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최종편집 2024-05-18(토)
  • 로그인
  • 회원가입
  • 지면보기
  • 전체기사보기

칼럼
Home >  칼럼  >  Nova Topos

실시간뉴스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 칼럼
    • Nova Topos
    2024-05-15

실시간 Nova Topos 기사

  • 동북아시아 최대 지정학적 요충지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대한민국, 대한민국은 어디로 가고 있는가?
    푸틴 정부는 시베리아의 경제력을 활성화시키고 유럽러시아와의 차이를 좁히려고 무던히 노력해왔지만 이 미국의 2.5배나 되는 전체 러시아와 중국 영토 크기와 비슷한 광활한 크기의 시베리아를 감당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이렇게 답이 없을 때 시베리아의 경제력이 회복될 수 있는 한 줄기 빛이 나타났다. 바로 북극항로의 개발 이야기가 전면으로 부각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오래 전부터 북극항로에 대한 논의가 있었지만 환경적, 비용적 측면에서 큰 관심을 받지 못했다. 하지만 북극 해빙의 두께가 얇아지면서 지금 그 어느 때보다 북극항로의 가능성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주장이 나오고 있다. 최근 러시아가 수에즈 운하의 대안으로 북극항로를 제시하면서 연해주 중심의 신항만 투자를 늘려가고 있으며 동방경제포럼 때 이러한 논의가 중점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전망된다. 북극항로는 북극해를 통해서 극동과 유럽을 이어주는 항로로 북극항로에는 북미와 유럽을 이어주는 캐나다 해역 북서항로와 아시아와 유럽을 잇는 러시아 해역의 북동항로로 분류된다. 북극항로를 이용하면 현재 항로보다 운항시간이 10일가량 단축되기 때문에 도로 사정이 낙후한 시베리아로의 운송업이 회복될 수 있고 경제 무역적인 가치도 높아지며 시베리아의 지하자원들이 개발되면서 시베리아의 경제가 급성장할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푸틴 정권은 러시아 경제의 진보적 이상향을 위해 북극항로 개발에 대해 적극적으로 사력을 다할 것으로 보인다. 더불어 2017년 8월 러시아가 일본과의 영토 분쟁 지역인 쿠릴열도 남부지역의 쿠릴 4개 섬을 경제특구로 지정함을 발표했다. 쿠릴 열도 지역에서 러시아와 일본의 공동 경제활동을 구상해온 일본은 이와 같은 조치에 당황해하면서도 적극 반발했다. 러시아 타스 통신과 일본 언론 등에 따르면 당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총리가 쿠릴 4개섬 가운데 하나인 시코탄에 경제 특구 성격의 '선도개발구역'(TOR)을 설치하는 총리령에 서명했다고 한다. 메드베데프 총리는 쿠릴열도가 속한 극동 사할린 주(州)의 주도 유즈노사할린스크를 방문해 여당인 '통합 러시아당'의 현지 열성당원들과 면담하는 자리에서 총리령에 서명했다고 밝히게 된다. 이와 같은 북방 4개 도서 선도 개발구역은 극동 지역에 분야별로 특화된, 경제자유구역과 유사한 산업 기지들을 조성함으로써 정부가 인프라를 구축해 주고 각종 행정과 세제 상의 특혜를 부여함으로 인해 국내외 입주의 업체들을 끌어 들여 완전히 영토화 하려는 러시아 정부의 방침으로 보여 진다. 쿠릴 열도가 속한 사할린 주 주지사 올렉 코줴먀코의 발표에 의하면 선도개발구역 지정으로 쿠릴 열도에 새로운 일자리들이 창출될 것이고 청년들의 실업난이 해결될 것이라며 적극적으로 환영하는다는 입장을 밝혔다. 사할린 주 주정부는 수산물 가공업체 '오스트로브니(Островни)'가 투자 의향을 밝혔다면서 이 업체가 약 74억 루블(약 1,400억 원)을 투자하여 시코탄 선도 개발구역에 수산물 가공 단지를 건설할 예정이라고 하였다. 오스트로브니(Островни)는 부두 시설 개보수, 수심 확장 사업 등을 시작으로 2020년까지 3단계로 사업을 추진할 계획을 세웠고 약 700개의 일자리가 창출될 것이라고 설명했으며 현재도 계속 사업이 추진되고 있다. 오스트로브니(Островни)는 이곳에서 생산된 수산물 가공품을 러시아 국내에 공급하는 것은 물론 일본, 중국, 한국 등으로 수출한다는 계획을 갖고 있다. 러시아 정부가 2010년 이후 1조원대 지역개발 및 관광지 개발을 할 예정이라 발표하고 이에 따라 현지 거주민들이 매우 기대하고 있으나 10년이 넘도록 아무것도 된 것은 없다. 아무래도 이곳으로 관광 올 사람들은 일본인들일 가능성이 높고 그들이 자주 출입하게 되면 문제가 생길 수 있기 때문이다. 일본이 영토 반환을 요구하는 남부 쿠릴 열도 인근 해상은 북극항로 활성화에 공을 들이고 있는 러시아의 입장에서는 중요한 길목이며 또한 태평양에 진출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요충지이다. 4개 섬 인근에는 천연가스와 석유, 비철금속, 수은 등 각종 자원이 엄청나게 매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러시아에게 아주 중요한 지역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4개 섬을 일본에 넘겨줬을 경우 미군이나 일본 자위대의 군사시설이 이곳에 들어설 가능성을 러시아는 완전히 배제하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이 지역을 두고 최근 푸틴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의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도중 러시아 제재를 가하며 비우호국으로 찍은 일본의 영토 분쟁 및 도발을 상쇄하기 위하여 북방 4개 도서 경제특구에 외자유치를 승인했다. 20년동안 법인세와 고정자산세를 면제해 주는 획기적인 조건까지 승인한 것이다. 따라서 서서히 서구와의 미국의 대러제재가 약해질 때쯤에 우리도 대비를 해야 한다. 북방 4개 도서 경제특구에 해산물이나 수산물, 특히 명태 가공업 등의 민간업체와 자원 개발과 더불어 쿠릴 열도 관광 개발 등을 목적으로 하는 우리의 민영 기업들이 진출하여 투자해야 한다. 이는 외화 벌이 & 일본의 영토 확보에 대한 야욕을 봉쇄시키는 효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러시아와의 협업으로 인해 다시 국가 간의 신뢰까지 회복하는 철저한 실리 외교와 경제적 이득을 목적으로 해야 한다. 그러면서 러시아에 대한 경제 제재와 맞 경제제재가 심화될 때 빚이 많고 외환이 부족한 나라들은 경제 위기를 맞게 된다. 특히 자원이 부족하고 원자재를 이용해서 제품을 만들어 수출하는 국가인 한국의 경우, 다방면에 있어 수출 길을 확보해야 하는데 그 또한 여의치 않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한국이 갖고 있는 이점들을 충분히 활용하지 못하고 있다. 한반도, 특히 대한민국이 위치한 남한 반도는 동북아시아 해상 교통의 요충지이면서도 지정학적으로 해상 무역으로 인한 최적의 조건을 갖고 있는 이점이 있다. 중공과 러시아 사이에 대칭점에 위치해 있고 지도 사진의 파란색 해상로를 이용해 전라도와 제주도를 거쳐 일본과 무역을 틀 수 있다. 붉은색 해상로를 이용해 블라디보스토크를 출발해 부산을 거쳐 제주도를 통과해 대만 방향으로 내려가 동남아시아로 넘어갈 수 있는 조건을 갖고 있다. 앞으로 전라도는 목포, 경상도 지역은 부산, 그리고 제주도가 아주 중요해질 것이다. 특히 제주도는 동북아시아 해상 교역의 요충지로 사방을 중개할 수 있는 최적의 이점을 갖고 있다. 동북아시아 해상 무역의 허브로써 충분히 구실을 할 수 있는 조건을 가진 곳이 제주도인 것이다. 더불어 중공, 러시아, 일본 어디든 우리가 적대하기 어려운 것이 현실로 드러나고 있다. 특히 러시아는 대륙으로 가는 중요한 통로이기도 하지만 해상으로 남하하는 그 시작점이기도 하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러시아와 적대하면 안 된다. 러시아와 적대할수록 불리한 나라는 한국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6
  • 우크라이나에 거주하고 있는 유태인의 역사
