변호사는 "민사 가처분 소송은 원고 적격을 따지지 않으며, 학습권 등의 권리 침해를 주장하면 원고 적격이 당연히 인정되므로 가처분 소송의 효용성이 크다"고 설명했다. 소송 결과는 이르면 4월 말에 나올 것으로 예상되며, 만약 기각이나 각하 결정이 나올 경우 즉시 항고와 헌법소원 제기가 가능하다고 소송 관계자들은 전했다. 이번 소송은 의대 증원 정책에 대한 학생들의 반발과 함께 그 절차적 정당성에 대한 법적 판단을 요구하는 사례로, 향후 유사한 교육 정책 변경에 대한 법적 대응에도 영향을 미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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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회
    2024-04-27
  • 금값 급등 속 한국은행의 보수적 금 매입 전략
    최근 금값이 역대 최고가를 경신하면서 전 세계적으로 금 투자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고 있다. 올해 초 대비 13% 이상 상승한 금값은 투자자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고 있으며, 이는 주로 미국의 통화정책 완화 전망과 연방정부의 재정적자 증가에 따른 것으로 분석된다. 뱅크오브아메리카와 씨티그룹은 올해 금 가격이 각각 온스당 2400달러와 3000달러에 이를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국내외 중앙은행들도 이러한 상황에 대응하여 금 매입을 늘리고 있다. 2022년 한 해 동안 중앙은행들이 매입한 금량은 1037톤에 달하며, 이는 1950년 이후 가장 큰 규모이다. 특히 중국은 215.9톤의 금을 사들이며 금 사재기에 가장 적극적인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이러한 국제적인 트렌드와는 달리, 한국은행은 2013년 이후 금을 추가로 매입하지 않고 있으며, 금 보유량 순위도 세계 36위로 하락했다. 한국은행의 보수적인 금 매입 전략은 외환보유액의 유동성 확보를 우선시하는 현 정책과 관련이 있다. 금은 유동화가 어렵고, 금리 하락 시 기회비용이 낮아지는 특성이 있기 때문에, 당장의 경제 상황과는 맞지 않을 수 있다. 한편, 금의 가격 변동성은 매우 크며, 특히 1980년대 이후 급격한 하락과 상승을 반복해왔다. 금값은 예측하기 어려운 변수에 매우 민감하며, 이로 인해 안정적인 투자 수단으로서의 가치가 떨어질 수 있다. 실제로 1973년 이후 금의 위험조정 연평균 수익률은 0.26%에 불과해 다른 자산과 비교할 때 매력적이지 않을 수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한국은행이 금 매입을 보류하는 것은 지정학적 안정성과 달러의 강세라는 점에서 미국의 우방국으로서의 위치를 고려할 때 합리적인 선택으로 보인다. 그러나 일각에서는 위험 분산과 자산 다각화의 관점에서 금 보유량을 증가시키는 것이 바람직할 수 있다는 의견도 제기되고 있다. 결국, 금 매입 여부는 단순한 투자 수익을 넘어서 국가의 경제적·정치적 상황을 고려한 종합적인 판단이 필요한 사안이다. 한국은행의 현재 금 매입 전략이 미래에도 계속 유효할지, 아니면 국제적인 트렌드에 발맞춰 전략을 수정할 필요가 있는지 지속적인 관찰이 요구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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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여당 내 친윤-비윤 분열 속 당권 주자 공방: 나경원-이철규 연대설과 원내대표 경쟁
    최근 여당 내부에서는 차기 당권을 누가 쥘지에 대한 논쟁이 한창이다. 총선에서의 참패 후, 여당은 강서구청장 보선과 같은 중요 국면에서 국민의 정권심판 예고를 간과한 결과, 내부적인 갈등이 더욱 심화되었다. 특히 친윤과 비윤 세력 간의 균형을 이루지 못한 채 정치적 파행을 거듭해 온 상황에서 한동훈 비대위 체제 이후 강력한 당권 주자가 부재한 상태에서 나경원과 이철규의 연대설이 주목받고 있다. 이철규 의원은 최근 원내대표로 급부상하며, 내달 3일로 예정된 원내대표 선거에서 중요한 인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총선에서 야권의 압승이 예상됨에 따라, 여당은 대여 강공 드라이브에 효과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대통령과 소통이 원활한 인물을 원내 사령탑으로 선출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있다. 이 의원은 총선 기간 동안 인재영입위원장을 맡아 활발한 활동을 보이며 영입인재들과의 비공개 오찬을 통해 당선인들을 격려하고 의정활동에 대한 조언을 제공했다. 이와 같은 활동은 그가 원내대표로 선출될 것이라는 전망을 뒷받침하는 동시에, 그의 지위를 강화하는 요소로 작용하고 있다. 