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21(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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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 소련에 실망하게 된 첫 번째 계기는 6.25 전쟁으로 나타난다. 스탈린은 원래부터 북한의 남침을 지원하는 것에 소극적이었으며, 북한군이 유엔군의 반격으로 패망 직전에 이르자 중국 측에 참전을 종용하면서도 자신들은 결국 움직이지 않았다. 소련의 지원은 겨우 공군 뿐이었고 그것도 평양 이북의 한반도 북부지역에만 공습하는 미군을 저지하기 위해 한정적으로 출격했으며, 그 이남에서 제공권 없이 전투를 벌이는 중국군은 오히려 큰 피해를 입었다. 이와 같이 소련이 6.25 전쟁에 대해 소극적인 행동을 한 것에 대해 알아보려면 대조국전쟁이 한창 진행 중인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로 돌아가 보아야 한다. 1937년부터 일본군이 ‘만주국치안숙청계획’을 통해 만주 지역의 병력을 늘리고 토벌작전을 실시하였기에 동북항일전선은 사실상 일본군에게 패배해 궤멸 상태에 놓였고 상당수의 독립군들이 소련으로 넘어가게 된다. 이후 1941년 1월, 한 인물이 소련 볼셰비키에 입당원서를 쓰고 이력서와 함께 제출하며 볼셰비키 주요 간부들과 면담을 했다. 그리고 그 인물은 약 1년 6개월 후인 1942년 7월 소련 볼셰비키 부대에 입대가 받아들여진 뒤, 대위로 전시(戰時) 특별 임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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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스탈린과 모택동, 출처 : 연합뉴스, 한미희 기자

 

그리고 이 인물은 1940년 12월 제2차 하바로프스크 조선 볼셰비키 회의에 등장하면서 모습을 나타내게 된다. 이 인물이 바로 김일성(金日星)이다. 이 회의에서 만주를 통일 집중적으로 영도하는 기관은 각 성의 대표에 의하여 선거된 전 만주 임시위원회이며 전 만주 임시위원회는 잠시 3명으로 한정하고 대회는 서기 1명을 직접 선가한다고 가결했으며 전 만주 당위 임시영도기관을 잠시 하바로프스크에 설치한다는 것, 그리고 통일적 최고 군사 영도 기관인 총사령부를 구성하는 것으로 결정했으며 이 같은 사실을 소련 스탈린에게도 통보했다. 소련은 항일부대들을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관리하는데 편리하도록 하기 위해 소련 영내에 남쪽과 북쪽 2개의 임시주둔지를 마련하고 소련 경내로 들어간 부대들을 각기 그 2개 주둔지에 집중시켰다. 이 2개 주둔지를 습관적으로 북야영, 남야영이라고 불렀으며, 하바로프스크 회의 정신에 근거하여 각 항일부대는 1940년 10월 말에서 11월초 사이로 만주에서 패배하고 있는 항일부대들을 소련으로 끌어들인 것으로 확인된다. 1941년 소련은 일본과 중립조약을 맺었고, 이에 따라 소련으로 피신한 항일부대들은 만주로 돌아가기 어려웠다. 그러나 1941년 6월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고, 소련은 대조국전쟁을 수행해야 했다.


그리고 1941년 12월 7일 일본의 진주만 기습 공격으로 미국이 제2차 세계대전에 참전하면서, 소련 또한 일본이 연해주를 침공할 것을 우려해 혹시나 모를 일본의 침략을 방어하기 위해 여러 전략들을 고려하게 되었다. 1942년 미드웨이 해전 이후 소련은 항일무장투쟁 세력들을 자신들의 군대로 편입했는데, 이것이 바로 88국제여단으로 불리는 군대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소련군의 단기 군사 교육을 받고 주로 한국인으로 구성된 여단 1대대의 대대장에 오르게 된다. 이 때 소련군 지도부는 김일성의 부대원들과의 관계, 혁명 운동에 대한 성실성, 뛰어난 러시아어 실력 등을 눈여겨 보기 시작했다. 당시 소련군의 평가에 따르면 김일성은 지나치게 과음하는 버릇이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놀라울 정도로 규율을 잘 세웠으며 엄격한 군율을 적용하였다고 한다. 소련군에 김일성이 복무하던 시절 중국인 정치위원이 그가 항일운동 간판만 걸어놓고 약탈, 납치, 살인, 방화를 자행했다고 폭로하기에 이른다. 그러한 사실에 대해 소련 군 당국이 김일성을 질책하자  "우리가 죽인 것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 트로츠키주의자" 라는 궤변을 하여 살아 남았다고 전한다. 


당시 제88 특별여단의 군사훈련은 소련 극동군의 ‘보병훈련대강’을 기초로 하여 소련 장교의 지도에 따라 행해졌으며, 총검술과 실탄 사격, 전술 진공, 방수 훈련, 행군 연습, 동계 야외 노영 훈련, 낙하산 강하 훈련 등이 이루어졌다. 겨울에는 스키, 여름에는 수영 연습도 이루어졌다. 전세가 막바지로 달하던 1944년에는 소련군 장교의 숫자가 점차 줄어들었으며, 항일연군 내부의 지휘관이 훈련을 지휘하게 되었고 김일성은 그 중에 한 사람이었다. 1945년 8월 미국이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을 투하하자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여 남하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일본의 괴뢰국인 만주국이 소련군에게 멸망하고 파죽지세로 한반도로 남하하게 되었는데 소련 밑에서 군복무를 한 김일성이 제88 국제여단 조선공작단의 일원으로 원산을 통해 귀국하게 된다. 이 때부터 소련 지도부와 스탈린은 김일성을 적극적으로 밀어주게 된다. 소련군은 민정사령관 로마넨코를 배석하게 하여 김일성에게 힘을 실어 주었고 박헌영은 여기에서 밀려나게 된다. 김일성은 '반 제국주의 반 봉건주의 민주주의 혁명'이라는 명목으로 공산주의에 대한 거부감을 가진 북한 주민을 기만하면서 갑부들을 숙청하는 사법 살인을 마구 남발했고 그 재산을 갈취했다. 