    우크라이나에 살고 있는 유태인의 역사는 무려 1,000년 이상 거슬러 올라간다. 우크라이나에 거주했던 유태인들은 7세기부터 존속했던 투르크계 유목제국인 하자르 제국에서부터 그 역사를 찾을 수 있다. 하자르족은 본래 7~10세기에 카프카스 지역과 흑해 북부의 볼가와 돈 강을 잇는 지역에 존재했다. 이 종족은 벨렌제르 씨족을 중심으로 강력한 조직력과 활발한 무역 활동으로 동유럽 역사에 등장했던 가장 중요한 투르크계 국가로 평가되고 있다. 훈족에 이어 유라시아 초원 지대를 평정한 유목민족은 아바르족이었고 이어 남부 러시아를 지배한 점령한 민족은 하자르족이었다. 이들은 당시 중동에서 신흥 세력으로 군림하고 있는 이슬람 세력과 기존의 기독교를 통해 하자르 제국을 비잔틴 제국의 영향하에 두려는 것에 정치적인 혼돈과 종속을 우려하여 결국 하자르 제국은 유태교를 받아들여 개종함으로써 하자르계 유태인이 탄생하게 된다. 이들 하자르계 유태인들이 8~9세기 같은 투르크계인 페체네그족의 공격과 약탈로 인해 국가가 쇠락하자 유럽으로 흘러들어갔고 이들 중, 중세시대에 남으로는 알자스부터 북으로는 빙엔에 걸쳐 있는 라인란트에 주로 거주하게 되면서 이들의 후예를 아쉬케나지(Aschkenasim) 유태인이라 부르게 된다. 반면 유럽으로 이동하지 않고 우크라이나에 남았던 하자르계 유태인 공동체들은 9세기 후반에 루스 슬라브가 남하함에 따라 그들과 섞여 살게 되었고 키예프 루스인과 동화되면서 정교회로 개종하지 않고 그들 스스로 문화적, 종교적 관습을 받아들이며 살았다. 우크라이나에서 루스 슬라브족과 함께 거주하던 유태인은 이스라엘 유태인과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종교적으로 개종하면서 자연스럽게 유태인으로 변모한 이들이었다. 그래서 이스라엘과의 연계성은 다소 약한 편에 속한다. 이들 우크라이나 유태인들은 하시디즘(Hasidism)과 같은 독특한 유태교 신학 및 그들의 문화적 전통을 많이 발전시켰다. 하시디즘은 히브리어의 하시드, 즉 '경건한' 자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광의로는 유태 종교사에 나타난, 율법(律法)의 내면성을 존중하는 경건주의 운동을 가리키고 있다. 이 운동은 정통 유태교로부터는 이단시되었으며 지식인 계층으로부터는 다소 미신적인 부분이 들어있다며 경시되어 왔으나 투르크 및 슬라브의 샤머니즘을 반영하여 습득 및 이를 유태교의 교리와 합치하여 하나님의 말씀을 설파하고 있었기에 동슬라브 지역에 거주하고 있는 유태교가 대체로 이와 같은 하시디즘(Hasidism)을 받아들이고 있다고 보면 된다. 세계 유태인 대회에 의하면 우크라이나의 유태인 공동체인 하시디즘(Hasidism) 유태인은 유럽에서 세 번째로 큰 유태인 공동체에 속하고 있으며 세계적으로 볼 때는 다섯 번째로 큰 유태인 공동체이다. 이들 하시디즘 우크라이나 유태인 공동체들은 역사적인 상황에 따라 크게 번성할 때도 있었지만 카톨릭을 근본으로 하는 폴란드와 체코 보헤미아, 모라비아 인들에 의해 하시디즘 유태인 공동체들은 박해와 반유대주의적 차별에 직면하기도 했다. 이들 유태인들의 언어인 이디시어는 중세 시대 이후 우크라이나어, 러시아어와 함께 우크라이나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던 언어였다. 당시 유태 민족 연합이 결성되어 하시디즘 유태인 공동체에 비교적 자치적인 지위가 부여되었다. 유태인 언어인 이디시는 이후, 근현대 시대의 역사적 소용돌이에 직면한 1917년에서 1920년 사이에 우크라이나에서 적극적으로 사용되었다. 그래서 제2차 세계대전 이전에는 우크라이나 도시 인구의 1/3이 하시디즘 유태인들이었고 이들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양쪽에서 거주하고 있었다. 이들 하시디즘 유태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소수민족으로 분류되었었다. 그러나 소련이 형성되고 우크라이나의 최서단 지역에서부터 유태인들이 크게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1918년에서 1927년 사이에 유태인들은 볼셰비키와 왕당파의 적백내전의 기간 동안 각자 적군과 백군의 주력으로 동원되어 동족상잔을 벌였고 그로 인해 내전이 볼셰비키의 승리로 돌아가자 백군에 가담했던 유태인들을 학살하기 시작했다. 게다가 우크라이나 지역의 유태인들은 대부분 폴란드와 독일로 넘어갔지만 이 또한 나치가 집권하면서 최악의 선택지가 되고 말았다. 이와 같은 유태인 학살자들의 추정치는 150,000~300,000명 정도로 여겨진다. 이후에도 우크라이나의 스테판 반데라의 극우조직에 의해 다수의 유태인들이 살해되거나 포로로 잡혔고 300개의 유태인 공동체가 완전히 파괴되었다. 1932년에는 우크라이나 대기근인 홀로도모르 사건이 발생하면서 수많은 유태인들이 기아로 사망했지만 1933년에는 이 모든 현상이 유태인 때문이라는 그릇된 인식으로 인하여 오데사에서 반유태인 폭동이 발생해 1,400명의 유태인들이 살해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과 독일의 우크라이나 점령 기간 동안의 유태인들인 손실은 700만 명으로 추산되며, 그 중 100만 명이 넘는 유태인들은 우크라이나 서부에서 나치즘을 숭상하는 극우주의자들에 의해 총에 맞아 사망했다. 대조국 전쟁 승전 이후, 우크라이나에는 1959년에 840,000명의 유태인이 있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이는 1941년 전쟁이 발발할 때의 유태인 인구에 비해 거의 70%이상 감소한 것이다. 더불어 우크라이나의 유태인 인구는 냉전 기간 동안 크게 감소했다. 1989년 우크라이나의 유태인 인구는 40만 명으로 줄어들었으며 우크라이나가 독립한 이후에도 계속 줄어들었다. 그러나 공산당의 간부들로 존재했거나 경제 기관에 종사했던 우크라이나 유태인 올리가르히들은 수많은 기업가들과 정치인들을 배출했으며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와 현 대통령 블라디미르 젤렌스키 등이 이와 같은 하시디즘 유태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 우크라이나 유태인들은 미국이나 서방의 유력 유태계 경제인 및 정치인들과 자주 로비 활동을 했다. 로비스트 활동의 대부분은 공공의 이익이 아닌 특정 집단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로비는 사회의 다수를 차지하는 약자의 권익을 위한 것이 아니고 기득층과 대기업을 위시한 특수 이익집단이 합법적으로 사회의 자원을 독점하고 나아가서는 국가의 부를 사유화하는 작업을 도와주는 행위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특정 집단의 부당한 행위도 정당화시켜 국가 공동체의 연대의식과 역동성을 현저히 약화시키는 폐단이 있다. 우크라이나 최고 의회 라다나 정부의 각종 의사 결정 과정에는 반드시 관련 로비가 음으로 양으로 참여한다. 우크라이나는 넓은 국토 위에 슬라브 인종들이 정착했던 국가이므로 민족별, 직종별, 계층별 이해가 서로 대립되는 경우가 많다. 그래서 이러한 제반 갈등 요인을 로비라는 형태를 통해 제도권 안에서 적극적으로 수렴하여 하나의 화합형 정책을 만든다는 것이 로비의 당위성이다. 게다가 1989년 우크라이나에 남아 있던 대다수의 유태인들은 공산주의 붕괴 기간과 그 이후에 우크라이나를 떠나 해외로 이주했다. 이들은 서유럽과 미국으로 이주하여 각 서방 국가들이 연결되어 있는 유태인 네트워크의 일원으로 활약하고 있다. 게다가 이들 중 국내에남아있는 유력 유태계 올리가르히들은 우크라이나 국내의 금융업도 장악하고 있으며 금융이야말로 산업생산과 불가분의 관계이므로 유태인의 산업계 장악이 매우 용이하다. 그리고 우크라이나 각지의 유통망까지 장악했다. 유태인들은 우크라이나 흑토를 이용한 곡물 관련 기업들 중 3개의 회사와 흑해와 아조프 해 연안의 부리스마 홀딩스를 비롯한 대형 원유 기업 중 4개 회사, 그 외의 다양한 유제품과 육류 회사 등 3개의 회사를 비롯해 주요 백화점과 대형 할인 매장들을 소유하고 있다. 따라서 우크라이나 신흥 올리가르히 중, 70%가 유태인 혈통과 관계 있거나 유태인으로 현재에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생명력을 유지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6
  • 동네에서의 술 한잔
    어제는 동네 이웃과 술 한잔했다. 그는 70대 초반이다. 술안주는 의대 증원 이천 명과 이번 선거에서 우리의 선택 등에 관한 것이었다. 내가 먼저 말을 꺼냈다. “천공의 성이 이씨랍니다. 그래서 이천공입니다.” 그도 유명제약회사 임원 출신이기에 의료계가 돌아가는 구조에 대해서는 일반인 이상으로 잘 알고 있었다. 그 역시 의료개혁과 이천 명 의대 증원은 직접적인 연결고리가 없다는 나의 말에 공감했다. 사실 현 정부는 실질적인 의료 개혁보다는 이천 명에 목을 매고 있는 듯하다. 그로 인해 현재 대학병원들은 의료대란을 맞이하고 있다. 며칠 전 전화 통화를 한 친구의 이야기도 전했다. 친구의 이야기는 가까운 친척 중의 한 명이 S병원에 입원하고 있는데 병원에서 퇴원을 종용한다고 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도움을 요청했다. 내가 그 병원에 근무하는 많은 교수들을 알고 있기에 전화를 한 것이었다. 하지만 나도 친구의 요청에 도움을 줄 수가 없었다. 지금 병원에서는 입원실을 점차 줄이고 있다. 꼭 이천 명이어야 할까? 정부의 밀어붙이기식 정치 현실 앞에서 환자들과 그의 가족들은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다음 술안주는 국회의원 선거에 관한 것이었다. 우리 동네는 김영주라는 4선 국회의원이 있다. 그는 민주당의 옷을 입고 네 번이나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다. 