반면, 나경원 당선인은 당대표 후보로서 강력한 위치를 점하고 있으며, 친윤 원내대표가 선출될 경우, 당대표는 상대적으로 친윤 색채가 덜한 인물이 맡아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는 논리가 제시되었다. 지난해 저출산고령사회부위원장으로서 전당대회 출마를 준비하던 나 당선인은 윤석열 대통령에 의해 해임된 바 있으며, 이는 당내 계파 간의 경쟁이 격화될 당시의 사건으로 해석되고 있다. 당내에서는 나-이 연대설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도 높다. 조해진 의원은 최근 페이스북을 통해 당대표로 나서려는 대통령의 심복에 대해 비판하며, 당과 대통령 모두 변화가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이러한 내부 비판은 당의 혁신과 쇄신을 요구하는 목소리와 맞물려 더욱 힘을 얻고 있다. 이처럼 여당 내에서는 원내대표 선거와 당대표 선출을 앞두고 계파 갈등이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으며, 나경원과 이철규의 연대 가능성에 대한 논의가 여전히 계속되고 있다. 그러나 당사자인 나 당선인이 출마설을 일축함에 따라, 연대설의 현실화 가능성은 점점 더 낮아지고 있다는 평가도 나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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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대표, 용산에서 영수회담 예정
    오는 29일 오후 2시, 윤석열 대통령과 이재명 더불어민주당 대표가 용산 대통령실에서 영수회담을 개최할 예정이라고 양측 대변인이 공식 발표했다. 이번 회담은 윤 대통령의 취임 이후 처음으로 이재명 대표와 단독으로 진행되는 것으로, 양측에서 각각 3명씩 배석할 것으로 알려졌다. 이번 회담의 주요 의제에 대한 조율은 아직 난항을 겪고 있는 상황이다. 이 대표는 최근 당 최고위원회의에서 "오랜만의 영수회담 준비로 의제 정리와 사전 협의가 쉽지 않다"고 언급하며, 우선적으로 윤 대통령과의 대면을 통해 해결책을 모색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이에 대해 대통령실은 이 대표의 발언을 긍정적으로 평가하며, 실무 협의를 통해 회담의 구체적인 일정과 준비를 서둘러 진행하겠다고 응답했다. 홍철호 정무수석과 천준호 비서실장은 이날 3차 실무회동을 마치고 각각의 기자회견을 통해 이 같은 사실을 공개하며 국민들의 기대와 관심에 부응하겠다는 입장을 전했다. 이번 회담은 윤 대통령의 취임 후 처음으로 이루어지는 단독 회담이며, 야당과 대통령의 협력과 국내외 정치적 이슈에 대한 폭넓은 논의가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된다. 회담의 결과는 양측의 향후 정치적 방향성에 중대한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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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치
    2024-04-27
  • 함석헌의 씨알과 비폭력
    “모든 존재하는 것의 바탕이 되는 것이 생명이다.” 당연하지만 아름다운 말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의 바탕은 생명이다. 모든 생명은 소중하다. 매월 마지막 목요일 저녁에 씨ᄋᆞᆯ학당에서 주최하는 ‘함석헌과 생명평화’라는 타이틀의 정기 강연회를 개최한다. 첫 강연자로 나선 우희종 선생은 ‘함석헌의 생명으로서의 씨ᄋᆞᆯ과 비폭력’을 주제로 강연을 하였다. 우희종 선생은 폴 틸리히의 ‘ground of being-itself’를 언급하면서 존재하는 모든 것의 바탕은 생명이라는 것을 강조하였다. 나는 의문이 생겼다. 함석헌은 왜 생명이라 말하지 않고 씨ᄋᆞᆯ이라고 이야기했을까? 어제 현장에서 강의를 듣는 순간에도 함석헌의 씨ᄋᆞᆯ이 가지고 있는 의미가 무엇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강의가 끝나고 나는 조금 무식한 질문을 하였다. 자기 소개를 하는 시간에는 우리들의 희망 종단(우희종)에서 참석한 사람이라고 나를 소개했다. 그만큼 우희종 선생과는 서로를 잘 아는 사이이다. “장자는 氣가 천지 사이에 충만하고, 氣가 모이고 흩어져서 인간의 생사가 결정되고, 천지의 만물은 모두 하나의 氣라고 인식하였습니다. 그러면 함석헌의 씨ᄋᆞᆯ이 장자의 氣와 유사한 것입니까?”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그렇게도 해석할 수 있을 것이라고 답변했던 것 같았다. 분명한 것은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주체적인 것이며, 생각하는 씨ᄋᆞᆯ이라는 부연 설명이 있었다. 그래서 나는 생각했다. 장자가 이야기하는 氣에는 유물론적인 부분이 있지만, 함석헌의 씨ᄋᆞᆯ에는 유물론적인 요소가 없어 보였다. 