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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지아가 주목한 트란스니스트리아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정식 국명으로 '트란스니스트리아 몰도바 공화국'이다. 이 뜻은 드네스트르 강 건너의 땅이라는 뜻을 갖고 있으며 트란스니스트리아(Transnistria)로 불린다. 이 국가는 동유럽에 있는 미승인국으로 1991년부터 사실상 독립 상태에 있으며 독립국가임을 자칭하고 있다. 2022년 2월 2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특수군사작전을 감행하면서 몰도바 역시 국내 사정이 우크라이나와 비슷하기 때문에 크게 두려움을 느끼고 있는 상황에 있다. 특히 러시아를 지원하고 있는 벨라루스의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대통령이 안보 회의 중 몰도바를 침공하려는 계획이 담긴 듯한 지도를 공개하여 논란이 커졌다. 따라서 몰도바의 대통령 마이아 산두는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시키자는 주장까지 나오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위기를 겪게 된다.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사실상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같은 민족이었고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19세기 초반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속국이었던 몰다비아 공국의 동쪽 절반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으로 할양되면서 서로 다른 나라가 된 것으로 보인다.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해야 한다는 주장은 현재도 존재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반발하여 위기감이 고조된 것이 우크라이나와의 국경 근처인 드네스트르 강 동쪽에 사는 러시아-슬라브계 주민들이었다. 특히 몰도바인들도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에 사는 사람은 러시아어만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에 동참했다. 2021년의 대선에서는 현 대통령인 바딤 크라스노셀스키(Вадим Красносельский)와 다른 무소속 후보인 세르게이 핀자르(Сергей Пынзарь) 후보 단 두 후보만 나섰다. 지난 총선과 마찬가지로 35.3%의 낮은 투표율이 나왔으나 25%는 넘기면서 유효한 대선으로 인정이 되었다. 현 대통령인 크라스노셀스키 대통령이 75%이상의 득표율을 획득하며 2선에 성공하게 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세가 불안정한 국가인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 서방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립을 지키려는 입장을 표명하는데 반해 국방부는 러시아에 대해 과도한 의존도를 보이고 있다. 2022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작전이 러시아의 계획과 달리 고전을 면치 못하게 되자 러시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 국방부로 하여금 가짜 깃발 작전을 벌여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을 동원하기도 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에는 약 1,500명의 러시아군이 주둔하고 있다. 그런데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의회는 지난 28일 특별회의를 열고 22만 명의 러시아 시민이 거주하고 있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몰도바의 점증하는 압력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러시아와 합병에 나서달라고 요청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지난 1월 몰도바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과의 거래에 관세를 도입하며 경제적 압박을 가했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고 있는 도중에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국경을 봉쇄했다.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를 거쳐 이 지역으로 가는 송유관도 막았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드나들 수 있는 유일한 통로는 사실상 몰도바 뿐이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가 교역품에 과세하면 트란스니스트리아 GDP의 10%에 이르는 비용이 더 생긴다며 반발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러시아와 합병론이 부상하자 가장 긴장하는 나라가 있다. 바로 조지아다. 조지아는 압하지야 자치공화국과 남오세티아 자치공화국이 러시아와 마주하고 있다. 이들 국가들 또한 러시아계 주민이 80% 이상 되는 미승인 자치공화국이며 러시아와 이미 두 차례 남오세티아 전쟁을 벌인 바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주민들의 요청을 받아들여 러시아와 합병하게 된다면 그 영향은 압하지야와 남오세이타에 미칠 것이며이 자치공화국들 또한 러시아와 합병론을 주장하게 될 것은 불문가지이다. 조지아는 압하지야와 남오세티아에 대한 영유권과 영토주권을 주장하고 있지만 돈바스처럼 러시아에 합병되기라도 한다면 조지아의 영토는 줄어드는 것은 물론이고 터키와 러시아의 압박을 받아 국가가 소멸될 위기에 놓이기 때문이다. 최근 조지아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예의주시하며 보고 있다. 그만큼 국가의 생존이 걸린 문제니 더욱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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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가 분리된 이유 (下편)
    코소보 전쟁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정권이 실각하면서 주카노비치는 세르비아와의 분리독립을 추구하기 시작한다. 가장 먼저 세르비아 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독일 마르크화를 사용하기 시작한 주카노비치는 이 때부터 집단 서방의 지지를 적극적으로 이끌어 낸다. 독일의 헬무트 콜 총리가 아주 가까운 사이가 된 주카노비치는 독일에게 내주면 안 될 것을 내주게 된다. 이는 몬테네그로의 확실한 수입원인 관광 산업이었다.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와 같은 아드리아 해안가의 도시들은 예로부터 휴양도시로 유명했다. 실제로 사회주의 시기부터 여름 휴양지로 유명했었는데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이었던 요시프 티토의 휴양지도 몬테네그로에 존재했을 정도였다. 워낙 몬테네그로의 경제력이 처참했던 탓에 독일의 지원금을 받지 않으면 국가 경제를 유지하기 힘들었다. 그렇다고 베오그라드 연방 정부에 새로운 지원금을 기대하기 어려운 상태였기에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두 개의 연방으로 분리되어 있었던 몬테네그로는 경제적인 독립화를 선언했다. 이 때 독일과 프랑스의 수많은 투자자들이 몬테네그로에 유입되었고 두 국가의 검은 돈, 탈세의 창구로 이용되기 시작한다. 현재 유럽에서 몰타와 키프로스가 갖고 있었던 탈세 창구의 위치를 90년에서 2000년대 후반까지 몬테네그로가 갖고 있었던 셈이다. 연방 내 경제적 독립에 성공한 주카노비치는 이내 정치적으로 완전한 독립을 계획하게 된다. 특히 독일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몬테네그로 사회민주당(Социјалдемократска партија Црне Горе)은 주카노비치가 당수로 활동하면서 해안가 4개 도시인 헤르체그 노비, 코토르, 티바트, 부드바의 개혁파들을 중심으로 독일의 막대한 자금을 지원받으며 몬테네그로 정국을 주도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의 새로운 대통령이 된 보이슬라브 코슈투니차(Војислав Коштуница)는 연방 유지를 강력하게 주장하며 몬테네그로의 정치적 독립을 반대했다. 그러나 독일과 집단 서방, 미국은 주카노비치와 몬테네그로 사민당을 적극 지지하며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로 구성된 신(新) 유고슬라비아 연방에 대해 적극적으로 분할하기에 나선다. 한편 신 유고 연방은 밀로셰비치가 물러나게 되면서 몬테네그로 독립에 대해 세르비아 사회는 오히려 반대하는 모양새에 들어갔고, 잘못하면 몬테네그로 국민들의 지지를 잃을 수도 있는 상황에 몰리자 사민당은 독일 및, 미국과의 협정을 통해 독립을 잠시 유보하고 세르비아 공화국과 타협해 세르비아와 국가 연합을 구성한다는 것을 골자로 한 베오그라드 협정을 체결하게 된다. 이에 따라 2003년에 유고슬라비아는 헌법을 개정하였고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국가 연합'으로 국호를 바꾸게 된다. 당시 부총리에 재직했던 자르코 라크체비치(Жарко Ракчевић)는 세르비아와 연합을 반대했던 인물이지만 베오그라드 협정이 체결되자 스스로 부총리 직위를 사임했다. 그러나 그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의 외교적 노선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세르비아는 친러 성향으로 친러를 고수하고 몬테네그로는 친서방주의를 고수했다. 게다가 지속적으로 독일의 지원을 받은 몬테네그로는 코소보 전쟁에서 파괴된 세르비아보다 경제력에서 훨씬 우월한 상태였고 세르비아는 전후복구를 몬테네그로가 받은 서방의 자금으로 했기 때문에 몬테네그로 내 국민들의 불만을 폭발하기 직전까지 몰린다. 이러한 상황에서 몬테네그로 내 정정마저 불안해지기 시작한다. 그러면서 몬테네그로는 독일 및집단 서방과의 협상을 통해 2006년과 2009년 두 차례에 걸쳐 독립에 대한 국민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를 결정하게 된다. 대신 집단 서방은 주카노비치에게 최소 찬성의 55%는 넘겨야 한다는 조건을 걸었고 마침내 2006년 5월 21일에 헌법에 따라 몬테네그로에서는 독립 여부를 묻는 국민투표가 시행되었다. 이 투표에서 몬테네그로는 55.5%의 찬성을 얻었고 결국 미국과 집단 서방이 이를 승인함으로써 마침내 몬테네그로는 세르비아와 완전히 독립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세르비아 몬테네그로의 헌법은 무효화 되었으며 새로운 헌법이 제정되었고 주카노비치의 총리 지위는 계속 유지되었다. 이에 대해 세르비아 내에서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약속한 대로 세르비아에서도 몬테네그로의 독립을 받아들이고, 더불어 자치공화국으로서의 헌법을 독립국 헌법으로 개정하여 세르비아 몬테네그로는 완전히 해체되었다. 이로써 유고슬라비아는 역사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게 되었다. 신(新) 유고슬라비아가 해체 된 것은 사실상 그 배경에는 집단 서방이 있었고 독일이 그 배후에 있었다. 게다가 신 유고 연방 내 악화된 경제 상황은 두 나라의 분리로 이어졌다. 주카노비치는 헬무트 콜-게르하르트 슈뢰더-앙겔라 메르켈로 이어지는 독일 정계와 친분을 유지했고 몬테네그로 독립에 최종적으로 싸인한 인물 또한 당시 신임 총리였던 메르켈이었다. 결국 유고슬라비아를 분할해서 쪼개는데 성공한 집단 서방은 2008년 코소보도 분할하는데 성공하여 세르비아는 국가 생존마저 위험해지는 상황까지 맞이한다. 그러나 세르비아의 배경에는 여전히 러시아가 있었고 러시아와 푸틴 대통령이 아니었으면 세르비아는 진작에서 멸망하고 남았을 국가였다.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는 상호 간에 주권국가로 갈라서게 되었지만 그 외에 모든 부분은 상호 협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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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20
  • 독일의 재무장, 독배가 될 수 있는 이유
    유럽 최대 경제 강국인 독일의 재무장이 최근 화두로 떠오르고 있다. 현재 독일 총리가 독일의 재무장을 선언했으며, 독일의 국방비 지출이 올해 국내총생산(GDP)의 2%를 달성할 수 있고, 향후 3.5% 정도까지도 늘릴 수 있다고 말했다. 이것은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에 대응한다는 표면적인 이유도 있지만, 다른 유럽국들은 내심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독일이 재통일할 때, 러시아(그 당시에 구소련연방)는 독일의 육해공군을 합쳐서 37만 병력으로 제한하고, 핵무기의 보유 및 배치를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독일의 재통일을 승인했다. 당시에 동서독을 합치면 90만 병력이 있었는데, 이것은 러시아의 입장에서 분명히 제한할 필요가 있었다. 또 나치 정권이 핵무기를 개발하려는 의도가 있었기 때문에, 러시아로서는 이를 금지할 필요도 분명히 있었다. 러시아의 이러한 조건은 한편으로 독일의 재무장을 금지함으로써, 러시아의 서쪽 지역에 대한 방어를 실질적으로 보장하고, 동유럽 지역을 완충지대로 활용하려는 것이었다. 다른 한편으로 거기에는 독일의 통일시 구동독지역에 미군의 배치로 인해 나토가 동진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도 포함되어 있다. 나치 독일의 러시아 침공으로 엄청난 피해를 보았던 러시아는 확실한 안전장치가 요구되었다. 이후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전까지만 해도 독일의 재무장 금지선 준수는 독일이 러시아와 좋은 관계를 긴밀하게 함으로써, 전반적으로 정치적 이득을 가져다주었다. 그것은 독일이 전범국의 이미지를 벗어나서 유럽의 지도국으로서 위상을 높였음을 뜻한다. 독일은 오스트리아뿐만 아니라 이탈리아 북부지역, 크로아티아 북부지역, 폴란드 서부지역, 체코의 일부, 그리고 루마니아 일부 지역 등등에도 영향력이 있다. 이것은 독일이 언제든지 민족주의에 대한 향수를 자극해 유럽 전체를 위협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될 수도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독일의 재무장은 특히 러시아를 더욱 자극해서 동유럽에서의 충돌 가능성도 배제될 수 없다. 역사적으로 보면, 독일은 서로 분열되어 국력이 약해지면, 주변국들의 발호로 독일 영토가 전쟁터로 되어 버렸다. 이와 반대로, 독일이 통일되어 국력이 하나로 되었을 때, 주변국을 침략했지만, 결국 연합세력에 의해 스스로 붕괴했다. 독일의 이러한 모순은 사실 균형의 추를 잘 유지해야만 극복될 수 있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자면, 독일의 재무장은 이른바 세력균형을 깨뜨리는 것이다. 더 나아가 유럽 각국의 치열한 군비경쟁, 극우 민족주의의 득세, 동유럽에서 민족갈등의 재현 등등을 유발할 수 있다. 독일 총리가 재무장을 선언했지만, 실질적 재무장을 위해서는 현재 독일 연방군의 현대화를 위한 장비개선과 병력 충원 및 디지털 사이버 정보전의 취약성을 개선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독일이 경제력으로 얼마든지 이것을 감당하기에는 별문제가 없을 것이다. 문제는 독일 내부의 여론과 합의인데, 이것이 쉽지 않다. 독일이 유럽연합에 가장 많은 부담금을 내면서 이미지 개선을 위해 노력했지만, 여전히 독일의 재무장이라는 금기를 깨는 것에 대해 외부적 시각에서의 우려의 시선이 많다. 