국회에서는 부의장이라는 직함을 가지고 활동했다. 나는 지역의 일 때문에 국회부의장실에 가서 그와 대화를 나누기도 했었다. 국회부의장실은 넓고 안락해 보였다. 그런 그가 민주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자 국힘당으로 당적을 바꾸어서 이번 선거에 나온 것이었다. 나는 민주당을 지지하지는 않지만, 그런 그의 태도에 대해서 실망이 매우 컸다. 그는 국회의원 당선이라는 자신의 이익 때문에 소속 정당까지 바꾸었다. 말로는 지역발전을 위해서라고 한다. 지역발전을 그만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텐데 속으로는 헛웃음만 났다. 그의 계산으로는 국힘당의 고정 지지자에 자신을 믿고 따르는 주민의 표를 더하면 이번에도 쉽게 당선되리라 생각했을 것이다. 나는 걱정된다. 그가 당선될까 봐! 여기까지는 동네 이웃과 내 생각이 유사했다. 그 다음이 문제였다. 나는 지금까지 한 번도 특정 정당에 가입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조국혁신당에 가입을 했고, 조국혁신당을 찍을 것이라고 이야기했다. 조국혁신당의 가입에 대한 나의 이야기에 그는 놀라워했다. “왜 하필 조국혁신당이냐?” 조국혁신당을 지지하는 나의 생각이 한심해 보인 듯한 그의 표정을 읽을 수 있었다. 나는 차분하게 나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검찰개혁을 하고자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조국을 변화를 원치 않았던 검사들이 멸문지화라는 칼로써 응징한 지난날의 과거를 이야기하면서, 조국혁신당이 대한민국의 미래라는 나의 생각을 전했다. 그의 반론은 없었다. 내 생각에 논리적이거나 사실적으로 잘못된 부분을 지적해 주었다면, 나는 그의 생각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반론 대신에 “너는 너의 주장이 강하다”라는 말을 듣게 되었다. 나는 정말로 나의 주장을 강하게 이야기하는가? 아침에 아내에게 물어보았다. 아내의 대답도 대동소이했다. “당신의 말빨이 쎄긴 쎄지!” 말빨? 나의 이야기가 지나치게 논리적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사실 타인과의 대화에서는 말이라는 논리보다는 마음이라는 정이 앞서야 한다. 논리는 마음이라는 정을 금강처럼 단단하게 고정시켜주는 역할을 할 뿐이다. 타인과의 대화에서는 공감의 확장이 필요했다. 지인이 나에게 해준 충고는 다음과 같았다. “타인의 이야기에 먼저 공감을 한 후에 너의 이야기를 해라.” 맞는 이야기였다. 그의 충고를 따랐다면, 내가 조국혁신당을 언급하기 전에 “당신은 조국혁신당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를 먼저 물었어야 했다. 하지만 나는 그가 조국을 싫어하는 이유도 모른 채 조국혁신당에 대한 나만의 생각을 이야기했다. 그를 설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나의 말이 그를 불편하게 만들었을 것 같았다. 상선약수의 도를 삶을 지혜로 생각하고 있지만, 어제는 조국혁신당에 대한 지지발언으로 상선약수의 지혜를 발휘하지 못하였다. 정치적인 이슈는 항상 논쟁거리이기는 하다. 하지만 일상의 삶에서 정치 아닌 것이 없다. 어제는 생활 물가에 대한 이야기도 나누었다. 대파 한 단에 875원이라는 것도 정치였다. 대통령이 양재 하나로 마트의 방문 스케줄이 정해지자 대파 가격 할인행사를 했다고 한다. 그래서 대통령이 방문한 당일 대파 가격이 875원으로 판매가 되었다. 그 모든 것이 연출이었다. 양의 탈을 쓴 늑대들의 광란이 현실 정치에서는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통령이 가고 난 다음 날 양재 하나로 마트에서는 대파 1천 단이 금새 소진되었다고 한다. 이런 아이러니한 현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대파 논란이 점차 커지자 오늘 뉴스를 보니 대파 할인행사를 24일까지 연장한다고 한다. 대통령이 문래동 홈플러스에 오면 감자 한 알도 이백 원으로 떨어지려나? 감자 한 알에 2,800원인 현실 앞에서 서민들은 좌절하지 않을 수 없다. 한동네에 사는 이웃이기에 그도 나의 말에 공감했다. 어제는 동네 이웃과의 술 한잔 속에 많은 의미를 담았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5
  • 우크라이나계 유태인, 그리고 이스라엘과의 관계
    우크라이나가 이번 전쟁에서 이스라엘의 중재를 요구했다. 앞서 포스팅한 것과 같이 이스라엘 유태인과의 혈통적인 부분에 있어 피 한 방울 섞이지 않고 유태교만을 가지고 우크라이나 땅에서 살아온 유태인들은 유태교의 발상지인 이스라엘을 늘 그리워하고 영혼의 고향으로 여겨 왔다. 아마도 이와 같은 중재의 요구는 우크라이나 내 유태인 세력들이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러시아와 항전하려고 남아있는 젤렌스키 대통령과 같은 유태계 올리가르히들의 요구와 목소리가 컸기 때문인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우크라이나와 이스라엘의 현대 관계사에 의하면 1948년에 이스라엘이 건국되었을 때는 우크라이나가 1991년 독립 이전까지 소련의 구성된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에 속했기 때문에 양국간 외교관계는 없었다. 다만, 이스라엘이 건국하기 이전부터 시오니즘 운동의 영향으로 인해 우크라이나의 유태인들 중에서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당시 우크라이나 유태인 이주의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크라이나 유태인의 이스라엘 정착의 대모로 알려진 골다 메이어(Golda Meir, 1898~1978) 전 총리를 들 수 있다. 골다 메이어는 골다 마보비치(Голда Мабович)라는 이름으로 1898년 현재 우크라이나의 키예프에서 태어났다. 1906년에 메이어의 가족들은 미국의 밀워키로 이민을 가게 된다. 아버지는 목수로 일했고, 어머니는 식료품 가게를 운영했다. 8세 때 가족을 위해 가게를 맡아봐야 했었다고 전한다. 1906년에서 1912년까지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는 학생을 위한 학교인 폴스 스트리트 스쿨(Fourth Street School)에 재학했다. 입학했을 당시에는 영어를 구사할 수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뛰어난 능력을 갖고 있었기에 수석으로 졸업했다. 현재 이 학교는 메이어의 이름을 따서 골다 메이어 학교라고 불리고 있다. 메이어가 14세였을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지게 되자 어머니가 학업을 포기하고 결혼하라고 권하게 되었고 이에 반항한 메이어는 덴버로 가출했다가 1913년 밀워키로 돌아왔다. 이후 1917년 간판장이었던 모리스 마이어슨(Morris Meyerson)과 결혼했고, 이후 한동안 마이어슨이라는 성을 사용하게 된다. 1920년대에 부부가 함께 영국령 팔레스타인의 키부츠에서 거주하게 되었는데, 남편이 이곳의 생활을 어려워했기 때문에 텔아비브로 이사했다. 1930년대에 이르러 시온주의 독립운동에 전념하느라 부득이하게 남편과 별거하게 되었고 그녀는 정치 노선에 뛰어들게 된다. 그녀는 이스라엘 건국 이전부터 초강경 시오니즘을 주장하게 된다. 1937년 영국이 팔레스타인을 아랍국와 유대국으로 분할하게 되자 이에 대한 절충안을 제시하게 된다. 이에 다비드 벤 구리온, 차임 바이츠만 등의 정치인들은 이와 같은 조건을 필요악이라 판단하여 수용하자는 입장을 내놓았지만 골다 메이어는 영국인들이 유태인의 영토를 인정하지 않는다고 반발하면서 이스라엘 땅을 모두 장악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아랍인들에 대해서는 평화롭게 지낼 수 있으면 좋겠지만 아랍인들이 반발할 것을 대비해서 이스라엘의 생존을 위해 무력으로 이들을 제압해야 한다는 확고한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1948년에 소련 주재 이스라엘 대사로 부임했으며 1949년부터 1956년까지 노동부 장관으로 승진했고 1956년부터 1966년까지 외무부 장관에 재임했다. 1950년대부터 1960년대까지 골다 메이어는 부총리급 실력자로서 이스라엘 정계의 동향을 좌우했으며 에비 에슈콜 총리가 사망하자 1969년에 이스라엘의 연합당은 메이어를 당 대표로 선출해 그의 자리를 계승하게 하면서 그녀는 5년 동안 이스라엘의 총리를 역임하게 된다. 