강의가 끝난 후에 나는 씨ᄋᆞᆯ학당 김영덕 연구원장으로부터 <함석헌 연구>라는 책을 한 권 받을 수 있었다. 그 책에는 “씨ᄋᆞᆯ은 생명 그 자체이며 역사를 살려내는 역사의 생명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씨ᄋᆞᆯ은 땅과 하늘과 바람과 물 즉 자연과 인간이 함께 만들어 가는 생명입니다”라는 구절이 있었다. 씨ᄋᆞᆯ의 출발은 “함께 살자”라는 것이라고 한다. 함석헌의 씨ᄋᆞᆯ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지만, 조금은 부족하여 서재에 있는 <다석 유영모의 철학과 사상>이라는 책을 펼쳐봤다. “유영모는 생명을 물질과 정신의 결합으로 보고, 생명이 물질에서 정신으로 고양되는 과정 속에 있다고 보았다.” 유영모의 이러한 생각이 함석헌에게 영향을 끼쳤음은 당연하다. 유영모의 생명에 대한 생각을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연결시켜보면, 함석헌의 씨ᄋᆞᆯ은 단순한 생명은 아니라 온 우주와 함께 하나가 되는 과정 속에 있는 진화하는 씨ᄋᆞᆯ로 이해가 되었다. 그래서 함석헌은 “생각하는 씨ᄋᆞᆯ이어야 산다”고 하였을 것이다. 이어지는 강의에서 우희종 선생은 비폭력에 대해 언급하였다. 그는 어리석음이 폭력이라고 하였다. 깨어있지 않음과 연결된다. 어리석음, 정상적인 관계의 단절, 왜곡된 믿음 등이 폭력이란 것이다. 폭력의 정의가 그렇다면, 비폭력은 정상적인 관계의 회복이고, 그러한 관계에 깨어 있음을 위한 실천과 행동에 있다고 하였다. 이어서 약자의 체념이나 무관심도 폭력의 행사라고 보았다. 함석헌은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비폭력은 너와 나의 대립을 초월하는 것이다. 차별성을 뛰어넘는 것이다.” 이 말을 우희종 선생은 파사현정, 즉 사악하고 그릇된 것을 부수고 생각을 바르게 한다는 불교의 용어를 언급하면서 angry Buddha를 이야기했다. angry Buddha는 잘못된 것을 바로잡아 바름으로 이끄는 분노의 행동이야말로 비폭력의 다른 이름이라고 강조했다. 비폭력을 언급하는 대목에서 우희종 선생은 슬라보에 지젝의 폭력에 대한 생각을 잠시 언급만하고 가볍게 지나쳤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지젝은 <폭력이란 무엇인가>에서 주관적 폭력과 객관적 폭력을 구분하면서 오늘날 사회에서 객관적 폭력인 상징적이면서 구조적인 폭력이 난무하고 있다고 보았다. 주관적 폭력은 가시적인 폭력이다. 이 책의 내용 중 다음의 대목이 기억에 남는다. “빌 게이츠의 두 얼굴은 소로스의 두 얼굴과 꼭 닮았다. ... 자선은 경제적 착취라는 얼굴을 감추고 있는 인도주의적 가면이다.” 에로스에서 티모스로의 전환이다. 대상을 소유하는 것에서부터 인정받고 싶은 욕망으로 전환에는 가면이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환경파괴의 주범이면서 자연보호구역에서 휴가를 즐기는 사람들이다. 이것이 바로 보이지 않는 조직적 폭력이고, 공손한 미소가 야수적인 감정 폭발보다 더욱 폭력적이란 말이다. 그 책의 마지막 대목 “때로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가장 폭력적으로 무언가를 하는 것이다”는 angry Buddha와유사하게 읽힐 수도 있다. 우희종 선생은 함석헌의 씨ᄋᆞᆯ과 비폭력사상이 생명 감수성을 높이는 사회로 나아가는 길이라고 강조하였다. “씨ᄋᆞᆯ들은 서로 주고받고, 같이 울고, 같이 느낄 때 부분의 합보다 위대해지고 부분은 전체 안에, 전체는 부분 안에 존재하게 되어 개인의 소리는 전체의 외침이 된다는 것이다.” 함석헌의 생명과 비폭력에 대한 우희종 선생의 강의는 이 짧은 문장 속에 모든 것이 담겨 있다고 이해했다. 뒤풀이로 우희종 선생과 함께 나눈 대화 속에서는 아르네 네스의 환경철학에 대해서도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네스는 생태운동을 표층과 심층으로 구분하면서 모든 동식물이 평등하다고 보는 것이 심층생태운동이 더욱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다음 기회에 더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우희종 선생과 헤어졌다. 우희종 선생을 통한 함석헌의 생명과 비폭력에 대한 강의는 지금 여기에 사는 우리 모두에게 많은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깨어 있는가?”
    • 칼럼
    • Nova Topos
    2024-04-27