독일 총리에 관한 낮은 지지율도 독일의 실질적 재무장을 완료하기까지 이겨내야 할 난관이 많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그런데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과 맞물리면서 정치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미국이 독일의 족쇄를 풀어주는 대가로 독일에게 유럽의 방위를 실질적으로 맡기고자 할 것이기 때문에, 독일은 미국에게 재무장을 받아내려고 하는 것이기도 하다. 문제는 독일의 재무장이 어느 정도까지인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는 점이다. 특히 독일의 재무장은 핵무기와 관련해서 자칫 러시아를 자극할 가능성이 높다. 현재 미국은 북대서양 조약기구를 통해 전술핵을 핵무기 공유 프로그램을 통해 독일, 네덜란드, 벨기에, 이탈리아, 그리고 튀르키예에 배치하고 있다. 이 프로그램은 핵무기를 갖고 있지 않은 국가들에 미국이 핵무기를 배치해서 그 통제권을 갖는 것이다. 그런데 만일 미국이 대선에서 정권이 바뀌면, 이 프로그램을 지속시킬 것인지 아니면 폐기될 것인지가 논란이 될 것이다. 독일이 재무장을 할 경우에도 핵무장이 포함될 가능성은 아마도 낮을 것이다. 그 때문에 독일은 이 문제에 관한 한 프랑스에 협조를 구할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이를 받아들일 것인지는 불확실하다. 왜냐하면 프랑스가 독일의 재무장을 원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독일이 원하는 방식을 프랑스가 수용하기 위해서는 독일이 많은 양보를 해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브렉시트 이후로 유럽에서 유일하게 핵무기를 보유한 프랑스가 차후 이 문제에 관한 한 어떤 태도를 취할지도 이슈가 될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은 이후에 어떻게 전개될 것인가? 오히려 그렇게 함으로써 러시아를 자극해서 오히려 유럽의 안보 전체가 위험하게 될 수 있다. 이것은 바로 역설이다. 독일이 러시아의 위협을 명분으로 재무장을 할 경우에, 물론 러시아의 위협에 맞설 국가가 독일 외에 없을 것이겠지만, 오히려 러시아와 협상을 하는 국가들도 출현하게 될 것이다. 특히 동유럽은 그렇게 될 가능성이 높을 것이다. 유럽이 그동안에 보여주었던 평화를 유지하면서 전쟁의 위협을 줄이고, 국제분쟁에서 중재의 역할을 할 수 있었던 것은 독일이든 프랑스든 러시아를 적절하게 이용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되지 않는다면, 유럽은 현실적 문제에 관한 해결책을 스스로 걷어 차버리는 것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독일의 재무장 문제는 단지 최근의 일만은 아니었다. 독일은 지속적으로 이 문제를 거론해 왔다. 거기에는 독일도 이제 전범국이라는 오명을 걷어내고, 유럽의 평화에 앞장설 수 있는 자격이 있다는 뜻이 포함되어 있다. 더 나아가 독일이 충분히 피해국들에게 할 만큼 했으니 이제 새로운 역할을 수행할 준비가 되어있다는 것을 뜻한다. 사실 독일의 재무장은 미국이 유럽보다 아시아-태평양 지역에서 대중국 포위망을 실행하는 데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미국이 유럽에서 일정 정도 거리를 두는 것이긴 하지만, 문제는 유럽이 스스로 복잡한 역학관계에 노출이 되어있는 유럽의 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지는 의문이 여전히 존재한다. 지상군에 취약한 유럽이 미국의 도움 없이 독자적으로 유럽을 이끌기에는 충분하지 않다. 사실 그러기 위해서는 유럽연합 회원국들이 단일대오로 나아가야 하겠지만, 서로의 경제적 편차가 너무 크고, 군비에서 방위분담금의 목표치를 얼마나 도달할 수 있는지도 문제다.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독일의 재무장을 촉진하고, 더 나아가 유럽연합 회원국들의 군비경쟁을 강화하는 방식은 그 누구에게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 이러한 방식은 유럽 전체를 파국으로 몰고 갈 수 있으며, 이것은 유럽이 더 이상 회복 불가능한 상태로 빠져들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더 나아가 그렇게 되면 유럽연합이 흔들리게 되는 것은 불을 보듯 너무나 뻔하다. 유럽은 이제라도 미국과 러시아의 대리전 성격을 띠는 전쟁을 속히 종식 시키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이를 위해 독일의 재무장보다는 오히려 출구전략이 필요하다. 독일의 재무장은 동전의 양면과 같다. 독일의 재무장이 러시아의 위협에 근거한 것이니까 이를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실로 그럴듯한 명분일 수 있다. 이 속에는 다른 의도도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는 합리적 의심을 거두어서는 안 된다. 또 현실적으로 그와 같은 합리적 의심은 무엇보다도 피해국의 입장에서 고려해 보아야 한다. 그것이 해소되기 전까지는 독일의 재무장 선언은 정치적일 수도 있음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독일의 재무장 카드는 다른 한편으로 유럽 전체와의 관계설정에서도 고려되어야 한다. 거기에는 분명히 유럽이 독자적인 목소리와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서 중재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즉 이것은 독일의 재무장이 승인되더라도 독일이 독자적인 군사행동을 금지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물론 세부적 사항은 이 경우에도 논의과정이 투명해야 한다. 그러나 이렇게 되면 북대서양조약기구의 위상도 바꾸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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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9
  • 특색있는 루마니아 사람들과 문화
    루마니아 인종들은 민족성 자체가 밝다. 그리고 매우 긍정적이고 성격은 다혈질이며 루마니아 인들은 전반적으로 노는 것을 무척 좋아한다. 그래서 루마니아의 어디를 가든 가무를 즐기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는 음주가무의 천국인데 전통적인 결혼식에서그 진면목을 볼 수 있다. 루마니아의 전통은 가수나 악단을 불러 밤새도록 춤추고 먹고 마시는 것이 보통이며, 크리스마스 같은 특별한 날에는 악단이 집집마다 연주하며 다니고 있다. 기본적으로 음악이 나오면 언제 어디서든지 춤을 출 수 있는 준비가 되어 있는 것도 루마니아 특유의 국민성이다. 어찌나 춤을 많이 추는지 장거리 고속버스 안에서도 관광버스처럼 춤추고 노는 것도 일상인 사람들이다. 루마니아는 국민 종교인 정교에 대한 종교심은 깊은 편이지만 러시아 정교회와는 달리 아주 세속적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체적으로 서유럽이나 북미의 보수적인 기독교인들이 술과 할로윈 파티 귀신분장을 좋지 않게 생각하는 경우가 제법 많은 것에 비하면 정반대 현상인 것이다. 당장 국민 1인당 술 소비량 부터가 세계에서 최상위권에 들어가며, 마녀가 직업으로도 인정된다. 우선 드라큘라부터가 사실상 루마니아를 대표하는 국민 귀신이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보는 것이 아닌 오히려 긍정적으로 보고 있다. 루마니아는 유럽에서 컬러 TV의 도입이 가장 늦었던 나라이기도 하다. 루마니아의 국영방송안 텔레비지우네아 로므나(Televiziunea Română)의 TV방송 시작은 1956년에 했다. 이는 동유럽에서 TV 송출이 가장 빠른 편에 속한다. 그러나 컬러 방송은 북한보다도 10년이나 늦은 1983년부터 송출되었다. 그마저도 컬러 방송이 완전히 정착한 것은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부터이다. 1990년도 이후에서야 컬러 방송이 가능했다는 것인데 그 이전에는 모두 흑백방송으로 채워진다. 1989년 루마니아 혁명 당시의 컬러 중계는 모두 외국이나 서유럽에서 송출된 것이고 루마니아 국영으로 방송된 것들은 모두 흑백이라 보면 된다. 물론 차우셰스쿠 시대에는 차우셰스쿠에 대한 선전 방송이 위주였고 그나마 1980년대에는 에너지를 절약한다며 방송시간을 평일 2시간, 주말 3시간으로 줄였다. 그리고 TV 채널도 두 개에서 한 개로 줄이면서 사실상의 국민들의 선택권을 박탈했다. 사실 그 이전에는 외국 프로그램도 상당량 수입하였는데 특히 달라스나 디즈니에서 제작한 만화 같은 미국 TV프로그램도 편성했었다고 전해진다. 어쨌든 반소감정이 있고 친중 및 친북을 했던 국가였기에 생각보다 소련의 방송이 많지 않았다고 한다. 당시 루마니아에는 북한의 채널들을 많이 수입했었다고 한다. 필자의 루마니아 지인들의 당시 회상을 듣다보면 북한 김일성의 교시도 그대로 송출이 되어 자신들도 어이없었다는 이야기를 하곤 했다. 그 정도로 차우셰스쿠는 김일성을 좋아하고 그의 정책 모델을 상당수 따온 인물로 유명하다. 그리고 루마니아 TVR이 BBC와 제휴를 맺으면서 TV 프로그램 제작 노하우를 전수받을 정도로 제법 선진적인 방송을 도입했었지만 1980년대 들어서면서 경제 침체가 이어지자 이 방송들조차도 거의 방영이 되지 않는 사례도 허다했다. 당시 경제 사정이 악화일로였던 북한조차도 고난의 행군 시기에는 TV 채널을 줄이지는 않았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 루마니아 국민들은 자국 TV 채널을 버리고 이웃인 유고슬라비아와 불가리아, 그리고 소련, 헝가리의 TV 방송을 몰래 시청했고, 불가리아 TV 편성 정보도 암시장에서 암암리에 돌아다녔다. 그리고 불가리아의 TV 만화와 불가리아 영화도 이 시기 루마니아 아이들에게 선풍적인 인기를 끌기도 했으며 불가리아의 당시 연예인들은 루마니아에서도 제법 인기를 끌었었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가 민주화 된 이후에는 다른 동유럽 국가들과 같이 국영방송을 공영방송으로 전환하고 광고방송도 개시했다. 루마니아는 소련에서도 하던 광고방송을 그동안 하지 않았었는데 유럽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광고, CF 방송을 한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방송시간도 다시 확대했으며, 민영방송을 허용하면서 급격히 상업화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방송에 대해 잘 모르는 인사들이 많아 낙하산 문제라든가 정치 언론의 유착 문제 등이 대두되기도 하였지만 차우셰스쿠 때보다는 매우 재미있어지고 다채로워진 것만큼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루마니아의 방송 환경은 대만과도 비슷한데 시청률 10%를 넘는 채널이 없다는 점이 문제였고 자국의 지상파 채널은 시청률이 더 낮아서 지상파 방송에 대한 존폐성이 부각되었다. 그래서 미국 드라마뿐만 아니라 인도 드라마, 터키 드라마, 텔레노벨라 등 다양한 외국 드라마들이 수입되고 있으며 이 때문에 한국 드라마도 많이 방영되었고 K-POP도 흥행을 타면서 루마니아의 지상파 시청률은 다시 올라가 현재는 시청률이 다른 케이블 방송 못지 않을 정도이다. 또한 루마니아는 동성결혼을 허용하지 않는 나라이다. 헌법상의 결혼 개념을 '배우자 간 결합' 에서 '남성과 여성 간의 결합'으로 바꾸는 것을 놓고 찬반 의견을 묻는 국민투표가 2018년 10월 6일과 7일에 실시되었다. 물론 이와 같은 개헌을 통해 동성 결혼의 허용을 막으려는 조치를 취하고 있는 것이다. 개헌 지지파로는 보수성향의 비정부 기구인 '가족 연대' 와 루마니아 정교회 등이 대표적으로 신부들은 신도들에게 예배 후 투표 참여를 독려할 것으로 예상된다. 루마니아에서 동성결혼은 현재도 불법이다. 하지만 보수 진영은 헌법상 결혼이 '배우자 간 결합'으로 규정되어 있는 것이 동성결혼을 허용하는 빌미가 될 수 있다고 보고 있었기에 이를 방지하려는 측면이 강하다. 따라서 이를 막기 위해 미리 결혼 개념을 '남녀간 결합'으로 못박아 놓는 개헌이 필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투표 결과가 법적 효력을 갖기 위해서는 투표율이 최소 30%를 넘어야 하는데 결국 투표율이 5.72%로 저조해 자연히 무산되었다. 당시 루마니아 인들에게 있어 남녀 간의 결혼이나 결합은 당연한데 굳이 이런 것까지 개헌을 해야 하는지 의문을 가진 사람들이 대다수라 투표율이 턱없이 낮았다고 전해진다. 루마니아의 문화에 의하면 루마니아는 2월, 3월, 7월, 8월, 9월, 10월에는 공휴일이 전혀 없으며 대체휴일제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 2021년과 같이 크리스마스가 토요일이면 12월 1일 국경절 이후 1월 24일 통일의 날까지 평일인 공휴일이 없게 되는데 이는 루마니아 인들은 열심히 직장과 가정에 충실해야 한다는 차원으로 빚어진 차우셰스쿠의 노동 정책의 반영 때문이다. 루마니아 인들의 정서상 일하고 가족에게 충실해야 하다는 것은 당연한 문화라고 보기에 이 공휴일 많지 않은 노동 정책은 폐지하지 않고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다. 현재 동유럽에서 가장 공휴일이 적은 나라가 루마니아이기도 하다. 그러나 거룩하게 쉬어야 하는 일요일은 가족들과 함께 놀이공원을 가는데 소금 광산을 개조한 살리나 투르다(Salina Turda)는 세계에서 가장 깊은 지하 놀이공원으로 무려 지하 120m에 달한다. 매 일요일마다 살리나 투르다 같은 놀이 공원은 수많은 인파로 붐비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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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트란스니스트리아를 바라보는 몰도바의 입장
    몰도바는 트란스니스트리아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있다. 다만 두 나라 간의 드니스트르 강을 중심으로 상호교류는 매우 활발하다. 2017년 1월 4일에는 트란스니스트리아 제2의 도시 벤데르에서 이고르 도돈 몰도바 대통령과 바딤 크라스노셀스키 트란스니스트리아 대통령이 양측 역사상 최초의 정상회담을 가지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자치를 인정하는 모습을 보였다. 그러나 2018년에 벌어진 유엔 총회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파견된 모든 외국군 철수를 요구하는 결의안이 채택되었다. 친 서방 성향의 몰도바 정부가 주도하여 조지아, 발트 3국, 우크라이나, 캐나다 등이 함께 마련한 결의 안에 대해 찬반 표결을 벌였고 투표에 참여한 162개국 가운데 64개국이 찬성표, 15개국이 반대표를 던졌으며 83개국은 기권함으로써 결의안이 통과되었다. 대부분의 서방 국가들은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졌다. 반대표를 던진 나라는 러시아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옛 소련 국가인 벨라루스와 아르메니아 등이고 러시아에 우호적인 이란, 시리아, 베네수엘라, 쿠바 등이었다. 이에 러시아 외무부는 트란스니스트리아로부터 러시아 평화유지군을 철수하도록 규정한 유엔 총회 결의는 이 지역 분쟁 해결에 대해 훼손할 우려가 있다면서 몰도바가 제안한 결의 안은 아주 증오스럽고 위험한 것이라고 비판했다. 이어 몰도바 지도부에서도 유엔 총회 결의에 대해 통일된 견해가 없다면서 러시아는 이 결의를 반러 정서에 기대하여 다가오는 총선을 앞두고 표심을 얻으려는 몰도바 내 특정 정치 세력의 명백한 선동주의적 행보로 간주한다고 지적하면서 그들의 배경에는 미국과 서방 국가들이 있다며 미국과 서구권도 한데 몰아 비난했다. 친러시아 성향의 이고르 도돈 몰도바 대통령은 자신의 페이스북 계정에 올린 글에서 몰도바 총리 측이 유엔 표결을 주도했다. 그러면서 다른 반러 행보를 취했다면서 집권 연정은 총선을 몇 개월 앞두고 흔들린 국내 정치적 입지를 회복하기 위해 국제무대를 활용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2016년 11월 결선 투표 끝에 대통령에 선출된 친러시아주의자 도돈은 친서방 정책을 추진하는 파벨 필립 총리 내각과 줄곧 갈등을 빚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파벨 필립 총리의 음모라고 비난했다. 