그녀는 매우 아랍에 대해 강경한 노선 일변도를 고집하여 1972년 뮌헨 올림픽 당시 팔레스타인 검은 9월단이라는 원리주의 다단체가 이스라엘 선수 11명을 살해하자 메이어는 이에 대한 반격으로 모사드에게 테러리스트를 사살하라는 지령을 내려 끝내 검은 9월단을 토벌했다. 1973년 제4차 중동전쟁 때에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전쟁 준비를 할 동안 이전 전쟁에서의 연이은 승리로 인해 방심하여 대비를 소홀히 했다가 기습공격을 받아 초반에 큰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 때 미국의 지원으로 인해 간신히 전황을 뒤집었지만, 당시에 입은 엄청난 피해는 국민들의 분노를 불러일으켰고, 의회에서는 특별위원회를 구성하여 청문회까지 열었을 정도로 그해에는 그녀의 정치 생명의 최대 위기로 자리잡았던 해였다. 그러나 1973년 12월 열린 총선에서는 간신히 승리하여 총리직은 유지했지만 결국 1974년 4월 새 내각이 들어선지 한 달 만에 정국의 안정을 위해서 총리직을 사임했으며, 국회의원직의 잔여 임기를 마무리한 것으로 하여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의 그녀는 예루살렘 외곽에 은거하면서 회고록을 쓰거나 요양했는데, 1977년 가을에 예루살렘의 이스라엘 국회의사당에서 VIP 자격으로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의 연설에 참관하여 악수하고 대화를 나누었다. 1978년 12월 8일에 예루살렘에서 지병인 림프종이 악화되어 80세로 사망했다. 그녀는 우크라이나계 유태인으로써 크게 성공한 인물로 알려졌으며 현재 이스라엘 뿐 아니라 우크라이나 유태인들 사이에서도 그녀의 이름이 늘 거론되고 있다. 골다 메이어는 마거릿 대처 이전의 "철의 여인"을 지칭했던 "철의 여인"의 원조였던 인물이었고 상당히 강인하고 억압적이며, 강경하고 보수적인 인물이기도 했다. 동시에 전쟁은 어쩔 수 없이 하는 것이라는 현실주의적 견해를 견지하면서 아랍에 대한 강경노선은 그녀의 평생 소신으로 남았다. 1970년대 소련이 유태인들의 이민을 허가하자 일부 우크라이나 유태인들이 이스라엘로 이민하였으며 이 때 골다 메이어는 자신도 우크라이나계임으로 내세워 그들이 정착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 그러나 1971년부터 74년까지 소련 유태인 10만여 명이 이스라엘로 이민하였는데 이들은 대부분 그루지야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에 거주하던 유태인들이었고 우크라이나계 유태인 인구는 생각보다 많지는 않았다고 한다. 골다 메이어와 같은 이스라엘의 역사적 거물이 있었기에 러시아 유태계들을 사실상 옹호하고 있는 이스라엘이 이번 전쟁에서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에 그나마 중립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5
  • 다극화 체제의 새로운 전략적 요충지 아프리카, 수십년간 아프리카에 공들여 온 러시아
    요즘 아프리카에 대한 관심이 부쩍 늘고 있다. 다극화 체제의 전략적 요충지로 아프리카가 새롭게 부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아프리카 국가들은 소련 시절 외교의 영향으로 아프리카에 친러 국가가 많은 편이다. 특히, 알제리, 수단 공화국, 이집트, 리비아, 앙골라, 모잠비크, 기니비사우, 에티오피아, 탄자니아, 나미비아, 남아프리카 공화국, 중앙아프리카공화국 등은 러시아와 매우 가까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냉전 당시에는 소련이 알제리 독립전쟁을 지원한 것은 물론 모잠비크 등에서 아프리카의 공산 반군들을 지원하였기 때문이다. 냉전 이후 러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은 러시아와 유럽 국가들과는 다르게 충돌할 상황이 없다 보니 친교 관계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동아프리카의 에티오피아도 소련의 지원으로 공산주의정권이 세워진 적이 있었다. 알제리, 리비아, 이집트, 수단은 냉전 시절에 소련제 무기들을 수입했고, 지금도 러시아제 무기를 수입하고 있다. 냉전 시절에는 서구 열강의 식민지에서 독립한 아프리카의 대부분 국가들이 소련과 교류, 협력이 활발했다. 상당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이집트의 제3 세계 외교 노선에 이어 소련과 실리 외교를 펼쳤으며, 알제리 독립 전쟁의 경우 소련에서 알제리 독립 운동의 측을 적극적으로 지원했던 역사가 있었다. 아프리카에서느 제2 세계, 공산권에 속하던 국가들도 있었는데, 앙골라, 모잠비크, 에티오피아, 베냉, 소말리아가 이에 속했다. 다만 소말리아는 1977년부터 1978년까지 에티오피아, 소말리아 등 동아프리카 지역에서 일어난 전쟁인 오가덴 전쟁 이후, 반소로 돌아섰지난 다른 국가들은 소련과 훨씬 더 관계가 가까웠다. 물론 남아프리카 공화국이나 말라위, 콩고민주공화국 등 소련에 적대적이던 친 서방 반공 성향 국가들도 존재하고 있었지만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소련의 원조는 소련 해체 이전까지 활발했던 것으로 보인다. 소련이 해체된 이후 아프리카 측으로 향하는 원조는 대폭 감소하였고 다른 한편으로 나이지리아를 비롯한 상당수의 아프리카 국가들은 소련 시절 외교 관계를 그대로 이어받았다. 그 이유로 인해 벨라루스, 우즈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등 구소련에서 갈라져 나온 동유럽이나 중앙아시아 국가 관련한 업무도 주 모스크바 대사관에서 대행하는 상황에 있다. 러시아는 서방과 '달리' 아프리카 지역에는 식민지를 장악하지 않았기 때문에 식민지에 대한 식민 제국으로서의 착취와 탄압이 아프리카 지역에서는 전무했기에 오히려 아프리카 국가들에게 환영받았던 측면이 있었다. 서방은 경제적으로 쇠퇴한 러시아와 달리 아프리카에 수많은 원조를 했으나, 서방의 원조에는 거버넌스의 개선, 민주주의 발전 압력이 가해졌기 때문에 서방에 대한 반감이 적지 않았다. 특히 식민지배를 경험한 아프리카에게는 서방의 요구와 압력은 신(新) 식민주의적 내정간섭으로 인식되었다. 게다가 서방의 경제 원조는 아프리카의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데 실패했으며 IMF, 세계 은행등을 통해 적극적으로 가해진 신(新) 자유주의적 경제정책은 오히려 아프리카의 경제 상황에 부작용을 안겨주기도 했다. 군사적으로 서방의 아프리카 개입은 시간이 지나도 아프리카의 안정화에 큰 기여가 되지 못했다. 특히 리비아의 카다피 정권에 대해 아프리카 연합에서 중재하던 도중에 미국과 나토가 무력 개입을 하였기에 반발이 심해졌다. 정작 미국과 나토의 후속 대책이 없는 개입은 안정화가 아닌 되려 큰 혼란을 야기했다. 그 외에도 프랑스의 사헬 지역에서 극단적 무장단체의 무력화에 실패했고 미국의 소말리아 드론 공격이 있었지만 소말리아 내전은 종결되지 않은 채 30년 이상을 끌고 있다. 아프리카 국가들로서는 경제적인 이익을 제대로 제공하지 못하고는 있지만 경제적 이유 때문에 러시아와의 관계를 마냥 무시할 수도 없기도 하다. 이는 바로 제재 문제 때문인데 인권 침해, 부정부패를 이유로 유엔 차원에서 제재가 가해지는 것 때문에 러시아가 상임이사국으로서 거부권을 행사하여 아프리카 국가들을 제재로부터 보호해주었다. 그로 인해 러시아는 각 아프리카 국가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2000년대 이후, 중공의 영향력이 커지면서 러시아와 다른 아프리카 국가들간의 교류가 많이 줄어들었다. 하지만 러시아는 푸틴 정권이 들어서면서 소련 해체 이후에 줄어들었던 영향력을 회복하고 있는 실정이다. 특히 기업과 군사 등을 통해 영향력을 회복하고 있다. 중국이 전 세계로 뻗어 나가기 위한 '일대일로' 추진 과정에서 특히 아프리카에 영향력을 강화하자 러시아 역시 아프리카의 풍부한 광물 자원과 사업 기회를 이용하기 위해 교역량을 늘리는 데 주력하고 있다. 따라서 2019년 10월 푸틴 대통령은 소치의 흑해 리조트에서 아프리카 40개국 정상이 참석하는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언론 인터뷰에서 서방 국가들은 과거 아프리카 대륙에 압박을 가하고, 협박한 전력이 있다며 러시아가 유일하게 아프리카 국가들의 주권을 존중하며, 오랜 역사적 유대가 있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러시아는 아프리카 국가들과 석유, 다이아몬드, 원전으로 협력을 확대하고 있으며 2017년 9월 28일에 러시아가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해 채무 200억 달러를 탕감하기로 했고 아프리카 20개국과는 군사협정을 체결했다. 중아공, 수단 등에 바그너 그룹을 파견하여 민생 치안과 분쟁 해결을 돕고 있다. 러시아는 세계에서 손꼽히는 탄화수소 생산국으로 거대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Gazprom), 로스네프트(Rosneft), 루코일(Lukoil)을 통해 이를 수출하고 있다. 