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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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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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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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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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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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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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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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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연한 요란
    생명의 기원과 진화를 과학적으로 탐구한 모노의 <우연과 필연>에는 ‘우연적 요란’이라는 개념이 등장한다. 모노는 우주 속에서 우연에 의해서 생명이 탄생했으며, 진화의 원동력은 미래를 예측할 수 없는 우연적인 요란에 의해서 생긴다고 보았다. 우리는 일상 삶 속에서 발생하는 우연한 만남과 이야기를 통해 우리의 생각을 바꿀 수도 있다. 지난 주말에는 친구 아들 결혼식에 참석했다가 우연히 여러 명의 친구를 만나게 되었다. 친구들과의 다양한 이야기가 곧 바로 우연한 요란들이었다. 다양한 우연들의 집합으로써의 우연한 요란에는 수많은 진리가 숨어 있다. 삶이 곧 책이다. 우연히 만난 친구에게 듣게 된 90세가 넘은 아버님에 대한 이야기는 아름다운 미담 이상의 것이었다. 친구는 주말마다 시골 별장에 사시는 아버님을 방문한다고 한다. 그러던 어느 날 아버지는 아들의 나이를 물었다. “너 나이가 몇이냐?” “아버지! 제 나이도 이제 60 후반입니다.” 아버지는 허허 웃기만 하셨다고 한다. 나는 친구 아버지의 웃음이 어른으로서의 인정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고 상상해보았다. 그다음 친구의 이야기는 감동적이었다. 어느 날은 아버지가 심어놓은 토마토 모종을 보고 친구는 깜짝 놀랐다. 너무 촘촘히 심어놓은 것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아버님에게 “아버지! 토마토 모종을 훌륭히 심어놓으셨군요!”라는 말만 했다. 아버님은 흐뭇하셨을 것이다. 내 나이에도 딸들에게 듣는 칭찬은 내 마음을 하늘로 날려 보내는데, 90이 넘은 나이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듣는 칭찬은 그 무엇보다도 즐거웠을 것이다. 친구는 다음 날 혼자서 토마토 모종을 적절한 간격을 두고 다시 정리했다. 친구의 이야기 속에서 진정한 공감과 참된 상호인정이라는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또 다른 에피소드도 재미있었다. 어느 날은 책상 위에 돈이 수북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아버지! 이 돈이 무슨 돈인가요?”라고 물었다. 친구의 아버님은 우리가 졸업한 고등학교 대 선배님이셨다. “학교 발전기금으로 내려고 준비해 둔 돈이지.” 아버지의 통장을 보니 아버지는 여러 차례 학교 발전기금으로 돈을 보내고 있었다. 90세가 넘으신 어르신의 모교에 대한 사랑은 놀라웠다. 친구는 아버지에게 “아버지! 저도 아버지를 대신해서 학교에 발전기금을 내고 있답니다.”라고 했다. 그러자 아버님은 또 허허 웃으시며서 “그럼 그 돈 너 가져라!”라고 하셨다. 그때 친구는 아내에게 일부러 큰 소리로 이야기했다. “여보! 아버지가 우리에게 큰돈을 주셨으니 우리 집 한 채 또 마련합시다.” 300만 원에 불과한 돈이지만 그 돈으로 집을 마련하겠다는 아들의 말은 분명히 아버지를 기쁘게 해 주었을 것이다. 훌륭한 아버지의 훌륭한 아들이었다. 옆에서 함께 친구의 이야기를 함께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웃으면서 나에게 이야기를 한다. “저 친구의 이야기를 네가 똑똑히 기억해라!” 순간 당황스러웠다. 물론 그 의미가 무엇인지는 잘 알고 있었다. 나는 친구들 사이에서 비판적인 이야기, ‘왜?’라는 질문을 자주 던지는 편이다. 학부 때 우수 논문으로 선정된 나의 졸업논문 제목이 ‘이성개념을 중심으로 한 마르쿠제 비판이론의 전개’였다. 이성의 비판적 기능을 강조한 논문이었다. 이성의 비판적 기능이라는 유령은 아직도 내 주변에서 나와 함께 하고 있다. 그러니 왜라는 질문을 던지는 것은 나에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친구는 “따지지 마라”라는 이야기를 돌려서 말한 것이었다. 나는 웃음으로만 화답했다. 때에 따라서는 왜라는 질문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마침 또 다른 친구의 이야기 속에서 ‘왜?’라는 질문이 필요한 이유가 숨어 있었다. “시골에 사는 친구들 고집은 대단해요! 생각이 서로 다르면 아예 서로를 배제시켜 버려요!” 우리 나이에 생각이 다른 친구와 굳이 함께 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었다. 생각의 차이를 다양성으로 받아들이면 될 터인데, 그들에게는 그러한 여유가 없는 모양이었다. 그 이야기를 듣고 있던 다른 친구가 나에게 묻는다. “철학을 전공한 너는 그 이유를 알고 있겠지! 왜 그렇다고 생각하냐?” 갑작스러운 질문이어서 나도 갑작스럽게 대답했다. “서울에 사는 우리는 우리 주변에서 수많은 생각의 차이를 경험하기에 마음의 유연성이 잘 훈련되어 있지만, 그러한 경험이 적은 시골의 친구들은 우리보다는 마음의 유연성을 갖기가 힘들지 않겠냐?”라고 답을 했다. 필터의 버블이라는 어려운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장자>의 제물론에는 모든 시비를 떠나 아무런 경계가 없는 세상에서 자유로운 삶을 추구해야 한다는 대목이 나온다. 여기에서 말하는 “시비를 떠난다”는 말은 ‘좋은 것이 좋은 것’이라는 무사안일한 태도가 아니다. 그것은 차이를 인정하면서 그 경계를 뛰어넘는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끝없는 변화와 자연의 조화에 대한 깨우침이다. 다름을 다양성으로 인정하면서 다르지만 함께 가는 길이 곧 자연의 길이고, 그러한 조화 속에서 참된 자유를 누릴 수 있다는 것이 장자의 생각이다. <장자>를 학문적으로 연구하면 어려울지도 모르지만, 사실은 우리의 일상 속에 장자가 말하는 모든 것이 들어 있다. 다만 우리가 그것을 모르고 지나칠 뿐이다. 연로한 아버지를 대하는 친구의 모습에서 상호존중, 상호인정, 차이에 대한 다양성의 수용이라는 이 시대에 필요한 모든 삶의 지혜를 엿볼 수 있었다. 자기중심적인 세계관에 빠져 오직 자신의 생각에만 도취되어 있는 사람을 경계해야 한다. 타인과의, 더 넓게는 자연과의 관계를 존중하는 관계중심적인 세계관이 미래사회에 대한 우리의 희망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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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독일과 프랑스, 서로 다른 계산 속에 주도권 경쟁
    독일과 프랑스는 현재 유럽연합(EU)의 쌍두마차로 실질적으로 유럽연합을 주도적으로 이끌고 있다. 또 두 국가는 유로화를 함께 사용하고 있으면서,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의 회원국이기도 하다. 표면적으로만 보면 두 국가는 유럽연합 영내 및 국제적 여러 현안에 관해 서로 협력을 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자세히 들여다보면, 두 국가는 서로 각자의 국익을 위해 치열한 경쟁을 물밑에서 벌이고 있다. 거기에는 서로 지정학적인 측면도 강하게 영향을 끼치고 있다. 독일은 중부 유럽국이기 때문에, 서부 유럽국인 프랑스를 의식해야 할 뿐만 아니라, 동쪽에 슬라브 국가들의 맹주국인 러시아도 경계하지 않으면 안 된다. 독일의 대유럽전략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독일이 프랑스와는 철광석이 풍부한 알자스-로렌 영토 분쟁이 있었고, 러시아와는 동유럽을 두고 이른바 범슬라브주의와 범게르만주의의 대결이 문제였다. 독일에게 알자스-로렌 지역이 중요했던 것은 철광석 때문이다. 독일이 알자스-로렌을 점령하면 석탄이 풍부한 독일의 노르드라인베스트팔렌 주의 루르 지역과 결합이 되고, 그렇게 되면 경제적 이익은 실로 엄청나다. 그런데 반대로 보자면, 이것은 독일이 먼저 동유럽으로 진격할 수 없게 만들기도 한다. 왜냐하면 프랑스는 오히려 알자스-로렌을 통해 독일의 루르 지역을 먼저 점령하고, 독일의 배후를 공격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독일이 팽창시에 먼저 프랑스를 제압하고, 그다음에 동유럽으로 진입해야 수월하다. 동유럽에서 범게르만주의는 폴란드의 슐레지엔 지역과 체코의 주데텐 지역을 중심으로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에 속했던 지역까지 포괄하게 된다. 그런데 이것은 1871년 독일의 통일이 오스트리아 제국 중심의 대독일주의가 아니라,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진행되었던 소독일주의에 따른 필연적 결과이기도 하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영역에는 독일인들도 있었지만, 다양한 민족과 언어 그리고 종교가 매우 달라 현실적으로 프로이센과 통합이 어려웠다. 문제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향력 약화가 이후에 동유럽을 둘러싸고 범게르만주의와 범슬라브주의의 치열한 각축장으로 변질이 되었다는 점이다. 이것은 곧바로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의 원인 중 하나로 나타났다. 그렇다면 프랑스는 어떤가? 서유럽국인 프랑스는 동쪽으로 가운데 독일을 제외하면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이탈리아와 국경을 맞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외부의 침략을 방어하기에 유리하다. 그 때문에 독일이 1871년 통일되기 이전까지에는 프랑스가 상대적으로 유럽 대륙에 강대국으로 위상을 가질 수 있었다. 그런데 프랑스의 문제는 이때까지만 해도 해양국가인 영국이었다. 유럽에서의 각종 전쟁에 영국이 개입하면서, 빈번하게 프랑스의 발목을 잡았다. 영국과의 지나친 경쟁으로 인해 프랑스가 유럽 내에서 영향력의 다소 약화되었고, 그 틈을 타서 독일이 급부상했다. 프랑스로서는 독일의 고립화가 필요했으며, 이때 프랑스는 독일을 견제하기 위해 영국 및 러시아와 관계를 강화했다. 프랑스는 독일과 악연이 깊다. 특히, 프랑스는 독일 통일(Deusche Einingung) 이후에 보불전쟁을 비롯해서 제1차 세계대전 및 제2차 세계대전에도 침략을 당했다. 전후 독일의 동·서독의 분단은 프랑스의 입장에서 전후 부흥과 또 다른 ‘아름다운 시대’(Belle Époque)를 재현할 기회였다. 왜냐하면 독일의 프랑스에 대한 위협의 가능성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사실 독일이 1990년 재통일을 할 때, 이것을 제일 반대했던 국가는 프랑스였다. 프랑스의 입장에서는 ‘독일의 재통일’(Deusche Wiedervereinigung)이 독일 민족주의의 부활을 불러오고, 알자스-로렌 지역이나 다른 옛 독일 영토를 되찾으려고 독일이 움직일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독일의 재통일이 소독일주의에 적합한 것으로 한정하면 프랑스로서는 독일을 재통일을 반대할 뚜렷한 명분은 없었다. 그 때문에 프랑스가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을 때, 거기에 세 가지 조건을 내세웠다. 첫째, 독일이 알자스-로렌의 영유권을 포기하고, 둘째, 독일이 동쪽 일부 영토를 포기하고, 셋째, 유럽의 단일 화폐를 독일이 사용한다는 것이었다. 