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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보스니아 정치 체제와 국가의 유래
    2016년 10월 12일,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는 총선과 함께 대통령 선거를 치루었다. 선거 이후, 부정 선거 시비와 개표 지연 등 여러 혼전들이 발생했고, 마침내 공화국을 대표하는 각 민족 계파별 3명의 대통령과 더불어 보스니아 전체를 대표하는 의원 42명, 그리고 각 체제별 의원들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 의원 98명, 스르브스카 공화국 의원 83명을 각각 선출했다. 선거 결과, 보스니아를 대표하는 3인 대통령으로는 세르비아계인 믈라덴 이바니치(Mladen Ivanić), 크로아티아계 드라간 쵸비치(Dragan Čović)와 보스니아계인 바키르 이제트베고비치(Bakir Izetbegović)가 당선되었고, 2016년 10월 17일 수도인 사라예보에서 취임식을 치렀다. 보스니아의 경우, 전쟁 이후 데이턴 협정에서 명시된 대통령 선거의 원칙에 따르자면, 3개 민족계파를 각각 대표하는 3명의 대통령이 향후 4년 동안 대통령 위원회를 구성하게 되며, 절대적으로 다수 득표한 대통령을 시작으로 각 대통령들이 8개월씩 번갈아가며 한 사람씩 의장 대통령을 맡아 통치하도록 되어 있다. 이번에 최고 득표로 당선되어 11월 17일부터 정상 업무를 수행하게 된 세르비아계 믈라딘 이바니치 대통령의 첫 해외 순방지는 대한민국이 되었다. 그는 2016년 11월 20일, 보수 민주 정당 연합체인 국제민주연합(IDU) 당수 회의가 열리는 대한민국을 방문하였고, 당시 새누리당의 김무성 대표와 면담하기도 했다. 보스니아는 한 연방국가에 2개의 체제라는 독특한 행정 체계와 함께 이해하기 어려울 정도로 복잡한 정치 형태를 갖고 있는 실정이다. 오늘날 보스니아 정치 형태의 기반은 앞서 언급한 것처럼 3년 8개월간 지속된 보스니아 내전을 종결시킨 ‘데이턴 합의안(Dayton Agreement, 1955년 10월)’에 기인하고 있다. 이 합의 안에 따라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장악한 49%의 스르브스카 공화국(Republika Srpska)과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드리 연합한 51% 영토의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연방(Federation of Bosnia and Herzegovina)’으로 분할된 채 현재에 이르고 있다. 이에 대한 역사적 기원으로 보자면, 테오도시우스(Flavius Theodosius, 347~395, 재위 : 379~395) 황제의 사망과 더불어 395년 로마 제국은 그의 아들들에 의해 동과 서로 분리되었고, 보스니아는 동, 서 로마 제국의 경계선이 되어야 했다. 이후 이 선은 로마 교회를 중심으로 한 서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카톨릭과 콘스탄티노플 교회를 중심으로 동로마 제국 지역을 대표하며 성장한 정교까지 종교 및 문화적 분리선까지 되었다. 수도인 사라예보와 제2 도시 바냐루카가 포함된 보스니아 지역 명칭은 국토를 가로지르는 보스나(Bosna) 강에서 유래했다. 그리고 헤르체고비나(Herzegovina)라는 지명은 오스만투르크 제국이 사라예보로 침공해오기 이전, 이 지역의 영주였던 부크취치 코사챠(Stjepan Vukčić Kosača, 1404~1466, 재임 1435~1466, ‘스트예판 헤르제그로’도 불린다)가 지배하던 영지를 지칭하는 단어인 헤르제그(Herzeg)라는 명칭에서 유래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실제, 중세시대 보스니아 지역은 세르비아 독립 정교회를 세운 인물이자 세르비아 민족 성인인 성 사바의 헤르제그(Herzeg of Saint Sava)지역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했다. 이후 오스만투르크의 지배 하에서 행정 구역중 하나인 헤르체고비나 구역(Herzegovina Sanjak)으로 명명되어지면서 오늘날까지 그 명칭이 이어지고 있다. 17세기 말에 들어와, 보스니아 지역은 다시 한 번 종교, 문화적 분할에 놓여져야 했다. 1683년 제2차 비엔나 전투에서 패배한 오스만투르크는 이 전투 이후로 서유럽의 수호자로 등장한 합스부르크 제국과 더불어 양 제국 간의 국경선을 재설정하는 과정에서 새로운 조약을 맺게 된다. 이 조약이 바로 1699년에 체결된 카를로브치 조약(Treaty of Karlowitz)이며, 조약에 따라 크로아티아는 서유럽 카톨릭 문화권의 지평선이라 불렸고, 보스니아는 오스만투르크의 유럽 최전선이자 유럽 내 이슬람 문화권의 지평선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이렇게 현재까지 이어 온 보스니아에는 국가에 각 민족 계파를 대표하는 대통령 3명과 내각이 존재하는 것 이 외에도, 보스니아는 각 2개의 체제 안에 또 다른 대통령들과 지방 내각들을 두고 있다. 실제로 2014년 11월, 세르비아계의 스르브스카 공화국에는 밀로라드 도딕(Milorad Dodik) 대통령이 당선되었고, 보스니아 무슬림과 크로아티아계 연합체인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연방에는 지브코 부디미르(Živko Budimir) 대통령이 자리하면서 다시 한 번 분열의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보스니아가 값이 비싼 정치적 비용들을 치르면서까지 복잡한 정치 조직을 지니고 있는 배경에는 무엇보다도 보스니아 내전과 같은 쓰라린 경험을 다시는 겪지 않겠다는 보스니아 지역 민족들의 고육책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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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슬로바키아 로베르토 피초 총리의 저격 사건, 그 배후는?
    슬로바키아의 로베트르 피초 총리가 어제 15일 총 여러 발을 맞아 매우 위중한 상태로 병원에 옮겨져 수술을 받았다. 각 소식통에 의하면 세 발 가운데 한 발이 명중되었다고 하고, 어떤 소식통에 의하면 다섯 발 중에 한 발, 혹은 여러 발 등으로 전해져 확실하게 알려진 바는 없다. 초반에는 매우 위독하다 하였지만 수술이 잘 되면서 다행히 지금은 생명을 위협받는 상태는 아닌 것으로 전해졌다. 로베르트 피초 총리는 수도인 브라티슬라바 동북쪽으로 150㎞ 떨어진 핸들로바 지역에서 발생했다.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 지역에 있는 ‘문화의 집’에서 각료 회의를 열었으며 회의 후 피초 총리가 지지자들을 만나던 중 피격을 당했다. 각종 SNS를 통해 퍼진 현장 영상을 확인해 보면 경호 요원이 총에 맞은 피초 총리를 차량에 급히 태워 이동하고,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사건 용의자가 경찰에 제압되었다고 한다. 피초 총리는 차량 이송 중 위중하다는 구급대원의 판단에 따라 헬기로 옮겨졌다. 구급대는 피초 총리를 인근 도시인 반스카 비스트리카 병원으로 옮겼고, 수 시간에 걸친 응급수술이 진행됐다. 당초 피초 총리의 상태가 위중한 것으로 알려졌으나 현재는 생명에는 지장이 없는 상태인 것으로 전해졌다. 마침 토마스 타라바 슬로바키아 부총리는 BBC와의 인터뷰에서 “피초 총리의 수술이 다행히 잘 된 것으로 알고 있다”며 “현재는 생명을 위협받는 상황은 아니다”라고 전했다. 이를 두고 슬로바키아 정부는 이번 사건을 정치적 동기에 의한 암살 기도로 규정하고 친서방, 친유럽파로 구성된 야당의 행위를 의심했지만 뚜렷한 증거도 없는데다 총리에 반대하며 반(反) 정부 시위를 열어오던 야권은 피격 소식을 접한 뒤 이날 밤 예정됐던 브라타슬라바에서의 시위 일정을 취소했다. 야당이 시위 일정을 취소한 이유는 여당으로부터 총리 저격의 배후라는 의심과 더불어 정치적 보복을 당하지 않기 위해서인 측면이고 만약 시위를 계속했더라면 오히려 정치적으로 여당의 지지세가 강화되는 역효과가 날 수 있다는 것에서 다소 현명한 처세를 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범인은 사설 보안업체에서 쇼핑몰 보안업무를 하던 사람으로 시집 3권을 출간한 슬로바키아 작가 협회 회원인 유라이 친툴라(Juraj Cintula)로 밝혀졌다. 우선 그는 제1 야당인 친서방 성향의 진보 슬로바키아 소속은 아닌것으로 밝혀졌다. 서방언론에는 8년 전 친러 단체에서 활동한 적이 있던 친러시아 파라 했지만 이는 석연치 않다. 현재 극도의 친러 행보를 보이고 있는 피초 총리에게 친러주의자가 그를 피격했을리는 없기 때문이다. 서방이 그의 피초 총리 저격에 대한 이유에 대해 "Nesúhlasím s politikou vlády. (나는 현 정부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라는 BBC의 인터뷰 발언을 보고 피초의 친러 행위보다는 개인적 감정에 의해 벌인 일이 아닌가라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가 8년 전에 친러 활동을 한 것과 현재 그의 행위는 별개라고 보고 있다. 그렇게 따지면 젤렌스키도 2019년 대통령 선거 공약에서 러시아와 화해해 우크라이나를 안정시키겠다고 내세웠을 정도로 친러 인사로 구분되었었고 우크라이나의 꽤나 많은 정치인들이 친러 정당 1세대, 2세대를 구성하고 있었다. 물론 전쟁이 발생하기 전까지는 그러했다. 그렇기에 피초 총리를 저격한 친툴라의 8년 전 친러 행각과 현 행위는 상관이 없다고 본다. 다만 그는 작년 10월 세 번째 총리 임기를 시작했을 때, EU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억 유로 규모 장기 지원 패키지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밝하면서 EU와 엇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우크라이나의 고질적인 부패 등을 이유로 추가 지원에 반대하면서 자국은 더 이상 우크라이나를 군사적으로 지원하지 않을 것이며 인도적 지원에 집중할 것이라 했다. 게다가 중국에서 열린 일대일로(一帶一路) 정상 포럼을 계기로 푸틴 대통령과 회동하기도 했다. EU의 재정, 군사적 지원은 러시아의 침략에 맞서는 우크라이나에게 어느 정도 도움이 되긴 했지만 전황을 뒤집기에는 역부족이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추가 지원금을 포함하는 EU의 2024~2027년 예산안이 통과되려면 27개 회원국이 만장일치로 찬성해야 하는데 헝가리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와 슬로바키아의 피초 총리가 계속 반대를 고수해 만장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 그리고 피초는 우크라이나가 종전을 위해 러시아에 영토를 양도해야 한다고 언급하기도 했다. 이 같은 점에 대해 우크라이나 젤렌스키 입장에서는 불만일 수밖에 없다. 그런 상황에서 피초는 올해 초, 우크라이나 서부 우즈호로드에서 데니스 슈미칼 우크라이나 총리와 회동을 가지면서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지원 안을 찬성하겠다고 밝혔지만 총격을 당하기 전까지 이에 대해 묵묵부답으로 일관해왔다. 게다가 하리코프 전선까지 밀린 우크라이나 입장에서는 무엇보다도 EU의 지원이 절실하다. 그렇기 때문에 지원안 통과를 약속해놓고 아직까지 지키지 않은 피초 총리에 대한 원한 또한 대단하다. 그래서 여러 정황상 이번 피초 총리 피격의 배후에는 EU나 나토, 미국보다 우크라이나 젤렌스키일 가능성이 높다고 본다.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에도 우크라이나가 배후일 가능성이 매우 높고 (현재도 수사 중에 있다.) 여러 정황상, 친러 성향의 피초 총리에 대해, EU의 지원안 끌어내겠다는 약속을 해놓고 지키지 않은 괘씸죄, 그리고 그동안 피초 총리가 해온 친러 발언도 있기 때문에 과거에 친러주의자였다가 변심한 시인 친툴라의 손에 어느 정도 돈을 주고 총을 쥐어 주며 이 같은 사건을 벌일 개연성은 충분히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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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7
  • 바이칼 호수에 대한 이야기