러시아는 그러나 국토의 65%가 자원개발에 막대한 비용이 드는 영구 동토층으로 뒤덮여 있어 아프리카의 천연자원에 눈을 돌리고 있는 입장이다. 가스프롬은 현재 3개의 가스광구가 발견된 알제리에서 개발을 진행하고 있고, 지난 2011년 이후 전쟁으로 대부분의 개발이 중단된 리비아에서도 사업 재개 기회를 노리고 있다. 가스프롬은 나이지리아에서 알제리를 거쳐 유럽으로 이어지는 송유관 건설에도 참여할 기회를 노리고 있는 상황이다. 루코일은 최근 가나와 카메룬, 이집트에서 석유와 가스 매장지 여러 곳을 발견해 개발을 앞두고 있으며 로스네프트는 이집트 조르(Zohr) 해상 가스광구에 투자하고 있다. 그리고 나이지리아의 오란토 석유 에너지 그룹과 함께 20여 개 개발사업 참여를 앞두고 있다.이집트를 비롯한 아프리카 국가들은 러시아산이나 우크라이나산 밀을 주로 수입하는 상황인데, 러시아산 밀은 호주산이나 캐나다산 밀에 비해 수급이 불안정한 대신 가격이 저렴하다. 소말리아의 경우, 밀 소비량의 90%를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에 의존하고 있다. 콩고와 마다가스카르는 각각 80%, 70%에 이른다. 또한, 아프리카 국가들의 러시아산 밀 비중이 40%에 달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인해 중동과 아프리카는 러시아 석유제품 공급업체의 가장 중요한 선택지가 되었다. 아프리카 국가들에서 러시아산 석유 수입이 증가했으며 러시아의 첫 아프리카 지원 비료 선박이 작년 12월 31일, 모잠비크에 도착함으로써 아프맄카에서의 러시아 역량은 더욱 커지게 되었다. 결정적으로 나이지리아의 보코하람 소탕 시기 미국이 나이지리아 군의 인권유린을 이유로 나이지리아에 무기 원조를 거부하면서 사이가 나빠졌으며 아프리카와 서방의 사이가 벌어진 틈새를 러시아가 파고들었다. 세르게이 라브로프 장관은 브릭스와 아프리카의 관계가 깊어질 것이라고 밝히면서 아프리카는 다극화 체제의 새로운 전략적 요충지가 되고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5
  •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스라엘의 국교 수교와 상호 교류에 대한 이야기
    이슬람권 국가들 중, 사우디아라비아에게 이스라엘을 인정하고 국교 수교와 상호 교류를 원하는 것은 미국이다. 왜냐하면 그동안 제국주의적 행위로 석유나 가스를 약탈해왔던 집단 서방과 미국은 사우디와 이스라엘 연결함으로써 얻을 이득이 더 많다. 사우디와 이스라엘이 화해모드가 들어가면 주변의 카타르, UAE, 바레인, 쿠웨이트, 오만, 요르단 등이 따라오게 되어 있기 때문에 석유 자원 강탈에도 유리하고 시아파 국가들을 고립시킴으로써 이슬람 연합을 방해할 수 있다. 그리고 이집트를 비롯한 북아프리카 5개국과 이란-이라크의 연결을 지정학적으로 단절시킬 수 있으니 미국이나 집단 서방이 얻는 이득은 어마어마하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패배 일보직전까지 가고 있는 미국 내의 분위기를 환기시킬 수 있다. 우선 바이든은 사우디와 이란을 화해시킨 시진핑처럼 사우디와 이스라엘을 화해시킨다는 것은 대단한 업적이다. 아마 내년 대선에서 바이든이 재선할 수 있는 가장 유력한 카드가 사우디-이스라엘을 연결시켜 중동의 평화를 이끌어 오는 것이다. 사우디와 이스라엘의 화해 무드 조성은 미국의 입장에서 볼 때 일거삼득이 되는것이다. 게다가 서구 유럽 또한 러시아의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이 끊긴 이후, 안정적으로 에너지를 수급할 수 있게 되니 이거만큼 최상의 수가 어디있을까? 이란이 이스라엘과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도 상에서 지워버리자고 헌법에 명시했다고 하는데 이스라엘이면 몰라도 사우디아라비아를 지도 상에서 지워버리자고 헌법에 명시됐다는 얘기는 이 분야의 전문가에 속하는 나도 처음 듣는 얘기다. 어디에 그런 자료가 있는지 출처를 알려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그게 헌법에 명시되어 있으면 사우디와 이란은 국교를 맺고 화해하면 안 되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사우디와 이란은 얼마전에 화해했다. 그리고 얼마 전에 사우디는 이스라엘과의 수교 협상을 중단하면서 양측의 관계도 어긋나 미국이나 바이든 행정부의 입장에서 닭 쫓던 개 신세가 되었다. 그리고 무슬림은 코란 한 글자라도 벗어나면 이단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결론적으로는 아니다. 대다수의 세속주의 국가들은 그런 생각 하는 사람 아무도 없다. 그렇게 여기는 분들이 터키나 이집트, 모로코, 아랍에미리트 두바이 등지로 여행이나 비즈니스 사업을 잘 가신다. 그리고 말레이시아나 인도네시아, 중앙아시아 5개 스탄 국가들도 여행 잘만 간다. 이런 국가들은 코란 한 글자라도 벗어나면 이단으로 여길까? 전혀 그렇지 않다. 하마스는 이스라엘과 공존을 부인하지만 이스라엘 또한 하마스 및 팔레스탄과 공존을 부인하고 있다. 여태까지 4차 중동 전쟁의 역사에서 이스라엘은 한번도 공존을 주장한 적 없다. 이것은 지금도 그렇다. 그리고 유태교인이 이슬람을 거역하는 멸종 대상이라고 봤다는 얘기도 있는데 만약 그랬다면 유태인들은 진작에 멸종됐다. 이미 오스만투르크나 바그다드의 영화를 누린 압바스 왕조 시절 때 멸종됐을 것이다. 그런데 많은 분들은 이러한 역사적인 사실을 모른다. 특히 오스만투르크를 배제하고 이스라엘-팔레스타인 역사를 논하는거 자체가 이해되지 않는다. 오스만이나 압바스, 아유브 왕조 등의 이슬람 국가들도 유태인 관료들이 상당히 많았고 오히려 이슬람은 유태인들을 잘 대우해줬다. 십자군 전쟁 때는 대다수의 유태인들이 기독교인들에게 학살당하자 이집트 아이유브 왕조의 살라딘에게 합류하여 기독교와 함께 싸웠다. 이건 역사를 보면, 세계사를 제대로 공부해 본 사람이라면 누구나알 수 있는 대목이다. 그리고 이스라엘을 억지로 영국이 박아내지 않았다면 오히려 유태인들은 더 보호 받고 안전했을 것이다. 당시 토종 유태인들의 종교를 오스만이 인정해줬고 그 대신 세금인 지즈야를 내야했다. 만약 유태인을 멸절하려 했다면 이미 오스만 시기에 예루살렘 성곽, 통곡의 벽, 헤브론, 베들레헴 등등 이딴 거 다 사라졌을 것이다. 하마스는 이슬람이란 종교를 등에 업고 지배하고 있는데 내가 앞서 포스팅에서 말했듯이 지도자들이 문제라는 것이지 모든 무슬림들이나 이슬람이 문제가 아니다. 전 세계는 하마스를 지지하는게 아니라 가자 지구 팔레스타인 사람들을 지지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그와 같은 과격 성향의 무슬림이 20억 무슬림 인구의 10~20%가 넘는다는 사실이 무슬림포비아를 몰고 온다는데 실제로 과격 무슬림은 10% 내외에 불과하다. 그렇게 따지면 과거에 제국주의를 하던 과격 기독교인들은 식민지 원주민들을 숱하게 학살하고 인종적 차별을 감행했다. 이들 기독교인들이 거의 90%다. 이슬람에서 우리는 절대적으로 옳고 너는 모든 것이 틀렸기 때문에 너는 말살되어야 마땅하다는 주장을 한 적은 없다. 그냥 기독교 목사들이 꾸란이나 하디스를 짜집기 해서 이슬람에 대해 안 좋은 소리를 하는 것에 한국은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그러니 무슬림과는 공존하기 끔찍한 것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4
  • 해상 교통의 요지, 인도네시아와 말레카 해협, 그리고 말레이 반도
    인도네시아 전체를 놓고 보면, 7세기에는 수마트라에서 스리위자야 왕국이 크게 흥성했다. 8세기에 들어서는 자바에서 산자야 왕을 시조로 하는 마타람 왕국이 건국되었다. 마타람은 이어 샤일렌드라라고 칭하는 일련의 왕들이 지배하는 시기를 맞이하는데, 이 시대를 따로 분류하여 샤일렌드라 왕조로 간주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하지만 이러한 샤일렌드라 왕조의 번영은 1세기로 끝나고 9세기에는 산자야 가문의 인물에 의해 마타람 왕국이 다시 부활했다. 샤일렌드라의 마지막 왕자는 스리위자야 왕국으로 피신해 거기서 왕위에 오르니 스리위자야 왕국과 마타람 사이의 관계가 우호적일 수 없었음은 자명한 일이다. 하지만 이러한 적대적인 부분에는 종교적인 이유도 존재했다. 샤일렌드라와 스리위자야 왕국은 공히 불교 국가였던 데에 반하여 마타람 왕국은 힌두교의 영향이 매우 강했다. 마타람은 1222년까지 존속했던 국가였지만 서로 간의 경쟁의식이 뚜렷했던 국가들이었던 것이다. 참고로 스리위자야 왕국이 1290년에 멸망했다. 수 세기 동안 두 왕국은 경쟁 관계를 이어 오다가 마타람과 스리위자야 왕국은 같은 세기에 사라졌던 것이다. 9세기 중부 자바를 장악하고 이 지역에 다시 힌두교의 영향을 확대해 가던 마타람은 스리위자야 왕국의 위협에 밀려 10세기에 동부 자바로 이주한 바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마타람 왕국은 힌두적인 것과 토착적인 것이 결합되는 독특한 자바 문화를 창달했고, 11세기 아이르랑가(Airanga) 시대를 들어서면서 불교와 공존하는 모습으로 크게 발전했다. 