여기에서 프랑스의 세 번째 전제조건은 독일을 유로화에 묶어 놓음으로써, 독일을 유럽 경제에 기여하게 만드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프랑스의 계산은 시간이 지나면서 독일에게만 실질적 이익을 가져다주었고, 프랑스와의 경제적 차이를 벌여 놓았다. 독일의 계산은 일단 나치즘에 의한 유럽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 개선을 통해 경제적으로 확실한 우위를 확보하면서, 동유럽 시장으로 진출하는 데 있다. 거기에 독일은 러시아로부터 값이 싼 천연가스와 석유 등을 수입하면서, 상대적으로 지하자원 수급에 큰 어려움이 없었다. 이것은 독일이 각종 경제 위기에도 불구하고 비교적 안정세를 유지할 수 있었던 까닭이기도 했다. 독일이 제조업 비중이 큰 국가이기 때문에, 내수와 수출을 통해 시장을 확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그런데 이것은 북대서양기구를 통해 독일의 안보를 미국이 상당 부분 보장했던 결과이기도 하다. 문제는 미국의 이번 대선 결과에 따라 독일의 재무장도 문제로 떠오르게 되면 자칫 유럽연합과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차원에서 분열을 불러오게 될 수도 있을 것이다. 프랑스의 계산은 미국의 도움 없이 유럽 자체의 방위능력을 키우면서, 각종 규제의 완화를 통해 경제 성장률을 높이는 데 있다. 프랑스의 입장에서 유럽연합이 너무 미국에게 끌려가다 보니 각종 현안에서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가 작아지고, 그렇게 되면 미국의 정책 변화에 따라 프랑스의 영향력이 유럽연합 내에서 축소될 수 있다. 영국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 국가 중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하고 있는 프랑스는 유럽 안보에서 이를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에게는 엄청난 부담감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프랑스에게 아무런 국경도 접하고 있지 않은 러시아라는 새로운 적을 만드는 것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정책변화가 생기더라도 프랑스는 독일과 달리 자기방어를 할 수 있을 정도는 되는데, 굳이 그렇게 해서 얻을 수 있는 실익은 없을 것이다. 프랑스는 제조업의 비중이 독일보다 크지 않고, 농업과 관광업의 비중이 상대적으로 크다. 제조업의 비중이 적다는 것은 고용률이 낮고 실업률이 높을 수밖에 없다. 거기에다 프랑스는 자국 농업을 보호하기 위해 농업보조금을 지원한다. 독일과 프랑스는 유럽연합이라는 큰 틀을 깨는 것보다 유지하는 것이 현재로서 서로 이익이라고 본다. 설령 독일의 극우주의자들이 독일의 유럽연합 탈퇴를 뜻하는 덱시트를 주장하고, 프랑스의 극우주의자들이 프렉시트를 주장하더라도, 이것은 현실적으로 실현되기 어렵다. 또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은 붕괴하고 독일과 프랑스는 화해보다는 대결로 나아갈 수 있다. 물론 반이민주의 정서, 만성적 재정적자, 유로화에 대한 불신 등등으로 인해 일부 정치권이 그렇게 주장할 수는 있겠지만, 둘 다 각기 국민의 높은 지지를 얻기는 힘들다. 현재 독일과 프랑스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및 이스라엘-하마스 전쟁에 관해서도 겉으로 보면 미국의 정책에 동조하는 듯 보이지만, 속내는 매우 복잡하다. 그것은 현재 독일이든 프랑스든 현재 정치지도자들의 낮은 지지율 탓에 현실을 정확히 직시하고, 유럽의 독자적 목소리를 내기보다 서로의 국익이 무엇인지에 더 골몰하고 있다는 점이다. 현재 시점에서 보면, 독일과 프랑스는 올해 6월 6일에서부터 6월 9일에 실시할 예정인 유럽의회 선거 결과가 중요하다. 유럽의회의 의석이 705석으로 독일은 96석이고, 프랑스는 81석인데, 선거 결과에 따라 향후 정책의 방향이 가늠하게 될 것이다. 독일과 프랑스가 이후에 어떤 행보를 보일지는 현재로서는 불투명하다. 서로 다른 계산법 속에서 어떤 현안은 서로 합의를 볼 수도 있고, 합의를 볼 수 없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이 두 국가가 유럽연합을 탈퇴할 가능성은 영국보다 상대적으로 낮은데, 영국의 브렉시트와 같은 결과를 모두 원하지 않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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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루마니아와 몰도바, "베사라비아(Besarabia)" 이야기
    루마니아 부쿠레슈티의 인민궁전으로 가는 통일대로 주변의 건물 벽면들을 보면 가끔 스프레이로 뿌려진 그레피티에 Besarabia e Romania!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이에 대한 뜻은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다!"라는 내용인데 이 글귀를 눈여겨보면 루마니아의 곳곳에서 같은 표어를 흔히 볼 수 있다. 물론 이와 같은 그레피티 표어는 루마니아 뿐이 아니다. 몰도바의 수도인 키시네프에서도 상당수 발견할 수 있다. 그러나 표어 글귀의 다른 점은 루마니아에서와 다르게 훼손당한 사례가 심심치 않게 있다는 것이다. 단어 중간에 “nu”를 삽입하면 “베사라비아는 루마니아가 아니다!(Besarabia nu e Romania!)”라는 뜻이 되는데 대개는 그런 식으로 훼손되어 있다. 그와 같이 훼손하는 자들의 정체는 아마 친러 세력이거나 트란스니스트리아, 가가우지아 자치 공화국 지역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 현재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을 가장 싫어하는 사람들은 친러계 사람들이고 국가로는 러시아이기 때문이다. 베사라비아(Besarabia)는 몰도바의 영토 대부분을 차지하는 드네스트르 강 서안 지역을 지칭하는 이름이다. 루마니아는 이 베사라비아 지역을 수복해야 할 옛 고토로 생각하고 있다. 인종적으로 같은데다가 같은 루마니아계 언어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해하지 못할 내용은 아니다. 그렇다고 하여 한 나라가 되어야 한다거나 그 반대이기 때문에 독립해야 했던 것도 아닌게 유럽의 실상이다. 복잡한 국가 간의 관계와 영토를 둘러싼 유럽의 오랜 분쟁사 중 한 무대이기도 한 베사라비아는 15세기 이후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봉신국으로 오랜 지배를 받아오다 1812년 부쿠레슈티 조약으로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게 할양되었다. 이후 100년 뒤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혁명의 도중에 등장한 몰도바 민주 공화국이 1918년 대(大) 루마니아 연방의 일원이 되었지만 적백내전으로 분주한 상황임에도 러시아 정부는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후일 탄생한 소련은 드네스트르 강 서안에 몰도바 소비에트 자치공화국(ASR)이 세워질 수 있도록 배려함으로써 베사라비아에 대한 영유권을 그대로 유지했다. 1939년 독소 불가침조약 체결과 제2차 세계대전의 발발은 루마니아에 대한 최후 통첩으로 소련군의 평화적 베사라비아 진주를 가능하게 했다. 몰도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SSR)이 탄생한 것은 이 때부터였다. 루마니아로서는 매우 굴욕적인 역사적 사건으로, 전쟁 중 루마니아가 나치 편에 서서 추축국의 일원이 된 이유 중의 하나로 나타나고 있다. 소련의 각 공화국에 대한 영향력은 이미 고르바초프의 뻬레스뜨로이까와 글라스노스뜨 이후 쇠퇴하기 시작하는데, 그와 반비례하여 민족주의적 성향은 강화되는 경향을 보이게 된다. 몰도바는 민족주의적 성향이 강세를 띤 국가의 대표적인 경우였다. 소련이 해체되기 전에 소수 민족의 축출을 주장하는 몰도바 인민전선(PFM)과 같은 민족주의 정치세력들이 등장했고, 1989년 몰도바 소비에트 최고회의가 몰도바어와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채택하는 사건이 벌어지게 된다. 1990년 최초의 자유선거에서 몰도바 인민전선이 승리하면서 소수 민족들의 위기의식은 더욱 고조되었고 가장 먼저 이에 반발한 것은 우크라이나와 러시아 등 슬라브계 인구가 다수인 드네스트르 강 동안의 트란스니스트리아였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9월 2일 독자적인 소비에트 공화국 수립을 선언하게 된다. 뒤이어 터키계 주민들이 다수인 남부의 가가우지아 지역이 1991년 8월 독립을 선언했다. 두 지역의 독립 선언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루마니아와의 통일과 소수 민족의 축출과 같은 과격한 인종주의적 태도를 취했었던 인민 전선의 등장 때문이었다. 인민 전선이 주도하는 가운데 몰도바는 가가우지아보다 일주일 늦게 독립을 선언했지만 이미 무력 분쟁이 촉발된 직후였다. 1990년 11월에는 키시네프 인근 두바사리의 드네스트르 강을 가로지른 다리에서 몰도바 측이 무력 진입을 시도하면서 민간인 3명이 사망하는 드네스트르 충돌 사건이 발생했다. 1991년에도 이와 유사한 사건이 간헐적으로 발생하면서 드네스트르 강 지역은 다뉴브 지역의 최대 화약고로 떠오르게 된다. 이에 대한 전면적인 전쟁이 발생했는데 1992년 3월 2일 몰도바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선제 공격을 하면서 시작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의 경계인 드네스트르 강을 따라 치열하게 전개된 전쟁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수적으로 열세였지만 군사적으로는 전혀 밀리지 않았다. 이는 소련 시절부터 주둔하고 있던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로 구성된 14군이 음성적인 지원에 나섰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군수물자 지원도 이어졌기 때문이다. 루마니아 역시 몰도바에 대한 군사적 지원에 나서게 된다. 1991년 7월 21일 러시아의 중재로 휴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전사한 1,000여 명은 공식적으로는 모두 민간인이었다. 양쪽 모두 정규군 체계를 갖추지 못했고 경찰과 민병대, 자원병을 동원한 결과였기 때문에 빚어진 일이다. 분쟁이 일어날 역사적 연원이야 여러 원인들이 존재하지만, 독립을 전후해 인종 갈등을 부추기고 급기야 전쟁까지 벌인 자유주의적 민족주의 세력은 전쟁 이후 상당수의 시민들에게 정치적 신뢰를 얻지 못했다. 정권을 장악한 후 서둘러 도입한 시장 경제는 가파른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게 되었고 몰도바는 지독한 경제난에 시달려야 했다. 1994년 독립 이후 치른 첫 총선에서는 민주농민당이 승리해 다수당이 되었고 정책의 변화가 이어졌다. 루마니아와의 통일 정책은 폐기되었고 헌법 개정과 특별법 제정으로 인해 마침내 가가우지아 지역은 자치권을 확보하게 된다. 그러나 경제는 지속적으로 악화된 상태였고 부정부패의 만연과 빈부격차의 심화, 사회복지의 붕괴 등으로 소련 해체와 독립 이후 새롭게 등장한 정치세력들에 대한 불만 또한 깊어졌다. 2001년 총선에서는 공산당이 압도적인 다수당이 되어 정권을 장악했다. 몰도바 공산당은 유럽에서 최초로 자유 선거를 통해 집권한 공산당으로 기록되었으며 대외적으로는 러시아와의 관계 개선이 추진되었다. 그리고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긴장도 완화되면서 몰도바의 정치 체계가 안정되기 시작했다. 공산당은 2005년 선거에서 다시 집권했고 2009년 선거에서도 1당이었지만 지도부에 속했던 마리안 루푸의 탈당과 민주당 입당, 3개 소수당의 연합과 연립 정부의 구성 등으로 인해 권력을 잃었다. 몰도바에서 이루어진 2011년의 여론조사는 29%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지지하고 61%가 반대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2010년 말 루마니아에서의 여론조사 결과는 좀 다르게 나타났으며 44%가 찬성했고 28%가 반대했다. 소련 시기 50년 동안 여러 민족이 한 국가 안에 살았기에 민족 분쟁과 같은 정치적 사안이 존재하지 않았다. 몰도바의 독립 전후 혼란기에 전쟁까지 치러야 했던 것은 신흥 정치 세력이 권력을 장악하기 위해 민족주의를 부추긴 결과였음을 방증하고 있다. 