총리가 이와 같은 독단적인 행위가 가능한 것은 내각책임제를 통치 체제의 근간으로 채택하고 있어 실질적으로 총리가 운영하고 대통령은 제한적 권한만 행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몰도바는 우크라이나, 조지아 등과 함께 지난 2014년 6월, 파벨 필립 총리 정권이 EU와 FTA를 포함한 포괄적 협력 협정을 체결하고 유럽화 노선을 걷고 있는 상황이었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주권을 인정하는 국가는 2008년 조지아로부터 분리 및 독립을 선포한 남오세티야와 압하지야 두 나라밖에 없으며 이 두 나라의 독립도 러시아와 일부 국가를 제외하고는 국제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러시아는 1992년 몰도바와 맺은 협정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에 평화유지군 명목으로 수천 명의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다. 이 고작 수 천명의 군대가 몰도바와 유럽에서는 위협이 된다고 철수를 촉구하는 것이다. 한편 트란스니스트리아 독립 정부도 러시아군 철수에 반대 입장을 밝히면서 서구와 몰도바 총리 정부의 결정에 대한 거부 의사를 명백히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친서방 몰도바 총리 정부가 유엔 총회에서의 결의를 근거로 러시아군 철수 조치를 강행시키려 할 경우 트란스니스트리아 내 러시아인들이 반발하면서 2014년 우크라이나에 속했던 크림반도가 러시아에 병합된 것과 유사한 '제2의 크림사태'가 벌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되었다. 결국은 이와 같은 결정이 취소되었지만 몰도바-트란스니스트리아 사태는 우크라이나-돈바스 사태 못지 않은 또 다른 동유럽의 새로운 화약고로 떠오르기 시작했다. 2018년 9월 1일 중립 지역에 대한 차량 번호판이 도입이 러시아의 주도로 유엔에서 주최되어 가결되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국제적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 번호판을 달고 있는 차량은 몰도바를 포함한 다른 국가로 이동할 수 없었다. 그래서 2015년 몰도바의 차량 번호판 체계를 따르면서 글꼴이 다르고 몰도바 국가 표식이 없는 대신 "MD" 스티커로 몰도바 차량임을 표시하는 새로운 번호판이 도입되었다. 해당 번호판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외부에서는 몰도바의 차량으로 취급받으며, 2021년 9월부터 우크라이나에서 중립 번호판을 장착하지 않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차량의 입국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트란스니스트리아 입장에서는 몰도바의 MD스티커를 부착하는 것에 대한 거부감으로 인해 중립 번호판을 장착하지 않았지만 러시아가 트란스니스트리아 정부를 달래면서 러시아와 연결될 수 있는 조치였음을 상기시켜 준 것으로 보인다. 2020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돈 대통령이 재선에 실패하고 친서방 성향의 마이아 산두가 당선되면서 갈등이 더욱 심해지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산두 대통령은 당선 직후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하고 있는 러시아 평화유지군의 철수를 강력하게 요구하기도 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몰도바와 다른 나라임을 천명하고 있지만 그와는 별개로 몰도바에서 선거가 치러질 때마다 일부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이 투표에 참여하는 광경이 벌어지곤 한다. 몰도바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자국 영토로 간주하고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현상인데, 해당 지역 주민들이 자국 투표에 참여하는 것을 막는다는 것 자체가 그들의 독립을 인정한다는 것이 되기 때문에 막지 않고 있다. 다만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은 친서방 몰도바 인사가 아닌 친러 몰도바를 인사를 찍으며 자신들의 현 상황을 우선 유지시키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는 입장이다. 그래서 친러 성향의 몰도바 후보자들은 트란스니스트리아에 방문해 유세하는 모습도 목격되고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미승인국이면서 내륙국이기 때문에 소련 해체 이후 심각한 경제난에 시달리는 지역이기도 하다. 몰도바의 1인당 GDP가 유럽 최하로 나오는 것에는 여러가지 이유가 있지만, 그 중 하나가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열악한 경제 사정 때문인 것도 있다. 소련시절에는 발전된 공업 지대였지만 분리독립 선언 이후로 내륙국인데다가 미승인국이라는 불리함까지 겹쳐서 낙후되어 버린 것이다. 러시아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에 경제적인 지원을 보내주고는 있지만 미승인국이라 대규모 지원을 보내주기에도 외교적으로 어려운 부분도 있다. 게다가 러시아 본토로부터도 멀리 떨어져 있으며 공장을 건설한다 해도 수출을 하거나 러시아로 물자를 공급하려면 반드시 우크라이나를 거쳐야 되다 보니 그 효과는 떨어질 수 밖에 없다. 트란스니스트리아 주민들의 사실상 주 소득원은 러시아 등으로 가서 외국인 노동자로 일하고 러시아 루블을 자국에 송금하는 것이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기 때문에 전적으로 외화벌이가 국가의 주 수입원 중 하나로 자리잡고 있다. 그리고 2022년 몰도바가 EU 가입을 선언하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독립을 선언했다. 독립 선언은 이미 소련과 분리된 이후에 했지만, 2022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해 특수 군사작전을 진행하고 있는 도중에 벌어진 사건이고 러시아의 위협이 가속화 된다 생각한 몰도바에서 EU 가입을 요청한 것이다. 이에 따라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에 적극 협력하겠다 밝혔고 자국에 러시아군 1,500명이 주둔한 상태라 이들이 이번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의 변수가 되어가고 있다. 게다가 몰도바의 군대는 예비군까지 합쳐 8만 명도 되지 않아 러시아군 1,500명의 숫자가 매우 위협적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이 장기화되자, 우크라이나 측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로 가는 물류를 끊어 버리게 되면서 트란스니스트리아는 고립되었다. 그래서 몰도바에게 인도적인 물자 원조를 해달라고 요청하는 상황까지 왔다. 러시아도 오데사와 미콜라이프도 아직 완전히 점령하지 못한 상황이라, 몰도바는 이와 때를 같이하여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완전히 멸망 혹은 굴복시키려 하고 있다. 그러나 이 또한 쉽지 않다. 러시아 군이 수송기로 물자를 실어날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지원하면서 몰도바에 대한 경제 원조를 하지 않게 되었으며 러시아의 수송기가 자주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왕래한다는 것은 우크라이나의 방공망 체계가 붕괴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올해 5월 9일, 러시아 전승기념일에도 트란스니스트리아의 수도 티라스폴에서는 군사 퍼레이드가 개최되어 나치 독일의 축출을 기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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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 스탈린에 의해 강제 이주 됐지만 북한의 국가체계를 세워준 고려인들과 중앙아시아의 유지로 자리 잡은 고려인들
    대조국 전쟁이 끝나자 한반도 북부에 진주한 소련군은 그곳의 조선인들과 함께 새 국가 건설을 위한 준비에 착수했다. 그러나 이곳의 조선인들은 국가 건설은커녕 행정 경험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일제 부역자들에게 의존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소련 정부는 중앙아시아에 정착한 일부 고려인들에게 조선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들은 구역 당ㆍ공산주의청년동맹ㆍ콜호즈(집단농장)ㆍ기업체ㆍ교육기관ㆍ군 등에서 일하며 풍부한 실무 경험을 쌓은 이들이었다. 1945년부터 49년까지 약 500명의 고려인들이 북한으로 파견되었다. 이들은 조선 출신으로 스탈린 체제 하에서 민족적 억압을 받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련 공민이었다. 북한으로 향하는 열차에서 이들은 자신이 ‘파견’된다고 생각했을까, 아니면 ‘귀향’한다고 생각했을까? 북한에 파견된 고려인들은 정치, 경제, 교육, 군사 등 여러 분야에서 활발하게 활동했다. 소련에서 포시에트 구역 공산청년동맹(콤소몰) 비서로 일한 바 있는 허가이는 1946년 조직된 조선공산당 북조선조직위원회의 규약과 조직 체계를 마련하고, 당 중앙위원회 제1 비서와 부위원장에까지 오른 조선로동당의 산파였다. 사마르칸트에서 고중학교 교장을 지낸 기석복은 조선로동당 기관지 로동신문의 주필로 일하며 선전 분야에서 두각을 나타내었다. 마찬가지로 타슈겐트에서 고중학교 교장을 지낸 유성훈은 내각 간부학교 교장과 김일성종합대학 총장을 역임하였다. 옴스크의 고리키사범대학에서 문학을 전공한 조기천은 1947년 서사시 <백두산>을 발표하며 북한을 대표하는 문인이 되었다. 소련 중앙은행 산하 재정대학을 졸업하고 동 은행 포시에트 지부장을 지낸 김찬은 조선중앙은행 총재로 일하면서 1947년 화폐개혁을 주도했다. 로스토프의 운수대학에서 철도운수를 전공한 박의완은 1948년 초대 내각의 교통상이 되었다. 이르쿠츠크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군의관으로 근무한 리동화는 조선인민군 군의국장을 맡아 한국전쟁 시기 야전병원에서 동분서주하였다. 한국전쟁 때 북측 대표로 휴전회담에 참석한 남일 또한 잘 알려진 파북 고려인 중 한 사람이다. 콜호즈에서 다른 고려인 동포들과 함께 1946~1950년 시기에는 1헥타르당 4~5톤에 이르는 쌀을 생산해 내었고, 일부 작업반들은 심지어 8톤까지도 생산하면서 농업적 성과와 김병화의 지도력을 높이 평가한 소련 당국이 1948년에 처음으로 노동영웅 칭호가 수여되었다. 이후 1951년에는 콜호즈 건설과 목화 및 벼 수확고의 성과에 따른 결과로 다시 레닌훈장과 ‘낫과 망치’ 금메달을 받았다. 이곳 콜호즈는 강제이주라는 어려운 환경에 굴하지 않고 시대를 앞서갔던 고려인 동포사회의 희망이셨다. 소련 당시 고려인 중심으로 이루어진 우즈베키스탄 콜호즈(집단농장)은 20개에 달했는데 한결같이 우즈베키스탄인들에게 ‘백만장자’ 콜호즈로 불리우며 부러움 샀다고 한다. 1950년대 초만 해도 우즈베키스탄에는 도시지역에도 전기가 들어오는 지역이 거의 없었지만 고려인들이 운영하는 콜호즈들은 자체 발전소를 만들어 전기를 생산해내어 콜호즈 전체에 가로등까지 설치해서 우즈베키스탄 인들이 단체 견학을 올 정도로 발전되었다. 흐루시초프 소련 서기장이 김병화 선생에게 3번째로 노동영웅을 수여하라고 지시하였다. 하지만 선생은 우즈베키스탄에서 고려인이 3번에 거쳐서 노동영웅을 수여받기보다는 우즈베키스탄사람이 상을 수여 받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밝히며 사양한 적이 있다. 이것은 선생의 겸손과 고려인 동포, 우즈베키스탄인 사이의 화합과 단합을 위하는 마음을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1959년에 당시 베트남 호치민 주석이 소련 방문 시에 우즈베키스탄의 김병화 선생의 콜호즈를 방문하였다. 뿐만 아니라 흐루시초프, 브레즈네프 서기장 등 소련의 정치지도자와 사회주의권의 다른 지도자들도 자주 농장을 방문하여 선생과 고려인 농장원들의 놀라운 성과를 살펴보는 일정을 가지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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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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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프가니스탄, 무엇이 문제였나?
    이슬람 원리주의의 상징인 탈레반에 의해 아프가니스탄 카불이 점령되고 내전을 종식을 선언함으로써 아프가니스탄의 모든 정정이 바뀌게 되었다. 이러한 아프가니스탄의 문제점이 어디에서부터 시작이 되었을까? 그 역사를 파악할 필요가 있다. 탈레반이 축출된 이후, 아프가니스탄 최초의 민주적인 선거로 당선된 하미드 카르자이(حامد کرزی)에서부터 불거진 지독한 부정부패에 있었다. 그래서 본 지면에는 아프가니스탄 민주정 초대 대통령인 하미드 카르자이(حامد کرزی)의 일생과 그가 대통령이 될 때까지의 일대기를 알아본다. 하미드 카르자이는 칸다하르 출생으로 파슈툰족 7개 씨족 중 하나인 포팔자이족 출생으로 정통 파슈툰족으로 나타나며 아프가니스탄 왕국의 마지막 왕 무함마드 자이르 샤의 사촌인 무함마드 다우드의 외가 집안이기도 했다. 그런 영향인지 그는 유년시절 왕가의 도움으로 인도 펀자브 지역에 유학을 갈 수 있었고 펀자브 지역에 살고 있는 파키스탄 사람들의 도움을 받게 되는데 때마침 1979년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이 발발했다. 그래서 카르자이는 펀자브에서 친해진 자신의 파키스탄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파키스탄에 입국하여 파슈툰 주에 들어가 대소련 항거단체인 무자헤딘을 지원하기 위한 모금활동에 뛰어들게 된다. 당시 아프가니스탄에는 친소파인 극좌파 대통령 모하마드 나지불라가 집권하고 있었다. 나지불라는 아프가니스탄 최대 공산주의 좌익계 정당이었던 인민민주당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었고 소련 측의 무한 지원을 받고 있었던 상황이라 무자헤딘을 비롯한 아프가니스탄 민족주의 진영의 극심한 반발을 초래하고 있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1988년 전쟁 막바지에 카르자이는 아프가니스탄으로 귀국하게 되고 반(反) 나지불라 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이 붕괴되면서 소련군 철수 이후에도 이어져 오던 나지불라 정부에 대한 소련의 지원마저 끊기면서 나지불라 정권은 심각한 위기에 몰리게 되었고 무자헤딘의 공격을 받아 결국 패망했다. 1992년 나지불라 정권을 무너뜨리고 카불을 장악한 무자헤딘의 지도자인 아흐마드 샤 마수드는 나지불라를 비롯한 전임 정권 지도자들에 대해 온건적인 생각을 갖고 있었지만 많은 무자헤딘들 중에 강경파들은 전임 정권 인사들에 대해 숙청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었다. 그러한 여러 생각들과 아프가니스탄 내의 이권들이 같은 무자헤딘들도 분열될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고 이들은 마침내 서로 간의 내전으로 승화되어 그 사이를 비집고 나온 탈레반 세력이 대두하여 전면 등장하게 된다. 탈레반 세력과 같은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이 대두된 이유는 정치와 종교, 사회가 이슬람과 선지자 무함마드의 계시 아래 하나로 뭉쳐 이 위기를 극복하자는 주장을 했고 이러한 주장들이 힘을 받았기 때문에 탈레반이 1990년대 초반에 강력한 세력으로 떠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그 당시 카르자이는 외무부 장관으로 있으면서 정부와 군벌이자 헤즈비 이슬라미 단체의 수장인 굴부딘 헤크마티아르와의 중재를 담당하고있었다. 그러나 이후, 카르자이는 굴부딘의 스파이 혐의를 받고 체포되었지만 굴부딘이 제공한 오토바이로 탈출에 성공했다. 그는 파키스탄의 퀘타로 망명하여 왕정복고 운동을 추진하고 있는 도중 그의 아버지가 탈레반에게 암살당하는 사건이 벌어지자 이에 분노한 카르자이는 아흐마드 샤 마수드의 북부동맹 계열로 돌아서게 된다. 전향한 카르자이는 2000년~2001년 유럽과 미국을 돌며 반(反) 탈레반 세력을 알리며 지지를 호소하였으나 그 당시 유럽과 미국은 탈레반의 정권 탈취에만 관심이 있었지 그 외의 반(反) 탈레반 세력에 대해 그다지 관심이 없었다. 