동부 자바의 적극적 개간으로 가경지가 확대되면서 스리위자야 왕국이 쇠퇴하였고 동서 교역의 중심지도 자바 동부 지역으로 옮겨 왔다.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현상이긴 하지만 스리위자야 왕국과의 극적인 화해도 이 때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세력을 바탕으로 12세기 자바 전역은 하나의 권력 내로 통합되어 가는 모습을 보인다. 1222년 마타람이 멸망하고 싱가사리 왕조가 들어서면서 다시 한 번 인도네시아 역사에서는 큰 변화가 나타났다. 종교적 성향은 12세기의 전통을 계승했지만, 지배 권력의 범위가 자바를 초월해 수마트라를 비롯한 주변 도서 지역으로 확대되기 시작한 것이다. 이 때부터 진정한 민족주의적 인도네시아의 모습이 나타나기 시작했으며, 이는 라덴 위자야가 몽골 원정군을 격퇴하면서 수립된 마자파히트 왕조에 의해서 실현되었다. 이와 같이 살펴본 동남아시아의 역사를 놓고 볼 때 특히 13세기는 점진적인 변화가 발견되고 있다. 각국에서 중앙 권력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대부분의 국가에서 외적인 팽창이 보이고 있지만 그보다 중요한 것은 직접적인 지배지가 확대되고, 유교, 불교, 힌두-자바의 중앙 문화가 확산되고 있었다는 것이다. 베트남에서는 13세기 종실 지배 체제하에서 중앙 권력 집단의 영향력이 커지고 국가적 자부심을 고양하는 역사서가 편찬되었으며 쯔놈 문학이 발전했다. 캄보디아에서는 관료 제도가 정교해지고 여행자 휴식소를 설치한 것에서 파악되듯이 중앙과 지방의 소통이 활발해졌다. 13세기에 자바의 통합은 거의 완성이 되었고 이는 자바를 중심으로 한 인도네시아 세계의 확대가 진행되고 있던 중이었다. 동남아시아 각국에서 보이는 통합 노력의 원인이자 결과는 이 시대에 발현된 힘이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쿠빌라이의 원나라 원정군들이 참파를 포함한 동남아시아 각지를 공격했지만 모두 실패하고 말았으며 몽골 또는 중국의 북방, 남방 간에 벌어진 대결에서 북방의 도전에 대응하는 남방의 자신감과 승리는 13세기 문화 발전의 힘에서 온 것으로 생각된다. 특히 샤일렌드라는 약 1세기 동안 동남아시아 해안 지대를 장악했던 해상 강국이었다. 사실 이러한 해상 강국은 보통 그 상업적인 번영 등을 놓고 고려해 볼 때 가장 짧고 굵게 그 역사적인 번영을 이루었던 대표적인 국가였다. 단지 이들은 오늘날 인도네시아 지역을 장악하여 중개 교통지를 장악했다는 것으로 알려졌을 뿐이지 샤일렌드라의 역사에 대해 알려진 것은 그다지 많지 않았다. 본 연구자가 처음 샤일렌드라를 접했을 때는 자바 섬과 수마트라에 고립된 국가나 다름없었다고 보았다. 그러나 자바 섬 각 지역에서 발견되는 비석들을 연구하고 금석학적인 부분, 그리고 이곳을 장기간 식민지로 삼았던 근현대 시기의 포르투갈과 네덜란드의 자료들을 최대한 검토했다. 그리고 크메르 제국의 비문과 기록, 인도 촐라 왕조가 자바 섬을 정복하고 스리위지야 왕국을 무력화시킨 이후의 촐라 왕국 측이 서술한 기록들도 확인했다. 특히 샤일렌드라에 대한 고고학적인 유적은 단연 보로부두르이다. 이 불교 유적은 당시 힌두교와 상좌부 불교로 통용되던 동남아시아의 특성상 유일하게 남아있는 대승불교의 흔적이라는 것에서 상당한 의의가 있었다. 그 정도 건축물을 건설했다는 것은 당시 샤일렌드라 왕국이 얼마나 부유하고 강대했는지를 알 수 있는 척도라 볼 수 있다. 하지만 정작 샤일렌드라는 상업과 농업을 병행했고 익히 알려진 것은 대단한 해양 상술로 인도네시아 일대 전체를 지배했다는 것 정도였다. 그러나 본 연구를 진행하면서 파악한 것은 해적들을 소탕하여 그들의 항해술과 선박 건조 기술로 동남아시아에서 가장 막강한 해군과 상륙군을 건설했고 동남아시아에서 각지를 돌아다니며 해안가와 함선이 들어갈 수 있는 강을 따라 육지를 정복했다. 결국 이들은 말레이 반도와 태국 남부 해안, 현 캄보디아 해안가와 톤레삽, 바탐방 일대를 장악했으며 메콩 델타까지 점령해 참파를 베트남 중부 지방으로 밀어내기도 했다. 그리고 멀게는 북베트남까지 진출해 당시 당나라의 지배하에 있던 안남도호부 소속의 교주군을 정복했고 비록 장악 기간이 2개월에 불과했지만 중국 대륙을 장악하고 있던 당나라 정부도 당황시킬 정도로 강한 군사력과 함대를 지닌 강대국이었다. 물론 825년부터 세력이 약화되어 육상 식민지를 모두 잃었고 인도네시아 일대에서도 그 영향력이 축소되어 영지가 수마트라 섬에 한정지어질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샤일렌드라가 동남아시아에 끼친 영향력은 단순히 해안 지대를 식민지화 했다는 것에서 의미를 둔 것이 아니었다. 샤일렌드라의 동남아시아 해안가 진출은 대승불교를 동남아시아 전역에 전파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후일 크메르 제국의 앙코르와트 건축에도 샤일렌드라 불교 건축의 양식이 들어갔기 때문에 아름다움의 정수가 유지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 각지를 정복하여 번영했던 샤일렌드라의 위명은 그 왕가가 수마트라의 스리위자야 가문에게 완전히 넘어가면서 멸망했다. 지금까지 수많은 나라가 존재했던 인도네시아 역사에서 샤일렌드라 왕국은 크메르 제국과 더불어 동남아시아의 양대 산맥을 이루었던 강대국이었다는 것은 부인할 수 없다. 그리고 그러한 샤일렌드라 왕국과 우리 한반도의 신라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거의 남아있는 것이 없지만 해상 실크로드 복원을 위해서 그 관계성에 대해서는 상당한 시일이 소요되더라도 연구해야 하는 또 하나의 과제로 보여 진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4
  • 이슬람 문화의 금기를 깬 이슬람 최초 여성 정치인 샤히르 베나지르 부토 (1953~2007)
    이슬람 문화의 금기를 깨고 여성 최초의 수상이 된 부토는 여성 사회를 개선시키려 했지만 그녀가 정치인이 되고부터 남성 정치인들에게 끊임없는 견제와 모략에 시달려야 했다. 대표적인 것이 비자금과 뇌물 수수 사건 등인데 그런 사건들로 인해 그녀는 수싱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그러나 서방에서는 그녀가 무고함을 주장했고 남성 중심 무슬림 정치계의 파키스탄을 맹비난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는 무려 400여회가 넘는 암살 위협에 시달렸고 남성들에게 살해 협박 편지를 받은 것만 해도 4만여 통 정도 된다하니 무슬림 체제의 신정국가에서 여성이 정치한다는게 얼마나 가시밭길인지 보여주는 반증이다. 그녀의 이름을 딴 공원이 파키스탄에 여러 군데 있는데 그녀의 최대 공로는 파키스탄 여성을 학교에 보내 공부할 수 있게 하는 파키스탄 의무 교육 헌법을 수정했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무슬림 신정으로 대표되던 파키스탄 사회에 엄청난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그로 인한 파장은 컸다. 무슬림 신정체제의 이란, 오만, 쿠웨이트, 바레인이 잇달아 여성들을 학교에 보내 의무 교육하는 것을 헌법에 명시했고 남성 무슬림들의 핍박을 받아 교육조차 못받던 무슬림 여성들이 학교를 다닐 수 있고 공부를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은 부토의 최대 공로다. 부토는 이슬람 국가 사상 최초로 여성 수상이 된 입지전적의 인물이기도 하지만 줄피카르 알리 부토 전 총리의 딸로, 카라치에서 출생하여 하버드 대학교와 옥스퍼드 대학교에서 수학하였을 정도로 파키스탄에서 대표적인 여성수재였고 여성들이 압박당하는 이슬람 문화권에서 그녀는 이슬람 여성들의 희망이자 대표적인 엘리트였다. 아버지가 파키스탄 군사 쿠데타로 의해 축출당하여 사형되자, 부토 자신도 여러 번 체포되어 투옥된 바 있다. 1984년 영국으로 망명하는 것이 허락되어 그녀는 망명상태에서 부친의 정당인 파키스탄 인민당(PPP)의 당수로 취임하게 되면서 파키스탄 좌파 운동의 선구자가 된다. 1988년 그녀는 파키스탄으로 돌아와 하이데라바드를 중심으로 신드 주에서 출발했고 이곳을 중심으로 선거활동을 벌여 그녀는 이슬람 국가에서는 사상 최초로 여성 수상이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수상이 된지 불과 20개월 후 군사 쿠데타로 군부의 지지를 받은 그람 이스하 크한 대통령에 의해 수상직에서 물러나는 불명예 퇴진을 당해야 했다. 그럼에도 같은 해 11월 16일, 부토는 People 지의〈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50인>에 선정되면서 이슬람 여성 운동의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 2007년 12월 27일, 2주 후의 총선을 앞둔 채 갑자기 암살당했다. 여러 이유가 있었지만 아마도 이슬람 사회 변혁을 바라지 않던 누군가에 의해 제거된듯 보인다. 부토의 영묘는 카라치에 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3