그 민족주의가 정치화 된 세력은 몰락했고 CIS 국가 중 가장 먼저 공산당이 부활하는 계기가 되기도 했지만 그와 같은 전쟁의 쓰라림은 여전히 남아 드네스트르 강 양편을 가르고 있는 실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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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아프가니스탄, 무엇이 문제였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상징인 탈레반에 의해 아프가니스탄 카불이 점령되고 내전을 종식을 선언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정정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문제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 그 역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탈레반이 축출된 이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하미드 카르자이(حامد کرزی)에서부터 불거진 지독한 부정부패에 있었다. 그래서 본 지면에는 아프가니스탄 민주정 초대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حامد کرزی)의 일생과 그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의 일대기를 알아본다. 하미드 카르자이는 칸다하르 출생으로 파슈툰족 7개 씨족 중 하나인 포팔자이족 출생으로 정통 파슈툰족으로 나타나며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마지막 왕 무함마드 자이르 샤의 사촌인 무함마드 다우드의 외가 집안이기도 했다. 그런 영향인지 그는 유년시절 왕가의 도움으로 인도 펀자브 지역에 유학을 갈 수 있었고 펀자브 지역에 살고 있는 파키스탄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때마침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 카르자이는 펀자브에서 친해진 자신의 파키스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파키스탄에 입국하여 파슈툰 주에 들어가 대소련 항거단체인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친소파인 극좌파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집권하고 있었다.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 최대 공산주의 좌익계 정당이었던 인민민주당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소련 측의 무한 지원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라 무자헤딘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 진영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88년 전쟁 막바지에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하게 되고 반(反) 나지불라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이어져 오던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무자헤딘의 공격을 받아 결국 패망했다.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뜨리고 카불을 장악한 무자헤딘의 지도자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나지불라를 비롯한 전임 정권 지도자들에 대해 온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많은 무자헤딘들 중에 강경파들은 전임 정권 인사들에 대해 숙청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여러 생각들과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권들이 같은 무자헤딘들도 분열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이들은 마침내 서로 간의 내전으로 승화되어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탈레반 세력이 대두하여 전면 등장하게 된다. 탈레반 세력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대두된 이유는 정치와 종교, 사회가 이슬람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계시 아래 하나로 뭉쳐 이 위기를 극복하자는 주장을 했고 이러한 주장들이 힘을 받았기 때문에 탈레반이 1990년대 초반에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카르자이는 외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정부와 군벌이자 헤즈비 이슬라미 단체의 수장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의 중재를 담당하고있었다. 그러나 이후, 카르자이는 굴부딘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지만 굴부딘이 제공한 오토바이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퀘타로 망명하여 왕정복고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도중 그의 아버지가 탈레반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분노한 카르자이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북부동맹 계열로 돌아서게 된다. 전향한 카르자이는 2000년~2001년 유럽과 미국을 돌며 반(反) 탈레반 세력을 알리며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그 당시 유럽과 미국은 탈레반의 정권 탈취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외의 반(反) 탈레반 세력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자 마수드와 카르자이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서로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테러계획 등을 미국에 경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했고 이는 9.11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마수드가 9.11 테러 이틀 전에 알카에다의 자폭테러로 인해 사망하였기에 미국은 반 탈레반 세력의 중심인물로 카르자이를 선택하게 된다. 사실 카르자이는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미국이 미리 잠재적 대항마로 점찍었던 압둘 하크가 탈레반 전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했다가 잡혀서 공개적으로 참수형을 당하자 카르자이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카르자이가 떠오를 수 있었던 것에는 미국의 국제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카르자이 본인이 아프가니스탄 명문가인 왕가의 친척 출신이라는 정통성 문제의 해소에 당시 드물게 아프가니스탄 사람으로써 펀자브 유학생 출신으로 고학력 엘리트였다. 게다가 인도에서 배운 영어로 미국과 소통했기 때문에 탈레반을 축출하고 싶은 미국에게는 최상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수드가 암살당하고 리더를 잃은 북부동맹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조율하고 원조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중재자로 자리했다는 것도 그가 대통령으로써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의 요인이 되었다. 또한 카르자이의 행적을 놓고 보면 그는 나지불라 정권 이후 모자데디 대통령 하에서 외무차관을 지내본 것 외에는 정계 요직에 거의 전무했던 자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그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때문에 탈레반이나 카르자이의 정적은 그를 미국이 세운 허수아비라고 비난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2001년 12월 독일에서 열린 모임에서 아프가니스탄 과도내각을 조직하였고 카르자이는 수반이 되었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를 알리고 지지를 호소한 카르자이는 순식간에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지도자 0순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 의해 탈레반이 축출되고 민주선거가 최초로 치뤄지면서 55.4%라는 압도적인 표를 받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통합적인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으로는 6대 대통령이지만 민주선거로 이루어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는 정부수립 최초의 대통령으로 간주되고 있다. 내일 포스팅에는 카르자이의 대통령으로써 재임하는 시기와 엄청난 부정부패, 그리고 아슈라프 가니의 등장에 대해 언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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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2023년 5월 러시아 크레믈린 전승절에서 한 푸틴 대통령의 연설
    "조국을 수호함으로써 그들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불멸화시킨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등을 기리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용기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나치즘으로부터 인류를 구했다. 현재 문명은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전환점에 서 있는 상태다. 우리 조국에 대한 실제 전쟁이 다시 한 번 발발했지만 우리는 국제 테러를 격퇴했으며 돈바스 주민들도 보호하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라는 초반 내용을 연설했다. 러시아어는 발언한 내용과 번역이 맞지 않으면 오해할 수 있는 소지들이 분명한 단어들이 있다. 게다가 해당 발언의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일부분만 잘라 정말 그런 양 왜곡해서 발표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특히 그런 행태는 한국 뉴스에서 곧잘 확인되는데 이것은 러시아어를 이해 못해서 방송에 내보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자극적인 단어 한 두개를 통해 정말 그런 양 헤드라인을 내보내면 조회수가 높아지고 영상 시청률 또한 높아지기에 얼마든지 낚시성 보도들을 할 수 있다. 이같은 보도를 하는 자들을 우리는 "기레기"라고 부르고 천박한 저널리즘이라는 뜻의 "처널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뉴스에서는 "러시아에서 특수군사작전(Специальная военная операция)이라는 용어를 쓰고 전쟁(Война)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음과 동시에 금기시되었다." 면서 푸틴이 전쟁(Война)이라는 말을 언급했다해서 이것을 전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군사작전이지만 그것도 엄연히 전시활동이나 다름없다. 