  • 네덜란드와 일본 에도막부의 교역, 난학(蘭學)의 유행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는 본국과 의사소통의 어려움과 더불어 수입 감소에도 높은 배당금 지불로 부채가 늘어나면서 1798년 파산하였다. 동인도 회사의 파산 이후 네덜란드 정부는 네덜란드 무역 종합 상사를 설립하여 인도네시아를 포함한 식민지들과 동남아시아와 일본과의 교역을 맡았다. 이러한 상태는 이후로도 약 150년 간 지속되었다. 동아시아 교역로 개척을 목표로 태평양을 횡단한 네덜란드 무역선 ‘리프데(Liefde)’ 호가 1600년 4월 일본 분고에 표착한 것은, 그 동안 동아시아 진출과 교역권을 독점적으로 행사하던 포르투갈의 시대가 종언을 고하고 네덜란드 시대가 열리는 상징적인 사건이라 볼 수 있다. 당시 쇼군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예수회 선교사들의 모두 처형 건의를 무시하고 항해사를 직접 접견하고, 서양 정세, 신무기와 전술, 항해술과 조선술을 듣고 고문으로 임명하였다. 당시 쇼군은 권력 기반 강화를 위해 경제력에 최우선을 두고 새로운 교역 통로 개발과 은 추출법 입수를 목표로 스페인에 접근하였으나 스페인의 기피로 네덜란드와의 통상에 나서면서, 1609년 히라도에 상관 설치를 허가하였다. VOC는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 상관을 받고 독점 무역권과 함께 가격 통제를 면제받는 등 세액을 받게 되었고, 이로써 네달란드는 200여 년간 일본과의 교역을 독점하게 된다. 네덜란드 인들은 선교 없는 교역을 내세워 막부를 설득하고 1641년 포르투갈이 떠난 데지마에 네덜란드 상관을 차렸다. 이후 일본의 유럽인과의 교역은 네덜란드가 독점했다. 데지마와 나가사키를 연결하는 다리로 상품만 오간 것이 아니다. 네덜란드 인들이 선교를 내세우지 않았기 때문에 막부는 데지마를 통해 발달한 서양 학문을 수입하더라도 위험한 기독교 사상이 유입되지 않으리라 기대했다. 에도 막부의 8대 쇼군 도쿠가와 요시무네(徳川吉宗)가 서양 서적의 수입 금지를 완화하면서 다양한 학문 분야의 서적들이 데지마를 통해 폭발적으로 전해졌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서양 학문을 지칭하는 단어가 남쪽 오랑캐의 학문인 남만학에서 난학(蘭學)으로 바뀌었고, 이를 연구하는 학자들은 ‘지란당(芝蘭堂)’이라는 학술 단체를 만들어 정보를 교류했다. 난학의 도입 초기에 특히 중요한 것은 의학이었다. 교역이 허용된 네덜란드 인이라 해도 상관장과 부상관장이 아니면 데지마를 벗어나 일본에 상륙하는 일이 드물었다. 일본인 역시 통역사와 창녀 등 제한된 인원만 데지마에 들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네덜란드 의사는 때때로 홀란드 다리를 건너 일본 고위층의 진료에 참여했고, 일본인 의사도 데지마에 와서 의학을 배웠다. 일본인 의사들은 서양 의학을 배우면서 인간의 육체가 음양오행설에 기반한 동양의학과는 전혀 다르고 <타펠 아나토미아(Tafel Anatomia)>와 정확하게 일치한다는 것에 충격을 받게 된다. 당시 일본인 의사 스기타 겐파쿠는 네덜란드어로 된 의학서의 인체 해부도를 보고 중국 의학서와 비교해 얼마나 정확한 것인지 알기 위해 1771년에 처형된 죄인의 인체 해부에 입회했다. 그 결과, 그는 중국 의학서가 얼마나 많이 오류가 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는 해부 현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네덜란드어로 된 해부학 책을 일본어로 번역하기로 다짐했다. 스기타와 그의 동료들이 1774년에 일본어로 출간한 <해체신서(解體新書)> 5권이 그것이었다. 이 책의 출판으로 인해 일본의 근대가 시작되었다는 평가도 있다. 일본 도쿄대학의 전신이 이 때 설치된 난학 연구소였다. 막부 역시 데지마를 무역 창구로만 사용하지 않았다. 그들은 네덜란드에 교역을 허용하면서 매년 서양 정세를 집대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를 작성해 보고하도록 요구했다. 1641년 처음 작성한 <오란다풍설서(オランダ風説書)>는 유럽 각국 뿐 아니라 인도, 청나라, 미국의 정보도 기재되어 쇄국 기간 중 막부가 국외 사정을 파악하는 데 중요한 구실을 했다. 일본 경제는 16~17세기에 막대한 은과 자기의 수출로 급격하게 성장했다. 더불어 이 때부터 교역에 대해 일본은 동남아시아 무역 경쟁에 본격적으로 뛰어 들어 해상 실크로드의 중심지였던 말라카까지 진출하고 이후 바타비아, 테르나테(Ternate) 등으로 넓혀 나갔다. 그리고 필리핀의 마닐라와 베트남의 호이안을 거점으로 중계무역을 했다.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의 데지마 무역관은 1854년 미국과 일본의 화친 조약으로 일본이 개항될 때까지 유럽과의 무역을 독점하며 막대한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일본의 쇄국으로 알려진 213년 동안 네덜란드와 일본 사이에 707척의 선박이 왕래했다. 일본은 주로 은과 구리와 자기를 수출한 반면에 일본에는 유럽 상품뿐 아니라 서구 지식이 밀려 들어왔다. 특히 약 1만 권의 서양 서적, 특히 네덜란드 서적이 수입되었다. 일본 사람들은 네덜란드의 다른 이름인 홀랜드(Holland)를 한자로 ‘화란(和蘭)’이라 불렀다. 일본에서 ‘화란 학문’ 곧 ‘난학(蘭學)’의 인기가 급상승했다. 네덜란드 서적을 통해 서양을 연구하는 학문이 난학(蘭學)인 것이다. 