    부리야트 공화국을 둘러싸고 있는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부하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반면 부리야트가 존재하는 ‘시베리아’는 알타이어로 ‘잠자는 땅’이라 한다. 그러나 부리아트어로 시베리아는 ‘신(神)들의 마을’이 된다. 중국의 고서(古書)들은 모두 북방 민족들을 천손(天孫)이라 하는데 부모(父母)인 하늘(天)과 자손(孫)들은 샤먼(巫)들을 통하여 서로의 의사를 소통할 수 있었다. 특히 부리야트의 무(巫, 샤머니즘)의 의식은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북방민족의 전통 의식과 거의 같다. 부리야트의 샤먼과 무당들은 하늘을 아버지로, 땅을 어머니로 모시고 그 세계를 9단계로 나누고 있다. 아래는 지옥세계로 7단계로 나누어져 ‘7’은 좋지 않은 숫자이고, ‘9’는 최상의 길수로 나타난다. 역시 북방 민족들도 9를 최상의 숫자로 삼는데, 이 외에도 여러 가지 유사성을 가지고 있어 같은 문화권으로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부리야트 인을 설명하며 바이칼 호수를 파악할 수밖에 없는데 앞서 서술한 것과 같이 바이칼은 부리야트 어로 ‘풍요로운 호수’, ‘부유한 호수’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나타난다. 바이칼 지역은 부리야트 이 외에도 퉁구스계 에벤키 족, 에벤 족, 타타르 족, 코사크 족 등이 거주하고 있으며 이들 종족 중 타타르 족은 몽골계통의 민족으로 몽골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정복한 이후 바이칼 지역에 널리 흩어져 거주하고 있다. 코사크 인들은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수에서 가장 가까운 지역에 거주하며 비교적 최근에 들어온 민족이다. 러시아 인들이 시베리아를 정복하기 시작하면서 코사크 인들이 바이칼 지역에 자리 잡았다. 그리고 부리야트와 이전 퉁구스계 민족들과 함께 바이칼 호 인근에서 혼혈하여 거주하고 있다. 이들은 전체적으로 볼 때 한민족과 유사한 혈통, 언어적 유사성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양민종은 시베리아 샤머니즘에서 ‘바이’가 샤먼을 지칭하는 것으로 해석하는 경우가 지배적인 것으로 언급하면서 ‘샤먼의 호수’라는 뜻도 된다고 설명하고 있다. ‘풍요로운 호수’나 ‘무속의 호수’로 지칭한 것을 볼 때 바이칼 호수는 세계에서 가장 오래되고, 가장 크고, 가장 깊고 차가운 담수호로 1996년 유네스코 세계자연유산으로 지정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바이칼 호수와 그 주변에는 약 2,600여 종의 동, 식물이 있다. 이 중 80%가 다른 지역에는 없는 세계에서 희귀한 동, 식물들이고, 그 토종의 비율 또한 세계 생태계 중에서 가장 높아 생태학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어류의 경우 52종 중 27종이 바이칼 호수에서만 서식하는 연어과의 어류인 오물(Omul)과 같은 고유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바이칼 호수에는 22개의 섬이 있다. 그 중에서 가장 큰 섬이 ‘바이칼의 심장’이라 불리는 알혼 섬이다. 알혼 섬은 전체의 윤곽이 바이칼 호수와 같으며 그 상징도 흰 독수리로 동일하게 나타난다. 이는 알혼 섬의 상징이 바이칼에 서식한 흰 독수리로 연해주와 극동 지역에 서식하는 흰 독수리와 같다. 게다가 알혼 섬의 ‘샤먼 바위’는 아시아의 9대 성소(聖所)들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이 바위는 돌 사원, 부르칸 봉, 동굴 봉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대리석으로 이루어진 이 바위에는 예로부터 전해지는 신비한 동굴이 있어서 동굴 안에서 샤머니즘 의식을 거행하였는데, 불교가 유래된 이후에는 부처의 상이 놓여 있다. 바이칼 호수에서 앙가라 강이 흘러나가는 지점에 있는 ‘샤먼바위’를 둘러싸고 바이칼 호수와 앙가라 강에 대한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 이러한 전설에 의하면 아버지 바이칼은 335개의 아들 강과 외동딸 앙가라를 두었는데 그들은 모두 아버지에게로 흘러 들어갔다. 그래서 아버지 바이칼은 물이 매우 풍부하다. 그런데 외동딸 앙가라가 예니세이 강을 사랑하여 아버지의 물을 연인에게 퍼주기 시작했다. 이에 화가 난 아버지 바이칼은 외동딸 앙가라에게 큰 바위를 던져 저주했다. 그것이 ‘샤먼바위’라 불리는 두 개의 큰 바위로 나타난다. 앙가라의 수원(水原)에 위치하여 그 시작으로 간주되는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러한 전설에는 또 다른 전설도 존재하고 있다. 바이칼에게는 외동딸 앙가라가 있었는데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사랑에 빠져 그와 도망치기로 결심하였다. 바이칼이 그 사실을 알고 앙가라의 수원에 돌을 던져 그 길을 막으려고 하였다. 그렇지만 앙가라는 고집을 부렸고, 아버지 바이칼은 딸을 추격하라고 조카 이르쿠트(Irkut)를 보냈지만 그는 앙가라를 불쌍하게 생각하여 바이칼로 돌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앙가라는 예니세이와 만나서 계속 흘러가게 되었다는 내용이다. 335개의 강이 바이칼 호로 물길을 대주고 있다. 하지만 물이 빠져나가는 곳은 오직 앙가라 강 뿐으로 나타난다. 앙가라 강은 시베리아의 예니세이 강과 만나 북극해로 흘러간다. 그러한 강의 유속으로 인하여 이러한 전설이 생겨난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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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몰도바의 숨겨진 복병 "가가우지아 공화국"
    동유럽의 몰도바 남부에 위치한 자치 지역이 하나 있다. 이 지역을 흔히 가가우지아(Gagauzia)라고 하는 곳이다. 이 지역은 1,832km²의 면적을 갖고 있으며 크기는 제주도(1,846km²)보다 약간 작다. 이들 인구의 83% 정도가 투르크계 출신인 가가우즈 인이며 다른 투르크계 민족들이 무슬림들인 반면에 이들은 정교도인들이다. 가가우즈 인들이 사용하는 가가우즈어 또한 터키어와 거의 비슷해서 터키어만 하는 사람이라도 이해하는데 어려움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터키의 공영방송인 TRT가 가가우지아에서도 공식적으로 송출되고 있다. 따라서 나의 경우, 터키어와 러시아어 모두 되기 때문에 어떤 언어를 선택해도 어려움은 없다. 그리고 가가우즈어 또한 우랄-알타이어 특성을 갖고 있어 한국어와는 어순이 같다는 장점 또한 존재한다. 현재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달리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하지는 않았고 몰도바 정부로부터 자치를 인정받았기 때문에 명목상이나 실질적으로나 몰도바 내의 자치 국가로 자리하고 있다. 가가우지아의 인구의 80% 이상이 가가우즈인이지만, 도시에 사는 가가우즈인들은 일상 생활에서 러시아어를 더 많이 사용하고 있다. 가가우지아 공화국의 수도인 콤라트(Komrat)에서도 러시아어가 더 많이 쓰이고 있다. 이에 따라 일상에서 가가우즈어를 사용하는 인구는 가가우지아 전체 인구의 54.2% 정도로 나타난다. 러시아어는 전체 인구의 40.3%가 사용하고, 불가리아어는 1.6%, 루마니아어는 1% 정도가 사용하고 있다. 원래 가가우즈 지역에는 몰다비아인으로 알려진 루마니아계 민족들과 루테니아인들이 거주하고 있었다. 하지만 몽골-타타르계의 크림 칸국이 침공하여 약탈을 당했고 이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과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으로 인해 이 지역이 오스만투르크의 지배를 받게 되었으나 대거 황폐화되었다. 18세기 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을 합병하면서 인구를 보충했다. 로마노프 제국은 오스만투르크 제국과의 전쟁에서 가가우즈 지역을 전초 기지로 삼는다는 명목 하에 노가이 칸국의 노가이족 12만여 명을 정착시켰다. 그리고 이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게 유르트를 전부 불살러버렸다.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에 의해 강제로 이주된 노가이족들은 투르크계 민족으로, 4세기 훈족과 더불어 유라시아를 왕래하며 거주하던 다양한 유목 종족들이 혼합되어 형성된 민족이다. 4~8세기 동안에는 불가르족, 하자르 족과 같은 종족들이 노가이인과 합류했고 9~11세기에는 페체네그족, 11~13세기에는 킵차크-쿠만족이라 불리는 폴로베츠 종족이 노가이 민족을 형성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이와 같은 노가이인의 출현에는 투르크계 민족들의 이합집산의 영향이 컸지만, 13세기 중엽 킵차크 칸국이 세워진 이후 몽골-타타르 족과 그로 인한 몽골 문화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는 노가이인들이 16세기에 서쪽 우랄 강 하류로 이주하기 전까지 자신들을 ‘만기트(Mangit)’라고도 불렀던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본래 만기트는 몽골계 부족으로 킵차크 칸국의 동쪽에 주로 거주했다가 그곳의 투크르계 종족과 혼합되었다. 노가이(Nogai)라는 명칭은 사실 민족 이름보다는 킵차크 칸국의 분열 이후 세워진 노가이 칸국으로 더 잘 알려져 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의 사령관이자 모든 행정을 관리하는 직위에 있었던 인물로 킵차크 칸국의 칸(Khan)을 승인하거나 퇴위시킬 정도의 막강한 권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노가이는 유럽 국가들로 원정을 나갔으며 비잔틴 제국,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을 정복하면서 약탈했다. 노가이는 킵차크 칸국과는 별개로 도나우 강에서 돈 강까지의 영토를 직접적으로 관할했다. 이 중에서 우랄 강과 카자흐스탄 서북부에 위치한 엠바 강 사이의 영토들이 15세기 킵차크 칸국에서 분리된 노가이 칸국의 토대가 되었다. 노가이라는 민족명칭은 노가이라는 인물과 더불어 노가이 칸국으로부터 기원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써 투르크-몽골(Turco-Mongol) 혼합체가 나타났는데 14세기의 차가타이 칸국과 킵차크 칸국이 투르크화 되었다. 이것이 노가이 칸국과 연결되어 있는 것을 말하고 있다. 이들 노가이 칸국의 지배 계급은 투르크어를 사용하고 이슬람교를 믿으며 대부분 투르크화 되었다. 이들이 러시아에 정복을 당했고 정착한지 수십년 후 19세기 초 노가이인들이 대거 오스만투르크 제국으로 탈주하자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은 이 지역에 불가리아인 난민들과 조지아인들을 비롯한 각종 민족들을 다시 가가우즈 지역으로 이주시켰다. 원래 노가이족이 살던 비옥한 평야 지역들은 우크라이나의 선조로 알려진 코사크인들과 독일계 러시아인들이 정착해 농사를 지으며 옥토로 탈바꿈 되었으며, 해당 지역의 노가이인들은 오늘날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불가리아인 난민들은 자국의 영토인 트라키아 지방이 오스만투르크 제국의 치하에 있었는데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오스만투르크에 독립하기 위해 봉기를 했던적이 있었다. 따라서 이를 진압하기 위해 오스만투르크 제국 내 비정규군들이 불가리아를 약탈하면서 많은 불가리아인들이 러시아 로마노프 제국의 영내로 피신했으며 인도적인 차원으로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여 가가우지아로 이동시켰다. 이들은 가가우지아에 살면서 노가이와 함께 같은 종족으로 동화되어 갔고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이 되었다. 이들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본래 불가리아 제국의 옛 수도인 벨리코 토르노브 일대에 거주하던 사람들이 많았다. 그리고 그들에 대한 학설이 21개가 있을 만큼 불가리아계 민족들의 출처에 대해 논란에 쌓여 있다. 오늘날 가가우지아인들 중 불가리아계, 루마니아계는 자신들이 13세기 발칸 반도에 정착한 셀주크투르크의 이젯딘 케이카부스 2세(Izzeddin Keykavus II 1236~1276)가 이끄는 오우즈 투르크인들과 그리스인의 혼혈 투르코폴레스의 후손으로 여기고 있다. 다만 이들 중 일부는 1307년 케이카부스 2세의 아들인 에세 할릴이 케이카부스가 이끌고 온 투르크인들을 이끌고 다시 아니톨리아의 다른 무슬림 투르크인들에게 귀순했다는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이들을 두고 페체네그인이나 쿠만족 후손으로 보는 학설도 있다. 제2 불가리아 제국 시절에는 쿠만족의 상당수가 불가리아 군에 합류했던 적도 있었기에 그와 같은 추론이 가능하다. 불가리아에서 오늘날의 가가우지아 일대와 부자크로 이주해오기 전 불가리아계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신들을 히리스티얀(Hiristiyan, Christian) 불가르, 하슬리(Hasli) 불가르 (True Bulgars), 에스키(Eski) 불가르 (Old Bulgars)로 칭했다 하며 당시 가가우지아라는 말은 일종의 비하적인 의미가 담긴 별칭이었다고 전해진다. 이 지역은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나고 러시아에서 루마니아로 넘어갔다가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소련에 속하게 되었다. 1980년대 후반 이후 트란스니스트리아와 유사하게 몰도바 인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루마니아계 몰도바인들 사이에서 몰도바를 루마니아에 병합하자거나 루마니아어를 공용어로 사용하자는 주장이 나오기 시작했다. 그러나 가가우지아 인들은 이와 같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심각하게 생각했다. 1990년 콤라트에서 가가우지아인들은 자치 공화국을 선언했으나 몰도바 정부는 인정하지 않았고, 이어서 1991년 가가우지아는 독립을 선언한다. 몰도바가 독립한 이후, 1994년 몰도바에서 민족주의자들이 물러나고 정권이 바뀌게 되자 몰도바 정부는 가가우지아인들의 자치권을 부여하기로 약속했으며 가가우지아는 몰도바에서 자치 지역이 되었다. 2014년에 2월 한 주민투표에서 관세 동맹과의 결속 강화에 98.4%가 지지했고 EU와의 더 밀접한 결속에 대해서는 97.2%가 반대했다. EU와 결속에 대해 반대가 압도적이었던 이유는 루마니아가 EU에 속해 있고 몰도바 정부가 루마니아와의 통일을 시도하기 있기 때문에 이러한 통일 과정이 EU의 중재 하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루마니아는 소수민족의 자치권을 인정하지 않는 국가다. 그렇다보니 루마니아와 몰도바가 통일되었을 때, 가가우즈의 미래가 보장되어 있지 않기 때문에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더구나 몰도바가 가가우지아인들의 처우까지 봐달라고 할 이유 또한 없기 때문에 이와 같은 루마니아-몰도바의 통일에 대해 러시아가 개입하여 통일을 무산시켜 주기를 원하고 있다. 이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몰도바-루마니아가 통합될 시 가가우지아가 독립할 권리에 대해서 98.9%가 찬성했다. 즉, 두 나라가 통일되면 가가우즈는 독립 국가를 세우고 독립하겠다는 것이다. 실제 선거에서도 친러 성향이 강하게 나타나는 지역으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함께 러시아에 속해지기를 원하는 사람들 또한 98%로 절대적이다. 그리고 2014년 총선에서는 친러파인 사회당과 공산당이 합쳐서 70% 가까이 득표하기도 하면서 가가우즈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더불어 몰도바 배후에서 친서방주의를 위협하는 큰 존재로 부각되고 있다. 하지만 가가우즈가 독립할 경우 몰도바, 혹은 통일된 루마니아와 우크라이나 사이의 내륙국이나 비연속국가가 될 가능성이 높다. 그럴 경우, 경제적으로 지금보다 더욱 낙후해질 가능성이 높다. 그것을 대비하기 위해 2022년 현재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남부와 동부를 장악하고 있는 러시아가 남부 몰도바 지역의 영토를 교환 내지는 몰도바로부터 매입하여 단절된 국토를 붙이려고 할 가능성도 열려 있는 편이다. 어쩌면 몰도바나 우크라이나 입장에서 트란스니스트리아보다 더 다급한 지역은 가자우즈 자치공화국일 가능성도 매우 커지고 있으며 오데사가 아주 중요한 지정학적, 전략적 요충지가 될 가능성이 크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남부를 장악하고 오데사를 점령하게 된다면 트란스니스트리아와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 도나우 습지 일대까지 영역화하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다. 특히 몰도바 남부의 가가우즈와 도나우 습지 지역은 러시아가 흑해 북안을 완전히 장악하고 서안으로 진출해 친 EU 및 나토 성향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 대한 견제가 가능한 곳이다. 오데사의 운명이 어떻게 되느냐에 따라 우크라이나와 몰도바, 트란스니스트리아와 가가우즈 공화국의 판세가 결정될 가능성이 아주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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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6