전 세계가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고 러시아의 주요 언론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심심치 않게 언급하고 있다. Русско-украинская война 라고 구글에 검색해도 이를 언급한 언론들이 수없이 잡힌다. 그런데도 푸틴의 연설 내용 전문을 보면 "전쟁"을 선언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단 위에 내용에서 "우리 조국에 대한 실제 전쟁이 다시 한 번 발발했지만 우리는 국제 테러를 격퇴했으며 돈바스 주민들도 보호하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여기에서 전쟁을 언급했다고 전쟁 선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푸틴은 전쟁을 선포한적은 어느 글 맥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아래 내용은 푸틴 대통령의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 당시 러시아어 연설 원문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는 바이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분들은 구글번역기로 돌려서 보시면 된다. 여기에서 어디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얘기가 있는지 확인하실 수 있다. 끝으로 한국의 언론은 정직성도 잃어버렸고 기자 정신도 잃어버렸다. 그저 조회수 늘리고 영상 시청률을 늘리는데만 관심있고 거기에만 몰두하는 천박한 프레스와 리포터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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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통일론과 몰도바 내 복잡한 내부 문제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본래 동질적으로 같은 민족이나 마찬가지인 두 민족은 루마니아 왕국이 생겨나기 이전에 베사라비아,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등 여러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지면서 서로 간의 분쟁을 지속했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베사라비아, 왈라키아가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던 반면에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베사라비아 일대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침략을 받아 3등분 되면서 루마니아 인들은 또 다른 디아스포라를 겪게 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루마니아 왕국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과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이에 따라 한 때 한 국민으로 지낸 적도 있었지만, 1940년 소련에 다시 병합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포함해서 베사라비아 일대를 점령하게 되면서 루마니아와 몰도바로 분리되어 졌다. 두 나라가 소련 시대에 분리된 이후, 국경이 그대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게 되었고 소련 붕괴 직후 몰도바가 소련에게서 분리 독립하면서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나라가 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루마니아에서는 현재 몰도바와 통일하자는 통일 찬성론자가 많지만, 몰도바 내에서는 루마니아와 통일하자는 연합주의자(Unioniști)와 몰도바주의자(Moldoveniști)들의 대립이 심각한 양립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필자도 2017년 몰도바 키시네프에 있을 때, 루마니아계가 루마니아와의 연맹국을 이룰 것을 요구하여 루마니아 국기를 들고 시위하는 장면도 직접 목격한 바 있다. 사실 몰도바는 독립 직후에 루마니아와 통일하려고 여러 협상을 벌인 바 있었지만 당시 몰도바의 집권당인 루마니아 인민 전선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났었던 데다 친러 성향의 소수민족이 다수 거주하는 가가우지아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은 루마니아 민족들끼리 자신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서로 통일하려 한다고 루마니아와의 통일 정책에 반발하면서 전쟁이 발생했었다. 이를 두고 루마니아 내전이라 불리는데 이 루마니아 내전에 대해서는 루마니아를 포스팅할 때 밝히도록 하겠다. 몰도바 중앙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여당인 인민 전선의 지지율이 폭락하게 되자 몰도바와의 통일할 수 있는 여력을 상실하게 된다. 우선 가가우지아 지역은 일단 조건부로 루마니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현재도 루마니아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몰도바가 루마니아와 통일하면 독립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 볼 때 소련 붕괴 이후로 물가가 폭등하고 산업 기반이 마비되는 상황에서 1인당 국민소득은 400달러대로 추락하였던데다 당시 루마니아도 경제적으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몰도바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단행하기 어려웠던 상태에 있었다. 당시 루마니아는 체제 전환 이후 물가가 급상승하였기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던 데다 구제금융의 대가로 차우셰스쿠 후반 시기부터 진행된 복지 축소 정책이 계속해서 진행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유 기업의 민영화와 매각으로 인해 실업률이 급상승하여 사회 안전망이 거의 붕괴될 지경에 있었다. 거기에다 당시 지배 계층이 소위 공산당 출신이었던지라 부정부패는 여전히 심각했다. 그래서 국민들의 삶이 좋아지지 못하게 되면서 경제적인 혼란은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었고, 결국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94년 총선과 대선에서 인민 전선 계열 정당이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루마니아에는 중도파 민주농민당이 집권하면서 몰도바와의 통일 정책은 폐기되었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나아진 2000년대에 들어서 몰도바와의 통일론은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2001년 몰도바 대선에서는 루마니아와의 통일에 반대하는 몰도바 공산당이 집권하는 등 몰도바 내부에서도 통일에 대한 회의론이 더욱 커지게 되면서 통일론이 다시 대두되는 루마니아와는 달리 몰도바의 통일론은 수그러지게 되는 엇박자의 형태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몰도바와의 통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상당한 입장이다. 2006년 7월에는 루마니아 측이 EU의 틀 안에서 몰도바를 흡수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2009년에 루마니아 대통령이 몰도바인 100만 명에게 시민권을 주겠다고 공언한 일도 있었다. 100만까지는 아니지만, 루마니아의 정부 기관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붕괴 후 2012년까지 몰도바인 40만 명이 루마니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2011년에 몰도바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29%가 통일을 지지하고 61%가 반대한 반면, 루마니아는 2010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44%가 통일에 찬성하고 28%가 반대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기에 여론조사를 보면 2010년대 후반기부터는 몰도바에서도 통일 찬성 의견이 올라가는 추세에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몰도바에서 매우 중요한 산업 지대에 놓여 있었지만 애매한 입지 조건과 미승인국이라는 불리함으로 인해 많이 낙후되면서 몰도바 중공업 경제의 의존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우크라이나와 병합을 추진하는게 낫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게다가 인구 감소나 취업의 유리함으로 인하여 시너지 효과로 보자는 여론도 나오고 있으며 더군다나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위협적이라는 분석도 존재하고 있어 루마니아와의 통일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봉착하고 있다. 몰도바의 정치인인 니콜라에 다비자(Nicolae Dabija)는 2016년부터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비정연합운동을 맡고 있으면서 통일을 추진하고 2017년에 필자가 목격했던 시위도 주도했다. 니콜라에 다비자는 친(親) 루마니아 성향의 정치인으로 몰도바 내 보수우익적인 입장을 띄고 있다. 몰도바에서의 이데올로기에서 보수 우익은 대개 친(親) 루마니아 계열이고 좌익은 친(親)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로 구분되어 있다. 여론적 추이를 보면 몰도바 젊은 층은 통일 찬성 여론이 강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통일을 반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미 두 나라가 갈려 나간지 수십 년이 되어 가는데다 몰도바 자체도 친(親) 통일과 반(反) 통일이 엇갈리니 가까운 미래에 루마니아와의 통일 및 통합이 현실로 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전망이다. 굳이 합병하려 한다면 러시아의 반발을 고려해 EU에 가입한 뒤 EU의 지원을 받으며 서서히 통합을 추진할 공산이 크다. 더불어 드네스트르 강 동쪽의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루마니아 영사관들이 여권 발급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 시민들에게 여권을 내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트란스 드네스트르 지역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분리 독립에 이어 러시아와의 합병도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은 러시아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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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 슬라브계 인종끼리의 이른바 "제노사이드"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