일본인 통역사와 상인들이 네덜란드 무역관의 상인들과 접촉하며 서양 문물을 수용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네덜란드 무역관의 의사와 지식인들은 자연스럽게 일본 청년들과 교제하게 되었다. 당시 네덜란드 의사 대부분이 유태인이었다. 이후 에도를 중심으로 일본의 서양 문물 수용이 빠르게 진행되어 1800년대 초에는 난학 전문가들이 1,000여 명을 넘어섰다. 서양의 많은 문물이 난학을 통해 일본에 들어왔다. 그 이후 명칭도 ‘난학에서 양학(洋學)으로, 이후 서학(西學)’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어졌다. 일본은 이렇게 일찍이 서구 문물을 받아들여 세계 동향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었다. 에도 막부는 나가사키의 네덜란드 인들을 1년에 한 번씩 불러들였다. 이 때 막부는 그들이 보고하는 <오란다풍설서>를 통해 국제 정세를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메이지 정부는 난학을 통해 모든 정보를 얻었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개방과 개항, 막부 타파, 구습 철폐, 부국 강병론 등을 주장하여 일본 근대화의 기수로 불리는 후쿠자와 유키치(福澤諭吉)는 일본의 장래가 젊은이들의 학문 탐구에 있다고 보고 게이오 대학(慶應大學)을 설립했으며 산케이 신문(産経新聞)의 전신인 지지신보(時事新報)를 창립했다. 그리고 그는 일본은 아시아를 탈피하여 구미 열강의 일원이 되어야 한다는 이른바 ‘탈아입구론(脫亞入歐論)’을 주창했다. 이렇게 난학은 조공과 책봉의 중화사상 정치 질서와 결별하고 서구를 지향하는 일본 근대화의 출발점이었다. 이와 같이 ‘탈아론(脫亞論)’은 후일 대동아공영권과 태평양전쟁의 사상적 출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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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4-27
  • 소련과 중공의 분열 및 결렬은 6.25 전쟁부터 시작, 이후 더 이상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았던 모택동
    중국이 소련에 실망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6.25 전쟁으로 나타난다. 스탈린은 원래부터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중국 측에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은 겨우 공군 뿐이었고 그것도 평양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에만 공습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출격했으며, 그 이남에서 제공권 없이 전투를 벌이는 중국군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이 소련이 6.25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 대조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였기에 동북항일전선은 사실상 일본군에게 패배해 궤멸 상태에 놓였고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소련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1941년 1월, 한 인물이 소련 볼셰비키에 입당원서를 쓰고 이력서와 함께 제출하며 볼셰비키 주요 간부들과 면담을 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약 1년 6개월 후인 1942년 7월 소련 볼셰비키 부대에 입대가 받아들여진 뒤, 대위로 전시(戰時) 특별 임관되었다. 그리고 이 인물은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에 등장하면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이 인물이 바로 김일성(金日星)이다. 이 회의에서 만주를 통일 집중적으로 영도하는 기관은 각 성의 대표에 의하여 선거된 전 만주 임시위원회이며 전 만주 임시위원회는 잠시 3명으로 한정하고 대회는 서기 1명을 직접 선가한다고 가결했으며 전 만주 당위 임시영도기관을 잠시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한다는 것, 그리고 통일적 최고 군사 영도 기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이 같은 사실을 소련 스탈린에게도 통보했다. 소련은 항일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관리하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소련 영내에 남쪽과 북쪽 2개의 임시주둔지를 마련하고 소련 경내로 들어간 부대들을 각기 그 2개 주둔지에 집중시켰다. 