그러자 마수드와 카르자이는 알카에다와 탈레반이 서로 연계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과 그들이 구상하고 있는 테러계획 등을 미국에 경고했지만 미국은 이를 무시했고 이는 9.11 테러에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사태가 발생한다. 마수드가 9.11 테러 이틀 전에 알카에다의 자폭테러로 인해 사망하였기에 미국은 반 탈레반 세력의 중심인물로 카르자이를 선택하게 된다. 사실 카르자이는 이전까지만 해도 그다지 주목을 받지 못했는데 미국이 미리 잠재적 대항마로 점찍었던 압둘 하크가 탈레반 전복을 위해 아프가니스탄으로 잠입했다가 잡혀서 공개적으로 참수형을 당하자 카르자이를 선택한 것이었다. 이러한 카르자이가 떠오를 수 있었던 것에는 미국의 국제정치적 계산이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이는 카르자이 본인이 아프가니스탄 명문가인 왕가의 친척 출신이라는 정통성 문제의 해소에 당시 드물게 아프가니스탄 사람으로써 펀자브 유학생 출신으로 고학력 엘리트였다. 게다가 인도에서 배운 영어로 미국과 소통했기 때문에 탈레반을 축출하고 싶은 미국에게는 최상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게다가 마수드가 암살당하고 리더를 잃은 북부동맹으로서는 미국과의 관계를 조율하고 원조를 받을 수 있는 중요한 중재자로 자리했다는 것도 그가 대통령으로써 집권할 수 있는 정치적 정당성의 요인이 되었다. 또한 카르자이의 행적을 놓고 보면 그는 나지불라 정권 이후 모자데디 대통령 하에서 외무차관을 지내본 것 외에는 정계 요직에 거의 전무했던 자였기 때문에 미국의 입장에서 그에 대한 정보력이 부족했을 수 있다는 생각이다. 이때문에 탈레반이나 카르자이의 정적은 그를 미국이 세운 허수아비라고 비난하게 된 계기가 된다. 그러나 그는 2001년 12월 독일에서 열린 모임에서 아프가니스탄 과도내각을 조직하였고 카르자이는 수반이 되었으며 전 세계를 돌아다니며 아프가니스탄의 정세를 알리고 지지를 호소한 카르자이는 순식간에 아프가니스탄의 정치지도자 0순위로 떠오르게 된다. 그리고 미국에 의해 탈레반이 축출되고 민주선거가 최초로 치뤄지면서 55.4%라는 압도적인 표를 받고 아프가니스탄 민주공화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었다. 통합적인 아프가니스탄 대통령으로는 6대 대통령이지만 민주선거로 이루어진 민주공화국 대통령으로는 정부수립 최초의 대통령으로 간주되고 있다. 내일 포스팅에는 카르자이의 대통령으로써 재임하는 시기와 엄청난 부정부패, 그리고 아슈라프 가니의 등장에 대해 언급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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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2
  • 2023년 5월 러시아 크레믈린 전승절에서 한 푸틴 대통령의 연설
    "조국을 수호함으로써 그들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고 불멸화시킨 아버지, 할아버지, 증조부 등을 기리기 위해, 헤아릴 수 없는 용기로 막대한 희생을 치르면서 나치즘으로부터 인류를 구했다. 현재 문명은 다시 한 번 결정적인 전환점에 서 있는 상태다. 우리 조국에 대한 실제 전쟁이 다시 한 번 발발했지만 우리는 국제 테러를 격퇴했으며 돈바스 주민들도 보호하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라는 초반 내용을 연설했다. 러시아어는 발언한 내용과 번역이 맞지 않으면 오해할 수 있는 소지들이 분명한 단어들이 있다. 게다가 해당 발언의 전체적인 맥락을 봐야 이해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는데 일부분만 잘라 정말 그런 양 왜곡해서 발표하는 부분이 있는 것이다. 특히 그런 행태는 한국 뉴스에서 곧잘 확인되는데 이것은 러시아어를 이해 못해서 방송에 내보낸 것과는 전혀 상관이 없다. 즉, 자극적인 단어 한 두개를 통해 정말 그런 양 헤드라인을 내보내면 조회수가 높아지고 영상 시청률 또한 높아지기에 얼마든지 낚시성 보도들을 할 수 있다. 이같은 보도를 하는 자들을 우리는 "기레기"라고 부르고 천박한 저널리즘이라는 뜻의 "처널리즘"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런데 이 뉴스에서는 "러시아에서 특수군사작전(Специальная военная операция)이라는 용어를 쓰고 전쟁(Война)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음과 동시에 금기시되었다." 면서 푸틴이 전쟁(Война)이라는 말을 언급했다해서 이것을 전쟁으로 인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특수군사작전이지만 그것도 엄연히 전시활동이나 다름없다. 전 세계가 전쟁으로 인식하고 있고 러시아의 주요 언론들 또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심심치 않게 언급하고 있다. Русско-украинская война 라고 구글에 검색해도 이를 언급한 언론들이 수없이 잡힌다. 그런데도 푸틴의 연설 내용 전문을 보면 "전쟁"을 선언했다는 내용은 어디에도 없다. 단 위에 내용에서 "우리 조국에 대한 실제 전쟁이 다시 한 번 발발했지만 우리는 국제 테러를 격퇴했으며 돈바스 주민들도 보호하고 우리의 안전을 보장할 것이다." 여기에서 전쟁을 언급했다고 전쟁 선언을 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푸틴은 전쟁을 선포한적은 어느 글 맥락에서도 찾아 볼 수 없다. 아래 내용은 푸틴 대통령의 전승절 군사 퍼레이드 당시 러시아어 연설 원문으로 중립적인 입장에서 여러분들의 판단에 맡기는 바이다. 러시아어를 모르는 분들은 구글번역기로 돌려서 보시면 된다. 여기에서 어디에 전쟁을 선포했다는 얘기가 있는지 확인하실 수 있다. 끝으로 한국의 언론은 정직성도 잃어버렸고 기자 정신도 잃어버렸다. 그저 조회수 늘리고 영상 시청률을 늘리는데만 관심있고 거기에만 몰두하는 천박한 프레스와 리포터들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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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 루마니아와 몰도바의 통일론과 몰도바 내 복잡한 내부 문제
    몰도바와 루마니아는 아주 밀접한 연관성을 갖고 있다. 본래 동질적으로 같은 민족이나 마찬가지인 두 민족은 루마니아 왕국이 생겨나기 이전에 베사라비아, 왈라키아, 트란실바니아 등 여러 개의 지역으로 나뉘어지면서 서로 간의 분쟁을 지속했었다. 그리고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베사라비아, 왈라키아가 루마니아 왕국이 되었던 반면에 트란실바니아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가 되었고 베사라비아 일대는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침략을 받아 3등분 되면서 루마니아 인들은 또 다른 디아스포라를 겪게 된다. 1918년 제1차 세계대전 이후에 루마니아 왕국은 트란스니스트리아 일대를 제외한 나머지 지역들과 헝가리의 트란실바니아를 자국의 영토로 편입했다. 이에 따라 한 때 한 국민으로 지낸 적도 있었지만, 1940년 소련에 다시 병합되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소련군이 트란스니스트리아를 포함해서 베사라비아 일대를 점령하게 되면서 루마니아와 몰도바로 분리되어 졌다. 두 나라가 소련 시대에 분리된 이후, 국경이 그대로 굳어져 현재에 이르게 되었고 소련 붕괴 직후 몰도바가 소련에게서 분리 독립하면서 같은 민족이면서도 서로 다른 나라가 되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루마니아에서는 현재 몰도바와 통일하자는 통일 찬성론자가 많지만, 몰도바 내에서는 루마니아와 통일하자는 연합주의자(Unioniști)와 몰도바주의자(Moldoveniști)들의 대립이 심각한 양립 형태를 이루고 있다. 필자도 2017년 몰도바 키시네프에 있을 때, 루마니아계가 루마니아와의 연맹국을 이룰 것을 요구하여 루마니아 국기를 들고 시위하는 장면도 직접 목격한 바 있다. 사실 몰도바는 독립 직후에 루마니아와 통일하려고 여러 협상을 벌인 바 있었지만 당시 몰도바의 집권당인 루마니아 인민 전선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났었던 데다 친러 성향의 소수민족이 다수 거주하는 가가우지아와 트란스니스트리아 지역은 루마니아 민족들끼리 자신들의 동의를 받지 않고 서로 통일하려 한다고 루마니아와의 통일 정책에 반발하면서 전쟁이 발생했었다. 이를 두고 루마니아 내전이라 불리는데 이 루마니아 내전에 대해서는 루마니아를 포스팅할 때 밝히도록 하겠다. 몰도바 중앙 정부가 트란스니스트리아와의 내전에서 패배하여 여당인 인민 전선의 지지율이 폭락하게 되자 몰도바와의 통일할 수 있는 여력을 상실하게 된다. 우선 가가우지아 지역은 일단 조건부로 루마니아의 지배를 받아들이기로 했고 현재도 루마니아의 영향을 받고 있지만 여전히 몰도바가 루마니아와 통일하면 독립하겠다는 입장을 내놓고 있다. 또한 경제적으로 볼 때 소련 붕괴 이후로 물가가 폭등하고 산업 기반이 마비되는 상황에서 1인당 국민소득은 400달러대로 추락하였던데다 당시 루마니아도 경제적으로 사정이 좋지 않았던 것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몰도바에 대한 경제적인 지원을 단행하기 어려웠던 상태에 있었다. 당시 루마니아는 체제 전환 이후 물가가 급상승하였기애 IMF로부터 구제금융을 받았던 데다 구제금융의 대가로 차우셰스쿠 후반 시기부터 진행된 복지 축소 정책이 계속해서 진행되어 있었던 상황이었다. 게다가 국유 기업의 민영화와 매각으로 인해 실업률이 급상승하여 사회 안전망이 거의 붕괴될 지경에 있었다. 거기에다 당시 지배 계층이 소위 공산당 출신이었던지라 부정부패는 여전히 심각했다. 그래서 국민들의 삶이 좋아지지 못하게 되면서 경제적인 혼란은 계속해서 이어져 오고 있었고, 결국 이러한 이유로 인해 1994년 총선과 대선에서 인민 전선 계열 정당이 참패하고 말았다. 이후 루마니아에는 중도파 민주농민당이 집권하면서 몰도바와의 통일 정책은 폐기되었다. 그나마 경제적으로 나아진 2000년대에 들어서 몰도바와의 통일론은 다시 부상하게 되었다. 2001년 몰도바 대선에서는 루마니아와의 통일에 반대하는 몰도바 공산당이 집권하는 등 몰도바 내부에서도 통일에 대한 회의론이 더욱 커지게 되면서 통일론이 다시 대두되는 루마니아와는 달리 몰도바의 통일론은 수그러지게 되는 엇박자의 형태를 보였던 것이다. 그러나 루마니아에서는 몰도바와의 통합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여전히 상당한 입장이다. 2006년 7월에는 루마니아 측이 EU의 틀 안에서 몰도바를 흡수할 의향이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또한 2009년에 루마니아 대통령이 몰도바인 100만 명에게 시민권을 주겠다고 공언한 일도 있었다. 100만까지는 아니지만, 루마니아의 정부 기관 보고서에 의하면 소련 붕괴 후 2012년까지 몰도바인 40만 명이 루마니아 시민권을 가지고 있다고 추정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2011년에 몰도바에서 실시된 여론조사에서는 29%가 통일을 지지하고 61%가 반대한 반면, 루마니아는 2010년에 실시된 여론조사에서 44%가 통일에 찬성하고 28%가 반대했던 것으로 조사되었다. 여기에 여론조사를 보면 2010년대 후반기부터는 몰도바에서도 통일 찬성 의견이 올라가는 추세에 있다. 트란스니스트리아가 몰도바에서 매우 중요한 산업 지대에 놓여 있었지만 애매한 입지 조건과 미승인국이라는 불리함으로 인해 많이 낙후되면서 몰도바 중공업 경제의 의존도가 떨어졌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우크라이나와 병합을 추진하는게 낫다는 의견이 많아졌다. 게다가 인구 감소나 취업의 유리함으로 인하여 시너지 효과로 보자는 여론도 나오고 있으며 더군다나 트란스니스트리아에 주둔한 러시아군이 위협적이라는 분석도 존재하고 있어 루마니아와의 통일 문제는 어려운 문제로 봉착하고 있다. 몰도바의 정치인인 니콜라에 다비자(Nicolae Dabija)는 2016년부터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주장하는 비정연합운동을 맡고 있으면서 통일을 추진하고 2017년에 필자가 목격했던 시위도 주도했다. 니콜라에 다비자는 친(親) 루마니아 성향의 정치인으로 몰도바 내 보수우익적인 입장을 띄고 있다. 몰도바에서의 이데올로기에서 보수 우익은 대개 친(親) 루마니아 계열이고 좌익은 친(親) 러시아 및 우크라이나로 구분되어 있다. 여론적 추이를 보면 몰도바 젊은 층은 통일 찬성 여론이 강하고 나이 많은 사람들은 통일을 반대하는 경향이 강하다. 이미 두 나라가 갈려 나간지 수십 년이 되어 가는데다 몰도바 자체도 친(親) 통일과 반(反) 통일이 엇갈리니 가까운 미래에 루마니아와의 통일 및 통합이 현실로 되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는 전망이다. 굳이 합병하려 한다면 러시아의 반발을 고려해 EU에 가입한 뒤 EU의 지원을 받으며 서서히 통합을 추진할 공산이 크다. 더불어 드네스트르 강 동쪽의 트란스니스트리아는 러시아와 루마니아 영사관들이 여권 발급 경쟁을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러시아는 주민 대다수가 러시아 출신이기 때문에 트란스니스트리아 시민들에게 여권을 내주는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러시아는 트란스 드네스트르 지역에서 국민투표가 실시되면 분리 독립에 이어 러시아와의 합병도 승산이 있다고 보았다. 이러한 상황에서 몰도바와 루마니아의 통일은 러시아 때문에 불가능한 것으로 보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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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1
  • 슬라브계 인종끼리의 이른바 "제노사이드"가 자주 발생하는 이유
    1830년대 후반, 러시아의 학자 미하일 포고딘(М. П. Погодин, 1800~1875)에 의해 작성된 논문 <서구의 중요성>에서 다른 민족에 비해 슬라브족의 우월성과 모든 슬라브족의 세계에서 러시아가 헤게모니를 장악할 필요가 있음을 주장하게 된 것이 범슬라브 민족주의 시작이다. 모든 슬라브족들이 같은 계열의 민족이고 모든 슬라브족들을 하나로 합쳐 외세를 방어하고 슬라브 민족만의 전통과 사상을 지키자는 것이 목적이다. 독일이 범게르만주의를 이용했다면 러시아는 범슬라브주의를 이용했다. 러시아적 범슬라브주의 국내외적으로 볼 때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제국주의 정책 이데올로기, 팽창 정책을 정당화시키기 위한 논리로 형성, 전개되어 온 국제관계 사상으로 평가해 왔다. 19세기 들어 발칸 반도의 슬라브족들은 오스트리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지배에 대한 불만이 서서히 강력해지기 시작했고, 세르비아나 불가리아 등은 오스만투르크로부터 독립하려고 했다. 러시아 입장에서는 발칸의 슬라브족들이 독립하면 경쟁자인 오스트리아-헝가리 2중 제국이나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땅과 인구가 줄어들어 약화되는 효과가 있는데다 새로 생겨나는 슬라브 민족 국가들은 이들의 독립을 도와준 러시아에 밀착하여 새로운 친러 세력을 구성할 수 있게 될 것이니 큰 이득이 따를 수밖에 없는 것이고,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독립하는데 있어 같은 계열의 민족이자 강대국인 러시아의 도움을 받을 수 있으니 서로의 유리한 입장이 맞아 떨어지는 셈이다. 이와 같이 발칸의 슬라브족들은 범슬라브주의를 외치면서 독립운동을 강력히 주장했고, 이에 러시아는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같은 민족이라 여기면서 도와주게 된다. 물론 같은 슬라브이기 때문에 도운 것도 있었지만 발칸 반도의 자원이나 서방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라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지정학적 이유로 인해 나타나는 부동항 확보의 정당성, 서구로 나아가기 위한 러시아의 패권 진출 등 다양한 플렌도 존재했다. 이러한 러시아의 계획과 발칸 지역의 남슬라브인들이 원하는 것들이 서로 맞아 떨어짐에 따라 세르비아를 중심으로 발칸 반도 서남부에 유고슬라비아가 나타나게 되었던 것이다. 범슬라브주의 최초로 주창했던 미하일 포고딘은 러시아의 지도하에서의 슬라브 민족들의 통일을 주장하여 러시아의 정당성에 무게를 실어주었고 니콜라이 다닐레프스키(Николай Данилевский, 1822~1885)는 슬라브인의 인종적 우월성을 설파하여 범슬라브주의의 교의를 제공했다. 