  • 인종학(Ethnology)과 분류와 다윈 진화론의 후생적 사고로 만들어낸 우생론(Eugenics theory)의 단면
    인종학(Ethnology)은 서양 제국주의에서 태생된 학문이다. 흔히 이러한 인종학(Ethnology)을 두고 인류학의 파생이라 생각하기 쉽지만 본래 생물학(Biology)에서 포유류 인간의 신체 외형에 따른 연구를 위해 따로 분리된 학문이다. 본래 서구 과학에서 인종을 분류하려는 사고는 계몽주의 시기인 17~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하지만 인종을 누구보다도 체계적으로 분류하려고 했으며, 분류된 인종을 두고 신체적인 특징이나 습성 등을 두고 생물학적인 부분과 의학적인 두 가지 개체로 나누어 파악하고자 했다. 이와 같은 인종적인 부분을 19세기에 들어 좀 더 과학적으로 파악해보고자 하는 시도가 이루어졌는데 영국의 생물학자인 토마스 헉슬리(Thomas Huxley)가 인체측정사진(Anthropometric photography)을 통해 분석하여 인종별로 위계화하고자 했다. 다윈 진화론의 신봉자이자 저명한 인류학자, 생물학자였던 헉슬리는 당시 지배적인 사고였던 ‘인종주의 사상’에 철저하게 경도되어 있었고 다윈처럼 인간은 진화의 최종적인 단계에 위치한다고 생각했다. 헉슬리는 인간 내부에서도 진화는 계속된다고 믿고 있었다. 즉 인간내부에서 흑인종은 가장 덜 진화해 침팬지에 가까우며 백인종은 가장 많이 진화해 침팬지에서 가장 멀어졌다고 주장했다. 이에 프랑스 인류학자 에두야르 티에송(Edouard Thiesson)이 1844년 브라질 원주민을 두고 인종학적 연구를 진행한 것을 시작으로 미국 인류학자 루이스 아가시즈(Louis Agassiz)가 1850년 미국에 이주해온 아프리카 출신의 흑인들이 피부가 왜 검은지에 대해 피부를 색소를 구성하는 멜라닌의 촉진 변화 등을 연구하기도 했다. 호주의 애버리진(Aborigine)의 경우, 오스트랄로이드, 오스트로네시아 계통에 속하는 종족으로 약간 곱슬머리에 얼굴이나 몸에 털이 많은 점은 코카소이드 계통을 닮았다. 1688년 호주 북서부 해안을 탐사한 영국인 윌리엄 댐피어의 수기에 의하면 ‘그곳에는 사람과 비슷한 유인원들이 살고 있다. 농사를 짓거나 가축을 키우지도 않고 자연이 제공 하는 먹이를 찾아 이곳 저곳으로 떠돌아다니는 동물과 비슷한 존재들이 있을 뿐이다’ 라고 본국에 보고했다. 댐피어의 이러한 보고서는『종의 기원(The Origin of Species)』을 쓴 찰스 다윈 에게도 영향을 주어, 다윈은 인종 간의 우열을 가리면서 백인을 가장 우수한 인종으로 분류한 반면 애버리진을 가장 열등한 종족으로 분류하였다. 찰스 다윈 진화론의 배경에 우생론(Eugenics theory)이 깔려 있다는 것인데 다윈은 이 외에도 동물의 성장 변화에 고생물 변이성에 주목하면서 애버리진의 원형을 오랑우탄에서 비롯되었다고 보고 뇌용량 CC의 크기에 따라 인류의 진화 정도를 책정하게 되었다. 애버리진은 세계의 어느 종족보다도 초기 인류에 가까운 모습에 속한다. 원숭이나 고릴라처럼 얼굴의 이마 부분이 툭 튀어나온 특징으로 인해 진화가 덜 된 듯한 느낌을 갖고 있다. 초기의 영국인들은 이들을 인간으로 분류하는 것조차 주저해서 원숭이류 중 가장 많이 진화한 유인원인 오랑우탄 정도로 취급하였다고 한다. 이러한 원인들이 결집되어 다윈의 진화론(Evolution theory)이 탄생하는 배경이 된다. 당시에는 그러한 인종분류가 우생론(Eugenics theory)을 위해 이용되는 용도였다면 1950년 이후 제국주의 시대가 종말을 향해 치달을 때쯤에는 "현생의 모든 인종뿐만 아니라 과거의 사람의 자연군(自然群)을 포함하여 그의 형성 시기·지역·이동·분화 등을 조사하고 상호간의 신체적 특징을 연구하는 학문"이라는 사전적인 의미로 정의되기 시작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러나 인종학의 학문이 위와 같은 사전적인 정의에 한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라면 매우 좋은 학술적 연구가 인종학이라는 학문이다. 그러나 인종학에서 파생된 우생론(Eugenics theory)이라는 것 자체가 인종학의 사전적 정의와 학문적 본질을 흐리게 만들고 많은 오해를 불러일으키는 요인이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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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내부 갈등이 잦은 이유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유럽 내 종교와 문화의 대표적인 모자이크 지역으로 분류되어 복잡한 구조를 지니게 된 배경은 무엇인지 알아볼 필요가 있다. 이는 보스니아를 중심으로 지난 2,000년 동안 이어진 종교, 문화적 분할의 역사와 더불어 보스니아가 자리하고 있는 지역이 발칸의 중심지로 지정학적 가치가 높다. 특히 터키와 서유럽을 왕래하는 통로에 있어 그 중간 지점에 위치하고 있기에 디나르알프스라는 거대한 산악 지대에 있음에도 많은 외침을 받은 배경으로부터 기인하고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일반적으로 발칸 유럽 자체가 종교적으로는 카톨릭과 정교, 이슬람 등의 다양한 종교가 존재하고 이에 따른 문화들이 유입되어 현존하고 있기 때문에 통상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Mosaic of Religion and Culture)’ 지역이라 불리고 있다. 실제로, 종교와 문화적인 분할에 따른 역사적인 격변으로 볼 때 보스니아는 이탈리아로부터 넘어온 카톨릭과 다수의 세르비아인들이 불가리아 제국으로부터 이어 받은 정교, 그리고 오스만투르크로 인해 개종된 세르비아계 무슬림의 종교 이슬람이라는 세계 3대 종교들이 복잡하게 얽혀져 있다. 이처럼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에 속하면서도 가장 복잡하고 혼재된 모자이크 중의 모자이크 지역(Mosaic area within a mosaic)이 된 것은 앞에서 언급한 것처럼 수많은 외침을 당했고 다양한 국가들의 지배를 받았으며 동, 서로마를 연결하는 연결 고리의 역할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와 같은 지정학적 배경은 그 수도인 사라예보에도 이슬람을 믿는 보슈냐크인들 외에도 정교를 믿는 세르비아인, 카톨릭을 믿는 크로아티아인 그리고 그 외로 비록 소수이지만 유태인들이 남아 있어 서로 복잡하게 혼재되었고 이들 함께 거주하면서 ‘유럽의 예루살렘’이라는 별칭까지도 얻었다. 사실 세계적인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 지역이라는 특성에서 볼 때 보스니아의 국제 지정학적 중요성은 냉전 시대 이후 펼쳐질 세계 질서의 특징이라는 내용을 주제로 <문명의 충돌(Clash of Civilizations)>을 집필한 사무엘 헌팅턴(Samuel Huntington, 1927~2008)의 저서 속 주장에도 파악할 수 있는 부분이다. 1989년에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인해 상징되는 냉전의 종결 이후 새롭게 변화해가는 국제 질서와 그 속에서 발생하고 있는 일련의 세계 현대사적 충돌과 갈등들을 지켜 본 헌팅턴은 전 세계를 약 8개의 문명권, 서구, 라틴 아메리카, 이슬람, 중국, 인도, 정교, 일본과 아프리카로 분류하게 된다. 그리고 이러한 문명권들 간의 충돌로 볼 때 여러 국제적 분쟁을 일으키고 있으며, 냉전 시대 이후, 국제적인 무력 충돌의 주요 요인 또한 바로 이와 같은 문화와 종교적인 차이에서 기인된다고 언급했다. 또한 헌팅턴은 자신의 저서에서 주요 문명 간 충돌의 대표적 사례로 ‘팔레스타인-가자와 이스라엘’ 지역과 더불어 ‘보스니아를 둘러싼 구 유고’ 지역을 들기도 했다. 그러나 종교와 문화의 모자이크라는 별칭과는 다르게, 다른 모자이크 지역에서 나타나지 않은 대립과 반목은 보스니아와 주 거주민들인 남슬라브계 민족들에게 고통과 어려움을 안겨 주고 있는 것이 현실인 상황이다. 보스니아의 내전 이후, 보스니아 내 민족들은 다민족, 다문화, 다종교 국가인 그들의 현실을 서로 인정하고 민족들 간의 화해와 통합이라는 과제를 이룩하기 위해 오랜 기간 노력해왔다. 하지만 지금도 이와 같은 갈등 양상은 크게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갈등의 근원은 종교를 정신적 지주로 두고 그에 기인한 민족주의적인 불씨가 아직 남아 있어서 그렇다. 그에 대표적인 부분은 보스니아 내전이 종결된 지 20년이 다 되어가는 현재, 한 국가 안에 3개의 큰 민족이 각각의 민족 교과서로 역사를 배우고 있다는 것에 있다. 실질적으로 보스니아는 세르비아계가 중심인 스르브스카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와 헤르체고비나의 크로아티아계가 중심인 곳에서 가르치는 역사 교과서, 보스니아가 가르치는 사라예보의 각 학교들의 역사 교과서는 그 민족적 출발선에서부터 판이하게 다르다. 참고로 보스니아는 중세 시대 때 세르비아 네마니치 왕조의 지배를 받았던 역사적 사실을 부정하고 있지만 스르브스카에는 이를 사실로 가르친다. 이는 매우 이해하기 어려운 현실이다. 최근 보스니아의 교육 현실을 집중 조명한 크리스찬 사이언스 모니터(CSM)라는 단체가 그 원인을 보스니아의 분할된 교육 체계에서 찾고 있다. 내전이 종식된 이후 보스니아의 교육 정책은 각 체제별 지역 정부에 맡겨졌다. 이는 현재 보스니아에 지역별로 10개가 넘는 교육부가 존재하고 있으며 통합되지 않고 있기에 저마다 가르치는 교과서들이 다를 수밖에 없다. 이러한 과정에서 3개 민족의 정치 지도자들은 각자의 민족적 특성과 향후 생성될 정치적인 분할에 맞추어 커리큘럼을 구성해 왔다. 따라서 각 민족이 자율적으로 펴낸 교과서를 통해 젊은이들을 교육하라고 지침을 내리는 실정이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역사 수업 또한 이러한 민족 정부의 커리큘럼에 들어가 있다. 따라서 역사적인 기록을 중시하는 역사학자들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각각의 민족주의를 선동하는 정치가들은 역사서를 통해 때로는 사실과 다르게 자신들을 전쟁의 희생을 당한 피해자로 묘사하고 또 다른 민족을 침략자인 것으로 기술해 이들이 성인이 되었을 때 대화가 불통이고 갈등을 심화시키는 것을 당연시하게 여기고 있다. 또한 자 민족에게 불리하거나, 국제적으로 논란이 될 수 있는 역사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언급을 회피하고 단순히 개요만 가르치며 근원적인 물음을 허락하지 않는다. 이와 같은 편파적인 역사 의식들이 다반사로 이루어지고 있는 실정에 있다. 이에 따른 한 국가 내의 서로 다른 역사 인식을 갖게 되는 혼란들은 서로 다른 상이한 역사를 배우고 있는 젊은 세대들의 인생에 큰 영향을 미친다. 이러한 비뚤어진 역사인식은 오히려 남슬라브 청년들의 극우 민족주의적 색체를 강화시킨다. 다른 역사적 가치관에 따른 민족 간 화해와 조화로운 관계로의 진출은 더욱 더 어려운 과제로 남겨지고 있으며 체트니치와 우스타샤와 같은 극단적인 네오나치들을 꾸준히 양산해낸다. 용서와 화해라는 과제보다 끝없는 적대와 공격 만을 안겨주고 있는 이처럼 잘못된 역사 교육은 보스니아가 앞으로도 문화, 종교 간을 초월, 국가 내 모든 민족을 통솔하는 통합된 미래를 어둡게 하고 있다. 그러니 스르브스카에서는 하루가 멀다하고 독립 시위가 일어나고 있으며 이같은 민족적 분열을 이용해 선전선동하는 정치인들 또한 문제다. 이는 비단 보스니아만의 문제는 아니다. 역사적으로 상호 간의 용서와 화해 없이 국가와 민족 통합은 요원할 수밖에 없다. 이는 우리 대한민국도 마찬가지다. 철지난 이념 논쟁을 앞세워 좌우 대립, 정치 정당 대립, 지역 대립, 남녀노소 갈등 등은 상호 간의 이해가 부족하고 이를 해결하고자 하는 노력이 거의 없다시피하기 때문에 작은 국가 안에서도 통합이 어렵다. 상호 간의 이해가 있어야 화해와 용서가 가능한데 이러한 이해조차 하지 않으려 하고 서로 간의 주장만을 내세우며 귀를 막고 있다. 이러한 상태에서 국민들의 이해 인식의 부족은 통합과 안정, 화해라는 대목의 평범한 진리가 통하지 않는다는 깨닫게 한다. 이러한 보스니아의 현실을 보며 우리 대한민국도 보스니아와 다를게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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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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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르비아인들이 알고 있는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초대 대통령 알리야 이제트베고비치(Alija Izetbegović)와 빌 클린턴