이 2개 주둔지를 습관적으로 북야영, 남야영이라고 불렀으며, 하바로프스크 회의 정신에 근거하여 각 항일부대는 1940년 10월 말에서 11월초 사이로 만주에서 패배하고 있는 항일부대들을 소련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확인된다. 1941년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소련으로 피신한 항일부대들은 만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대조국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또한 일본이 연해주를 침공할 것을 우려해 혹시나 모를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전략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소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했는데, 이것이 바로 88국제여단으로 불리는 군대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관계, 혁명 운동에 대한 성실성,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군의 평가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나치게 과음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규율을 잘 세웠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소련군에 김일성이 복무하던 시절 중국인 정치위원이 그가 항일운동 간판만 걸어놓고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고 폭로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소련 군 당국이 김일성을 질책하자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 라는 궤변을 하여 살아 남았다고 전한다. 당시 제88 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하여 소련 장교의 지도에 따라 행해졌으며, 총검술과 실탄 사격, 전술 진공, 방수 훈련, 행군 연습, 동계 야외 노영 훈련, 낙하산 강하 훈련 등이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 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소련군에게 멸망하고 파죽지세로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는데 소련 밑에서 군복무를 한 김일성이 제88 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이 때부터 소련 지도부와 스탈린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게 된다. 소련군은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게 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박헌영은 여기에서 밀려나게 된다. 김일성은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명목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북한 주민을 기만하면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 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46년 7월 박헌영을 제치고 스탈린과의 면접을 통해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된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재신임한 것은 그가 소련군에 소속한 경력이 있다는 점, 소련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는 점, 항일영웅으로서 38선 이북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점, 학식과 이론은 약하지만 소질과 신념이 강하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1948년 대한민국과 북한 양측의 분단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선을 중심으로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1949년 국공 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대륙에서의 내전은 종결되었다. 