그리고 1867년에 모스크바에서 범슬라브계 민족회의가 개최되었지만 러시아가 자신들이 중심이 되어 슬라브주의를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기 때문에 다른 슬라브 민족들이 반발했고 이와 같은 급진적 운동은 점차 식어가기 시작했다. 범슬라브주의에 심취한 러시아인들은 옛 동유럽 전역이 거의 슬라브의 영토라고 확신하는 팽창주의적인 주장을 하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은 슬라브에 대한 민족주의적 성격으로 인해 이를 반대하는 사람들에 대해 욕설하고 폭행 등의 물리적인 가해를 가하기도 한다. 헝가리, 루마니아와 몰도바, 알바니아, 그리스 등은 옛 슬라브인들의 영토이고 이들을 학살하는데 있어 주저함이 없다. 심지어 라트비아와 리투아니아까지 슬라브족의 영토라 주장하거나 슬라브 문화권에 속한다고 주장하면서 패권주의를 지향한다. 물론 이들 중에는 슬라브족과의 혼혈 등으로 동화된 국가도 존재한다. 대표적인 국가가 체코, 슬로바키아, 폴란드, 불가리아, 우크라이나가 있는데 우크라이나의 경우, 슬라브족이라 주장하기도 하지만 엄연히 정체성이 슬라브와 다르고, 스스로 슬라브가 아니라는 자들도 상당수 존재한다. 더불어 스스로를 슬라브 민족이라고 생각하는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범슬라브 운동의 시작에 대해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 범게르만주의에 필적하는 범민족주의 운동인 범슬라브주의 운동의 시작은 19세기 초의 합스부르크 제국 내의 슬라브 민족들의 연대를 지향하는 운동인 "오스트로 슬라브주의(Австрославизм)'에서 비롯되었다. 당시 슬로바키아의 얀 콜라르(Ján Kollár, 1793~1852)나 파벨 샤파리크(Pavel Šafárik, 1795~1861) 등이 제국 내 슬라브인들의 언어적의 유사성과 문화적인 유사성을 통해 연계를 강조하였으며 이어 체코의 프란치셰크 팔라츠키(František Palacký, 1798~1876)가 제국 내 슬라브인들에 대한 정치적인 연대를 지향하여 1848년에는 모스크바 범슬라브계 회의보다 앞서 프라하에서 최초의 슬라브계 회의를 개최하기도 했다. 여기에는 러시아의 아나키즘 철학자 미하일 바쿠닌(Михаил Бакунин, 1814~1876)이 참가하기도 했다. 뒤이어 크림전쟁에서 러시아가 패배한 이후, 1860년대의 러시아에 범슬라브주의가 나타났다. 이와 같은 범슬라브주의가 러시아에서 촉발된 이유는 크림 전쟁에서의 충격적인 패배로 나타났다. 크림 전쟁에서 러시아는 이민족인 영국, 프랑스와 오스만투르크에게 그 자존심이 꺾였다. 게다가 제국주의 패권을 함께 다투고 있는 라이벌이라 생각했던 영국, 프랑스에게의 패배는 소련의 해체에 이어 러시아 역사상 가장 치욕적인 패전으로 기억되고 있다. 이 때부터 영국, 프랑스가 러시아를 침공할지 모른다는 위기설이 대두되기 시작했다. 이러한 위기설은 영국,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로부터 러시아 슬라브인을 결집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기 시작했고 결국 러시아에 대한 애국주의와 애국심이 범슬라브주의를 탄생시킨 원인이 되었다. 이 극우적인 발상의 범민족주의는 국가와 민족의 위기감이 고조될 때 하나의 이념으로 결집할 수 있는 원동력이 된다. 그러면서 민족적인 위대함과 그에 따른 민족의 우수성을 선전하게 되었고 강적들을 물리칠 때마다 나타난 일련의 사건들은 범슬라브 민족주의의 근간으로 자리 잡아갔다. 다만 범게르만주의나 다른 민족주의와 다른 것은 범슬라브주의 주창하는 자들의 특성이 자국민 슬라브족이 우선이라는 국가적 개념이 들어가 있다는 것이다. 국가적 개념의 민족주의는 국가 외적으로까지 분포한 민족개념에서 국가론으로 축소한 것인데 같은 계통의 민족이어도 국가를 벗어나면 적이 될 수밖에 없다는 생각이 굳어져 갔다. 이는 서방의 민족주의와 다르게 슬라브권 국가들은 전제 군주가 통치해 오고 있는 상태에서 전제 군주를 중심으로 민족주의가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어 다른 나라를 침공하고 다른 민족이나 같은 슬라브계여도 무조건 학살하고 보는 것이 이러한 이유이다. 범슬라브주의이지만 동류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국가론이고 무조건 국가가 먼저이다. 국외는 어찌됐건 동맹국이 아니면 동류의 민족이어도 적일 수밖에 없다. 그러니 그들을 없애는 “제노사이드”를 통해 완전히 싹을 잘라버리고 새로운 싹인 자신들이 그곳에 뿌리를 박아 이식하여 번성케 해야 한다는 급진적 범슬라브주의가 슬라브 인종들 중 “제노사이드”를 벌이는 자들에게 정당성으로 자리를 잡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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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Nova Topos
    2024-05-10
  • 러시아 푸틴 대통령의 임기 시작과 그와 비교되는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의 운명
    이틀 전 7일부터 푸틴 대통령의 5번째 임기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5월 9일 오늘 79년째 전승기념일이다. 전승절은 1941-1945 대조국 전쟁, 혹은 대독전쟁(Великая Отечественная Война)에서 승리한 것을 기리는 날이다. 실제로 독일군 작전참모장 알프레드 요들은 5월 8일 오전에 군사행동을 종료한다는 항복문서를 서명했지만, 당시 소련의 지도자인 스탈린은 소련군이 참가하지 않은 서명은 인정할 수 없다고 하여 다시 5월 8일 밤인 러시아 시간으로는 5월 9일 새벽 00:43에 재서명을 받았기 때문에 이 날 전승기념일로 간주한다. 소련군이 전쟁에서 승리한 이 날은,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말에 따르면, '소련 인민의 삶에서 '영광의 순간'이 되었다. 이는 소련 역사상 사람들이 조국의 승리와 자유를 위해 감당한 상실의 의미가 명약관화했던 유일한 시기다." 라고 할 만큼 러시아 최대의 공휴일이다. 단순한 기념일이 아니라 현대 러시아 인들의 국가적 자긍심, 긍지의 원천인 날이기도 하다. 오늘은 많은 러시아 인에게 특별한 날이다. 2,700만의 어마어마한 희생을 치른 국가적 총력전이었기 때문에 전쟁의 상실을 겪지 않은 가족은 러시아에서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며, 전쟁에 참가한 사람들도 아직까지 일부 살아 있다. 5월 9일이 조국 러시아에 자긍심을 느끼는 계기가 된다고 인정하는 러시아 사람들이 많이 있다. 그래서 군사 퍼레이드가 화려하게 치뤄진다. 오전 10시 Спасская башня (스빠스스까야 바쉬냐) 타워에서 종소리가 울리면 시작이 된다. 왜 오전 10시냐면 소련군이 5월 9일 베를린에 입성해 오전 10시에 베를린 국회의사당에 소비에트의 깃발 꽂은 시각이기 때문이다. 이 군사퍼레이드의 하이라이트는 블라디미르 푸틴 대통령이 ypa! (우라!, 만세라는 뜻의 러시아어)하면 전 장병들이 ypa 삼창을 외치고 러시아 국가가 연주되는 것이다. 그 때 그 장엄함은 그 압도적인 장관에 온 몸에 소름 돋을 정도다. 군사 퍼레이드가 끝나고 틴 대통령은 각계, 각 인사들에게 악수하며 인사하고 붉은 광장을 걸어 크레믈린 성곽 주변을 통과해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으로 간다. "꺼지지 않는 영혼의 불꽃"은 러시아의 현충원과 같은 곳으로 제2차 세계대전부터 최근 전쟁에 이르기까지 러시아를 위해, 충성스럽게 싸우다 전사한 영령들을 추모하기 위한 곳이다. 푸틴 대통령과 러시아의 각료들은 그곳에서 헌화를 하고 묵념을 하면서 나라를 위한 충(忠)의 의미를 다시 새기게 한다. 그러면서 각오를 다잡는다. 이후, 불멸의 연대(Бессмертный полк)라는 행사를 진행한다. 독일군이 방심하고 있던 소련을 선전포고 없이 공격해 들어온 1941년 6월 22일부터 소련군이 프루트강을 건너 루마니아로 진격해 나간 1944년 4월 8일까지 소련군과 시민들은 소련 땅에서 독일군 주력부대에 맞서 싸워야 했다. 독일군을 소련 땅에서 몰아내는 데 걸린 시간은 거의 3년에 달했던 것이다. 유럽에서의 전쟁이 독일군과 소련군의 전쟁이었던 것은 사망자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서의 총 사망자 수는 5,000만~7,000만명 사이로 추정되는데, 이 중 소련인 사망자 수가 2,500만~2,700만명으로 추산된다. 대략적으로 말해, 전체 사망자 수의 절반이 소련인이었던 것이다. 독일군의 포위하에 2년 반 동안 봉쇄되었던 레닌그라드(지금의 상트페테르부르크)만 해도 적게는 64만명, 많게는 150만명이 사망한 것으로 추정된다. 식량, 연료, 의료품의 공급이 끊긴 상태로 버텨야만 했으니 아사와 동사자가 속출했다. 스탈린그라드 전투는 또 얼마나 격렬했던가? 스탈린그라드 전투에 투입된 소련군 사병의 평균 생존 시간은 24시간에 불과했다. 이 와중에 스탈린그라드 시민들은 소개되지 않은 채 그 처참한 전쟁터 속에서 살았으니, 아이들은 얼어붙어 있는 시체들을 가지고 놀았다고 한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희생을 감수하고 획득한 승리인 것이다. 소련군 지휘관과 사병들은 말할 것도 없고, 극심한 기아를 겪으면서도 버텨 준 레닌그라드 시민들, 독일군의 점령하에서 목숨 걸고 저항운동을 벌였던 게릴라 대원들, 여성임에도 전쟁터에 자원해서 간호병, 통신병, 심지어 전투원이 된 그녀들, 이런 사람들이 있었기에 소련은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러시아인들이 오늘날 ‘대조국전쟁’에서의 승리를 그토록 자랑스럽게 여기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실제 대부분의 러시아인들은 자국 역사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것으로 2차 세계대전에서의 승리를 꼽는다. 그래서 매년 5월 9일이 되면 전 세계의 러시아인들은 광장에 집결하여 대조국 전쟁 (소독전쟁)에서 희생한 자신의 가족, 친지, 그 외의 인물들의 사진을 들고 나와 거리를 행진한다. 서서히 돌아가신 분들의 희생과 대조국 전쟁이 잊혀갈 때쯤 파시즘에 대항해 조국을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친 애국 선열의 넋을 기리는 것이 그들의 몫임을 깨닫고 역사적 기억을 보전하는 것이다. 이틀 전, 푸틴 대통령은 5번째 임기를 시작하는 행사를 치뤘다. 2018년에도, 2024년에도 마찬가지로 푸틴 대통령은 2,000여 명이나 되는 초청 인사들의 환영과 박수를 받으며 행사장에 입장한 뒤 헌법 사본에 오른손을 올리고 취임을 선서했다. 이 헌법 사본에 오른손을 올리는 이유는 과거 노보고르드 공국 시절의 전통을 이어 받은 것이다. 중세 노보고르드 공국은 베체(Вече)라는 의회에서 대공을 선출한다. 이렇게 뽑힌 대공은 오른 손으로 공국의 법전 위에 손을 올리고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를 보호하는 맹세를 큰 소리로 포고하여 취임식을 치르는 것에서 유래하고 있다. 러시아는 전통을 수호하고 이를 계승하는 나라다. 푸틴 대통령은 다음과 같이 선서하며 포고하게 되어 있다. "나는 국민의 권리와 자유를 존중하고 보호하고, 러시아 헌법을 존중하고 보호하며, 국가의 주권과 독립, 안보, 정체성을 보호하고 국민에게 봉사하기 위해 대통령의 권한을 행사할 것을 맹세합니다.(Я обязуюсь уважать и защищать права и свободы народа, уважать и защищать Конституцию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 осуществлять полномочия Президента для защиты суверенитета, независимости, безопасности и самобытности страны и служить народу.)" 이 포고가 끝나면 헌법재판소장이 연단 위로 올라와 푸틴 대통령의 공식 취임을 선포하게 된다. 과거 노보고르드 공국의 베체 의장이 올라와 대공 취임을 공식 선포한 것처럼 러시아도 그 전통을 계승하여 따르고 있는 것이다. 이날은 발레리 조르킨(Валерий Зорькин) 소장이 푸틴 대통령의 공식 취임을 선포했다. 푸틴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연설에서 “서방 국가들과의 대화를 거부하지 않는다”고 언급했다. 그는 "안보와 전략적 안정에 대해 서방 측과 대화할 수 있다"고 언급하면서 "그러나 오직 서로의 이익을 존중하는 대등한 조건에서만 가능하다"고 했다. 또한 "그와 같은 대등한 조건을 선택하는 것은 온전히 그들의 몫"이라고 했다. 또 특수 군사작전 참가자들에게 감사를 전하며 러시아는 하나로 단결한 위대한 국민이고 모든 장애와 방해들을 극복하며 함께 승리하자고 격려했다. 이어 푸틴 대통령은 야외 광장으로 나와 비가 내리는 추운 날씨 속에 대통령 근위대의 사열을 받은 이후, 성모 수태고지 성당(Благовещенский собор)으로 가서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가 집전하는 감사 기도에 참석했다. 이 날 대통령 취임식과 동시에 미하일 미슈스틴 총리가 이끄는 기존 정부는 자동 해산되었지만, 새 정부가 들어설 때까지 이들은 대행 자격을 받으며 업무를 이어간다. 총리 후보는 전승절이 끝나고 난 10일, 장관 후보들은 13일 의회 인준을 받을 것으로 예상되며 크게 변수가 없는 한, 현 각료 대부분이 그대로 인준될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처럼 분위기가 좋은 러시아와는 달리 우크라이나는 초상집이나 다름없다. 러시아 내무부는 이달 4일 경찰 데이터베이스에 '1978년 1월 25일 크리프이 리에서 태어난 블라디미르 알렉산드로비치 젤렌스키는 러시아 연방 형법 조항에 따라 수배 중(Владими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Зеленский, родившийся 25 января 1978 года в селе Крыпили, разыскивается по статьям Уголовного кодекса Российской Федерации.)'이라고 올렸다. 이는 우선 형사 사건으로 입건하고 수배 영장을 때리면 우크라이나 헌법 상 임기가 마무리 되는 5월 20일 이후, 체포영장을 발부한다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 뒤이어 포로셴코 전 대통령도 수배자 명단에 올렸지만 아직 체포영장을 발부하지 않았다. 러시아 내무부 측은 우크라이나 전현직 대통령에 대한 형사 입건 혐의나 이유에 대해 별다른 설명을 하지 않았다. 이는 그 이유야 다들 알고 있기 때문이다. 2019년 우크라이나 대통령 결선투표에서 포로셴코 대통령을 꺾고 당선된 젤렌스키의 대통령 공식 임기는 오는 20일에 종료된다. 이는 현 우크라이나의 계엄령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계염령은 대통령 선거를 연기한다는 것이지 대통령 임기를 연기한다는 뜻이 아니기 때문이다. 러시아는 이를 겨냥해 '젤렌스키 흔들기'의 일환으로 그를 수배자 명단에 올린 것으로 보고 있지만 나는 러시아가 그를 협상 대상에서 제외한 것으로 보고 있다. 이는 압박이 아니라 합법적으로 그를 추포하겠다는 의지이기도 하다. 러시아 인터폴에서 젤렌스키에 대한 체포 영장이 발부되면 러시아 정보부는 그를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체포할 수 있다. 러시아 내무부는 대통령 두 사람 외에도 알렉산드르 리트비넨코 우크라이나 국방안보회의 서기(사무총장, 장관급)와 알렉산드르 쉴라파크 전 재무장관, 스테판 쿠비바 전 중앙은행 총재를 3일 수배자 명단에 올리면서 젤렌스키 임기 종료와 더불어 공식 체포 영장을 발부할 계획이다. 이제 젤렌스키는 서방을 방문할 때도 본인이 언제, 어디서든 체포될 수 있다는 심리적 불안감에 사로잡히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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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0
  •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학살 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 소송 제기와 문제