    183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학자 미하일 포고딘(М. П. Погодин, 1800~1875)에 의해 작성된 논문 <서구의 중요성>에서 다른 민족에 비해 슬라브족의 우월성과 모든 슬라브족의 세계에서 러시아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 범슬라브 민족주의 시작이다. 모든 슬라브족들이 같은 계열의 민족이고 모든 슬라브족들을 하나로 합쳐 외세를 방어하고 슬라브 민족만의 전통과 사상을 지키자는 것이 목적이다. 독일이 범게르만주의를 이용했다면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이용했다.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 국내외적으로 볼 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제국주의 정책 이데올로기, 팽창 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논리로 형성, 전개되어 온 국제관계 사상으로 평가해 왔다. 19세기 들어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강력해지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등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발칸의 슬라브족들이 독립하면 경쟁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땅과 인구가 줄어들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는데다 새로 생겨나는 슬라브 민족 국가들은 이들의 독립을 도와준 러시아에 밀착하여 새로운 친러 세력을 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니 큰 이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독립하는데 있어 같은 계열의 민족이자 강대국인 러시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서로의 유리한 입장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이와 같이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러시아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같은 민족이라 여기면서 도와주게 된다. 물론 같은 슬라브이기 때문에 도운 것도 있었지만 발칸 반도의 자원이나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나타나는 부동항 확보의 정당성, 서구로 나아가기 위한 러시아의 패권 진출 등 다양한 플렌도 존재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계획과 발칸 지역의 남슬라브인들이 원하는 것들이 서로 맞아 떨어짐에 따라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 서남부에 유고슬라비아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범슬라브주의 최초로 주창했던 미하일 포고딘은 러시아의 지도하에서의 슬라브 민족들의 통일을 주장하여 러시아의 정당성에 무게를 실어주었고 니콜라이 다닐레프스키(Николай Данилевский, 1822~1885)는 슬라브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설파하여 범슬라브주의의 교의를 제공했다. 그리고 1867년에 모스크바에서 범슬라브계 민족회의가 개최되었지만 러시아가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슬라브주의를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다른 슬라브 민족들이 반발했고 이와 같은 급진적 운동은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범슬라브주의에 심취한 러시아인들은 옛 동유럽 전역이 거의 슬라브의 영토라고 확신하는 팽창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슬라브에 대한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욕설하고 폭행 등의 물리적인 가해를 가하기도 한다. 헝가리, 루마니아와 몰도바, 알바니아, 그리스 등은 옛 슬라브인들의 영토이고 이들을 학살하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 심지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슬라브족의 영토라 주장하거나 슬라브 문화권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패권주의를 지향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슬라브족과의 혼혈 등으로 동화된 국가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국가가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우크라이나가 있는데 우크라이나의 경우, 슬라브족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엄연히 정체성이 슬라브와 다르고, 스스로 슬라브가 아니라는 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더불어 스스로를 슬라브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범슬라브 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범게르만주의에 필적하는 범민족주의 운동인 범슬라브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초의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슬라브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오스트로 슬라브주의(Австрославизм)'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슬로바키아의 얀 콜라르(Ján Kollár, 1793~1852)나 파벨 샤파리크(Pavel Šafárik, 1795~1861) 등이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언어적의 유사성과 문화적인 유사성을 통해 연계를 강조하였으며 이어 체코의 프란치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1876)가 제국 내 슬라브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연대를 지향하여 1848년에는 모스크바 범슬라브계 회의보다 앞서 프라하에서 최초의 슬라브계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아나키즘 철학자 미하일 바쿠닌(Михаил Бакунин, 1814~1876)이 참가하기도 했다. 뒤이어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1860년대의 러시아에 범슬라브주의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범슬라브주의가 러시아에서 촉발된 이유는 크림 전쟁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로 나타났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는 이민족인 영국,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에게 그 자존심이 꺾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패권을 함께 다투고 있는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영국, 프랑스에게의 패배는 소련의 해체에 이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때부터 영국, 프랑스가 러시아를 침공할지 모른다는 위기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설은 영국,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슬라브인을 결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주의와 애국심이 범슬라브주의를 탄생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 극우적인 발상의 범민족주의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감이 고조될 때 하나의 이념으로 결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면서 민족적인 위대함과 그에 따른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게 되었고 강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은 범슬라브 민족주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다만 범게르만주의나 다른 민족주의와 다른 것은 범슬라브주의 주창하는 자들의 특성이 자국민 슬라브족이 우선이라는 국가적 개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적 개념의 민족주의는 국가 외적으로까지 분포한 민족개념에서 국가론으로 축소한 것인데 같은 계통의 민족이어도 국가를 벗어나면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이는 서방의 민족주의와 다르게 슬라브권 국가들은 전제 군주가 통치해 오고 있는 상태에서 전제 군주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다른 민족이나 같은 슬라브계여도 무조건 학살하고 보는 것이 이러한 이유이다. 범슬라브주의이지만 동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론이고 무조건 국가가 먼저이다. 국외는 어찌됐건 동맹국이 아니면 동류의 민족이어도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을 없애는 “제노사이드”를 통해 완전히 싹을 잘라버리고 새로운 싹인 자신들이 그곳에 뿌리를 박아 이식하여 번성케 해야 한다는 급진적 범슬라브주의가 슬라브 인종들 중 “제노사이드”를 벌이는 자들에게 정당성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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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0
  •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임기 시작과 그와 비교되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운명
    이틀 전 7일부터 푸틴 대통령의 5번째 임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9일 오늘 79년째 전승기념일이다. 전승절은 1941-1945 대조국 전쟁, 혹은 대독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실제로 독일군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은 5월 8일 오전에 군사행동을 종료한다는 항복문서를 서명했지만,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은 소련군이 참가하지 않은 서명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5월 8일 밤인 러시아 시간으로는 5월 9일 새벽 00:43에 재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 날 전승기념일로 간주한다.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라고 할 만큼 러시아 최대의 공휴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현대 러시아 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인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많은 러시아 인에게 특별한 날이다. 2,700만의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국가적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상실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 있다.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치뤄진다. 오전 10시 Спасская башня (스빠스스까야 바쉬냐) 타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시작이 된다. 