  • 투르크메니스탄의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 정권의 기행과 루흐나마(Ruhnama)
    루흐나마(Ruhnama), 이 책은 투르크메니스탄의 독재자 사파르무라트 니야조프가 쓴 자서전이기도 하지만 니야조프교의 경전이기도 하다. 니야조프는 이 책을 보고 만족했는지 모든 국민들에게 이를 읽고 암송해야만 사회생활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무슬림이 인구의 절대 다수를 차지하는 만큼 이맘들이 루흐나마를 왜 꾸란과 동급에 놓아야 하냐며 반발했지만 이에 대해 해당 이맘들이 근무하는 모스크를 철거하는 것으로 대응했고, 그의 압력에 굴복한 모스크에서 어쩔 수 없이 루흐나마를 걸어놓아야 했다. 또한 루흐나마를 정식 교육과정에 포함시키고, 모스크에도 배치하며, 운전면허 시험에서도 암송하게 했다. 이에 따라 시험시간은 16시간까지 늘어났다. 그리고 2006년 니야조프는 터키력 신년을 축하하는 행사에서 "누구나 루흐나마를 한 번만 읽으면 지혜로워지며 아침, 점심, 저녁 이 책을 하루 세 번만 읽으면 자연스레 천국에 갈 것이다. 이는 내가 하나님께 여쭤봤다" 라는 말을 대국민연설에서 언급했다고 한다. 이 책은 각국의 언어로 번역되어 세계 40여 나라에 수출되었는데 우리 한국에도 한국어로 번역된 이 책이 있다. 3권짜리 두툼한 책자로 권당 4만원에 가까운 비싼 책으로 이 책은 시각 장애인을 위해 음성판, 점자판으로까지 출판되었으며 더 경악할 일은 2006년에 니야조프 사망 이후, 100만부까지 팔렸다는 사실이다. 그리고 니야조프는 평소 이걸 꾸란, 성경과 더불어 3대 성서라고 자랑하기까지 했다. 그런데 이건 출판사측에서도 팔려고 내놓은 게 아니라 투르크메니스탄 정부로부터 한국어판 출판 의뢰를 받아 찍어낸 것 뿐이다. 그러니까 출판사로써는 그냥 한국어 번역료와 기타 출판에 필요한 제반비용을 받아 책을 인쇄해준 것 뿐이다. 의외로 꽤 많은 대학교의 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다. 보고 싶은 사람들은 학교 도서관에서 한번 찾아보자. 니야조프는 "다른 거 다 필요 없다, 이것만 읽고 외우고 공부해라"라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까지도 세뇌시키듯 강요했다. 이거 잘 외우고 잘 이해하면 장학생으로 우선 선발권을 가졌다고 한다. 이거 외워야만 대학에 들어갈 수 있다. 현재까지도 투르크메니스탄에서 제작된 영화는 무조건 초반부에 니야조프의 황금동상과 함께 루흐나마의 구절이 나오고 있다. 그 외에도 니야조프는 각종 기행들로 유명하다. 1997년 그는 수술로 인해 금연했는데 이를 계기로 전국에 금연령을 내려버렸다. 이 금연령은 지금도 여전히 실행 중이라 흡연자들은 외출하기 전 집안이나 차 안에서 미리 담배를 피운다고 한다. 투르크메니스탄에서 담배를 어떻게 태우는지에 대해 여행 서적을 보면 나와 있다. 또 건강이 악화되자 국민들이 내게 기도를 많이 해 힘들다며 기도를 줄이라고 국민들에게 권고하기도 했다. 그리고 해바라기 씨앗이 본인의 치아게 끼었다고 까먹는 것도 금지시켰다. 이 역시 여전히 실행 중이다. 게다가 1년이 너무 길다며 1년을 10개월로 만들어 버렸다. 멜론을 먹어보고 맛있다며 멜론의 날을 명절로 지정했고 일주일 7일 모두 월요일, 화요일 등 없애버리고 "기분 좋은 날", "화려한 날" 등등 이런식으로 명칭을 바꿔버렸으며 해외 유학을 금지시키고 외국에서 학위를 딴 사람들을 추방시키거나 인정하지 않았다. 그는 광적인 시인이어서 자신이 지은 즉흥시를 정규방송 자체를 수시로 중단하고 직접 국민들에게 낭독하기도 했다. 2001년엔 국민 정서에 맞지 않는단 이유로 발레와 오페라도 금지, 2003년엔 금니와 장발, 턱수염을 금지했으며 2005년 랩, 힙합, 더 나아가 투르크메니스탄 국민의 예술성과 가창력을 저해한다는 이유로 립싱크까지 금지시켰다. 대중문화에서 자신을 풍자하고 비난하는 걸 막기 위해서였다. 러시아어 교육인 경우는 니야조프시절에 폐지되기도 했다가 2008년부터 부활되었으며 인터넷도 금지시켰다. 투르크메니스탄은 2006년 니야조프가 사망한 이후에야 인터넷이 대중화되었다. 전 세계 어느 나라든 방송도 못보게 했고 하루에 5번 루흐나마 암송과 더불어 니야조프에 관한 찬양 방송을 하게 했다. 때문에 투르크메니스탄 사람들이 세상이 어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는 방법은 안테나를 러시아 방향으로 돌려 몰래 러시아 방송을 듣는 것이었다고 한다. 또한 지구온난화로 갈 곳을 잃은 동물들을 위해 전 국토의 90% 가까이가 사막인 투르크메니스탄에 동물원을 건설하기도 하였고 팽귄들을 위해 얼음 궁전을 짓기도 했다. 같은 해 12월 16일에는 신임 석유, 가스장관을 임명하여 향후 6개월 안에 영어에 능통하지 못하다면 해임시켜버리겠다고 협박하기도 했다. 그런데도 이 독재자를 추방시키지 못한 것은 엄청난 광물 및 가스, 석유 등 자원이 넘쳐났기 때문에 가능했다. 외부에서는 그에 독재자라고 비난해도 그에 대한 국민들의 평가는 의외로 나쁘지 않았다. 이는 구소련 붕괴 이후 다른 나라와 달리 벨라루스와 더불어 경제적으로 막장이 되지 않은 유이한 국가이며, 또 분배를 잘했기 때문이었다. 니야조프는 소련 시절의 복지제도를 상당부분 유지시켰고 그 덕택에 사회안정을 유지했다. 우선 생필품과 식료품을 매우 싼 값에 풀었기에 소득수준에 비해 엄청나게 풍족한 식생활을 누릴 수 있었고 교통비와 공공요금도 매우 싸게 책정되어 직장인 기준으로 미화 1달러만 있으면 1년 내내 버스를 타고 출퇴근할 수 있었다. 휘발유값, 전기료, 가스비, 수도요금, 소금값도 2020년까지 면제하겠다고 선언하였고 또한 교육수준이 저하되었어도 어쨌거나 무상교육 제도를 유지해서 교육비 걱정을 할일도 없었다. 집도 공공근로기간을 채우면 무상으로 주었기 때문에 체감되는 경제문제가 크게 완화되어 같은 시기 러시아 같은 나라처럼 범죄율이 크게 늘어나거나 타지키스탄 같은 나라처럼 전쟁이 벌어진다나 하는 일 없이 일단 안정이 유지되었기 때문에 국민들은 니야조프가 뭘하든 불만이 없는 것이다. 특히 투르크메니스탄은 IMF의 구조조정 방안을 거절할 정도로 경제상황은 더욱 호전되었는데, 그 덕택에 아슈하바트를 흰색 건물들로 깔끔하게 정비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대규모 건축물과 니야조프 황금동상을 만들 여유가 있던 것이었기도 했다. 니야조프 시기 때 사형제를 폐지했고 라마단 기간 중에 범죄자들을 1만 명씩 사면까지 했다. 투르크메니스탄은 형벌이 매우 관대한 국가이고 범죄율도 극히 낮아 현지인은 밤에도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다. 그러나 외국인은 가이드 없으면 한낮에도 자유롭게 다니기 어렵다. 실제 니야조프 당시 투르크메니스탄에 가봤던 나는 투르크메니스탄이 1인당 국민소득으로만 본다면 빈국처럼 보이지만 사람들이 궁핍한 생활을 하지 않고 오히려 카자흐스탄보다 잘 산다는 느낌이 들었다. 니야조프는 말 그대로 국민들을 소위 개돼지로 만드는 방법을 잘 알고 있었다. 절대적인 통제와 삼엄한 감시 안에 불만이 없게끔 최소한의 삶을 보장했던 것이다. 먹고 살만해지고 배불러지니 정치에 관여하지 않게 만들다 보니 국민들은 불만이 없다고 한다. 정치는 그들이 알아서 하는거니까 자신들을 배부르게 잘 살게 만들어주면 조용해지는 것이다. 중국의 역대 왕조 철학들에서도 백성들이 배부르고 태평가를 부르면 황제의 현명함을 칭송한다 했다. 과거 시대도 아니고 비교적 최근 시대임에도 이러한 국민들의 성향은 유지되었던 것이다. 그래서 투르크메니스탄 사회에 대해서는 정치학, 사회학적으로 굉장히 연구가치가 높다. 그 이유는 지금도 그 사회가 현존하고 있기 때문이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3
  • 너무도 위험한, 비상식적인 라이언에어 4978편 벨라루스 강제착륙 사건