    이제트베고비치는 전형적인 보슈냐크인이다. 이제트베고비치를 이해하려면 보슈냐크를 이해할 필요가 있다. 보슈냐크인은 보산스키 무슬림(Bosanski Muslimani)을 뜻하는 말이다. 한국에서는 보스니아인으로 통용되기도 하지만 일반적인 보스니아인이라는 표현은 많이 다르다. 왜냐하면 이는 민족이 아닌 종교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구성 민족은 무슬림이 아닌 기독교인도 많으며 보스니아 민족주의 운동이 발흥하던 시기에는 가톨릭을 믿는 보스니아인들도 많았다. 그래서 전반적으로 보스니아인과 보슈냐크인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즉,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모든 시민들이 보스니아인이고 보슈냐크는 보스니아인 중 무슬림인 보스니아인을 통칭하는 말로 이해하면 된다. 보스니아와 보슈냐크의 개념과 그 차이를 이해해야 앞으로 전개될 사건의 이해가 빠르다.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거주하는 보슈냐크인은 178만 명 정도다. 보슈냐크가 생성된 시기는 오스만투르크 제국 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보스니아 땅은 당시 세르비아 왕국의 지배를 받고 있었고 세르비아 정교회 신자들이 절대 다수를 이루던 지역이었는데 세르비아 왕국이 오스만투르크에게 멸망하면서 다수의 투르크인들이 보스니아 땅에 들어와 정착하게 되었다. 당시 오스만투르크는 비무슬림들인 세르비아인들에게 이슬람으로의 개종을 강요하지 않았다. 투르크 지배자들은 정교회를 인정해주는 대신 세금을 내도록 했다. 이러한 정책은 어느 정도 가산을 가지고 있던 세르비아 중산층까지는 세금 내고 신앙을 유지하는 것이 가능했지만 세금낼 돈이 없는 세르비아의 하층민들에게 있어 이는 매우 고역인 제도였다. 따라서 세금낼 돈이 없는 세르비아의 하층민들은 정교를 버리고 이슬람으로 개종해 세금을 면제했다. 그리고 이들 개종한 세르비아인 무슬림들 중 딸들은 투르크 지배층들과 통혼하여 이들의 혼혈 자손들이 보스니아에 이슬람을 신봉하면서 새로운 민족 개념이 탄생한다. 이들이 바로 보슈냐크인 1세대라 할 수 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자신의 고조부가 무슬림으로 개종해 투르크인 여성과 결혼한 혈통 사이에서 4세대가 지나 탄생한 모계 투르크 혈통의 보슈냐크였다. 지금도 80% 이상의 세르비아인들은 이제트베고비치를 4세대 투르크 모계 혈통의 보슈냐크로 인식하고 있다. 그리고 이는 역사적으로도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와 같은 투르크 모계 혈통의 보슈냐크인들은 투르크 부계 혈통의 보슈냐크들보다 훨씬 더 원리주의 이슬람의 성격을 띄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이와 같이 엄격한 무슬림 가정에 자랐고 15세의 어린 나이로 믈라디 무슬리마니(Mladi muslimani)라는 집단에 들어갔다. 믈라디 무슬리마니(Mladi muslimani)는 세르비아어로 "청년 무슬림들"이라는 뜻이다. 이들은 굉장히 과격한 원리주의적 성격을 지닌 집단이었고 1941년 4월, 나치 독일의 괴뢰국인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독립 및 창설에 기여했다. 이 나치 괴뢰국가는 인구 630만 명의 소국으로 출발했다. 당시 가톨릭 신자인 크로아티아인이 330만 명, 정교회 신자인 세르비아인이 200만 명, 무슬림 보슈냐크인이 70만 명으로 복잡한 국가 형태를 가졌고 보슈냐크인들이 주도한 믈라디 무슬리마니는 수적으로 열세였을 뿐만 아니라 종교적인 이유로 크로아티아 내무성 직할부대 우스타샤와 세르비아 왕정복고주의 의용군 체트니크(Четник)의 차별과 박해를 받고 있었다. 이에 나치인 하인리히 힘러는 믈라디 무슬리마니의 불만을 전쟁에 이용할 계획을 세웠고 팔레스타인 민족주의의 시조이자 아랍민족주의 투쟁운동가인 아민 알 후세이니(Amin Al-Huseini, 1897~1974)의 영도 아래 나치가 되어 프랑스 전선에 투입되기도 했다. 당시 이제트베고비치 또한 17세의 어린 나이에 대프랑스 전선에 투입되었는데 이 때 나치 활동을 하면서 전투 능력과 학살 등의 잔혹함 등을 습득했던 것으로 보여진다. 이같은 보슈냐크 나치는 후일 제13무장산악사단(13.Waffen-Gebirgs-Division der SS)이라 알려진 한트샤르(Handschar)이다. 세르비아인들은 이제트베고비치를 "나치"로 여기고 있다. 물론 보스니아, 보슈냐크인들은 이제트베고비치를 해당 나치 논란을 부정함과 동시에 그가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출신"이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그가 파르티잔을 활동했다는 근거는 매우 미약한 편이다. 이후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나고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이 세워지면서 이제트베고비치는 1950년, 25세의 나이로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에 보슈냐크 대표로 입당한다. 그러나 그는 반유고적이고 유고슬라비아가 반동으로 여기던 이슬람 원리주의를 대표하고 있었다. 당시 유고슬라비아는 유물론의 입장에서 종교를 반대하던 공산주의적인 색체가 아니라 어느 정도 종교를 인정하고 있었지만 과격한 색체가 들어가 있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혐오했다. 게다가 요시프 티토는 믈라디 무슬리마니(Mladi muslimani)를 굉장히 혐오했는데 이제트베고비치는 왕성한 이슬람 관련 저술 활동을 하여 티토의 눈밖에 났고 그는 여러 차례 투옥되었다. 이 중에서 가장 주목을 받았던 저술이 1970년에 발표한 <이슬람 선언(Islamska deklaracija)>이었다. 이 책은 보슈냐크들이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 원리주의 이슬람 국가인 파키스탄의 무함마드 진나(Muhammad Jinnah, 1876~1948)를 모델로 삼고 있었다. 이 책의 파장은 생각보다 엄청났다. 티토는 이에 격분하여 <이슬람 선언(Islamska deklaracija)>을 금서로 지정하고 이제트베고비치를 "국가전복혐의(Државна субверзијска накнада)"로 체포했다. 이제트베고비치는 첫 공판에서 사형을 언도 받았지만 보슈냐크인들의 반발과 이로 인한 폭동을 우려한 티토와 공산당 정부는 이제트베고비치를 무기징역으로 감형했다. 이후, 1980년 티토가 사망하면서 이제트베고비치는 유고슬라비아 내 종교적 화합을 명분으로 석방되었고 1990년까지 약 10년 동안 보슈냐크인들의 공산당 대표를 지냈다. 이후,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작업에 들어가면서 그는 보스니아 민주행동당(Stranka demokratske akcije)을 창당하여 당수가 되었고 미국과 나토에 협력해 유고슬라비아를 쪼개는데 앞장섰다. 그는 미국의 막대한 지원을 받아 1990년 자유선거에서 세르비아 민주당의 라도반 카라치치(Радован Караџић)와의 맞대결에서 승리하고 보스니아의 독립 추진에 나섰다. 그리고 크로아티아계 정당들과 합의해서 1992년 보스니아 독립 투표를 실시, 세르비아계의 보이콧으로 인해 독립할 수 있었다. 세르비아인들은 보스니아의 독립을 유고슬라비아를 쪼개려던 미국의 도움으로 인해 독립한 것으로 여기고 있다. 그러면서 이제트베고비치를 미국과 나토에 협력해 수많은 세르비아인들을 학살자로 여기고 있다. 1995년 보스니아 내전 당시, 이제트베고비치는 보스니아 무슬림들을 이끌고 전장에 있었다. 그는 이슬람 원리주의를 표방하고 있었고 세르비아를 상대로 이 전쟁에서 승리를 원했다. 그렇기에 자신이 이끄는 보스니아 무슬림들, 보슈냐크와 피를 맺어진 형제들과 함께 싸우길 원했다. 그는 클린턴에게 세르비아와 전투를 벌이기에 자신의 병력과 무기에서 한계를 보이고 있으며 병력을 충원하기 위해 도와줄 것을 요청했다. 세르비아인들은 당시 이제트베고비치의 구원요청에 응하여 클린턴이 투입한게 원리주의 집단 무슬림으로 알고 있었다. 그래서 내가 혹시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펀자브 일대에서 활동하던 "오사마 빈 라덴"의 무리들이냐 물어보니 그들은 "그것까지는 모르겠고, 굉장히 호전적인 무슬림들" 이었다고 답했다. 그래서 나는 리처드 펄(Richard Perle), 빌 클린턴이 어떤 사람들인지 물었다. 그들은 "세르비아, 자신과 자신의 동료들, 친구, 친척들을 파괴한 전쟁범죄자"라고 답했다. 적어도 이 전쟁을 겪었던 세르비아인들은 클린턴과 이제트베고비치에 대한 원한을 갖고 있었고 이들은 세르비아의 극우주의자가 되었다. 이분들과 대화 이후, 나는 나름대로의 자료를 찾아보며 내가 공부했던 것들과 비교 분석하여 이를 재구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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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5
  • 중남미의 파나마, 내일 대선과 총선을 조망해본다.
    그 동안 파나마는 글로벌 물류를 담당하고 있는 운하가 거대한 시련을 겪고 있었다. 파나마 운하는 2023년 여름부터 일일 통과 선박을 35→31→21척 등으로 각각 줄여 왔다. 그리고 현 2024년 2월에는 다시 18척으로 축소했다. 이는 엘니뇨로 인한 가뭄으로 인해 수량이 부족해지면서 운영에 어려움을 겪고 있기 때문이다. 파나마 운하는 대서양과 태평양을 연결하는 매우 중요한 통로 역할을 맡고 있다. 현대의 함선들은 크기가 워낙 거대해져 통과 선박 크기에 제한이 있다. 파나마 운하의 높이는 해수면보다 최대 26m로 높은 편이다. 선박들은 도크에 들어온 뒤 물을 채워 더 높은 위치의 도크로 올라가게 되고 운하 중간에 위치한 가툰 호수를 거쳐 다시 도크로 들어가 물을 빼 내려가며 계단식으로 운하를 통과하여 바다로 들어가게 된다. 이러한 갑문 엘리베이터에 사용되는 물은 가툰 호수에서 끌어다 쓰고 있는데 현 파나마 최악의 가뭄은 가툰 호수의 물을 말려 바닥을 드러낼 위험에 처해지고 있는 것이다. 가툰 호수의 위기는 곧 파나마 운하의 효용성의 위기와도 직결된다. 파나마 운하는 갑문식으로 만들어져서 비록 속도는 매우 느리지만, 무려 20,000km 이상을 돌아가야 하는 것에서 단 하루 정도로 건너갈 수 있게 되자, 대서양에서 태평양으로 건너가는 선박들과 반대로 태평양에서 대서양으로 건너가는 선박들이 파나마 운하를 이용하게 되었다. 결국 파나마 운하는 건설비에 들어간 비용 이상을 통행수수료로 쉽게 뽑아낼 수 있을 정도인데 파나마 국가 경제의 80% 이상을 이 운하의 통행수수료로 충당하고 있다. 파나마는 1인당 GDP가 중남미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드는 나라로 2010년대 중남미에서 도미니카 공화국, 볼리비아와 함께 가장 높은 성장세를 보인 나라 중 하나로 손꼽힌다. 사실상 이 운하 하나로 중남미에서 일약 잘 사는 나라로 손꼽히게 됐는데 1인당 GDP가 14,618달러로 개발도상국 수준을 넘어 중진국으로 나아가고 있다. 이러한 파나마 운하에 문제가 생긴다면 하루아침에 최빈국으로 나락 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글로벌 물동량 5%, 화물선의 약 40%가 통과하는 파나마 운하의 통과 선박 감소는 글로벌 물류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는데 파나마 운하에 문제가 생긴다면 파나마 다음으로 경제에 큰 타격을 받는 나라는 바로 미국이다. 미국은 파나마 운하 통과 선박의 50% 이상을 차지하고 있는데 남해와 북해가 없는 미국 입장에서 해운으로의 동, 서 무역 연결은 파나마 운하 밖에 방법이 없다. 미국 입장에서도 파나마 운하에 대해 민감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그동안 미국은 1999년 12월 31일 파나마 운하를 파나마 정부에 반환하면서 이를 관리할 관리비를 비롯, 상당 양의 달러를 파나마에 퍼줬다. 그렇기 때문에 파나마 운하의 위기는 미국 경제의 위기, 미국 국가 안보의 위기로도 직결된다. 자국을 방어하는 미 해군 군함들이 동서를 왕래하기 위해 파나마 운하를 통과하기 때문이다. 블룸버그 통신은 “두 운하에 문제가 동시에 발생하면 글로벌 해상통상로가 (무역선들이 아프리카 남단의 희망봉과 남미 남단의 마젤란 해협으로 돌아가야 했던) 18세기로 퇴행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 뾰족한 방법이 없다. 이는 당사 국가인 파나마도 마찬가지고 미국도 이를 해결할 방법이 뚜렷하게 나타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다른 대안으로 떠오른 것이 니카라과 운하 프로젝트(Nicaragua Canal Project)이다. 사실 니카라과 운하의 건설은 20세기 초에 미국이 추진하다가 파나마 운하 건설권을 프랑스로부터 4,000만 달러에 넘겨받으면서 포기한 프로젝트였다. 이후 니카라과가 친러, 친중 국가가 되면서 2012년 9월 26일, 니카라과 정부와 중국의 홍콩 니카라과 운하 개발(HongKong Nicaragua Canal Development, 이하 HKND)은 니카라과 운하를 건설하기로 협의하고 양해각서에 서명했다. 니카라과 운하 건설업체로 선정된 HKND는 왕징(王靖) 대표가 설립한 회사로, 이 프로젝트의 총 건설비가 400억~500억 달러에 이를 것이라고 추정된다. 이를 위해 니카라과의 의회는 HKND의 개발 참여를 승인했고 이를 통해 HKND는 니카라과 운하 개통 후 100년간의 운하의 건설과 관리, 개발의 권리를 갖게 되었으며, 운하 건설과정에 필요한 보조도로, 항만, 공항, 철도 등의 건설도 허가받았다. 태평양 연안의 브리토 강에서 나카라과 호수를 거쳐 카리브 해 연안의 푼타 고르다 강까지 총 길이가 278km에 달한다. 니카라과 운하의 폭은 최소 230m에서 최대 520m이며, 수심은 27.6m로 확장 공사를 한 파나마 운하는 길이 82km, 폭은 55m, 수심은 18.3m로 니카라과 운하보다 규모가 작다. 파나마 운하는 최대 8만 t의 선박이 오갈 수 있는데 니카라과 운하는 선박의 최대 적재톤수가 최대 25만 t이나 된다. 이게 완성되기라도 하면 이미 파나마 운하와의 경쟁력에서 앞서게 되는 것이다. 이게 완공되면 중국의 일대일로 사업을 통해 니카라과 운하를 갖게 되면 향후 100년 동안 미국의 동, 서 물류와 무역의 항로까지 틀어 쥘 수 있게 된다. 그런데 왕징의 금융 손실로 인해 HKND가 니카라과 프로젝트에서 손을 땠고 2018년 2월에 HKND는 홍콩 본사를 폐쇄한 채 유령 회사가 되어버렸다. 그런데 이곳을 중국 정부가 다시 손을 대기 위해 니카라과와 서서히 접촉하고 있다. 여기에 중국은 파나마에도 손을 뻗치고 있는데 니카라과가 안 되면 언제든지 파나마로 옮길 수 있게 피해를 최소화하려는 일종의 보험용일 가능성도 있다. 그런데 당장 내일 있을 5월 5일 파나마의 대선에 당선이 유력한 호세 라울 물리노(Jose Raul Mulino) 전 공공 안전부 장관이 친미성향을 갖고 있지만 친중성향도 함께 갖고 있다는 것이다. 