왜 오전 10시냐면 소련군이 5월 9일 베를린에 입성해 오전 10시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소비에트의 깃발 꽂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 군사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ypa! (우라!,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어)하면 전 장병들이 ypa 삼창을 외치고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엄함은 그 압도적인 장관에 온 몸에 소름 돋을 정도다. 군사 퍼레이드가 끝나고 틴 대통령은 각계, 각 인사들에게 악수하며 인사하고 붉은 광장을 걸어 크레믈린 성곽 주변을 통과해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으로 간다.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은 러시아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최근 전쟁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각료들은 그곳에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한 충(忠)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잡는다. 이후,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라는 행사를 진행한다. 독일군이 방심하고 있던 소련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해 들어온 1941년 6월 22일부터 소련군이 프루트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진격해 나간 1944년 4월 8일까지 소련군과 시민들은 소련 땅에서 독일군 주력부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3년에 달했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이었던 것은 사망자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5,000만~7,0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중 소련인 사망자 수가 2,500만~2,700만명으로 추산된다. 대략적으로 말해, 전체 사망자 수의 절반이 소련인이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포위하에 2년 반 동안 봉쇄되었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만 해도 적게는 64만명, 많게는 15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량, 연료, 의료품의 공급이 끊긴 상태로 버텨야만 했으니 아사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또 얼마나 격렬했던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은 소개되지 않은 채 그 처참한 전쟁터 속에서 살았으니, 아이들은 얼어붙어 있는 시체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희생을 감수하고 획득한 승리인 것이다. 소련군 지휘관과 사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극심한 기아를 겪으면서도 버텨 준 레닌그라드 시민들,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목숨 걸고 저항운동을 벌였던 게릴라 대원들, 여성임에도 전쟁터에 자원해서 간호병, 통신병, 심지어 전투원이 된 그녀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소련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오늘날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자국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꼽는다. 그래서 매년 5월 9일이 되면 전 세계의 러시아인들은 광장에 집결하여 대조국 전쟁 (소독전쟁)에서 희생한 자신의 가족, 친지, 그 외의 인물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거리를 행진한다. 서서히 돌아가신 분들의 희생과 대조국 전쟁이 잊혀갈 때쯤 파시즘에 대항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의 넋을 기리는 것이 그들의 몫임을 깨닫고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틀 전, 푸틴 대통령은 5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행사를 치뤘다. 2018년에도, 2024년에도 마찬가지로 푸틴 대통령은 2,000여 명이나 되는 초청 인사들의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행사장에 입장한 뒤 헌법 사본에 오른손을 올리고 취임을 선서했다. 이 헌법 사본에 오른손을 올리는 이유는 과거 노보고르드 공국 시절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중세 노보고르드 공국은 베체(Вече)라는 의회에서 대공을 선출한다. 이렇게 뽑힌 대공은 오른 손으로 공국의 법전 위에 손을 올리고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맹세를 큰 소리로 포고하여 취임식을 치르는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러시아는 전통을 수호하고 이를 계승하는 나라다. 푸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서하며 포고하게 되어 있다. "나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러시아 헌법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국가의 주권과 독립, 안보, 정체성을 보호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Я обязуюсь уважать и защищать права и свободы народа, уважать и защищать Конституцию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осуществлять полномочия Президента для защиты суверенитета, независимости, безопасности и самобытности страны и служить народу.)" 이 포고가 끝나면 헌법재판소장이 연단 위로 올라와 푸틴 대통령의 공식 취임을 선포하게 된다. 과거 노보고르드 공국의 베체 의장이 올라와 대공 취임을 공식 선포한 것처럼 러시아도 그 전통을 계승하여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날은 발레리 조르킨(Валерий Зорькин) 소장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취임을 선포했다. 푸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연설에서 “서방 국가들과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는 "안보와 전략적 안정에 대해 서방 측과 대화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오직 서로의 이익을 존중하는 대등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그와 같은 대등한 조건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라고 했다. 또 특수 군사작전 참가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러시아는 하나로 단결한 위대한 국민이고 모든 장애와 방해들을 극복하며 함께 승리하자고 격려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은 야외 광장으로 나와 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 속에 대통령 근위대의 사열을 받은 이후, 성모 수태고지 성당(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으로 가서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감사 기도에 참석했다. 이 날 대통령 취임식과 동시에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이끄는 기존 정부는 자동 해산되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들은 대행 자격을 받으며 업무를 이어간다. 총리 후보는 전승절이 끝나고 난 10일, 장관 후보들은 13일 의회 인준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며 크게 변수가 없는 한, 현 각료 대부분이 그대로 인준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처럼 분위기가 좋은 러시아와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초상집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내무부는 이달 4일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1978년 1월 25일 크리프이 리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젤렌스키는 러시아 연방 형법 조항에 따라 수배 중(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еленский, родившийся 25 января 1978 года в селе Крыпили, разыскивается по статьям Уголовного кодекс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이라고 올렸다. 이는 우선 형사 사건으로 입건하고 수배 영장을 때리면 우크라이나 헌법 상 임기가 마무리 되는 5월 20일 이후, 체포영장을 발부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뒤이어 포로셴코 전 대통령도 수배자 명단에 올렸지만 아직 체포영장을 발부하지 않았다. 러시아 내무부 측은 우크라이나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입건 혐의나 이유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 이유야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을 꺾고 당선된 젤렌스키의 대통령 공식 임기는 오는 20일에 종료된다. 이는 현 우크라이나의 계엄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계염령은 대통령 선거를 연기한다는 것이지 대통령 임기를 연기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를 겨냥해 '젤렌스키 흔들기'의 일환으로 그를 수배자 명단에 올린 것으로 보고 있지만 나는 러시아가 그를 협상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압박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그를 추포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러시아 인터폴에서 젤렌스키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면 러시아 정보부는 그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체포할 수 있다. 러시아 내무부는 대통령 두 사람 외에도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우크라이나 국방안보회의 서기(사무총장, 장관급)와 알렉산드르 쉴라파크 전 재무장관, 스테판 쿠비바 전 중앙은행 총재를 3일 수배자 명단에 올리면서 젤렌스키 임기 종료와 더불어 공식 체포 영장을 발부할 계획이다. 이제 젤렌스키는 서방을 방문할 때도 본인이 언제, 어디서든 체포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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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0
  •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학살 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 소송 제기와 문제