    지난 1999년 11월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학살수용소의 생존자들과 유족들이 미국 샌프란시스코 법원에 집단으로 소송을 제기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되고 나치와 파시즘을 지지한 바티칸이 유태인과 세르비아인 학살에서 어떻게 관여했는지의 내용이 다시 드러났으며 이 과정에서 미국과 집단 서방이 바티칸을 비호해 이같은 학살 범죄에 대한 카톨릭의 역할을 겨우 무마했지만 코소보 전쟁이 터지면서 스레브레니차 학살 등이 조명을 받게 되자 그로부터 58년 전의 비극까지도 수면 위에 올라오게 된 것이다. 당시 28명의 유족 대표 소송인들은 제2차 세계대전 당시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인, 유태인, 우크라이나인, 러시아인 등 소수의 생존자들이 존재했고 학살 피해를 입고 사망한 사람들의 유족들로써 제2차 세계대전 중 크로아티아 나치인 우스타샤 민병대에 의해 탈취된 금이 바티칸 은행 등 다른 곳으로 옮겨져 보관되어 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유족들과 생존자들은 바티칸 은행, 프란치스코 수도회, 스위스 국립은행, 크로아티아 해방운동 등을 상대로 강제로 탈취되거나 유골 사이에서 채집된 금의 반환을 위해 법적 투쟁을 했다. 당시 약 3년 동안 진행 중인 소송에서 변호사들은 재판에 필요한 제2차 세계대전 중의 문서들과 CIA, 미군 정보국(DIA), NSA 등에서 보관하고 있는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몇 가지의 기밀 문서들을 넘겨 받았으며 바티칸에도 기밀 문서들을 해제할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바티칸은 75년 이후에 보관된 문서들을 해제한다는 관례가 있다. 75년 이후라면 뉘른베르크 전범 재판이 끝나고 현재 78년이 지났으니 그 관례대로라면 이제라도 공개가 가능하다. 1999년 당시에는 75년 공개 관례를 들어 거절했지만 이제는 거절할 명분이 없다. 그러나 당시 생존자 분들은 거의 돌아가시고 유족들도 연로하여 이 문제를 재기할 수 있는 힘이 없다. 이전 1999년 샌프란시스코 재판 때는 소송을 담당하고 있는 조나산 레비 변호사가 재판을 위해 정확한 바티칸 은행의 소유자를 밝히라고 바티칸 당국에 요구했었지만 바티칸 측은 이것마저도 거부했다. 바티칸 측이 본인들이 반 나치, 반 전체주의 활동을 해왔고 학살에는 전혀 없다고 그동안 주장했었는데 정말로 그러한지에 대해 해당 부분들에서 떳떳하다면 공개 못할 이유가 없다. 그러나 바티칸은 지금도 침묵 중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나치전범들을 재판에 회부하면서 공개된 문서들, 미군 정보국과 국무성에서 해제된 문서들은 바티칸과 크로아티아 우스타샤 정부와의 관계를 잘 드러내주고 있다.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침공하면서 크로아티아에서는 나치 괴뢰 정부인 우스타샤 정부가 들어섰다. 무엇보다도 우스타샤 정부와 크로아티아 카톨릭 교회의 관계가 매우 긴밀했다는 사실은 제2차 세계대전이 종결된 이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건국되면서 6명의 카톨릭 고위 성직자들을 유고슬라비아 티토 정권에서 베오그라드 사법재판소에 나치 전범으로 기소했다. 기소 이후 그들 성직자들은 유죄 판결을 받았다. 당시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 사람들을 죽일 것을 명령한 바 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수배되었으며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 주교는 ‘세르비아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했다고 지난 기사에서 언급한 바 있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한 현장인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프란치스카 수도회의 소속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특히 당시 생존자와 유족들 원고 측 변호인단이 추적해오던 한 프란시스카 수도회 신부에 관한 문서가 1999년 10월, 미군 정보국에 의해 공개되면서 그동안 CIA나 집단 서방이 억지로 감추려 했던 사실들이 드러나게 된다. 당시 샌프란시스코 재판의 생존자 & 유족들 변호를 맡은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크루노슬브 드라가노비츠(Krunoslv Draganowicz) 신부를 바티칸 은행으로 넘어간 금 문제에 관련한 인사로 간주해 그에 관한 문서를 CIA와 미군 정보국에 요구한 적 있다.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전시 하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전범 사제이며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 등으로 탈출시켰던 Rat Line을 만든 인물이다. 이와 같은 탈출로를 통해 우스타샤 정부의 모든 지도자들이 독일과 달리 전범에서 자유로워졌고 바티칸과 서방 간의 야합으로 인해 우스타샤의 학살은 철저히 은폐되어 왔다. 1999년 6월 4일에 공개된 문서에 의하면 드라가노비츠 신부는 수많은 정보국을 위해 일해온 스파이로 밝혀졌다. 특히 CIA와 미군 정보국이 그가 나치 활동의 전력이 있고 세르비아인들을 증오했으며 바티칸 측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단지 그가 과격한 반공주의자라는 이유로 인하여 좌익들을 견제하고 탄압하기 위한 도구로 채용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우스타샤 정부는 1941년 나치 독일이 크로아티아에 세운 괴뢰 정부인 크로아티아 독립국을 이끄는 전체주의 정당으로써 극단적인 민족주의와 카톨릭주의를 골자로 한다. 이들은 다른 민족과 종교에 대해 잔혹한 박해로 악명을 떨쳤던 극우 조직이다. 제2차 세계대전 이전부터 우스타샤들은 유럽에서 가장 잘 조직된 극단적인 성향의 테러 집단으로 유명했는데, 1934년에 일어난 유고슬라비아 왕 알렉산데르 1세의 암살과 프랑스 외무부 장관이었던 장 루이 바르투의 암살은 우스타샤의 사주에 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41년과 1945년 사이 약 80만의 세르비아인들과 약 6만의 유태인들, 수천 명의 집시들을 집단으로 학살했다. 나치 독일의 집행관들이 독가스로 집단 학살하는 방법을 사용한 반면 이들은 주로 칼과 망치 등의 가장 원시적인 무기를 흉기로 사용했다. 우스타샤 정부는 정권을 장악하자마자 카톨릭 왕국 크로아티아라는 기치를 걸고 3분의 1 학살, 3분의 1 추방, 3분의 1 개종이라는 극단적으로 잔악한 정책을 실행했다. 이들은 인종차별을 공개적으로 시행하는 법을 제정했고 다른 민족들의 학교와 교회를 강제로 폐쇄했으며 유태인들은 다윗의 별표시를 한 완장을 칙용하여 구분하고, 세르비아인들은 정교회 표시인 ‘P’가 적힌 완장을 채워 구분했으며, 집시들은 노란 완장을 강제로 두르게 하여 인권 말살을 서슴치 않았다. 당시 우스타샤 정부가 바티칸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았다. 우스타샤 정부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벨리치와 크로아티아 수도인 자그레브의 대주교였던 스테피나츠는 매우 각별한 사이였다. 1941년 5월에 우스타샤 정권이 들어서자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에게 축전을 보내고 축하연을 베풀기도 했다. 그리고 같은 해 5월에 스테피나츠는 파벨리치가 이탈리아 무솔리니와의 조약에 서명하기 위해 로마로 가는 길에 교황이었던 비오 12세와 개인적인 만남까지 주선했다.당시 크로아티아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국의 크로아티아 신부들에게 목회 서신을 돌려 새로 탄생한 우스타샤 국가를 지지할 것을 명령하고 자신도 우스타샤 정부의 종교 개종위원회 수장으로 활동하면 온갖 악행을 자행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독일 전범들 대부분이 뉘른베르크 법정에 서서 실형을 선고받은 것과는 대조적으로 우스타샤 정권의 지도자들 대부분은 미국과 집단서방의 묵인 하에 대부분 법망을 빠져나가 아무도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 넘겨지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세르비아인들, 유태인들과 집시들을 학살한 이후 피해자들에게서 갈취한 금과 귀중품을 갖고 탈출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바티칸은 독일과 크로아티아에서 온 나치 전범들을 바티칸의 성과 수도원 등지에 숨겨 보호해줬다. 조나산 레비 변호사는 당시 나치 전범들이 바티칸 은행을 통해 아르헨티나 등 각 카톨릭 국가들로 송금했다고 주장했다. 특히 우스타샤 정권의 수장이었던 안테 파블리치는 1945∼1947년까지 바티칸으로부터 국가 지도자의 대우를 받으며 바티칸 성에 머물다가 이후 아르헨티나로 탈출해 페론주의로 유명한 후안 페론 대통령의 정치고문으로 일했다. 수십 만을 학살했던 학살 수용소들의 책임을 맡았던 아르투코비츠(Artukowitz) 신부는 30년 동안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호화로운 생활을 하다 사망했으며 루브릭 신부의 경우, 스페인에서 호화 별장들을 구입하고 아르헨티나, 브라질, 베네수엘라 등지에서 사업가로서 새로운 삶을 살다가 편안하게 숨을 거두었다. 크로아티아의 나치 정권을 지원하고 세르비아 정교도들을 학살하는 데 앞장섰던 대주교 스테피나츠는 전범으로 체포되어 유고슬라비아 베오그라드 재판에서 전범으로 회부되었다. 그는 감옥에서 몇 년간 복역한 이후 바티칸의 구명 운동과 미국 및 집단서방의 협박으로 인해 석방되었다. 그가 죽은 뒤 1998년 10월3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크로아티아에서 성인으로 추대되는 마지막 절차인 시복식이 치러져 세상을 놀라게 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나치 독일에 협력했던 스위스 은행, 스웨덴 은행, 포르투갈 은행 등은 당시 피해자들의 요구를 수용하여 문서를 공개하고 보관된 금을 되돌려줄 것이라고 밝혔다. 그리고 독일 정부도 희생자들에게 수십억 달러를 배상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바티칸 당국은 오히려 독립 국가에 대한 주권 침해라는 이유를 들어 미국 정부에 대해 샌프란시스코 재판을 중단시키라고 압박했다. 이 같은 내용은 한국에서도 2000년 한겨레 21 하영식 기자의 <기관총을 든 신부님>을 통한 폭로로 인해 밝혀졌는데 유족 측 변호사인 조나산 레비는 하영식 기자에게 “교황의 변호사들이 모두 이 문제를 건드리는 것에 반대하는데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유태인들과 정교도들에게 어떻게 사과할 수 있는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라고 편지를 보냈다. 이 재판이 어떻게 끝났는지에 대해 검색을 해도 찾기가 힘들다. 아마 이 또한 미국이나 집단 서방, 바티칸 측이 찾지도 못하게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남은 것은 75년 비공개 보관 관례 룰로 묶여 있는 숨은 문서들을 공개하는 것이다. 바티칸이 당시의 악행을 인정하고 피해자들에게 반성하며 이 문건들을 공개하는 진정성 있는 모습을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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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 아프가니스탄 전통의 악습인 남색 바차바지(Bacha bāzī)
    2002년도 더 타임스와 2010년에 제작된 영국 타큐멘터리 영화 The Dancing Boys of Afghanistan에서 바차바지(Bacha bāzī)의 악명을 고발하면서 이 기가 막힌 풍습에 전 세계가 경악했다. 아프가니스탄의 전통 악습인 이 바차바지는 현재, 평범한 동성애가 아니라 명백한 소년 성착취라 볼 수 있다. 이 악습인 바차바지(Bacha bāzī)가 언제, 어떻게 시작되어 현재까지 오게 되었을까? 고대 그리스에서는 남성 무희들이 여성과 같이 화장을 하고 춤추는 풍습이 있었으며 그런 아름다운 남성을 선택해 동성애를 즐기는 환락의 풍속도 존재했다. 특히 테베에서는 동성애자들의 군대인 "신성군단"이 존재했다. 시민 계급인 성인 남성과 곧 시민이 될 청소년이 동성애를 하는 문화가 광범위하게 있었고 이들은 현대적인 동성애자와 달리 연인 관계인 동시에 성인 남성이 스승의 역할을 맡아 곧 시민이 될 소년에게 시민으로서 사회적 교양을 가르쳐주는 스승과 제자 관계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마케도니아에 의해 그리스가 정복되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동방 원정을 하게 되면서 아케메네스 페르시아 제국을 정복했다. 그리고 중앙아시아 일대도 석권한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각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자신의 이름을 딴 "알렉산드리아" 라는 도시를 건설하면서 그리스인들을 지배자로 하여 거주케하였다. 그로 인해 건국된 국가가 바로 박트리아 왕국이었다. 박트리아 왕국으로 인해 그리스 문화가 중앙아시아 대부분 지역으로 퍼지게 되었다. 그 박트리아와 서역 월지의 후예들이 혼혈한 종족들이 흉노의 침공으로 월지가 멸망하자 오늘날 아프가니스탄 지역으로 내려와 뿌리를 내렸다. 그러면서 아프가니스탄 전 지역에 그리스 문화가 전파되었는데 이 때 그리스의 동성애 문화도 함께 전파되었던 것이다. 남성 무희가 여성처럼 화장을 하고 여성복장을 하고 춤을 추게 된 문화인 바차바지(Bacha bāzī)가 이 때부터 시작된 것이다. 바차바지는 페르시아어로 '소년(bachen)' '놀이(bazi)'라는 어휘의 합성으로, 노는 소년이라는 뜻으로, 주로 공연을 하면서 생계를 꾸려나가는 청소년 무용수들을 뜻하고 있다. 주로 9~15살 사이의 가난한 집 아이들을 모집해서 댄서로 키워주는 것이 일반적이며, 여장을 하여 공연을 시킨다. 이슬람의 종교법으로 인해 여자가수들을 데려다 공연시키는 것은 어려우니까 그 대용품으로 투입시키는 것으로 변질되었다. 이들 청소년 무용수들은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정부의 공권력의 보호를 받지 못해 성매매나 성착취, 납치의 대상이 되는 것은 당연했고, 폭행이나 강간 사건을 당해도 처벌이 이루어지지 않는 경우가 대다수였다. 더불어 이슬람 원리주의로 인해 동성애가 멸시되는 아프가니스탄에서도 이들을 상대로 성관게를 가지거나 연애를 하는 것은 서로 모른척하는 경우가 많다. 이는 남색, 전통적으로 이를 향유하는 대부분의 가해자들은 지역의 토호나 유력 군벌들이었고 이슬람 모스크의 이맘들도 이를 즐겼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아프가니스탄의 게이들은 명예살인을 당하거나 테러, 징역형과 같은 법적인 처벌을 당하기 십상인데다 설사 처벌에서 면죄된다 해도 주변 시민들에게 살인위협을 받거나 폭력에 노출되고, 더불어 집단 따돌림도 함께 동반할 수 있기에 서로 모른척 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권력자나 부유한 자들은 뇌물로 법망을 피하는 경우가 많다보니 아프가니스탄의 동성애자들은 권력자와 부자들이 동성을 취해도 처벌을 받지 않는데 자신들은 돈과 권력이 없기 때문에 보호받을 수 있는 권리가 없기에 인권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은 성착취 관습에 대해 근절하려고 오랜 기간 동안 노력해온 바 있다. 아프가니스탄 칸국, 시르 알리 칸 시절인 1872년부터 1873년까지 일시적으로 금지하기도 했지만, 오래 지나지 않아 흐지부지 되었으며 이 때문에 보호국이었던 영국인들이 바차바지 풍습에 대해 기록을 남겨 화재가 되기도 했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에 바차바지들을 성매매하는 풍습이 다시 재확산되자 미국 측에서도 이를 근절하려 했지만 현지 문화를 존중해야 한다는 원칙으로 인해 없애는데 실패했다. 이와 같은 바차바지로 일하는 청소년들은 나이가 들면 인기를 잃기도 하였고 그에 따라 여성과 결혼하는 것이 일반적이지만, 바차바지 중개업자를 일하면서 다른 바차바지들을 모집하는 형식으로 대를 물려 악습을 이어주는 경우가 빈번했다. 그리고 남자와의 성매매로 생활을 연명하는 경우도 빈번하고, 트랜스젠더와 게이로서의 정체성을 지니더라도 바차바자로 일하는것 자체가 남자에게 몸을 판다며 멸시당하는 일이고, 공개적으로 커밍아웃을 하기 어려워 이중적인 생활하는 경우가 많다.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 탈레반의 주요 개혁 과제 중 하나가 바차바지의 타파였다. 탈레반의 정당성은 샤리아 율법에 입각한 사회질서를 재건하는 것이었다. 바차바지는 샤리아가 금지하는 동성애와 사치, 향락 모두가 포함되었기 때문이다. 또한 탈레반이 상대한 무자헤딘들 가운데도 바차바치를 사들여 향락을 즐기는 자들도 상당수 있었던 것도 사실인지라 악습을 타파하는 것이 지지층 확보를 위한 정책으로 비교적 잘 이용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탈레반의 집권 시기 바차바지는 양귀비와 같은 마약의 재배와 함께 엄격하게 금지되는 범죄였으며, 이와 같은 행위들이 발각되면 당사자들은 사형에 처해졌다. 물론, 이들이 혐오한 것은 아동 성범죄자가 아니라 동성 간 성행위였고, 그 때문에 가해자가 누구인지도 모르는데 성착취 피해자인 아이만 처형당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미국-아프가니스탄 전쟁 직후 재집권한 아프가니스탄 이슬람 공화국에서 바차바지의 문제는 더욱 심각해졌다. 탈레반이 축출되고 나서 나타난 보상심리 때문인지 알 수는 없지만 지역 사회 곳곳에서 재유행된 것은 물론이고 심지어 말단 군경들 사이에서도 권위와 남성의 상징이으로 자리 잡아 즐기는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이러한 악습이 아프가니스탄의 대중들 사이에서 지탄의 대상이 되긴 했지만 누구 하나 이 풍속을 즐긴 것에 대해 언급하지 못했다. 2017년에 법률이 개정되어, 바차바지는 엄연한 성폭력 범죄로 규정되는 것으로 마무리지었지만,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영상들을 보면 바차바지들이 여전히 밤 무대 일에 종사하며 돈벌이를 하는 모습을 여전히 볼 수 있다. 그렇지만 2021년에 탈레반이 재집권하면서 그 이후 이러한 악습이 근절될 일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그나마 공화국 시기에 구축해 놓은 인프라들을 탈레반들이 모두 원상태로 돌린데다가, 식량 난으로 인해 국가 기능이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상태에서 장기 매매와 신생아 거래 등의 비극도 벌어지고 있다. 그러다보니 고작 매춘이 사라질리가 만무하고 바차바지도 근절될리도 없을 것이니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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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9