파나마는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에도 가장 먼저 참여했던 국가 중에 하나이고 물리노도 중국과의 관계와 미국과의 관계를 두고 중립적인 입장을 받아들이되, 중국의 일대일로 프로젝트를 중단 없이 계속 실행하겠다고 했다. 전임 대통령이었던 마르티넬리는 부패 혐의로 미국 입국이 금지된 반면, 물리노는 미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와 같은 파나마 대선이 총선과 함께 치뤄지는 이유는 전 대통령인 리카르도 마르티넬리(Ricardo Martinelli)가 최근 공공 자금을 세탁한 혐의를 받고 유죄 판결이면서 대통령으로써의 자격이 박탈당했다. 따라서 8명의 대통령 후보자가 나타나 5월 5일 선거를 치르게 된다. 파나마 시민들의 가장 큰 관심사는 피치 레이팅스(Fitch Ratings)가 최근 투자 등급에서 파나마의 신용 등급을 강등시킨 가운데 파나마의 경제적 안정성을 회복하는 것이고 파나마 운하 문제의 해결, 그로 인한 최근 떨어진 경제를 회복하는 것이다. 마틴 토리호스(2004~2009) 전 대통령과 2019년 선거에서 2위로 머무른 로물로 루(Rómulo Roux)는 일자리 창출과 투자를 강조하면서 경제 안정을 회복하겠다는 공약을 바탕으로 유세를 벌였고 리카르도 롬바나(Ricardo Lombana)는 노동자들, 특히 구리 광산 시위 당시 그들의 지지를 받으면 철저한 좌파 성향인 인물로 우파의 부패를 척결하자는 것을 공약으로 내세웠다. 마르티넬리의 후임자로 지명된 호세 라울 물리노(José Raúl Mulino)의 공약은 다소 모호한 상태로 남아 있지만, 최근 여론 조사를 보면 그는 파나마 시민들의 절대적인 지지를 받고 있다. 특히 물리노는 앞서 언급한 것처럼 미국과 중국 모두와의 관계를 유지하는 것을 최우선으로 했다. 미국은 반도체와 같은 산업 분야의 협력 가능성에 초점을 맞춰 파나마에서 외교적 입지를 강화했고 중국은 파나마 인프라 개선에 대한 투자를 강화했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미국보다는 중국에 쏠려 있는 경향이 다소 나타나고 있다. 게다가 가장 풀기 어려운 숙제인 파나마 운하의 담수를 해결하는 문제도 남아있다. 내일 그들은 누구를 선택할 것인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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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5
  • 제국주의 집단 서방에 저항한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 이야기 - 후편
    1821년 그리스에서는 오스만 제국의 지배에서 벗어나 독립을 시도한 반란이 발생하게 된다. 오스만 제국은 이전에도 그리스에서 반란이 여러 차례 발생했으나 모두 진압에 성공했기 때문에 마찬가지로 그리스의 반란 진압에 나섰으나 이번에는 예전과는 달리 그리스 독립군의 격렬한 저항에 쉽게 진압되지 않았다. 이와 같은 그리스 인들의 격렬한 저항에 당황한 술탄 메흐메트 2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지원을 요청했다. 알리는 본국에 지원군을 보내주는 대가로 크레타와 모레아를 얻으며 자신의 이집트 총독 자리를 임명직에서 세습직으로 바꿔 달라고 요구했으며 그리스 독립군에 의해 한시가 급했던 술탄은 알리의 요구를 수용했다. 곧바로 알리는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지원군을 그리스로 파견했다. 그런데 그리스 독립군 내부에서는 지휘권을 두고 독립군끼리의 내전이 발생하였기 때문에 내전의 피해를 극복하지 못한 상태에서 오스만-이집트 연합군과 맞서 전투를 치뤄야 했고 결국 대부분의 영토를 점령당하고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에게 진압당하기 직전까지 가게 된다. 그리스에서 이집트 군은 대대적인 학살과 약탈, 파괴를 일삼았으며 포로가 된 그리스 인들은 모두 노예 시장에서 노예로 팔아 버렸다.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그리스 지배를 영구화하기 위해 그리스 인들을 모두 살해하고 이집트 인들을 차출해 그리스에 정착시키려 했다. 그러나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의 잔혹한 행위에 분노한 영국, 프랑스, 러시아 3대 열강들이 그리스 독립군의 지지하여 그리스 독립 전쟁에 개입하게 된다. 이들 3대 열강들은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에게 그리스의 반란 진압을 중단하고 그리스를 오스만 제국 산하의 자치국으로 남기는 내용의 타협 안을 제시했다. 하지만 반란을 진압하기 직전,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는 열강의 제안을 당연히 거부했다. 이에 열강들은 자신들의 요구를 거부하였기에 나바리노(Navarino)에서 해전을 치르게 된다. 이후 열강들의 군사력으로 인해 그리스 일대의 오스만-이집트 연합군을 무장해제시키며 그들의 요구를 관철시켰다. 집단 서방 열강들과 러시아는 그리스 민족에게 자결권이 있음을 선포하였으며 이후 직접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에게 추가로 전쟁을 선포하여 오스만 제국을 격파하고 러시아와의 전쟁에서 패배한 오스만 제국은 아드리아노플 조약에서 그리스의 독립을 인정하게 된다. 술탄을 도와 전쟁에 참전했지만 전쟁에서는 패배했고 결국 얻지 못한 메흐메트 알리는 대신 시리아라도 주고 자신이 맡고 있는 이집트 태수직위를 자손들한테 세습할 수 있게 제도를 바꿔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집단 서방이나 러시아에 몰려 있는 술탄은 이를 거부했다. 그러자 이에 분노한 메흐메트 알리는 1831년 오스만 제국으로부터 반란을 일으켰다. 이미 알리는 프랑스 장교들을 훈련 교관으로 영입하고 이집트 군의 지휘를 맡긴 상태였다. 이로써 이집트 군은 오스만 군을 격파하고 순식간에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점령했다. 오스만 제국이 야심차게 추진한 탄지마트 개혁이 완료되지 않았고 신식군대로 바뀌지 않는 상태에서 숙청된 예니체리들의 흔적이 여러 곳에 남아있었다고는 하나 이집트 군에게 쉽게 패배한 심각한 졸전이었다. 이집트 군은 여세를 몰아 오스만 제국의 수도 코스탄티니예로 진격했고 오스만 제국의 본토인 아나톨리아 중부의 콘야까지 진출했다. 알리를 막아낼 수단이 없어진 메흐메트 술탄은 다급히 러시아에 지원을 요청했고 러시아는 이를 승락하여 아나톨리아로 내려와 이집트 군을 상대했다. 여기에 러시아가 오스만 제국을 자신들의 영향권에 넣어 완전히 지중해로 내려올 것을 우려한 영국과 프랑스 역시 개입하여 메흐메트 알리와 메흐메트 2세 술탄에게 휴전하라며 압력을 넣었다. 결국 1833년 오스만 제국은 나라를 보전하고 이집트는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았으나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 등을 모두 메흐메트 알리에게 내주어야 했다. 이후 크게 굴욕을 당한 메흐메트 2세는 메흐메트 알리한테 복수하고 상실한 국토를 회복하기 위해 자신이 지도하는 탄지마트 개혁에 가속도를 붙였다. 이와 같은 오스만 재국의 대대적인 근대화에 오스만 제국은 조금씩 근대적인 형식으로 바뀌게 된다. 한편 메흐메트 알리는 오스만과의 주종관계를 완전히 청산하고 이집트의 독립을 노리기 시작했다. 이에 오스만 제국과 이집트 사이에 다시 불화가 시작되었고 휴전을 맺은지 6년 후인 1839년 근대화가 어느 정도 되었다고 판단한 메흐메트 2세는 8만 대군으로 시리아 침공을 지시한다. 그러나 오스만 군이 완전히 근대화 되어 서구 열강처럼 강군이 되기에는 아직 멀었다. 오스만 군은 헤지브 전투에서 4만여 명의 이집트 군에게 대패했고 알렉산드리아를 봉쇄하기 위해 출항했던 오스만 제국의 해군은 함대 전체가 알리에게 투항하였기 때문에 메흐메트 2세는 홧병으로 쓰러져 지병이던 결핵이 악화되었고 결국 사망했다. 급사한 메흐메트 2세를 승계하여 어린 나이의 압둘메지트 1세가 갑자기 술탄 자리에 올랐고 권력의 공백을 이용하여 메흐메트 알리는 옛 이집트-시리아 왕국을 재건하여 독립하는 것을 넘어 코스탄티니예까지 정복해 오스만 제국을 승계할 새로운 이슬람 제국을 세우겠다는 야심을 품기 시작했다. 하지만 19세기 세계 최강대국이었던 영국의 입장에서 오스만 제국은 러시아가 지중해로 내려오는 것을 막는 완충국가로서의 가치가 있었다. 그와 같은 오스만 제국이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이집트에 의해 완전히 와해되어 세력의 균형이 붕괴되는 것을 막기 위해 영국은 오스만 제국의 편을 들어 개입하였으며 오스만 제국과 동맹 관계이던 러시아, 그리고 또 다른 열강인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프로이센 제국까지 이 사태에 개입하였기에 메흐메트 알리에게 시리아 영유를 조건으로 여기까지 하라며 압력을 넣었다. 그러나 프랑스라는 배경을 두고 있던 메흐메트 알리는 물러서지 않았다. 결국 영국은 대규모 함대를 파견하여 이집트와 시리아 해안을 포격해 붕괴시키고 열강 연합군에 의해 이집트 군이 크게 패하자 결국 메흐메트 알리는 열강의 요구 사항을 받아들여 이집트는 오스만 제국의 형식적인 속령으로 남게 된다. 결국 크레타와 시리아, 헤자즈를 반환하고 군대 규모를 축소한다. 그러나 처음 전쟁의 목표였던 이집트 태수 직위의 세습이라는 목표는 달성하는데 성공했을 뿐, 그 외에는 얻은 것이 없었다. 이후 이집트는 여전히 형식적으로 오스만 제국의 속령이긴 하지만 사실상 오스만 제국에서 분리 독립하게 된다. 메흐메트 알리와 그의 후손들은 1956년까지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으며 이집트의 왕은 아니고 태수(Khediv)라는 칭호를 사용했지만 사실상 한 나라의 독립 군주나 다름없었다. 다만 이집트는 이후로도 여전히 오스만 제국에게 정기적으로 세금을 납부했으며, 1860년대까지 오스만 제국 전 속령 중 가장 세입이 높은 지역이 남동 유럽 다음으로 이집트였을 정도였다. 이집트는 영국의 보호령으로 전락한 1880년대에 오스만 제국에게 세금 납부를 중단하였으며 이는 오스만 제국의 세수를 감소시켜 경제적으로 큰 타격을 주게 된다. 알리는 1848년 장남 이브라힘 파샤에게 태수 자리를 양위했으나 이브라힘 파샤가 결핵에 걸려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고 차남 투순 파샤의 아들인 손자 압바스 파샤에게 태수 자리가 돌아갔다. 그리고 메흐메트 알리는 1849년 8월 2일 알렉산드리아에서 사망하여 시신은 카이로의 무함마드 알리 모스크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메흐메트 알리의 생애에 대해 이집트의 경제학자 아민은 강력한 독립국가와 근대화를 달성하고 외세의 압박에 굴하지 않았기 때문에 후일 가말 압델 나세르(Gamal Abdel Nasser, 1918~1970)의 생애와 공통된 점이 있다고 호평했다. 메흐메트 알리가 이끄는 군사적인 연전연승은 맘루크 왕조의 명군 바이바르스에 필적된다고 평가받기도 했다. 레바논의 역사가 필립. K. 히티(Philip Kindred Hyti)가 주장하기를 19세기 이집트의 역사는 메흐메트 알리의 이야기라고 할 정도 그 위대함을 평가하기도 했다. 알리는 프랑스의 교육 제도를 본받아 의무 교육을 실시했고 군제, 세제, 행정, 통상, 농업, 산업 전 분야에 걸쳐 많은 개혁을 실시해 이집트를 근대화시켰다. 메흐메트 알리 그 자신도 청결을 중시하고 검소하며, 인품이 좋아 많은 이들의 지지를 얻기도 했다. 후일 이집트 왕국을 전복시키고 공화국으로 만든 압델 나세르조차도 알리는 높게 평가했으며, 메흐메트 알리는 현재도 이집트에서 근대화 되기 전, 마지막 불꽃이라는 역사적인 인물로 평가되고 있다. 메흐메트 알리는 이집트의 역사를 떠나 객관적인 평가로 볼 때 오늘날까지 이어지는 유라시아의 지정학적 경쟁과 중동 특유의 가문 및 혈족 중심 지배 체제의 기원, 그리고 중동 근대화 과정의 시조로 볼 수 있는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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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 제국주의 집단 서방에 저항한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 이야기 - 전편
    제국주의 영국에게 식민지가 되기 이전에 이집트에서 전 아랍을 대신하여 마지막 불꽃을 태웠던 영웅이 있었다. 그가 바로 메흐메트 알리 파샤(Mehmet Ali Pasha, 1769~1849)이다. 메흐메트 알리는 현 그리스 영토인 오스만 제국령 마케도니아 카발라에서 알바니아인 상인 집단 가정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 아버지를 일찍이 여의고 숙부 밑에서 자랐다. 그는 타고난 상업 실력으로 숙부에게서 그 능력을 인정받아 카발라의 징세관으로 활동하게 된다. 뒤이어 나폴레옹이 이끄는 프랑스군이 이집트를 침공했다가 실패하고 철수하자 숙부에 의해 이집트를 재점령하기 위해 이집트로 파견된 카발라의 알바니아인 오스만 제국군 용병 부대의 부사령관으로 임명되어 이집트와 인연을 맺게 된다. 이집트에 온 알리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이집트의 상황 속에서 자신의 정치 능력을 발휘하여 이집트의 권력을 장악하는데 성공했고 혼란스러운 이집트를 완벽히 평정한 공으로 1805년 오스만 술탄인 셀림 3세로부터 이집트 태수 자리를 임명받게 된다. 이후 알리는 이집트 군벌로 군림해 온 맘루크들을 대거 숙청하고 자신만의 절대적 권력을 강화해 사실상 국왕으로 군림했다. 알리는 총독직을 세습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에 반기들어 오스만과 전쟁을 벌였으며 그로 인헤 이집트의 근대화에 많은 업적을 남긴 인물이기도 했다. 그래서 그를 이집트 역사에는 "이집트의 마지막 불꽃"이라 여기며 영웅으로 예우하고 있다. 당시 이집트는 오스만의 술탄 셀림 1세가 맘루크 왕조를 멸망시키고 이집트를 영토로 편입한 이래 오스만 제국의 지배 하에 있긴 했었으나 오스만과 거리도 멀었을 뿐 아니라 유럽과 세력을 겨루는 것에 집중하고 있었기에 실질적으로는 맘루크 왕조 멸망 이후에도 계속해서 특권층으로 군림하던 맘루크들이 반 자치적으로 다스리고 있었다. 이로 인해 수도 코스탄티니예에서 직접 파견되어 온 태수한테 반항적으로 굴면서 그들의 세를 과시했고 이에 굴복하지 않으면 반란을 일으켜 태수를 궁지에 모는 등, 맘루크들은 오스만 제국에게 있어 아주 큰 근심거리였다. 