    지난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학살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치와 파시즘을 지지한 바티칸이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학살에서 어떻게 관여했는지의 내용이 다시 드러났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과 집단 서방이 바티칸을 비호해 이같은 학살 범죄에 대한 카톨릭의 역할을 겨우 무마했지만 코소보 전쟁이 터지면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이 조명을 받게 되자 그로부터 58년 전의 비극까지도 수면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당시 28명의 유족 대표 소송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 유태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등 소수의 생존자들이 존재했고 학살 피해를 입고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로써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나치인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탈취된 금이 바티칸 은행 등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바티칸 은행, 프란치스코 수도회, 스위스 국립은행, 크로아티아 해방운동 등을 상대로 강제로 탈취되거나 유골 사이에서 채집된 금의 반환을 위해 법적 투쟁을 했다. 당시 약 3년 동안 진행 중인 소송에서 변호사들은 재판에 필요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문서들과 CIA, 미군 정보국(DIA), NSA 등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몇 가지의 기밀 문서들을 넘겨 받았으며 바티칸에도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75년 이후에 보관된 문서들을 해제한다는 관례가 있다. 75년 이후라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끝나고 현재 78년이 지났으니 그 관례대로라면 이제라도 공개가 가능하다. 1999년 당시에는 75년 공개 관례를 들어 거절했지만 이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당시 생존자 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유족들도 연로하여 이 문제를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전 1999년 샌프란시스코 재판 때는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조나산 레비 변호사가 재판을 위해 정확한 바티칸 은행의 소유자를 밝히라고 바티칸 당국에 요구했었지만 바티칸 측은 이것마저도 거부했다. 바티칸 측이 본인들이 반 나치, 반 전체주의 활동을 해왔고 학살에는 전혀 없다고 그동안 주장했었는데 정말로 그러한지에 대해 해당 부분들에서 떳떳하다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티칸은 지금도 침묵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면서 공개된 문서들, 미군 정보국과 국무성에서 해제된 문서들은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부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크로아티아에서는 나치 괴뢰 정부인 우스타샤 정부가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우스타샤 정부와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회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건국되면서 6명의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을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권에서 베오그라드 사법재판소에 나치 전범으로 기소했다. 기소 이후 그들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한 바 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수배되었으며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 주교는 ‘세르비아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했다고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현장인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프란치스카 수도회의 소속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당시 생존자와 유족들 원고 측 변호인단이 추적해오던 한 프란시스카 수도회 신부에 관한 문서가 1999년 10월, 미군 정보국에 의해 공개되면서 그동안 CIA나 집단 서방이 억지로 감추려 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판의 생존자 & 유족들 변호를 맡은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크루노슬브 드라가노비츠(Krunoslv Draganowicz) 신부를 바티칸 은행으로 넘어간 금 문제에 관련한 인사로 간주해 그에 관한 문서를 CIA와 미군 정보국에 요구한 적 있다.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전시 하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전범 사제이며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으로 탈출시켰던 Rat Line을 만든 인물이다. 이와 같은 탈출로를 통해 우스타샤 정부의 모든 지도자들이 독일과 달리 전범에서 자유로워졌고 바티칸과 서방 간의 야합으로 인해 우스타샤의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1999년 6월 4일에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수많은 정보국을 위해 일해온 스파이로 밝혀졌다. 특히 CIA와 미군 정보국이 그가 나치 활동의 전력이 있고 세르비아인들을 증오했으며 바티칸 측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가 과격한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인하여 좌익들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스타샤 정부는 1941년 나치 독일이 크로아티아에 세운 괴뢰 정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이끄는 전체주의 정당으로써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카톨릭주의를 골자로 한다. 이들은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 잔혹한 박해로 악명을 떨쳤던 극우 조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우스타샤들은 유럽에서 가장 잘 조직된 극단적인 성향의 테러 집단으로 유명했는데, 1934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었던 장 루이 바르투의 암살은 우스타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41년과 1945년 사이 약 80만의 세르비아인들과 약 6만의 유태인들, 수천 명의 집시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나치 독일의 집행관들이 독가스로 집단 학살하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이들은 주로 칼과 망치 등의 가장 원시적인 무기를 흉기로 사용했다. 우스타샤 정부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카톨릭 왕국 크로아티아라는 기치를 걸고 3분의 1 학살, 3분의 1 추방, 3분의 1 개종이라는 극단적으로 잔악한 정책을 실행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공개적으로 시행하는 법을 제정했고 다른 민족들의 학교와 교회를 강제로 폐쇄했으며 유태인들은 다윗의 별표시를 한 완장을 칙용하여 구분하고,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 표시인 ‘P’가 적힌 완장을 채워 구분했으며, 집시들은 노란 완장을 강제로 두르게 하여 인권 말살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우스타샤 정부가 바티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우스타샤 정부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벨리치와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의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1941년 5월에 우스타샤 정권이 들어서자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에게 축전을 보내고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와의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길에 교황이었던 비오 12세와 개인적인 만남까지 주선했다.당시 크로아티아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국의 크로아티아 신부들에게 목회 서신을 돌려 새로 탄생한 우스타샤 국가를 지지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도 우스타샤 정부의 종교 개종위원회 수장으로 활동하면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독일 전범들 대부분이 뉘른베르크 법정에 서서 실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스타샤 정권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미국과 집단서방의 묵인 하에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가 아무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들,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한 이후 피해자들에게서 갈취한 금과 귀중품을 갖고 탈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바티칸은 독일과 크로아티아에서 온 나치 전범들을 바티칸의 성과 수도원 등지에 숨겨 보호해줬다.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당시 나치 전범들이 바티칸 은행을 통해 아르헨티나 등 각 카톨릭 국가들로 송금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우스타샤 정권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블리치는 1945∼1947년까지 바티칸으로부터 국가 지도자의 대우를 받으며 바티칸 성에 머물다가 이후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페론주의로 유명한 후안 페론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다. 