  • 현재까지 이어지는 동유럽 경제의 가장 약한 고리, 불가리아의 경제사
    불가리아는 제2차 세계대전을 기점으로 공업화를 추진했고, 전후에는 공산주의로 체제변화를 시도했다. 불가리아는 전통적인 농업 강국이었으나, 구소련권 경제에 편입된 이후에 군수공업과 철강, 화학, IT산업이 발전하게 된다. 1990년 기점으로 불가리아는 자본주의 체제로 다시 편입하였다. 하지만 중화학 공업 분야에서 이전 공산주의 시절에 비해 경쟁력을 크게 상실하게 되었고, 농업도 이전의 경쟁력을 회복하지 못하게 된다. 이후 불가리아는 공산체제 이후 30년 동안 정치, 경제적으로 상당한 변화를 겪게 된다. 사회주의 체제 하에서 고도로 중앙 집중화된 계획경제에서 벗어나, EU에 안전하게 정착하여 개방형 시장에 기반한 경제체제를 구축하면서 산업 발전이 더디게 되었다. 불가리아처럼 지하자원이 다른 국가들에 비해 부족하고 인구수도 1992년 기준으로 500만이 채 안 되는 국가는 발전이 쉽지 않다. 농업이나 공업 집단화는 오히려 불가리아 같은 국가에게는 차라리 나은 현실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1990년 체제 전환 시기 직후부터 불가리아의 경제는 10년 동안 아주 느린 속도로 성장하였다. 그러면서 일찌기 없었던 국가 부채는 높아지고 국고의 손실을 보았다. 이 시기의 불가리아는 구소련 지역의 시장에 대한 의존에서 점차 EU으로의 수출을 증가시켰다. 불가리아는 1997년 이후 경제적 문제점을 극복하고 위기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1998년부터 경제성장률이 플러스로 바뀌면서 소비증가, 소득증대, 고용확대가 계속되었고 2000년에는 국내정치 및 경제가 안정됨에 따라 경제성장률이 6.5%로 높아졌다. 이는 1990년대 후반에 시작된 구조 개혁과 통화위원회 도입, 그리고 EU 가입에 대한 기대는 빠른 경제 성장과 더불어 향상된 생활 수준을 가져다 주었던 것이다. 1999년 불가리아는 중앙 유럽 자유 무역 협정(CEFTA)에 가입했는데, 그 회원국들 (크로아티아, 체코, 헝가리, 폴란드,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슬로베니아)과 함께 중요한 무역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2004년 크로아티아와 루마니아를 제외한 모든 국가의 EU 가입은 CEFTA 무역의 중요성을 감소시켰다. 2004년 불가리아 수입무역의 54%와 수출무역의 58%가 EU 회원국과의 교역이었다. 불가리아는 알바니아, 크로아티아, 에스토니아, 이스라엘, 라트비아, 리투아니아, 북마케도니아, 몰도바, 터키와 자유무역협정을 맺고 있다. 그러나 2008년의 글로벌 경제위기로 인해 불가리아가 계획한 완전한 경제 발전을 성공하지 못하였고 다시 침체기를 맞이한다. 2000년대 초반에는 탄화수소 연료가 중요한 수입품으로 남아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 후반부터는 총 수입에서 이러한 상품의 비중이 1996년 29%에서 2004년 13%로 크게 감소했다. 이 기간 동안, 기계와 장비, 소비재, 자동차의 양이 증가하면서 수입품의 다양화가 개선되었다. 수입의 상당 부분은 가공해 재수출하는 옷감, 금속광석, 석유 등의 원자재가 차지하고 있다. 2005년에 가장 중요한 수입품은 기계와 장비, 금속과 광석, 화학과 플라스틱, 연료와 광물이었다. 주요 수입원은 독일, 러시아, 이탈리아, 터키, 그리스였다. 2005년에 불가리아의 가장 큰 수출 시장은 이탈리아, 독일, 터키, 그리스, 벨기에였다. 가장 중요한 수출품은 의류, 신발, 철과 철강, 기계와 장비, 그리고 연료였다. 2005년 불가리아의 수출액은 총 117억 달러, 수입액은 총 159억 달러로 42억 달러의 무역 적자를 냈다. 2000년대 초반 불가리아 상품 시장이 급격히 위축된 러시아와의 무역 적자는 특히 심각하다. 불가리아의 막대한 외화 부채는 공산주의 시대 내내 경제적 부담이었다. 이에 2005년 말, 불가리아는 2002년과 예년에 비해 가치가 증가했지만 GDP의 백분율로 감소한 152억 달러의 대외 부채를 보고했다. GDP 대비 대외채무는 2004년과 2005년 사이에 일정하게 유지되었다. 불가리아의 평균 임금은 2015년 3월 기준 600 레바, 한화로 40만 원 정도 되지만 현재는 750 레바, 약 50만 원 정도로 10만원 정도 오른 상태라 보면 된다. 하지만 물가 수준은 소득에 비해서 상당히 비싸 불가리아 인들은 타국으로 이민을 가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노동력이 부족해져 산업 역군들을 채용하기 쉽지 않다. 2005년에 불가리아의 노동인구는 약 330만 명으로 추산되었다. 2004년에는 11%가 농업, 33%가 산업, 56%가 서비스 분야에서 일했다. 실업률은 공산주의 시대 이후 내내 두자릿수를 기록하여 2000년에는 19%라는 최고점에 도달했다. 그 이후 민간기업과 국영기업에서 새로운 일자리가 생기면서 그 비율이 현저히 낮아졌다. 2005년의 공식 수치는 2002년 말의 16.9%와 비교해 11.5%였다. 그러나 2003년에 약 50만 명의 불가리아인들이 실업자였지만 일자리를 구하지 않았기 때문에 공식적으로 집계되지는 않았다. 2005년 1월 정부는 최저임금을 매달 90달러로 25% 인상했다. 2017년 불가리아의 1인당 GDP는 16,230달러이며 실업률은 5.3%였다. 최근 불가리아는 EU의 평균 소득 수준을 따라 잡고 유럽 시민 공동 번영을 증진하기 위해 연간 최소 4%의 경제성장률을 맞추는 경제 정책을 펼치고 있다. 불가리아의 금융 부문은 아직 저개발 상태이지만 상대적으로 안정적이다. 세계 은행(World Bank)에서 평가하기를 2019년 불가리아 비즈니스 용이성 점수에서 불가리아 경제의 가장 취약한 부분은 전력 공급과 파산 해결 분야로 나타났다. 불가리아의 전력 90%가 화력발전으로 나타나며 에너지 자원이 빈약하기 때문에 가스나 원유, 석탄을 러시아로부터 수입하고 있는 현실이다. 그래서 현재 불가리아는 2023년까지 친환경 에너지를 총 전력 생산의 23%수준으로 높이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이는 EU 회원국이라면 당연히 맞춰야 하는 기준이며, 이를 위해 EU는 많은 보조금을 불가리아에 지원하고 있다. 불가리아의 원유 매장량은 2016년 기준 1,200만 배럴이며, 천연가스 매장량은 2015년 기준으로 4억 입방미터 정도로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런지 최근 불가리아에서는 좋은 소식이 있다. 불가리아가 크로아티아와 더불어 EU에서 유로화를 사용하는 유로존 가입에 다가서게 된 것이다. 유럽중앙은행(ECB)는 2020년 7월에 발표한 성명에서 크로아티아와 불가리아가 '유럽환율조정장치 2(ERM Ⅱ)'에 가입할 것이라고 밝혔다. ERM Ⅱ는 유로존 가입 사전 단계로 두 국가는 앞으로 2년 간 유로화와 자국 통화 간에 환율 변동 폭을 제한하며 유로화에 대한 적응 단계를 거치게 된다. 두 국가는 이후 통화를 유로화로 전환하기 위한 실무과정을 진행해 이르면 2023년 최종적으로 유로존에 가입할 전망이다. 현재 19개국이 회원국인 유로존에서 마지막으로 가입한 국가는 리투아니아로 지난 2015년 가입했다. 이제 불가리아도 2023년부터 자국 화폐인 레바가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유로화를 쓸 것으로 보이지만 아직까지는 레바를 사용하고 있다. 유로화폐를 2025년부터 사용할 것으로 보여 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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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8
  • 발칸의 나치, 우스타샤에 협조한 카톨릭의 어두운 과거
    1941년 나치 독일과 이탈리아 왕국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전격적으로 침공했다.이로 인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은 멸망했고 나치독일과 이탈리아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라는 괴뢰국을 만들었고 이 괴뢰국에 루이 바르투(Louis Barthou)라는 인물을 수상으로 임명했다. 크로아티아 독립국은 이에 대한 보답으로 세르비아인과 동방 정교회 신자들, 보슈냐크 무슬림들을 학살하였다. 이러한 결과로 인해 세르비아인 250,000명이 국외로 추방되었고 330,000명에서 390,000명에 달하는 세르비아인과 37,000명에 달하는 유태인들이 안테 파벨리치가 이끄는 우스타샤에 의해 학살되었으며 약 200,000명이 고문과 협박으로 인해 로마 카톨릭 교회로 개종해야 했다. 이를 주도한 비밀 경찰청장이라는든지 세르비아인 학살과 관련된 모든 공직은 카톨릭 사제 출신 인사들이 차지했다. 야세노바츠(Jasenovac) 강제 수용소를 건립하고 이를 담당한 수용소 소장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 또한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 출신이었다. 야세노바치 강제 수용소에서는 60,000명에서 70,000명이 살해당한 것으로 추정되어지며 오늘날 야세노바치 수용소에는 이곳에서 살해당한 수감자 75,159명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 내일 나는 야세노바츠(Jasenovac) 강제 수용소를 답사한다. 이 이야기는 내일하도록 하자. 당시 크로아티아의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대주교는 1941년 4월 14일 나치의 발칸반도 점령을 환영하는 성명을 발표하는 충격적인 조치를 벌였다. 이와 같은 엄청난 얘기는 현재 약자를 보호한다는 명목의 선한 종교 천주교라고 생각한다면 이는 매우 경악스러운 얘기였다. 그리고 스테피나츠가 이와 같이 "하느님은 우방국의 지도자이신 아돌프 히틀러와 우리의 지도자이신 안테 파벨리치로 하여금 무력으로 우리의 압제자를 쫓아내도록 인도했다. 하느님께 영광을! 아돌프 히틀러에게 감사를! 안테 파벨리치에게 무한한 충성을!(Bog je vodio Adolfa Hitlera, vođu naših saveznika, i Antu Pavelića, našeg vođu, da silom istjeraju naše tlačitelje. Slava Bogu! Hvala ti Adolf Hitler! Bezgranična odanost Anti Paveliću!)"이라고 외치면서 선동했던 것은 당시 나치와 파시즘의 행패에 침묵하고 비호했던 로마 교황청과 연관이 있다. 당시 교황은 비오 12세(Pius XII)였다. 비오 12세는 철저한 반공주의자이기도 했다. 그가 뮌헨에서 머물고 있을 때 쿠르트 아이스너(Kurt Eisner, 1867~1919)의 좌익 폭동에 휘말려 공산주의자들이 총칼을 들고 주교 관저로 쳐들어와 무기를 들이미는 상황을 겪었어도 주교관저를 떠나지 않았지만 그로 인해 사회주의자나 공산주의자들은 척결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게 된다. 비오 12세가 뮌헨에서 머물 때 히틀러와도 만난 적이 있었다. 당시 비오 12세는 히틀러에게 무도한 공산주의자들과 맞서 싸우라며 축복을 내렸고 이처럼 그는 반공을 위해서라면 히틀러나 무솔리니와 손을 잡았다. 그래서 당시 바티칸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에 유태인 학살을 방조하고 나치에 협조했다는 설이 나온 것은 괜히 있었던 이야기가 아니다. 비오 12세는 독일 공산당의 뮌헨 지부를 가리켜 무질서하고 추잡하며, 유태인 천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존 콘웰의 <히틀러의 교황(Hitler's Pope)>이라는 전기에 의하면 유태인의 참상에 대해 알고 있던 건 분명하지만 공개적으로 그걸 비난하지 않았고 유고슬라비아의 크로아티아-가톨릭계 정권의 잔학성에 대해서도 침묵했다. 심지어 거기 가담한 일부 인사들에 대해 축복했는데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 대주교가 비오 12세 교황의 축복을 받았다고 썼다. 존 콘웰은 "전능하신 하느님의 힘으로 은폐된 나치 학살의 배후(The person behind the Nazi massacre covered up by the power of Almighty God)"라고 비난했다. 교황의 비호에 스테피나츠는 우스타샤의 전범 파벨리치를 축복했다. 우스타샤는 종교적인 학살을 묵인 받은 셈이 되었다. 파벨리치는 순수한 카톨릭 국가 건설에 필요한 제도들을 도입한다. 모든 공공기관에서 카톨릭의 교리를 준수하도록 의무화했으며 정부와 학교에서 비(非) 카톨릭교도는 모두 추방했다. 더불어 세르비아인들이 사용하는 키릴 문자로 성경 및 책을 발행하는 것을 금지하면서 문화적으로도 탄압했다. 더불어 카톨릭 신자가 유태인 등 이교도와 결혼하는 것도 금지했다. 모든 공공시설 입구에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개는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세워 놓고 인종 청소 작업도 병행했다. 파벨리치 정부는 이것을 '위험 인물(Undesirables) 제거 작업'이라 했다. 당시 파벨리치에 의해 규정된 위험 인물은 세르비아인, 유태인, 집시 등 비(非) 카톨릭교도들이었다. 파벨리치는 세르비아인들 완전히 절멸되어야 한다며 모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위험 인물들을 청소할 것이라고 선언했다.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은 유고슬라비아에서 벌어진 이와 대량 학살의 전모에 대해 <바티칸 대학살(The Vatican's Holocaust Archived>이라는 책에 서술했다. 이 책에 의하면 당시 세르비아인에 대한 학살은 로마 카톨릭 교회가 조직적으로 자행했다 밝히고 있다. 가히 파벨리치의 목적은 크로아티아를 카톨릭 신정국가로 만드는 것에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당시 세르비아인 학살에 있어 최전선에서 활동했던 우스타샤들의 무기는 같은 카톨릭 국가들인 오스트리아와 이탈리아를 통해서 지원되었고 이 또한 바티칸이 계획했다. 아브로 맨하탄(Avro Manhattan)은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멸망과 친카톨릭 독립 국가 또한 바티칸이 설계하고 기획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에 우스타샤의 지도자 안테 파벨리치는 바티칸에게 상당한 지원을 받았고 금전적인 지원으로 인해 불가리아인을 고용하여 유고슬라비아 국왕을 암살했다. 그리고 우스타샤를 이끌고 세르비아인과 유태인들을 학살함과 동시에 카톨릭으로 강제 개종을 진두 지휘했으며, 제2차 세계대전 후반 독일군이 패배하자 파벨리치는 남미로 도주했는데 이 또한 바티칸의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특히 우스타샤의 대부분이 카톨릭 사제들과 신자들로 구성되었고 야세노바치 강제수용소 등 대부분의 절멸 수용소의 간부들이 로마 카톨릭 교회 사제들이었다. 