특히 1760년대 들어서 알리 베이 엘 케비르(Ali Bey El-Kebir)와 그의 부관 아부 앗 다하브(Abu Ad Dahab)가 연이어 국가의 원로 직위인 '셰이크 알 빌라드' (Sheik Al Bilad) 직위에 올라 실권을 장악하였고, 오스만 조정이 보낸 총독의 권력은 유명무실 할 수밖에 없었다. 1768년에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와의 전쟁에 돌입하자 알리 베이와 팔레스타인의 군벌 자히르 알 우마르(Zahir Al Umar)는 러시아 제독 알렉세이 오를로프(Алексей Орлов)와 동맹을 맺어 본격적인 반란에 나서기도 하였다. 1772년 알리 베이에게 쿠데타를 일으켜 그를 축출하고 집권한 아부 앗 다하브(Abu Ad Dahab)는 오스만 정부와 타협했으나 교섭이 이어지는 도중인 1775년 사망하게 된다. 그 후 그의 부하들인 무라드 베이와 이브라힘 베이가 알리 베이의 심복이던 이스마일 베이와의 내전을 벌인 끝에 1778년 연립 정권을 세우며 대놓고 오스만 정부와 반목하게 된다. 하지만 맘루크의 저항을 분쇄하고 이집트를 중앙 정부에 귀속시키는 일은 당시 쇠퇴하고 있던 오스만 제국의 상황으로 볼 때 매우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1786년 팔레스타인의 호족 자히르 알 우마르의 반란을 진압한 유능한 제독인 하산 파샤 휘하의 부대에 부분적으로 근대화된 함대를 보내 이집트를 장악했고 이스마일 베이를 옹립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니 이듬해 재차 러시아와의 전쟁이 터지며 오스만 제국 군이 러시아와의 전장으로 철수하자 1791년 무라드 & 이브라힘 베이의 연립 정권이 부활하게 된다. 그런데 1798년 나폴레옹이 이집트를 침공해와 맘루크를 격파하고 이집트를 차지했지만 이어 영국군에게 밀려 나폴래옹의 군대는 프랑스 본국으로 돌아가고 영국군 역시 얼마 안 가 이집트에서 철수하자 무주공산이 된 이집트에는 권력의 공백이 발생하게 된다. 맘루크가 쇠퇴한 틈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하려는 오스만 제국의 중앙정부와 이집트의 권력을 회복하려는 맘루크 사이에 충돌이 발생하게 되었고 마침 이집트에 와 있던 메흐메트 알리에게 있어 이집트의 권력 공백은 자신에게 충성하는 알바니아인 용병들을 이용해 이집트를 장악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왔다. 이와 같은 권력의 공백과 혼란을 이용하여 알리는 자신의 정적들을 하나씩 제거하기 시작했다. 특히 당시 이집트의 토착 지배층이었던 맘루크의 숙청 과정은 먼저 자신이 약탈을 연출했고 이를 통해 울라마, 상인, 민중을 선동해 맘루크를 그들 스스로 추방하게 했다. 또한 당시 오스만 제국 행정부가 임명한 이집트 태수의 권력을 장악한 다음 자신이 이끄는 알바니아인 부대를 이용하여 이집트 전역에 조세 행정부를 설치한다. 이러한 과정에서 발생한 반란들은 알바니아인 부대를 보내 진압하면서 동시에 알바니아인 군인들이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견제했다. 이에 자신이 몰아냈던 맘루크들에게 환영식을 열어준다는 이유로 카이로에서 학살을 자행하여 숙청한 후, 이집트에서 절대권력을 구축한다. 이를 통해 몽골군의 침공 이후 이집트 지역을 오랫동안 지배했던 맘루크 계층은 완전히 소멸되었다. 이집트 태수가 된 알리는 맘루크와 친 오스만 계파들을 동시에 숙청한 이후 알바니아 인 혈족과 이집트 현지인을 고용해 가신으로 만들고 이들을 중심으로 이집트의 정권을 강화했고, 동시에 자신의 영지가 된 이집트의 사회와 경제를 전면적으로 재조직했다. 이집트의 주요 수자원인 나일 강을 대대적으로 정비하고 농민들을 동원해 면화와 곡물 재배에 투입하며, 무역 독점으로 인해 발생한 차익을 서구식 인프라와 교육, 산업, 보건, 국방 등에 전면적으로 투자하여 이집트를 근대화로 탈바꿈시킨다. 또한 서유럽에서 무기를 수입하고 장교까지 초빙해 이집트 군의 훈련을 실시하면서 근대화시키는데 일조했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코스탄티니예의 오스만 중앙 정부를 대놓고 비판하는 등 독자적인 행보를 보이기 시작했지만 그래도 오스만의 종주권을 인정하고 코스탄티니예의 술탄에게 세금을 바쳤다. 비록 한 때 콥트어 부흥 운동을 적극적으로 지원하기도 하면서 오스만 행정부와 대립각을 세웠지만 알리의 군사력과 이집트에서 코스탄티니예로 들어오는 안정된 세입이 있었기에 알리를 용인했다. 나아가 적극적으로 근대화를 추진하는 이집트의 성과에 강한 인상을 받고 오스만 행정부도 비슷한 정책을 추진하지만 이집트와 같은 성과를 낼 수는 없었다. 하지만 이와 같은 성과의 이면에는 메흐메트 알리의 강압적인 정책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 나일 강 정비 과정에서 수많은 노동자들을 죽음으로 내몰았고, 관세로 이집트의 산업을 보호하며 성장시켰으나 당시 대부분의 노동자들은 강제 동원된 자들이라 이들의 원성은 실로 대단했다. 의무교육을 위해 아이들을 강제로 부모와 떨어뜨리는 반인권적인 문제를 지적받기도 했으며 이집트의 강력한 군사력의 뒤에는 인구의 약 2.6%를 열악한 처우의 군대로 강제로 동원하는 등, 비인간적인 징병까지 존재했다. 징병 명령에 대해 저항하기라도 하면 메흐메드 알리는 이들을 유혈 진압을 통해 강경하게 대응했으며 심지어 병역을 피하고자 자발적으로 불구가 된 이들을 모아 장애인 부대까지 편성하기도 했다. 메흐메트는 이후 자신의 개혁을 통해 재조직한 이집트의 군사력을 바탕으로 본격적으로 정복 전쟁에 나섰다. 1805년 와하브파를 신봉하며 훗날 사우디아라비아를 세우게 되는 네지드의 사우드 가문이 아라비아 반도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메카와 메디나, 두 성지를 점거하자 오스만의 술탄 무스타파 4세는 메흐메트 알리에게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령하게 된다. 이는 기존의 모든 질서를 뒤엎는 와하브파의 등장은 칼리프 칭호를 가지고 있던 오스만 제국뿐만 아니라 아라비아와 가까운 이집트에서 기반을 다지고 있는 메흐메트 알리에게도 충분한 정치적 위협이었다. 또한 오스만 정부를 대신해 반란을 진압하면서 오스만 정부의 호의를 얻어 정치적인 입지를 견고히 구축할 수도 있었으며 마지막으로 이미 쇠퇴를 시작한 오스만 제국이 일개 오지인 아라비아 사막에서 일어난 근본주의자 반란을 진압할 수도 없다는 것이 드러났기에 오스만 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된 공백 지역을 차지하여 세력을 불릴 수도 있었다. 따라서 메흐메트 알리는 술탄의 명령을 받들어 와하브 반란 진압에 나서게 된다. 그 와중에 1807년 영국이 나폴레옹 전쟁의 영향으로 이집트에 원정군을 보내 공격하자 알리는 이에 격렬하게 저항하여 영국군을 격파하기도 했다. 1811년 메흐메트 알리는 자신의 장남 이브라힘 파샤를 사령관으로 한 진압군을 헤자즈에 파견하였고 이브라힘 파샤는 1년여 만에 헤자즈를 수복하게 된다. 이로써 사우드 가문이 이끄는 반란군은 와해되었고 곧바로 이집트 진압군은 사우드 가문의 근거지인 네지드를 완전히 장악했다. 메흐메트는 후일 반란의 불씨를 남기지 않도록 사우드 가문을 추격하여 말살할 것을 명령해 2년 여에 걸친 추격전 끝에 사우그 가문의 구성원 대부분이 포로로 잡아 처형했다. 그리고 사우드 가문의 저항 역량은 이 때 메흐메트 알리에 의해 완전히 종식되었기 때문에 이후 19세기 말까지 사우드 가문은 조용히 혈통을 이으며 세력을 다시 키우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사우드 가문은 이집트에 대한 원한이 강한데 이는 현재 사우디아라비아와 이집트의 사이가 좋지 않은 원인이 되기도 헸다. 당시 사우드 가문의 반란을 진압한 것을 계기로 메흐메트 알리는 점차 자신의 군주인 오스만 술탄의 지시에서 벗어나 자신의 마음대로 군대를 움직이기 시작한다. 자신의 세력을 키우기 위해 다음 공격 목표는 수단이었다. 수단은 각종 자원과 금, 노예가 풍부하지만 이집트에게 저항할 만한 강력한 세력을 갖추지 못하고 분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침공 목표로 아주 적당했으며 손쉽게 제압이 가능한 곳이었다. 1820년 알리는 5천여 명의 군대를 수단에 파견하여 수단 정복을 명령했다. 수단을 침공한 이집트 군은 센나르 술탄 왕국을 멸망시키고 수단을 이집트의 영향권으로 편입시켰다. 이후 수단은 1956년 수단 공화국으로 독립할 때까지 이집트의 보호 하에 들게 되었고 이집트가 영국의 식민지가 되었을 때, 수단도 함께 영국의 식민지로 합병되는 원인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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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4
  •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25년 전 코소보 전쟁 당시 미국과 나토가 폭격한 중국 대사관 터를 다녀오다.
    나는 오늘 1999년 5월 7일 코소보 전쟁 당시 미국과 나토가 폭격했던 베오그라드 중국 대사관 현지를 다녀왔다. 폭격 이후, 25년이 지났지만 그 때의 잔상은 사라지고 대사관 터에는 비석 두 개만이 다수의 꽃다발들과 함께 남아 있다. 주변의 있는 건물둘은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Novi Beograd) 부지들을 재단장할 때 갈아 엎어져 새 건물들로 도색되어 있다. 신도심지라 불리는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는 사바 강 건너 구 베오그라드 시가지를 마주 보고 있는 신도시형 계획 부지다. 노비 베오그라드는 역사적으로 오래된 구 베오그라드에 대한 개발보다 새로운 형태의 신도시 개발을 목적으로 만들어진 곳이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료된 이후, 요시프 티토는 1945년 11월 11일 총선거를 통해 왕정 폐지를 선언하고 공산당 일당 독재 체제를 이루었으며 '유고슬라비아 연방 인민공화국'을 선언하였다. 그러면서 이곳에 대한 개발을 강화했으며 이곳에서 공산당 대회당을 짓고 티토 자신도 이곳 공관에서 근무했다. 티토가 미, 소 양대 강국 사이에서 중립 노선을 지키며 나름 독자적인 제3 세계 국가의 초석을 이루려 했던 곳 또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였으며 유고의 모든 관공서, 공무원들에게 할당된 주거지, 공산진영이든, 자유진영이든 할 것 없이 각 국 대사관 또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에 지어졌다. 즉, 세르비아어로 Novi는 "새로운"을 뜻한다. 말 그대로 신(新) 베오그라드였다. 중국은 1949년 공산화 된 이후, 유고슬라비아와 수교하면서 이곳 노비 베오그라드에 대사관을 개설했다. 노비 베오그라드에 개설된 중국 대사관은 두 번째로 지어졌으며 첫 대사관은 아이러니하게도 미국이었다. 유고슬라비아는 서방과 수교 및 교류하고 있었기 때문에 중국과도 수교한 뒤에는 교류, 협력을 자주 했다. 티토의 사후, 1980년대부터 유고슬라비아는 분열의 조짐을 보이기 시작했으며 1990년대에 유고슬라비아 내전으로 유고 내 공화국들이 독립국이 되고 있는 상황에서 중국은 유고슬라비아와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등 사상 유래 없는 의리를 지켰다. 그렇기 때문에 다른 나라는 몰라도 세르비아만큼은 중국을 매우 각별하게 생각한다. 그려면서 코소보 전쟁 와중, 나토군이 군사 작전을 진행하는 과정에서 베오그라드를 폭격했는데 그만 중국 대사관마저 폭격해버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중국 대사관 직원 3명이 죽고 세르비아 현지인도 14명이 부상을 입었다. 어떤 기사나 기록에서는 이날 죽은 중국인이 대사관 직원인지, 언론인인지 상이하게 나타나 정확한 신분은 햇갈린다. 다만 중국 측에서는 이들을 언론인, 기자라고 했다. 이날 폭격으로 인해 대사관 건물 또한 파괴되었다. 그리고 주변 건물들도 상당수 초토화 되었다. 중국 내에서 극렬한 반미 시위가 벌어졌다.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이 이를 '비극적인 실수'라며 유감을 표시했고, 당시 미국 정부는 중국 대사관 바로 옆에 위치한 유고슬라비아 연방 소속의 조달 이사회를 목표로 진행한 폭격 임무였다고 했다. CIA 국장 조지 테넷은 폭격 위치 입력을 잘못했다고 청문회에서 시인했다. 이후, 1999년 8월, 미국은 피해자에 대한 보상을 하기로 합의를 했고 대사관 복구에 대한 보상도 진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또한, 2000년 미중관계법 제정으로 인해 중국의 세계무역기구 가입을 승인하면서 미중관계를 증진시키려고 했다. 그러면서 상황은 중국이 일방적인 피해자로 비춰지면서 많은 동정표를 받았다. 홍콩 시사잡지 '첸사오(前哨)' 는 장쩌민(江澤民) 전 주석의 미발간 회고록을 입수하여 폭로했다. 이 회고록에 의하면 당시 중국 대사관 폭격과 관련한 비화가 소개되어 있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전 세르비아 대통령이 나토 공습으로 인해 국방, 정보, 경찰본부 등이 모두 파괴되자 중국에 세르비아 정보요원들을 위한 은신처를 제공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한다. 당시 러시아도 매우 혼란한 상황에 옐친 대통령에서 푸틴 대통령으로 정권 교체가 이루어지고 있는 상황이라 코소보 전쟁에 이렇다 할 도움을 주지 못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장쩌민 주석은 당시 세르비아와의 관계를 고려하여 대사관 지하에 당시 유고슬라비아 정보요원들의 은신처를 제공했다. 이러한 행위는 중국이 대사관으로 넘어 들어오는 사람들을 자국의 주권을 걸고 보호할 책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는 난민이라면 모르겠지만 사전에 이미 밀로세비치와 협의되어 있었기 때문에 이미 세르비아 측과 공조하고 있었던 부분이라, 대사관이 아닌 다른 곳에서 요격했다면 중국이 관여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기에 어쩔 수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대사관이라고 하는 곳은 이미 그 나라의 영역이다. 미국이 이를 대사관을 공격했다면 상대가 누구든 대사관에 발을 들여 놓은 이상, 그 나라의 주권에 해당되기 때문에 명백히 국제법 위반이다. 당시 중국은 티베트-신장위구르의 분리 문제로 인해 미국과 갈등이 첨예했던 상황이었고 이런 미국에 대응하기 위한 외교적 일환으로 미국과 나토를 강력히 비난하면서 유고슬라비아 정보 요원들을 숨겨 주었던 것이다. 당초 나토군의 공습이 확대되자 중국 외교부는 장 쩌민에게 베오그라드에서 직원들을 철수시킬 것을 건의했다. 