소련도 대조국 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안정화되어 팔로군 등 남침을 위한 지원을 받기 쉬워지게 되었고 스탈린은 탱크와 야포, 전투기 등을 지원하여 북한 군대를 무장시켰다. 군 병력도 강력해지니 자신감이 생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71차례나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을 두려워했으며 모스크바 핵이 투하될 것을 염려해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은 꺼려했다. 그래서 소련은 1949년 핵실험을 했고 1953년 수소폭탄 개발을 통한 핵무장까지 완료하게 된다. 스탈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김일성은 이번엔 모택동에게 스탈린을 설득해 달라며 부탁하게 되었고 모택동의 설득과 미국의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것을 판단하게 되자 미군이 합류하기 전, 적화통일 시키면 된다 인식하고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하게 된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6.25 전쟁이다. 중국 지도부는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인 소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미군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MiG-15와 같은 고가 무기나 장비들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참전했지만, 소련은 우방국에게 우대 가격이라고 속이며 제3 세계 국가에 제공하는 원조 가격보다도 훨씬 비싸게 팔아넘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지도부는 격노했지만 이 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물론 소련도 6.25 당시 적극적이지 못한 것에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소련 측은 대조국 전쟁에서 나치 독일에게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나라였고, 전후복구가 한창이라 재원이 부족했으며 사실 그와 같은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공 정부 창립 초기에 중국에 해준 원조(2억달러 유무상 원조)도 적지 않았고 한다. 소련도 안정되었기는 하나 매우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고, 더욱이 자국의 최신형 무기들의 자격증까지도 허가해주는 등, 사회주의 혈맹국인 중공에 대해서도 할 만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소련은 무기만큼은 제 값 받고 팔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입장이었다. 특히 중국 측이 볼 때 소련이 배신했다고 본 제3 세계에 대한 무기거래는 미국과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는 제3 세계(특히 인도)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 가성비 대비 파격적인 할인을 해줘야 했지만, 무기와 기술 도입원이 소련 밖에 없는 중국에는 정치 논리 대신 경제 논리가 들어갔기 때문에 딱히 배신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양측의 6.25에서의 지원 문제를 두고 대립한 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가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에 비해 중공군은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었다. 이 때부터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게 되었지만 그나마 코민테른을 지휘했던 스탈린주의 사상이 공산주의 시작이자 리더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스탈린이 생존해 있는 동안 모택동은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참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때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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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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