    2021년 5월 23일, 그리스 아테네를 출발해 리투아니아 빌뉴스로 가던 라이언에어 4978편이 MiG-29 벨라루스 전투기의 위협으로 벨라루스 민스크 국제공항에 비상 착륙했다. 라이언에어는 아일랜드 소속의 항공사로 브렉시트 이후 영국-EU간 항공 협정 변화에 대비해서 영국행 항공편은 라이언에어 UK라는 영국 자회사에서 일부 운항하는 것으로 분리되었다. 벨라루스 정부는 이스라엘과 하마스의 무력충돌이 있었음을 강조하면서 이스라엘의 발포가 중단되지 않는다면 비행기를 폭파시킬 것이라는 하마스의 폭탄테러 협박이 전자우편으로 전달되었다고 발표했다. 하마스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는 비밀결사로서 테러단체이자, 군벌을 겸한 정당으로 팔레스타인에 자리잡고 있는데 현대 이슬람 원리주의 테레단체들이 대개 레닌주의를 추종하는 비밀 결사 조직들의 일부 요소들을 벤치마킹한 것과 같이 하마스도 그와 같은 요소들을 겸하고 있었기에 위험하다는 것이며 해당 항공기에 하마스 요원들이 타고 있었기에 그들로 보호하려 한다는 내용의 발표였다. 그러나 이와 같은 발표는 이스라엘과 하마스 간의 휴전 협정이 발효된 이후에 보내졌으며, 하마스 측의 대변인은 이와 같은 항공기 폭발 및 기내 개입을 전면 부인했다. 그러한 테러를 미리 전자우편 따위는 보내지 않고 바로 시행하지 뭐하러 그런 불편한 협박 메일을 보내겠냐는 항변과 더불어 그리스에서 리투아니아로 가는 항공편에 특별한 악감정이 없기에 테러 같은 행위를 할 이유가 없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알렉산드르 루카센코 대통령은 민스크 공항 메일로 영어로 된 경고 서한이 들어왔다면서 서한 내용을 공개했다. 벨라루스 측이 공개한 서한에는 "우리 하마스 전사들은 이스라엘이 가자지구 공격을 중단할 것을 요구한다. 우리는 EU사 이 전쟁에서 이스라엘을 지지하는 일을 그만둘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들어 있었다. 이어 "5월 중순 그리스에서 열린 델피 경제 포럼(Delphi Economic Forum) 참석자들이 라이언에어 FR4978 편으로 귀국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하면서 "이 여객기에 폭탄이 설치되어 있으며 만일 우리의 요구를 이행하지 않을 경우 폭탄이 23일 리투아니아 빌뉴스 상공에서 터질 것"이라는 협박이 담겼다 한다. 그 이유로 벨라루스 교통부 항공국 국장 아르툠 시코르스키(Артём Сикорский)는 벨라루스 민스크 공항 관제 센터가 여객기 승객들에게 압박을 주지 않으면서 국제 의무에 따라 여객기를 비상 착륙시키는 조치를 취했다고 설명했다. 이를 위해 자국 공군 전투기까지 이륙시켜 여객기를 호송했으며 이 여객기에 대한 테러 위협이 접수되었기에 국제항공법에 따른 조치였다고 주장했다. 이에 따른 루카센코 대통령의 주장 또한 확고했다. 그는 "당시 항공기가 벨라루스 국경을 넘어왔고 우리 영공에 있었다. 우리는 기내 폭발물 설치 정보를 기장에게 알리고 이를 공개해야만 했다. 폭발 위협 세력이 하마스인지 아닌지는 중요치 않다. 승무원들은 결정을 내릴 시간이 있었다"고 하였다. 그러면서 벨라루스 측이 강제한 것이 아니라 여객기 기장이 항공사, 목적지인 빌뉴스 공항 측과 의논해 민스크 공항에 착륙하기로 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항공국 국장 아르툠 시코르스키(Артём Сикорский)의 공식 주장보다 좀더 구체적인 주장이었다. 그러면서 리투아니아 수도인 빌뉴스에 가까운 지점에서 민스크로 회항한 이유에 대해선 빌뉴스, 리보프와 키예프, 바르샤바 등의 공항들이 폭발물이 설치된 것으로 추정되는 여객기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루카셴코는 이륙한 벨라루스 공군 미그(MiG)-29 전투기가 여객기 기장에게 민스크 공항 착륙을 강요했다는 주장을 반박하면서, 전투기의 과제는 여객기를 위기 상황에서 안전하게 착륙시키는 것이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루카센코 대통령은 여러 국가 출신의 승객 123명과 6명의 승무원이 공중에서 위험에 처해 있었다면서 비상착륙의 불가피성을 역설했다. 만일 비행기에 폭발물이 설치되어 있고 테러리스트가 그것을 터뜨리려고 했다면 우리는 어쩔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객기가 벨라루스 국민의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그러니 나를 비난하지 말라. 나는 자국민을 보호하며 합법적으로 행동했다고 항변했다. 그런데 조사 결과 폭발물은 발견되지 않았고 이에 전 세계가 벨라루스와 루카센코 대통령을 비난했다. 자칫 잘못했으면 최악의 항공 사고가 발생했을지 모르는 극도로 위험한 상황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해당 항공편에는 벨라루스 반체제 유튜버로 알려진 로만 프로타세비치(Роман Протасевичи)와 그의 여자친구인 소피아 사페가(София Сафега)가 탑승해 있었다. 항공기가 민스크 공항에 착륙하자 항공기를 수색했고 KGB 요원들이 기내에 들어가 프라타세비치와 소피아를 체포해갔다. 그러자 벨라루스 당국과 루카센코가 정적을 제거하기 위해 여객기를 납치했다는 국제적 비난 여론이 거세게 일기 시작했다. 이에 루카센코는 그들이 벨라루스에서 유혈 폭동을 일으키려 했기 때문이라며 국가 안보상의 이유로 부득이하게 체포할 수밖에 없었다고 밝혔다. 루카센코는 프라타세비치가 벨라루스 내 테러리스트 목록에 올라 있으며 그가 운영한 텔레그램 채널은 극단주의 조직으로 인정되어 있다면서 벨라루스 국적자인 프라타세비치와 벨라루스 영주권을 가진 그의 여자친구를 공항에서 체포한 것은 우리의 주권사항이라 강조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서방이 객관적인 정보에 관심이 없고 관성적으로 벨라루스를 비난하고 있다면서, 벨라루스의 적대 세력들은 '레드라인'을 넘어 행동했고, 상식과 도덕의 경계도 넘었다고 비판했다. 이에 대해 대체적으로 EU, 미국, 영국 등 서방 국가들은 벨라루스의 민항기 납치 행위를 전면적으로 규탄하고 있으며, 러시아, 중국 등 반(反) 서방 국가들은 오히려 벨라루스를 지지했다. 또한 이전부터 루카셴코 정부에 불만이 있었던 벨라루스 시민들은 이번 사건을 규탄하며 시위를 벌였다. 마침내 EU는 민항기를 강제로 착륙시키고 승객을 납치하는 초유의 사태에 대해 즉각적으로 비난 성명을 내고, 벨라루스 국적기들의 역내 취항을 금지했다. 또한 많은 EU 국가들은 벨라루스를 제재하고, 자국 항공사에도 벨라루스 상공을 우회할 것을 요구했다. 또한 벨라루스에 추가 제재를 가할 것이며 2021년 6월 4일부터 모든 벨라루스 항공사의 EU 역내 영공 통과 및 EU 공항 접근을 금지하는 제한 조치 도입을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6월 24일에는 새로운 경제 제재를 도입했다. 벨라루스의 주요 수입원인 석유 제품, 염화칼륨, 담배 제품 생산에 사용되는 상품 거래가 제한되었다. EU 자본시장 접근도 제한되며, 벨라루스 정부나 공공 기관에 보험, 재보험을 제공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더불어 벨라루스에 인터넷, 전화 통신 감시나 도청을 위한 장비, 기술, 소프트웨어, 군민 양용 제품과 군사용 기술을 직간접적으로 판매하거나 공급하는 것도 금지되었다. 미국 또한 벨라루스 9개 국영기업을 제재하고 미국과 벨라루스의 2019년 항공 협정을 임의적으로 적용했던 것도 중단했다. 바이든은 벨라루스가 국제법을 모욕했다고 밝혔으며 7월 6일부터는 인도주의적, 또는 국가 보안상의 이유를 제외하고는 미국과 벨라루스 간 항공권 판매를 금지하는 내용의 명령을 발표했다. NATO에서는 벨라루스 외교 사절단의 나토 본부 접근을 제한했으며 싱가포르 항공과 에어 아라비아 또한 벨라루스 영공 이용을 중단했다. 한편 프랑스는 2021년 6월 11∼13일 영국에서 열리는 2021 G7 콘월 정상회의에 벨라루스 야권 인사 초청을 희망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반면 중국은 사실관계가 명확하지 않다며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를 자제해야 한다는 입장을 강조했고 러시아는 서방 세력의 벨라루스 제재를 규탄하며, 서방의 제재 조치를 "감정적 분출"이라 언급했다. 러시아는 유럽에 역으로 제재를 하며 프랑스, 오스트리아에서 모스크바로 날아오는 일부 유럽 항공편을 거부하기도 했다. 러시아가 벨라루스에 5억 달러(한화 약 5575억 원)의 차관을 제공하고 양국 간 항공편 수도 늘리기로 합의하며, 서방의 제재에 맞대응했고 러시아 대외첩보국 국장 세르게이 나리시킨(Сергей Нарышкин)과 벨라루스 KGB 위원장 이반 테르텔(Иван Тертель)은 벨라루스 북동부 도시 비쩹스크에서 만나 서방의 공세에 맞서기 위해 공조를 강화하기로 합의했다. 벨라루스는 2021년 6월 22일에 나치 독일과 치열한 전투가 벌어진 브레스트 요새에서 제2차 세계대전의 희생자를 기리는 기념식을 열었는데 루카센코 대통령은 여기에 참석했다. 루카센코는 "그들이 우리 국민과 기업체에 전날 제재를 도입했다. 그들이 6월 22일에도 그랬다"며 연설했다. 1941년 6월 22일 나치 독일은 소련을 침공했었고 2021년 6월 22일은 나치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지 80년째가 되는 해로 벨라루스는 러시아 등과 함께 매년 6월 22일을 기리고 있다. 루카셴코 대통령은 제재를 가한 시기가 상징적이라 지적하면서 그들은 역사로부터 아무것도 배우지 못했다고 비난했다. 벨라루스 외무부도 이 날 논평을 통해 서방의 제재가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라면서 불순하고 비생산적이라고 비난했다.
    • 칼럼
    • Nova Topos
    2024-04-02
비밀번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