이미 러시아 대사관도 철수한 상태였고 중국이 남아 있을 명분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장쩌민은 유고슬라비아와의 외교 관계, 개인적으로 밀로셰비치와의 걱별한 우정과 의리 등을 생각했었던듯 싶다. 장쩌민은 대사관 직원들에게 남아 있으라 지시했다. 나토가 설마 국제법을 어기고 대사관을 폭격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예상 외로 중국 대사관이 폭격을 당한 것이다. 폭격 직후 당시 주 세르비아 중국 대사는 부서진 대사관 건물 앞에 서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공격당했다"며 이는 국제법상 위법이라 부르짖었다. 그리고 이는 고스란히 중국 언론의 전파를 탔다. 북경대학에서는 세르비아 주재 중국 대사관의 폭격 사실이 알려진 이후 시민과 대학생 1만여 명이 미국 대사관 앞에서 밤늦도록 격렬한 항의 시위를 벌였다. 시위대들은 하늘이 클린턴을 저주할 것이며 미국은 살인자라고 외치며 반미 시위를 계속했다. 중국 정부가 이 사건으로 인해 크게 분노하자 앞서 언급한대로 미국은 공식적으로 사과를 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중국 대사관 내부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요원들이 원격 통신 등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는 증거를 비공식적으로 제시했다. 여기에서 이미 미국은 유고슬라비아 정보요원들이 중국 대사관에 들어갔다는 정보를 알고 있었다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미국은 이와 같은 정보를 캐치하고 오폭을 가장한 조준이었을 확률이 매우 높다. 당시에는 지금 같은 인터넷이라던지, 개인 영상이라던지 이런 것들이 발달하지 않았던 때라, 일단 질러 놓고 오폭이라 주장하면서 조사 위원들을 나토 위원들로 구성해 꾸리고 현장을 조작하면 그만이다. 그러나 여러 정황상, 이는 명백한 조준이다. 당시 조달 이사회는 모든 인원들이 철수한 상황이었고 나토 공습 당시에 이사회 건물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리고 후일, 기밀문서에 의하면 미국은 당시 조달 이사회 건물에 아무도 없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고 한다. 그러면 어느 누가 조달 이사회 건물을 표적으로 했다는 얘기를 믿을 수 있을까? 중국 대사관 내부에 숨어 있던 세르비아 요원들이 원격 통신 등의 스파이 활동을 했다고 증거를 내놓은 것을 보면 이는 이미 조준했음을 스스로 시인한 셈이다. 그렇다고 해도 미국이 중국 대사관에 대한 폭격은 올바른 결정이었을까? 절차상 미국은 중국에게 이같은 유고슬라비아 요원들의 스파이 행위의 증거를 들이밀고 이들을 내놓으라 협상을 할 수도 있었고 중국 정부에게 강한 경고를 하며 이들은 전범이니 넘겨달라고 요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이를 기다릴 수 있는 충분한 시간적 여유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주 미국답게 중국 대사관을 표적으로 삼고 대놓고 폭격하는 전쟁 범죄를 저질렀다. 이날 포격한 이들에 대한 국제 사법 처리는 어떻게 됐을까? 당연히 아무도 이같은 전쟁 범죄에 법적 처벌을 받지 않고 무마되었다. 국제적인 부분, 국제법적인 것으로 따져 보자면 이는 엄연한 국제법 위반에 국제형사재판소에 마땅히 재소되어야 하는 전쟁범죄다. 그런데 당시 중국 대사관 폭격으로 지하실에 있던 세르비아 정보요원 10여명이 죽었는데도 중국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고 있었다. 이 때 보도로는 세르비아인 14명이 부상이라 했지만 그 중 10명이 정보요원이고 나머지 4명은 대사관 직원인 세르비아 인일 것이다. 아마 중국도 이를 암묵적으로 무마하기 위해 대(大)를 위한 소(小)의 희생으로 생각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국제 관계, 국제 사회는 이처럼 냉혹한 것이다. 국익을 위해, 더 큰 이득을 얻기 위해 인간적 양심과 선악, 그리고 도덕성은 깔끔히 무시되고 때에 따라서 묻어둬야 할 진실이라는 것 또한 존재한다. 한국인들은 이런 냉혹한 현실을 잘 모른다. 물론 이 사건은 미국이 오폭을 사과함으로써 중국의 체면을 살려주고 중국은 반미 시위가 번지는 것을 막는 식으로 마무리됐다. 미국 또한 이 사건이 더욱 번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을 것이다. 미국이 한 수 접은 이유는 뻔하다. 코소보 전쟁에 이어 중동 상황도 슬슬 좋지 않아지고 그러면서 중국과의 마찰은 미국 입장에서도 부담되는 일이었다. 중국 입장에서도 당시만 해도 미국과 직접적으로 충돌할 수 있는 여력이 되지 않던 때였다. 결국 미국과 중국이 막후에서 외교적으로 타협했던 것으로 보인다. 올해 내가 내일 세르비아에서 나간 후, 중국의 시진핑 주석이 세르비아를 방문한다. 아마 5월 7~8일 미국과 나토가 중국 대사관을 폭격했던 그 날짜에 맞출 것이다. 내가 왔던 이곳을 일주일 뒤, 시진핑이 와서 참배하고 부치치 대통령과 대담을 가질 것으로 보인다. 다음 주 주제는 그것이 전 세계적으로 핫한 주제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렇기에 난 시진핑보다 일주일 앞서 이곳을 먼저 방문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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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실증사학의 대부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와 일본식 실증사학의 비교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들이 생각하는 실증사학은 레오폴드 폰 랑케(Leopold von Ranke)가 주장하는 것에 입각하여 판단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랑케의 주장을 면밀히 보면 Wie es eigentlich gewesen, 즉 "있는 그대로의 과거"를 보고 판별하자는 것이다. 비판적인 방법을 엄격히 적용하여 사료 속에 담겨진 순수한 사실을 발견해 내는 것이 바로 실증사학의 기본 원리다. 그러나 랑케의 주장과는 달리 그의 사관을 다른 열강 국가들은 진정한 객관성이 아닌 제국주의적 지배 사관에 입각하여 객관적 타당성(Objective validity)을 내세우며 지배 논리를 정당화했다. 랑케가 개체적 사실들의 연관을 발전으로 파악했으며, 그 발전의 양상은 구체적으로 지배적 이념을 통해 나타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빚어진 오해와 오산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여러 나라를 거쳐 이것이 일본에 들어왔을 때는 일본식의 실증사관(實證史觀)으로 불려 주관적으로 해석해 그로 인한 비도덕적 행위, 연구 윤리를 벗어난 행위들이 나타나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사관은 우리에게 그대로 이어진다. 당시 단재 신채호 선생이나 백암 박은식 선생 등의 역사학자들이 랑케가 누군지, Empirical history가 무엇인지 제대로 인식했었겠는가? 랑케가 주장한 부분에 대해 우리는 그 사관을 환기시킬 필요가 있다. 실증사학 연구 방법론은 크게 '사실해명중시' 또는 '사료비판중시'로 나뉘는데 사실해명중시론은 정확한 사료를 통해서 연역적 추론으로 역사를 분석하는 방법을 말하고 사료비판중시론은 사료 외의 고고학적 근거, 기타 비(非) 사료적 요소로 발견적 또는 귀납적 추론으로 분석하는 방법인데 나는 둘 다 중시한다. 그래서 랑케가 주장했던 실증사학론은 잘못된 것이 아니다. 다만 그것을 후대에 이용하고 주관적인 추론에 맞추는 자들이 잘못된 것이다. 게다가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은 군국주의적 사관에 맞추어 이용되어 왔다는 것에서 더 큰 문제점이 있다.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에 대하여 비교 논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여태까지 그런 논의도 없었고 재야에서는 실증사관이 무엇인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태반이다. 게다가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를 혼동하고 있으며 모두 제국주의적 학문으로 귀결시키는 것은 아직 연구방법론에 대해 학문적 트레이닝이 되어있지 않은 현상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다. 이제라도 일본식 실증사관론(實證史觀論)과 랑케의 Empirical history를 분리하여 비교하고 연구에 있어 받아들일 것은 받아들이고 없어져야 할 것은 없어져야 한다고 생각한다. 진정한 실증이란, 확실한 고증과 토론과 논란을 통해 최대한 접근한 근거, 고고학, 인류학, 역사학 3요소 모두 맞물려 들어가는 것이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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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3
  • 러시아 모스크바 크로쿠스 홀 테러 사건의 테러범들이 가게 될 흑돌고래 교도소
    흑돌고래 교도소는 러시아의 최고등급 교도소로 카자흐스탄 국경과 가까운 지역인 오렌부르크 주에 위치하고 있다. 정식 명칭은 '연방 정부 기관 - 오렌부르크 주 러시아 연방교정청 관할 제 6 교도소'(Исправительная колония № 6)이며, 흑돌고래 교도소라는 이름은 교도소에 있는 검은 돌고래 조형물에서 따온 별칭이다. 물론 다른 나라에도 악명 높은 교도소는 많고, 미국의 ADX 플로렌스 교도소 같은 슈퍼맥스급 교도소가 유명하지만, 흑돌고래 교도소는 그것과 비교가 불가능한 악명 높은 시설이다. 그 특성을 보면 사실상 이름만 교도소고 실제론 합법적 강제 수용소나 다름없다. 왜냐하면 처음부터 '가석방 금지 무기수'들이 수용되는 곳이고 교화가 될 가능성이 전혀 없기에 사형제가 있는 나라였으면 진작 죽었을 인간 쓰레기 말종들과 국외 살인범들만 고르고 골라서 평생동안 종신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최초로 이 교도소가 세워진 것은 1745년으로 이 때까지만 해도 평범한 강제 노역소였으나 코사크의 푸가초프 농민 반란이 진압된 이후인 1773년부터 교도소로 변경되었으며, 2000년 11월부터 지금의 악명 높은 교도소가 되었던 오랜 역사를 가지고 있다. 흑돌고래 교도소는 중범죄자 전문 교도소이며 다른 중범죄자 전문 교도소들과 차별되는 이 교도소만의 특징이 있다. 이는 가석방 불허 무기징역을 받은 흉악한 범죄자만 수감한다는 것이다. 러시아 교도소가 전반적으로 인권을 경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그래도 교화 자체를 포기하는 정도는 아닌데, 여기만큼은 애초부터 교도소 운영 기조에 교화라는 개념은 전혀 존재하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오로지 죽을 때까지 자유를 박탈하기 위한 곳이기 때문에 갱생 가능성이 조금이라도 있다면 여기로 보내지지 않는다. 실제 재심으로 감형되어 더 나은 교도소로 이감된 재소자가 5명 정도 존재한다. 그러나 물론 재심 조건이 쉽지도 않으며, 다른 사람의 죄를 전부 뒤집어쓴 정말 억울한 사안이거나 실제로는 종범인데 주범의 죄까지 뒤집어 쓴 수준의 공범 정도가 아니라면 재심의 가능성은 전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그렇기 때문에 여기 재소자들의 악행은 극악함이라는 말로도 부족한 수준이다. 단순 강간, 살인 따위로 올 수 있는 곳이 아니다.평균 5명 이상의 살인 전과, 그것도 유괴살인 혹은 아동 성폭행 정도 되어야 러시아에서도 보내는 곳이다. 즉, 김근식이나 조두순 같은 자들이 오는 곳이라는 것이다. 혹은 식인을 하거나, 테러 조직이나 마피아 등의 두목인 경우도 체포 당하면 이곳으로 끌려오기도 한다. 실제로 일가족 5명을 몰살하고 시신까지 불태운 흉악범 니콜라이 아스탄코프와 같은 극악 살인마가 무기수로 복역 중이다. 러시아 체스판 연쇄살인사건의 살인마 알렉산드르 피추시킨 역시 이곳에 갇혀 있을 것으로 추정되었는데, 러시아 정부가 밝히기로는 여기가 아니라 그나마 흑돌고래 교도소보다 처우가 더 나은 흰올빼미 교도소에 수감 중이라고 한다. 현재도 사형을 실시하는 미국, 중국, 일본과는 다르게 러시아가 한국과 더불어 사형 유예국으로 분류되는 이유로 꼽히기도 한다. 이 교도소에서는 교도관이 당당하게 "수감자들을 사람 취급 안 한다."고 말한다. 즉, 이 감옥은 교도관들이 재소자들을 증오하며, 이에 대해 어떠한 제재도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교도관들도 사람인지라 재소자들을 상대로 모질게 행동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여기는 그런 거 없다. 물론 이런 반응에는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는 것이, 다시 말하지만 이곳은 그냥 살인 정도로 잡혀가는 곳이 아니기 때문이다. 흑돌고래 교도소와 같은 높은 보안등급에 속하는 연방 교정청 교도소에서는 수감자를 호송하는 방식은 뒤로 수갑을 채운 후 이동시 허리를 90도로 굽혀 고개가 바닥을 보게 해서 이동하는데, 이는 교도소의 구조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게 하는 효과도 있지만 수감자가 쉽게 반항하지 못하게 작은 것부터 통제하기 위한 목적이 더 크다. 좀 심하다 싶은 수감자는 눈가리개까지 씌우게 하고, 수감자를 이동시킬 때에는 항상 수감자 1인당 6명의 교도관들이 교도견과 같이 와서 데리고 다닌다. 이렇게까지 삼엄하게 호송하는 이유는 감방이 기본적으로 2인 1실이기 때문이다. 즉, 초극악 범죄자가 둘이나 있으므로 언제든지 감방에서 사건이 터질 수 있으며 수감자 한 명을 이동시킬 때는 나머지 한 명도 잘 감시해야 한다. 또한 감시하기 위해 밤에도 불을 켜 놓는데, 죄수는 자살 방지 명목으로 이불을 머리까지 덮을 수도 없게 되어있다. 또한, 취침 시간 외의 시간에 침대에 누우면 바로 교도관들에게 구타 당한다. 추운 겨울철 한파의 날씨에도 불구하고 난방 기구는 없고 담요도 한 사람 당 한 장씩만 제공된다고 한다. 더운 여름철에도 선풍기 하나 없는 곳에서 폭염 무더위를 버텨야 한다. 다른 교도소들과 달리 이곳의 교도관들은 실탄이 장전된 총기로 무장한다. 