수십 만을 학살했던 학살 수용소들의 책임을 맡았던 아르투코비츠(Artukowitz) 신부는 30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 사망했으며 루브릭 신부의 경우, 스페인에서 호화 별장들을 구입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사업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크로아티아의 나치 정권을 지원하고 세르비아 정교도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회부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몇 년간 복역한 이후 바티칸의 구명 운동과 미국 및 집단서방의 협박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뒤 1998년 10월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크로아티아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마지막 절차인 시복식이 치러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스위스 은행, 스웨덴 은행, 포르투갈 은행 등은 당시 피해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문서를 공개하고 보관된 금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독일 정부도 희생자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배상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바티칸 당국은 오히려 독립 국가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국 정부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재판을 중단시키라고 압박했다. 이 같은 내용은 한국에서도 2000년 한겨레 21 하영식 기자의 <기관총을 든 신부님>을 통한 폭로로 인해 밝혀졌는데 유족 측 변호사인 조나산 레비는 하영식 기자에게 “교황의 변호사들이 모두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반대하는데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태인들과 정교도들에게 어떻게 사과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 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검색을 해도 찾기가 힘들다. 아마 이 또한 미국이나 집단 서방, 바티칸 측이 찾지도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75년 비공개 보관 관례 룰로 묶여 있는 숨은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이다. 바티칸이 당시의 악행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반성하며 이 문건들을 공개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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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 아프가니스탄 전통의 악습인 남색 바차바지(Bacha bāzī)
    2002년도 더 타임스와 2010년에 제작된 영국 타큐멘터리 영화 The Dancing Boys of Afghanistan에서 바차바지(Bacha bāzī)의 악명을 고발하면서 이 기가 막힌 풍습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전통 악습인 이 바차바지는 현재, 평범한 동성애가 아니라 명백한 소년 성착취라 볼 수 있다. 이 악습인 바차바지(Bacha bāzī)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까지 오게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성 무희들이 여성과 같이 화장을 하고 춤추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런 아름다운 남성을 선택해 동성애를 즐기는 환락의 풍속도 존재했다. 특히 테베에서는 동성애자들의 군대인 "신성군단"이 존재했다. 시민 계급인 성인 남성과 곧 시민이 될 청소년이 동성애를 하는 문화가 광범위하게 있었고 이들은 현대적인 동성애자와 달리 연인 관계인 동시에 성인 남성이 스승의 역할을 맡아 곧 시민이 될 소년에게 시민으로서 사회적 교양을 가르쳐주는 스승과 제자 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에 의해 그리스가 정복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을 하게 되면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일대도 석권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각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지배자로 하여 거주케하였다. 그로 인해 건국된 국가가 바로 박트리아 왕국이었다. 박트리아 왕국으로 인해 그리스 문화가 중앙아시아 대부분 지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 박트리아와 서역 월지의 후예들이 혼혈한 종족들이 흉노의 침공으로 월지가 멸망하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아프가니스탄 전 지역에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었는데 이 때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도 함께 전파되었던 것이다. 남성 무희가 여성처럼 화장을 하고 여성복장을 하고 춤을 추게 된 문화인 바차바지(Bacha bāzī)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바차바지는 페르시아어로 '소년(bachen)' '놀이(bazi)'라는 어휘의 합성으로, 노는 소년이라는 뜻으로, 주로 공연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청소년 무용수들을 뜻하고 있다. 주로 9~15살 사이의 가난한 집 아이들을 모집해서 댄서로 키워주는 것이 일반적이며, 여장을 하여 공연을 시킨다. 이슬람의 종교법으로 인해 여자가수들을 데려다 공연시키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 대용품으로 투입시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들 청소년 무용수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의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해 성매매나 성착취, 납치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고, 폭행이나 강간 사건을 당해도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더불어 이슬람 원리주의로 인해 동성애가 멸시되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들을 상대로 성관게를 가지거나 연애를 하는 것은 서로 모른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남색, 전통적으로 이를 향유하는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지역의 토호나 유력 군벌들이었고 이슬람 모스크의 이맘들도 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프가니스탄의 게이들은 명예살인을 당하거나 테러, 징역형과 같은 법적인 처벌을 당하기 십상인데다 설사 처벌에서 면죄된다 해도 주변 시민들에게 살인위협을 받거나 폭력에 노출되고, 더불어 집단 따돌림도 함께 동반할 수 있기에 서로 모른척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력자나 부유한 자들은 뇌물로 법망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아프가니스탄의 동성애자들은 권력자와 부자들이 동성을 취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데 자신들은 돈과 권력이 없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기에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착취 관습에 대해 근절하려고 오랜 기간 동안 노력해온 바 있다. 아프가니스탄 칸국, 시르 알리 칸 시절인 1872년부터 1873년까지 일시적으로 금지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되었으며 이 때문에 보호국이었던 영국인들이 바차바지 풍습에 대해 기록을 남겨 화재가 되기도 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에 바차바지들을 성매매하는 풍습이 다시 재확산되자 미국 측에서도 이를 근절하려 했지만 현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인해 없애는데 실패했다. 이와 같은 바차바지로 일하는 청소년들은 나이가 들면 인기를 잃기도 하였고 그에 따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바차바지 중개업자를 일하면서 다른 바차바지들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대를 물려 악습을 이어주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리고 남자와의 성매매로 생활을 연명하는 경우도 빈번하고, 트랜스젠더와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더라도 바차바자로 일하는것 자체가 남자에게 몸을 판다며 멸시당하는 일이고,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워 이중적인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 탈레반의 주요 개혁 과제 중 하나가 바차바지의 타파였다. 탈레반의 정당성은 샤리아 율법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바차바지는 샤리아가 금지하는 동성애와 사치, 향락 모두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탈레반이 상대한 무자헤딘들 가운데도 바차바치를 사들여 향락을 즐기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도 사실인지라 악습을 타파하는 것이 지지층 확보를 위한 정책으로 비교적 잘 이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탈레반의 집권 시기 바차바지는 양귀비와 같은 마약의 재배와 함께 엄격하게 금지되는 범죄였으며, 이와 같은 행위들이 발각되면 당사자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물론, 이들이 혐오한 것은 아동 성범죄자가 아니라 동성 간 성행위였고, 그 때문에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성착취 피해자인 아이만 처형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에서 바차바지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탈레반이 축출되고 나서 나타난 보상심리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역 사회 곳곳에서 재유행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말단 군경들 사이에서도 권위와 남성의 상징이으로 자리 잡아 즐기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이러한 악습이 아프가니스탄의 대중들 사이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누구 하나 이 풍속을 즐긴 것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2017년에 법률이 개정되어, 바차바지는 엄연한 성폭력 범죄로 규정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지만,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영상들을 보면 바차바지들이 여전히 밤 무대 일에 종사하며 돈벌이를 하는 모습을 여전히 볼 수 있다. 그렇지만 2021년에 탈레반이 재집권하면서 그 이후 이러한 악습이 근절될 일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공화국 시기에 구축해 놓은 인프라들을 탈레반들이 모두 원상태로 돌린데다가, 식량 난으로 인해 국가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장기 매매와 신생아 거래 등의 비극도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고작 매춘이 사라질리가 만무하고 바차바지도 근절될리도 없을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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