그리고 김일성은 1946년 7월 박헌영을 제치고 스탈린과의 면접을 통해 북한의 지도자로 결정된다. 스탈린이 김일성을 재신임한 것은 그가 소련군에 소속한 경력이 있다는 점, 소련의 명령을 잘 이행했다는 점, 항일영웅으로서 38선 이북에서 지명도가 높다는 점, 학식과 이론은 약하지만 소질과 신념이 강하다는 점 등 때문이었다고 한다. 1948년 대한민국과 북한 양측의 분단 정부가 수립되면서, 한반도는 미국과 소련이 그어놓은 38선을 중심으로 충돌이 발생하게 된다. 때마침 중국에서는 1949년 국공 내전에서 모택동의 공산당이 승리하면서 대륙에서의 내전은 종결되었다. 소련도 대조국 전쟁에서의 충격에서 안정화되어 팔로군 등 남침을 위한 지원을 받기 쉬워지게 되었고 스탈린은 탱크와 야포, 전투기 등을 지원하여 북한 군대를 무장시켰다. 군 병력도 강력해지니 자신감이 생긴 김일성은 스탈린에게 남침 허가를 71차례나 요청하게 된다. 그러나 스탈린은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미국의 원폭을 두려워했으며 모스크바 핵이 투하될 것을 염려해 미국과 직접적인 대결은 꺼려했다. 그래서 소련은 1949년 핵실험을 했고 1953년 수소폭탄 개발을 통한 핵무장까지 완료하게 된다. 


스탈린의 마음이 움직이지 않자 김일성은 이번엔 모택동에게 스탈린을 설득해 달라며 부탁하게 되었고 모택동의 설득과 미국의 애치슨 라인에서 한반도가 제외되는 것을 판단하게 되자 미군이 합류하기 전, 적화통일 시키면 된다 인식하고 김일성에게 남침을 허락하게 된다. 그러면서 발생한 것이 6.25 전쟁이다. 중국 지도부는 전쟁이 지속되는 와중에 한국전쟁 지원에 소극적인 소련에 대해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게 되었다. 특히 중국은 미군에 맞서기 위해 소련의 MiG-15와 같은 고가 무기나 장비들을 대량으로 구입해서 참전했지만, 소련은 우방국에게 우대 가격이라고 속이며 제3 세계 국가에 제공하는 원조 가격보다도 훨씬 비싸게 팔아넘겼다. 이러한 사실을 알게 된 중국 지도부는 격노했지만 이 때는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출하지는 않았다. 물론 소련도 6.25 당시 적극적이지 못한 것에 나름의 입장이 있었다. 소련 측은 대조국 전쟁에서 나치 독일에게 가장 피해를 많이 입은 나라였고, 전후복구가 한창이라 재원이 부족했으며 사실 그와 같은 어려운 사정에도 불구하고 중공 정부 창립 초기에 중국에 해준 원조(2억달러 유무상 원조)도 적지 않았고 한다.


소련도 안정되었기는 하나 매우 경제적으로 어려운 형편이었고, 더욱이 자국의 최신형 무기들의 자격증까지도 허가해주는 등, 사회주의 혈맹국인 중공에 대해서도 할 만큼 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적어도 소련은 무기만큼은 제 값 받고 팔아야 한다는 것이 당시의 입장이었다. 특히 중국 측이 볼 때 소련이 배신했다고 본 제3 세계에 대한 무기거래는 미국과 줄타기 외교를 하고 있는 제3 세계(특히 인도)에 정치적 고려가 들어가 가성비 대비 파격적인 할인을 해줘야 했지만, 무기와 기술 도입원이 소련 밖에 없는 중국에는 정치 논리 대신 경제 논리가 들어갔기 때문에 딱히 배신한 것도 아니라는 입장에 있었다. 결과적으로 양측의 6.25에서의 지원 문제를 두고 대립한 것은 지극히 경제적인 이유가 발단이 되었던 것이다. 결국 소련에 비해 중공군은 어마어마한 손실을 입었다. 이 때부터 모택동은 스탈린에 대한 신뢰도가 낮아지게 되었지만 그나마 코민테른을 지휘했던 스탈린주의 사상이 공산주의 시작이자 리더격으로 보았기 때문에 스탈린이 생존해 있는 동안 모택동은 별다른 불만을 드러내지 않고 참아야 했던 것이다. 이런 문제들이 쌓이고 쌓여 흐루시초프의 스탈린 격하 운동 때 마침내 폭발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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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과 중공의 분열 및 결렬은 6.25 전쟁부터 시작, 이후 더 이상 스탈린을 신뢰하지 않았던 모택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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