흑돌고래 교도소에서는 2선이긴 해도 군용 화기인 AKM 자동소총과 마카로프 권총 등으로 무장하여 극악무도한 수감자들 사이에 공포 분위기를 조성한다. 매일 하루에 15분 간 죄수들을 간이 감방에 옮기고, 그 사이에 교도관들은 그 방을 샅샅이 수색하는 작업을 한다. 만약 죄수들이 밀반입품을 감방 내에 가지고 왔을 경우 그냥 놔두면 탈옥, 자해, 폭행, 살인 등을 자행할 수 있기 때문이다. 24시간 CCTV로 감시하고 있으며 목을 매거나 손목을 그으면 어떻게든 와서 살려둔다. 다만 흑돌고래 교도소 소장이 "자살하고 싶다면 교도관에게 심하게 대들면 된다."라고 말한 바 있다. 총으로 바로 쏴서 죽이는 게 아닌, 본보기로 생명에 지장이 없는 부분을 구타하거나 총으로 쏴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이거나 최악의 경우 죽지도 못하고 고통만 받는 상태로 살게 된다. 그리고 이 수색을 매일 한다. 식사 역시 물과 빵과 수프밖에 없다. 독방에 갇힌 수용자들에겐 수프밖에 안 주며, 이것마저도 식당의 음식물 쓰레기 배출용이나 똥을 퍼담을 때 쓸 것 같이 생긴 통에 담아 가져온 뒤, 개 밥그릇처럼 생긴 그릇에 퍼담아서는 쓰레받기가 달린 장대로 감방 안에 밀어 넣어서 식사를 준다. 맛도 지독하게 없어서 굶어 죽지 않고자 억지로 먹어야 할 수준이라고 한다. 죄수들의 생명 유지만이 목적이기 때문에 맛을 신경 쓸 필요가 없다고 한다. 이곳에서는 교도소에 공동 묘지가 딸려 있고 수감자가 사망하면 장례식도 치르지 않고 시신은 교도소 내 화장장에서 화장되어 교도소 공동 묘지에 묻힌다. 그러니까 죽어서도 이 교도소를 나갈 수 없다는 영원한 무기징역을 받는 곳이다. 이 때문에 러시아의 초강력범들은 여기만큼은 안 들어가려고 있는 없는 돈을 죄다 퍼부어가며 특급 변호사들을 고용하다가 파산하는 경우가 있을 정도라고 한다. 김근식, 조두순 같은 아동 성범죄자들은 러시아 같음 흑돌고래 교도소에서 차라리 죽는게 나은 삶을 살텐데 한국은 참 좋은 나라다. 그런 추악한 범죄를 저지르고도 감옥에서 나와 사회로 돌아올 수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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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인도의 신목(神木) 숭배에 대하여
    신목에 대해 물어보니 아라케(Arake), 신당을 쉬라타(Shirata)라고 부른다. 아마 그 용어들은 비하르(Bihar) 방언일 것으로 추정된다. 고대 시대에 비하르 왕조라는 마가다 계열의 난다 왕조 직전의 왕조가 있었는데 이들은 티베트 계열의 민족이 세운 왕조였고 장기간 비하르 계통 민족들의 지배를 받았다. 그 이유로 티베트어계의 언어가 정착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신목은 나무를 끼고 힌두교의 주신인 브라흐만, 시바, 비슈누, 크리슈나, 칼리, 하누만, 가네샤, 데바, 수리야, 인드라, 아이야나르 등의 신들을 숭배하기도 하는데, 이 지역에서는 하누만이 많이 나타남으로 인해 칼리와 하누만이 수호신으로 존재하고 있다. 대개 나무를 끼고 영적인 기운을 느끼며 성직자가 영매를 맞이하는데 이를 불의 신인 수리야가 초나 꽃을 태워 재를 만들고 이것이 자신들의 조상을 만나게 하는 환각을 역할을 한다고 하였다. 이 재를 버부티(Berbuti)라고 하는데 성스러운 재라는 뜻이다. 보통 가정의 무사행복, 안녕, 그리고 부(富)와 특별히 이루고 싶은 소원을 비는데 대개 그 소원은 하누만이 듣고 이를 브라흐만에 전달한다고 믿고 있다. 그리고 네팔과 가까운 접경 지역에는 브라흐만 대신 석가가 자리하고 있는 경우가 많이 보인다. 특히 시바 신을 모신 신당에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기도 드리고 간다. 브라만 신관이 고대 시대에는 주도했지만 이제는 일반 신관이 주도하여 제를 지낸다. 보통 신당 공중에는 바나나와 사과가 걸려있다. 바나나는 남성을 상징하고 사과는 여성을 상징한다. 남자 아기가 태어나면 바나나로 축복하고 여자 아기가 태어나면 사과로 축복한다. 신목은 신당의 양쪽에 대나무 기둥을 중심으로 깃발이 매달려 있다. 이는 소도를 뜻하는 기둥으로 아샬리(Asahali)라 부른다. 즉, 아삼-비하르 방언에 의하면 아샬리는 신성한 장소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양쪽에 염소가 묶여 있는데 듣기론 내일 아침에 제사에 쓰일 소라는 것이다. 시바 신에게 바치는 염소는 주로 새끼 염소이며 그것도 어느 정도 성년 나이가 되가는 소를 잡는다. 시바 신이 파괴의 신이기 때문에 이러한 살육을 좋아할 수 있을듯 싶다. 물론 대부분 힌두교인들은 소는 신성시여기지만 염소는 잡아도 되는 동물인듯 싶다. 일반인들 식탁에는 이 제물이 올라오지 않으며 염소를 먹는 풍습조차 없다. 신당에서 나타나는 칼리는 힌두교 전통에 따르면 우주의 영원한 에너지와 관계가 있는 여신이다. 산스크리트어로 칼리는 칼라(Kala)라는 일반 명사에서 왔는데 칼라는 검은색, 시간, 죽음을 의미하고 죽음의 신을 뜻한다. 칼라카(Kalaka)는 "시간에 관계된" 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는 힌디어의 보통 명사다. 칼리는 흔히 "검은 피부색을 가진 자" 또는 "파괴의 여신"으로 해석되며 이는 최초로 데바나가리 문자의 기초인 산스크리트어에 남아있다. 이러한 시기의 시작은 베다 아리아 시대에서부터 시작이 된다. 중앙아시아 샤머니즘에 들어가는 신상(神像)과 사상, 인더스의 신(神), 갠지스의 신과 사상이 통합된 베다 문명의 시대가 도래했고 이 시대를 나는 문화, 언어 융합의 시대로 정의하고 있다. 이 때부터 비슈누, 하누만, 크리슈나, 시바, 파르바티, 나라시마, 락슈미 등의 신들이 등장하기 시작했고 두르가, 바마나, 수리야, 파드마파니 등의 신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그러면서 카스트 제도가 도입되어 유목적 신분 제도가 성립되니 그 모든 출발은 중앙아시아 스키타이계의 아리아 인의 정복이었던 것으로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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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2
  • 퉁구스어, 민족, 퉁구스족에 대한 이야기
    동호(東胡)는 동쪽의 호족(胡族)으로 유목민족이다. 당시 한(漢)나라나 진(秦)나라 등은 호(胡)와 이(夷)의 개념을 아마도 동일한 족속으로 보았을 듯 하다. 이는 후대에 적(狄), 융(戎), 이(夷), 호(胡)를 같은 오랑캐로 표기했기 때문이다. 결국, 동, 서, 남, 북 방위에 따라서 오랑캐를 뜻하는 한자 표기만이 달라졌을 뿐,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한족을 둘러싸고 있는 주위의 민족들은 서로간의 치열한 전쟁이 있었을지라도 같은 계통의 민족이 대를 이어 자리를 잡았으며 북방도 주인이 여러차례 바뀌었지만 흉노-선비-돌궐-거란처럼 이름만 바뀌었을 뿐 그 민족이 그 민족이었다. 흉노의 뒤를 이어 몽골고원이나 만주 지역에 나타난 민족들 대부분 "흉노의 별종이다." 라는 글귀가 나타났기 때문이다. 물론 글귀처럼 흉노와는 다른 종자지만 그럼에도 흉노가 언급되었다는 것은 이들과 흉노의 관계가 깊었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북방은 달라진게 없었다. 어느 한 민족이 쇠퇴하면 또 다른 민족 중 그 한 민족에 복속되었던 세력이 성장하여 그 자리를 차고 앉았을 뿐이다. 이와 같은 상태는 청(淸)나라 때까지 계속되었다. 동호는 흉노에게 패망하였지만 동쪽으로 패주하여 두 민족으로 갈라진다. 이러한 동호의 시대는 끝나지 않았다. 선비 6부 중 하나인 우문부(宇文部)는 시라무렌이라 부르는 서랍목륜하(西拉木倫河)에 정착했다. 모용선비의 모용황이 우문선비를 공격하자 우문선비는 패배하여 송막(松漠) 사이 땅으로 도망가서 정착하였고 이들이 통합되어 거란이 되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웠고 요나라누 금나라 멸망하자 몽골고원에 자리 잡고 케레이트(Kereit)의 부족을 흡수했다. 케레이트(Kereyid~Geryid)라는 이름은 케레이(Kereyi~Gereyi)의 복수형으로 라시드 앗 딘의『집사(集史)』에 따르면,「케레이」의 의미는 그 선조의 얼굴 색이 검었다는 데에서 유래한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어, "까마귀"의 몽골어인 케리예(keriye)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그리고 케레이트의 옹칸은 테무친을 맞아들여 사위로 삼았고 이후 케레이트는 몽골제국에 멸망한다. 시간이 한참 흐른뒤 동호는 몽골제국, 원(元)나라가 되어 중국을 통치했고 이후 청나라 때는 만주족에게 정복되었다. 그러나 몽골 문자를 변형하여 만주 문자를 만들었고 몽문과 만문의 형태가 같고 발음도 유사점을 보이고 있음에 따라 이를 두고 언어학자들이 동북아시아의 언어형태를 두 가지로 구분하기 시작했다. ‘알타이’라는 명칭은 이들 언어를 사용하던 민족이 분열하기 전의 원주지가 알타이산맥 부근이었다는 구스타프 람스테드와 포페의 가설에서 유래된 것이다. 알타이어계는 크게 투르크 · 몽골 · 퉁구스의 세 어군(語群)으로 나뉘어진다. 람스테드는 알타이 제민족의 원주지를 흥안령(興安嶺) 부근으로 추정하고 약 4, 000년 전 퉁구스인과 한국인의 선조는 동쪽, 몽고인과 투르크인은 그 서쪽에 있었던 것으로 보고 있었다. 그러나 포페는 알타이 공통 조어에서 투르크어와 몽골어 · 만주, 퉁구스어가 분열하고, 후자에서 다시 몽골어와 만주, 퉁구스어가 분열한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한국어는 알타이 조어에서 제일 먼저 직접 분열한 것으로 추정한다. 여기서 나타나는 퉁구스는 몽골어와 만주어로 한자인 동호(東胡)를 발음한 말이다. 동북아시아 역사에 있어 동호=퉁구스의 역사가 지대하다는 것을 서양 언어학자들은 알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을 알타이 범주에 집어 넣음으로써 중앙아시아, 몽골, 동북아시아까지 한번에 묶어 규정했다. 그러나 람스테드의 주장대로 알타이 민족의 원주지가 흥안령 부근이라면 서쪽으로 뻗어나간 알타이어로 명칭을 붙이면 안되는 것이다. 기원지가 동북아시아 흥안령인데 중앙아시아, 몽골, 동북아시아 언어는 왜 우랄 산맥과 중앙아시아의 알타이어인가? 이들 북아시아 및 중앙아시아 언어의 기원지가 동북아시아로 인정했던 람스테드와 포페는 그 언어의 명칭도 동북아시아 이름이자 가장 고대, 중세, 근대까지 번성했던 동호어, 혹은 퉁구스어를 제민족 언어의 중심으로 명명했어야 했다. 퉁구스어에서 알타이어, 투르크어, 몽골어 세 어군으로 나뉘고 그 외의 부족들의 언어들을 나열해야 했다. 모든 역사의 중심이 유라시아로 바뀌면 다음으로 해야 하는 작업이 있다. 그것은 아시아와 유럽 각국이 혈연적 종족 체계, 언어 체계에 대한 재연구를 해서 편향적이지 않은 채계를 다시 만드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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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1
  • 포르투갈의 고인돌 문화, 카스트로 문화(Castro culture)
    유럽 문명의 원류라고 하면 누구나 고대 그리스-로마를 떠올릴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로마 문명만이 유럽 문명의 뿌리는 아니다. 그리스 인들이 '갈라타이' '켈트이', 로마인들이 '갈리아'라고 불렀던 켈트인은 유럽 문명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한 민족이었다. 로마인의 갈리아 원정은 켈트 문화의 쇠퇴라는 결과를 낳았지만, 이후 게르만 민족의 유럽 지배는 이 원정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이 역사학계의 정설로 되어 있다. 포르투갈, 스페인 북부에 있는 갈라시아와 포르투 지역은 로마인의 지배 이전에 켈트 문화의 독자적인 전통을 지키고 있었다. 그러나 5세기경부터는 로마 교회의 적극적인 포교로 이 지역들의 켈트 사회는 기독교화되었고, 그 결과 독자적인 켈트식 카톨릭 문화가 발전하게 되었다. 켈트 문화는 후에 브리타니아와 아일랜드 건너가 명맥을 유지했고 11세기부터 유럽 각지에 전파된 로마네스크 미술이 자리잡게 되었다. 켈트인은 유럽의 역사 무대에서 자취를 감췄지만 그들의 문화는 지금도 면면히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켈트 문화가 지금도 남아 있다면, 도대체 켈트인의 유적은 어디에 숨어 있는 것일까? 그리스, 로마의 지중해 고전 문화는 견고한 '돌의 문화'로, 자신들의 문화를 돌로 남겨놓았다. 그들이 남긴 문화적 유산들은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쉽게 변하지 않는 돌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후세에도 전해질 수 있었다. 하지만 켈트의 문화는 이러한 정형화된 문화와는 달랐다. 자연을 숭배했던 켈트인들은 '나무의 문화'를 가지고 있었다. 그 때문에 건축 유산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독자적인 문자를 가지고 있었지만 기록을 남기지 않았기 때문에 그들이 어떠한 민족이었는지는 추측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19세기 중반 무렵까지의 이야기였다. 왜냐하면 그들의 문화를 생생하게 보여주는 놀라운 유적이 발굴되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바로 이베리아 반도의 북서부 지역, 현재의 북부 포르투갈 및 갈리시아의 스페인 지역 및 아스투리아스 서부 및 레온 북부 지역에서 동기 시대 B.C 9 세기경의 끝에서 로마 문화가 창궐한 B.C 1 세기 경에 포함될 때까지 존재했던 켈트 문화인 카스트로 문화(Castro culture)가 그것이다. 특히 산타 테클라산에 있는 갈리시아 요새에서 발굴(發掘)된 켈트 상징물인 트리스켈(Triskel)이 다수 발견되었고 여기에서는 다수의 고인돌과 암각화가 발견되었다. 그리고 포르투 시내 곳곳의 서점에는 이러한 포르투갈 고대 유적에 대한 서책이 판매되고 있고 포르투 역사박물관에도 그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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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24-05-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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