아브로 맨하탄은 이를 두고 바티탄이 기획한 학살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한편 크로아티아에서 정권을 잡은 파벨라치는 모든 세르비아인들로 하여금 로마 카톨릭 교회로 개종해야 한다는 강제 개종법을 통과시키면서 세르비아인들의 정신을 말살시키려 했다. 우스타샤는 이 법에 따라 세르비아인들을 개종시키며 상당한 양의 돈도 뜯어냈다. 1인당 180 디나르(Dinar)를 내고 고해성사를 하면 '개종 증명서'를 발행해줬다. 이와 같은 학살에 두려움을 느낀 세르비아인들 가운데 30%가 학살을 피하기 위해 카톨릭으로 개종했다. 이와 같은 강제 개종 소식은 교구 게시판, 즉 대주교 스테피나크가 담당하는 자그레브 주교 관할 기관인 <카톨리츠카 리스타(Katolička lista)>에 의해서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스테피나크는 이를 바티칸에 보고했다. 1941년 <카톨리츠카 리스타(Katolička lista)> 38호지에 의하면 "부딘치 마을의 모든 주민이 가톨릭으로 개종함으로써 2,300명 영혼의 새로운 교구가 만들어졌다(Svi mještani sela Budinci prešli su na katoličanstvo, čime je nastala nova župa s 2300 duša)."고 보도하였다. 만약 이러힌 개종에 대해 단체적으로 저항할 경우 무자비한 집단 학살이 자행되어졌다. 또 다른 예를 들어 바라즈딘(Varaždin)에 있는 카프치네 수도원 사제 암브로지아 노바크(Ambrozija Novak)는 우스타샤와 함께 모스타니(Mostanika) 마을을 포위한 이후에 마을 사람들에게 항복을 권유하면서 "세르비아인들은 사형에 선고되었다. 사형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오직 카톨릭을 받아들이는 것이다(Srbi su osuđeni na smrt. Jedini način da se izbjegne smrtna kazna je da se prihvati katoličanstvo)."라고 포고문을 돌리기도 했다. 20세기에 중세 시대에서나 볼법한 행위들이 자행되고 있었던 것이 제2차 세계대전 당시의 크로아티아였다. 참고로 바라즈딘은 우스타샤에 의해 크로아티아 최초의 유덴프라이(Judenfrei)가 선언된 곳이었다. 유덴프라이는 "유태인이 없는 땅"이라는 독일어이다. 한편 리브노(Livno)에서 가까운 고리카(Gorika) 수도원 신부 스레치코 피리크(Srečiko Pirik)는 대학살을 주장하면서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모든 세르비아인을 죽여라. 학살을 마친 후에 이 교회로 오라. 그러면 내가 너의 행위를 고백하고 네 죄를 사해 줄 것이다(Pobijte sve Srbe. Nakon što završiš svoj posao, dođi ovamo u crkvu i ja ću ispovjediti tvoja djela i osloboditi te tvojih grijeha)." 이와 같은 말들로 인하여 1941년 8월 10일에 리브노 지방에서 대학살이 존재했으며, 5,600명 이상의 정교회 세르비아인들이 학살을 당했다고 한다. 우스타샤의 세르비아인 학살은 잔악하기가 이를데 없었다. 이는 중세 시대 십자군들이 예루살렘을 함락할 때 무슬림들을 학살했는데 이를 능가할 정도였다고 한다. 우스타샤는 체포한 정교회 신도들을 산 채로 생매장시켰고 도끼로 목을 잘라 살해했으며 눈알을 빼서 눈알을 화환처럼 만들어 목에 걸고 다녔다고 한다. 한편 붙잡힌 정교회 사제들은 더욱 가혹한 고문을 당하면서 서서히 죽어갔다. 그들은 맨발에 말 편자를 못 박아 불길을 걷게 하면서 태워 죽였다. 야세노바츠 강제 수용소(Jasenovac)에서는 정교회 신자들과 사제들을 소각로에 던져져 산채로 태워 죽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잔인한 학살은 여자와 어린 아이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아이들은 대부분 굶어 죽거나 갓난 아이들은 벽에 던져져 머리가 깨진 채 죽었다. 우스타샤는 정교회 신자들을 편리하게 죽이기 위해 일명 세르비안 칼날이라는 도구를 사용하기도 했다. 이처럼 당시 조직적인 학살을 진두 지휘한 많은 전범들이 카톨릭 성직자들이라는 것에서 대단한 충격을 받고 있다. 상당수 카톨릭 사제와 수도원의 수사들은 정교회 사제들과 신도들의 사형 집행을 주도했다. 1941년 대학살을 주도한 것은 프란치스코 수도회 소속의 투고미르 솔도(Tugomir Soldo) 수사였다. 한편 보지다르 브랄로프(Božidar Bralov) 신부는 180명의 세르비아인들을 기관총으로 사살한 이후 시신을 쌓아놓고 그 앞에서 춤을 췄다는 보고도 존재한다. 나치 전범으로 기소된 드라구틴 캄버(Dragutin Camber) 신부는 300명 가까이 되는 세르비아인들의 학살을 명령했고 슬로베니아의 그레고리 로즈만(Gregori Rozman) 주교는 나치의 협력자로 전격 수배되었다. 한편 보스니아 사라예보의 이반 사릭(Ivan Sarik) 주교는 세르브인들의 교수형 집행인으로 유명한 사제였다. 또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고문하고 학살하여 독일 나치들조차 놀라게 한 야세노바츠 수용소의 최고 책임자가 앞서 첫 단락에서 언급한 프란시스카 수도회의 사제인 미로슬라브 필리포비치(Miroslav Filipović)였다. 그리고 레온 드라가노비츠(Leon Draganowicz) 신부는 전시의 크로아티아에서 수십만의 세르비아인들을 학살한 혐의를 받고 있다. 또한 종전 이후에는 아돌프 아이히만과 클라우스 바비 등을 포함한 수천 명의 나치 전범들을 남미의 아르헨티나로 탈출시킨, 이른바 쥐구멍 라인(Rat Line)으로 불리는 탈출로를 만든 인물이기도 하다. 이러한 크로아티아에서의 나치를 두둔하여 학살을 주도한 알로이시우스 스테피나츠(Aloysius Stepinac)는 나치 전범에 학살자로 국제사법재판소에서 사형을 언도 받아도 모자랄 인물이다. 티토는 전범조사위원회를 구성해 알로지제 스테피나츠 대주교를 기소했다. 티토는 세르비아인 학살 사건에 대해 유죄를 인정하고 징역 16년을 선고한다. 그러나 교황 비오 12세는 이에 반발하며 분노했다. 그리고 스테피나츠 대주교의 사면과 석방을 국제사회를 통해 압박한다. 그리고 스테피나치 대주교를 오히려 추기경으로 승진시켜버렸다. 이어 그의 사후, 충격적이게도 1998년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해 순교자로 선언되면서 시복되었다. 이러한 나치와 협력 행위에 대해 로마 카톨릭과 바티칸 교황청의 지금 입장은 어떨까? 학살된 세르비아인들에 대한 사과와 참회의 눈물을 흘렸을까? 현재 스테피나츠는 자그레브 대성당에서 편안하게 영면하고 있다. 이런걸로 볼 때 크로아티아는 사과와 반성 없는 나치 국가가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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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8
  • 5월 6일에 있을 차드 대선, 부자 세습이 될 독재의 흑역사
    아프리카 차드가 내일 6일, 임기 5년의 대통령을 뽑는 선거를 치른다. 이 선거는 말리를 비롯해 2020년 이후 군사 쿠데타가 일어난 아프리카의 여러 군부 통치 국가 중 처음으로 실시되는 민정 이양 선거로 알려졌다. 현 군부의 군정 수반인 마하마트 이드리스 데비(Mahamat ibn Idriss Déby) 과도군사위원회 의장과 쉭세 마스라(Succes Masra) 총리 등 10명이 출마했으나 데비 의장의 승리가 거의 확실시 되는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문제는 이것이 합법적인 부자 세습으로 간다는 것이 문제다. 차드를 30년 동안 장기 집권한 이드리스 데비 전 대통령이 2021년 4월 반군의 공격으로 사망한 이후 마하마트 의장이 과도 군정을 이끌고 있다. 마하마트 의장은 집권 당시 18개월 간의 군정 이후 민주 선거를 치르겠다고 약속했으나 2022년 10월 이를 번복하고 군정을 2년 더 연장했고, 지난 3월 초 221개 정당이 연합한 통합차드(For a United Chad) 집회에서 대선 출마를 공식 선언하면서 부자 세습 독재의 길을 열었다. 차드 야당 트랜스포머 당의 대표였던 쉭세 마스라는 2022년 10월 군정 2년 연장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한 이후 군부와의 충돌로 인해 미국으로 망명했다가 미국 정부의 주도로 군정과 화해하고 지난해 11월 귀국, 올해 초 총리직을 수락하며 군정에 합류했다. 차드의 군정은 친서방 세력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현재까지 중앙아프리카에서 가장 많은 프랑스군과 미군이 주둔하고 있다. 가장 큰 문제는 차드 반군이다. 차드 반군은 여전히 차드 서부와 북부 지역에서 강세를 보이고 있는데 이들의 배후에는 바그너 그룹이 있다. 게다가 대다수의 주민들은 프랑스에 대한 감정이 그리 좋지 않다. 차드는 프랑스에서 독립한 이후, 공식적으로 수교했다. 현대에서도 프랑스어가 많이 사용되고 있는 점을 이용하여 여러 지원에 나서면서 친프랑스 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하였지만 이 와중에 벌어진 여러 가지 문제, 그리고 석유와 우라늄과 같은 자원을 도움에 대한 보상 명목으로 가져갔기 때문에 말리, 니제르와 같이 중앙아프리카에서 가장 가난한 빈국으로 꼽히고 있다. 석유 자원 및 우라늄을 비롯한 광물 자원이 많아 국가가 발전할 수 있는 많은 요인을 갖고 있지만 중앙아프리카의 최빈국이 되었던 이유는 미국이나 유럽의 강대국들이 이웃 리비아의 내전을 배후 지원하면서 차드의 자원을 강탈해갔다. 게다가 리비아 군의 폭격도 받으면서 오랫동안 전쟁에 시달려 오기도 했다. 석유가 북부 티베스티 지역에서 나고, 그 외에 우라늄이나 니켈, 인광석 등 막대한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수익을 극소수와 강대국들이 나눠먹기 하고 있기 때문에 가난한 것도 있지만 사하라 사막이 점점 넓어지면서 농업생활도 어려움에 빠지고 있다. 더불어 이웃인 수단과의 관계도 그리 좋지 않다. 이는 수단의 다르푸르 대학살로 인한 난민 문제가 원인으로, 수단 측에서 아랍계 민병대인 잔자위드가 차드를 월경하고 있다며 국가적인 항의를 한게 국가 간의 대립으로 이어졌다. 수단과 차드 주민 모두 아랍계 흑인이지만 수단 아랍인의 주류는 아랍화된 누비아인이고, 차드의 아랍인들은 주로 바카라 족으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남수단과 수단 남부 다르푸르 주 내 난민들이 대거 몰려들면서 더더욱 가난에 시달리게 되면서 수단과 단교했고 남수단 또한 기독교계 딩카족, 누비아인들은 차드의 실세인 바까라족과 역사적으로 앙금이 남아있어 사이가 좋지 않다. 차드 인구의 80%가 극빈층이며 식량 문제가 심각해 UN으로부터 식량을 지원 받는 실정이다. 이처럼 어려운 나라에 이전 대통령인 이드리스 데비는 31년 동안 철권통치를 했다. 일반 국민들이 프랑스에 대한 감정은 좋지 않지만 그래도 지도자인 데비 대통령에 대한 신뢰는 높다. 대다수의 국민들은 후임이 될 마하마트 데비가 프랑스를 몰아내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전임 독재자인 이드리스 데비는 1952년 차드 북부의 자가와(Zaghawa)족 유목민 가정에서 태어났다. 데비는 수단으로 망명했을 당시 리비아의 지원을 받으면서 반정부 세력인 애국구제운동을 결성했으며 1982년 자신의 정치적 동지인 이센 아브레(Isen Avre)와 함께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구쿠니 우에데이(Gukuni Uedei) 당시 차드 대통령을 축출했고 이 쿠데타를 통해 자신의 동료인 이센 아브레가 차드의 대통령에 취임했다. 이후 이드리스 데비는 리비아와의 도요타 전쟁으로 알려진 전쟁에서 차량화 보병을 주축으로 한 기동전을 벌여 승리를 거두면서 영웅으로 떠오르게 된다. 이 때 데비는 프랑스의 도움을 많이 받았고 프랑스 대통령인 프랑수와 미테랑과 친분을 맺었다. 하지만 아브레가 집권한 이후 데비는 리비아와의 영토 문제를 두고 아브레와 여러 갈등을 겪게 된다. 결국 이 문제로 인해 데비는 리비아로 돌아가 카다피와 협상을 벌인 끝에 그의 지원을 이끌어 낸다. 그는 리비아 남부에 전쟁으로 인해 피난 와 있던 난민들을 설득해 다시 애국구원운동당을 만들었고 게릴라 전을 통해 차드의 주요 군사력을 분쇄시키며 영토를 장악해 나갔다. 이후 데비는 다시 수도인 은자메나를 점령하고 권력을 장악했다. 그렇게 이드리스 데비 한 때 자신의 편이였던 이센 아브레 몰아내고 1990년 12월 4일 스스로 대통령에 취임한 뒤 국가평의회를 구성다. 이후, 차드의 대통령으로 30년 가까이 장기집권을 했으며, 차드의 집권당인 애국구원운동의 당수로도 활동하게 된다. 이처럼 권력을 장악했지만 문제는 현재까지도 차드는 수많은 내전과 쿠데타가 일어나며 차드가 완전히 국가 기능을 제대로 수행할 수 없다는 점에 있다. 쿠데타로 정권을 장악한 이후 1998년 남부 반군과의 평화협정이 체결됨으로 인해 내전이 종결되는 듯 했으나 1999년 다시 반군이 발생한다. 특히 2008년 2월 3일에는 굉장히 큰 위기에 몰리기도 했는데 이는 차드 수도인 은자메나에서 수도로 진입한 반군이 이드리스 데비를 축출하기 위한 공격을 개시하면서 차드 정부군과 본격적인 전투를 벌였으며, 차드 정부 군은 이날 헬리콥터와 장갑차를 동원해 대통령 사무실과 관저를 방어했다. 이후 수도에서 정부군은 반군을 격퇴했다고 한다. 결국에는 반군 공세가 강화되면서 은자메나는 반군에게 장악되어 데비는 대통령궁에 고립되기도 했다. 그래도 이드리스 데비가 프랑스에 도움을 요청하여 이를 막아내서 반군이 밀려나긴 했지만 2009년에도 차드 동부 지역에서 교전은 계속되었다. 이들 반군은 상당수가 수단에서 지원하거나 수단에 근거지를 두었기 때문에 차드가 수단 영토의 몇몇 지역 반군 거점을 폭격하여 수단과의 외교 마찰도 자주 발생했다. 이와 같은 내전으로 인해 2008년 약 28만 5천 명의 난민과 18만명의 차드 내 난민들이 발생했다. 이와 같은 내전이 지속되자 많은 시민들이 내전을 피해 카메룬으로 건너갔다. 카메룬을 향한 주민들의 피난이 계속되고 있는 가운데 그나마 차드의 내전은 2015년 데비가 통제권을 확대해 안정을 찾아가고 있지만 국제 전문가들은 지속적인 반군들의 활동과 차드의 만성적인 가난으로 인해 데비 대통령이 정권을 유지할 수 있을지에 대해 의문을 재기했다. 데비는 아프리카 독재자로서 2005년 국민투표를 통해 자신의 3선 연임을 가능하게 하는 대통령 임기 제한을 없애는 개헌에 성공한 뒤 2006년 대통령 선거에서 승리했다. 2006년 5월 3일 차드에서 대통령 선거 투표가 이루어졌는데 데비는 주로 친정부 인사들인 4명의 다른 후보들과 경쟁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겨봤자 같은 여당이고 상왕처럼 데비가 국정에 대해 지시할 것이 뻔했기 때문에 야당 지도자들은 지지자들에게 투표를 거부할 것을 촉구했다. 당시 차드 정부는 선거를 방해하겠다는 반군의 위협에 대비하여 차드 수도의 보안을 강화했는데, 실제로 반군들은 선거 3주 전에 데비 정부를 전복시키기 위해 은자메나를 공격하기도 했을 정도로 내전이 격화된 상태였다. 2011년 5월에 실시된 대선에서는 무려 89%의 지지율로 다시 당선되어 5년의 임기를 다시 시작했다. 한편 차드 내 야권은 여당 애국구원운동당(MPS)이 2011년 2월에 실시된 총선에서 선거 결과를 조작한 데다 이번 대선도 부정선거였기에 아예 투표를 거부한다고까지 했다. 2015년 들어서 데비는 나이지리아 이슬람 극단주의 무장 반군 보코하람 소탕 작전에 참여했으며 보코하람 지도자 아부바카르 셰카우(Abubakar Shekau)가 은거하고 있는 곳을 알고 있다며 경고했다. 강력하게 보코하람과의 전쟁으로 인해 여기에 상당한 인력과 돈이 들어갔다. 이후 2021년 4월 20일, 6연임 확정 직후 전방 군부대 시찰, 정확히는 충성서약을 받으러 갔다가 반군과 전투로 전사했다. 더불어 4월 11일의 대선승리 발표 후 수시간 만이었기 때문에 차드의 행정부는 혼란에 빠졌다. 이드리스 데비의 차남인 마하마트 "카카" 데비 이트노 육군 대장이 이끄는 군사위원회가 군정을 선언했다. 정식 대통령이 아닐 뿐이지 사실상 부자 세습이 이루어졌던 것이다. 독재자였지만 극렬 이슬람 원리주의 세력과의 전쟁에서 데비는 서방측의 동맹이었다. 그로 인해 데비의 장례식에 프랑스의 에마뉘엘 마크롱 대통령이 참석하기도 했다. 마하마트 데비는 두 가지의 문제에 직면해 있다. 차드 국민들의 염원대로 프랑스 군의 철수를 요구하며 압박할 것인가. 혹시 반군 문제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의 문제다. 경제적인 부분은 차드의 입장에서는 부차적인 문제다. 프랑스가 물러가고 내전이 종식되어야 다음 문제인 경제적인 부분에 손을 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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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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